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아마추어 경력
곤도 히로시는 1938년 12월 2일 사가현 도스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자랐으며, 프로 입단 후에도 급여의 절반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내며 효심을 보였다.
그는 사가현립 도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주로 내야수로 활약했지만, 팀 내 투수 부재로 인해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3학년이던 1956년 하계 고시엔 사가현 예선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사가 상업고등학교에 아쉽게 패하며 고시엔 대회 출전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약은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니시테쓰의 제의를 거절하고, 이후 브리지스톤 타이어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특히 니시테쓰의 입단 테스트에서 미하라 오사무 감독과 가와사키 도쿠지 앞에서 던지며 자신감을 얻은 그는 브리지스톤 테스트에서는 타자들이 그의 공을 거의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었다. 브리지스톤의 합격 통보가 먼저 도착했고, 당시 체중이 62 kg에 불과할 정도로 몸이 가늘었던 점도 니시테쓰의 제의를 거절한 이유가 되었다.
1957년 브리지스톤 타이어에 입사한 곤도 히로시는 구루메시 공장의 용도과에 배속되어 오전 8시 10분부터 오후 4시 10분까지 근무하며, 중간인 오후 2시경에는 야구부에 합류하여 훈련에 임했다. 당시 후쿠오카현은 닛테쓰 광업 후타세, 도요 고압 오무타, 야하타 제철, 모지 철도국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회인 야구 명문팀들이 즐비했다. 반면 브리지스톤 팀은 동호회 성격이 강하여 훈련이 선수 개개인의 자율에 맡겨져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곤도는 체력 강화에 매진하여 복근, 등근육 운동과 런닝을 꾸준히 했으며, 구장 근처의 지쿠고강변을 매일 달렸다. 이처럼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그의 몸은 점차 강해졌고 구속도 빨라졌다. 그는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오다 미키오는 "저 친구를 어떻게든 도쿄 올림픽에 내보낼 수 없을까. 나가면 금메달은 확실하다"고 언급했으며, 육상 경기 400m 허들 선수로 전향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입사 3년째인 1959년에는 브리지스톤 구장에서 닛폰 석유, 닛폰 통운, 릿쿄 대학 등과 경기를 치렀는데, 이들 팀의 타자들을 상대로 거의 얻어맞지 않았다. 특히 1957년 제3회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팀 우승에 기여한 호리모토 리쓰오와도 대결했는데, 호리모토의 투구 연습을 지켜보던 입사 동기이자 배터리 파트너인 쓰쓰미다 다다오는 "곤도가 더 대단한 공을 던진다"고 칭찬했다.
1960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는 닛테쓰 광업 후타세와의 북규슈 남부 예선 첫 경기에서 연장 10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쳤으나, 11회에 1점을 내주며 아쉽게 패했다. 이후 그는 북규슈 대표팀인 닛테쓰 광업 후타세의 보강 선수로 출전하여 2경기에 등판해 도스 고등학교 1년 선배인 이노우에 마모루(이후 한큐)를 구원하며 호투를 펼쳤다. 총 7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그의 활약은, 닛테쓰 광업 후타세 감독에서 물러나 주니치 드래건스 2군 감독으로 부임한 노닌 와타루의 눈에 띄었다. 노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주니치가 곤도 영입에 나섰고, 다른 여러 구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빗발쳤다. 최종적으로 '계약금은 어느 구단보다 높게 주겠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의를 거절하고, 1961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2. 프로 선수 경력
1961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곤도 히로시는 스기시타 시게루의 등번호 20번을 물려받았다. 그해 오픈전에서 28.1 이닝 동안 1자책점(평균 자책점 0.31)의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자, 1군 감독으로 부임한 노닌 와타루는 "올해는 너를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곤도는 데뷔 첫해부터 힘 있는 직구와 크게 떨어지는 커브를 주무기로 주니치 드래건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구원 투수 역할까지 소화했다. 그해 팀의 총 130경기 중 절반이 넘는 69경기에 등판했고, 그 중 선발 등판은 44경기였다. 그는 35승 19패, 429.1 이닝, 탈삼진 310개, 평균 자책점 1.70을 기록하며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했다. 특히 429.1 이닝은 1950년 양대 리그제 시행 이후 아키야마 노보루(다이요)가 1957년 기록한 406 이닝을 뛰어넘는 일본 프로 야구 단일 시즌 역대 최고 기록으로, 2020년 시즌 종료 시점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의 혹독한 연투를 상징하는 '곤도, 곤도, 비, 곤도'라는 유행어(비가 오지 않는 날은 매일 곤도가 던졌다는 의미)는 당시 야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유행어는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였던 호리모토 리쓰오가 "주니치 투수는 곤도밖에 없는가, 이러다간 망가지겠다. '곤도, 비, 여행(이동일), 곤도, 비, 곤도'잖아"라고 기자에게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961년 7월 4일부터 12일간 '비·완봉·비·이동일·완투·비·이동일·선발(5이닝)·비·비·이동일·선발(5이닝)'이라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는 나가시마 시게오에게는 유독 약점을 보였는데, 탈삼진 없이 타율 0.448로 부진했다.
2년째인 1962년에는 슬라이더를 새로 익혀 선발 39경기를 포함해 총 61경기에 등판, 30승 17패, 362.1 이닝, 탈삼진 212개, 평균 자책점 2.33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잦은 등판과 당시의 잘못된 훈련 및 재활 치료 방식(투구 직후 어깨를 따뜻하게 데우는 등)으로 인해 어깨와 팔꿈치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3년째인 1963년부터는 구위가 급격히 떨어져 10승에 그쳤고, 1964년에는 6승으로 부진이 이어졌다.
