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dward Osborne Wilson영어, 1929년 6월 10일 ~ 2021년 12월 26일)은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자연주의자, 생태학자, 곤충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는 사회생물학 분야를 개척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헌으로 '사회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또한 생물 다양성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생물 다양성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윌슨은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이 분야에서의 방대한 연구로 '개미 박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의 주요 과학적 업적으로는 로버트 맥아더와 함께 개발한 섬 생물지리학 이론, 형질 분화 이론,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 등이 있다. 윌슨은 인간과 자연의 본능적 연결을 설명하는 바이오필리아 개념과, 다양한 학문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려는 통섭 이론을 주창하며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9년)와 개미(1991년)로 두 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여러 베스트셀러 저서를 통해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윌슨의 연구는 생전에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그의 사회생물학 이론을 인간 행동에 적용한 것은 학계와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리처드 도킨스와의 진화론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있었다. 또한 사후 공개된 서신을 통해 과학적 인종주의자로 평가받는 J. 필립 러쉬턴을 지지한 사실이 드러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생물학, 생태학, 보존학 등 여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과학적 인본주의를 주창하고 생물 다양성 보존을 위한 '하프 어스' 구상을 제안하는 등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인류 사회와 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어린 시절과 교육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1929년 6월 10일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이네즈 리네트 프리먼과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 시니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서전 내추럴리스트에 따르면, 그는 모빌, 디케이터, 펜서콜라를 포함한 미국 남부의 여러 마을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결국 자살했다. 윌슨이 일곱 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같은 해, 윌슨은 낚시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오랜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낚시를 멈추지 않았고, 야외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 의료 치료를 받지 않았다. 몇 달 후 오른쪽 눈동자에 백내장이 생겨 펜서콜라 병원에 입원하여 렌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윌슨은 이 수술을 "끔찍한 19세기 고난"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왼쪽 눈의 시력은 20/10으로 온전히 유지되었는데, 이는 그가 "작은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비와 개미를 더 많이 알아챘고, 자동으로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입체시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은 글씨와 작은 곤충 몸의 털까지 볼 수 있었다. 포유류나 조류를 관찰하는 능력이 저하되면서 그는 곤충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홉 살 때 윌슨은 워싱턴 D.C.의 록 크리크 공원에서 첫 탐사를 시작했다. 그는 곤충을 채집하기 시작했고 나비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빗자루, 옷걸이, 치즈천 주머니로 만든 그물을 사용하여 나비를 잡았다. 이러한 탐사는 윌슨이 개미에 매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어느 날 썩은 나무껍질을 벗겨내다가 그 밑에서 시트로넬라 개미를 발견했던 경험을 묘사했다. 그가 발견한 일개미들은 "짧고, 통통하고, 선명한 노란색이었으며, 강한 레몬 향을 뿜어냈다". 윌슨은 이 사건이 "생생하고 오래 지속되는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미국 보이스카우트에서 이글 스카우트 상을 받았고 보이스카우트 여름 캠프의 자연 감독으로 활동했다. 18세에 곤충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를 채집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곤충 핀이 부족해지자 유리병에 보관할 수 있는 개미로 대상을 바꿨다. 워싱턴의 미국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개미학자인 매리언 R. 스미스의 격려를 받아 윌슨은 앨라배마주의 모든 개미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를 통해 그는 모빌 항구 근처에서 미국 내 첫 불개미 군집을 보고했다.
윌슨은 11년간의 학교생활 동안 15~16개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될까 봐 걱정하여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교육비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시력 문제로 신체검사에 불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949년에 학사 학위를, 1950년에 생물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윌슨은 하버드 대학교로 편입했다. 하버드 펠로우 학회에 임명된 그는 쿠바와 멕시코에서 개미 종을 채집하고 호주, 뉴기니, 피지, 뉴칼레도니아를 포함한 남태평양과 스리랑카를 여행하며 해외 탐사를 다녔다. 1955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아이린 켈리(Irene Kelley)와 결혼했다. 윌슨은 젊은 과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IQ가 123으로 측정되었다고 밝혔다.
2.2. 초기 경력
1956년부터 1996년까지 윌슨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개미 분류학자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특히 개미가 환경적 불이익을 벗어나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지 이해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분류군 주기' 이론을 개발했다.
