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82년경 마케도니아의 엘리메이아에서 귀족인 필리포스와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사회적으로 저명하고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안티고노스의 어린 시절과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깊은 야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가 마케도니아군에 입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초기 경력
안티고노스는 필리포스 2세 휘하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마케도니아가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에우메네스, 파르메니온, 폴리페르콘, 안티파트로스 등 필리포스 2세의 주요 장수들과 함께 활약하며 마케도니아 군에서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기원전 340년 페린토스 포위전 중에 투석기 파편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으며, 이때부터 "애꾸눈"이라는 뜻의 모노프탈모스Monophthalmos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애꾸눈이 된 것에 상당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례로 플루타르코스는 테오그리테스라는 소피스트가 그를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로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코인 초상화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왼쪽 눈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서의 경력
기원전 336년 10월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안티고노스의 능력을 인정하여 중용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제국 동방 원정을 시작할 무렵, 당시 60세였던 안티고노스는 코린토스 동맹의 그리스 동맹 보병대 7,000명을 지휘했다.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프리기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하고 1,500명의 용병대와 현지 병력으로 그곳을 지키게 했다.
프리기아는 비티니아가 독립을 유지하고 파플라고니아, 카파도키아, 리카오니아가 페르시아 사트라프들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이사우리아와 피시디아가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등 전략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다리우스 3세에게 충성하는 로도스의 멤논이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에게해의 여러 섬을 공략하며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안티고노스의 주된 임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10년간에 걸친 원정 동안 보급로와 통신선을 확보하고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승리한 후, 나바르자네스의 지휘 아래 이소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2만여 기병대를 포함한 페르시아군이 소아시아로 침입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다.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32년 봄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에서 세 차례의 전투 끝에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또한 멤논이 함대를 이끌던 중 병사하면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력화되었다. 이후로도 계속된 페르시아의 반격을 물리친 안티고노스는 프리기아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고 보급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며 프리기아의 사트라프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3. 디아도코이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하고 재통일하려는 디아도코이들의 복잡한 권력 투쟁이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안티고노스는 이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결국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연합에 맞서 최후를 맞이했다.

3.1. 알렉산드로스 사후와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직후, 첫 현안은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멜레아그로스와 보병 장교들은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으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첫 왕비인 록사네의 자식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결국 록사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았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여 필리포스 3세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공동 왕으로 옹립했다. 페르디카스는 왕국 섭정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보좌하기로 했으나, 페르디카스는 곧 멜레아그로스를 암살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 회의에서 제국이 분할될 때, 안티고노스는 프리기아, 리카오니아, 팜필리아, 리키아, 서부 피시디아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에우메네스가 할당받은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를 확보하는 것을 돕기를 거부하여 당시 제국의 섭정이었던 페르디카스의 적대감을 샀다. 페르디카스는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간주하고, 왕실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정복한 뒤 서쪽으로 향하여 안티고노스를 위협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그리스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페르디카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기원전 320년, 안티고노스는 키프로스를 확보했다.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은 기원전 320년 페르디카스가 이집트를 침공하려다 실패하고 불만을 품은 자신의 장교들(셀레우코스와 안티게네스)에게 암살당하면서 끝났다.
