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탠리 앤 더넘(Stanley Ann Dunham스탠리 앤 더넘영어, 1942년 11월 29일 ~ 1995년 11월 7일)은 미국의 인류학자로, 인도네시아의 경제 인류학과 농촌 개발을 전문으로 연구했다. 그녀는 제44대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더넘은 생전에 세계 빈곤층을 위한 소액 금융 프로그램 개발과 여성의 권리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미국 국제 개발처(USAID), 포드 재단, 인도네시아 인민은행(Bank Rakyat Indonesia반크 라키아트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 BRI) 등과 협력하며 농촌 산업 발전과 소액 금융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들인 버락 오바마는 그녀를 "내 형성기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녀가 내게 가르쳐 준 가치들은 정치 활동의 기준점"이라고 언급하며 어머니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사후에도 그녀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는 재조명되어, 하와이 대학교에서는 그녀의 연구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리고 박사 학위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또한 그녀의 인도네시아 바틱 직물 컬렉션은 미국 전역에서 전시되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최고 민간 훈장인 '빈탕 자사 우타마'를 추서받았다. 그녀를 기리는 장학금과 기금도 설립되었고,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와 서적도 출간되었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2.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탠리 앤 더넘은 1942년 11월 29일 캔자스주 위치토의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에서 매들린 리 페인(Madelyn Lee Payne매들린 리 페인영어)과 스탠리 아머 더넘(Stanley Armour Dunham스탠리 아머 더넘영어)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스탠리'라는 남자 이름이 붙었으며, 그녀 자신도 아버지가 아들을 원해서 자신의 이름이 남성 이름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스탠리'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새로운 동네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이름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중간 이름인 '앤'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족은 잦은 이사를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버지 스탠리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재학하면서 가족은 위치토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48년에는 오클라호마주 폰카시티, 이어서 텍사스주 버논, 그리고 다시 캔자스주 엘도라도로 옮겨갔다. 1955년에는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아버지는 가구 판매원으로, 어머니는 은행 부행장으로 일했다. 그들은 시애틀 웨지우드 인근의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앤은 그곳의 네이선 엑스타인 중학교에 다녔다.
1957년, 더넘의 가족은 시애틀 외곽의 머서 아일랜드로 다시 이사했다. 더넘의 부모는 당시 13세였던 딸이 새로 개교한 머서 아일랜드 고등학교에 다니기를 원했다. 이 학교에서 그녀는 발 푸버트(Val Foubert)와 짐 위처맨(Jim Wichterman) 선생님으로부터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고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겼다. 한 학급 동료는 그녀를 "우리 또래보다 지적으로 훨씬 더 성숙했고, 약간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회상했으며, 고등학교 친구는 그녀가 지식이 풍부하고 진보적이었다고 묘사하며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이미 자유주의자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그녀를 "타고난 여성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비트족' 시인들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사상을 형성했다.
2.2. 가족 및 출신 배경
스탠리 앤 더넘의 부모는 모두 캔자스주 출신으로, 1940년 5월 5일 위치토에서 결혼했다. 그녀의 어머니 매들린은 1970년에 하와이 은행 최초의 여성 부행장 중 한 명이 될 정도로 경력에서 성공했다. 아버지는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육군에 입대했으며, 어머니는 위치토의 보잉 공장에서 일했다.
더넘의 가계는 주로 영국계 혈통이며, 소량의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독일, 스위스-독일계 혈통도 섞여 있다. 가문 내에는 체로키족 혈통이 있다는 구전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먼 친척으로는 전설적인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Wild Bill Hickok와일드 빌 히콕영어)이 그녀의 6촌 5대 후손이며, 딕 체이니(Dick Cheney딕 체이니영어) 전 부통령을 비롯해 존슨(Johnson) 전 대통령, 트루먼(Truman) 전 대통령과도 먼 친척 관계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계보학 웹사이트 앤세스트리닷컴(Ancestry.com)은 2012년 7월 30일, 오래된 문서와 Y-DNA 분석을 통해 더넘의 어머니가 17세기 식민지 버지니아의 아프리카 노예였던 존 펀치(John Punch존 펀치영어)의 후손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더넘의 아버지 스탠리 아머 더넘은 인근에 살던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 언론인인 프랭클린 마셜 데이비스(Franklin Marshall Davis프랭클린 마셜 데이비스영어)와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했다. 후일 앤 더넘이 아들 버락 오바마를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연구 활동에 전념할 때, 스탠리 아머나 데이비스는 어린 오바마에게 시를 지어 읽어주거나 동네를 함께 돌아다니기도 했다. 더넘이 처음으로 교제했던 남성 중 한 명이 아버지의 친구인 데이비스라는 이유로, 미국의 일부 보수 인사들은 버락 오바마의 생부가 프랭클린 마셜 데이비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인식된다. 데이비스와 헤어진 뒤에도 더넘은 프랭클린을 아버지 스탠리 아머의 절친한 친구로서 존중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3. 결혼과 가족 생활
1959년 8월 21일, 하와이주가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더넘의 부모는 새로운 주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했고,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더넘은 가족과 함께 호놀룰루로 이사했다. 더넘은 호놀룰루에 위치한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에 입학하여 수학과 인류학을 공부했다.
