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이자 어린 시절부터 그의 밑에서 활약하며 초기 경력을 쌓았다.
1.1. Birth and family
후쿠시마 마사노리(어린 시절 이름은 市松이치마쓰일본어)는 1561년 오와리국 가이토 군 후타쓰데라 촌(현재의 아이치현 아마시 후타쓰데라 야시키)에서 태어났다. 그는 통(桶) 장인 후쿠시마 마사노부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 따르면, 마사노부가 그의 의부였을 수도 있으며, 실제 아버지는 오와리 국 가스가이 군 기요스 지역(현재의 기요스시 중심 지역)의 통 장인인 호시노 나리마사로 추정되기도 한다. 마사노리의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훗날 오만도코로로 알려짐)의 여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였으므로, 히데요시와 마사노리는 외사촌 관계였다.
1.2. Early service under Toyotomi Hideyoshi
소년 시절부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어머니를 통한 혈연 관계로 히데요시의 小姓고쇼일본어(시동)로 섬겼다. 1578년 하리마국의 미키성 포위전에 참전하여 첫 전장을 경험했다. 처음 녹봉은 200석이었다.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쇼류지성을 공격하는 등 군공을 세웠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300석이 추가되어 총 500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다.
2. Major activities and achievements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중요한 전투에 참전하여 다이묘의 지위에 오르고,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2.1. Rise to daimyō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마사노리는 적장 오가사토 이에요시의 목을 베는 등 제일 먼저 전공을 세우는 대공을 세웠다. 일본 자료에는 그가 하이교 고자에몬을 토벌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 전공으로 인해 그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에서도 특별히 인정받아 5,000석을 가증받았는데, 이는 다른 여섯 창이 각각 3,000석을 받은 것에 비해 월등히 큰 보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오마사와 결혼했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여러 전역에 참전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부친 마사노부와 함께 병력 300명을 이끌고 후방 지원 부대로 종군했다고 전해진다. 미노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과 싸워 胴肩衣도카타기누일본어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네고로지 정벌과 시코쿠 정벌에도 참여했다.
1587년 규슈 정벌 이후, 9월 5일 이요국 이마바리에 113,000석 이상의 영지를 받아 정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오다와라 정벌(1590년)에서는 오다 노부카쓰의 군에 속하여 하치스카 이에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가모 우지사토 등과 함께 니라야마성을 공격하고 포위했다. 1595년 7월, 히데요시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을 명령받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에 체류 중이던 마사노리는 히데쓰구에게 할복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그는 오와리국 기요스에 240,000석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1598년에는 羽柴하시바일본어 성을 사용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아오키 가즈노리와 함께 하시바 성과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시종(侍従)에 임관함으로써 쇼다이부(諸大夫)에서 구게나리(公家成)를 이루었다. 이는 마사노리와 아오키 가즈노리가 히데요시의 모계 친척이었기에 도요토미 씨의 '준(準)일문'으로 간주되어 다른 후다이(譜代) 가신들과는 별개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2.2.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mjin War)
1592년 임진왜란 중 분로쿠의 역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일본군 제5군의 주장이 되어 도다 가쓰타카, 조소카베 모토치카,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을 이끌고 경기도 공략에 나섰다. 그해 연말에는 경기도 죽산의 수비를 맡았다. 잠시 일본으로 귀국한 후, 1594년 1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다.
