1. 초기 생애 및 배경
P. 람리의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그리고 그의 예술적 재능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친 교육 과정은 그의 다재다능한 경력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1. 출생과 가족
P. 람리는 1929년 3월 22일, 이슬람력으로 샤왈 1일 아침 이드 알피트르 예배 직후 말레이시아 페낭의 조지타운 외곽 숭가이 피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Teuku Nyak Puteh bin Teuku Karim테우쿠 냑 푸테흐 빈 테우쿠 카림말레이어(1902년 ~ 1955년)과 Che Mah binti Hussein체 마 빈티 후세인말레이어(1904년 ~ 1967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테우쿠 냑 푸테흐는 인도네시아 아체의 로크세우마웨 출신 부유한 가문의 외동아들로, 가족과의 불화로 선원이 되어 페낭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버터워스의 쿠방 부아야 출신인 P. 람리의 어머니 체 마 후세인(당시 과부)을 만나 1925년에 결혼했다. P. 람리에게는 어머니의 첫 결혼에서 얻은 이복형제 셰이크 알리도 있었다.
어머니 체 마는 P. 람리를 낳기 전 아침부터 복통을 호소했으며, 아버지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산파를 기다렸다. 아버지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P. 람리는 이미 세상에 태어나 있었다. 그의 할머니는 '테우쿠 자카리아'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를 '람리'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이 훗날 그의 예명 'P. 람리'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P. 람리가 페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잇몸암으로 사망했다. P. 람리의 출생지에는 현재 그의 생가 박물관이 보존되어 있다.
1.2. 교육
P. 람리는 캄풍 자와 말레이 학교(Sekolah Melayu Kampung Jawa)와 프랜시스 라이트 영어 학교(Francis Light English School, 1939년 ~ 1941년)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이후 페낭 자유 학교(Penang Free School)에 진학했으나,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말라야 점령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 해군 학교(Kaigun Gakko카이군 각코일본어)에 입학하여 음악의 기초와 일본어를 배웠으며, 히라헤 선생으로부터 일본 노래를 배우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그의 음악과 영화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음악 수업을 들으며 악보를 읽는 법을 익혔고, 마을의 행진 밴드에 합류했다. 학창 시절 P. 람리는 글씨를 깔끔하게 쓰고 매력적인 언어 구사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알려졌다. 그는 낮에는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밤에는 스포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스승인 엔칙 하시엠(아흐마드 다우드의 아버지)은 그에게 학생들의 책을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시키곤 했으며, P. 람리는 종종 엔칙 하시엠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기도 했다.
2. 경력
P. 람리의 예술가로서의 여정은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1. 연예계 입문 및 초기 경력
P. 람리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친구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바이올린을 사기 위해 품삯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150명 규모의 대대장이 되어 매주 주말 열리는 무대 공연에서 여러 곡을 부르며 일본어를 빠르게 습득했다. 일본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여러 곳으로 보내 기술을 연마하게 했다.
밤에는 시나란 빈탕 소레(Sinaran Bintang Sore) 밴드와 함께 음악 연습을 했고, 이후에는 오르케스 테루나 세캄풍(Orkes Teruna Sekampung)에 바이올린 연주자, 가수, 작곡가로 합류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엔칙 카마루딘은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제안했으며, 카마루딘의 딸 노르마는 그가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커피를 가져다주곤 했다.
