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어린 시절과 학력은 그의 정치적 성장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1956년 9월 17일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북부 추이주 아라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샤르셴 아탐바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붉은 군대 소속으로 동유럽 전선에서 복무한 참전 용사였다.
아탐바예프는 첫 번째 부인 부아자르와의 결혼에서 네 자녀를 두었다. 아들 세이이트와 세이테크, 딸 디아나와 디나라가 그들이다. 1988년에는 두 번째 부인 라이사 아탐바예바와 결혼하여 아들 카디르베크(1993년생)와 딸 알리야(1997년생)를 두었다. 라이사는 타타르족 출신으로, 오시에서 태어났으며 의사로 일했다. 그의 딸 알리야 샤기예바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유명한 예술가이다. 2018년 1월, 아탐바예프는 자신이 작곡한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노래를 발표했으며, 이 노래는 후에 아제르바이잔의 가수 아라즈 엘세스에 의해 다시 불려졌다.
1.2. 학력
아탐바예프는 모스크바 국립 경영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키르기스 SSR 통신부에서 엔지니어 및 프룬제 (현 비슈케크)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키르기스 SSR 최고 회의 간부회 사무국에서 일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프룬제 시 페르보마이스키 지구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키르기스스탄 최초의 민간 기업인 '포럼'을 설립하여 성공적인 사업가로 활동했으며, 한때 이 기업은 키르기스스탄의 국내총생산의 20%를 차지하는 쿰토르 광산과 비슷한 수준의 세금을 납부했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와 튀르키예에서도 사업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2. 정치 경력 초기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초기 정치 경력을 쌓았다.
2.1. 사회민주당 활동
아탐바예프는 1993년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99년 7월 30일부터 2011년 9월 23일까지 당의 의장을 역임했다. 2005년 튤립 혁명 당시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의 상징은 튤립이었다.
2.2. 정부 참여 및 시위
2000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6%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2005년 12월 20일부터 2006년 4월 21일까지 정부에서 산업무역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2006년 4월 말과 11월에 비슈케크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개혁을 위하여!' 운동을 이끌었다. 2006년 12월 26일, 아탐바예프는 다른 의원들의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 해산 요구를 거부하며, "이 의회는 적어도 2007년 5월까지는 해산될 수 없으며, 모든 법률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키르기스스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가 (제안된) 권위주의적 헌법을 채택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법적으로 채택된 헌법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능한 모든 (항의 행동을) 취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2.3. 튤립 혁명
아탐바예프는 2005년 튤립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부패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단호한 연설을 통해 민주적 변화를 이끄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아탐바예프는 자신의 당을 법치주의와 정의 확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끌며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사회민주당은 시위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원하여, 궁극적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의 전복을 이끈 대규모 집회의 조직자 중 하나가 되었다. 아탐바예프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민주적 개혁과 국가 내 인권 개선을 촉구했다.

3. 총리 재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총리로서 두 차례에 걸쳐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3.1. 2007년 총리직
2007년 3월 29일, 아짐 이사베코프 총리의 사임에 따라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3월 30일 의회에서 48대 3의 압도적인 표차로 인준을 받았다. 아탐바예프는 중앙아시아에서 야당 출신으로는 최초로 총리직에 오른 인물로 기록되었다. 4월 11일, 그는 바키예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비슈케크의 대규모 시위대에 연설하려 했으나, 시위대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2007년 10월 24일, 바키예프 대통령은 2007년 키르기스스탄 헌법 국민투표 이후 아탐바예프 정부의 사임을 발표했다. 정부는 12월 2007년 키르기스스탄 의회 선거 이후까지 직무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탐바예프는 11월 28일 사임했으며, 바키예프 대통령은 그의 직무 수행을 칭찬하며 사임을 수락하고 이스켄데르베크 아이다랄리예프를 총리 대행으로 임명했다. 사회민주당의 에딜 바이살로프는 아탐바예프가 의회 선거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강제로 해임되었다고 주장했다.
