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티븐 노먼 칼턴(Steven Norman Carlton스티븐 노먼 칼턴영어, 1944년 12월 22일 ~ )은 미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965년부터 1988년까지 좌완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6개 팀에서 뛰었지만, 특히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사이 영 상을 네 차례 수상하고 1980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레프티(Lefty)"라는 별명으로 불린 칼턴은 4000개 이상의 탈삼진과 300개 이상의 승리를 기록했으며, 은퇴 후 1994년 첫 투표 자격으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좌완 투수로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통산 탈삼진(전체 네 번째)과 두 번째로 많은 통산 승리(전체 11번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1972년에는 최하위 팀인 필리스 소속으로 팀 승리(59승 97패)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27승(46%)을 혼자 기록하는 경이로운 업적을 달성했다.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25승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투수이자, 한 시즌 300이닝 이상을 던진 마지막 투수이다. 또한, 투수로서 역대 최다인 90개의 보크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스티븐 칼턴의 어린 시절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형성되었으며, 그의 학업과 초기 야구 경력, 그리고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삶과 선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칼턴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조와 앤 칼턴 부부의 외아들이었으며, 조앤과 크리스티나라는 두 여동생과 함께 마이애미 144번가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조 칼턴은 항공사 정비사로 일했다. 어린 시절부터 리틀 리그 야구와 아메리칸 리전 야구에서 활동하며 야구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2.2. 학력 및 아마추어 경력
칼턴은 노스 마이애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처음에는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의 계획이 없었고 학업에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학년이 되면서 농구를 그만두고 투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커트 베바콰와 한 팀에서 뛰었으며, 그의 동료 리치 멜리치는 플레이오프에서 찰리 호프를 상대로 1대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 노스 캠퍼스에서 야구를 계속했으며, 데미 마이네리 감독이 이끄는 강팀에서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1963년 마이애미 데이드 대학 재학 중,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5000 USD의 계약금을 받고 계약했다. 이 계약금은 2014년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3.86 만 USD에 해당한다.
2.3. 동양 철학과의 접목
10대 시절부터 칼턴은 동양 철학을 탐독하고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다. 요가난다는 명상을 통해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상을 전파했으며, 이는 칼턴의 삶과 선수 경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독특한 훈련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3. 프로 경력
스티븐 칼턴의 프로 야구 경력은 마이너 리그에서의 성장부터 시작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그리고 말년의 여러 팀을 거치며 쌓아 올린 빛나는 업적과 도전의 시기들로 구성된다.
3.1. 마이너 리그
1964년, 칼턴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을 빠르게 통과하며 네 개의 팀에서 투구했다. 플로리다 이스트 코스트 인스트럭셔널 리그 소속의 카디널스 팀에서는 2승 3패, 방어율 2.89를 기록했다. 클래스 A 노던 리그의 위니펙 골드아이즈에서는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4승 4패, 방어율 3.36을 기록했다. 클래스 A 웨스턴 캐롤라이나 리그의 록힐 카디널스에서는 11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 1패, 방어율 1.03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클래스 AA 털사 오일러스로 승격되었다. 그는 털사 오일러스 소속으로 텍사스 리그에서 4경기에 등판하여 1승 1패, 방어율 2.63을 기록하며 1964년 시즌을 마쳤다. 이 해 칼턴은 전체적으로 15승 6패, 방어율 2.22를 기록했으며, 178이닝 동안 191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1965년에는 플로리다 이스트 코스트 인스트럭셔널 리그의 카디널스 팀에서 1경기 5이닝 1실점 투구를 한 후 메이저 리그 팀으로 승격되었다. 1966년에는 트리플 A로 승격된 털사 오일러스에서 19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9승 5패, 방어율 3.59를 기록했다.
