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력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고교 시절부터 프로 입단, 주니치 드래곤즈와 롯데 오리온즈에서의 선수 생활, 그리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을 거쳐 은퇴 후 해설가 및 교육자로 활동하며 일본 야구계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1.1. 프로 입단 전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오사카부 다이토시 출신으로, 다이토시립 시조 중학교 3학년 때 부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 후보였던 대체대 부속 중학교와 대결하며 가가와 신유키를 만났다. 원래 덴리 고교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나니와 고등학교 측의 적극적인 권유와 "3년 후에 강한 팀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 나니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가가와 신유키와 배터리를 이루어 침체되어 있던 야구부를 부활시켰다. 나중에 오쿠보 히로모토와의 대담에서, 나라현 내 강팀 감독인 친척이 덴리 고교 입학을 반대했고, 나니와 고등학교 OB인 다카다 시게루의 권유로 나니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회고했다.
고교 시절 총 3차례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2학년 봄 선발 대회에서는 다카마쓰 상업 고등학교에 0대3으로 패하며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3학년 봄 선발 대회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여 미노시마 고등학교에 7대8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3학년 여름 선수권 대회에서는 오사카부 예선 결승에서 전년도 여름 우승팀이자 4시즌 연속 고시엔 진출을 노리던 PL가쿠엔 고등학교를 꺾고 고시엔 대표가 되었다. 제6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나중에 주니치에서 팀 동료가 되는 아게오 고등학교의 니무라 도루로부터 홈런을 치기도 했으나, 준결승에서 이케다 고등학교에 0대2로 패하며 4강에 머물렀고, 봄·여름 연속 결승 진출은 불발되었다.
프로 동기인 오카다 아키노부와 기다 이사무에게 지명이 집중되는 가운데, 1979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가 단독으로 1순위 지명했다. 담당 스카우트는 호모토 히데아키였다. 계약금은 3300.00 만 JPY, 연봉은 280.00 만 JPY였다.
1.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979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당시 등번호로 "17", "21", "24" 중 선택하라는 제안을 받았고, 날씬한 체형에 어울리는 슬림한 숫자의 "17"을 선택했다.
1980년부터 1군에 등판하여 2승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개막 1군에 합류하여 중간 계투로 1군에 정착했다. 1982년에는 스즈키 다카마사, 고마쓰 다쓰오의 뒤를 이어 구원 에이스가 되어 17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주니치 감독이었던 곤도 사다오는 우시지마가 구원 투수로서 초일류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투수 코치였던 곤도 히로시도 구원 투수로서의 적합성을 언급했다. 같은 해 세이부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등판했다. 3차전에서는 8회부터 스즈키 다카마사의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시리즈 첫 승을 기록했고, 4차전에서도 9회에 고마쓰 다쓰오를 구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시리즈 첫 세이브를 올렸다.
1983년에는 전년도 8월 초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구원 실패가 이어졌다. 기분 전환을 겸해 선발 투수로 전환하여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인 10승을 기록했으나, 시즌 내내 안정감은 부족했다. 1984년에는 다시 클로저로 복귀하여 개인 최고 기록인 29세이브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5년 시즌 중반에 다시 선발 투수로 전환하여 6승 8세이브를 기록했으며, 6번의 완투도 기록했다.
1986년 오프 시즌, 롯데 오리온즈의 주포 오치아이 히로미쓰와의 1대4 대형 트레이드가 발표되었다. 나고야 구장 근처에 자택을 구매하고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막 취임하여 주니치에서 현역 생활을 마칠 생각이었던 우시지마는 이 트레이드에 끝까지 납득하지 않고 저항했다. 하지만 호시노가 자택으로 불러 우시지마를 설득했고, "장래에 주니치 지도자로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주니치 복귀는 실현되지 않았다.
1.3. 롯데 오리온즈 시절
1987년, 오치아이 히로미쓰와의 4대1 트레이드로 가미카와 세이지, 히라누마 사다하루, 구와타 시게루와 함께 롯데로 이적했다. 이적 후에도 등번호는 17번이 결번으로 남았으나, 이듬해 개막 전 세이부에서 이적한 무라이 가즈오가 착용했고, 그 다음 해에는 기대되는 고졸 신인 우에하라 아키라에게 계승되었다.
등번호는 27번으로 변경되었고, 전년도에 은퇴한 주니치 시절 선배 쓰치야 마사카쓰의 등번호를 물려받았다. 이적 첫 해인 1987년에는 2승 24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주니치 시절부터 개선 중이던 슬라이더와 슈트를 이적 첫 해에 훌륭하게 선보이며 타이틀 획득에 기여했다.
