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히라쓰카 라이초(平塚 らいちょう히라쓰카 라이초일본어, 본명: 히라쓰카 하루(平塚 明히라쓰카 하루일본어))는 1886년 2월 10일 도쿄에서 태어나 1971년 5월 24일 사망한 일본의 작가, 언론인, 정치 활동가, 아나키스트이자 일본 여성주의의 선구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 해방 운동과 평화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11년 일본 최초의 여성 문학 잡지인 《청조》(青鞜세이토일본어, Bluestocking)를 창간하며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元始、女性は太陽であった겐시, 조세이와 다이요 데 앗타일본어)라는 상징적인 문구로 여성의 정신적 독립을 주장했다. 이 문구는 신토의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여성들이 잃어버린 정신적 독립성을 동시에 언급하며, 이후 여성 권리 획득 운동의 상징적인 말이 되었다. 《청조》는 초기에는 문학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여성 성욕, 정조, 낙태 등 여성 문제에 대한 솔직한 논의를 포함하며 여성 운동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녀는 엘렌 케이,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젠 불교 등 다양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개인주의를 강조했다. 1920년에는 이치카와 후사에와 함께 신부인협회를 설립하여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위한 일본 최초의 여성 운동 단체로서 활동했다. 이 단체의 노력으로 1900년에 제정되어 여성의 정치 단체 가입 및 정치 집회 참여를 금지했던 치안경찰법 제5조가 1922년에 폐지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반전 운동과 평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63년에는 신일본부인회를 설립하는 등 말년까지 여성 권리와 평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의 삶은 모리타 소헤이와의 동반 자살 미수 사건, 오쿠무라 히로시와의 사실혼 관계 등 여러 사회적 논란을 낳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사회의 관습에 대한 그녀의 비순응적인 도전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20세기 초 일본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자 영향력 있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녀의 후기 조직인 신일본부인회는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히라쓰카 라이초의 생애는 일본 근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여성의 권리와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한 한 개인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다양한 사건과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는 그녀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2.1. 출생 및 유년 시절
히라쓰카 라이초는 본명 히라쓰카 하루(平塚 明히라쓰카 하루일본어)로 1886년 2월 10일, 일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도테산반초(현재 도쿄도 지요다구 고반초)에서 3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이지 시대 정부의 고위 관료인 히라쓰카 사다지로였으며, 어머니 히라쓰카 쓰야(光沢쓰야일본어)의 부모는 도쿠가와 고산쿄 중 하나인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어의(御医) 집안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부모님은 교육열이 높았고, 라이초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선천적으로 성대가 약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체질이었다.
1887년부터 1년 반 동안 아버지의 유럽과 미국 시찰로 인해 라이초는 서구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892년 후지미 심상고등소학교(현 지요다구립 후지미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아버지는 기존의 서구식 가풍을 버리고 국수주의적인 가정 교육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로쿠메이칸 시대의 종말과도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1894년 히라쓰카 가족은 혼고구 고마고메 아케보노초(현 분쿄구 혼코마고메)로 이사했고, 라이초는 혼고구 공립 세이시 심상소학교(현 분쿄구립 세이시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2.2. 학창 시절 및 사상적 영향

1898년 세이시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시 국수주의 교육의 모델 학교였던 도쿄 여자고등사범학교 부속 고등여학교(현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곳의 양처현모주의 교육에 불만을 품고 급우들과 '해적조'를 결성하여 수신(도덕) 수업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1903년에는 "여성을 인간으로서, 부인으로서, 국민으로서 교육한다"는 교육 방침에 매료되어 일본여자대학 가사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는 "여성에게는 여자 학교 이상의 학문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라이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가주의적 교육이 강화되었고, 라이초는 오차노미즈 시절과 같은 사상을 대학에서도 발견하자 심한 환멸을 느꼈다. 