1960년대에는 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로버트 맥아더와 협력하여 종수 평형 이론을 개발했다. 1970년대에는 생물학자 대니얼 S. 심벌로프와 함께 플로리다 키스의 작은 맹그로브 섬에서 이 이론을 실험했다. 그들은 모든 곤충 종을 박멸하고 새로운 종에 의한 재개척 과정을 관찰했다. 윌슨과 맥아더의 저서 섬 생물지리학 이론은 생태학의 표준 교과서가 되었다. 1971년에는 곤충 사회(The Insect Societies)를 출판하여 곤충과 다른 동물의 행동이 유사한 진화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1973년 윌슨은 하버드 비교동물학 박물관의 곤충학 큐레이터로 임명되었다.
3. 주요 과학적 공헌
윌슨은 그의 학문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이론과 연구를 통해 과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 곤충학 및 개미 연구
윌슨은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개미 박사'로 불릴 만큼 이 분야에서 방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400종 이상의 개미를 발견하고 분류했으며, 개미의 행동, 생태, 생리, 사회 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동물학자 베르트 휠도블러와 함께 1990년에 출간한 백과사전적 저서 개미는 개미 연구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윌슨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개미의 자기희생적 행동이 유전적 이익(당시에는 자매들과 7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여겨짐)에 기반한다는 사회생물학적 설명을 제시하며, 모든 사회적 행동을 사회성 곤충의 행동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개미 사회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가 옳았다. 사회주의는 작동한다. 단지 그가 종을 잘못 선택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개미와 같은 진사회성 종은 번식적 독립성이 없으므로 군집 전체의 적합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더 높은 다윈 적합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2. 섬 생물지리학
윌슨은 1967년 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로버트 맥아더와 함께 섬 생물지리학 이론을 공동 저술하며 섬 생물지리학이라는 중요한 학문 분야를 개척했다. 이 이론은 섬의 면적과 본토와의 거리가 섬에 서식하는 종의 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는 종수 평형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생물지리학과 생태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으며, 보존 생물학 분야의 보호 구역 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슨과 맥아더의 저서는 생태학 분야의 표준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에는 생물학자 대니얼 S. 심벌로프와 함께 플로리다 키스의 작은 맹그로브 섬에서 모든 곤충 종을 제거하고 새로운 종의 재개척 과정을 관찰하는 실험을 통해 이 이론을 실증적으로 검증했다.
3.3. 사회생물학

윌슨은 1975년 저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통해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정립했다. 그는 사회생물학을 "모든 종류의 유기체에서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로 정의했다. 이 책은 동물 행동학, 생태학, 유전학의 지식을 통합하여 모든 사회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일반 원칙을 수립하고자 했다. 윌슨은 곤충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척추동물에게,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인간에게 적용했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이 유전, 환경 자극, 과거 경험의 산물이며, 자유 의지는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행동의 생물학적 기반을 "유전적 속박"이라고 지칭했다.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법칙에 의해 형성된 후성유전적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본다. 이 이론과 연구는 선구적이고 영향력이 컸지만, 동시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윌슨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유전자이며, 선택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특정 종류의 유전자 집합을 지닌 개체라고 주장했다. 진사회성 곤충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혈연 선택설을 사용한 것과 관련하여, 그는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관점은 다윈이 처음 대략적으로 정립했던 것처럼, 줄곧 집단 선택설이었다"고 말했다. 사회생물학 연구는 특히 인간에게 적용될 때 논란이 많았다. 이 이론은 인간이 어떤 선천적 정신적 내용도 없이 태어나며, 문화가 인간 지식을 늘리고 생존과 성공을 돕는다는 일반적인 타불라라사 교리를 거부하는 과학적 주장을 확립했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의 마지막 장과 인간 본성에 대하여 전반에 걸쳐 인간의 마음이 유전적 유산과 문화 모두에 의해 형성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사회적, 환경적 요인이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3.4. 바이오필리아와 통섭
윌슨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인 바이오필리아와 통섭을 제시했다.
- 바이오필리아: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체 또는 생명의 시스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인간이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원래 에리히 프롬이 제안했지만, 윌슨은 이를 발전시켜 인간이 자연환경에 대해 선천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바이오필리아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이 가설이 현대 보존 윤리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자연 보호가 인간의 본능적인 바이오필리아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1984년 저서 바이오필리아를 통해 이 개념을 탐구했다.