3.2. 2010-2011년 총리직
2009년 7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광범위한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투표 당일 후보직을 철회했다. 그는 "대규모의 전례 없는 위반으로 인해 우리는 이 선거를 불법으로 간주하며, 새로운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고 밝혔다.

2010년 키르기스스탄 의회 선거 이후, 그는 자신의 사회민주당과 레수푸블리카 (정당), 아타-주르트가 참여하는 연립 정부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1년에는 로자 오툰바예바의 뒤를 이어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2011년 10월 30일 선거 당일, 그는 유권자 약 60%의 투표율 중 63%를 득표하며 부툰 키르기스스탄당의 아다칸 마두마로프와 아타-주르트당의 캄치베크 타시에프를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 대통령 재임 (2011-2017)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4.1. 취임
아탐바예프는 2011년 12월 1일 비슈케크의 키르기스 국립 필하모닉 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식에는 압둘라 귈 튀르키예 대통령, 카림 마시모프 카자흐스탄 총리, 아르투르 라시자데 아제르바이잔 총리, 미헤일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 등 여러 국가의 정상 및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러시아 대통령 행정부 수장 세르게이 나리시킨과 체첸 공화국 수장 람잔 카디로프의 참석이 예상되었으나, 그들은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러시아 외무부의 하급 관리들을 보냈다.
취임 연설에서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국가의 새로운 역사입니다." 취임식 예산은 2009년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의 취임식에 사용된 비용의 절반 미만인 약 1000.00 만 KGS (21.70 만 USD)가 소요되었다. 아카예프, 바키예프, 오툰바예바의 취임식에 사용되었던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장식된 흉갑과 달리, 아탐바예프의 흉갑은 108NaN 경 cm 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석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보석이 국가 문화에 "수입된"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소로스는 아탐바예프에 대해 "키르기스스탄은 부패하지 않은 대통령을 갖게 되어 행운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부패에 물들지 않은 인물이 권력을 잡는 것이 국가의 민주적 발전에 좋다고 언급했다. 알렉산더 소로스 또한 키르기스 정부의 '타자 쿰' 프로젝트에서의 디지털화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아탐바예프를 "약속을 지키는 사람... 그와 어떤 것에 동의하기는 때때로 어렵지만, 일단 합의되면 합의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끝까지 간다"고 묘사했다.


아탐바예프의 대통령 임기 말,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여 "키르기스스탄과 국민들이 인권, 민주주의의 규칙이라는 이념에 헌신하고 있음을 확신했으며, 이것이 실제로 키르기스 국민에게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언급했다.
4.2. 국내 정책
아탐바예프는 국내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4.2.1. 헌법 개혁 및 의회 강화
2015년 11월, 아탐바예프의 명령에 따라 키르기스스탄 국방부는 국방국가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키르기스스탄군에 대한 권한은 키르기스스탄군 총참모부로 이관되었다. 총참모장은 군의 최고 지도자이자 대통령의 제2인자로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2016년 12월,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 내 군사 법원의 사용을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아탐바예프는 2016년 키르기스스탄 헌법 국민투표를 주재하여 총리와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사법 시스템을 개혁하는 안을 제안했다. 국제 전문가들은 헌법 개혁을 통한 의회 형태의 정부 전환, 총리와 의회의 역할 강화, 그리고 이슬람주의 이념의 확산에 맞서 권력 기관을 안정화하려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이 개혁은 이전 헌법에 명시된 결혼 계약의 유효성을 명확히 했다. 이 변경안은 키르기스스탄 인구의 거의 80%에 달하는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로 승인되었다.
아탐바예프는 블라디미르 푸틴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자신에게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준수하고 두 번째 임기를 포기했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카자흐스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나에게 두 번째 임기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우리는 다른 국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설명했다. 국민들은 그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4.2.2. 생체 인식 선거 시스템 도입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재임 기간의 중요한 성과는 생체 인식 여권과 생체 인식 선거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이 시스템은 선거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한 시민이 여러 번 투표할 가능성을 배제했다. 투표는 지문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2014년 제정된 "키르기스 공화국 시민 생체 인식 등록에 관한 법률"은 민주적 선거 제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 연합은 키르기스스탄이 2015년 의회 선거를 조직하는 데 지원을 제공했으며, 이 선거는 공정하고 경쟁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아탐바예프는 2013년 브뤼셀 방문 시 유럽 의회 의장 마르틴 슐츠 및 유럽 이사회 의장 헤르만 반 롬푀이와의 협상에서 이러한 지원을 논의했다. 당시 아탐바예프는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 집행위원회 위원장과도 활발한 대화를 나눴다.