3.2.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65-1971)
칼턴은 1965년 20세의 나이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1967년까지 카디널스 로테이션의 정규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키 1.93 m에 강한 속구와 슬라이더를 가진 위압적인 모습으로 곧바로 위협적이고 지배적인 투수로 알려졌다. 칼턴은 세인트루이스에서 곧바로 성공을 거두며 승리 기록을 쌓았고, 1967년 월드 시리즈와 1968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3.2.1. 초기 활약 및 월드 시리즈 경험
1967년, 칼턴은 28번의 선발 등판에서 14승 9패, 방어율 2.98을 기록했다. 1968년에는 13승 11패, 방어율 2.99를 기록했다. 1969년 9월 15일, 칼턴은 뉴욕 메츠를 상대로 9이닝 경기에서 당시 메이저 리그 신기록인 1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으나, 팀은 4대3으로 패배했다. 1969년 시즌을 17승 11패, 내셔널 리그에서 두 번째로 낮은 방어율 2.17, 210탈삼진으로 마쳤다.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칼턴은 5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동안 무자책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3대1로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카디널스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68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두 경기에 구원 등판하여 4이닝 동안 3실점을 기록했으며, 카디널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7차전에서 패배했다.
3.2.2. 슬라이더 습득과 성공
1968년 월드 시리즈가 끝난 후, 칼턴은 카디널스 팀의 일원으로 일본 순회 경기에 참여했다. 이 투어 중 그는 도쿄 오리온스의 에이스 나리타 후미오의 슬라이더 투구에 흥미를 가졌고, 이를 곧바로 익히기 시작했다. 새로운 투구인 슬라이더를 습득한 덕분에 칼턴은 1969년 방어율을 2.17로 낮추고 17승 11패의 기록으로 향상되었으며 21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3.2.3. 연봉 갈등과 트레이드
칼턴은 1969년 시즌에 2.60 만 USD의 연봉을 받았는데, 1970년 시즌을 앞두고 연봉을 5.00 만 USD로 인상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카디널스 구단은 3.10 만 USD를 제시하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연봉 분쟁으로 인해 칼턴은 1970년 스프링 트레이닝에 불참했고, 이로 인해 10승 19패, 방어율 3.73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최다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71년에는 슬라이더 투구를 잠시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20승 9패, 방어율 3.56을 기록하며 자신의 첫 20승 시즌을 달성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연봉 분쟁이 발생했다. 칼턴은 연봉 6.50 만 USD를 요구했으나, 구단은 5.50 만 USD를 제시하며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카디널스의 구단주 거시 부시는 칼턴의 트레이드를 지시했고, 1972년 2월 26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투수 릭 와이즈와 맞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현재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적인 트레이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에는 와이즈가 75승, 칼턴이 77승을 기록하며 둘 모두 리그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았고, 칼턴의 전 팀 동료이자 와이즈의 전 포수였던 팀 맥카버는 이 트레이드를 "좋은 선수를 위한 아주 좋은 거래"라고 묘사했다. 맥카버는 칼턴이 더 타고난 재능을 가졌지만 와이즈가 더 나은 제구력을 가졌다고 평했다. 하지만 와이즈가 메이저 리그에서 11년 더 뛰면서 188승을 기록한 반면, 칼턴은 329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는 카디널스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중 하나이자 야구 역사상 가장 불균형적인 거래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칼턴은 카디널스에서 7시즌 동안 190경기에 등판하여 172번 선발로 나서 77승 62패, 방어율 3.10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66번의 완투와 16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그는 1968년, 1969년, 1971년에 내셔널 리그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3.3. 필라델피아 필리스 (1972-1986)
칼턴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선수 생활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이 시기는 그의 경력을 정의하는 황금기로 기록되었다.

3.3.1. 1972년의 경이로운 시즌
1972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첫 시즌, 칼턴은 팀이 59승 97패로 최하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펼쳤다. 그는 리그 최다승(27승), 최다 완투 (30회), 최다 탈삼진 (310개), 최저 방어율 (1.97)을 기록하며 투수 삼관왕을 달성했다. 최하위 팀 소속 투수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했으며, 이 시즌 동안 그의 승리는 팀 전체 승리의 46%를 차지하며 현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1884년 찰스 래드번은 팀 84승 중 59승(70%)을 기록했다.) 그의 1972년 활약은 만장일치로 사이 영 상을 안겨주었고, 그 해 최고의 프로 선수에게 주어지는 히코크 벨트도 수상했다.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는 5위를 차지했다. 칼턴은 자신의 성공이 동양 무술 기법을 포함한 혹독한 훈련 방식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5갤런짜리 쌀통 바닥까지 주먹을 비틀어 넣는 훈련이었다.