P. 람리는 라디오 말라야 북부 지부에서 주최하는 노래 경연 대회에 참가하여 자신의 재능을 시험했다. 1945년과 1946년에는 연속으로 3위를 차지했으며, 1947년에는 '말라야 최고 가수 스타'로 1위를 거머쥐었다. 이 성공을 계기로 그의 이름과 오르케스 테루나 세캄풍은 북부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방사완 연극 배우들로 구성된 '라유안 아스마라' 그룹이 페낭에서 공연을 할 때, 그는 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보러 갔다. 그는 공연 수입과 무대 공연으로 번 돈을 옷을 사는 데 썼으며, 때로는 찢어진 셔츠 위에 코트를 걸쳐 입고 공연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라유안 아스마라 그룹의 공연을 보기 위해 담장을 넘는 용기를 보였다. 이 그룹에는 당시 영화배우로서는 무명이었던 카스마 부티가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흐마드 C.B.는 오르케스 테루나 세캄풍의 리더를 만나 라유안 아스마라 그룹과의 합병을 제안했고, 합병 공연에서 P. 람리는 카스마 부티를 처음 만났다. 또한 카스마의 의붓아버지이자 색소폰 연주자인 자파르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라유안 아스마라 그룹이 공연을 위해 계속 이동하면서 그는 한동안 카스마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48년, 쇼 브라더스의 영화감독 B.S. 라지한스는 페낭에서 열린 크론총 공연에서 P. 람리의 재능을 발견했다. 1년 뒤인 1949년, 라지한스는 P. 람리를 말레이 영화 프로덕션(MFP)에 플레이백 싱어로 초대했다. P. 람리는 주저 없이 바이올린을 들고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는 잘란 암파스 스튜디오에서 오디션을 보았고, 자신이 작곡한 첫 곡인 "아지자"(Azizah)를 불렀다. 이 곡은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그가 처음 감독한 영화 《페나렉 베차》(1955)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P. 람리의 첫 영화 출연작은 1948년 영화 《친타》로, 그는 악역을 맡았으며 주연 배우 루마이 누르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플레이백 싱어로 다섯 곡을 불렀다. 이후 1950년 L. 크리슈난 감독의 영화 《박티》에서 첫 주연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플레이백 싱어의 도움 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시티 자이나브와 듀엣을 불렀다. 1951년 《주위타》와 1953년 《이부》 등의 영화에서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하며 말레이 영화 산업의 주요 스타로 떠올랐다. 배우로서의 인기가 높아지는 동시에 그의 음악 경력도 시작되었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헴슬리 & 컴퍼니와의 음반 계약으로 이어졌다. "아지자"는 헴슬리에게 상당한 수익을 안겨주었고, P. 람리는 이 곡으로 3000 USD를 받았다. 그는 또한 음악 감독 유소프 B.의 지휘 아래 HMV(His Master's Voice)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디오 말라야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2.2. 말레이 영화 프로덕션(MFP) 시절과 황금기
P. 람리의 영화 경력은 1950년 영화 《탁디르 일라히》가 개봉된 후 급부상했다.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에 따르면, 그는 스튜디오가 자신의 임금 인상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MFP를 잠시 떠났으나, 다른 영화사 누산타라 프로덕션스에 합류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1950년 12월 나트라 폭동이 발생하자 그는 잠시 조호르바루로 피신했다. 그 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MFP의 첫 말레이 감독인 A. 마하디의 도움으로 P. 람리는 MFP에 다시 합류하여 1951년 5월 말 개봉된 영화 《펭히두판》에 출연했다.
MFP로 돌아온 P. 람리는 《세졸리》(1951), 《주위타》(1951), 《안타라 세늄 단 탄기스》(1952), 《후잔 파나스》(1953), 《팡길란 풀라우》(1954)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감독으로서 첫 큰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1955년, P. 람리는 자신이 출연하고 사아디아와 공동 주연한 첫 영화 《페나렉 베차》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연예 잡지 《마잘라 필름 단 수칸》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56년에는 이 영화가 최고 말레이 영화, 최고 감독, 최고 노래("이나앙 바루" Inang Baru), 최고 배우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인도 영화감독 파니 마줌다르의 연출 아래, P. 람리는 항 투아 전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항 투아》(1956)에 사아디아, 아흐마드 마흐무드와 함께 출연했다. 1956년 1월 28일 개봉된 이 영화는 이스트만컬러 형식으로 촬영된 최초의 말레이 영화였다. 그는 이어서 마줌다르와 다시 협력하여 영화 《아낙쿠 사잘리》에 출연했는데, P. 람리는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산과 반항적인 아들 사잘리라는 두 가지 역할을 연기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8년, 그는 군사 영화 《사르잔 하산》에 출연했는데, P. 람리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원래 필리핀 영화감독 람베르토 아벨라나가 감독할 예정이었으나, 아벨라나가 하차하면서 P. 람리가 감독직을 맡았다. 이 영화에는 진스 샴수딘, 살레흐 카밀, 사아디아도 출연했다. 2년 후, 그는 계급을 중시하는 텡쿠 잘레하 가족의 반대에 부딪힌 가잘리(P. 람리 분)와 텡쿠 잘레하(사아디아 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 《안타라 두아 다르잣》(1960)을 직접 쓰고, 감독하고, 출연했다. 이 영화의 출연진에는 S. 카다리스만, 유소프 라티프, 아흐마드 니스푸, 쿠스와디나타 등이 포함되었다. 영화 외에도 P. 람리는 해피 월드, 뉴 월드, 빅토리아 극장에서 상연된 《술탄 마흐무드 망카트 디 줄랑》(1959), 《카칩 마스》(1961), 《다마크》(1952)와 같은 연극 제작도 감독했다.