1965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니시자와 미치오 감독으로부터 야수 전향을 제안받았다. 곤도 본인은 1년차의 성공에 대한 미련으로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니시자와 감독이 그의 강한 손목을 활용한 타격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전향을 적극 권유했다. 내야수로 전향한 그는 그해 이토 다쓰히코 등과 함께 주전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며 81경기에 출전했다. 1966년에는 개막부터 2번 유격수로 기용되었으나 타격 부진이 계속되었다. 1967년에는 주로 3루수로 80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센트럴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비록 타격에 대한 감을 잡아가고 있다고 느꼈지만, 3년 동안 니시자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1968년 스프링 캠프 직전 니시자와 감독이 사임하고, 스기시타 시게루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스기시타 감독은 곤도의 내야수 송구 모습을 본 후, 약해진 팀 투수진을 고려하여 "역시 너는 투수다. 다시 한번 던져 보지 않겠나"라며 불펜에서 투수 훈련 재개를 권유했다. 그러나 다시 투수로 던지기 시작하자, 그동안 잠잠했던 오른쪽 어깨에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해 4월 27일 히로시마전(마쓰야마)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이것이 그의 선수 경력 마지막 승리였다.
같은 해 캠프 종반, 프로 데뷔 9년 만에 처음으로 2군 선수들과 함께 나고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은 곤도는 이 시점에서 은퇴를 결심했다. 그의 투수 시절 혹사 경험은 본인뿐만 아니라 일본 야구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역 시절 곤도의 투수 코치였던 곤도 사다오는 훗날 '투수 분업제'를 제안하는 등 일본 프로 야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곤도 자신은 연투를 거듭했던 신인 시절을 회상하며 "그 무렵, 또 하나의 내가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 스스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역 시절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기마타 다쓰히코는 저서에서 "유연하고 탄력적인 다리와 허리를 이용한 폼으로, 아마 150 km/h를 넘는 직구를 던졌다"고 기록했다. 그의 솟구치는 듯한 속구는 과거 사와무라 에이지와 대결했던 마쓰키 겐지로로부터 "가장 사와무라에 가까운 투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곤도 히로시는 야구 해설가와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다양한 프로 야구팀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은퇴 후 구단으로부터 1군 매니저를 제안받았으나, 자신의 성격상 팀에 동행할 경우 선수들에게 월권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고사했다. 주니치 퇴단 후, 그는 도카이 라디오에서 프로 야구 해설자(1969년~1972년)로 활동했는데, 당시 보수는 경기당 성과급이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야구 해설은 월 2~3회에 불과하여 시간이 많았고, 지인들과 골프를 치며 한 달의 절반을 코스에서 보냈다. '프로 골퍼가 되려는 것이냐'는 말도 들었지만, 본인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당시 던롭 스포츠 경영자였던 아이바 요시로가 "어슬렁거리며 놀고만 있으면 안 된다"고 훈계하며 "야구 해설을 하면서 우리 회사에서 일하라"고 손을 내밀어, 브리지스톤 이후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나고야 시내 회사에서 전표를 쓰고 백화점 등에서 재고 정리를 했으며, 해설이 있는 날에는 오후에 야구장으로 향했다. 곤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른 길을 벗어나려던 자신을 바로잡아 준 아이바 사장을 '야구를 제대로 하게 해준 대은인'이라고 말했다.
1973년, 감독 요나미네 가나메의 초청으로 주니치에 복귀하여 2군 투수 코치(1973년~1980년)와 1군 투수 코치(1981년~1983년)를 맡아 1974년과 1982년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주니치 투수 코치로 있으면서 가쿠 겐지, 미야코 유지로 등을 지도했으며, 1982년에는 우시지마 가즈히코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켰다. 곤도는 당시 우시지마에 대해 "선발로 나서면 밋밋한 공이 나오지만, 승부처에서는 멋진 공을 던진다. 마무리로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했고, 우시지마는 마무리로서 7승 4패 17세이브의 좋은 성적을 남겼다.
주니치를 퇴단한 후 후지 TV·도카이 TV·도카이 라디오 야구 해설가,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1984년~1987년)로 활동하다가 1988년부터 오기 아키라 감독의 주선으로 긴테쓰 버펄로스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오기 감독과는 현역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오기와 곤도를 코치 시절 지도했던 쓰보우치 미치노리가 오기에게 곤도를 추천했다. 곤도는 긴테쓰에서 부진하던 야마사키 신타로를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하고, 가토 데쓰로를 재기시키며, 요시이 마사토를 마무리 투수로 발탁했다. 1988년 6월, 리처드 데이비스가 대마초 불법 소지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곤도는 주니치 구단 관계자를 통해 당시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으로 1군 출전 기회가 없던 랄프 브라이언트에 대해 확인했다. 곧바로 오기 감독에게 보고했고, 나카니시 후토시 수석 코치와 함께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웨스턴 리그 주니치전을 시찰하여 브라이언트의 거칠지만 빠른 스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긴테쓰는 주니치에 현금 트레이드를 신청하여 브라이언트를 영입했다. 곤도 부임 첫해인 1988년, 전년도 리그 최하위(4.22)였던 긴테쓰의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2위인 3.23으로 개선되었고, 이듬해 1989년에도 팀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오기 감독과의 의견 충돌로 갈등을 겪었고, 위약금 1,300만 엔을 지불하고 그 해를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1990년에는 도카이 TV 야구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오프에는 다이에 호크스와 친정팀 주니치로부터 투수 코치 제의를 받았다. 다이에가 먼저 제의했고, 당시 구단 프런트에 있던 스기우라 다다시가 이전에 감독 시절 자신을 코치로 초빙했던 인연으로, 생활 거점인 나고야의 주니치 대신 다이에를 선택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다이에 1군 투수 코치를 맡는 동안 팀 평균자책점을 5.56에서 4.22로 낮추는 등 투수진을 개선했지만, 리그 최하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무라타 가쓰요시, 모토하라 마사하루를 지도했고, 이케다 지카후사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다. 다이에 코치 3년째에는 네모토 리쿠오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시모야나기 쓰요시의 기용을 제안하여, 오랜 기간 시모야나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다이에 퇴단 후 다시 후지 TV·도카이 TV·도카이 라디오 야구 해설가,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1994년~1996년)로 활동했고, 1997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배터리 코치 겸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투수진을 정비하여 팀 평균자책점을 전년도 최하위(4.67)에서 3.70으로 개선하는 등 팀을 2위로 이끌었다. 1998년에는 요코하마 감독으로 승격했다. 당시 59세로 감독 첫 취임 시 연령으로는 역대 최고령이었지만, 부임 1년째인 1998년에 팀을 38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후 2000년까지 감독을 맡으며 3년 동안 모두 팀을 A클래스(1위~3위)에 진입시켰다.