3.1. 첫 번째 결혼: 버락 오바마 시니어
더넘은 하와이 대학교에서 러시아어 수업을 듣던 중, 이 학교 최초의 아프리카 학생이었던 버락 오바마 시니어(Barack Obama Sr.버락 오바마 시니어영어)를 만났다. 오바마 시니어는 25세의 나이에 학업을 위해 하와이로 유학을 왔는데, 고향인 케냐 냐냥오마 코겔로에 임신한 아내 케지아(Kezia)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며 미국에서 교육받던 젊은 케냐 청년 중 한 명이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어린 시절 케냐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으나, 아버지가 보석금 내기를 거부해 석방된 후 나이로비에서 하급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우연히 만난 미국인 교육자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 대학들에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1959년 23세의 나이로 하와이 유학길에 올랐다.
더넘과 오바마 시니어는 양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1년 2월 2일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결혼했는데, 당시 더넘은 임신 3개월이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나중에 더넘에게 케냐에서의 첫 결혼 사실을 알렸지만, 자신은 이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 년 뒤 더넘은 이 주장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오바마 시니어의 첫 아내인 케지아는 나중에 자신이 루오족 관습에 따라 오바마가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동의했다고 밝혔다.
1961년 8월 4일, 18세의 더넘은 호놀룰루에서 첫 아이인 버락 오바마를 낳았다. 같은 해 워싱턴주에 사는 친구들은 한 달 된 아들을 데리고 시애틀을 방문했던 그녀를 기억한다. 더넘은 1961년 9월부터 1962년 6월까지 워싱턴 대학교 시애틀 캠퍼스에서 공부했으며, 남편이 하와이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어린 아들과 함께 시애틀의 캐피톨 힐 지역에서 싱글맘으로 살았다. 이 시기 동안 그녀의 부모님이 어린 오바마를 양육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1962년 6월 하와이 대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공부할 장학금을 받았으나, 더 일류 학교인 하버드 대학교 진학을 원해 장학금을 거절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로 떠나 1962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더넘은 1963년 1월 봄 학기에 맞춰 호놀룰루로 돌아와 하와이 대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그녀는 1964년 1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오바마 시니어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이혼이 성립되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1965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 케냐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 10세였던 아들 버락 오바마를 만났다. 이 만남이 그와 아들 사이의 마지막이었다. 케냐로 돌아간 오바마 시니어는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케냐 대통령과 부족 출신이 달랐고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정부 부서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제대로 된 직업을 얻지 못하고 어려운 삶을 살던 그는 1987년 3월 2일 52세의 나이로 간 기능 부전으로 사망했다. (일부 정보원에서는 교통사고를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더넘은 전 남편들과 소원하게 지내지 않았고, 자녀들이 아버지들과 계속 유대감을 느끼도록 격려했다.
3.2. 두 번째 결혼: 로로 수토로
더넘은 동-서 센터(East-West Center)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인 롤로 수토로(Lolo Soetoro롤로 수토로영어)를 만났다. 그는 1962년 9월 동-서 센터 장학금을 받고 호놀룰루로 와 하와이 대학교에서 지리학을 공부했으며, 1964년 6월 지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수토로와 더넘은 1965년 하와이에서 결혼했으며, 1966년 수토로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더넘은 1967년 8월 6일 하와이 대학교에서 인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해 10월 6살 아들 버락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하여 남편과 합류했다. 그들이 이사한 직후,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Soeharto수하르토인도네시아어) 전 대통령의 급부상과 1960년대 유혈 반공 혁명(약 50만 명 희생) 직후 사회 전반에 불안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수토로는 처음에는 정부 소속의 저임금 지형 측량사로 일했고, 나중에는 유노칼(Union Oil Company)의 정부 관계 사무실에서 일했다. 가족은 처음 2년 반 동안 남부 자카르타 테벳(Tebet테벳인도네시아어) 지구 멘텡 달라(Menteng Dalam) 행정 마을의 16번 카이 하지 람리 텡가 거리(Kyai Haji Ramli Tengah Street)에 있는 신축 지역에 거주했다. 아들 버락은 인근의 인도네시아어 사용 가톨릭 학교인 산토 프란시스쿠스 아시시(Santo Fransiskus Asisi산토 프란시스쿠스 아시시인도네시아어) 초등학교에서 1, 2, 3학년 일부 과정을 다녔다. 1970년에는 북쪽으로 3.2 km 떨어진 중부 자카르타 멘텡(Menteng멘텡인도네시아어) 지구 페강산(Pegangsaan) 행정 마을의 22번 타만 아미르 함자 거리(Taman Amir Hamzah Street)로 이사했다. 아들은 이곳에서 2.4 km 동쪽에 위치한 멘텡 행정 마을의 국립 베수키 학교(State Elementary School Menteng 01베수키 학교인도네시아어)에서 3학년 일부와 4학년 과정을 마쳤다.