P. 람리는 코미디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이는 그가 직접 출연하고 S. 샴수딘, 아지즈 사타르와 함께 주연한 영화 시리즈 《부장 라폭》을 감독하면서 입증되었다. 이 영화는 사회 의식을 주제로 하여 그의 가장 사랑받는 코미디 영화가 되었다. 《부장 라폭》의 성공은 《알리 바바 부장 라폭》, 《펜데카 부장 라폭》, 《세니만 부장 라폭》 등 세 편의 속편으로 이어졌다. 1959년 영화 《펜데카 부장 라폭》은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최우수 코미디상을 수상했다. 1962년, 그는 아내 살로마와의 행복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 《이부 메르투아쿠》를 감독했으며, 카심 슬라맛 역을 연기하며 직접 대본을 썼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주제곡 "디 마나 칸 쿠 차리 간티"는 영화의 인기를 뛰어넘었다. 이 영화에서 P. 람리는 자신의 색소폰 연주 실력도 선보였다. 《이부 메르투아쿠》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특별히 신설된 '가장 다재다능한 배우'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듬해 그는 아내와 함께 홍콩 영화 《러브 퍼레이드》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싱가포르의 말레이 영화 프로덕션에서 활동한 시기는 P. 람리의 "황금기"로 여겨지며, 이 시기에 그는 가장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영화들을 만들고 가장 기억에 남는 곡들을 작곡했다. 그의 작곡은 20세기 초 말라야 연방과 싱가포르에 널리 퍼져 있던 방사완과 롱겡 극장의 반주 음악, 그리고 크론총 장르와 같은 매우 국제화된 음악적 풍경을 반영했다.
2.3. 음악 활동
P. 람리는 다작의 작곡가이자 음악가였다. 그는 350곡 이상의 노래를 직접 녹음했으며, 그 외에도 약 500곡이 그 자신이나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녹음되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로는 "게타란 지와", "덴당 페란타우", "엥카우 락사나 불란", "조겟 파항", "투둥 페리옥", "디 마나 칸 쿠 차리 간티", "아지자" 등이 있다. P. 람리가 작곡한 노래들은 그의 영화에 삽입되었으며, 그 자신이나 다른 예술가들이 불렀다. 1956년 B.N. 라오가 감독한 영화 《항 투아》에서는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했다.
P. 람리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 때마다 새로운 곡을 창작하며 말레이 가요와 팝 음악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외에도 트럼펫과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조겟', '크론총', '돈당 사양' 등 지역 음악 스타일을 기반으로 라틴 음악, 재즈, 아랍 음악, 인도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를 자유자재로 혼합하여 작곡하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1960년대에 작곡한 "부니 기타"는 당시 해외에서 유행하던 '트위스트' 리듬을 도입하기도 했다.
2.4. 메르데카 필름 프로덕션 및 후기 활동
P. 람리는 1964년 싱가포르를 떠나 쿠알라룸푸르의 메르데카 필름 프로덕션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1964년에 두 편의 영화, 즉 《마두 티가》와 《티가 압둘》(S. 카다리스만과 공동 집필)을 감독하고 주연했는데, 이 작품들은 그가 쇼 브라더스와 함께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그해 4월, 그는 호 아 록과 H.M. 샤가 소유한 쿠알라룸푸르의 스튜디오 메르데카로 이적했다. 그러나 쇼 가문은 스튜디오 메르데카의 대량 주식을 매입하여 P. 람리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1964년 11월, P. 람리와 그의 아내 살로마는 움노 여성 및 이슬람 자금 모금을 위한 쾅 통 협회에서 열린 버라이어티 쇼에 초청받아 공연했다.
그는 스튜디오 메르데카에서 첫 영화 《시토라 하리마우 자디안》을 감독했는데, 이 영화의 대본을 직접 쓰고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위해 P. 람리는 특수 효과를 시도했지만, 적은 예산과 부족한 지원으로 인해 편집을 포함한 여러 작업을 직접 수행해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 영화의 시사회에는 배우 아흐마드 다우드와 사아디아가 참석했지만, 쇼 브라더스 관계자들은 15분 만에 자리를 떴다. 이 영화는 현재 유실된 유일한 말레이 영화가 되었다.