1988년에는 25세이브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세이브 포인트 차이로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은 긴테쓰의 요시이 마사토가 차지했다.) 1989년에는 선발 투수로 전환하여 개인 최고 기록인 12승을 올렸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했다. 특히 다이에이를 상대로는 7승 1패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1승만 더하면 최고 승률 타이틀도 획득할 수 있었으나, 12승을 올린 후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등록이 말소되어 약 한 달간 등판하지 못했다. 사실 10승을 올릴 때부터 이미 오른쪽 어깨를 다쳤지만, 진통제를 복용하며 12승까지 올렸다고 한다. 오른쪽 어깨 통증을 극복하기 위해 인너 머슬을 단련하는 재활을 시작했다.
1990년에는 혈액 순환 장애로 고통받았다. 전년도 오른쪽 어깨 통증을 극복하고 다시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혈액 순환 장애가 발생했다. 목과 어깨의 통증과 저림이 심해 의사에게 "야구는 못 해도 좋으니,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불안감이 커지자 담당 의사는 "무엇을 모르는지 알면 불안하지 않다. 메커니즘을 알면 두렵지 않다"고 조언했고, 이에 따라 재활에 임했다. 거의 한 시즌을 재활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와 이듬해 1991년에는 승리 없이 시즌을 마쳤다.
1992년 4월 7일 후쿠오카 다이에이와의 1차전에서 3년(924일) 만의 승리를 완투로 장식했다. 이 승리는 팀이 지바로 이전한 후 지바 롯데 마린스로서의 첫 승리였다. 원래는 개막 2차전 고베에서 등판 예정이었으나, 비로 인해 연기되면서 홈 개막전에서 던지게 되었다. 등판 이닝은 가능한 만큼만 생각했으나, 계속 던질 수 있게 되어 완투승을 거둘 수 있었다. 부활의 승리보다 완투승을 거두었다는 것이 우시지마 개인에게는 큰 의미였고,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같은 해 3승을 올렸다.
1993년에는 캠프 막바지에 원인 불명의 목 통증으로 이탈했고, 목 통증이 나아 1군에 등판하기도 했으나 팔꿈치 통증에 시달리다 현역에서 은퇴하며 14년간의 프로 생활을 32세의 젊은 나이로 마감했다.
1.4.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1994년, TBS (TBS TV, TBS 라디오)와 CBC (CBC TV, CBC 라디오)의 야구 해설가로 취임했다. 11년간 해설가로 활동하며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과 이론적이며 상쾌한 어조로 인기를 얻었다.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도 겸임했다.
1997년 오프 시즌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곤도 히로시로부터 1군 투수 코치 요청을 받았으나,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집 대출도 남아있다"며 고심 끝에 거절했다. 1999년 오프 시즌에는 주니치 시절 동료였던 오시마 야스노리가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취임하며 오시마로부터 1군 투수 코치 요청을 받았으나 구단이 제시한 조건과 맞지 않아 취임에 이르지 못했다. 나가시마 시게오나 하라 다쓰노리 등 다른 구단에서도 코치직 제안이 있었으나, 투수 코치는 투수 편을 들지 않으면 투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고, 투수를 보호하면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불가피한 충돌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해 계속해서 요청을 거절했다. 은혜를 입은 오시마의 요청 때는 그러한 걱정이 없었으나, 이미 많은 요청을 거절한 후였기에 오시마의 요청만 수락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2005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요코하마와는 현역 시절 전혀 인연이 없었으나, 당시 요코하마의 모회사가 TBS였기 때문에 TBS 야구 해설가였던 우시지마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코치진으로는 롯데 시절 후배였던 요시다 아쓰시를 투수 코치로, 후쿠자와 요이치를 배터리 코치로 영입했다. 취임 첫 해에 3년 연속 최하위 팀을 A클래스 (3위)로 이끌었다.
2006년 요코하마의 팀 부진으로 인해 같은 시즌을 끝으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8월 초에는 이미 퇴단 의사를 굳혔고, 10일 사사키 사장과의 회담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9월 3일 기자회견에서는 "열심히 응원해주신 팬들께 죄송한 마음이 강해 결단했다.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해주었지만, 2년 계약의 2년차에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여 회사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올스타전 기간에는 "교류전 이후 좋은 경기를 펼쳤고, 부상 선수들도 점차 복귀하여 전력이 두터워지고 있다. 팀 내에서도 좋은 의미의 경쟁이 가능할 것 같다"며 반등을 기대했으나, 결국 순위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제로는 팀 강화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구단과의 불화가 원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2. 은퇴 후 활동
선수 및 감독 은퇴 후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야구 해설가로서 대중과 소통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 활동에 매진하며 야구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2.1.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요코하마 감독직 사임 후, 다시 TBS와 CBC의 TV 및 라디오 야구 해설가,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현재도 해설가로 출연하고 있다.