1970년 8월 15일, 수토로와 더넘 사이에서 딸 마야 소에토로-응(Maya Soetoro-Ng마야 소에토로-응영어)이 태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 더넘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영어 통신 교육을 병행했고, 머헤일리아 잭슨(Mahalia Jackson머헤일리아 잭슨영어)의 음반과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마틴 루서 킹 주니어영어)의 연설문을 교재로 활용했다. 1971년, 그녀는 어린 오바마를 하와이로 돌려보내 푸나호우 학교(Punahou School푸나호우 학교영어) 5학년부터 다니게 했다. 당시 스탠리의 어머니 매들린 더넘이 하와이 은행에서 부행장으로 일하며 비싼 학비를 지원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장학금으로 충당되었다.
1년 뒤인 1972년 8월, 더넘은 딸 마야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와 아들과 합류했으며,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에서 인류학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그녀의 대학원 학업은 1972년 8월부터 1973년 7월까지 아시아 재단(The Asia Foundation아시아 재단영어)의 지원을 받았고, 1973년 8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동-서 센터 기술 개발 연구소의 지원을 받았다.
더넘은 1974년 12월 하와이 대학교에서 인류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하와이에서 3년을 보낸 후, 더넘은 1975년 딸 마야와 함께 인류학 현장 연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아들 버락은 어머니를 따라 인도네시아로 가지 않고, 호놀룰루에서 조부모와 함께 살며 푸나호우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는 것을 선택했다.
롤로 수토로와 더넘은 1980년 11월 5일 이혼했다. 롤로 수토로는 1980년 에르나 쿠스티나(Erna Kustina)와 재혼하여 아들 유수프 아지 수토로(Yusuf Aji Soetoro, 1981년생)와 딸 라하유 누르마이다 수토로(Rahayu Nurmaida Soetoro, 1987년생)를 두었다. 롤로 수토로는 1987년 3월 2일 52세의 나이로 간 기능 부전으로 사망했다.
더넘은 두 번째 결혼 생활에서 남편이 아이를 더 갖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다시 직업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수토로가 결혼 후 더 미국인처럼 되었고, 자신은 더 자와섬 사람처럼 되었다고 말했다. 더넘은 전 남편들과 소원하게 지내지 않았고, 자녀들이 아버지들과 계속 유대감을 느끼도록 격려했다.
3.3. 자녀
스탠리 앤 더넘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영어, 1961년 8월 4일생): 첫 남편 버락 오바마 시니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 마야 소에토로-응(Maya Soetoro-Ng영어, 1970년 8월 15일생): 두 번째 남편 롤로 수토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녀들이 양쪽 아버지들과 계속 유대감을 가지도록 격려했으며, 특히 아들 버락 오바마에게 깊은 사랑과 지지를 보냈다.
4. 학업 및 연구 경력
앤 더넘은 인류학자로서 학문적 여정과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는 특히 인도네시아의 농촌 개발, 여성의 노동, 전통 산업에 대한 심층 연구로 유명하다.
4.1. 학력
더넘은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에서 인류학 분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 학사 학위**: 1967년 인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 석사 학위**: 1974년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 박사 학위**: 1992년 8월 9일, 앨리스 G. 듀이(Alice G. Dewey앨리스 G. 듀이영어) 교수의 지도 아래 인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녀의 1,043쪽에 달하는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Peasant Blacksmithing in Indonesia: Surviving and Thriving Against All Odds인도네시아 농촌의 대장장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생존하고 번성하기영어』였다.