P. 람리는 이후 1972년까지 스튜디오 메르데카에서 《마삼-마삼 마니스》와 《두 리 미》 영화 시리즈를 포함한 18편의 영화를 더 감독했다. 1967년, P. 람리가 떠난 후 세 편의 영화가 실패하면서 말레이 영화 프로덕션은 결국 운영을 중단했다. 1년 후인 1968년, P. 람리가 속해 있던 음반사 EMI는 계약 만료 시점에 그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는 P. 람리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EMI와 다시 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1969년 6월 21일, P. 람리와 그의 아내 살로마는 인도네시아 메단으로 떠나 말레이시아 문화 사절단에 합류했다. 당시 총리 툰쿠 압둘 라흐만 푸트라 알하지의 아내인 샤리파 로지아 시예드 알위 바라크바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특별 초청을 받아 함께 메단으로 향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스튜디오 메르데카와 함께한 《락스마나 두 리 미》(1972)였으며, 그의 마지막 노래이자 가사는 "아예르 마타 디 쿠알라룸푸르"였다. 이 곡은 그의 아내 푸안 스리 살로마가 그의 사후에 불렀다. 경력 말기에는 P. 람리는 압둘라 후세인이 집필한 두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즉 《인탄》(1970)과 《란타우 슬라맛》(1972)에 출연했다. P. 람리는 H. M. 샤와 다른 세 명과 함께 말레이시아 영화 산업 발전을 목표로 하는 영화 단체인 말레이시아 영화 기업(PERFIMA)을 설립했다. 그러나 1973년 2월 말, P. 람리와 H. M. 샤는 지도부와의 의견 차이로 PERFIMA에서 해고되었다. 사망하기 전, P. 람리는 언젠가 쇼 브라더스와 경쟁하기 위해 자신만의 영화사를 설립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3년 5월 14일부터 18일까지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영화제에 말레이시아 예술가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총 62편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으며, 그중 33편을 직접 감독했다.
3. 영화 및 음악 작품
P. 람리는 배우, 감독, 작곡가, 시나리오 작가로서 방대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360개 이상의 곡을 작곡하고 66개 이상의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으며, 35개 작품을 연출했다.
3.1. 주요 영화
P. 람리의 경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거나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영화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배우로서 66편, 감독으로서 35편의 영화에 참여했다.
- 《친타》(1948) - 첫 영화 출연작
- 《박티》(1950)
- 《탁디르 일라히》(1950)
- 《페나렉 베차》(1955) - 첫 감독 작품
- 《아부 하산 펜추리》(1955)
- 《항 투아》(1956)
- 《아낙쿠 사잘리》(1956)
- 《부장 라폭》 시리즈 (1957년 ~ 1961년)
- 《부장 라폭》(1957)
- 《펜데카 부장 라폭》(1959)
- 《알리 바바 부장 라폭》(1961)
- 《세니만 부장 라폭》(1961)
- 《사르잔 하산》(1958)
- 《안타라 두아 다르잣》(1960)
- 《이부 메르투아쿠》(1962)
- 《라부 단 라비》 시리즈
- 《라부 단 라비》(1962)
- 《나십 시 라부 라비》(1963)
- 《마두 티가》(1964)
- 《티가 압둘》(1964)
- 《마삼-마삼 마니스》(1965)
- 《두 리 미》 시리즈
- 《두 리 미》(1966)
- 《나십 두 리 미》(1966)
- 《나십 두 리 미》(1967)
- 《아낙 바팍》(1968)
- 《엔암 자하남》(1969)
- 《디 벨라캉 타비르》(1969)
- 《닥터 루시디》(1970)
- 《잔간 팅갈 다쿠》(1971)
- 《푸투스 수다 카세흐 사양》(1971)
- 《락스마나 두 리 미》(1972) - 마지막 영화 출연작
그는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 《인탄》(1970)과 《란타우 슬라맛》(1972)에도 출연했다.