그가 출연한 주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TBS 라디오 익사이트 베이스볼 (TBS 라디오: 1994년 ~ 2004년, 2007년 ~ 2017년)
- S☆1 BASEBALL
- TBS TV (지상파 자체 제작분. 2010년 이후에는 CBC TV 제작분 중계만 출연): 1994년 ~ 2004년, 2007년 ~ 2009년
- CBC TV (지역 방송은 '모에여 드래곤즈!' 타이틀): 1994년 ~ 2004년, 2007년 ~
- RCC TV (지역 방송은 'RCC 카프 나이터/카프 데이게임 중계' 타이틀): 2007년 4월 12일 히로시마 대 주니치전 출연
- BS-TBS (CBC TV 제작 포함): 2007년 ~
- TBS 뉴스버드 → TBS 채널 (CBC TV 제작 포함): 2008년 ~
- CBC 드래곤즈 나이터 (CBC 라디오. TBS 라디오 또는 분카 방송의 중계 포함): 1994년 ~ 2004년, 2007년 ~
- RKB 익사이트 호크스 (RKB 라디오. 2017년까지 TBS 라디오·CBC 라디오 동시 중계 및 중계, 2018년에는 분카 방송 중계 출연)
- J SPORTS STADIUM (2007년 RCC TV 제작 지상파 동시 중계에 1회 출연. 2017년부터 CBC TV 제작분 출연)
- 선데이 드래곤즈 (CBC TV: 1994년 ~ 2004년, 2007년 ~) - 2001년 10월 ~ 2003년 3월 메인 사회자.
- MLB 주의 (TBS TV: 2004년)
- 딥 피플 (NHK 종합: 2011년 2월 11일) - '포크볼'을 주제로 무라타 조지,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대담.
- 선데이 모닝 (TBS TV: 2012년 5월 6일) - 스포츠 코너 '주간 의견반' 게스트 코멘테이터.
- 스포츠 술집 가타리테이 (NHK BS1: 2013년 4월 26일) - '프로 야구 마구 토크' 주제로 게스트 출연.
2.2. 지도 및 교육 활동
현재 해설가로 출연하는 한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당시의 피지컬 트레이너였던 야마구치 미쓰쿠니와 함께 'Senseup+ Sports Academy'를 개설하여 기술뿐만 아니라 신체 사용법, 마음가짐 등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전달하며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한 2011년부터 세가사미 경식 야구부의 특별 투수 코치 (비상근)를 맡고 있으며, 사회인 야구팀과 대학 야구팀의 투수 지도도 병행하고 있다.
3. 인물 및 인간 관계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고교 시절부터 독특한 성격과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으며, 프로 생활 동안 다양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선수들의 성장을 돕는 데 헌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3.1. 성격 및 일화
나니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너무 많이 던져 허리를 다쳐 치료에 전념하며 연습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미야자키현에서 열린 초청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마운드에 전령으로 온 선수에게 "던지는 건 나야, 조용히 지켜봐"라고 말하거나, 감독에게 "제가 던지면 팀은 반드시 이깁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등, 날카로운 눈매의 미남형 얼굴과 독특한 캐릭터로 여중고생을 중심으로 한 고시엔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79년 봄 선발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에서 연장 13회 221구를 던진 다음 날, 도요대 히메지 고등학교와의 준결승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는 등, 고교 시절부터 이미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고교 졸업 후 진로는 처음부터 프로만을 생각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프로 구단에서 제안이 왔다. 특히 난카이에서는 나니와에서 우시지마 본인과 가가와, 야마모토 아키라 세 명 모두를 영입하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TV에서는 요미우리 경기 중계가 중심이었고 퍼시픽 리그 중계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슈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귀가 불편하여 "라디오로는 들리지 않으니 너를 알 수 없다, TV로만 볼 수 있다"며 요미우리가 있는 센트럴 리그로 가기를 원하셨다. 이 때문에 퍼시픽 리그 6개 구단 모두에게 사전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로 인해 당시 "고교생 입단 거부", "역지명" 등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주니치와 마찬가지로 드래프트 회의 전날 지명 연락을 했던 요미우리에서도 지명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당시 요미우리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가 좌완 투수를 희망하여 기다 이사무 지명으로 변경되었고, 결국 주니치의 단독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우시지마의 현역 은퇴 후에도 직접 전화 연락이 오는 등 나가시마와의 교류는 계속되고 있다.