요코하마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도카이 TV(2009년~2011년), 도카이 라디오(2001년~2011년), 스포츠 호치(2001년~2008년)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2002년부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친분이 있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퇴임으로 무산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구단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코치 제의를 받았다. 2012년에는 현역 시절 동료인 다카기 모리미치가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하자 1군 투수 코치로 다시 부임했다. 당시 73세로 일본 프로 야구 현역 감독 및 코치 중 최고령이었으며, 수석 코치 격으로 다카기 감독을 보좌했다. 복귀 후 신인 및 젊은 투수들의 적극적인 기용과 선발 요원이었던 야마이 다이스케의 구원 전환 등을 통해 팀의 센트럴 리그 2위와 6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시즌 막판 에이스 요시미 가즈키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나카타 겐이치, 엔옐버트 소토도 등판이 불가능해지는 위기를 겪었다. 남아있는 선발 투수는 시즌 10승의 야마우치 소마 외에 4승의 오노 유다이, 3승의 가와카미 겐신, 야마모토 마사, 1승의 이토 준키뿐인 상황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3연승을 거뒀다. 그러나 구단 측은 요미우리에게 패한 직후인 2012년 10월 24일 곤도의 퇴단을 공식 발표하여 1년 만에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13년부터는 도카이 TV와 도카이 라디오 야구 해설자로 복귀했고,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6년에는 '사무라이 재팬 평가전 - 일본 vs 중화 타이베이'의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으며, 2017년 제4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았다.
3.1. 지도 철학
곤도 히로시는 미국 플로리다 교육 리그에서의 코치 연수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독특한 지도 철학인 'Don't over teach'(지나치게 가르치지 않는다, 혹은 간섭하지 않는다)를 코치 및 감독 생활 전반에 걸쳐 관철했다. 곤도 본인은 이러한 지도 방식을 '분방주의'(奔放主義일본어)라고 명명했다. 그는 선수의 감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팀을 승리로 이끄는 수완을 보여주었고, 이는 당시 여러 언론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야구계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지론 중에는 "지금 야구는 마무리 투수에서 8할이 결정된다", "마무리 투수는 4번 타자에 해당한다. 선발진의 세 기둥보다 격상"과 같은 견해도 있다. 곤도는 현장 복귀의 길을 열어준 던롭 스포츠의 경영자였던 아이바 요시로와 요나미네 가나메 감독을 자신의 은인으로 꼽았다.
3.2. 투수 코치로서
곤도 히로시는 "투구폼은 그 투수의 주장"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 투수들의 폼에 대해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폼 교정을 시도한 선수는 미야코 유지로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긴테쓰 버펄로스 코치 시절 곤도에게 지도를 받았던 가토 데쓰로는 "당시 투수진은 모두 곤도 코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제 야구 인생에서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곤도 코치뿐입니다. 현역 시절 잦은 등판으로 어깨를 다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투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생각해 주는 분이었습니다"라고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했다. 역시 긴테쓰 코치 시절 곤도에게 지도를 받았던 요시이 마사토는 곤도를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존경하는 코치로 꼽으며 "그 이전까지는 벤치에 있는 감독과 코치진을 의식하며 던졌는데, 곤도 코치로부터 '안타나 홈런을 맞으면 내 탓이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이후로 마운드에 용기를 가지고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투수였던 히라누마 사다하루는 "프로에 와서 처음 만난 곤도 히로시 코치의 임팩트는 엄청났다. 투수 코치인데도 감독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얼굴만 마주쳐도 몸 상태가 나빠질 정도였지만,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만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곤도는 볼카운트 2스트라이크 노 볼 상황에서 고의적으로 볼을 던져 승부를 피하는 것에 대해 "투수가 유리한데 왜 굳이 피하는가"라며 3구 승부를 하지 않는 배터리가 많은 현실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구계에 완전히 정착한 선발 투수들의 6일 간격 로테이션에 대해 곤도는 2022년의 한 영상에서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며, "40대에도 공을 던지는 선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체로 투수의 어깨는 이틀이면 회복되고, 사흘을 두면 충분히 가능하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루 더 둔다면 4일 간격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 대신 1시즌 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1경기 등판 원칙을 100구, 최대 120구로 투구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3.2.1. 감독들과의 갈등
곤도는 코치로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으로, 설령 상사(감독)라 할지라도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언동에는 철저히 반론을 제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훗날 "'감독 따위에게 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일했다. 감독에게 얕보이는 코치라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을 내보냈다"고 밝혔다.
