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 시절 및 배경
파울루 푸트르는 1966년 2월 28일 포르투갈 세투발현 몬티조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 스포르팅 CP의 유스 시스템에 합류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17세가 되던 1983-84 시즌에 스포르팅 CP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당시 그는 구단 회장 주앙 호샤에게 급여 인상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한 시즌 만에 FC 포르투로 이적했다. 이 이적 과정에서 베테랑 선수인 자이므 파셰쿠와 안토니우 소자가 스포르팅 CP로 이동하는 맞교환이 이루어졌다.
2. 클럽 경력
파울루 푸트르는 프로 선수로서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 FC 포르투, SL 벤피카,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프랑스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이탈리아의 레지아나, AC 밀란, 잉글랜드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일본의 요코하마 플뤼겔스 등 다양한 클럽에서 활약하며 화려하면서도 부상으로 얼룩진 경력을 보냈다.
2.1. 스포르팅 CP
푸트르는 1983-84 시즌, 17세의 나이로 스포르팅 CP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스포르팅 CP의 유스 시스템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다. 그러나 구단 회장과의 급여 인상 문제로 인해 단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나 FC 포르투로 이적하게 되었다.
2.2. FC 포르투

FC 포르투로 이적한 파울루 푸트르는 이후 몇 년간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포르투에서 두 차례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1984-85, 1985-86 시즌)을 경험했다. 특히 1986-87 시즌 유러피언컵에서는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준결승전에서 디나모 키예프를 상대로 1차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결승 진출을 도왔고,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는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2-1 승리와 우승을 이끌었다. 1987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뤼트 휠리트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개인적인 영예도 안았다. 당시 푸트르 본인은 수상을 확신했으나, 휠리트가 106표, 푸트르가 91표를 얻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자신의 팀 선수인 휠리트의 수상을 위해 표를 매수하는 등의 부정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과 비난이 일기도 했다.
2.3.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러피언컵 우승 이후, 푸트르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스페인 무대에 진출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65.00 만 EUR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빠르게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로 자리매김했지만, 타고난 신체적 약점과 잦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1990년대 내내 고통받았다.
1991-92 시즌에는 27골로 피치치 트로피를 수상한 마놀로에게 수많은 어시스트를 제공했으며,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0 승리에 기여하는 골을 직접 기록하기도 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는 팀 주장을 맡았다. 1987-88 시즌 종료 후 AS 로마로의 이적에 개인적으로 합의했으나, 구단 간 합의가 불발되어 이적이 무산되기도 했다.
2.4. 후기 경력
1993년 1월, 푸트르는 FC 포르투와 스포르팅 CP의 라이벌 팀인 SL 벤피카로 이적했다. 짧은 기간 동안 벤피카에 머물렀지만, 타사 드 포르투갈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보아비스타와의 결승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5-2 승리에 기여했다. 벤피카 팬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부상 문제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이후 그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한 시즌 계약을 맺고 입단하여 동료 루이 바루스와 함께 뛰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시간은 계속되는 부상과 드라간 스토이코비치와의 포지션 경쟁으로 인해 실망스러웠으며, 리그 8경기에서 단 2골에 그쳤다. 또한, 전년도에 발생한 승부 조작 문제가 불거지면서 알렌 복시치, 마르셀 드사이 등 주축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1993-94 시즌 중반에는 AC 밀란과 연결되기도 했으나, 결국 새로 승격한 세리에 A 팀인 레지아나로 이적했다. 1993년 11월 21일 크레모네세와의 데뷔전에서 그는 팀의 세리에 A 첫 승리를 안기는 기억에 남을 만한 개인 돌파 골을 기록하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후반전에 알레산드로 페드로니의 거친 태클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시즌 잔여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팀은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다음 시즌에도 푸트르는 12경기 출전에 4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이는 레지아나의 강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5-96 시즌에는 AC 밀란으로 이적했지만, 계속되는 부상과 다른 재능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팀에서 단 한 차례 출전에 그쳤다. 그는 시즌 마지막 경기인 크레모네세와의 홈 경기에서 로베르토 바조의 교체 선수로 출전했으며, 이 경기는 밀란의 7-1 승리로 끝나며 리그 우승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이 경기에서 푸트르가 공을 잡을 때마다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이탈리아에서의 시간을 마친 푸트르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1년 계약에 합의했다. 그는 등번호 10번을 받기 전까지 경기에 뛰는 것을 거부하는 일화로 유명하다. 웨스트햄에서도 부상으로 인해 9경기 출전에 그쳤다.