주니치 입단 발표 당시 헤어스타일은 리젠트였다. 하지만 나중에 오쿠보 히로모토와의 유튜브 대담에서 우시지마는 "그 헤어스타일은 펀치 파마가 자란 것"이라고 회고했다. 고교 일본 대표 시절 머리를 짧게 잘랐지만, 프로 입단 전에 파마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 열심히 머리를 길러 펀치 파마를 한 후 프로 입단 전에 자르니 리젠트처럼 보였다고 한다. 루키로서 캠프 첫날 우시지마의 머리카락을 본 호시노 센이치가 엄하게 지도했다는 설은 우시지마가 부정하고 있다. 드래프트 전에는 재능은 있었지만 워낙 품행이 좋지 않아 손을 떼는 구단이 속출했고, 주니치도 한때 지명을 보류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감독 나카 도시오의 강한 희망과 호시노 (1981년부터 투수 코치 보좌 겸임)의 "내가 다시 단련시켜주겠다"는 한마디로 지명을 결정했다. 또한 주니치 시절에는 선수 기숙사 통금 위반 벌금을 "월급에서 공제해달라"고 말하거나, 방 문에 벌금을 미리 붙여놓고 밤거리에 놀러 나갔다는 일화가 우시지마 본인으로부터 전해진다. 심지어 우승 시 (연봉 외에) 구단에서 지급되는 상금을 봉투째 기숙사 사장에게 건네며 "이걸로 당분간 (벌금) 처리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니치 시절에는 고마쓰 다쓰오와 함께 지역 기업 고와 신약의 미카론 (두발 비듬 방지 약) 광고에 출연하는 등 고교 시절의 이미지 그대로 미남형 얼굴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은퇴 후에는 나고야시에 본사를 둔 안경점 '안경의 와코'의 이미지 캐릭터를 맡고 있다.
나카 도시오 감독 시절 어느 날, 미팅에서 이나오 가즈히사 투수 코치가 투수진 전원에게 "9회 2사 만루, 볼카운트 2-3에서 어떤 공을 던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투수가 자신의 결정구를 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 루키 우시지마였다. 의아해하는 이나오에게 우시지마는 "어떤 상황에서 2-3이 되었는지에 따라 마지막에 던질 공도 달라진다. 2-3이 되기까지의 경위가 없으면 마지막 공도 결정할 수 없다. 점수 차에 따라서도 던질 공이 달라지므로 일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는 이나오가 현역 시절 실천했던 생각, 투구술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 일화는 현재도 야구 관련 만화에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이나오는 우시지마의 답변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그걸로 됐다"며 우시지마를 칭찬했고, 나중에 "프로에서 일류 투수가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한편 우시지마 본인은 이때의 일에 대해 "이나오 씨가 아니라 더 고집 센 코치였다면 분명 미움을 받아 찍혔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나오는 나중에 롯데 감독을 맡았으나 1986년 오프 시즌에 퇴임이 결정되었고, 그가 존경했던 오치아이가 이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우시지마는 포크볼을 결정구로 사용했지만, 그의 손은 평범한 크기였다. 어느 해 후지 TV '프로 야구 뉴스'의 오프 시즌 기획에 게스트로 출연한 우시지마는 포크볼 잡는 법을 묻자 옅게 웃으며 공을 아주 얕게 끼워 보여주었다. "아니, 이걸로 그렇게 떨어지는 건가요?"라고 의아해하는 아나운서에게, 동석했던 세키네 준조 (같은 프로그램 해설가)가 갑자기 "저는 알지만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여운을 남긴 채 프로그램은 잠시 광고로 넘어갔다. 광고가 끝난 후, 우시지마는 "사실은..."이라며 비밀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우시지마의 포크볼 그립은 특수한 것으로, 먼저 검지와 중지를 벌리고 그 사이에 공을 서서히 밀어 넣으면, 갑자기 두 손가락 사이의 관절이 빠지면서 손가락 힘줄 부분이 거의 붙을 정도로 각도가 한 번에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스튜디오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우시지마는 "손가락이 크게 벌어지도록 공을 끼우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관절을 자유롭게 빼거나 다시 끼울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NHK 종합 '딥 피플'의 '포크볼' 편에서도 관절이 빠지는 모습을 공개하며 마크 크룬이 놀랐다고 말했다.