1972년 시즌의 주요 하이라이트로는 5승 1패로 시즌을 시작한 후, 필리스가 단 10득점만을 기록했던 5연패를 겪었다. 이후 그는 15연승을 기록하며 20승 6패의 기록에 도달했고, 시즌 마지막 3분의 1 기간 동안 7승 4패를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27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 칼턴은 41번의 선발 등판 중 30번을 완투했다. 15연승 기간 동안 (3번의 노-디시전 포함), 칼턴은 155이닝을 던지며 103안타, 28실점(15승리 경기에서는 17실점), 39볼넷, 140탈삼진을 기록했다. 1972년 7월 23일부터 8월 13일까지는 5번의 완투승을 거두었고, 45이닝 동안 단 1번의 비자책 실점과 22안타만을 허용했으며 4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당시 야구 해설가들은 칼턴의 슬라이더가 거의 칠 수 없는 공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칼턴은 1972년 시즌을 회고하며 "거시 부시가 연봉 문제로 나를 최하위 팀인 필리스로 트레이드시켰다. 나는 카디널스에서 25승을 하는 데 정신적으로 전념했지만, 이제 목표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나는 25승 목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필리스의 59승 중 27승을 내가 올렸다. 나는 그 시즌을 나의 가장 훌륭한 개인적인 업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3.2. 언론과의 단절
1973년, 칼턴이 13승 20패, 방어율 3.90으로 부진하자, 언론은 그의 특이한 훈련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칼턴과 언론 사이에 험악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1976년, 그는 변호사 에드워드 L. 울프의 조언에 따라 언론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으며,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거부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이에 통산 300승을 달성했을 때 코멘트를 요청받았지만, 그때는 "Thank you very much."라고만 말했다. 1980년대 초반, 그는 경기 전 프로그램에서 생방송 중 자신도 모르게 접근한 해설자의 머리에 후원사의 시계를 던지기도 했다. 이 상황은 1981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멕시코 출신 신인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스타덤에 오르자, 한 기자가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 두 명은 영어를 못한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와 스티브 칼턴"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필리스의 오랜 팀 동료 래리 보와는 칼턴의 언론 침묵에 대해 "필라델피아 팬들이 우리 라커룸에서 본 스티브 칼턴의 모습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며, "그는 기자들이 들어오면 가면을 썼다. 그는 기자들과 일관되게 행동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칼턴은 자신의 오랜 언론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것(1974년부터 경력 끝까지 언론과 말하지 않은 것)은 당시 나에게 완벽했다. 마음을 정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나는 비난받는 것에 지쳤다. 나에게는 그것이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것(나의 침묵)은 내가 더 잘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나의 인터뷰 없이도 더 잘 썼다. 어차피 다 인용이고, 나에게는 다 똑같이 들린다. 그 후 그들은 더 좋고 흥미로운 글을 썼다. 나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꽤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신문을 펼쳐서 자신이 비난받는 것을 읽는 것은 하루를 제대로 시작할 수 없게 만든다."
3.3.3. 황금기: 사이 영 상과 월드 시리즈 우승

칼턴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계속해서 여러 해 동안 성공을 누렸으며, 1972년, 1977년, 1980년, 1982년에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필리스를 구단 역사상 최고의 포스트시즌 연속 진출로 이끌었다. 칼턴은 네 번의 사이 영 상을 수상한 최초의 투수였으며, 이 기록은 후에 그렉 매덕스에 의해 동률을 이루고 로저 클레멘스와 랜디 존슨에 의해 경신되었다. 그의 1972년 사이 영 상은 만장일치 투표로 결정되었으며, 그는 내셔널 리그 MVP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다. 필리스는 점차 팀을 강화했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 칼턴은 내셔널 리그에서 다승(24승), 탈삼진(286개), 이닝(304이닝)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며 필리스가 구단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월드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했으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두 번의 선발 등판에서 2승 무패, 방어율 2.40, 15이닝 동안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칼턴은 메이저 리그에서 300이닝 이상을 던진 마지막 투수이다.
