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내토 다카하루는 무사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도쿄로 상경하여 실력을 갈고닦은 뒤 경찰직에 종사하며 검도계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1.1. 출생 및 성장 과정
내토 다카하루는 분큐 2년 10월 25일(1862년 12월 16일) 미토에서 미토번 궁술 사범인 이치게 타카노리(市毛高矩)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북진일도류 검술 사범인 와타나베 세이자부로(渡辺清左衛門)의 딸로, 그는 무예가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메이지 2년(1869년)부터 한학, 수련,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12세에는 북진일도류 검술 사범인 오자와 토라키치의 미토 토부칸(水戸東武館) 도장에 입문하여 훗날 동문이자 절친한 벗이 되는 몬나 타다시와 인연을 맺었다.
메이지 14년(1881년), 내토는 숙부인 내토 기자에몬 마사토시(内藤儀左衛門政敏, 1867년 사망)의 양자가 되어 '내토 다카하루'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2. 도쿄에서의 수련과 초기 활동
메이지 16년(1883년) 4월, 내토 다카하루는 도쿄로 상경하여 시타야 구루마자카에 있던 사카키바라 겐키치의 도장에서 1년간 검술을 수련했다. 이듬해부터는 일본 각지를 돌며 무사수행을 시작하여 산속에서 고행을 쌓는 등 자신을 단련했다.
도쿄로 돌아온 뒤, 그는 당시 경시청 격검 시와카리(撃剣世話掛, 검술 지도 담당)였던 카와사키 젠자부로와 타카노 사자부로 등에게 시합을 신청하여 연승을 거두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메이지 21년(1888년) 5월 9일, 내토는 자신도 경시청에 일등 순사로 임관했으며, 시모에 슈타로의 주선으로 토부칸 도장의 동문이었던 몬나 타다시와 같은 경찰서에 배속되었다. 이 무렵 내토를 의지하여 도쿄로 상경한 조카 이치게 타니(市毛谷)에게 스모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반대하는 친척들을 설득하여 그를 스모계에 입문시켰다. 이치게 타니는 훗날 요코즈나 히타치야마 타니에몬으로 승진하게 된다.

1.3. 청일 전쟁 참전
메이지 27년(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경시청은 재류민 보호를 위해 격검 시와카리들에게 조선 출장을 명령했고, 내토와 몬나 역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내토는 고베 항을 출항하며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던 무사의 활과 화살의 마음을 오늘이야말로 풀어내리라"는 시를 읊었으나, 현지에서 급성 흉막염을 앓게 되어 귀국해야 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내토 다카하루는 대일본무덕회에 봉직하며 근대 검도의 발전과 후학 양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대일본무덕회에서의 활동
메이지 30년(1897년), 내토는 대일본무덕회로부터 정련증을 수여받았다. 경시청에 근무하면서도 우시고메 하라마치에 자신의 도장 '양신관'을 열고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 격검부 사범으로 활동하며 검도 보급에 힘썼다.
메이지 32년(1899년) 3월, 교토에 대일본무덕회 본부인 무덕전이 준공되었다. 무덕회는 교수진 강화를 위해 오쿠무라 사콘타, 미츠하시 켄이치로, 내토 다카하루, 사사키 마사노리, 코세키 노리마사 등 다섯 명을 지명했다. 내토는 무덕회 상임 의원인 쿠스노키 마사요시로부터 "미치노타메 키타레(道のため来たれ, 도를 위해 오라)"라는 전보를 받고 크게 감동하여, 같은 해 9월 도쿄에서 쌓아 올린 모든 기반을 버리고 대일본무덕회 본부에 봉직하게 되었다.
그는 무술교원양성소(후일 무도전문학교로 개칭)의 검도 주임 교수를 맡아, 훗날 검도 10단에 오르는 모치다 모리시와 사이무라 고로 등의 명성 있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2.2. 검도 보급 및 제도화
내토 다카하루는 도쿄전문학교 (현 와세다 대학) 격검부 사범으로 활동하며 대학 검도 보급에 기여했다. 메이지 44년(1911년), 그는 대일본제국 검도형 제정의 주사위원(주된 심사위원)으로 임명되어 검도 기술의 표준화와 체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대일본무덕회의 후원 아래 일본 학교와 대학에서 검도 수련을 보급하고 제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검도 지도 철학은 경기로서의 검도에 부정적이었으며, 키리카에시(`切り返し`, 연속 치기 연습)나 카카리 게이코(`掛かり稽古`, 공격 연습)와 같은 기본기를 철저히 지도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검도의 진정한 본질이 형식적인 대련보다는 기초적인 기술과 정신 단련에 있다고 믿었다.