- 통섭: 윌슨은 1998년 저서 통섭: 지식의 통합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그는 지식이 과학과 인문학적 탐구로 나뉘지 않는 단일하고 통합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지식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윌슨은 인간 본성을 정신 발달의 유전적 패턴인 후성유전적 규칙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그는 문화와 의례가 인간 본성의 부분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예술 감상, 뱀에 대한 두려움, 근친상간 금기 (웨스터마크 효과)와 같은 개념들이 자연과학의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으며, 학제 간 연구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3.5. 기타 주요 이론
윌슨은 위에서 언급된 주요 이론 외에도 다양한 과학적 기여를 했다.
- 형질 분화 (Character Displacement): 1956년 윌리엄 L. 브라운 주니어와 공동 저술한 논문에서 형질 분화 이론을 정의했다. 이 이론은 유사한 종들이 경쟁을 피하기 위해 서식지나 자원 이용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한다. 이 논문은 1986년 과학 인용 고전으로 선정될 만큼 높은 영향력을 가졌다.
- 유전자-문화 공진화 (Gene-Culture Coevolution): 1981년 생물학자 찰스 럼스든과 함께 유전자, 마음, 문화(Genes, Mind and Culture)를 출판하며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 분류군 주기 (Taxon Cycle): 윌슨은 개미가 환경적 불이익을 벗어나 새로운 서식지로 이동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종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분류군 주기' 이론을 개발했다.
- 페로몬 분류 (Pheromone Classification): 수학자 윌리엄 H. 보서트와 협력하여 곤충의 의사소통 패턴에 기반한 페로몬 분류법을 개발했다.
4. 주요 저서
윌슨은 그의 과학적 탐구와 사상을 담은 수많은 저서를 출판했으며, 이 중 다수는 대중 과학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 형질 분화 (1956년): 윌리엄 L. 브라운 주니어와 공동 저술한 논문으로, 종 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질 분화 현상을 다룬다.
- 섬 생물지리학 이론 (1967년): 로버트 맥아더와 공동 저술. 섬의 면적과 본토와의 거리가 종의 수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종수 평형 이론을 제시한다.
- 곤충 사회 (1971년): 곤충의 사회적 행동과 진화적 압력의 관계를 탐구한다.
-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1975년):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 곤충 행동 이론을 척추동물과 인간에게 확장 적용한다.
- 인간 본성에 대하여 (1979년): 인간 문화 진화에서 생물학의 역할을 다루며, 197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유전자, 마음, 문화: 공진화 과정 (1981년): 찰스 럼스든과 함께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을 제시한다.
- 프로메테우스의 불: 마음의 기원에 대한 성찰 (1983년)
- 바이오필리아 (1984년): 인간과 자연의 본능적 연결인 바이오필리아 개념을 탐구한다.
- 생태계에서의 성공과 지배: 사회성 곤충의 사례 (1990년)
- 개미 (1990년): 베르트 휠도블러와 공동 저술한 개미 연구의 백과사전적 저서로, 199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생명의 다양성 (1992년):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과 멸종 위기를 다룬다.
- 바이오필리아 가설 (1993년): 스티븐 R. 켈러트와 함께 바이오필리아 가설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 개미로의 여정: 과학 탐험 이야기 (1994년): 베르트 휠도블러와 함께 개미 연구의 여정을 서술한다.
- 내추럴리스트 (1994년): 윌슨 자신의 자서전이다.
- 자연을 찾아서 (1996년): 로라 사이먼즈 사우스워스와 함께 자연 탐구에 대한 글을 모았다.
- 통섭: 지식의 통합 (1998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의 지식 통합을 주장하는 이론을 제시한다.
- 생명의 미래 (2002년): 지구 생명의 미래와 보존에 대한 그의 비전을 담았다.
- 신세계의 페이돌레: 지배적이고 초다양한 개미 속 (2003년)
- 아주 단순한 시작부터: 다윈의 위대한 네 권의 책 (2005년): 찰스 다윈의 주요 저서들을 편집하고 서문을 썼다.