키르기스스탄 검찰총장실은 아탐바예프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자주 활동했다. 이는 특히 선거 한 달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중 한 명과 만난 이후 카자흐스탄 지도부가 키르기스스탄의 선거 과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7년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한 페데리카 모게리니는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공화국의 선거 절차 전반을 개선하고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킨 데 기여한 바가 명백하다"고 인정했다.
4.2.3. 성평등 정책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리더십 아래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성평등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의회 명단에 여성 대표 33% 할당제가 도입되었고, 지방 의회에는 여성 대표 30% 할당제가 수립되어 여성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었다.
아탐바예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검찰총장, 대법원장, 의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이 포함된다. 모성법, 가정 폭력 방지법 등 주요 법률이 통과되었으며, 출산에 대한 사회적 혜택이 제공되었다. 어머니날은 공식적으로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전국적으로 모성 및 아동 보건 센터, 유방암 검진 센터, 여성 종양 센터, 부인과 질환 센터가 건설되어 여성 건강 관리가 향상되었다.
4.2.4. 세속주의 정책
아탐바예프는 또한 국가 내 이슬람화 과정에 반대하며 세속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종교와 국가의 분리 원칙을 지지했다. 이슬람 신학자들과 무프티아테의 대중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 여성들의 복장 선택권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들어보세요, 50년대부터 키르기스스탄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었지만, 이 여성들 중 누구도 자살 폭탄 벨트를 두르고 누군가를 폭파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머리에 방수포 부츠를 신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아무도 폭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친절함, 사람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머리를 잘라야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특정 복장을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과 싸워야 합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게 하세요, 하지만 아무도 폭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의 주요 문제는 테러리즘이기 때문입니다."

4.3. 외교 정책
아탐바예프는 주요 국가 및 국제기구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 키르기스스탄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4.3.1. 유럽 연합과의 관계
2011년 대통령 취임 직후, 아탐바예프는 튀르키예를 방문하여 압둘라 귈 튀르키예 대통령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2011년 3억 달러였던 무역액을 2015년까지 10억 달러로 늘리고, 튀르키예가 향후 몇 년 내에 키르기스스탄에 4억 5천만 달러 규모의 튀르키예 투자를 유치하는 데 동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탐바예프는 대통령으로서 브뤼셀을 2011년, 2013년, 2015년, 2016년 총 네 차례 방문했다. 2015년 3월 22일부터 4월 1일까지는 유럽 국가들(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독일)을 순방하며 문화 교류부터 투자 협력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심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많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유럽 연합은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적 개혁에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아탐바예프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2014-2020년 양자 협력의 틀 내에서 유럽 연합은 교육, 법치주의, 농촌 개발이라는 세 가지 핵심 분야의 발전을 위해 키르기스 공화국에 1.84 억 EUR를 할당했다.


2015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키르기스스탄 방문은 독립 키르기스 공화국 역사상 독일 연방 총리의 첫 방문이자, 독일 연방 총리의 중앙아시아 지역 첫 방문이었다.
2013년, 아탐바예프는 영국이 바키예프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가 런던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영국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은 무아마르 카다피나 바샤르 알아사드의 자녀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왜 키르기스스탄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적용합니까? 영국은 '우리는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적 발전을 돕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강탈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돈을 공정한 선거에 자금을 대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4.3.2. CIS 국가 및 기타 국가와의 관계
2015년 2월, 벨라루스에 은신 중이던 전 안보국장 자니시 바키예프에게 알만베트 아나피야예프(41세)의 죽음을 전적으로 비난하면서 벨라루스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벨라루스 외무부는 그의 발언에 대해 "논평할 의미가 없다"고 응수했다.