긴테쓰 버펄로스 코치 시절에는 오기 아키라 감독과, 다이에 호크스 코치 시절에는 다부치 고이치 감독과 갈등을 겪었다. 특히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시절에는 다카기 모리미치 감독과의 불화설이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긴테쓰 코치 시절, 곤도는 투수 육성 및 심리적, 신체적 컨디션 측면에서 중간 계투를 빈번하게 기용했던 오기 감독의 투수 운용에 이의를 제기했다. 반면 오기 감독은 자신의 저서에서 코치는 감독이나 투수의 이익 대표가 아니라는 점에서 곤도의 자세를 "코치로서의 직분과 위치를 분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주니치 코치 시절(2012년), 곤도는 다카기 감독과 투수 기용 등에서 종종 의견이 대립했다. 당시 다카기 감독은 기자회견이나 팀 내부에서 선수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질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곤도는 "언론 앞에서 선수의 험담을 하지 마라. 선수들은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맞고 안 맞는 것은 코치의 책임이고, 이기고 지는 것은 감독의 책임"이라고 다카기 감독을 비유적으로 훈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프로 야구계에 오래 몸담으며 코치 시절 최악의 화내는 방법을 알았다. 남들 앞에서 화내는 것은 최악의 방식이다. 남들 앞에서 혼나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에게는 남들 앞에서 혼나는 것이 수치스러울 뿐이므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고 기술했다. 그럼에도 그는 2012년 시즌 종료 후 퇴단을 앞두고 "다카기 감독에 대한 앙금은 없다"고 말했다.
에나쓰 유타카는 곤도를 "명감독은 많아도 명코치는 적다. 그중에서 타격 쪽 명코치는 나카니시 후토시, 투구 쪽 명코치는 곤도"라고 높이 평가했다. 에나쓰는 또한 2012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곤도의 계투 전략을 극찬하며 그의 퇴단을 아쉬워했다. 도요다 야스미쓰 역시 곤도와 다카기의 대립을 "서로의 직무를 다하려 했기에 생긴 싸움이었다. 이런 에너지를 품은 팀과 맞서는 것은 오히려 싫은 일이다"라고 평가하며 곤도의 퇴단을 안타까워했다. 곤도의 주니치 퇴단은 1989년 긴테쓰 퇴단 때와 유사하게, 2012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1989년 일본 시리즈 모두 투수 기용을 둘러싼 감독과의 대립이 퇴단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3.3. 감독으로서
곤도 히로시는 다이요, 요코하마, DeNA의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재임 기간 동안 모든 시즌을 A클래스(1위~3위)로 마친 감독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 시절 그는 '오레오 고토오 '간토쿠' 토 요부나!'(나를 '감독님'이라고 부르지 마라!)'라는 독특한 방침을 내세우며, 자신을 '곤도 상'(権藤さん일본어)으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이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를 내다봄과 동시에, 직함을 버려 선수들과의 벽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 규칙은 선수와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취재진에게도 적용되었으며, 위반 시 벌금 1000 JPY를 부과한다는 명목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소속 선수였던 베테랑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이 규칙을 모른 채 곤도를 "감독님!"이라고 불렀다가, 곤도가 못 들은 척하자 다시 "감독님!"하고 불렀고, 이에 곤도는 "어 그래, 자네는 벌금 2000 JPY!"라고 말해 다니시게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그는 야간 훈련을 강제하지 않고 각 선수들의 자율성에 맡겼다. 선수 전원을 모으는 미팅도 기본적으로 진행하지 않았으며, 개최하더라도 "여러분은 프로이니 프로답게 해주십시오"와 같은 간단한 한마디로 끝내고 곧바로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그라운드 등에서 선수 개개인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며 교감했다.
감독 부임 초기, 그는 코치진에게 "선수들이 연습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연습하는 모습을 잘 관찰해 주었으면 한다. 단, 선수들이 조언을 구할 때까지 기술적인 지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곤도 휘하에서 코치로 활동했던 야마시타 다이스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프로 선수는 당연히 그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1군 선수라면 기술뿐만 아니라 야구에 대한 생각도 확실히 가지고 있다. 물론 신인이나 부진에 시달리는 선수에게는 적절한 지도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에게 코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곤도 감독이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수 개개인을 최대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선수의 자율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베이스타스에는 개성 강한 야수와 투수가 많았고, 선수들끼리 서로 자극하고 경쟁했다.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팀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하나로 뭉쳐 있었다.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말보다 태도로 선수들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독려한 곤도 감독의 생각 덕분이라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곤도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큰 활약을 보였던 로버트 로즈는 곤도를 '최고의 보스'라고 존경했다. 로즈는 해마다 자신을 대체할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거나 연봉 협상에 소극적인 구단 프런트에 불만을 품고 은퇴까지 고려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린 곤도는 1999년 여름, 구단 통역이 아닌 영어에 능통한 자신의 딸만 대동하여 로즈와 단둘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로즈는 "곤도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은퇴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곤도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이는 그의 맹활약의 밑거름이 되었다.