- 창조: 지구 생명을 구하기 위한 호소 (2006년): 과학과 종교의 협력을 통해 생물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 드러난 자연: 1949-2006년 선별된 저작 (2006년)
- 초유기체: 곤충 사회의 아름다움, 우아함, 기이함 (2009년): 베르트 휠도블러와 함께 곤충 사회의 복잡성을 탐구한다.
- 개미집: 소설 (2010년): 그의 첫 소설 작품이다.
- 개미 왕국: 호세 셀레스티노 무티스와 신세계 자연사의 여명 (2010년): 호세 마리아 고메즈 두란과 함께 저술했다.
- 잎꾼개미: 본능에 의한 문명 (2011년): 베르트 휠도블러와 함께 잎꾼개미의 사회를 다룬다.
- 지구의 사회적 정복 (2012년)
- 젊은 과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2014년)
- 영원으로 가는 창문: 생물학자가 고롱고사 국립공원을 걷다 (2014년)
- 인간 존재의 의미 (2014년)
- 하프 어스 (2016년): 지구 표면의 절반을 야생 생물에게 할애하자는 구상을 제시한다.
- 창의성의 기원 (2017년)
- 창세기: 사회의 깊은 기원 (2019년)
- 개미 세계 이야기 (2020년)
- 내추럴리스트: 그래픽 각색 (2020년): 그의 자서전을 그래픽 노블 형태로 각색한 작품이다.
5. 철학과 신념
윌슨은 그의 과학적 연구를 넘어 광범위한 철학적, 윤리적, 환경적 신념을 발전시켰다.
5.1. 과학적 인본주의
윌슨은 '과학적 인본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현실 세계와 자연 법칙에 대한 과학의 증가하는 지식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과학적 인본주의가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2003년에는 인본주의 선언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철학을 주창했다.
5.2. 종교 및 영성에 대한 견해
신과 종교에 대한 윌슨의 입장은 복합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잠정적 이신론"이라고 설명했으며,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불가지론자"를 선호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전통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는 궤적을 겪었다고 설명하며, "나는 교회에서 멀어졌지만, 확정적인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는 아니었으며, 단지 더 이상 침례교도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윌슨은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의례가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믿음과 의례가 거부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 본성에 대한 그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더 조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 창조(The Creation)에서 윌슨은 과학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고" 그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썼다. 그는 "과학과 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가지 힘이며, 창조물을 구하기 위해 함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윌슨은 텍사스 미들랜드 칼리지 등에서 종교계에 호소했으며, 이러한 호소는 "엄청난 반응"을 얻었고, "파트너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한 정도로 작동할 것"이라는 언약이 작성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5년 1월 21일 뉴 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우리를 끌어내리고 있다"고 말하며, "인간 진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종교적 신앙을 제거하는 지점까지 축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종의 자연스러운 갈망이나 이러한 위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5.3. 환경주의 및 보존
윌슨은 생물 다양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멸종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1960년대 이후 자신의 원래 연구 분야가 활성화된 것을 언급하며, 만약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미생물 생태학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20세기 대량 절멸과 현대 사회의 관계를 연구했으며, 대량 절멸을 지구의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규정했다.
1998년 그는 의회에서 생태학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숲, 특히 오래된 숲을 벌목할 때, 당신은 단지 많은 큰 나무와 천개에서 날아다니는 몇 마리의 새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몇 평방 마일 내에 있는 엄청난 수의 종들을 극심한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수는 수만 개에 이를 수 있습니다. ... 그들 중 다수는 아직 과학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과학은 균류, 미생물, 그리고 많은 곤충의 경우처럼 그 생태계 유지에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역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윌슨은 생물 다양성의 전 세계적 보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연구에 기여하고 이를 장려했다. 1984년에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진화적, 심리적 기반을 탐구한 바이오필리아를 출판했다. 이 저서는 '바이오필리아'라는 단어를 도입하여 현대 보존 윤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988년 윌슨은 이 주제에 대한 첫 미국 전국 회의의 회의록을 바탕으로 생물 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책을 편집했는데, 이 책은 '생물 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언어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이 작업은 생물 다양성 연구의 현대적 분야를 창조하는 데 매우 영향력이 컸다. 2011년 윌슨은 모잠비크의 고롱고사 국립공원과 남서 태평양의 바누아투 및 누벨칼레도니아 군도로 과학 탐사를 이끌었다. 윌슨은 컬럼비아 대학교의 지구 연구소 컨설턴트, 미국 자연사 박물관, 컨서베이션 인터내셔널, 네이처 컨서번시, 세계 자연 기금의 이사로서 국제 보존 운동의 일원이었다.