201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단 안보 조약 기구 정상회담에서 아탐바예프는 중앙아시아의 수자원 문제에 대해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같은 해 말, 그는 이란에서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와 만나 "이란과 키르기스스탄은 공통된 종교, 역사, 문화를 가진 두 형제 국가이며, 양국 국민 사이에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정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2017년 2017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아탐바예프는 카자흐스탄이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인 외무르베크 바바노프를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카자흐스탄 관리들이 연금 수입을 약탈하여 부패했다고 비난했다. 2017년 10월 9일, 아탐바예프는 소치에서 열리는 독립국가연합 정상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회담에는 키르기스스탄 지도자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만나야 하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달, 그는 타슈켄트를 방문하여 키르기스스탄 지도자로서는 획기적인 방문을 했다.
아탐바예프는 유라시아 경제 연합 가입을 발표하고, 2014년 마나스 국제공항에 주둔하던 미국 군사 기지 철수를 확보했으며, 최소 50만 명의 키르기스스탄 시민이 일하고 있는 러시아 연방과의 긴밀한 경제 관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러시아로부터 더 큰 경제 및 에너지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명했다.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러시아 군사 기지도 키르기스스탄에서 철수될 것이라고 단호히 밝혔다. 아탐바예프는 "미래에 키르기스스탄은 자체 군대에만 의존하고 희망해야 하며, 러시아, 미국 또는 다른 나라의 군사 기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초, 아탐바예프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의 회담에서 러시아가 칸트 공군 기지 사용료로 키르기스스탄에 빚진 1500.00 만 USD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4.4. 주요 정책 및 이니셔티브
아탐바예프의 재임 기간 동안 추진된 특별한 정책, 문화 행사, 역사적 기념 사업 등은 그의 리더십을 잘 보여준다.
4.4.1. 세계 유목민 게임 개최
아탐바예프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전통을 보존하고 대중화하기 위해 2014년 세계 유목민 게임의 출범을 지지했다. 세계 유목민 게임은 유목민 국가들의 문화유산, 스포츠 기술, 전통 스포츠를 선보이는 플랫폼이 되었으며, 다양한 국가 국민들 간의 문화적 유대와 상호 이해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았다.

최초 세 번의 세계 유목민 게임은 키르기스스탄 촐폰아타에서 개최되었다. 제4회 게임은 2022년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튀르키예 이즈니크에서 열렸다. 2024년 세계 유목민 게임은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9월 8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아탐바예프는 2014년과 2016년 제1회 세계 유목민 게임 개막식에 키르기스스탄 국가대표팀을 직접 이끌고 참여하여 행사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4.4.2. 1916년 중앙아시아 봉기 기억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러시아 제국의 징벌군에 의해 자행된 1916년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린 중앙아시아 역사상 유일한 중앙아시아 대통령이다. 우르쿤 또는 1916년 중앙아시아 봉기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이 지역 역사에서 비극적인 페이지였다. 기념비 개막은 그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존경과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아탐바예프의 행동은 과거의 불의에 맞서는 역사적 기억과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 결정은 국가적 화해와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정체성 강화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여겨졌다.

2016년 9월 17일,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아르메니아 대통령 세르지 사르키샨, 몰도바 총리 파벨 필립은 아타-베이이트 기념 단지에 있는 1916년 희생자 기념비에 헌화하며 희생자들의 기억을 기렸다.
2017년 10월,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 민족의 봉기와 이주를 기억하기 위해 11월 7일과 8일을 "역사와 조상 기억의 날"로 지정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2015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1916년 봉기를 기억하는 상징으로 구소련 국가와 러시아에서 사용되던 성 게오르기우스 리본의 사용을 중단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러시아어 사용 인구 사이에서 시위를 촉발했다.