그녀는 또한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워싱턴주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기도 했다.
4.2. 연구 주제 및 관심사
더넘은 장인 정신, 직조, 그리고 가내 수공업에서 여성의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의 연구는 특히 자바섬의 여성 노동과 인도네시아의 대장장이 산업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는 경제 인류학과 농촌 개발 분야에서 권위 있는 전문가였다.
인류학자 마이클 도브(Michael Dove마이클 도브영어)는 더넘의 박사 학위 논문을 "1,200년 된 산업에 대한 고전적이고 심층적인 현장 인류학 연구"라고 평가했다. 더넘의 논문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 도전하며, 빈곤의 원인이 가난한 사람들 자신에게 있거나 문화적 차이가 저개발 국가와 산업화된 서구 간의 격차를 만든다는 통념에 반박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중부 자바의 마을 주민들은 서구의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람들과 동일한 경제적 필요, 신념,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의 장인들이 "이익에 강렬하게 관심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기업가 정신은 "인도네시아 농촌에 풍부하게 공급되고 있었고", 천 년 동안 "전통 문화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더넘 박사는 이 공동체의 저개발이 자본 부족과 정치적 배분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문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은 엘리트의 권력만을 강화시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논문에서 그녀는 "많은 정부 프로그램이 마을 관리들을 통해 자원을 전달함으로써 부주의하게 계층화를 더욱 촉진시킨다"고 썼는데, 이 관리들이 그 자금을 자신의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4.3. 박사 학위 논문
앤 더넘의 박사 학위 논문은 『Peasant Blacksmithing in Indonesia: Surviving and Thriving Against All Odds인도네시아 농촌의 대장장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생존하고 번성하기영어』라는 제목으로 1992년 하와이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제출되었다. 이 논문은 그녀의 지도교수였던 앨리스 G. 듀이의 지도 아래 완성되었다.
이 1,043쪽 분량의 방대한 논문은 인도네시아 농촌 대장장이 산업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로, 학계에서 큰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인류학자 마이클 도브는 이 논문을 "고전적이고, 깊이 있으며, 1,200년 동안 지속된 오래된 산업에 대한 현장 인류학 연구"라고 평가했다.
더넘은 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학문적 기여를 했다.
- 빈곤에 대한 통념 반박**: 빈곤의 근원이 가난한 사람들 자신에게 있거나, 문화적 차이가 저개발 국가와 산업화된 서구 간의 격차를 초래한다는 대중적 인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반박했다.
- 경제적 합리성 강조**: 자신이 연구한 중부 자바의 마을 주민들이 서구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기업가 정신이 수천 년 동안 인도네시아 농촌의 전통 문화 일부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 빈곤의 구조적 원인 규명**: 지역 사회의 저개발이 자본의 부족과 자원의 정치적 배분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지, 문화적 차이가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정부 프로그램 비판**: 많은 정부의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 의도치 않게 자원을 마을 관리들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계층화를 더욱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했다.
이 논문은 더넘 사후인 2009년 듀크 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Surviving against the Odds: Village Industry in Indonesia역경에 맞서 살아남기: 인도네시아의 마을 산업영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더 많은 학자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5. 전문 활동 및 기여
앤 더넘은 인류학자로서의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농촌 개발, 여성 역량 강화, 소액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활동과 기여를 펼쳤다.
5.1. 인도네시아에서의 활동
더넘은 인도네시아에서 다양한 교육 및 컨설팅 활동을 수행하며 농촌 개발과 여성 역량 강화에 힘썼다.
- 교육 및 행정**:
- 1968년 1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인도네시아-미국 우호 연구소(Lembaga Persahabatan Indonesia Amerika, LIA)에서 영어 강사이자 부소장으로 일했다.
- 1970년 1월부터 1972년 8월까지 중부 자카르타의 경영 교육 및 개발 연구소(Lembaga Pendidikan dan Pengembangan Manajemen, LPPM)에서 영어 교사, 부서장, 이사를 역임했다.
- 1977년 3월에는 자카르타의 인도네시아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인도네시아 국가 개발 계획 위원회(BAPPENAS) 직원들을 위한 단기 강의를 개발하고 가르쳤다.
- 문화 및 연구**:
-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자카르타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의 가네샤 자원봉사자 협회(Ganesha Volunteers, Indonesian Heritage Society)의 공동 설립자이자 적극적인 회원으로 활동했다.
-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호놀룰루의 버니스 P. 비숍 박물관(Bernice P. Bishop Museum)에서 직조, 바틱, 염색 등의 공예 강사로 일했다.