멸종 위기의 규모를 이해한 그는 숲 보호를 옹호했으며, 1998년에 처음 도입되었고 2008년에 재도입되었지만 통과되지 않은 "미국 숲을 구하기 위한 법안"도 포함한다. 포레스트 나우 선언은 열대림 보호를 위한 새로운 시장 기반 메커니즘을 요구했다. 윌슨은 한때 경제적 이득을 위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것은 르네상스 그림을 태워 식사를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2014년 윌슨은 멸종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으로 지구 표면의 50%를 다른 종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할애할 것을 촉구했다. 이 아이디어는 그의 저서 하프 어스(2016년)와 E.O. 윌슨 생물다양성 재단의 하프 어스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었다. 윌슨의 대중 과학을 통한 생태학적 영향력은 앨런 G. 그로스의 과학적 숭고(The Scientific Sublime)(2018년)에서 논의되었다.
윌슨은 과학이 인정한 190만 종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는 전 세계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 (EOL) 이니셔티브를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EOL은 거의 모든 알려진 종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 유기체 특성, 측정, 상호작용 및 기타 데이터에 대한 개방적이고 검색 가능한 디지털 저장소는 300개 이상의 국제 파트너와 수많은 과학자들이 전 세계 사용자에게 지구 생명에 대한 지식 접근을 제공하고 있다. 윌슨은 개인적으로 400종 이상의 개미를 발견하고 기술했다.
6. 학문 경력 및 후기 활동

6.1.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경력
윌슨은 1956년부터 1996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오랜 기간 연구와 교육 활동에 헌신했다. 그는 1976년에 프랭크 B. 베어드 주니어 과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96년 하버드에서 은퇴한 후에는 명예 교수인 펠레그리노 대학교 명예 교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개미 분류학자로서의 초기 연구부터 섬 생물지리학, 사회생물학, 통섭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6.2. 은퇴 및 E.O. 윌슨 생물다양성 재단
윌슨은 199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명예 교수이자 곤충학 명예 큐레이터 직위를 계속 유지했다. 2002년 73세의 나이로 하버드에서 완전히 은퇴한 후에도 그는 10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으며, 여기에는 아이패드용 디지털 생물학 교과서도 포함된다.
그는 PEN/E. O. 윌슨 문학 과학 저술상을 후원하는 E.O. 윌슨 생물다양성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듀크 대학교의 니콜라스 환경대학원 산하의 "독립 재단"이다. 윌슨은 이 협정의 일환으로 듀크 대학교의 특별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고롱고사 국립공원 등지로 과학 탐사를 이끄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생물 다양성 보존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7. 개인 생활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1955년에 아이린 켈리(Irene Kelley)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캐서린(Catherine)이라는 딸이 있었다. 윌슨 부부는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에 거주했다.
8. 사망
윌슨의 아내 아이린은 2021년 8월 7일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2021년 12월 26일, 92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벌링턴에서 사망했다.