이 무렵부터 자신의 갈등 이유를 찾기 위해 종교 서적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젠의 존재를 알게 되어 닛포리에 있는 젠 도장 '료보안'(両忘庵료보안일본어)(現 인간젠 택목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젠의 공안 수행을 통해 견성(見性)을 허락받고 깨달음을 얻은 증명으로 혜훈(慧薫) 선자(禪子)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1906년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료보안에서 젠 수행을 계속하며 니쇼가쿠샤(二松学舎니쇼가쿠샤일본어)(현 니쇼가쿠샤 대학)와 여자영학숙(女子英学塾조시 에이가쿠주쿠일본어)(현 쓰다주쿠 대학)에서 한문과 영어를 배웠고, 1907년에는 성미고등영어여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미고등영어여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처음으로 문학에 접하며 문학에 눈을 떴다. 도쿄 제국대학 출신의 신임 교사 이쿠타 초코에게 사사하며, 이쿠타와 모리타 소헤이가 주최하는 과외 문학 강좌 '규슈 문학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쿠타의 권유로 처녀 소설 '사랑의 말일'을 완성했고, 이를 읽은 모리타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그녀는 엘렌 케이의 저작 일부를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개인주의적 여주인공 노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바뤼흐 스피노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G. W. F. 헤겔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2.3. 《청조》 창간과 '여성은 태양이었다'

히라쓰카 라이초는 1911년 일본 최초의 여성 문학 잡지인 《청조》(青鞜세이토일본어, Bluestocking)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8세기 영국 여성 살롱인 블루스타킹스 소사이어티와 지적인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인 블루스타킹에서 이름을 따왔다. 잡지 창간 자금은 어머니가 딸의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사용했다. 그녀는 동창생들과 동년배 여성들을 중심으로 청조사를 설립하고, 주로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청조》의 표지는 나가누마 지에(후의 다카무라 지에코)가 그렸으며, 요사노 아키코는 "산이 움직이는 날이 온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담긴 시 '소조로고토'를 기고했다. 라이초는 창간사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 《청조》 발간에 즈음하여'를 쓰면서 처음으로 '라이초'(らいてう라이초일본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이 필명은 염원했던 자살 미수 사건 이후 잠시 머물렀던 나가노현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새 '뇌조'(雷鳥라이초일본어)에서 따온 것으로, '고독의 새', '겨울 산의 새'로도 불리던 뇌조의 이미지는 그녀의 당시 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1911년 9월 《청조》가 창간되자 남녀 양쪽에서 극단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여성 독자들로부터는 편지가 쇄도했고, 심지어 히라쓰카의 집을 찾아오는 독자들도 있었다. 반면 남성 독자들이나 신문들은 《청조》를 조롱하는 기사를 썼고, 때로는 히라쓰카의 집에 돌을 던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가네코 지쿠스이가 일본에 엘렌 케이를 처음으로 소개했고, 케이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라이초는 이후 "케이의 사상이 나의 사고방식과 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
잡지는 초기에는 문학에 중점을 두었으나, 몇 년 안에 여성의 성, 순결, 낙태 등 여성 문제에 대한 솔직한 논의를 포함하여 여성 문제로 초점을 옮겼다. 요사노 아키코와 같은 저명한 시인이자 여성 권리 옹호자들도 기고가로 참여했다. 일본의 주류 언론은 라이초와 동지들이 명성을 얻으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이 퍼뜨린 그들의 연애사와 비순응주의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는 대중의 여론을 잡지에 불리하게 만들었고, 라이초는 자신의 이상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글들을 여러 차례 발표하게 했다. 1913년 4월에 발표한 에세이 '세상의 부인들에게'에서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인 양처현모를 거부하며 "얼마나 많은 여성이 경제적 안정을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하고 한 남자의 평생 하인이자 매춘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순응주의는 《청조》를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와도 대립하게 만들었으며, "공공 질서를 교란하거나 일본과 양립할 수 없는 서구 여성 사상을 도입하는" 여성 잡지에 대한 검열로 이어졌다.
1913년 2월호 부록에 후쿠다 히데코가 "공산제가 이루어지면 연애도 결혼도 자연스럽게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썼다가 "안녕 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자, 라이초는 아버지의 분노를 사 집을 나와 독립할 준비를 시작했다. 1913년 5월에 출간된 라이초의 첫 평론집 《원창으로부터》(円窓より엔마도 요리일본어, Marumado yori) 역시 출간 직후 "가족 제도를 파괴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 책은 1913년 6월 《창문이 있는 곳에서》(窓ある窓にて마도 아루 마도 니테일본어)로 제목을 바꿔 다시 출간되었다.