요코하마 감독 취임 첫 해 캠프에서도 우시지마의 독자적인 이론이 엿보였다. 그중 하나가 "불펜 투구 연습 시 포수는 포구음을 내지 마라"는 것이었다. 우시지마에 따르면 "포구음이 좋다는 것은 상대 타자에게 맞기 쉬운 공이다. 특히 최근에는 실내 불펜이 있는 구장이 많아 포구음이 반향하기 쉬워, 컨디션이 좋지 않은 투수가 '좋은 공이 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포수는 투수를 기분 좋게 던지게 하기 위해 큰 미트 소리를 낸다"는 이론을 가진 이토 쓰토무와는 대척점에 있는 이론이었다. 사실 우시지마에게는 이 포구음에 얽힌 원체험이 있었다. 현역 시절, 어느 지방 구장에서 경기 전 스탠드 아래 불펜에서 투구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좋은 이미지로 직구를 던졌는데도, 불펜 포수의 미트에서는 "보코" 하는 둔탁한 소리만 들려왔다.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보니, 불펜 벽면에는 방음 처리가 되어 있어 소리가 반향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우시지마는 "이대로는 컨디션이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메뉴를 변경하고, 그라운드로 나가 캐치볼을 했다. "포구음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시지마는 비행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었다. 롯데 시절에는 지방 경기가 많아 특히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의 경기 전후에는 이동 수단으로 고민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해설가 시절에도 장시간 비행기 이동을 싫어하여 미국 메이저 리그 시찰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다. 또한 요코하마 감독 취임 후 2005년, 춘계 캠프를 위해 기노완시로 향할 때는 긴장한 표정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하 공항 도착 후, 기자들에게 오랜만의 비행기 소감을 묻자 "내릴 때 흔들렸네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즌에 들어서도 나가사키 빅N 스타디움에서 히로시마전이 열렸을 때, 전날 이동일에는 비행기로 이동하는 팀을 떠나 신요코하마역에서 아침 첫 신칸센 '노조미 1호'와 재래선 특급 '가모메'를 갈아타고 나가사키까지 이동했다. 게다가 교류전 때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에서의 라쿠텐전 다음 경기가 이동일 없이 삿포로 돔에서의 닛폰햄전이었는데, 라쿠텐전 3차전이 우천 취소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이동하는 팀을 떠나 혼자 침대 특급 '호쿠토세이'로 이동하는 등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취재 기자들이 이 점을 지적해도 항상 "차창 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기분 전환이 되었다"는 등의 답변을 했다.
3.2. 주요 인물과의 관계
고교 시절 배터리를 이룬 '도카벤' 가가와 신유키가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해마다 체중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우시지마 스스로 주의를 주었다. 나중에 우시지마는 프로 야구 은퇴 후 가가와에 대한 평가로 "언젠가는 야구계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급격히 살이 찌면서 선수 생활 기간이 짧아졌다"며 아쉬워했다. 2014년 9월 26일, 가가와 신유키가 심근경색으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비보를 들은 직후 우시지마는 "왜... 아직 이를 텐데.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강한 운을 가진 남자이니 분명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가버릴 줄은..."이라며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최근에는 대화할 기회가 없었고, 몇 년 전 모교 (현 대체대 나니와)의 고시엔 출전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공을 받아줄 수 없겠구나..."라며 쓸쓸함을 드러냈다. 2018년 8월 8일 아침, 제10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기념 대회의 레전드 시구식에 등장했으나, 원바운드 투구가 되어 쓴웃음을 지었다. 우시지마는 "고시엔 시구식 이야기가 왔을 때, 만약 살아있다면 포수는 가가와였을까 생각했다"고 고인을 추모하며 말했다. 관중석에서는 가가와 부인과 딸들이 영정을 들고 이 등판을 지켜보았다.
현역 시절부터 호시노 센이치를 동경했고, 호시노 또한 우시지마를 아꼈다. 그러나 호시노는 우시지마를 오치아이 영입을 위해 1986년 가을 주니치 감독 취임 직후 롯데로 트레이드했다. 트레이드 결정 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이적 기자회견을 위해 도쿄로 향하는 우시지마를 호시노는 나고야역의 도카이도 신칸센 승강장에서 배웅했다. 우시지마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열했다. (그러나 호시노에게 "오치아이 씨를 마중 나오셨습니까?"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호시노는 후년 인터뷰에서 "우시지마는 다른 팀의 야구를 배우게 할 생각으로 트레이드 보냈다. 언젠가는 주니치로 복귀시킬 생각이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은퇴했다"고 말했다.