9. 평가 및 유산
윌슨은 그의 혁신적인 과학적 연구와 환경 보호 활동으로 폭넓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 이론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9.1. 수상 및 영예
윌슨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연도 | 수상 내역 | 비고 |
---|---|---|
1959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 |
1967 | 뉴컴 클리블랜드 상 | 최근 화학적 의사소통의 발전 논문 |
1969 | 미국 과학 아카데미 회원 | |
1976 | 미국 국가 과학상 | 사회생물학 제창 |
1979 | 라이디 상 | 필라델피아 자연과학 아카데미 |
1979 | 퓰리처상 | 저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 |
1984 | 타일러 환경 공로상 | |
1987 | ECI 상 | 국제 생태학 연구소, 육상 생태학 부문 |
1987 | 웁살라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스웨덴 |
1988 | 미국 성취 아카데미 황금 접시 상 | |
1990 | 크라포르드상 |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
1991 | 퓰리처상 | 저서 개미 (베르트 휠도블러와 공동 수상) |
1993 | 국제 생물학상 | 생태학, 행동학, 진화 생물학 공헌 및 사회생물학 제창 |
1994 | 칼 세이건 과학 대중화상 | |
1995 | 내셔널 오듀본 협회 오듀본 메달 | |
1995 | 타임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 선정 | |
1996 | 국제 곤충학회 공로상 | 이탈리아 피렌체 |
1998 | 미국 철학회 벤저민 프랭클린 과학 공로 메달 | |
1999 | 미국 인본주의 협회 올해의 인본주의자 | |
2000 | 루이스 토마스 과학 저술상 | |
2001 | 니렌버그 상 | |
2002 | 왕립 지리학회 버스크 메달 | |
2004 | 이글 스카우트 공로상 | |
2006 | 린네 학회 300주년 기념 은메달 | |
2007 |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 애디슨 에머리 베릴 메달 | |
2007 | TED 상 | |
2007 | 카탈루냐 국제상 | |
2009 | 탐험가 클럽 메달 | |
2010 | BBVA 재단 지식의 프론티어 상 | 생태학 및 보존 생물학 부문 |
2010 | 토머스 제퍼슨 건축 메달 | |
2010 | 하트랜드 상 | 첫 소설 개미집: 소설 |
2010 | 어스스카이 올해의 과학 커뮤니케이터 | |
2012 | 코스모스 국제상 | |
2014 | 큐 국제 메달 | |
2014 | 미국 자연사 박물관 명예 과학 박사 학위 | |
2016 | 하퍼 리 상 | |
2018 | Myrmoderus eowilsoni | 종명에 그의 이름이 붙여짐 |
2020 | Miniopterus wilsoni | 종명에 그의 이름이 붙여짐 |


또한, 도핀 아일랜드 해양 연구소의 연구선 중 하나는 R/V E.O. 윌슨으로 명명되었으며, 플로리다주 월튼 카운티의 노쿠스 플랜테이션에 있는 바이오필리아 센터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9.2. 비판 및 논란
윌슨의 학문적 여정은 끊임없는 논쟁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인간 행동에 사회생물학을 적용한 것은 학계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9.2.1. 사회생물학 논쟁
1975년 출판된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은 처음에는 대부분의 생물학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사이언스 포 더 피플과 연관된 사회생물학 연구 그룹의 상당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사회생물학 논쟁'으로 알려진 대규모 논란이 뒤따랐다. 윌슨은 이 논쟁에서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 우생학 지지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버드 동료 중 리처드 르원틴과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사회생물학 연구 그룹의 일원으로서 윌슨의 아이디어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주로 윌슨의 사회생물학 저술에 비판의 초점을 맞췄다. 굴드, 르원틴 등은 공개 서한인 "사회생물학에 반대하며"를 통해 윌슨의 "인간 사회와 인간 행동에 대한 결정론적 관점"을 비판했다. 윌슨의 연구를 비판하는 다른 공개 강연, 독서 모임, 보도 자료도 조직되었다. 이에 윌슨은 바이오사이언스에 "학술적 자경주의와 사회생물학의 정치적 중요성"이라는 토론 기사로 대응했다.
1978년 2월, 미국 과학 진흥 협회 연례 회의에서 사회생물학 토론에 참여하던 윌슨은 인종차별 반대 국제 위원회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인종차별주의자 윌슨, 숨을 수 없다, 우리는 당신을 집단살해 혐의로 고발한다!"는 구호가 외쳐지는 가운데 물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윌슨이 인종차별과 생물학적 결정론을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와 이전에 윌슨에게 항의했던 사이언스 포 더 피플은 이 공격을 비난했다.
철학자 메리 미즐리는 짐승과 인간(Beast and Man)(1979년)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사회생물학을 접하고, 윌슨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책을 대폭 수정했다. 미즐리는 동물 행동 연구, 명확성, 학술성, 백과사전적 범위에 대해 윌슨의 책을 칭찬했지만, 개념적 혼란, 과학주의, 유전학의 의인화에 대해 광범위하게 비판했다.