이후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복귀하여 1997-98 시즌에 10경기에 출전했다. 그의 프로 경력은 J1리그 클럽인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1998년 카를로스 렉사치 감독이 이끌던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합류하여 이고르 레디아코프 등과 함께 공격진을 이끌었다. J리그 데뷔 2경기 만인 5월 5일 산프레체 히로시마전에서 첫 골을 기록했으며, 5월 9일 아비스파 후쿠오카전, 재개 후 7월 25일 콘사도레 삿포로전에서 3경기 연속 골을 넣었다. 그러나 세컨드 스테이지 9월 26일 벨마레 히라츠카전 이후, 9월 28일 렉사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32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J리그에서는 13경기 3골을 기록했다. 1999년 12월 월드 사커에서 발표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수 100인'에서 공동 98위에 선정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파울루 푸트르는 12년 동안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서 총 41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 데뷔는 UEFA 유로 1984 예선의 일환으로 1983년 4월 27일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는 17세 204일에 불과했으며, 이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최연소 출전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푸트르는 198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포르투갈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그는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팀은 1-3으로 패하며 결국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No. | 날짜 | 장소 | 상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85년 1월 30일 | 이스타디우 조제 알발라드, 리스본, 포르투갈 | 루마니아 | 1-0 | 2-3 | 친선 경기 |
2 | 1989년 9월 20일 | 스타드 드 라 말라디에르, 뇌샤텔, 스위스 | 스위스 | 1-1 | 2-1 |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 |
3 | 1991년 1월 23일 | 올림픽 스타디움, 아테네, 그리스 | 그리스 | 2-1 | 2-3 | UEFA 유로 1992 예선 |
4 | 1991년 2월 9일 | 타알리 국립경기장, 타알리, 몰타 | 몰타 | 1-0 | 1-0 | UEFA 유로 1992 예선 |
5 | 1993년 4월 28일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포르투갈 | 스코틀랜드 | 3-0 | 5-0 |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
6 | 1993년 11월 10일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포르투갈 | 에스토니아 | 1-0 | 3-0 |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
4. 플레이 스타일
파울루 푸트르는 매우 재능 있고 창의적인 왼발잡이 윙어였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초기에 디에고 마라도나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특히 폭발적인 가속력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드리블 기술, 빠른 속도, 민첩성, 그리고 빠른 발은 그가 공을 가지고 있을 때 매우 빠르게 움직이며 여러 상대를 제칠 수 있게 했다.
푸트르는 시야와 활동량을 바탕으로 득점과 어시스트를 모두 해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이탈리아에서 활약할 당시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기용되기도 했다. 그는 왼발잡이였지만 양발을 모두 잘 사용했으며, 뛰어난 패스를 공급하는 찬스 메이커로도 알려져 있었다. 또한, 잘생긴 외모로 여성 팬들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여준 조숙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잦은 부상에 시달려 경력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경기력이 점점 더 기복을 보였고, 득점률이 저조해졌으며, 32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5. 은퇴 후 활동
선수 은퇴 후, 파울루 푸트르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단장으로 일했다. 이후에는 고향에서 부동산 개발업에 종사했다. 2011년 5월에는 스포르팅 CP 회장 선거에 디아스 페헤이라 팀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나, 당선에는 실패했다. 그는 또한 텔레비전 진행자로도 활동하며 TVI 24의 심야 토크쇼인 아 노이치 두 푸트르볼을 진행하기도 했다.
6. 개인사
파울루 푸트르의 막내아들인 파비우도 축구 선수였다. 미드필더였던 파비우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팀에서 뛰었으며, 포르투갈 U-17 대표팀에 소집되기도 했다. 그의 조카인 아르투르 푸트르도 FC 알베르카, FC 마이아, CD 아베스에서 프로 선수로 뛰었으나 큰 영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푸트르의 큰아들 파울루는 "프라이데이(Fr1day)"라는 록 밴드에서 활동했다.
7. 논란 및 평가
파울루 푸트르의 경력에는 몇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1987년 발롱도르 수상과 관련하여 그는 당시 수상을 확신했지만, 뤼트 휠리트에게 2위를 기록했다. 이후 언론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자신의 팀인 AC 밀란의 선수 휠리트에게 상을 주기 위해 투표를 매수하는 등 부정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었다.