3.2.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사망하자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제국의 새로운 분할이 이루어졌다. 안티파트로스가 제국의 새로운 섭정이 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안티고노스는 트리파라데이소스에서 단죄된 페르디카스파의 잔당들을 상대로 전쟁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안티고노스는 왕실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며 안티파트로스의 유럽 군대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을 보강받은 후, 소아시아에 남아있던 전 페르디카스파인 에우메네스, 알케타스, 도키모스, 아탈로스, 폴레몬에 대항하여 진군했다. 안티고노스는 먼저 카파도키아에 있던 에우메네스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노스는 과감하고 공격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결국 오르키니아 전투에서 에우메네스를 제압하고 격파하여 그를 노라 요새로 후퇴시켰다. 에우메네스를 포위한 채, 안티고노스는 이제 피시디아의 크레토폴리스 근처에 있던 알케타스, 도키모스, 아탈로스, 폴레몬의 연합군을 향해 진군했다. 안티고노스는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기습을 통해 적들을 격파했다. 안티고노스는 한 번의 전역에서 두 번의 뛰어난 작전을 통해 노라에 고립된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페르디카스파의 잔당들을 섬멸했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를 제외하고 폴리페르콘에게 섭정직을 남겼다. 안티고노스와 다른 실력자들은 폴리페르콘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야망을 저해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와 협상에 들어갔으나, 에우메네스는 이미 폴리페르콘에게 설득되어 제국 내 다른 모든 장군들에 대한 권위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에우메네스는 계략을 통해 노라에서 탈출하여 소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남쪽 킬리키아로 도주했다. 안티고노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대규모 함대를 보유한 클레이토스 백색파와 소아시아 북서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에우메네스에게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클레이토스는 해전에서 안티고노스의 제독 니카노르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 안티고노스와 니카노르가 육해군 합동 공격을 감행하여 클레이토스의 진영을 기습하자 완전히 허를 찔려 전 병력이 포로로 잡히거나 사망했다(비잔티움 전투에서).
한편, 에우메네스는 킬리키아, 시리아, 페니키아를 장악하고 실버 실드와 히파스피스타이의 지휘관인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폴리페르콘을 위해 해군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함대가 준비되자 그는 폴리페르콘을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서쪽으로 보냈으나, 킬리키아 해안에서 안티고노스의 함대를 만나자 함대가 안티고노스 편으로 넘어갔다.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킬리키아로 동진하여 시리아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일 작정이었다. 에우메네스는 이를 미리 알고 페니키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상부 사트라피에서 지원을 모으려 했다.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사트라프인 암피마코스의 지지를 얻었으나, 바빌로니아의 사트라프인 셀레우코스와 메디아의 사트라프인 페이톤의 도움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자신의 영토를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 킬리키아와 북부 시리아를 확보하는 데 시간을 들인 뒤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했다. 셀레우코와 페이톤을 설득하지 못한 에우메네스는 겨울 숙영지를 일찍 떠나 수시아나의 주요 왕실 재무고인 수사로 진군했다. 수사에서 에우메네스는 수시아나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모든 사트라프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사트라프들이 에우메네스에게 합류하자 그는 상당한 병력을 갖추게 되었고, 안티고노스와의 전투를 자신감 있게 기대할 수 있었다. 에우메네스는 이후 남동쪽으로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추가 병력을 확보했다. 한편 안티고노스는 수사에 도착하여 셀레우코스를 그곳에 남겨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에우메네스를 추격했다. 코프라타스 강에서 에우메네스는 강을 건너던 안티고노스를 기습하여 그의 병력 4,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재앙에 직면한 안티고노스는 강 건너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돌아 메디아로 진군하여 상부 사트라피를 위협했다. 에우메네스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안티고노스의 보급선을 끊고 싶었으나, 사트라프들은 자신들의 사트라피를 포기하기를 거부하며 에우메네스를 동쪽에 머물게 했다. 기원전 316년 늦여름,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 결국 두 군대는 남부 메디아에서 만나 파라이타케네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사상자가 더 많았던 안티고노스는 다음 날 밤 군대를 강행군시켜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316년에서 기원전 315년 겨울 동안, 안티고노스는 사막을 가로질러 군대를 이동시켜 페르시아에 있는 에우메네스를 기습하여 허를 찌르려 했으나, 불행히도 지역 주민들에게 목격되어 적들에게 보고되었다. 며칠 후 양군은 전투를 위해 대열을 갖추었다. 가비에네 전투는 이전의 파라이타케네 전투만큼이나 결정적이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에우메네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그의 동맹인 페우케스타스의 이중성 또는 무능함 때문에 군대의 보급 캠프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이 손실은 특히 실버 실드에게 심각했는데, 캠프에는 30년 간의 성공적인 전쟁을 통해 축적된 전리품과 병사들의 여성 및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지휘관 중 한 명인 테우타모스가 안티고노스에게 접근하여 에우메네스를 넘겨주는 대가로 보급품 수송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실버 실드는 이에 응하여 에우메네스와 그의 장교들을 체포하여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끝났다. 에우메네스는 감시하에 놓였고, 안티고노스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의 지지를 받아 포로를 살려주려 했으나, 회의는 이를 기각하고 에우메네스는 처형되었다.