9.2.2. 리처드 도킨스와의 논쟁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른바 '사회생물학 논쟁' 동안 윌슨을 옹호했지만, 이후 진화론 해석을 둘러싸고 둘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이 논쟁은 2012년 도킨스가 윌슨의 저서 지구의 사회적 정복에 대해 프로스펙트 매거진에 비판적인 서평을 쓰면서 시작되었다. 서평에서 도킨스는 윌슨이 혈연 선택설을 거부하고 집단 선택설을 지지한 것을 "평범하고" "초점이 흐려졌다"고 비판하며, 책의 이론적 오류가 "중요하고, 만연하며, 그 논지의 핵심적인 부분이라 추천할 수 없다"고 썼다. 윌슨은 같은 잡지에서 도킨스가 "자신이 비판하는 부분과 거의 관련이 없다"고 반박하며 그를 수사학에 몰두한다고 비난했다.
2014년 윌슨은 인터뷰에서 "나와 리처드 도킨스 사이에는 논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론인이고, 언론인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과 내가 가졌던 논쟁이 실제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과의 논쟁이었음을 보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도킨스는 트위터에서 "나는 E.O. 윌슨과 그의 곤충학, 생태학, 생물지리학, 보존학 등에 대한 막대한 기여를 매우 존경한다. 그는 단지 혈연 선택설에 대해 틀렸을 뿐이다"라고 답했고, 나중에 "내가 다른 과학자들의 생각을 보고하는 언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확장된 표현형을 읽어보라"고 덧붙였다. 생물학자 제리 코인은 윌슨의 발언이 "불공정하고, 부정확하며, 무례하다"고 평했다. 2021년 윌슨의 부고에서 도킨스는 그들의 논쟁이 "순전히 과학적"이었다고 밝혔다. 도킨스는 자신의 비판적 서평을 고수하며 "솔직한 어조"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윌슨 교수와 그의 평생의 업적에 대한 깊은 존경심"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9.2.3. J. 필립 러쉬턴 지지 논란
윌슨 사망 전, 그의 개인 서신들은 미국 의회도서관의 요청에 따라 기증되었다. 그의 사망 후, 윌슨의 생물지리학과 보존 생물학의 옹호자로서의 유산과 수년간 과학적 인종주의적 사이비과학자 J. 필립 러쉬턴을 지지한 사실 사이의 불일치를 논의하는 여러 기사가 출판되었다. 러쉬턴은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의 논란이 많은 심리학자였으며, 나중에는 파이오니어 펀드를 이끌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윌슨은 러쉬턴의 동료들에게 여러 이메일을 보내 러쉬턴의 작업이 학술적 비행, 데이터 오용, 확증 편향 등으로 광범위하게 비판받는 상황에서 이를 옹호했다. 이 모든 것은 러쉬턴이 자신의 인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알려졌다. 윌슨은 또한 러쉬턴이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에 쓴 기사를 후원했으며, 검토 과정에서 윌슨은 기사의 전제에 이미 동의할 가능성이 있는 검토자들을 의도적으로 찾아 나섰다. 윌슨은 자신의 명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러쉬턴의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비공개로 유지했다. 윌슨은 러쉬턴의 이데올로기가 더 널리 지지받지 못하는 이유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이는 미국 학계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면 사실상 사형 선고와 같다. 나 자신도 두려움 때문에 러쉬턴의 작업 주제를 피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2022년, E.O. 윌슨 생물다양성 재단은 이사회와 직원을 대표하여 윌슨의 러쉬턴 지지와 인종차별주의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9.3. 영향력
윌슨은 '생물 다양성의 아버지', '개미 박사', '다윈의 후계자' 등 여러 별칭으로 불리며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PBS 인터뷰에서 윌슨을 "자연계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법 같은 이름"이라고 묘사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그는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전문가의 우뚝 솟은 모범"이며, "세상에 에드 윌슨만큼 개미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둘째, "그 깊은 지식과 이해 외에도 그는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는 지구와 그 안에 담긴 자연계를 놀라운 세부 사항과 비범한 일관성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윌슨은 생물학, 생태학, 보존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회생물학 이론은 인간 행동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으며, 생물 다양성 보존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전 세계적인 환경 운동에 큰 동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는 대중 과학 저술가로서 복잡한 과학 개념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여 과학적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