- 1977년 6월부터 1978년 9월까지 동-서 센터의 학생 장학금을 받아 인도네시아 중앙 자바의 욕야카르타 특별 지역에서 마을 산업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직조공이었던 그녀는 마을 산업에 관심을 가졌고, 자바 공예의 중심지인 욕야카르타 시로 이주했다.
- 1978년 5월과 6월에는 자카르타의 국제 노동 기구(ILO) 사무소에서 단기 컨설턴트로 일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의 제3차 5개년 개발 계획(REPELITA III)을 위한 마을 산업 및 비농업 기업에 대한 권고안을 작성했다.
- 개발 컨설팅**:
- 1978년 10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미국 국제 개발처(USAID)의 자금 지원을 받아 개발 대안 주식회사(Development Alternatives, Inc., DAI)를 통해 시행된 인도네시아 산업부의 지방 개발 프로그램(PDP I)에서 중앙 자바의 농촌 산업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 1981년 1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포드 재단의 동남아시아 지역 사무소에서 여성 및 고용 프로그램 책임자로 재직하며 인도네시아에서 현재 표준이 된 소액 금융 모델을 개발했다. 당시 팀 가이트너(Timothy Geithner팀 가이트너영어) 미 재무부 장관의 아버지인 피터 가이트너(Peter Geithner피터 가이트너영어)가 재단의 아시아 그랜트 책임자였다.
- 1986년 5월부터 11월, 그리고 1987년 8월부터 11월까지 파키스탄(Pakistan) 펀자브주(Punjab, Pakistan펀자브주영어) 구즈란왈라(Gujranwala구즈란왈라영어) 지역 통합 농촌 개발 프로젝트(GADP) 하에 파키스탄 농업 개발 은행(ADBP)의 가내 산업 개발 컨설턴트로 일했다.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 개발 은행(Asian Development Bank아시아 개발 은행영어)과 국제 농업 개발 기금(IFAD)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루이 베르거 그룹(Louis Berger International, Inc.)을 통해 신용 대출 부분이 시행되었다. 더넘은 라호르(Lahore라호르영어)의 펀자브 소규모 산업 공사(PSIC) 사무실과 긴밀히 협력했다.
- 1988년 1월부터 1995년까지 인도네시아의 가장 오래된 은행인 인도네시아 인민은행(Bank Rakyat Indonesia, BRI)의 컨설턴트 및 연구 코디네이터로 일했으며, 그녀의 작업은 미국 국제 개발처(USAID)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세계에서 가장 큰 소액 금융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데 기여했다。
- 여성 권리 신장**:
- 1993년 3월에는 뉴욕의 여성 세계 금융(Women's World Banking, WWB)의 연구 및 정책 코디네이터로 활동했다. 그녀는 1994년 1월 뉴욕에서 열린 여성 및 금융 전문가 그룹 회의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베이징에서 1995년 9월 4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유엔 제4차 세계 여성 회의와 그 이전에 열린 유엔 지역 회의 및 비정부 기구 포럼에서 WWB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원했다.
5.2. 농촌 개발 및 소액 금융
앤 더넘은 농촌 개발 분야에서 여성의 노동과 세계 빈곤층을 위한 소액 대출 제도인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옹호자로서 활동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의 인권, 여성의 권리, 풀뿌리 개발을 지지하는 단체의 지도자들과 협력했다。
그녀가 포드 재단에서 개발한 소액 금융 모델은 현재 인도네시아의 표준이 되었으며, 인도네시아는 현재 소액 대출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도 국가 중 하나이다。 그녀는 미국 국제 개발처(USAID)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무담보 소액 대출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더넘의 연구는 농촌의 빈곤 문제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접근성 부족에서 비롯되며,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5.3. 학술 및 문화 활동
앤 더넘은 교육, 연구, 문화 보존 등 다양한 학술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지식과 기여를 남겼다。 그녀의 활동은 인도네시아와 하와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교육 활동**:
-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며 인도네시아-미국 우호 연구소(LIA)와 경영 교육 및 개발 연구소(LPPM)에서 영어 교육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 인도네시아 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국가 개발 계획 위원회(BAPPENAS) 직원들을 위한 단기 강의를 개발하고 진행했다。
- 문화 보존 및 연구**:
- 자카르타 국립 박물관의 가네샤 자원봉사자 협회(Indonesian Heritage Society인도네시안 헤리티지 소사이어티영어)를 공동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산 보존에 기여했다。
- 호놀룰루의 버니스 P. 비숍 박물관에서 직조, 바틱, 염색 등의 전통 공예를 가르치며 문화 교육에 참여했다。
- 그녀의 전문적인 논문들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국립 인류학 아카이브(NAA)에 소장되어 있다。 이 소장품에는 대장장이 연구에 대한 사례 연구, 서신, 현장 노트, 강의록, 사진, 보고서, 연구 계획서, 설문 조사 및 플로피 디스크 등이 포함되어 있다。
- 특히 그녀의 현장 노트는 2020년에 디지털화되었으며, 이를 전사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일반 대중의 참여도 독려되고 있다。
- 주요 저술 및 연구 성과**:
- 『Civil rights of working Indonesian women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성의 시민권영어』 (1982)
- 『The effects of industrialization on women workers in Indonesia인도네시아 여성 노동자에 대한 산업화의 영향영어』 (1982)