칼턴은 1981년 수비력을 인정받아 골드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2년 9월 13일,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네 번째로 홈런을 치고 완투 완봉승을 동시에 기록했다. 그는 세 번의 다른 10년대에 이러한 업적을 달성한 유일한 투수이다. 그는 1983년 월드 시리즈에서 필리스가 다시 한번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 시즌을 15승 16패, 37번의 선발 등판에서 방어율 3.11로 마쳤다. 그러나 필리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칼턴은 2승 무패, 방어율 0.66을 기록하며 13이닝 동안 13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1983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짐 파머를 상대로 등판하여 6과 2/3이닝 동안 2자책점을 허용하며 3대2로 패배했다. 필리스는 이 시리즈를 5경기 만에 내줬다.
1983년 9월 23일, 칼턴은 자신의 친정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통산 300승을 달성하며 이 위업을 이룬 역대 16번째 투수가 되었다.
3.3.4. 통산 탈삼진 기록 경쟁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간 칼턴은 노아 랜 라이언 및 게이로드 페리와 흥미로운 투수 대결을 펼치며 역대 최다 탈삼진 기록에서 자주 순위가 바뀌었다. 1983년 시즌 시작 시, 55년 동안 이어져 온 월터 존슨의 3,508탈삼진 기록을 깨기 위해 노아 랜 라이언 (3,494개), 게이로드 페리 (3,452개), 칼턴 (3,434개) 세 투수가 100개 이내로 추격하고 있었다. 1983년 4월 22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노아 랜 라이언이 가장 먼저 존슨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러나 라이언이 기록을 세운 직후 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고, 칼턴이 눈부신 시즌을 보내면서 격차를 좁혔다. 1983년 6월 7일, 칼턴은 3,526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라이언(3,524개)을 제치고 역대 최다 탈삼진의 왕좌에 올랐다. 이 시즌 동안 둘의 탈삼진 기록은 14번의 선두 변경과 한 번의 동률을 반복했으며, 시즌 종료 시 칼턴이 3,709개로 라이언의 3,677개보다 앞섰다. 은퇴를 앞둔 페리도 존슨의 기록을 넘어섰고, 경력을 3,534개의 탈삼진으로 마쳤다. 이후 5명의 다른 투수들이 존슨의 기록을 넘어섰으며, 존슨은 역대 탈삼진 순위에서 9위로 밀려났다.
1984년에도 라이언과 칼턴 사이에 5번의 선두 변경과 한 번의 동률이 더 있었으나, 칼턴은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역대 최다 탈삼진 경쟁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선두를 차지한 것은 1984년 9월 4일의 선발 등판 후였다. 그는 시카고 컵스 타자 4명을 삼진 처리하며 라이언(3,854개)보다 3개 많은 3,857개를 기록했다. 시즌은 라이언이 2개(3,874대 3,872) 앞선 채로 마무리되었지만, 칼턴은 1985년에는 부상으로 얼룩진 시즌을 보냈고, 1986년에는 더욱 부진했으며, 결국 4,000탈삼진까지 18개만을 남겨둔 채 필리스에서 방출되었다.
오랜 필리스 팀 동료인 마이크 슈미트에 대해 칼턴은 "슈미티는 투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즉 홈런과 뛰어난 수비를 제공했다. 그는 내가 함께 뛰었던 최고의 3루수이며, 아마도 역대 최고의 3루수일 것이다. 그는 명백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였고, 심지어 당시에도 그랬다. 그는 최고의 기량에서 은퇴했다. 나는 그가 분명히 600개의 홈런을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필리스에서 15시즌 동안 칼턴은 241승 161패, 방어율 3.09를 기록했다。 그는 499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85번의 완투, 39번의 완봉승을 기록했으며, 3,697이닝 동안 3,031개의 탈삼진과 1,252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그는 필리스 소속으로 7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972년, 1977년, 1980년, 1982년에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을 네 번 수상했다.