곤도의 좌우명은 'Kill or be Killed'(죽이거나 내가 죽거나)'이다. 요코하마 감독 시절 그는 개막전 벤치에 합류한 투수 전원에게 이 문구를 새긴 사인볼을 건네주기도 했다. 덕아웃에서 지휘할 때 벤치에 앉지 않고 서서 턱이나 뺨에 손바닥을 대고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이 자주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이 자세는 곤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당시 스포츠 신문이나 주간지의 풍자 만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코치 시절에도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이자 오랜 친분이 있던 히가시오 오사무와 시리즈 직전 언론에 공개된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선발 투수를 예고하는 약속을 주고받았다. 이는 경기장 밖에서의 설전이나 심리전을 배제하고, 선수들의 순수한 힘과 기술의 승부를 만끽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시리즈 종료 후에도 스포츠 전문지 'Sports Graphic Number'에서 히가시오와 대담을 가졌는데, 시리즈 종료 후 불과 몇 주 만에 맞대결을 펼쳤던 양 팀 감독이 대담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3.3.1. 감독 스타일 및 전략
곤도 히로시는 스스로 "나는 8할이 투수 코치"라고 공언했으며, 경기 중에도 벤치에서 볼배합 사인을 내거나 직접 마운드에 올라가 투수에게 지시를 내리고 투수 교체를 단행하는 등 투수진 운용에 깊이 관여했다. 곤도 휘하에서 2000년 1군 투수 코치를 지낸 엔도 가즈히코는 "나는 투수 코치 보좌(적인 입장)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반면 야수들에게는 수석 코치인 야마시타 다이스케나 타격 코치인 다카기 요시카즈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일임했으며, 타자와 주자에게 보내는 사인도 최소한으로 줄여 선수 개개인의 판단에 맡겼다. 일례로 1번과 2번 타자를 주로 맡았던 이시이 다쿠로와 하루 도시오에게는 희생 번트나 히트 앤드 런 등과 같은 지시를 내리지 않고 노사인으로 콤비 플레이를 맡겼다. 야마시타는 곤도에게 "공격에서 고민이 생기면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고, 곤도는 이 조언을 철저히 따라 사인을 거의 내지 않았다. 야마시타는 특히 "(1998년에는) 단 한 번도 번트 사인을 내지 않았다. 그해는 히트 앤드 런 사인도 한 번도 내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인이 너무 나오지 않아, 2000년 전반기 팀이 최하위로 침체되자 선수들이 주도하여 소집한 미팅에서 공격 전술에 대한 사인을 더 내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그의 현역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지론은 그의 감독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코하마 감독으로 부임한 1998년에는 사사키 가즈히로를 확고한 마무리 투수로 두었으며, 다른 구원 투수들에게도 '중간 계투 로테이션'을 확립하여 연투로 인한 혹사를 최대한 피하게 했다.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기본적으로 3연투는 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틀 던지면 다음날은 꼭 쉰다. 팀을 '블랙 기업'으로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길 만한 경기에서 쓸 수 있는 중간 계투를 좌우로 나누어 운용했다. 우투수라면 이가라시 히데키, 시마다 나오야가 있고, 좌투수라면 아와노 히데유키, 모리나카 마사오 등이 있었다. 거기서 로테이션을 짜면서 같은 날 이가라시와 시마다를 동시에 기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에서 선발이 7회까지 버텨주면 경기가 편안하게 전개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8회에 세 명이라도 투입할 수 있으니까. 곤도는 감독 시절 '나는 투수 코치다'라고 말했었고, 투수진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역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다이에 호크스 코치 시절의 시모야나기 쓰요시에게만은 예외적으로 매일 연습과 경기에 등판시켜 제구력을 향상시키도록 했다. 이는 당시 감독인 네모토 리쿠오가 시모야나기 본인의 강인한 신체와 사회인 시절부터의 훈련량과 질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녀석은 망가지지 않는다"고 곤도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곤도는 "보내기 번트는 일부러 적에게 아웃 카운트를 헌납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작전", "감독으로서는 일관되게 희생타의 필요성을 부정해 왔다"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제한된 상황에서만 희생 번트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요코하마 감독 재임 기간 3년 동안 팀의 희생타 개수는 리그 최소 기록을 나타냈다. 이러한 그의 전술은 '머니볼 이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 '중간 계투 로테이션' 등의 지론과 함께 메이저리그의 사고방식과도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경기 종반 1점을 다투는 상황에서의 보내기 번트까지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팀이 우승 경쟁을 하는 시즌 후반부에는 감독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요코하마가 우승했던 1998년에는 9월 후반부터 희생 번트를 사용하거나, 세이브 상황이 아닌데도 사사키 가즈히로를 등판시키는 경우가 포착되기도 했다.
그는 "심판은 절대적이며, 항의해도 판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지론을 준수하여 판정에 대해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카다 이사오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날 경기에서 스트라이크-볼 판정으로 선수들이 항의를 부추기자 심판에게 다가갔지만, "선수들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세상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말하며 사담을 나누다가 "고맙다"고 하고 벤치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1998년 8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스즈키 다카노리의 홈런성 타구가 2루타로 판정되자, 곤도는 덕아웃에서 나와 심판에게 한마디 확인하고는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에 선수들은 "항상 싸우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싸우지 않는 건가?"라며 불신감을 가졌고, 곤도는 다음날 "모두에게 싸우라고 말해왔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어젯밤 심판과 싸우지 않았다. 미안하다,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선수들에게 사과했다. 그 말대로 다음 날 경기에서 하루 도시오가 수비 방해 판정을 받자, 덕아웃에서 뛰쳐나와 심판에게 언성을 높이며 5분간 맹렬히 항의했다.