- 『Women's work in village industries on Java자와섬 마을 산업에서의 여성의 노동영어』 (1982)
- 『Women's economic activities in North Coast fishing communities: background for a proposal from PPA북해안 어업 공동체의 여성 경제 활동: PPA의 제안 배경영어』 (1983)
- 『BRI Briefing Booklet: KUPEDES Development Impact SurveyBRI 브리핑 책자: 쿠페데스 개발 영향 조사영어』 (1990)
- 박사 학위 논문: 『Peasant blacksmithing in Indonesia: surviving against all odds인도네시아 농촌의 대장장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생존하고 번성하기영어』 (1992)
- 『Pendekar-pendekar besi Nusantara: kajian antropologi tentang pandai besi tradisional di Indonesia누산타라의 철 전사들: 인도네시아 전통 대장장이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인도네시아어』 (2008, 인도네시아어판)
- 『Surviving against the odds: village industry in Indonesia역경에 맞서 살아남기: 인도네시아의 마을 산업영어』 (2010, 박사 학위 논문 출판본)
- 『Ann Dunham's legacy: a collection of Indonesian batik앤 더넘의 유산: 인도네시아 바틱 컬렉션영어』 (2012)
6. 개인적 신념과 가치관
6.1. 종교관 및 세계관
앤 더넘은 종교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으나, 깊은 영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아들 버락 오바마는 그의 1995년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어머니를 "내가 한창 자라던 시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녀가 내게 가르쳐 준 가치들은 정치에 입문한 이래로 계속해서 나에게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어머니를 "내가 가지지 못한 믿음에 의존한 자수의 미덕에 대한 신뢰를 가진, 세속적 인본주의의 외로운 증인이자 뉴딜과 평화 봉사단, 자유주의 성명서를 위한 군인"이라고 표현했다.
2006년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오바마는 "나는 종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경험들은 물려받은 회의론을 강화했을 뿐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 기독교인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공언된 세속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러 면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고 썼다. 더넘에게 종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통제하고 우리 삶의 깊은 진리를 이해하려는 많은 방법 중 하나였으며, 반드시 최고의 방법은 아니었다"고 오바마는 설명했다.
딸 마야 소에토로-응(Maya Soetoro-Ng마야 소에토로-응영어)은 어머니의 삶의 철학이 "두려움이나 좁은 정의에 갇히지 않고, 우리 자신 주변에 벽을 쌓지 않으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친밀감과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시절 더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막신 박스(Maxine Box)는 더넘이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말하고 다녔고, 무신론에 대해 읽고 논쟁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항상 도전하고 논쟁하고 비교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늘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야 소에토로-응은 나중에 어머니가 무신론자였는지 묻는 질문에 "어머니를 무신론자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불가지론자였다.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성경,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불교 경전, 『도덕경』 등 모든 좋은 책들을 주었으며, 모든 사람이 기여할 아름다운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했다"고 답했다. 그녀는 "어머니는 예수가 훌륭한 본보기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2007년 연설에서 오바마는 어머니의 신념과 외조부모의 신념을 대조하며, 어머니의 영성과 회의주의에 대해 언급했다. "부모님이 비실천적인 침례교도이자 감리교도였던 저의 어머니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영적인 영혼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도적 종교에 대해 건강한 회의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자신의 신앙과 부모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아버지는 케냐 출신이었고 마을 사람 대부분이 무슬림이었지만, 아버지는 이슬람을 실천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았다. 그는 나의 어머니를 만났다. 내 어머니는 캔자스 출신의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기독교인이었다. 이슬람과 나의 유일한 연결점은 아버지 쪽 할아버지가 그 나라 출신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슬람을 실천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6.2. 사회적 관점
앤 더넘은 사회 정의, 인권, 경제적 평등에 대한 깊은 헌신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여성주의자"로 불릴 만큼 여성의 권리와 역할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지녔다.