3.2. 주요 노래
P. 람리는 250곡 이상을 작곡하고 그 중 거의 30곡을 직접 불렀다. 그의 음악은 말레이 가요와 팝 음악의 기반을 다졌으며, 재즈와 조겟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음악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의 노래 중 다수는 그가 작곡하고 인도네시아인 S. 수다르마지가 작사했지만, 일부 곡은 저작권 문제로 작곡가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음은 대중에게 사랑받았거나 그의 음악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 "아지자"(Azizah말레이어)
- "게타란 지와"(Getaran Jiwa말레이어)
- "아치 아치 부카 핀투"(Aci Aci Buka Pintu말레이어)
- "디 마나 칸 쿠 차리 간티"(Di Mana Kan Ku Cari Ganti말레이어)
- "제리탄 바팅쿠"(Jeritan Batinku말레이어)
- "아예르 마타 디 쿠알라룸푸르"(Ayer Mata di Kuala Lumpur말레이어) - 그의 마지막 녹음곡
- "덴당 페란타우"(Dendang Perantau말레이어)
- "엥카우 락사나 불란"(Engkau Laksana Bulan말레이어)
- "조겟 파항"(Joget Pahang말레이어)
- "투둥 페리옥"(Tudung Periok말레이어)
- "부니 기타"(Bunyi Guitar말레이어)
- "푸투스 수다 카세흐 사양"(Putus Sudah Kaseh Sayang말레이어)
- "앗살라무알라이쿰"(Assalamualaikum말레이어)
- "붕아 멜로르"(Bunga Melor말레이어)
- "이스타나 친타"(Istana Chinta말레이어)
- "바랑 양 레파스 잔간 디 케낭"(Barang Yang Lepas Jangan Di Kenang말레이어)
- "린두 하티쿠 티닥 테르키라"(Rindu Hatiku Tidak Terkira말레이어)
- "조겟 말레이시아"(Joget Malaysia말레이어)
- "말람 이니 키타 베르피사흐"(Malam Ini Kita Berpisah말레이어)
4. 개인사
P. 람리의 사생활, 특히 결혼과 자녀에 대한 내용은 그의 예술적 경력만큼이나 다채롭고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4.1. 결혼과 자녀
P. 람리는 생애 동안 세 번 결혼했다.
- 첫 번째 결혼: 주나이다 하리스(Junaidah Haris말레이어)
1947년 9월 17일에 결혼했으나, 1953년 10월 17일에 이혼으로 끝났다. 주나이다는 P. 람리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에 그를 사랑했다. 이 결혼에서 P. 람리는 두 명의 친자녀를 두었다.
- 두 번째 결혼: 노리잔 모흐드 누르(Noorizan Mohd. Noor말레이어)
1955년 2월 6일에 결혼했다. 노리잔은 당시 페락 주의 왕족으로, P. 람리와의 사랑을 위해 궁정 생활을 기꺼이 포기했다. 그녀는 유명한 예술가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P. 람리를 사랑했지만, 결혼 생활은 1961년 10월 16일에 끝났다. 노리잔은 결혼 생활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P. 람리는 자신의 예술 경력에 더 집중했다. P. 람리는 노리잔이 다른 배우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심했으며, 노리잔은 이후 압둘라 칙과 잠시 결혼했지만 P. 람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세 번째 결혼: 살로마(Saloma말레이어)
1961년 11월 21일, 가까운 친구들만 참석한 매우 간소한 결혼식으로 살로마와 결혼했다. P. 람리는 원래 살로마의 언니인 마리아니 이스마일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살로마는 P. 람리의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다. 살로마는 P. 람리를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살로마와의 결혼 생활은 P. 람리의 음악 경력에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 그는 수백 곡을 작곡하고 살로마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P. 람리는 직접 돌본 자녀가 많았지만, 친자녀는 주나이다와의 결혼에서 얻은 두 명뿐이었다. 그의 자녀들은 종종 그의 작품 활동에 도움을 주었는데, 예를 들어 영화 《티가 압둘》의 "톨롱 카미 반투 카미"(Tolong Kami Bantu Kami말레이어)와 같은 노래에서 어린이 코러스로 참여하거나, 영화 《아낙 바팍》에서 농장 노동자의 아이로 출연하는 등 아역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모흐드 나시르 P. 람리(Mohd Nasir P. Ramlee말레이어): 주나이다와의 친자녀 (1953년 ~ 2008년)
- 아르판(Arfan말레이어): 주나이다와의 친자녀 (1955년 ~ 1998년)
- 사잘리 P. 람리(Sazali P. Ramlee말레이어): 입양아 (1958년생)
- 압둘 라흐만(Abdul Rahman말레이어): 의붓아들 (주나이다의 아들)
- 노르마(Norma말레이어): 의붓딸 (노리잔의 딸)
- 아르말리(Armali말레이어): 의붓아들 (살로마와 A.R. 톰펠의 아들)
- 베티(Betty말레이어): 입양아
- 자키아(Zakiah말레이어)/자잘로마(Zazaloma말레이어): 입양아 (1963년생)
- 사바루딘(Sabaruddin말레이어)/바딘(Badin말레이어): 입양아 (1965년 ~ 2007년)
- 디안 P. 람리(Dian P. Ramlee말레이어): 입양아 (중국계 혈통의 유명 말레이시아 배우)
5. 사망

P. 람리는 1973년 5월 29일 화요일 새벽, 심장마비로 44세의 나이로 쿠알라룸푸르 병원에 도착하려던 중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쿠알라룸푸르의 잘란 암팡 이슬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말레이시아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총리였던 압둘 라작 후세인을 비롯해 아지즈 사타르, S. 수다르마지, M. 아민 등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압둘 라작 후세인 총리는 P. 람리의 죽음을 "대체할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의 상실"이라고 애도했다.