4.4.3. GSP+ 지위 획득
키르기스스탄은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재임 기간인 2015년에 유럽 연합으로부터 GSP+ 지위를 획득했다. GSP+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키르기스스탄은 27개의 국제 협약을 준수해야 했다. 이 중 7개는 인권과 관련이 있는데, 아동 권리 보호,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 철폐,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보호,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 그리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권리 보장이 포함된다.
5. 대통령 퇴임 후 활동 및 법적 문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대통령직 퇴임 후에도 키르기스스탄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었으나, 후임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법적 문제에 직면했다.
5.1. 제임베코프 정부 비판
2017년 11월 24일 대통령직을 소론바이 젠베코프에게 이양한 후,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의 당수로 복귀했다. 그는 퇴임 후 정치 무대에 다시 등장하여, 특히 자신의 후임자를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2018년 봄부터 시작된 이러한 비판은 주로 젠베코프가 "가족 중심의 정권"을 수립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언론은 젠베코프의 가족 중심 정권과 그의 수십 명의 친척들이 최고위 국가 기관, 대사관, 의회에 포진해 있다는 헤드라인으로 가득했다. 2019년 3월 17일, 아탐바예프는 "이 사람을 권력에 앉힌 것에 대해 모두에게 사과한다. 내가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고 말하며 후임자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5.2. 면책 특권 박탈 및 구금
2019년 6월,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들은 아탐바예프의 대통령 면책 특권을 박탈하고 그에 대한 형사 고발을 추진하기로 투표했다. 이에 앞서 2월, 헌법재판소장 에르킨베크 마미로프는 "법의 소급 적용은 없다"며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2019년 5월 15일 키르기스 공화국 법률 "키르기스 공화국 대통령 활동 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라 대통령 면책 특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발언으로 인해 마미로프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 동생의 보좌관인 아실베크 젠베코프에 의해 교체되었다.
이에 대해 아탐바예프는 코이-타시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기자들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며 자신의 헌법적 권리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헌법재판소는 심문의 합법성 또는 불법성 문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젠베코프의 가족 중심 정권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그는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이 심리 중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국가 보안 요원의 경호를 받고 있었다. 그는 경찰이 법을 어기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7월 3일, 아탐바예프는 수 주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1,000명의 지지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7월 24일, 그는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 대표단과 함께 러시아로 2일간의 방문을 시작했다. 그는 이날 오후 1시 48분 칸트 공군 기지 (러시아 공군 운영)에서 수호이 슈퍼제트 100을 타고 출발했다. 방문 기간 동안 그는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5.3. 수감 생활 및 건강 문제
2019년 8월 7일, 키르기스스탄 특수부대가 비슈케크에 있는 아탐바예프의 거주지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군인 1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의 민간인과 군인이 부상을 입었다. 키르기스스탄 안보위원회 회의에서 젠베코프는 아탐바예프가 "헌법을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다음 날 두 번째 습격이 시작되었고, 아탐바예프는 보안군에 항복했다.
2019년 8월 9일,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 사무실과 야당 의제를 대중에게 전달하던 '에이프릴 TV' 채널이 특수부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압수되었다. 당의 모든 문서, 조직 장비 및 사회민주당 소유의 다른 재산이 불법적으로 압수되었다. 특수부대는 사회민주당의 컴퓨터와 서버에서 전국 사회민주당 당원들의 정보를 입수하여, 전국 당원들을 심문하고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1,700명의 시민들이 키르기스 공화국 검찰총장실에 소론바이 젠베코프 대통령의 불법 행위에 대해 형사 소송을 제기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에 대해 오히려 이 1,700명 모두가 심문을 받게 되었고, 경고와 위협을 받으며 강력한 압력을 받았다. 8월 13일, 키르기스스탄 국가안보위원회 (SCNS) 위원장 오로즈베크 오품바예프는 아탐바예프가 구금되기 전에 정부 전복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2020년 6월 23일, 그는 바투카예프 사건과 관련하여 부패 혐의로 1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2022년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마드리드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93개 정당이 키르기스스탄에 대한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은 "검찰과 법원이 8월 7-8일 코이-타시에서 1,700명의 민간인에게 가해진 심각한 부상과 냉병기를 포함한 무력을 사용한 잔혹 행위 사실을 조사하지 않는 것은 불공정한 재판을 시사하며, 이는 이전 특수 서비스 책임자들인 오품바예프와 주누샬리예프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민간인에 대한 무력 사용이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에 해당하며, 이는 국제적으로 조사될 사안임을 지적한다. 피해 시민들의 진술이 계속 무시된다면, 조직은 국제 조사에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그의 아들 카디르베크 아탐바예프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고문에 대해 증언했다.
