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엔리케 과이타는 1910년 7월 11일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주 루카스 곤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9년 5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 바이아 블랑카에서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Club career
과이타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양국에서 활약하며 인상적인 클럽 경력을 쌓았다.
2.1. Estudiantes and early career
과이타는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교수들'(Los Profesores스페인어)이라는 유명한 공격진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이 시기에 그는 리그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2.2. Move to Italy and Roma
1933년, 과이타는 이탈리아로 이적하며 AS 로마에 입단하여 선수 경력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두 시즌 동안 로마에서 뛰었다. 특히 세리에 A 1934-35 시즌에는 28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이 시기 그는 뛰어난 기량과 강렬한 플레이 스타일로 '검은 해적선'(Il Corsaro Nero이탈리아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6년, 그는 이탈리아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2.3. Return to Argentina and retirement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과이타는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활약했다. 그는 라싱 클루브에서 뛰었고, 이후 친정팀인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로 복귀했다. 그는 1939년 시즌을 끝으로 프로 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3. International career
엔리케 과이타는 축구 역사상 독특한 기록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으로,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두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활약했다. 그는 복수의 국가대표팀 활동 규제가 생기기 전, 양국 국가대표로 뛰었던 12명의 아르헨티나 선수 중 한 명이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는 4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으며, 193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는 10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특히 1934년 FIFA 월드컵에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유일한 골을 넣어 이탈리아의 1-0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는 이탈리아가 자국에서 월드컵 정상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와 함께 1933-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4. Honours
엔리케 과이타는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여러 중요한 우승과 개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4.1. International
- FIFA 월드컵: 1934 (이탈리아)
-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1933-35 (이탈리아)
-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1937 (아르헨티나)
4.2. Individual
- 세리에 A 득점왕: 1934-35 (28골)
- 월드컵 대회의 선수단: 1934
5. Legacy and reception
엔리케 과이타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양국을 대표하며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독특한 선수로 기억된다. 그는 두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하고 클럽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는 등 뛰어난 기량과 성과를 남겼다. 특히 '검은 해적선'이라는 별명은 그의 강렬한 플레이 스타일을 잘 보여주며, 그가 당대 축구계에 미친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6. External links
- [https://www.national-football-teams.com/player/22851/Enrique_Guaita.html National-Football-Teams.com의 엔리케 과이타 프로필]
- [https://web.archive.org/web/20071020025337/http://futbolfactory.futbolweb.net/index.php?ff=historicos&f2=00001&idjugador=436 Futbol Factory 프로필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