강화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군이 남부 지역에 배치될 것이 결정되자, 마사노리는 거제도의 송진포성(松真浦城)과 장문포성(場門浦城) 수비 및 보급 등 병참 활동을 담당했다. 그해 10월, 조선 수군을 이끄는 이순신 장군이 장문포를 공격했을 때(1594년 장문포 해전), 마사노리는 직접 군함에 올라 지휘하며 적선을 불태우는 등의 반격으로 조선군을 격퇴했다. 그는 이후 게이초의 역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1599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히데요시는 조선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사노리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마스다 나가모리와 함께 이 군세의 대장으로 발탁되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1598년 8월에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2.3. Conflict with Ishida Mitsunari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급격히 악화되었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한 후, 마사노리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해 이케다 데루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등 일곱 명의 무장들과 함께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칠장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 습격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미쓰나리가 군공을 불리하게 평가하고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이들 장수들이 오사카성 내 기요마사의 저택에 모인 후 미쓰나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하인 구와지마 지에몬의 보고를 통해 음모를 알아차리고, 시마 사콘 등과 함께 사타케 요시노부의 저택으로 피신했다. 일곱 장수들은 미쓰나리가 저택에 없음을 알고 오사카성 내 여러 다이묘 저택을 수색했으며, 가토의 군대가 사타케 저택으로 접근하자 미쓰나리 일행은 사타케 저택에서 탈출하여 후시미성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다음 날, 일곱 장수들은 미쓰나리가 숨어 있음을 알고 후시미성을 포위했다. 후시미성에서 정치 업무를 담당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상황을 중재하려 했다. 장수들은 이에야스에게 미쓰나리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의 은거를 조건으로, 그리고 주요 쟁점이었던 조선 울산성 전투의 전공 평가를 재검토하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며 사태를 해결했다.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 유키 히데야스가 미쓰나리를 사와야마성까지 호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미쓰나리를 살해하려는 음모라기보다는 장수들과 미쓰나리 간의 법적 분쟁에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물리적으로 보호하기보다는 장수들의 불만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일곱 장수와 미쓰나리 간의 개인적인 갈등을 넘어, 도쿠가와 파와 미쓰나리 주도의 반(反)도쿠가와 파 사이의 광범위한 정치적 경쟁의 연장선으로 해석한다. 이 사건 이후, 미쓰나리와 대립했던 무장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작가 무라마쓰 슌키치는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와의 갈등에서 실패한 주요 원인이 당시 주요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마사노리는 또한 그의 누나의 아들이자 자신의 양자인 마사유키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만히메(満天姫)와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이는 다이묘 간의 사적인 혼인을 금지한 히데요시의 유언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2.4. Battle of Sekigahara

1600년 아이즈 정벌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과정에서 상방(上方)에서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열린 오야마 평정에서, 이미 구로다 나가마사의 회유를 받은 마사노리는 미쓰나리의 거병에 동요하는 여러 다이묘들보다 먼저 이에야스의 편에 설 것을 맹세하며 서쪽으로 반전(反轉)하여 진군하는 방침을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기요스에서 미노 방면으로 진군하여 서군 오다 히데노부가 수비하는 기후성을 공격할 때, 마사노리는 이케다 데루마사와 선봉을 다투었고,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협력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히데노부의 군대는 이이 나오마사와 합의하여 서군을 돕지 않기로 결정한 이시카와 사다키요로부터의 예상 지원을 받지 못했다. 히데노부는 할복을 준비했으나 이케다 데루마사 등의 설득으로 동군에 항복하여 기후성이 함락되었다.
1600년 8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 연합군은 오다 히데노부가 수비하는 다케가하나성을 공격했다. 군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이케다 데루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가 이끄는 18,000명의 병력이 강을 건너는 쪽으로 이동했고, 마사노리, 이이 나오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교고쿠 다카토모,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다나카 요시마사, 혼다 다다카쓰가 이끄는 16,000명의 병력이 하류의 이치노미야시로 진군했다. 데루마사가 이끄는 첫 번째 그룹이 기소 강을 건너 요네노에서 전투를 벌여 히데노부의 병력을 격퇴했다. 한편, 다케가하나성은 서군의 장수 스기우라 시게카쓰에 의해 보강되었다. 8월 22일 오전 9시, 나오마사와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이 강을 건너 다케가하나성을 직접 공격했다. 시게카쓰는 마지막 저항으로 성에 불을 지르고 할복했다.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서 마사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했다. 그는 도쿠가와 선봉대를 이끌고 동군 좌익의 후지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돌진하여 서군의 우측 중앙을 공격하며 전투를 시작했다. 마사노리의 군대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17,000명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우키타 군의 선봉인 8,000명의 아카시 다케노리 부대가 초기에 우세를 점하여 마사노리의 군대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으나, 우키타 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세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선 것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다. 이에 마사노리의 군대는 다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이는 동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전투 후 마사노리는 서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로부터 오사카성을 접수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 그는 이러한 공헌으로 아키국(히로시마)과 빈고국(토모)의 광대한 영지 498,000석을 받아 히로시마번의 번주로 임명되었다.