아탐바예프는 바투카예프의 석방 및 갱스터 바투카예프의 탈옥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형사 처벌을 받았으나, 바투카예프와 아탐바예프가 개인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접촉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사건에 없었다. 아탐바예프에 대한 모든 재판 절차는 공식 법정에서 진행되지 않고, 키르기스스탄 국가안보위원회의 교도소에서 진행되었으며, 사건이 기밀로 분류되어 기자나 친척조차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2020년 11월, 키르기스 공화국 대법원 사법부는 바투카예프 탈옥 사건에 대한 아탐바예프의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이는 판결이 피고인에게 최후 진술권과 법정 변론 참여권을 박탈하는 등 수많은 중대한 절차적 위반을 통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2020년 10월 5일, 2020년 키르기스스탄 시위가 발생했다. 비슈케크에서 1,000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저녁까지 최소 5,000명으로 늘어났으며, 2020년 키르기스스탄 의회 선거의 결과와 투표 매수 의혹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시위대는 아탐바예프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10월 8일, 아탐바예프는 비슈케크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차량이 총격을 받아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는 10월 10일 다시 수감되었다. 그는 2020년 키르기스스탄 혁명의 혼란에 참여한 혐의로 다시 수감되었으나, 나중에 형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 수바날리예프에 따르면, 아탐바예프의 체포는 정치적 상대를 제거할 필요성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이전 당국은 권력 이양의 조건으로 코이-타시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투옥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당국은 2020년 10월 10일 야당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구금을 지시했다.
2019년 8월, 아탐바예프는 부패와 살인 혐의로 수감되었으나, 나중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0년 10월 5일, 선거 시위대는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아탐바예프는 2023년 2월 자신에 대한 모든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2년 3월 23일, 아탐바예프는 교도관들의 폭력으로 인해 척추를 다쳤으며, 몸에 수많은 찰과상과 구타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3월 25일 키르기스 공화국 국립 고문 방지 센터에 의해, 그리고 이후 국립 심장학 센터의 의료 검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아탐바예프는 치료뿐만 아니라 심각한 건강 검진조차 거부당했다. 2022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사무총장 루이스 아얄라가 키르기스스탄을 특별 방문하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특별 성명이 발표된 후에야 아탐바예프는 잠시 검진을 위해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5.4. 국제적 지원

2022년 7월 8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이사회(전 세계 63개 정당)는 "전 대통령이 구금, 재판, 선고를 받은 방식이 피고인으로서의 법적 및 인권적 권리를 침해하고, 키르기스 형사소송법을 위반하며, 국제 사법 규범을 위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탐바예프가 검진을 받은 국립 심장학 센터에서 식도에 두 차례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 수술은 시행되지 않았다. 아탐바예프는 바렛 식도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자 스페인 총리인 페드로 산체스의 지원으로 석방되어 의료 수술을 위해 스페인으로 이송되었다. 아탐바예프는 자신에 대한 모든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20년 새해를 맞아 아탐바예프가 아직 수감 중이던 당시 그에게 새해 카드를 보냈다.
6. 암살 시도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정치 경력 동안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를 겪었다.