2.4. 동반자 관계와 사회적 논란

히라쓰카 라이초는 22세이던 1908년 3월 21일, 모리타 소헤이와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의 오가시라 고개 부근 산중에서 눈 속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가 경찰에 구조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시오바라 사건' 또는 모리타 소헤이의 소설 《매연》에서 이름을 따 '매연 사건'으로 불리며, 당시 신문들은 "자연주의 고조, 신사 숙녀의 정사 미수, 정부는 문학사, 소설가, 정부는 여자 대학 졸업생"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하며 사회적 스캔들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라이초는 일약 유명해졌고, 대중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일본여자대학의 벚나무회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나, 1992년에 복원되었다.
1912년 여름(26세), 라이초는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에서 자신보다 5살 어린 화가 지망생 오쿠무라 히로시(奥村博史오쿠무라 히로시일본어)를 만났다. 《청조》사를 둘러싼 소동 끝에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夫婦別姓후후벳세이일본어)로 동거를 시작했다. 라이초는 이 사실을 《청조》의 편집 후기에서 독자들에게 알렸고, 동거 직후인 1914년 2월호에는 '독립하는 데 있어서 부모님께'라는 사적인 편지를 《청조》 지면에 발표했다. 그녀는 결혼 제도에 반발하여 혼인 신고를 하지 않고, 오쿠무라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아 사생아로 자신의 호적에 등록했다. 이는 당시의 결혼 제도와 '가(家)' 제도를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장남의 병역을 앞두고 군대 내에서 사생아로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쿠무라 가문의 호적에 입적하며 정식으로 결혼했다.
오쿠무라는 병약했고 그림 판매도 부진하여, 라이초의 원고 수입이 가계의 주 수입원이 되는 등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가 모성 보호 논쟁에서 출산 및 육아에 대한 국가 지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상대 여성보다 연하의 연인'을 '제비'라고 부르는 것은 오쿠무라가 라이초와 헤어지기로 결심했을 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라이초가 《청조》 지면에 발표하면서 일종의 유행어가 된 데서 유래한다. 그 구절은 "조용한 물새들이 다정하게 놀고 있는 곳에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평화를 어지럽혔다. 어린 제비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날아간다"는 내용이었다.
1915년 1월호부터는 이토 노에에게 《청조》의 편집권을 넘겼다.
2.5. 여성 운동 활동


《청조》의 편집권을 이토 노에에게 양도한 후, 히라쓰카 라이초는 오쿠무라 히로시의 병간호와 육아에 전념했다. 그러나 1918년 요사노 아키코가 《부인공론》 3월호에 '여성의 철저한 독립'(국가에 모성 보호를 요구하는 것은 의뢰주의에 불과하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자, 라이초는 이에 반박하며 같은 잡지 5월호에 '모성 보호의 주장은 의뢰주의인가'(연애의 자유와 모성의 확립이 있어야만 여성의 자유와 독립이 의미를 갖는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라이초는 엘렌 케이의 모성 우선 주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상황에서 완전한 독립은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여성 노동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할 때, 여성의 국가적, 사회적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 지원을 통한 모성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야마카와 기쿠에가 9월호에 '요사노, 히라쓰카 두 씨의 논쟁'(진정한 모성 보호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가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논쟁에 가세했고, 야마다 와카 등도 참여하면서 이는 '모성 보호 논쟁'(母性保護論争보세이 호고 론소일본어)이라는 큰 사회적 현상으로 발전했다. 이 논쟁 속에서 라이초는 1919년 《부인공론》 1월호에 '현대 가정부인의 고민'(가정부인에게도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마땅하며, 그 권리가 있어야 한다)을 발표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아이치현의 섬유 공장을 시찰하고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귀국길에 신부인협회 설립 구상을 굳혔다.
신부인협회는 1919년 11월 24일, 이치카와 후사에, 오쿠 무메오 등의 협력으로 라이초에 의해 설립이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여성 참정권 운동'과 '모성 보호'를 요구하며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확립하기 위한 일본 최초의 여성 운동 단체였다. 협회 기관지 《여성동맹》에서도 라이초가 창간사를 집필했다. 신부인협회는 '중의원 의원 선거법 개정', '치안경찰법 제5조 수정', '성병 환자에 대한 결혼 제한 및 이혼 청구' 등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특히 여성의 집회·결사 권리 획득을 위한 치안경찰법 제5조 개정 운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1921년 라이초는 과로와 이치카와 후사에와의 대립으로 협회 운영에서 물러났다. 또한 이토 노에, 사카이 마가라, 야마카와 기쿠에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적란회를 결성하고 《신부인협회와 적란회》(太陽타이요일본어 1921년 7월호)를 시작으로 신부인협회와 라이초를 공격했다. 라이초가 떠나고 이치카와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신부인협회는 사카모토 마코토와 오쿠 무메오 등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운동을 계속하여 1922년 치안경찰법 제5조 2항 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침체되었고, 이듬해 1923년 말 해산되었다. 라이초는 이후 문필 생활에 들어섰다.