이러한 곤도의 방침은 부임 2년차 이후 팀 내부에서 마찰을 빚기 시작했으며, 특히 야수진과는 거의 모든 것을 코치에게 일임한 탓인지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임 3년차인 2000년에는 팀 성적 부진을 계기로 내분이 표면화되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은 2000년 6월 18일 히로시마전(12차전)에서 발생했다. 곤도가 상대 투수 네이선 민치에 맞서 좌타자 고마다 노리히로 대신 우타자 나카네 히토시를 대타로 내보내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고마다는 격분하여 경기 도중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언론에 고마다의 '무단 귀가'로 보도되었다. 사실 이 반발은 단순히 대타 교체 때문만이 아니라, 고마다가 이전부터 곤도의 지휘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고마다는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편 곤도 자신도 당시 오호리 다카시 구단 사장과는 친밀한 관계였지만, 다른 프런트와 이시이 다쿠로 등 일부 주력 선수들과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그해를 마지막으로 계약 만료로 퇴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고마다는 "곤도 감독은 일부 아끼는 선수들만 교감하고 있어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선수회 회장 이시이 다쿠로 등의 재촉으로 자신이 팀의 현 상황과 곤도 감독의 방침에 대해 쓴소리를 했는데, 그 후로는 말도 붙일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단 귀가'라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하며, "야마시타 다이스케 수석 코치가 저를 무척 걱정해서 '2000안타라는 목표가 있지 않나. 오늘은 돌아가도 좋으니 (다음 경기 장소인) 진구 구장에는 꼭 와달라'고 말해 주었다. 신문에는 '무단 귀가'라고 보도되었지만, 야마시타 코치의 말이 있었으니, 무단은 절대 아니었다"고 밝혔다. 곤도는 훗날 "은퇴하고 나서 고마다가 저를 이해해 주었다. '곤도 감독이 아니었다면 2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때는 2군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위에 두면 난동을 부릴 테니까. 대신 10일 동안 2군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고 했다. 경기에 나가도 좋고, 쉬어도 좋다고. 대신 10일 뒤 1군에 돌아오면 5번 타자를 시키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고마다와 만나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설명했다.
3.3.2.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립
감독으로서 곤도는 "무엇보다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생각이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이라는 철학을 지켰다. 센트럴 리그 우승 후 헹가래를 받은 직후에도 히어로 인터뷰에서 한두 마디만 하고 끝냈으며, 이후 개별 인터뷰에서도 "주역은 선수니까"라며 출연을 고사하는 등 팬이나 취재진 앞에서 선수들보다 돋보이는 언동을 삼갔다.
이에 대해 같은 시기 야쿠르트와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으며 "야구는 감독의 지휘 여하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감독은 홍보도 겸하고 있다"는 지론을 펼쳤던 노무라 가쓰야는 곤도의 지휘 스타일과 머신건 타선을 "제멋대로이고 무례할 정도의 예의 없는 야구"라고 평가절하하며, 곤도나 요코하마 선수들의 인격적인 부분까지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98년, 정규 시즌 우승 매직넘버 3을 남겨둔 요코하마는 10월 3일부터 10월 6일까지 홈구장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야쿠르트와 4연전을 맞이했다. 이 연전 이전 요코하마는 앞에서 언급된 악연으로 인해 곤도가 "ID 야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선수들을 독려하며 야쿠르트전에서 특히 투지를 불태워 크게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연고지 요코하마에서의 우승 헹가래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지만, 노무라는 "1년차 곤도에게 쉽게 우승을 안겨줄 수 없다"며 투쟁심을 드러냈고, 당시 호조를 보이던 가와사키 겐지로, 이시이 가즈히사, 이토 도모히토 등을 연달아 투입하여 3연승을 거두며 자신의 눈앞에서의 우승 헹가래를 저지했다. 곤도 자신도 "그라운드 위에서 박보장기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며 은근히 노무라를 비하하기도 했다.
노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곤도를 "전형적인 투수 유형의 성격", "감독이 되고 나서도 호쾌한 야구를 좋아한다", "술꾼" 등으로 묘사하며 "나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야구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노무라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슈칸 포스트'의 '위협구 좌담회'에서 에모토 다케노리와 히가시오 오사무가 노무라의 감독 취임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반면, 곤도는 "라쿠텐 선수들은 야구를 너무 모른다. 이럴 때 노무라로부터 야구를 제대로 배우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2020년 노무라가 사망했을 때는 "노무라의 대단함은 인재를 파악하는 안목이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아이디어맨이자 대단한 야구인"이라고 말하며, 노무라의 감독으로서의 수완을 높이 평가했다.
4. 수상 및 업적
곤도 히로시는 선수 및 지도자 경력 동안 수많은 타이틀과 상을 획득하며 일본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4.1. 선수 타이틀 및 수상
- 다승왕: 2회 (1961년, 1962년)
- 2년 연속 다승왕은 센트럴 리그 최장 타이 기록이다. (다른 수상자: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히라마쓰 마사지, 에가와 스구루, 엔도 가즈히코,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마사, 세스 그라이싱어, 우쓰미 데쓰야, 스가노 도모유키, 아오야기 고요)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61년)
- 최다 탈삼진: 1회 (1961년)
- 당시에는 연맹 표창 타이틀이 아니었으며,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되었다.
- 신인왕 (1961년)
-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 (1961년)
- 신인 선수로서 수상한 것은 3년 연속으로, 시즌 69경기 등판은 수상자 중 최다 타이 기록이다.
- 베스트 나인: 1회 (1961년)
- 일본 야구 전당 헌액자 (2019년, 전문가 부문)
4.2. 지도자 업적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일본 시리즈 우승 (1998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센트럴 리그 우승 (1998년)
- 감독 재임 기간 3년 동안 모두 A클래스(1위~3위)를 달성한 유일한 감독이다.