오시마 야스노리와는 주니치 시절에는 교류가 많지 않았고, 나고야에서는 오시마가 더 인기 있고 실적도 뛰어났기 때문에, 함께 주니치에 재적했던 시절에는 둘이서 식사하러 나간 것이 단 한 번뿐이었다고 나중에 2018년 오시마와의 대담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함께 이적하여 도쿄로 이주하면서 때로는 같은 아파트에 살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가족 간의 교류도 있었다고 한다. 맞대결에서는 1988년에는 7타수 1안타로 우시지마가 우세했고, 1989년에는 6타수 5안타로 오시마가 맹타를 휘둘렀다. 오시마는 우시지마의 커브를 경계하면서도, 친한 사이이고 컨트롤이 좋기 때문에 인코스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시마는 주니치 시절 팀 동료 투수들의 습관을 간파하고 본인에게도 가르쳐주었지만, 우시지마는 영리하기 때문에 반드시 역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오시마도 허를 찌르는 배합을 염두에 두었다.
롯데로의 이적이 결정된 직후, 우시지마는 "(1987년 당시) 12개 구단의 홈 구장 중 올스타전이나 시범 경기에서도 한 번도 등판 경험이 없는 곳이 롯데의 홈 구장인 가와사키 구장이다"라고 말했다. 우시지마가 주니치에 입단한 후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1980년과 1985년에 올스타전이 개최되었으나, 우시지마는 두 번 모두 선발되지 못했다.
1988년 10월 19일, 롯데 대 긴테쓰 더블헤더 (통칭: 10.19)의 1차전 9회 초 2사 2루, 선발 투수 오가와 히로시를 구원했으나, 대타 나시다 마사타카에게 중전 적시타를 맞아 스즈키 다카히사에게 역전 홈인을 허용했다. 우시지마는 훗날 TV 아사히 '뉴스 스테이션' 등 각 언론 인터뷰에서 나시다와 왜 승부했는지 묻자 "1루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고의 사구를 줄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긴테쓰 선수들은 모두 기백이 넘쳐흘렀다. 집념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에 (나시다를 고의 사구로 보내고) 다음 타자와 승부하든, 그 다음 타자와 승부하든 결과는 분명 같았을 것이다. 누구와 승부해도 마찬가지였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한 후년에 진행된 다른 인터뷰에서는 "나시다 씨는 그 해를 끝으로 은퇴를 결정했고, 어쩌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될 수도 있었다. 승패가 걸린 상황이었지만, '현역 마지막이 고의 사구라면, 나시다 씨에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여 승부했다"고도 말했다.
롯데 시절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이적 초만큼의 활약은 후년에 보여주지 못했으나, 그동안 프로 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젊은 투수진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어 선수들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고미야마 사토루, 이라부 히데키를 비롯한 투수진에게는 기술적,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버팀목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오랜 기간 TV·라디오에서 이론파 해설의 뒷받침이 되었다. 또한 1992년 롯데 입단 이래 우시지마를 계속 따랐던 요시다 아쓰시는 잡지 '주간 베이스볼' 선수 명감의 "야구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장면" 질문에 자신이 1993년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한 것과 "우시지마 씨의 현역 은퇴"를 계속해서 꼽았다. 요시다는 2004년 현역 은퇴 후 우시지마의 권유를 받아 요코하마에 코치로 입단했다. 우시지마 재임 중에는 불펜 담당 투수 코치를 맡았다. 우시지마의 현역 말년에 스토퍼로 활약했던 가와모토 이쿠히로는 우시지마의 은퇴 후 등번호 27번을 물려받았다. 고미야마도 요코하마 시절 27번을 착용했다.
고바야시 이타루는 1991년 1년간 롯데의 연습생 (당시 도쿄대 4학년 재학 중)으로 지냈는데, 이때 부상으로 2군에 있던 우시지마에게 지도를 받았고, 고바야시는 나중에 "연습생으로, 프로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에서, 자칫하면 불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여러모로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준 우시지마 씨에게 대단히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수의 습관 등을 교정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마크 크룬을 영입할 당시, 구속은 빠르지만 컨트롤에 어려움이 있어 프런트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비디오를 본 우시지마 감독이 "이 습관이라면 교정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크룬 영입을 결정했다. 우시지마 감독의 교정으로 크룬은 제구 난조를 고치고 사사키 가즈히로로부터 구원 에이스 자리를 빼앗을 만큼 활약했다. 크룬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우시지마 감독 덕분"이라고 말했다. 또한 요코하마에 트레이드되어 입단한 이래 부진이 계속되던 가도쿠라 겐은 우시지마 감독으로부터 "10NaN 경 cm 발을 높이 들어봐라"는 조언을 받은 결과, 타이밍을 잘 잡게 되어 7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소화하고 개인 최다인 11승을 올렸다. 최종전에는 2일 휴식 후 등판시키는 우시지마의 배려도 있어 동료 미우라 다이스케와 동수로 리그 최다인 177 탈삼진을 기록하며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4. 지도 철학 및 전술
감독으로서의 투수 기용에 대한 전술에서는 '콰트로 K'와 같은 중간 계투진을 정비했지만, 한편으로는 에이스급 선발 투수에게 완투를 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2005년에는 20번의 완투를 기록했으며, 그중 10번의 완투는 미우라 다이스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완투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선발 투수는 투구 수 100구에 도달하거나 투구 이닝이 7회 전후가 될 때까지는 투구 내용과 관계없이 계속 등판시켰다. 이러한 방침에 대해 우시지마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에이스 투수를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5. 기록 및 수상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선수 시절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여러 타이틀과 기록을 남겼고, 감독으로서도 팀을 A클래스로 이끄는 성과를 보였다.