2007년 3월부터 11월까지 키르기스 공화국 총리 재임 기간 중인 2007년 5월 11일, 아탐바예프는 독극물에 의한 암살 시도를 겪었다. 튀르키예 앙카라 군사 의료 병원의 튀르키예 의사들이 나중에 확인했듯이, 독극물은 알려지지 않은 출처의 독에 의해 발생했다.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아마도 지금 나에게 많은 적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크리스탈 반도체 재료 공장을 국유화하려는 나의 시도 때문에 그들은 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위협한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자 대사업가인 막심 바키예프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대통령의 형제 자니시 바키예프 등 대통령 행정부 인사들이 아탐바예프 독살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2009년 7월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는 통합 야당 블록의 유일한 후보였는데, 잘랄아바트 지역 바자르코르곤 지구에서 유권자들과의 만남 전날 다시 독극물에 중독되었다. 현지 호텔에서 아침 식사 후, 야당 단일 후보는 예정된 유권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으나, 도중에 몸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야당 인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병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회의를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에서 내릴 때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움직임의 협응력 상실을 느꼈다. 아탐바예프의 대변인 조마르트 사파르바예프는 "그는 몸이 끔찍했고, 손톱이 갈색으로 변했으며, 구토와 현기증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탐바예프는 다시 튀르키예에서 치료를 받았다.


쿠르산 아사노프 내무부 차관 겸 아탐바예프 체포 작전 책임자는 2019년 8월 코이-타시 마을에 있는 그의 거주지를 1,000명 이상의 법 집행 기관 대표들이 습격했을 때 "전 대통령 아탐바예프를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밝혔다.
2020년 10월 사건 당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와 외무르베크 바바노프가 이끌던 통합 야당의 집회 도중,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차량에 총탄이 발사되었다. 암살 시도 영상은 소셜 미디어에서 널리 퍼졌다.
7. 수상 및 영예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7.1. 키르기스스탄
이미지 | 훈장 / 영예 | 수여 연도 | 수여 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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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르기스 공화국 영웅 | 2017년 11월 27일 | |
![]() | 다나케르 훈장 | 2007년 11월 28일 | 공화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기여하고 민족 간 화합을 보존하기 위한 결실 있는 활동 |
![]() | 마나스 훈장 2등급 | 2011년 12월 1일 | 권위주의적 가족 중심 정권에 맞선 투쟁 기간 동안 시민적 책임감과 용기,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이념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헌법 개혁, 민주적 의회 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2010년 4월 인민 혁명 이후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완료한 것 |
![]() | 단크 메달 | 1999년 | 키르기스스탄 산업 생산 부문에서의 결실 있는 활동 |
7.2. 해외 훈장
8. 평가 및 논란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리더십과 정책 결정은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 인권, 사회 발전에 긍정적 및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낳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아탐바예프는 중앙아시아에서 헌법에 명시된 임기를 준수하고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의회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혁과 유럽 연합의 지원을 받은 생체 인식 선거 시스템 도입은 선거의 투명성과 민주적 절차를 크게 개선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한 할당제를 도입하고, 모성 보호 및 가정 폭력 방지 법률을 제정하는 등 성평등 정책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지지하는 세속주의 정책을 옹호하며 여성의 복장 선택권을 옹호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 유목민 게임을 출범시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전통을 보존하고 대중화하려 한 노력은 문화적 유대 강화에 기여했다. 1916년 러시아 제국의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고 "역사와 조상 기억의 날"을 제정한 것은 역사적 기억과 국가적 화해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퇴임 후 활동과 관련된 법적 문제들은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후임 소론바이 젠베코프 정부의 "가족 중심 정권"을 비판한 것은 그의 정치적 용기로 평가될 수 있으나, 이로 인해 대통령 면책 특권이 박탈되고 구금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 충돌과 인권 침해 의혹은 그의 명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감 중 건강 악화, 고문 의혹, 그리고 치료 거부 문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국제 인권 단체들의 강력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바투카예프 사건과 관련하여 증거 없이 유죄 판결을 받고 비밀리에 재판이 진행된 점은 사법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체포 과정에서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폭로와 차량에 대한 총격 사건은 그의 생명이 위협받았음을 시사하며, 이는 정치적 탄압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민주화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될 수 있으나, 그의 퇴임 후 겪은 법적 고난과 인권 침해 의혹은 그의 유산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남겼다. 그의 사례는 중앙아시아에서 민주적 전환과 권력 이양의 어려움, 그리고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