2.5. Hiroshima Domain administration

1601년 3월, 아키국과 빈고국에 입봉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즉시 영내를 순회하며 검지(檢地)를 실시하여 영지의 공식 수확고(石高)를 재산정했다. 그는 가신들에게 사실상의 급미제(給米制)를 적용했으며, 검지 결과를 농민들에게 공개하고 실제 수확에 따라 연공(年貢)을 징수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영내의 사찰과 신사 보호에도 열정적이었으며, 1602년에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유명한 불경인 『헤이케 노교』를 수리하기도 했다.
1603년에는 아키국의 최서단에 거대한 가메이성 축성을 시작했다. 이 성은 모리 씨 영지의 최동단에 있는 이와쿠니성에 대한 대항 거점이었으며, 동시에 산요도(山陽道)의 교통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상공업 육성 노력은 히로시마 발전에 기여했다.
2.6. Later relations with the Tokugawa shogunate
1604년 이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에도 막부의 여러 성곽 수리 동원에 참여하여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도요토미 씨에 대한 주군으로서의 충성을 결코 잊지 않았다. 1608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병을 앓자 마사노리는 서둘러 오사카성으로 문병을 갔다.
1611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에게 니조성에서의 회견을 강요했을 때, 마사노리는 가토 기요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와 함께 히데요리 상경에 완강히 반대하던 요도도노를 설득하여 히데요리의 교토행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마사노리 자신은 병을 핑계로 회견에 동석하지 않았고, 대신 히라카타시에서 교토로 이어지는 길목에 10,000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 회견 직후 기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요시나가 부자, 이케다 데루마사 등 친(親)도요토미 다이묘들이 잇따라 사망했다. 1612년 마사노리 자신도 병을 이유로 은거를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오사카 전투 당시 히데요리가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마사노리는 참전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오사카의 구라야시키(蔵屋敷)에 보관되어 있던 80,000석의 쌀을 막부가 접수하는 것을 묵인하는 데 그쳤다. 그의 일족인 후쿠시마 마사모리와 후쿠시마 마사시즈는 도요토미 군에 가담했지만, 마사노리 자신은 막부로부터 종군이 허락되지 않았고, 겨울의 진과 여름의 진 모두 에도 잔류(留守居役)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의 적자 후쿠시마 다다카쓰는 병력을 이끌고 막부군에 가담했다. 전쟁 후, 마사노리의 동생인 후쿠시마 다카하루는 도요토미 가문에 내통했다는 혐의로 막부로부터 개역(改易)을 명령받았다.
3. Dispossession and later years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무가제법도 위반을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작은 영지로 전봉되어 말년을 보냈다.
3.1. Circumstances of dispossession

161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망 직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태풍 수해로 파손된 히로시마성의 혼마루(본성), 니노마루(2의 성곽), 산노마루(3의 성곽) 및 석축 등을 무단으로 수리한 것이 무가제법도 위반으로 문제시되었다. 마사노리는 두 달 전부터 수리 허가를 신청했으나, 막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이미 마사노리가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 반포 이후에도 성을 신축하여 모리 씨의 보고를 받은 막부로부터 해당 성을 파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후쿠시마 측은 비가 새는 부분을 어쩔 수 없이 수리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처음에는 에도에 참근(參勤) 중이던 마사노리가 사과하고 수리한 부분을 파각하겠다는 조건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막부가 요구한 "혼마루 외의 수축 부분을 파각하라"는 조건에 대해, 마사노리는 혼마루 수축 부분만 파각하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수축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이로 인해 "파각이 불충분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인질로 에도에 보낼 예정이던 아들 후쿠시마 다다카쓰의 출발을 지연시키고, 이에 대해 "모든 것은 부모 하기 나름"(万事親次第)이라며 변명을 거부하는 등 불순한 태도를 보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 쇼군은 격노하여 마키노 다다나리와 하나부사 마사나리를 상사(上使)로 파견해 에도 시바 아타고의 마사노리 저택에 몰수 명령을 전달했다. 그 결과, 아키국과 빈고국의 500,000석 영지는 몰수되었고, 대신 시나노국의 가와나카지마 4군 중 다카이 군과 에치고국의 우오누마 군에 총 45,000석의 영지(다카이노 번)로 감봉 전봉(轉封)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봉 후 마사노리는 적자 다다카쓰에게 가독(家督)을 양도하고 은거했으며, 출가하여 고사이(高斎)라는 법호를 사용했다.