특히, 그녀의 인류학 연구는 빈곤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농촌의 빈곤이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자본 부족과 정치적 자원 배분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며, 많은 정부 프로그램이 자원을 마을 관리들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계층화를 촉진시킨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녀가 농촌 개발 및 소액 금융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더넘은 터프하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약간은 초연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평가받는다. 전기 작가 재니 스콧(Janny Scott재니 스콧영어)은 그녀에게서 나타나는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듯한 초연함"이 때때로 아들 오바마에게서 발견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점점 사라져가는 이국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낭만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합리적인 실용주의자"였다. 인도네시아에 처음 갔던 1960년대가 유혈 반공 혁명 직후의 불안정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박사 학위 논문에는 제품이나 이국적인 측면의 기록보다 인구 밀집 지역인 자바섬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묘사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또한, 더넘은 관대한 성격이었지만 돈 관리에 서툴렀고, 가슴 뛰는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자유롭지만 체계적이지는 못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깊은 사랑과 더불어 찬탄을 아끼지 않는 엄마였다. 그녀는 평화 봉사단에서의 낙천주의자이자 하와이 대학교 동-서 센터의 국제주의자였다.
당시까지 잔존하던 흑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인종보다는 인격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들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이 절대적이었고,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얼마나 용감하고 담대한지 모른다"며 자랑했다. 심지어 한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더넘이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와이주는 더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두 명의 남편을 만난 곳이자, 인류학 분야에서 학사부터 박사 학위까지 모든 학위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2007년경, 미국의 특정 세력은 버락 오바마를 인신공격할 목적으로 1970년 무렵 어느 파티에서 촬영된 누드 사진을 그녀의 사진이라고 주장하며 인터넷에 배포했다. 그러나 얼굴 윤곽, 코 높이, 미간 간격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 동일 인물이 아님이 드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밝혀졌다.
7. 질병과 죽음
1994년 후반, 앤 더넘은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자카르타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갑작스러운 복통을 느꼈다. 현지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소화 불량으로 진단되었다.
1995년 초, 더넘은 미국으로 돌아왔고 뉴욕시에 위치한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 센터(Memorial Sloan-Kettering Cancer Center)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자궁암 진단을 받았으며, 이미 암이 난소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생애 후반, 그녀는 '기존 질병'을 이유로 보험 혜택을 거부하는 시그나(Cigna) 보험 회사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녀의 고용주가 제공하는 건강 보험은 의료비 대부분을 부담했지만, 그녀는 자기부담금과 보장되지 않는 비용으로 매달 수백 미국 달러의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그녀의 고용주가 제공하는 장애 보험은 암이 '기존 질병'이라는 이유로 보장되지 않는 비용에 대한 청구를 거부했다.
더넘은 병이 진행되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 곁에서 살기 위해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1995년 11월 7일, 53번째 생일을 22일 앞두고 사망했다. 하와이 대학교에서 추모식이 거행된 후, 아들 버락 오바마와 딸 마야 소에토로-응은 어머니의 유해를 오아후섬 남쪽에 위치한 코코 헤드의 라나이 전망대(Lanai Lookout)에서 태평양 바다에 뿌렸다. 오바마는 2008년 12월 23일, 대통령 당선 몇 주 후 같은 장소에서 외할머니 매들린 더넘의 유해도 뿌렸다.
버락 오바마는 30초짜리 선거 광고인 "어머니(Mother)"에서 건강 보험 개혁을 주장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언급했다. 이 광고에는 어린 오바마를 안고 있는 더넘의 사진이 등장했으며, 오바마는 어머니가 비싼 의료비 때문에 마지막 나날을 걱정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주제는 2007년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에서 했던 연설에서도 다루어졌다.
8. 사후 평가 및 유산
앤 더넘의 사망 이후, 그녀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기여, 그리고 그녀의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되고 평가받았다.
8.1. 저술 및 연구 성과
더넘의 박사 학위 논문인 『Peasant Blacksmithing in Indonesia: Surviving and Thriving Against All Odds인도네시아 농촌의 대장장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생존하고 번성하기영어』는 사후인 2009년 12월 듀크 대학교 출판부에서 『Surviving against the Odds: Village Industry in Indonesia역경에 맞서 살아남기: 인도네시아의 마을 산업영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더넘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앨리스 G. 듀이(Alice G. Dewey)와 낸시 I. 쿠퍼(Nancy I. Cooper)가 수정 및 편집했으며, 더넘의 딸인 마야 소에토로-응이 서문을 썼다. 보스턴 대학교 인류학자 로버트 W. 헤프너(Robert W. Hefner)는 후기에서 더넘의 연구가 "선견적"이며, 그녀의 유산이 "오늘날 인류학, 인도네시아 연구, 그리고 참여 학술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이 책은 200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인류학 협회 연례 회의에서 대통령 패널을 통해 공개되었고, 이 회의는 C-SPAN에 의해 녹화되었다.