그 결과, 안티고노스는 이제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의 권위는 동부 사트라피에서 서쪽의 시리아와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수사의 재무고를 장악하고 바빌론에 입성했다. 바빌론의 총독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도망쳐 그와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와 동맹을 맺었다.
3.3.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14년, 동맹을 맺은 실력자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에게 카파도키아와 리키아를 카산드로스에게, 헬레스폰토스 프리기아를 리시마코스에게, 페니키아와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그리고 바빌로니아를 셀레우코스에게 양도하고, 그가 축적한 보물을 나누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안티고노스의 유일한 답변은 실력자들에게 전쟁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리스토데모스를 1000 talents와 함께 펠로폰네소스반도로 보내 그곳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그의 오랜 적이었던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어 카산드로스와 전쟁을 벌이게 했다. 그는 조카 폴레마이오스 휘하의 군대를 카파도키아를 거쳐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보내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소아시아를 침공하는 것을 막게 했다. 안티고노스 자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제하에 있던 페니키아를 침공하여 티레를 포위했다. 티레 포위는 1년이 걸렸고, 페니키아를 확보한 후 그는 주력군을 소아시아로 진군시켜 아산드로스(리디아와 카리아의 사트라프이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의 동맹)를 제거하려 했으며,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방어는 그의 장남 데메트리오스에게 맡겼다.
기원전 312년, 안티고노스는 리디아와 카리아 전체를 점령하고 아산드로스를 몰아냈다. 그는 조카들인 텔레스포로스와 폴레마이오스를 그리스의 카산드로스에게 보냈다. 안티고노스가 서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상황을 이용하여 남쪽에서 침공했다. 그는 가자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를 만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 프톨레마이오스를 위해 싸우던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돌아갔고, 곧 그의 옛 사트라피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동부 지방을 확보했다. 셀레우코스의 정복은 바빌로니아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 전쟁 동안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와 안티고노스를 모두 격파하고 동부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309년까지 지속된 바빌로니아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사이에 평화가 체결되어 각자의 영역(안티고노스는 서쪽, 셀레우코스는 동쪽)에서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서쪽에서 안티고노스는 적들을 지치게 만들고 그들에게 평화를 강요했다. 이 평화로 그는 자신의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안티고노스의 제국과 동맹 체제는 이제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3.4.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과 이프소스 전투
평화 협정은 안티고노스가 일부 자유 그리스 도시들에 수비대를 배치했다는 구실로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에 의해 곧 파기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에 대한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카산드로스로부터 그리스의 일부를 빼앗았다.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의 막내아들 필리포스가 26~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는 안티고노스에게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는 아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전역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녔을 장군을 잃은 것이었다.
기원전 306년 키프로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한 후,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그 승리 이후 안티고노스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아들에게도 같은 왕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사실상 안티고노스가 이제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다른 실력자들인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도 곧 안티고노스의 선례를 따라 스스로 왕을 선언했다.
안티고노스는 이제 대규모 군대와 강력한 함대를 준비했으며, 그 지휘권을 데메트리오스에게 넘겨주고 자신의 영토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그의 이집트 침공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후퇴해야 하는 실패로 판명되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기원전 305년,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를 점령하려 시도했는데, 로도스는 이집트에 대항하는 안티고노스를 돕기를 거부했었다. 로도스 포위전은 1년 동안 지속되었고, 기원전 304년 데메트리오스가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로도스인들이 안티고노스를 위해 배를 건조하고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모든 적에 대항하여 그를 돕는다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로도스인들은 오랜 포위전 동안의 도움에 대해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소테르Soter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구원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제국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들, 이제는 스스로 왕이 된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의 성공에 대응하여 종종 결혼을 통해 서로 동맹을 맺었다. 안티고노스는 곧 이 네 명 모두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주로 그의 영토가 그들 각자의 영토와 국경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304년에서 303년 사이에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얻고 카산드로스를 여러 차례 격파하며 카산드로스를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게 마케도니아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연합하여 그를 공격했다. 리시마코와 카산드로스의 장군 프레펠라오스는 트라키아에서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리시마코스는 곧 대부분의 이오니아 도시들을 확보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카파도키아를 통과하여 진군하고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그리스에서 소환할 수밖에 없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최근 테살리아에서 카산드로스와 결정적이지 않은 교전을 벌인 바 있었다. 이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리시마코스와 프레펠라오스에 대항하여 움직였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프레펠라오스의 연합군은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안티고노스는 81세의 나이에 이 전투에서 투창에 맞아 전사했다. 이프소스 이전에는 그는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모든 계획은 끝이 났다. 안티고노스의 왕국은 분할되었고, 그의 영토 대부분은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가 통치하는 새로운 왕국들의 손에 들어갔다. 승리자들은 대체로 안티고노스의 선례를 따라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지만, 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옛 제국이나 서로에 대한 권력을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이 왕들은 서로 간에 불안한 (그리고 결국 실패한) 모두스 비벤디를 확립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별개의 영역으로 받아들였다.