4.3. 주요 기록
- 투수 삼관왕: 1회 (1961년)
-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10번째, 만 22세 시즌에 달성하여 마에다 겐타와 함께 센트럴 리그 최연소 타이 기록이다.
- 투수 삼관왕에 최다 완봉을 더한 기록은 역사상 7번째이며, 신인 선수로는 유일하다.
- 시즌 최다 투구 이닝: 429.1 이닝 (1961년)
- 센트럴 리그 역대 최고 기록이다.
- 신인 기록 (1961년)
- 최다 승리: 35승
- 최다 완봉 승리: 12승 (하야시 야스오와 타이 기록)
- 최다 무사사구 완투 경기수: 8경기
- 최다 탈삼진수: 310개
- 최다 완투: 32회 (신인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30승 이상: 2년 연속 2차례 (1961년, 1962년)
- 2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며, 2차례는 스기시타 시게루, 가네다 마사이치와 나란히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이다. 퍼시픽 리그 및 단일 리그 시대를 포함하면 빅토르 스타루힌, 벳쇼 다케히코, 스기우라 다다시와 나란히 역대 3위 타이 기록이다.
- 올스타전 출장: 3회 (1961년~1963년)
- 개인 첫 기록
- 첫 등판·첫 승리: 1961년 4월 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고라쿠엔 구장)
4.3.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소속 등판 선발 완투 완봉 무4구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고4 몸맞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평균자책 WHIP 1961년 주니치 69 44 32 12 8 35 19 -- -- .648 1645 429.1 321 20 70 8 3 310 3 1 97 81 1.70 0.91 1962년 61 39 23 6 3 30 17 -- -- .638 1421 362.1 307 26 69 2 3 212 5 0 108 94 2.33 1.04 1963년 45 31 9 0 1 10 12 -- -- .455 922 220.2 205 29 79 2 4 88 1 1 105 94 3.83 1.29 1964년 26 16 3 0 1 6 11 -- -- .353 458 105.1 105 12 45 1 3 47 4 0 53 49 4.19 1.42 1968년 9 1 0 0 0 1 1 -- -- .500 95 18.1 32 5 11 0 2 10 0 0 23 22 10.80 2.35 통산: 5년 210 131 67 18 13 82 60 -- -- .577 4541 1136.0 970 92 274 13 15 667 13 2 386 340 2.69 1.1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4.3.2.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자 희생번트 희생플 볼넷 고4 사구 삼진 병살타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961년 주니치 70 163 144 18 31 7 0 1 41 8 1 0 13 0 6 0 0 24 4 .215 .247 .285 .531 1962년 61 130 117 10 25 5 0 4 42 13 0 0 8 1 4 0 0 19 3 .214 .238 .359 .597 1963년 49 83 76 8 18 5 0 3 32 8 0 0 3 0 4 0 0 12 2 .237 .275 .421 .696 1964년 29 39 38 3 7 2 0 1 12 4 0 0 0 0 1 0 0 5 1 .184 .205 .316 .521 1965년 81 212 196 28 39 11 0 3 59 18 3 3 2 0 14 0 0 24 3 .199 .252 .301 .553 1966년 74 198 179 17 32 7 1 1 44 7 2 5 4 1 12 0 2 28 0 .179 .237 .246 .483 1967년 107 331 288 34 62 8 3 5 91 27 6 6 26 4 11 0 2 50 3 .215 .246 .316 .562 1968년 12 3 3 1 0 0 0 0 0 0 0 0 0 0 0 0 0 1 1 .000 .000 .000 .000 통산: 8년 483 1159 1041 119 214 45 4 18 321 85 12 14 56 6 52 0 4 163 17 .206 .245 .308 .553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4.3.3. 연도별 감독 성적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98년 요코하마 1위 136 79 56 1 .585 - 100 .277 3.49 60세 1999년 3위 135 71 64 0 .526 10.0 140 .294 4.44 61세 2000년 3위 136 69 66 1 .511 9.0 103 .277 3.92 62세 통산: 3년 407 219 186 2 .541 A클래스: 3회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4.3.4. 등번호
- 20 (1961년~1968년)
- 64 (1973년~1977년)
- 76 (1978년~1983년)
- 70 (1988년~1989년, 1991년~1993년)
- 72 (1997년~2000년, 2012년)
5. 인물 및 에피소드
곤도 히로시는 야구계에서 독특한 성격과 여러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같은 규슈 출신의 전설적인 대투수 이나오 가즈히사를 매우 존경했다. 사회인 야구단 시절, 그는 훈련의 전부를 이나오의 투구 폼을 흉내 내는 것으로 보냈다. 크게 휘두르며 축이 되는 오른발이 발끝으로 설 정도로 몸을 뻗어 던지는 폼은 이나오와 놀랍도록 닮았는데, 곤도는 축발의 뒤꿈치를 드는 방법만을 익히기 위해 따로 1시간씩 연습하기도 했다. 또한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아래를 보며 달리는 모습까지 이나오를 곧잘 따라 했다고 한다.
반면, 가네다 마사이치의 NPB 400승 기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네다의 400승 중 약 90%에 해당하는 353승이 약체팀인 고쿠테쓰 스왈로스 시절에 기록된 것이며, 우승을 다투는 중요한 경기에서 던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가치를 부정했다.
후배 세대에 대해서는 스가노 도모유키, 오타니 쇼헤이, 후지나미 신타로의 재능을 "격이 다르다"고 평가했다. 특히 후지나미에 대해서는 "작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그의 거친 공까지 용인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동시에 한신 타이거스 시절 후지나미의 들쭉날쭉한 기용법에 대해 한신 구단을 강하게 비판하며 "트레이드로 내보내는 것이 좋지 않았겠나", "저기(한신)로는 무리다"라고 말하며, 한신이 후지나미를 육성할 만한 팀이 아니라고 혹평했다(2022년 시즌 중 시점).