6. 유산과 평가
P. 람리는 말레이시아 및 동남아시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예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평가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6.1. 문화적 영향력
P. 람리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의 새로운 세대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영감을 주고 있다. 그의 영화와 음악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비롯한 광범위한 말레이어 사용권 지역(즉, 누산타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공헌은 현재까지도 기념되고 있다.
그의 영화는 인도네시아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는데, 특히 자카르타의 십대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다. 그의 곱슬머리와 클라크 게이블처럼 얇은 콧수염은 많은 이들이 따라 할 정도로 유행했다. 인도네시아의 유명 배우 빙 슬라멧과 벤야민 수엡은 P. 람리를 자신들의 경력에서 본보기로 삼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P. 람리의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극장 티켓은 항상 팬들에게 매진될 정도였다.
말레이시아 배우 션 가지는 P. 람리를 "말레이시아 음악의 영웅"이자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을 합쳐놓은 듯한 르네상스 예술가"라고 칭했다. CNN은 2010년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시아 배우 2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며 그의 국제적인 위상을 재확인했다.
P. 람리는 영화마다 새로운 곡을 창작하며 말레이 대중음악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피아노, 바이올린 외에도 트럼펫과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조겟', '크론총', '돈당 사양' 등 지역 음악 스타일을 기반으로 라틴 음악, 재즈, 아랍 음악, 인도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를 자유자재로 혼합하여 작곡하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1960년대에 작곡한 "부니 기타"는 당시 해외에서 유행하던 '트위스트' 리듬을 도입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그의 노래 149곡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며 그의 예술적 가치가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사후에는 시티 누르할리자의
6.2. 수상 및 영예
P. 람리는 생전과 사후에 걸쳐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그는 말레이 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말레이시아 국가 훈장
- 아흘리 망쿠 느가라(AMN): 1963년, 국왕 탄신일을 기념하여 수여되었다. 이는 P. 람리가 국가 최고 훈장을 받은 최초의 말레이 영화 스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 판글리마 세티아 마흐코타(PSM) - 탄 스리: 1990년 6월 6일, 국왕에 의해 사후 수여되었다.
- 사후 스니만 아궁 느가라(Seniman Agung Negara, 국가 최고 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다.
- 사라왁 주 훈장
- 다툭 아마르 빈탕 케냐랑(DA) - 다툭 아마르: 2009년, 사라왁 주 정부에 의해 사후 수여되었다. 당시 사라왁 주지사 압둘 타이브 마흐무드는 쿠칭에서 열린 원로 예술가 기념식에서 그의 양녀 디안 P. 람리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P. 람리는 2005년에 공연 예술 분야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아 '닥터' 칭호를 받기도 했다.
- 영화제 수상
- 1956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영화 《항 투아》로 최우수 음악상 수상.
- 1957년 제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도쿄): 영화 《아낙쿠 사잘리》로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
- 1959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영화 《펜데카 부장 라폭》으로 최우수 코미디상 수상.
- 1963년 제10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도쿄): 영화 《이부 메르투아쿠》로 '가장 다재다능한 배우' 부문 특별상 수상.