3.2. Later life and death


1620년 9월, 적자 후쿠시마 다다카쓰가 요절하자, 마사노리는 영지 중 25,000석을 막부에 반납했다. 1624년 7월 13일,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나가노현 다카야마촌의 다카이노에서 향년 64세로 사망했다. 다카이노에서의 생활은 불과 5년이었지만, 그는 영내 총검지, 용수(用水) 설치와 신전(新田) 개발, 치수 공사 등의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막부의 검시역(検死役)인 홋타 마사요시가 도착하기 전에 가신 쓰다 시로베이가 마사노리의 유체를 화장했기 때문에, 남은 20,000석의 영지마저 몰수되었다. 이로써 후쿠시마 본가는 폐지되었지만, 막부는 마사노리의 아들 후쿠시마 마사토시에게 옛 영지에서 3,112석을 주어 하타모토로 삼았다. 마사토시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가문은 한때 단절되었으나, 후쿠시마 다다카쓰의 손자 마사카쓰가 가문을 재건하여 대대로 고쇼인반(御書院番) 등을 역임했다.
나가노현 다카야마촌에는 개역 후 마사노리가 살았던 저택 터와 다비(荼毘)를 모셨던 터가 역사 유적으로 남아 있다. 또한 도쿄도 미나토구 미타에 위치한 뵤도산 쇼가쿠인(平等山正覚院)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그의 아들 후쿠시마 마사토시 부자의 오륜탑이 세워져 있다.
4. Personality and anecdotes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용맹함과 충성심으로 알려진 동시에 거친 성격과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도 유명했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일화들이 전해진다.
4.1. Character and public image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일반적으로 '무용에 뛰어나나 지모가 부족한 멧돼지 무사'(猪武者이노무샤일본어)라는 이미지가 강하며, 난폭한 사람으로서의 일화가 많다. 그러나 그의 행정 능력과 종교적 관용성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인물 평가도 존재한다.
4.2. Notable anecdotes
- 어린 시절의 사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운영하던 통 장인 가업을 잇기 위해 수행 중, 어른과 싸우다 끌로 상대를 살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히로시마 입봉 시의 일화:** 아키국 히로시마에 입국할 당시 배에 지풍(地嵐)이라는 강한 바람이 불자, 그는 "국가 시작에 땅이 거칠어서 좋은가"라고 말하며 아무 죄 없는 뱃사공을 참살했다는 기록이 『유로 이야기』에 남아 있다.
-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언행:**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최고의 무공을 칭찬받았지만, 때로는 이를 무시하는 언행을 보이기도 했다. 기후성을 함락시켰을 때는 성주 오다 히데노부의 조명을 탄원했는데, 이는 마사노리에게 히데노부가 주군(오다 노부나가)의 가문이었으므로 은의에 따라 조명을 탄원한 것이었다. 그 직후, 그의 가신이 도쿠가와 가문의 아시가루(足軽)에게 모욕당해 자살하자, 마사노리는 상사인 하타모토 이나 아키쓰나의 할복을 요구하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영지를 떠날 뿐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건 때문에 도쿠가와 측 사료인 『타이토쿠인도노 고짓키』에는 "이 사람(마사노리)은 본성이 강폭하고, 군공을 자랑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행정적 역량:** 무단파(武断派)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1601년 검지 당시 498,000석이었던 영지 수확고를 1619년에는 515,000석까지 증가시키는 등 영주로서 행정적인 성과도 남겼다.