더넘의 방대한 전문 자료들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국립 인류학 아카이브(NAA)에 보존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S. 앤 더넘 논문, 1965-2013"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대장장이 연구에 대한 사례 연구, 서신, 현장 노트, 강의록, 사진, 보고서, 연구 파일, 연구 제안서, 설문 조사, 그리고 포드 재단 및 인도네시아 인민은행과 같은 기관의 컨설턴트로서의 전문적인 작업 내용이 담긴 플로피 디스크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현장 노트는 디지털화되어 2020년부터 대중이 참여하는 전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8.2. 기념 사업 및 재조명
앤 더넘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기념 사업과 재조명 노력을 통해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다.
- 학술적 재조명**: 2008년 9월,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는 더넘의 연구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그녀의 학문적 기여를 기렸다.
- 문화 전시**: 2009년에는 "옷에서 문화를 발견한 여인: 버락 오바마의 어머니와 인도네시아 바틱"이라는 제목으로 더넘의 자바 바틱 직물 컬렉션 전시회가 미국 내 여섯 개 박물관을 순회하며 진행되었다. 이 전시는 8월에 워싱턴 D.C.의 직물 박물관(Textile Museum)에서 마무리되었다. 더넘은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후 바틱 예술에 매료되어 다양한 직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 국가 훈장**: 2010년 12월 11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녀의 여성 역할, 사회경제적 역량 강화, 소액 대출에 대한 연구를 기리며 인도네시아 최고 민간 훈장인 '빈탕 자사 우타마'(Bintang Jasa Utama빈탕 자사 우타마인도네시아어)를 추서했다.
- 전기 출간**: 2011년에는 전 뉴욕 타임스 기자 재니 스콧(Janny Scott)이 집필한 장편 전기 『A Singular Woman한 명의 특별한 여성영어』이 출간되어 더넘의 삶을 상세히 다루었다.
- 기금 및 장학금**: 하와이 대학교 재단은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 인류학과에 교수직을 지원하는 '앤 더넘 소에토로 기금'을 설립했으며, 호놀룰루의 동-서 센터와 연계된 학생들을 위한 '앤 더넘 소에토로 대학원 펠로우십'을 운영하고 있다. 2010년에는 그녀의 모교인 머서 아일랜드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스탠리 앤 더넘 장학금'이 설립되어 첫 6년간 11명의 여학생에게 대학 장학금을 수여했다.
- 미디어 재조명**:
- 2012년 1월 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동-서 센터에서 열린 어머니의 인류학 연구 전시회를 방문했다.
- 비비안 노리스(Vivian Norris) 감독의 장편 전기 영화 『Obama Mama오바마 마마영어』 (프랑스어 제목: La mère d'Obama)는 2014년 5월 31일 제40회 시애틀 국제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이는 더넘이 성장했던 머서 아일랜드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 2016년 영화 『배리』(Barry배리영어)에서는 배우 애슐리 저드(Ashley Judd애슐리 저드영어)가 대학생 시절의 버락 오바마의 삶을 극화한 이 작품에서 더넘 역할을 맡았다.
8.3. 사회적 영향
앤 더넘은 그녀의 연구와 전문 활동을 통해 소액 금융과 여성 역량 강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농촌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세계 빈곤층을 위한 소액 대출 프로그램을 옹호하며 인도네시아의 사회 경제 발전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녀는 아들 버락 오바마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지배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오바마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 가치들이 정치 활동의 기준점이 되었다고 강조하며, 그녀의 세속적 인본주의와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앤 더넘은 아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며, 얼마나 용감하고 담대한지 모른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일부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더넘은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믿음은 오바마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정신적 지지대가 되었다.
q=Lanai Lookout, Oahu|position=right
그녀의 유해는 하와이주 오아후섬 남쪽 해안의 라나이 전망대(Lanai Lookout)에서 태평양에 뿌려졌다. 하와이는 더넘이 두 남편을 만난 곳이자, 인류학 학사부터 박사 학위까지 모든 학위를 취득한 특별한 장소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과 학문적 배경은 그녀가 포용적이고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