2.3. 검도 실력 및 평가
북진일도류 검술가로서 내토 다카하루는 기합 활용에 매우 능숙했다. 메이지 34년(1901년) 5월, 제6회 무덕제 대연무회에서 타카노 사자부로와 유명한 대결을 펼쳐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당시 심판을 맡았던 미츠하시 켄이치로는 이 대결을 "전에도 후에도 그 이상의 시합은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하며 명승부로 평가했다. 또한, 이 대결에서 내토가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상대방의 코테(손목 보호대)와 멘(머리 보호대)에 여러 차례 타격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카노의 공격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받아내는 모습으로 우월한 검도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는 그의 뛰어난 기합 운용 능력과 정신력을 증명하는 일화이다.
내토 다카하루는 타카노 사자부로와 함께 검도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서쪽의 내토, 동쪽의 타카노"라는 말로 그들의 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대일본무덕회로부터 검도범사의 칭호를 획득하며 최고의 검도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3. 사상 및 철학
내토 다카하루는 검도의 경기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전통적인 수련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지녔다.
3.1. 검도에 대한 관점
내토 다카하루는 검도가 경기로 변질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검도의 본질은 무술로서의 수련과 정신 단련에 있다고 보았으며, 승패를 다투는 경기적 요소가 도입되면 검도가 지닌 전통적인 가치와 깊이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그는 키리카에시나 카카리 게이코와 같은 기본기 수련의 철저함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검도 기술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에도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쇼와 천황이 직접 관람하는 쇼와 천람 시합의 개최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 시합이 검도의 경기화를 가속화하고 진정한 무예 정신을 퇴색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궁내성 관료인 사이온지 하치로로부터 칙명이라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이 시합에 대해 "이것으로 일본 검도는 멸망했다"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4. 개인적인 삶
내토 다카하루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의 생애에 있어 두드러진 두 가지 사실이 있다. 그는 메이지 14년(1881년)에 숙부인 내토 기자에몬 마사토시의 양자가 되면서 본명인 이치게 다카하루에서 '내토 다카하루'로 성을 바꾸었다.
또한, 내토는 조카인 이치게 타니가 스모 선수의 길을 걷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집을 찾아온 조카를 보고 스모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니가 스모계에 입문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도왔다. 그 결과 이치게 타니는 훗날 스모의 최고봉인 요코즈나 히타치야마 타니에몬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5. 사망
내토 다카하루는 쇼와 4년(1929년) 4월 9일에 급서했다. 그의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이 그토록 반대했던 쇼와 천람 시합이 개최되기 직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으로 평가된다.
6. 영향 및 평가
내토 다카하루는 근대 검도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정신과 업적은 오늘날까지 기려지고 있다.
6.1. 후학 양성 및 영향
내토 다카하루는 대일본무덕회의 무도전문학교에서 검도 주임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특히 그가 길러낸 제자 중에는 훗날 '쇼와의 검성'이라 불리며 검도 10단에 오른 모치다 모리시와 사이무라 고로 등이 있어 그의 교육자로서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검도의 경기화를 반대하고 기본기 수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신의 철학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형식적인 승패보다는 검도의 본질적인 가치와 정신을 추구하는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내토 다카하루는 타카노 사자부로와 더불어 "서쪽의 내토, 동쪽의 타카노"로 불리며 근대 검도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중심인물로 평가받는다.
6.2. 기념 및 대중문화 속 모습

내토 다카하루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교토시 사쿄구에 위치한 무도센터 내에 '검성 내토 다카하루 선생 현창비'(`剣聖内藤高治先生顕彰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그가 검도계에 남긴 공로를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또한, 내토 다카하루는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등장하여 그의 생애와 활약이 널리 알려졌다.
- 만화:** 무라카미 모토카의 작품 『용-RON-』에서 그의 일대기가 다루어졌다.
- 텔레비전 드라마:** 1995년 NHK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용-RON-』에서는 배우 만야 킨노스케가 내토 다카하루 역을 맡아 열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