한편, 라이초는 1917년에 발표한 원고 '피임의 가부를 논함'에서 우생학을 긍정적으로 다루며 산아 제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녀는 성병의 확산이 일본 '인종'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성병 환자의 결혼 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그녀의 경력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점으로 남아있는데, 이는 그녀가 우생학 운동과 자신을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시기에는 소비 조합 운동에도 힘썼으며, 이는 사회 개혁의 주요 목표를 위해 가장 많은 사람을 포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시기 그녀는 다카무레 이쓰에 등의 아나키스트 계열 잡지 《부인전선》에도 참여했다.
2.6. 전후 활동과 평화 운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히라쓰카 라이초는 일본공산당의 지지자로서 활동하며 여성 운동과 함께 반전 운동 및 평화 운동을 추진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다음 날, 그녀는 작가이자 활동가인 노가미 야에코와 일본 부인 운동가 3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에게 일본이 중립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국가로 남을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1951년 12월에는 대일 평화 조약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여 '재무장 반대 부인 위원회'를 결성했다. 1953년 4월 5일에는 일본부인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국제민주부인연맹 부회장에 취임했다. 1955년에는 세계평화어필7인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이 되었다. 1960년에는 연명으로 '완전 군축 지지, 안보 조약 폐기를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10월 19일, 히라쓰카 라이초는 이와사키 치히로, 노가미 야에코, 하니 세츠코, 기시 데루코, 구와사와 요코, 구시다 후키, 후카오 스마코, 쓰보이 사카에 등 32명의 여성들과 함께 신일본부인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오늘날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64년 2월 18일, 1941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던 남편 오쿠무라 히로시가 도쿄도 세타가야구 공립학교공제조합 간토중앙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1970년 6월에도 이치카와 후사에 등과 함께 미일안전보장조약 폐기 어필을 발표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반전 운동을 전개하여, 1966년 '베트남 대화회'를 결성했고, 1970년 7월에는 '베트남 모자 보건 센터'를 설립했다. 그녀는 "여성들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천재이다"라고 선언하며 고고한 행동가로서 평생 여성 운동과 반전·평화 운동에 헌신했다.
또한 1951년, 라이초는 채식주의자 명단에 추가되었는데, 그녀는 36~37세 무렵 극심한 두통과 구토로 고통받다가 이시즈카 사겐의 식양법과 니키 겐조의 현미식에 대해 읽고 이를 실천하면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후 약 30년 가까이 채식주의를 실천했다.
만년에는 자서전 집필에 착수했으나, 1970년 담낭암 및 담관암을 앓아 도쿄근로자의료회 요요기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후에도 구술 필기로 집필을 계속했지만, 1971년 5월 24일 병원에서 향년 86세(만 85세)로 영면했다. 법명은 묘온지명(明媼之命)이다. 그녀의 기일인 5월 24일은 필명을 따 '라이초 기'(らいてう忌라이초 기일본어)라고 불린다. 13세까지 동거했던 손자에 따르면, 육친의 시선으로 본 그녀는 세간의 '라이초'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손자는 그녀가 "신장은 약 145 cm로 또래에 비해 작고, 목소리가 작으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3. 사상과 철학
히라쓰카 라이초의 사상과 철학은 개인주의, 젠 불교, 그리고 아나키즘적 경향을 기반으로 하며, 서구 철학과 일본 전통 사상을 융합한 독자적인 관점을 형성했다.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재학 시절부터 바뤼흐 스피노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G. W. F. 헤겔 등 당시 유럽 철학의 흐름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특히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라의 개인주의적 태도에 크게 공감하며, 여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사상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그녀는 젠 불교의 독실한 수행자였다. 1905년 젠을 접한 후 료보안(현 인간젠 택목도장)에서 수행하며 견성(見性)을 경험하고 '혜훈 선자'라는 도호를 받았다. 젠 수행은 그녀의 내면적 갈등을 해소하고 정신적 독립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대표적인 선언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이러한 정신적 독립과 자아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철학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라이초의 사상에서 엘렌 케이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케이의 저작을 번역하며 모성 보호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했다. 라이초는 여성의 성적 자유와 모성의 확립이 진정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모성 보호 논쟁에서 국가의 모성 지원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비순응주의적 태도와 기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그녀의 아나키즘적 경향을 드러낸다. 《청조》가 문학에서 여성 문제로, 나아가 '아나키스트 논쟁지'로 변화한 것은 그녀의 사상적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1930년대 소비 조합 운동에 참여한 것 또한 사회 개혁을 위한 대중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녀의 사회 철학을 보여준다. 전후 평화 운동과 반전 운동에 헌신한 것은 그녀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신념을 반영한다.