- 술버릇과 니혼고 창 일화:** 그는 대주가로 술버릇이 나빴다. 술에 취해 가신에게 할복을 명령했다가 다음 날 아침에야 실수를 깨닫고 돌이킬 수 없음을 후회하며 가신의 목에 울면서 사죄했다는 일화도 있다. 술자리에서 구로다 나가마사의 사자로 온 구로다 가신 모리 도모노부에게 대작을 권했으나 도모노부가 사자로서의 임무 때문에 거절하자, "구로다 무사는 술에 약해 취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모욕했다. 가문의 명예가 훼손된 도모노부는 기꺼이 술을 단숨에 마셨고, 그 보상으로 히데요시에게 하사받은 명창(名槍) '니혼고 창'을 요구했다. 마사노리는 당황했지만 무사로서 전언을 뒤집을 수 없어 부득이하게 가보(家寶)인 창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장면은 일본 민요 '쿠로다부시'의 가사로도 유명하다.
- 나고야성 공사 불평:** 막부의 명령으로 나고야성 축성 공사를 돕던 중, 그는 "에도나 슨푸는 그렇다 쳐도, 이곳은 첩의 자식(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성이 아닌가. 거기까지 혹사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너는 (이에야스의) 사위이니, 우리를 위해 이 문제를 직접 간언해 달라"고 강요했다. 데루마사가 침묵하자, 이를 들은 가토 기요마사가 화를 내며 "함부로 말하지 마라. 축성이 그렇게 싫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모반을 준비해라. 그것이 무리라면 명령대로 공사 기일을 재촉해라"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 이시카와 사다키요와 가이후쿠인:** 1615년 오사카성이 함락된 후, 마사노리는 묘신지의 이시카와 사다키요를 찾아 만났다. 마사노리는 사다키요로부터 묘신지 내의 땅 일부를 양도받아 가이후쿠인(海福院)을 건립하고 사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사다키요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가 전후에 다인(茶人)이자 상인이 된 인물로,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 오타니 요시쓰구의 여동생, 사나다 유키무라의 딸 등 여러 설이 있다.
- 이에야스와의 임종 전 대화:** 이에야스가 중병으로 임종을 앞두자, 마사노리는 슨푸를 찾아 문병했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리에게 차갑게 "한번 아키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쇼군가(도쿠가와 히데타다)에 불만이 있다면, 사양하지 말고 병사를 일으켜라"라고 말했다. 이에야스의 앞을 물러난 마사노리는 "오늘까지 충실히 봉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씀을 하시니 한없이 정이 없다"며 탄식하며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 이를 들은 이에야스는 "그 한마디를 내뱉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며 안심했다고 전해진다.
- 센 리큐와의 만남:** 마사노리는 한때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왜 무용도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다인 센 리큐를 따르느냐"고 물었다. 이후 다다오키의 초대로 리큐의 다회(茶會)에 참석한 후, 마사노리는 "나는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마주해도 겁먹은 적이 없었으나, 리큐님과 마주하니 왠지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며 리큐에게 깊이 감복했다.
- 공처가:** 그는 상당한 공처가였다고 전해진다. 한 번은 여성 문제로 질투에 광분한 부인 쇼센인(昌泉院)에게 나기나타로 공격당해, 전장에서는 겁먹은 적이 없다고 자부했던 그도 이에 도망쳤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 다카이노 번 개발:** 다카이노 번으로 전봉된 후, 그는 검지와 신전(新田) 개발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신전 개발을 허락받은 구보타 가문의 후손인 6대 구보타 주에몬(구보타 슌코)은 고바야시 잇사의 문인 중 한 명이자 잇사의 경제적 후원자가 되었다.
- 이시다 미쓰나리 시신 모욕:** 후시미성에 전시된 이시다 미쓰나리의 시신을 보고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켰다"며 모욕하고 침을 뱉고 발로 찼다고 전해진다.
5. Official posts and ranks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역임했던 관직과 위계는 다음과 같다.
- 1585년 8월 11일(덴쇼 13년 7월 16일): 다이라 마사노리로서 종5위하 사에몬노조(左衛門尉)에 서임.