4. 통치와 왕조 창건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06년 키프로스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승리 후 왕(바실레우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안티고노스 왕조를 창건했다. 그의 왕조는 이후 마케도니아를 지배했으며,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 공화국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의 통치 시기, 특히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평화가 체결되었을 때, 그의 제국과 동맹 체제는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며 권력의 정점에 달했다.
5. 가족 및 개인 생활
안티고노스의 아버지는 귀족인 필리포스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게는 데메트리오스라는 형과 폴레마이오스라는 동생이 있었다(이 폴레마이오스는 장군 폴레마이오스의 아버지이다). 그의 조카 텔레스포로스는 세 번째 형제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어머니가 페라의 페리안드로스와 재혼하여 낳은 이복동생 마르시아스가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형의 미망인인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여 두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필리포스를 낳았다.

안티고노스는 매우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영웅적인 체격"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분명히 큰 남자였음을 의미하지만 안티고노스는 그보다도 더 키가 컸다. 이러한 거대한 체구 외에도, 그는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아마도 페린토스 포위전에서) 더욱 위압적인 인상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모노프탈모스"(애꾸눈)라는 별명을 얻었다.
6. 죽음과 유산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80세 또는 8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영토는 승리자들인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에 의해 분할되었다. 안티고노스가 가졌던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야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좌절되었고, 이는 디아도코이들이 각자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적 지형을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그의 왕국은 분할되었지만, 그의 살아남은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294년 마케도니아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안티고노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 공화국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며 안티고노스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7. 평가 및 역사적 조명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장 유능하고 야심찬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전략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디아도코이 전쟁 초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재통일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의 급격한 세력 확장은 다른 계승자들의 연합을 불러왔고, 결국 이프소스 전투에서의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졌다.
안티고노스는 한때 에우메네스를 살려두려 했으나, 부하들의 반대로 뜻을 꺾어야 했다. 그는 에우메네스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유해를 그의 가족에게 보내는 등 개인적인 존중을 보였다. 또한 그는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이 제국 동방 영토에 대한 야심을 보이자 그를 제거하는 등,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안티고노스의 활약은 헬레니즘 시대의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실패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구적인 분열을 가져왔다.
8. 대중문화 속 안티고노스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는 여러 역사 소설과 영화에서 등장한다.
- 메리 르노의 소설 장례 경기에서는 안티고노스의 별명인 "모노프탈모스"가 "애꾸눈"으로 번역되어 사용된다.
- 올리버 스톤 감독의 2004년 영화 알렉산더에서는 이안 비티가 안티고노스 역을 연기했다.
-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역사 소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한 코끼리와 로도스의 청동 신에 안티고노스(그리스어 형태인 안티고노스)가 등장한다.
- 크리스천 캐머런의 역사 소설 왕들의 힘에서는 안티고노스가 주요 악당으로 나온다.
- 알프레드 더건의 역사 소설 코끼리와 성채(미국 제목: 도시의 포위자)의 초기 장에 등장하는데, 이 소설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 에릭 플린트의 대체 역사 소설 알렉산더의 유산과 그 속편 마케도니아의 위험에서는 조연 악당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