또한, 2014년 11월 포르투갈 신문 레코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당시 회장이었던 헤수스 힐로부터 승부 조작 제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기면 보너스도 있었다"고 언급하며 승부 조작의 사실을 다시 한번 주장했으나, 본인은 경기에 뛰는 것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푸트르는 1999년 12월 월드 사커에서 발표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수 100인'에서 공동 98위에 선정되며 그의 뛰어난 재능과 업적을 인정받았다.
8. 통계
8.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국내 컵 | 리그 컵 | 유럽 대회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스포르팅 CP | 1983-84 | 프리메이라 디비장 | 21 | 3 | 5 | 0 | - | 3 | 0 | - | 29 | 3 | ||
포르투 | 1984-85 | 프리메이라 디비장 | 30 | 6 | 7 | 2 | - | 2 | 1 | 4 | 1 | 43 | 10 | |
1985-86 | 프리메이라 디비장 | 26 | 7 | 4 | 1 | - | 3 | 0 | 2 | 0 | 35 | 8 | ||
1986-87 | 프리메이라 디비장 | 25 | 10 | 4 | 1 | - | 9 | 2 | 2 | 2 | 40 | 15 | ||
합계 | 81 | 23 | 15 | 4 | - | 14 | 3 | 8 | 3 | 118 | 33 |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87-88 | 라리가 | 35 | 8 | 4 | 1 | - | - | - | 39 | 9 | |||
1988-89 | 라리가 | 28 | 5 | 7 | 0 | - | 2 | 1 | - | 37 | 6 | |||
1989-90 | 라리가 | 27 | 10 | 2 | 0 | - | 2 | 0 | - | 31 | 10 | |||
1990-91 | 라리가 | 26 | 3 | 6 | 1 | - | 2 | 0 | - | 34 | 4 | |||
1991-92 | 라리가 | 31 | 6 | 6 | 5 | - | 6 | 5 | 0 | 0 | 43 | 16 | ||
1992-93 | 라리가 | 16 | 6 | 0 | 0 | - | 3 | 1 | 2 | 0 | 21 | 7 | ||
합계 | 163 | 38 | 25 | 7 | - | 15 | 7 | 2 | 0 | 205 | 52 | |||
벤피카 | 1992-93 | 프리메이라 디비장 | 11 | 3 | 2 | 2 | - | 0 | 0 | - | 13 | 5 | ||
마르세유 | 1993-94 | 리그 1 | 8 | 2 | 0 | 0 | 0 | 0 | - | - | 8 | 2 | ||
레지아나 | 1993-94 | 세리에 A | 1 | 1 | 0 | 0 | - | - | - | 1 | 1 | |||
1994-95 | 세리에 A | 12 | 4 | 1 | 0 | - | - | - | 13 | 4 | ||||
합계 | 13 | 5 | 1 | 0 | - | - | - | 14 | 5 | |||||
AC 밀란 | 1995-96 | 세리에 A | 1 | 0 | 0 | 0 | - | 0 | 0 | - | 1 | 0 |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1996-97 | 프리미어리그 | 9 | 0 | 0 | 0 | 0 | 0 | - | - | 9 | 0 |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97-98 | 라리가 | 10 | 0 | 0 | 0 | - | 0 | 0 | - | 10 | 0 | ||
요코하마 플뤼겔스 | 1998 | J리그 | 13 | 3 | 0 | 0 | 3 | 0 | - | - | 16 | 3 | ||
커리어 합계 | 330 | 77 | 48 | 12 | 3 | 0 | 32 | 10 | 10 | 3 | 423 | 103 |
8.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포르투갈 | 1983 | 1 | 0 |
1984 | 4 | 0 | |
1985 | 4 | 1 | |
1986 | 4 | 0 | |
1987 | 2 | 0 | |
1988 | 1 | 0 | |
1989 | 4 | 1 | |
1990 | 1 | 0 | |
1991 | 8 | 2 | |
1992 | 3 | 0 | |
1993 | 8 | 2 | |
1994 | 0 | 0 | |
1995 | 1 | 0 | |
합계 | 41 | 6 |
9. 수상 경력
9.1. 클럽
포르투
- 프리메이라 리가: 1984-85, 1985-86
- 수페르타사 칸디두 드 올리베이라: 1984, 1986
- 유러피언컵: 1986-8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코파 델 레이: 1990-91, 1991-92
벤피카
- 타사 드 포르투갈: 1992-93
AC 밀란
- 세리에 A: 1995-96
9.2. 개인
- 포르투갈 올해의 선수: 1986, 1987
- 발롱도르: 1987년 2위
- 월드 사커: 20세기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