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오노 하루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봉사했으며,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히데요리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1.1. 출생 및 가계
오노 하루나가는 에이로쿠 12년(1569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교토의 수도에서 태어났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오와리 군서 계도부집』(尾張群書系図部集)에 근거하여 오와리국 하구리군 오노촌(현재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아사이초 오노)에서 태어난 성주 일족이라는 설이다. 단고국 오노촌(현재 교탄고시)에서 태어났다는 설은 그의 영지와 혼동되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하루나가의 아버지는 오노 사다나가(사도노카미)이며, 어머니는 요도도노의 유모였던 오쿠라쿄노츠보네이다. 이 때문에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는 유모의 자식(젖형제) 관계였다. 요도도노의 출생년에 여러 설이 있지만, 하루나가가 요도도노와 동갑이거나 매우 비슷한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노 가문은 본래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의 신직 가문이었으나, 신직을 잃고 미노국으로 유랑해왔다. 하루나가의 할아버지인 오노 하루사다(이가노카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그곳에 오노성을 쌓고 거성으로 삼았다. 사다나가는 하루사다의 아들이며, 오노성을 계승한 오노 하루히사(하루나가에게는 숙부)는 사다나가의 동생이다. 『남로지』(南路志)에 따르면, 오와리 하구리군 동향 출신인 모리 가쓰나가와는 사촌 관계였다고 한다.
하루나가에게는 오노 하루후사(슈메노카미), 오노 하루타네(도켄/도미), 오노 하루즈미(이키노카미) 등의 형제들이 있었다. 다만 하루즈미는 족보에 이름이 없어, 종종 하루나가와 하루후사만을 오노 형제로, 혹은 하루나가, 하루후사, 도켄을 오노 삼형제로 부르기도 한다. 오쿠라쿄노츠보네와 하루나가 일족은 오다니성 함락 이후에도 계속 요도도노를 따랐던 것으로 보이나, 덴쇼 11년(1583년) 에치젠국 기타노쇼성이 함락된 후에는 요도도노의 행방조차 불분명하여 오노 일족이 어떤 경위를 겪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이 시기인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에는 본가의 오노 하루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대하여 영지를 잃고 오노성을 상실했다.
하루나가의 초기 경력은 불분명하며, 그가 히데요시의 우마마와리슈가 된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비호 아래 들어간 시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덴쇼 16년(1588년)경 또는 그 직전으로 추정된다.
덴쇼 17년(1589년), 하루나가는 부모의 공적으로 다이코 구라이리치에서 이즈미국 사노(현재 이즈미사노시)와 단고국 오노에 총 10,000석의 영지를 하사받고, 단고 오노성을 거점으로 영지를 운영했다. 이는 같은 해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출산한 것과 관련된 포상 또는 축하의 가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2.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오노 하루나가가 확실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덴쇼 19년(1591년) 11월, 히데요시의 미카와국 기라 사냥에 수행했을 때부터이다.
분로쿠 원년(1592년), 『마쓰라 고사기』(松浦古事記)에 따르면 분로쿠의 역 당시 히젠국 나고야성의 진영 배치에 "오노 슈리노스케"의 이름이 있었으며, 그는 나고야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의 전례에 따라 요도도노나 마쓰노마루도노 등의 측실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요도도노는 바로 이 여름에 다시 임신하여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출산했다.
분로쿠 3년(1594년)에는 후시미성 축조를 분담했으며, 당시 10,000석의 지행을 받았다.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의 사망 시 유물로 금자 15매를 받았다. 게이초 4년(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알현하여 츠메슈 니반노쿠미(詰衆二番之組)의 필두로서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7일, 중양절 축하를 위해 오사카성에 등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고봉행 중 한 명인 마스다 나가모리가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있다고 밀고했다. 이미 가나자와로 귀국했던 마에다 도시나가가 주모자이며, 아사노 나가마사, 히지카타 다케히사, 하루나가가 공모하여 성내에서 이에야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신변 경비를 강화하여 축하를 무사히 넘긴 후, 오사카성 니시노마루에 들어가 천수각을 조영하여 자신이 히데요리와 동등한 존재임을 과시했다. 또한 모의자들을 적발하기 시작하여, 10월 2일 하루나가는 죄를 물어 유배되어 시모사국의 유키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히지카타 다케히사도 같은 죄로 히타치국 미토의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맡겨졌다. 또한 어머니 오쿠라쿄노츠보네도 오사카에서 추방되었다.
1.3. 세키가하라 전투와 이후
게이초 5년(1600년) 7월 24일, 이에야스는 히지카타 다케히사와 하루나가를 만나 죄를 용서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여 참전했으며, 본전에서는 선봉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대에 소속되었다. 『세키가하라 군기대성』(関原軍記大成)에 따르면,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의 철포 대장인 고치 시치로에몬을 쓰러뜨리는 무공을 세웠다고 한다. 전투 후에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적의가 없다"는 이에야스의 서한을 가지고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가문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이후 하루나가는 에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오사카에 머물렀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는 오사카성의 성주가 되었다.
1.4. 도요토미 히데요리 가신으로서의 활동
게이초 19년(1614년) 6월 22일, 가타기리 가쓰모토의 동생인 가타기리 사다타카와 함께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히데요리로부터 5,000석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받았다. 이로써 그의 총 영지는 15,000석에 달하게 되었다. 그 답례를 위해 사다타카와 함께 이에야스가 있는 슨푸를 방문했고, 이어서 에도의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방문했다.
같은 해, 도요토미 가문의 가로였던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추방되자, 하루나가는 도요토미 가문을 주도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 내부에서는 주전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로닌들을 불러들여 오사카 겨울의 진에 이르게 된다. 하루나가는 와타나베 다다시와 함께 쿠지토리 부교(鬮取奉行)가 되어 도요토미 측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서 농성전을 지휘했다.