- 1597년 9월 7일(게이초 2년 7월 26일): 도요토미 마사노리로서 시종(侍従)에 임관. 동시에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음.
- 1602년 4월 28일(게이초 7년 3월 7일): 도요토미 마사노리로서 좌근위권소장(左近衛権少将)으로 전임(이때 종4위하로 승서된 것으로 추정됨).
- 1617년 7월 23일(겐나 3년 6월 21일): 도요토미 마사노리로서 종3위로 승서하고 참의(参議)로 전임. 같은 해 11월 2일 참의직 사퇴.
마사노리는 서한 등에서 '사에몬다이후'(左衛門大夫)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계보 기록에도 '사에몬다이후'에 임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관직으로서 사에몬다이후는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 임관은 '사에몬노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사에몬다이후'는 (6위에 해당하는) 사에몬노조를 사임하고 그 대가로 종5위하로 승진하여 현재 무관(散位)인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마사노리 시대에는 이미 이러한 관습이 잊혀져 실제 관직인 '사쿄다이후' 등과의 혼동이 일어났다. 마사노리는 시종 임관 후에도 '사에몬다이후'를 사용했으며, 시종 임관 후에도 '사부로사에몬노조'를 칭했던 이케다 데루마사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무사로서의 관도명(官途名)과 무가관위(武家官位)로서 보임되는 관위가 별개로 취급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도요토미 후다이(譜代)의 여러 장수들은 '쇼다이부나리'(諸大夫成, 종5위하 서위)로 취급되었으나, 마사노리와 아오키 가즈노리(시게요시)만이 시종에 임관하는 '구게나리'(公家成)를 거쳤. 이는 마사노리와 아오키 가즈노리가 히데요시의 모계 친척이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씨의 '준(準)일문'으로 간주되어 아사노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등 다른 후다이 가신들과는 별개의 특별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6. Family and retainers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가계는 여러 배우자와 자녀를 포함했으며, 충성스러운 가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군사 및 행정 활동을 수행했다.
6.1. Family
- 아버지:** 후쿠시마 마사노부 (1525?-1597)
- 어머니:** 쇼운인(松雲院)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모.
- 정실(正室):** 쇼운인(照雲院, ?-1602년 5월 16일) - 마사노리의 중신 쓰다 나가요시의 딸. 마사노리 사이에서 세 아들(마사토모, 다다카쓰, 마사토시)을 두었으나, 마사토시를 낳던 난산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의 묘케이인(妙慶院)에 있다.
- 아들:**
- 후쿠시마 마사토모 (1596-1608)
- 후쿠시마 다다카쓰 (1598-1620) - 차남.
- 후쿠시마 마사토시 (1601-1638)
- 아들:**
- 계실(継室):** 쇼센인(昌泉院, ?-1642년 1월 18일) - 마키노 야스나리의 딸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1604년 마사노리와 결혼하여 세 딸을 낳았다. 마사노리가 개역된 후에는 세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갔다.
- 딸:**
- 고쇼인(暠照院, ?-1634) - 미나세 가네토시의 아내.
- 슌포묘코(春圃妙香, ?-1632) - 오노 주에몬의 아내.
- 기쿠(喜久) - 하세가와 규마의 측실.
- 딸:**
- 양자(養子):**
- 아들:**
- 후쿠시마 마사노부
- 후쿠시마 마사유키 (1585-1608) - 벳쇼 시게무네의 7남.