5.1. 선수 기록
연도 | 구단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사구 | 승 | 패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고의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80 | 주니치 | 9 | 4 | 0 | 0 | 0 | 2 | 1 | 0 | -- | .667 | 111 | 27.0 | 23 | 4 | 12 | 0 | 0 | 14 | 0 | 0 | 16 | 15 | 5.00 | 1.30 |
1981 | 51 | 5 | 0 | 0 | 0 | 2 | 7 | 0 | -- | .222 | 434 | 104.1 | 84 | 11 | 59 | 6 | 0 | 82 | 3 | 0 | 39 | 32 | 2.76 | 1.37 | |
1982 | 53 | 0 | 0 | 0 | 0 | 7 | 4 | 17 | -- | .636 | 301 | 77.1 | 44 | 6 | 28 | 4 | 1 | 75 | 0 | 0 | 12 | 12 | 1.40 | 0.93 | |
1983 | 37 | 9 | 0 | 0 | 0 | 10 | 8 | 7 | -- | .556 | 395 | 88.0 | 104 | 10 | 30 | 2 | 1 | 69 | 0 | 0 | 55 | 44 | 4.50 | 1.52 | |
1984 | 50 | 0 | 0 | 0 | 0 | 3 | 6 | 29 | -- | .333 | 307 | 75.2 | 60 | 6 | 25 | 5 | 1 | 67 | 1 | 0 | 25 | 23 | 2.74 | 1.12 | |
1985 | 38 | 10 | 6 | 1 | 0 | 6 | 8 | 8 | -- | .429 | 504 | 116.1 | 103 | 17 | 60 | 9 | 4 | 82 | 0 | 0 | 47 | 45 | 3.48 | 1.40 | |
1986 | 35 | 0 | 0 | 0 | 0 | 3 | 5 | 16 | -- | .375 | 227 | 55.0 | 46 | 5 | 19 | 3 | 0 | 46 | 1 | 0 | 18 | 17 | 2.78 | 1.18 | |
1987 | 롯데 | 41 | 0 | 0 | 0 | 0 | 2 | 4 | 24 | -- | .333 | 230 | 55.2 | 46 | 6 | 16 | 6 | 2 | 59 | 1 | 0 | 15 | 8 | 1.29 | 1.11 |
1988 | 38 | 0 | 0 | 0 | 0 | 1 | 6 | 25 | -- | .143 | 213 | 46.1 | 49 | 4 | 29 | 2 | 0 | 46 | 3 | 0 | 24 | 23 | 4.47 | 1.68 | |
1989 | 21 | 21 | 8 | 0 | 0 | 12 | 5 | 0 | -- | .706 | 632 | 148.2 | 134 | 13 | 75 | 0 | 0 | 115 | 7 | 1 | 66 | 60 | 3.63 | 1.41 | |
1990 | 3 | 1 | 0 | 0 | 0 | 0 | 1 | 0 | -- | .000 | 33 | 8.0 | 7 | 1 | 2 | 0 | 1 | 6 | 0 | 0 | 6 | 5 | 5.63 | 1.13 | |
1991 | 1 | 1 | 0 | 0 | 0 | 0 | 1 | 0 | -- | .000 | 22 | 4.2 | 8 | 1 | 0 | 0 | 0 | 5 | 0 | 0 | 3 | 2 | 3.86 | 1.71 | |
1992 | 9 | 8 | 3 | 0 | 0 | 3 | 3 | 0 | -- | .500 | 227 | 54.0 | 43 | 5 | 21 | 0 | 1 | 48 | 0 | 0 | 18 | 16 | 2.67 | 1.19 | |
1993 | 9 | 9 | 0 | 0 | 0 | 2 | 5 | 0 | -- | .286 | 199 | 44.0 | 56 | 6 | 15 | 0 | 1 | 32 | 1 | 0 | 30 | 26 | 5.32 | 1.61 | |
통산: 14년 | 395 | 68 | 17 | 1 | 0 | 53 | 64 | 126 | -- | .453 | 3835 | 905.0 | 807 | 95 | 391 | 37 | 12 | 746 | 17 | 1 | 374 | 328 | 3.26 | 1.3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타이틀
- 최우수 구원 투수: 1회 (1987년)
표창
- 월간 MVP: 1회 (투수 부문: 1989년 6월)
- 파이어맨상: 1회 (1987년)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1980년 8월 24일, 대 요미우리 20차전 (나고야 구장), 9회 초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위와 동일, 9회 초 야마모토 고지로부터
- 첫 승리: 1980년 8월 30일, 대 한신 19차전 (나고야 구장), 8회 초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이닝 무실점
- 첫 선발·첫 선발 승리: 1980년 9월 6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2차전 (나고야 구장), 6이닝 1실점
- 첫 세이브: 1982년 4월 11일, 대 요미우리 2차전 (나고야 구장), 9회 초 1사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3이닝 무실점
- 첫 완투: 1985년 8월 7일, 대 히로시마 16차전 (나고야 구장), 10이닝 무실점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85년 8월 13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4차전 (나고야 구장)