도쿠가와 측에서 화친이 제의되자,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오다 우라쿠사이와 함께 하루나가는 도쿠가와 측의 혼다 마사즈미 및 고토 미쓰쓰구와 교섭을 진행했다. 요도도노가 에도로 인질로 가는 것, 도요토미 가문의 로닌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가증, 오사카성 혼마루만 남기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파괴하는 것 등 쌍방의 제안을 정리하여 화의를 성립시켰다. 우라쿠사이와 하루나가는 화친의 보증으로 인질을 내놓게 되었는데, 하루나가는 차남 오노 하루야스(야시치로)를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다. (하루야스는 전쟁 후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성내에서는 화친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화친 후인 이듬해 4월 9일 밤, 하루나가는 오사카성의 누문에서 암습을 당해 호위병 2명이 죽거나 다쳤고, 본인도 칼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는 주전파인 동생 하루후사에 의한 습격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습격범은 하루후사의 가신인 나리타 간베에의 부하(야마토의 코바시구미 이마쿠라 손지로)로 알려져 있다. 나리타는 습격에 실패하자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으며, 도망친 부하들은 가타기리 저택이나 조소카베 모리치카 저택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붙잡았다고 한다.
1.5. 오사카 전투 (여름의 진)
게이초 20년(1615년)의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출격하는 여러 장수들에 앞서 하루나가는 오사카성 혼마루의 수비를 맡았다. 4월 28일, 기이국 와카야마성의 아사노 나가아키라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하루나가는 가신인 기타무라 젠다유, 오노 야고자에몬을 기이로 잠입시켜 잇키(봉기)를 선동했으나 계획은 실패했다. 5월 6일, 혼다 전투에서는 하루나가가 후위를 지휘했으며, 교착 상태에 빠진 후 도요토미 여러 부대와 함께 철수했다. 5월 7일,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는 전군의 후위로서 시텐노지 북동쪽 후방, 비샤몬 연못 남쪽에 포진했다. 통설에 따르면 히데요리의 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총붕괴로 패전한 후, 차우스야마에서 철수해 온 하루나가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출마하여 전사하려던 히데요리를 하야미 모리히사가 만류하여, 혼마루로 철수하여 농성하게 되었다. 하루나가는 마지막 계책으로 독단적으로 쇼군 히데타다의 딸이자 히데요리의 정실이었던 센히메를 탈출시켜, 그녀를 사자로 삼아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히데요리 모자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탄원하게 했다. 이튿날 5월 8일, 도쿠가와 측에서는 심의가 있었고, 이에야스는 손녀의 간청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으나, 히데타다는 센히메가 히데요리와 함께 자결하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히데요리 모자의 조명 탄원을 거부했다. 한 가닥의 희망이 끊어지자, 하루나가 등은 히데요리와 함께 오사카성의 야마자토쿠루와에서 자결했다. 어머니 오쿠라쿄노츠보네와 장남 오노 하루노리도 함께 자결했다. 향년 47세였다. 『가스가샤시 유한기』(春日社司祐範記)에는 "오노 슈리가 일을 처리하고 마지막으로 할복했다. 그의 각오는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인물
오노 하루나가는 무장으로서의 능력 외에도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후루타 오리베에게 다도를 배워 차인이기도 했으며, 뛰어난 서예가였다.
그는 사나다 유키무라와는 히데요시의 우마마와리슈를 지내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며, 오사카 전투에서 유키무라를 오사카로 초대한 것도 하루나가였다고 알려져 있다. 유키무라에게 병력을 맡겨 지휘하게 한 점을 고려할 때, 그를 어리석은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나가가 에도 시대에 악역으로 묘사된 것은 이에야스에게 반대한 도요토미 가문의 수뇌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에도 시대에는 악평을 쓸수록 환영받는 분위기였으므로, 극작가들에 의해 악역으로 꾸며졌을 가능성이 높다.
3. 평가 및 루머

에도 시대 초기부터 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여러 서적에 기록되어 있다. 게이초 4년(1599년) 10월 1일자 나이토 다카하루가 나이토 모토이에에게 보낸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나, 오히로이님의 어머니는 오쿠라쿄라고 하며, 그 아들인 오노 슈리는 어전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오히로이님의 어머니(요도도노)와 함께 간통한 것인지, 함께 최후를 맞이할 분위기였으나, 그 슈리를 우키타 히데이에가 구속해 두었다. 함께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말했으며, 고야산으로 도망쳤다고도 한다. (후략) - 게이초 4년 10월 1일자 나이토 모토이에에게 보낸 나이토 다카하루 서신
비슷한 소문은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도 기록되어 있어, 완전히 허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소문에 꼬리표가 붙은 듯한 기록이 적지 않다. 강항이 쓴 『간양록』(看羊録)에서는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가 요도도노를 아내로 맞으려 했으나, 하루나가의 아이를 임신한 요도도노가 이를 거부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다만 『간양록』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 재개를 명언하는 등 기묘한 소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이야기의 출처에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는 당시 그러한 소문이 있었다는 정도의 신빙성만을 가진다.
에도 시대의 『메이라 고한』(明良洪範)에서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 하루나가와 요도도노의 아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동시에 요도도노가 가부키 배우인 나고야 산자부로라는 미남을 총애하여 부정을 저질렀다고도 쓰고 있다. 역사학자 구와타 다다치카는 이러한 풍설들이 "악평을 쓸수록 환영받던 에도 시대"의 극작가들에 의한 것에 불과하며, "세상에 널리 퍼졌다"고 평가했다. 이는 하루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대항한 도요토미 가문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에도 막부의 시각에서 악역으로 조작되거나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는 비판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