곤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프로 입단 이후에도 월급의 절반을 고향의 어머니에게 보낼 만큼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는 럭비에 대한 조예가 깊어, 친분이 있는 모리 시게타카와의 텔레비전 대담에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었다. 골프 또한 그의 취미로, 현역 은퇴 후 한때 골프 관련 업종에 종사하기도 했다. 프로 골퍼의 제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장타자로, 72세의 나이에도 헤드 스피드 48 m/s를 기록한 바 있다.
에모토 다케노리와 시모야나기 쓰요시에 따르면, 곤도는 대단한 맥주 애호가라고 한다.
6. 유산 및 평가
곤도 히로시는 일본 야구계에서 그의 역사적 중요성과 영향력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선수 시절 혹사 경험은 훗날 그가 '선수를 지나치게 가르치지 않는' 독특한 지도 철학과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지론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당시 일본 야구의 권위적이고 혹사에 가까웠던 관행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며, 선수 복지와 자율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6.1. 긍정적 평가
곤도 히로시는 선수 육성 및 팀 관리에서 보여준 혁신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야구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Don't over teach'(지나치게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은 선수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당시 많은 감독과 코치들의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지도 방식과 대비되며, 선수 개인의 성장을 도모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투수 폼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고,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지론을 바탕으로 선발 투수의 투구수 제한과 중간 계투 로테이션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선수들의 부상 방지 및 장기적인 활약을 도모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생각이었으며, 훗날 일본 야구 전반의 투수 운용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 시절 1998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높이 평가된다. 그는 팀의 모든 선수에게 '감독님' 대신 '곤도 상'으로 부르도록 지시하며 선수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강조했고, 야간 훈련 강제 등 통제적인 관행을 없애 선수들의 자율성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로버트 로즈와 같은 외국인 선수들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으며, 개성 강한 선수들을 하나로 뭉쳐 팀워크를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희생 번트 최소화 등 공격적인 야구 스타일 또한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6.2. 비판 및 논란
곤도 히로시의 행동, 결정, 그리고 철학은 때로는 비판적인 관점과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지도 스타일인 '지나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때로는 팀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 재임 시절 야수진에 대한 코칭을 전적으로 다른 코치에게 일임하고 최소한의 지시만 내린 것이 야수진과의 의사소통 부재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000년 고마다 노리히로 대타 교체 사건은 이러한 갈등의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고마다가 감독의 결정에 격분하여 경기 도중 귀가한 사건은 곤도의 선수 관리 방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당시 고마다는 곤도 감독이 일부 아끼는 선수들과만 교감하고, 자신과 같은 선수들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주장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비록 곤도는 훗날 고마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밝혔으나, 이 사건은 감독과 선수 간의 소통 부족으로 인한 갈등의 대표적인 예시로 남아있다.
또한 곤도는 긴테쓰 버펄로스 코치 시절 오기 아키라 감독, 다이에 호크스 코치 시절 다부치 고이치 감독, 주니치 드래건스 코치 시절 다카기 모리미치 감독 등 상위 감독들과 여러 차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감독의 투수 운용 방식에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나, 이러한 태도가 때로는 팀 내 불화를 야기하고 자신의 조기 퇴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노무라 가쓰야와의 공개적인 대립은 '선수 중심의 자율 야구'와 '감독 중심의 관리 야구'라는 상반된 철학의 충돌을 보여주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곤도 히로시의 지도 방식은 일본 야구계에 새로운 시각과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의 유산은 여전히 복합적으로 평가된다.
7. 저서 및 언론 활동
곤도 히로시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쳤으며, 자신의 야구 철학을 담은 여러 서적을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했다.
7.1. 저서
-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教えない教え일본어)》(슈에이샤, 2010년 11월 17일)
- 《더 던지고 싶지는 않을까: 곤도 히로시로부터의 메시지(もっと投げたくはないか: 権藤博からのメッセージ일본어)》(닛칸 스포츠 출판사, 2014년 10월)
- 《계투론 - 투수 교체의 비법(継投論 投手交代の極意일본어)》(廣済堂出版, 2017년 12월) - 니노미야 세이준과 공저
- 《타자가 싫어하는 투구론 투수가 싫어하는 타격론(打者が嫌がる投球論 投手が嫌がる打撃論일본어)》(廣済堂出版, 2019년 11월) - 니노미야 세이준과 공저
7.2. 언론 활동
곤도 히로시는 다양한 방송사에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야구 지식과 통찰을 전달했다.
- 도카이 라디오 '가쓰 나이터' (1969년~1972년, 2001년~2011년, 2013년~)
- 후지 TV 'BASEBALL SPECIAL ~야구도~' (프로 야구 중계)
- 후지 TV '프로 야구 뉴스' (지상파 시대 출연)
- 도카이 TV '히로미쓰의 슈퍼 드래건스' (2009년~2011년, 2013년~)
- TV 아이치 '프로 야구 열전 ~불멸의 히어로들~'
- 스포츠 호치 (2001년~2008년) 야구 평론가
- 닛칸 스포츠 (1990년, 2013년~) 야구 평론가
-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1년~) 칼럼 '유유구론'(悠々球論일본어) 집필
- 메~테레 '슈퍼 베이스볼' (2008년 6월 1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전, 계약 출연)
- TOKYO FM '스즈키 도시의 지브리 땀 범벅' (2009년 9월, 2010년 4월·10월, 게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