- 딸:**
- 겐코인(玄興院) - 구루시마 나가치카의 아내이자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 아들:**
6.2. Retainers
- 오가와 야스요시
- 오사키 나가유키
- 오제키 마사카쓰
- 가니 요시나가
- 나가오 가즈카쓰
- 후쿠시마 하루시게
- 홋타 간에몬
- 홋타 야고에몬
- 기조 나가마사
- 아다치 야스시게
- 아다치 야스무네
7. Legacy and evaluation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역사적 평가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행정적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다이묘 가문이 결국 단절된 과정을 함께 조명한다. 그가 남긴 유물들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증명하는 유형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7.1. Historical evaluation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일본의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다이묘로 평가된다. 그는 일반적으로 무용에 뛰어나지만 지략이 부족한 '멧돼지 무사'(猪武者이노무샤일본어)로 묘사되지만, 히로시마번 번주 재임 시절에는 검지(檢地) 시행과 경제 발전 촉진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주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의 복잡한 정치적 격변기,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전략적으로 연합한 그의 능력은 한동안 영지의 생존을 보장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씨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이후 에도 막부에 대한 불복종은 결국 그의 영지 몰수로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그의 본가(本家)는 폐지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하타모토로서 도쿠가와 막부를 계속 섬기면서 후쿠시마 가문은 비록 축소되었지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전쟁의 센고쿠 시대에서 평화로운 에도 막부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에 무장들이 겪었던 극적인 변화와 도전을 반영한다.
7.2. Related artifacts
- 니혼고 창**: 日本号니혼고일본어는 한때 황궁에서 소유했던 유명한 창으로, '일본 3대 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창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소유였다가, 민요 '쿠로다부시'에 묘사된 일화를 통해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신인 모리 도모노부의 손에 들어갔다. 현재 이 창은 복원되어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다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다치(太刀)는 매우 귀중한 검으로, 한때 추정 가치 1.05 억 USD에 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검은 현재 타모이킨 아트 펀드에 소장되어 있다.
8. In popular culture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극적인 삶과 독특한 성격은 소설, 영화, 드라마,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8.1. Novels and literature
- 시바 료타로의 단편 소설 『아이젠 묘오』(愛染明王일본어), 단편집 『나는 권현』에 수록.
- 다카하시 가즈시마의 『후쿠시마 마사노리 - 히데요시 천하 통일의 제일 창』(福島正則-秀吉天下取りの一番槍일본어, PHP 문고, 2000년).
- 오쿠보 도모히로의 『물의 요새 - 후쿠시마 마사노리 최후의 싸움』(水の砦-福島正則最後の闘い일본어, 고단샤 문고).
- 다카하시 가즈시마의 『맹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 태합기 외전』(闘将 福島正則-太閤記外伝일본어, PHP 연구소).
- 야마모토 슈고로의 단편 소설 『오래된 떡갈나무』(古い樫木일본어), 『꽃도 칼도』에 수록.
- 가토 히로시의 『신군 이에야스의 밀서』(神君家康의密書일본어, 신초샤, 2011년).
8.2. Film and television
- 영화:**
- 『할복』 (1962년 영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가공의 가신인 쓰구모 한시로가 주인공이다.
- 『세키가하라』 (2017년 영화): 오토오 다쓰마가 연기했다.
- 텔레비전 드라마(NHK 대하드라마 포함):**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단바 데쓰로가 연기했다.
- 『여성 태합기』 (1981년, NHK 대하드라마): 미카미 칸이 연기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3년, NHK 대하드라마): 와타비키 가쓰히코가 연기했다.
- 『독안룡 마사무네』 (1987년, NHK 대하드라마): 가와라 사부가 연기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88년, TBS 대형 시대극 스페셜): 고니시 히로유키가 연기했다.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가니에 게이조가 연기했다.
- 『천지인』 (2009년, NHK 대하드라마): 이시하라 요시즈미가 연기했다.
- 『군사 칸베에』 (2014년, NHK 대하드라마): 이시구로 히데오가 연기했다.
- 『사나다마루』 (2016년, NHK 대하드라마): 후카미 모토키가 연기했다.
- 『어쩌다 이에야스』 (2023년, NHK 대하드라마): 후카미 모토키가 연기했다.
8.3. Video games
- 코에이의 『결전』과 『결전 III』.
- 『사무라이 워리어즈』 시리즈: 『사무라이 워리어즈 3』에서는 비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확장팩인 『사무라이 워리어즈 3 Z』와 『사무라이 워리어즈 3: 익스트림 레전즈』, 그리고 『사무라이 워리어즈 4』와 그 확장팩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다.
- 『포켓몬 콘퀘스트』(일본명: 『포켓몬+노부나가의 야망』): 그의 파트너 포켓몬은 악비르와 악비아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