4. 저술 활동
히라쓰카 라이초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폭넓은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이는 그녀의 사상과 여성 운동에 대한 헌신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남긴 주요 저서, 논문, 번역 작품 및 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4.1. 단독 저서
- 《원창으로부터》(円窓より엔마도 요리일본어, Marumado yori, 1913년 5월): 라이초의 첫 평론집. 출간 직후 "가족 제도를 파괴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 《창문이 있는 곳에서》(窓ある窓にて마도 아루 마도 니테일본어, Aru Mado nite, 1913년 6월): 《원창으로부터》가 발매 금지된 후 제목을 바꿔 재출간된 책.
- 《현대와 부인의 생활》(現代と婦人の生活겐다이 토 후진 노 세이카츠일본어, Gendai to Fujin no Seikatsu, 1914년 11월)
- 《라이초 제3문집 현대의 남녀에게》(らいてう第三文集 現代の男女へ라이초 다이산 분슈 겐다이 노 단조 에일본어, Raichō Daisan Bunshu: Gendai no Danjo e, 1917년 12월)
- 《부인과 아이의 권리》(婦人と子供の権利후진 토 고도모 노 겐리일본어, Fujin to Kodomo no Kenri, 1919년 12월)
- 《여성의 말》(女性の言葉조세이 노 고토바일본어, Josei no Kotoba, 1926년 9월)
- 《라이초 수필집 구름・풀・사람》(らいてう随筆集 雲・草・人라이초 즈이히츠슈 구모 구사 히토일본어, Raichō Zuihitsu Shu: Kumo Kusa Hito, 1933년 7월)
- 《어머니의 말》(母の言葉하하 노 고토바일본어, Haha no Kotoba, 1937년 2월)
- 《내가 걸어온 길》(わたくしの歩いた道와타쿠시 노 아루이타 미치일본어, Watakushi no aruita michi, 1955년 3월)
-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히라쓰카 라이초 자서전》(元始、女性は太陽であった 平塚らいてう自伝겐시, 조세이와 다이요 데 앗타 히라쓰카 라이초 지덴일본어, Genshi, josei wa taiyō de atta Hiratsuka Raichō Jiden, 1971년 8월~1973년 11월): 여러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자서전.
- 《오히려 여인의 성을 예배하라 히라쓰카 라이초 신성도덕론집》(むしろ女人の性を礼拝せよ 平塚らいてう新性道徳論集무시로 뇨닌 노 세이 오 레이하이세요 히라쓰카 라이초 신세이도토쿠 론슈일본어, Mushiro Jonin no Sei o Reihai seyo: Hiratsuka Raichō Shin Seidōtoku Ronshū, 1977년 7월)
- 《황금빛 자화상 히라쓰카 라이초 말의 꽃다발》(金いろの自画像 : 平塚らいてうことばの花束킨이로 노 지가조: 히라쓰카 라이초 고토바 노 하나타바일본어, Kiniro no Jiga zo: Hiratsuka Raichō Kotoba no Hanataba, 2005년 5월)
4.2. 공저
- 《모자수필》(母子随筆보시 즈이히쓰일본어, Boshi Zuihitsu, 1948년 3월): 딸 히라쓰카 아케미와 공저.
4.3. 감수
- 《우리 어머니라면 평화를 비는 어머니들의 수기》(われら母なれば 平和を祈る母たちの手記와레라 하하 나레바 헤이와 오 이노루 하하타치 노 슈키일본어, Warera Haha Nareba: Heiwa o Inoru Haha-tachi no Shuki, 1951년 12월): 구시다 후키와 공동 감수.