; 족적 기록
- 100세이브: 1987년 10월 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24차전 (고라쿠엔 구장), 9회 말 무사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기타 기록
- 시즌 11무승부: (1982년) 에나쓰 유타카, 후지카와 규지와 함께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올스타전 출장: 5회 (1983년, 1984년, 1987년 ~ 1989년)
등번호
- 17 (1980년 ~ 1986년)
- 27 (1987년 ~ 1993년)
- 72 (2005년 ~ 2006년)
5.2. 감독 기록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팀 | |||
---|---|---|---|---|---|---|---|---|---|---|---|---|
2005 | 요코하마 | 3위 | 146 | 69 | 70 | 7 | .496 | 17.0 | 143 | .265 | 3.68 | 44세 |
2006 | 6위 | 146 | 58 | 84 | 4 | .408 | 29.5 | 127 | .257 | 4.25 | 45세 | |
통산: 2년 | 292 | 127 | 154 | 11 | .452 | A클래스 1회, B클래스 1회 |
6. 영향 및 유산
우시지마 가즈히코는 선수, 지도자, 해설가로서 일본 야구계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후배 투수들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6.1. 야구계에 미친 영향
선수 시절에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구원 에이스이자 롯데 오리온즈의 최우수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핵심 전력이었다. 은퇴 후에는 이론적인 해설가로서 대중에게 야구의 깊이를 전달하며 인기를 얻었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으로서는 팀을 A클래스로 이끌며 지도력을 입증했고, 특히 마크 크룬이나 가도쿠라 겐과 같은 투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약점을 보완해주는 탁월한 지도 능력을 보여주었다. 은퇴 후에도 'Senseup+ Sports Academy'를 운영하고 사회인 및 대학 야구팀 코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6.2. 동료 및 후배와의 관계
현역 시절부터 호시노 센이치를 동경했으며, 호시노 또한 그를 아꼈으나 트레이드로 인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호시노는 우시지마가 다른 팀에서 야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회고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오시마 야스노리와는 주니치 시절에는 큰 교류가 없었으나, 이적 후 도쿄에서 함께 살 정도로 친밀한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롯데 시절 팔꿈치 부상으로 부진을 겪었을 때도, 프로 생활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젊은 투수진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어 선수들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고미야마 사토루, 이라부 히데키를 비롯한 투수진에게는 기술적,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버팀목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오랜 기간 TV·라디오에서 이론파 해설의 뒷받침이 되었다. 또한 1992년 롯데 입단 이래 우시지마를 계속 따랐던 요시다 아쓰시는 잡지 '주간 베이스볼' 선수 명감의 "야구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장면" 질문에 자신이 1993년 오른쪽 어깨 부상을 당한 것과 "우시지마 씨의 현역 은퇴"를 계속해서 꼽았다. 요시다는 2004년 현역 은퇴 후 우시지마의 권유를 받아 요코하마에 코치로 입단했다. 우시지마 재임 중에는 불펜 담당 투수 코치를 맡았다. 우시지마의 현역 말년에 스토퍼로 활약했던 가와모토 이쿠히로는 우시지마의 은퇴 후 등번호 27번을 물려받았다. 고바야마 이타루는 우시지마에게 지도를 받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고교 시절부터 배터리를 이룬 절친한 동료 가가와 신유키의 죽음은 우시지마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는 가가와의 죽음을 애도하며 고시엔 시구식에서 가가와가 포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바람을 드러내는 등, 평생에 걸쳐 깊은 우정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