6.3. 기념 및 추모
P. 람리의 죽음 이후,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 1973년 8월 15일, 그의 사망 약 3개월 후 쿠알라룸푸르 잘란 투안쿠 압둘 라흐만에 '파와감 P. 람리'(Pawagam P. Ramlee말레이어, P. 람리 영화관)가 공식 개관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이 영화관은 룸푼 필름 말레이가 소유했으며, 당시 셀랑고르 주 주지사 하루운 이드리스가 개관식을 주재했다.
- 1982년에는 쿠알라룸푸르 도심의 잘란 패리(Jalan Parry)가 잘란 P. 람리(Jalan P. Ramlee말레이어)로 개명되었다. 사라왁 주 쿠칭에도 같은 이름의 '잘란 P. 람리' 거리가 있다.
- 1986년 3월 22일, 그의 57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세타팍 잘란 데답에 위치한 그의 마지막 거주지가 푸스타카 페링가탄 P. 람리(Pustaka Peringatan P. Ramlee, P. 람리 기념 도서관)로 개조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기념관은 P. 람리의 유품과 자료들을 전시하며 그의 예술적 공헌을 기리고 있다. 페낭의 'P. 람리 하우스'는 그의 생가로, 1926년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지은 목조 주택을 복원한 것이다. 이 집은 국립 기록원에 의해 쿠알라룸푸르의 P. 람리 기념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인수되었으며, P. 람리의 페낭 시절 개인 기념품과 가족 소유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 2007년 말레이시아 독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그는 국가에 큰 공헌을 하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말레이시아인들을 기리는 프로그램인 '아낙 그밀랑 말레이시아(Anak Gemilang Malaysia)'의 최종 후보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그의 삶을 다룬 뮤지컬 연극 《P. 람리 더 뮤지컬... 삶, 사랑 그리고 영감》이 무대에 올려졌다.
- 2010년에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그의 삶과 작품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방영되었다.
- 2017년 3월 22일, 그의 88번째 생일을 맞아 구글 말레이시아는 구글 두들을 통해 P. 람리를 기념했다.
- 2021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은 P. 람리에게 경의를 표하며 한정판 메뉴인 '버거 P. 람리'를 출시했다. 이 버거는 KFC의 '징거 버거'와 P. 람리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나시 칸다르를 조합한 것으로, 다양한 콤보 메뉴로 제공되었다.
- 2022년 4월 14일부터 7월 31일까지 파렌하이트 88은 말레이시아 관광예술문화부 및 말레이시아 국립 기록원과 협력하여 '갤러리 P. 람리'라는 특별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에는 P. 람리와 살로마의 역사적인 사진, 예술 분야에서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영화와 무대 공연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의상 등이 전시되었다.
6.4. 수용 및 비판적 평가
P. 람리는 사망 당시 말레이시아 연예계에서 대체로 무시당했으며, 동료 예술가들의 질투로 인해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공헌이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사망 20년 후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후기 식민지 및 독립 후 국가 건설 시기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그의 비극적인 말년을 알게 된 후대 세대들의 깊은 부끄러움과 연민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1983년 6월 16일,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였던 마하티르 모하맛 박사는 P. 람리의 공헌을 국가의 위대한 예술가로서 진정으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기념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P. 람리를 진정한 '국민 예술가'라고 칭하며, 그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영화인 《락스마나 두 리 미》가 1973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참석한 다른 말레이시아 예술가들은 P. 람리를 외면했다. 이에 그는 싱가포르 예술가들과 함께 앉았으며, 홍콩과 일본 등 해외 예술가들이 그에게 더 많은 인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말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
7. 외부 링크
- [https://web.archive.org/web/20101031211521/http://www.sinemamalaysia.com.my/artist/info/?id=Teuku_Zakaria_Bin_Teuku_Nyak_Puteh_3756 P. 람리 프로필 (sinemamalaysia.com.my)]
- [http://www.p-ramlee.com/ P. 람리 사이버 박물관]
- [http://www.astro.com.my/pramlee/ P. 람리: 당신의 이름은 드높고, 당신의 공헌은 기억될 것입니다 (Astro 특별 추모 프로그램)]
- [https://www.discogs.com/artist/3293241-P-Ramlee P. 람리 Discogs 프로필]
- [https://www.allmusic.com/artist/p-ramlee-mn0001255767 P. 람리 AllMusic 프로필]
- [https://www.imdb.com/name/nm0708422/ P. 람리 IMDb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