4.4. 번역
- 엘렌 케이, 《모성의 부흥》(母性の復興보세이 노 훗코일본어, Bosei no fukkō, 1919년 5월)
- 엘렌 케이, 《사랑과 결혼》(愛と結婚아이 토 겟콘일본어, Ai to kekkon)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婦人の隷属후진 노 레이조쿠일본어, Fujin no Reizoku, 1929년 11월)
4.5. 작품집 및 평론집
- 《히라쓰카 라이초 저작집》(平塚らいてう著作集히라쓰카 라이초 초사쿠슈일본어, 1983년~1984년): 전 8권으로 구성된 저작집.
- 제1권: 《청조》 관련 글,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등.
- 제2권: '모성의 주장' 관련 글, '개인으로서의 생활과 성으로서의 생활 간의 쟁투' 등.
- 제3권: '사회 개조에 대한 부인의 사명', '여공국 일본' 등.
- 제4권: '오히려 성을 예배하라', '생명에서 외면당하는 현대 여성' 등.
- 제5권: '부인 전선에 참가하여', '소비 조합에 대하여' 등.
- 제6권: '딸에게 어머니의 유산을 이야기하다', '군인관' 등.
- 제7권: '나는 영원히 실망하지 않는다', '비무장국 일본 여성의 강화 문제에 대한 희망 요항' 등.
- 보권: 사진, 서한, 연보, 저작 목록.
- 《히라쓰카 라이초 평론집》(平塚らいてう評論集히라쓰카 라이초 효론슈일본어, 1987년 5월):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세상의 부인들에게', '새로운 여자', '모성 보호 문제에 대해 다시 요사노 아키코 씨에게 보내다' 등 주요 평론 수록.
4.6. 논문
- '쇼와 부인 해방 운동사 상/하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기까지'(1951년)
- '인류의 평화를 향한 의지'(1952년)
- '미국 상원의원에게 보낸 재무장 반대 어필에 대하여'(1952년)
- '평화에 기도하다'(1952년)
- '아시아의 평화는 부인의 손으로 - 이덕전 씨를 맞이하며'(1955년)
- '주부 해방론'(1955년)
- '서민 속에 태어나는 힘'(1956년)
- '《청조사》 시절'(좌담회, 1956년)
- '히라쓰카 라이초 전후 일기(1953-58)'(2019년)
5. 가족 관계
히라쓰카 라이초의 가족 관계는 그녀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녀의 비순응적인 결혼관과 모성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관계 | 이름 | 생몰년도 | 설명 |
---|---|---|---|
아버지 | 히라쓰카 사다지로 (平塚定二郎히라쓰카 사다지로일본어) | 1856-1936 | 기슈번 출신 사무라이.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수학. 참사원 서기관을 거쳐 회계검사원에 근무. 1887년부터 1년 반 동안 유럽과 미국을 시찰. 이후 제일고등학교의 독일어 강사를 겸임. |
어머니 | 히라쓰카 쓰야 (光沢쓰야일본어) | 불명 | 부모가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어의(御医) 집안에 양자로 입적됨. |
남편 | 오쿠무라 히로시 (奥村博史오쿠무라 히로시일본어) | 1889-1964 | 화가, 무대 예술가, 반지 제작자.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출신. 18세에 상경하여 미술 학교에서 라이초를 만남. 신극 운동에 참여. 1914년 라이초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했으며, 아들 아츠후미의 병역 문제로 1941년에 정식으로 결혼.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 |
장녀 | 히라쓰카 아케미 (曙生아케미일본어) | 1915-1993 | 라이초가 모리타 소헤이와의 자살 미수 사건을 다룬 연재작 '고개'를 집필하던 중 태어남. 오미 학원 직원이었던 사회학자 쓰키조에 쇼지와 결혼. 어머니 라이초와 공저로 《모자수필》을 출간. 재생 불량성 빈혈과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 |
장남 | 오쿠무라 아츠후미 (奥村敦史오쿠무라 아츠후미일본어) | 1917-2015 |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기계공학과 교수. 《재료 역학》, 《메카닉스 입문》 등 다수의 저서 및 편저서가 있음. 97세에 노환으로 사망. |
손자 | 오쿠무라 나오후미 (奥村直史오쿠무라 나오후미일본어) | 1945- | 오쿠무라 아츠후미의 아들.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 심리학 전공 졸업. 병원 심리 치료사 근무 후 도요가쿠엔 대학 비상근 강사. 《히라쓰카 라이초 - 손자가 말하는 본모습》(2011), 《히라쓰카 라이초 그 사상과 손자가 본 본모습》(2021) 등 저술. |
손녀 | 쓰키조에 미카 (築添美可쓰키조에 미카일본어) | 불명 | 히라쓰카 아케미의 딸. 1970년대 니치게키 뮤직홀에서 댄서로 활동 (예명: 호나미 미카). |
손녀 | 쓰키조에 미도 (築添美土쓰키조에 미도일본어) | 불명 | 히라쓰카 아케미의 딸. |
라이초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와 '가(家)' 제도를 부정하고, 자녀들을 자신의 호적에 사생아로 등록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당시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의 개인주의 사상과 여성의 독립을 향한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편 오쿠무라 히로시의 병약함과 경제적 어려움은 라이초가 글쓰기와 강연 활동을 통해 가계를 책임지게 했으며, 이는 그녀가 모성 보호 논쟁에서 국가의 모성 지원을 주장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히라쓰카 라이초는 20세기 초 일본 여성 운동의 선구자이자 핵심 인물로서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주로 잡지 《청조》의 발행인으로서의 역할로 기억되지만, 그 외에도 여성의 권리와 사회 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사상과 활동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라는 선언은 여성들에게 잃어버린 자존감과 정신적 독립성을 되찾을 것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청조》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이슈를 논의하는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했다. 그녀의 추종자들 중에는 한국의 선구적인 여성주의 작가 나혜석 (《청조》가 전성기일 때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다)과 아나키스트이자 사회 비평가인 이토 노에 등이 있었으며, 이토 노에의 《청조》 가입은 일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히라쓰카 라이초의 활동은 치안경찰법 제5조 개정(1922년)을 통해 여성의 정치 집회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여성 참정권은 그녀의 노력만으로 달성되지 못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GHQ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그녀는 그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는 패전의 고통 속에서 여성 참정권이 "타력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표하기도 했다.
그녀의 경력은 여러 논란을 동반하기도 했다. 모리타 소헤이와의 동반 자살 미수 사건, 오쿠무라 히로시와의 사실혼 관계 등은 당시 보수적인 사회에서 큰 스캔들이 되었으며, 언론은 그녀의 비순응적인 삶을 과장하여 보도했다. 또한 1917년 '피임의 가부를 논함'이라는 글에서 우생학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며 성병 환자의 결혼 제한을 주장한 것은 그녀의 경력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지점으로 남아있다. 이는 성병 확산이 일본 '인종'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기반한 것이었다.
전후 평화 운동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높이 평가된다. 그녀는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가서 일본의 중립과 평화주의를 주장했으며,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고 재무장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3년 창립한 신일본부인회는 오늘날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그녀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의 삶과 업적은 후대에도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 2005년 그녀의 모교인 일본여자대학은 졸업 100주년을 기념하여 '히라쓰카 라이초 상'을 제정했다. 2014년 2월 10일에는 구글 두들이 그녀의 128번째 생일을 기념하기도 했다. 그녀의 손자인 오쿠무라 나오후미는 그녀가 "신장은 약 145 cm로 또래에 비해 작고, 목소리가 작으며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세간에 알려진 '고고한 행동가' 이미지와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7. 관련 항목
- 아나키즘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 엘렌 케이
- 요사노 아키코
- 오쿠무라 히로시
- 오쿠무라 아츠후미
- 이와사키 치히로
- 이치카와 후사에
- 이토 노에
- 인간젠
- 인형의 집 (희곡)
- 일본공산당
- 일본의 여성주의
- 일본의 여성 참정권
- 일본여자대학
- 좋은 아내 현명한 어머니
- 존 스튜어트 밀
- 젠 불교
- 치안경찰법
- 청조 (잡지)
- 청조사
- 츠다주쿠 대학
- 한국 전쟁
- 헨리크 입센
- 히라쓰카 사다지로
- 나혜석
- 노가미 야에코
- 딘 애치슨
- 모리타 소헤이
- 모성 보호 논쟁
- 바뤼흐 스피노자
- 베트남 전쟁
- 블루스타킹
- 블루스타킹스 소사이어티
- 세계 대공황
- 세계평화어필7인위원회
- 신부인협회
- 신일본부인회
- 오쿠 무메오
-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우생학
- 와세다대학
- 야마카와 기쿠에
- 야마다 와카
- 양처현모
- 구글 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