3.3.5. 필리스 시절 말기
칼턴은 1985년 시즌에 40세가 되었고, 방어율 3.33에도 불구하고 1승 8패에 그쳤다. 이후 6월에 부상으로 이탈했으나 시즌 막바지에 복귀하여 결국 1승 8패, 방어율 3.33으로 시즌을 마쳤다. 1986년 시즌에는 개막부터 부진을 겪었으며, 방어율 6.18, 4승 8패를 기록한 후 통산 4,000탈삼진까지 18개를 남겨둔 채 6월 24일 필리스에서 방출되었다.
3.4. 말년 경력 (1986-1988)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떠난 후 스티븐 칼턴은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한 어려움이 따랐지만, 그 와중에도 중요한 기록들을 달성했다.
3.4.1.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방출된 지 일주일 후인 1986년 7월 4일, 칼턴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했다. 그는 자이언츠와 계약한 후 언론과의 자발적인 보이콧을 잠시 중단하고 기자회견에 응하기도 했다. 8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에릭 데이비스를 삼진으로 잡으며 역사상 두 번째로 통산 4,000탈삼진을 달성했다. 이 경기는 자이언츠가 11대6으로 패배했다. 칼턴은 이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 투구를 펼치고 3점 홈런까지 쳤으며, 이는 자이언츠에서의 유일한 승리였다. 전체적으로 칼턴은 자이언츠에서 6경기에 등판하여 1승 3패, 방어율 5.10을 기록했다. 이 이틀 후인 8월 7일, 칼턴은 은퇴를 발표하며 "나는 한 리그에서 전체 경력을 보낸 투수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한 경력의 이정표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조직 내의 젊은 선수들, 특히 재능 있는 젊은 투수진에 전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3.4.2. 시카고 화이트삭스
칼턴의 은퇴는 잠시였다. 그는 자발적 은퇴 선수 명단에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고, 내셔널 리그에 은퇴 서한도 제출하지 않았다. 결국 칼턴은 1986년 8월 11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잔여 시즌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그는 경력상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화이트삭스에서 칼턴은 4승 3패, 방어율 3.69를 기록했다. 1986년 시즌 전체적으로 (세 팀에서) 칼턴은 9승 14패, 방어율 5.10을 기록했다.
3.4.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및 미네소타 트윈스

1987년, 칼턴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합류하여 동시대의 명투수 필 니크로와 팀 동료가 되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그들은 사상 최초로 두 명의 300승 투수가 한 경기에 동반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으나, 양키스가 10대6으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칼턴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투구한 유일한 경기였는데, 이는 인터리그 경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의 경력 대부분을 내셔널 리그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197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내셔널 리그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나, 실제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1987년 7월 말, 칼턴은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인디언스와 트윈스 두 팀에서 합산하여 6승 14패, 방어율 5.74를 기록했다. 트윈스는 1987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칼턴은 포스트시즌 로스터에는 포함되지 않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팀의 우승에 기여한 선수로서 세 번째 월드 시리즈 반지를 받았다. 칼턴은 트윈스 팀 동료들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하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 백악관에서 팀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을 때, 신문들은 칼턴을 제외한 모든 팀원의 이름을 명시했다. 칼턴은 대신 "신원 미상의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으로 표기되었다.
1988년 칼턴은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터에 포함되어 4경기에 등판했으나 (0승 1패, 방어율 16.76), 5이닝 동안 8실점을 허용하며 사실상 마지막 의미 있는 등판을 한 후 4월 23일 트윈스에서 방출되었다. 1988년 잔여 시즌 동안 칼턴을 영입하는 팀은 없었다.
3.5. 은퇴
1989년에도 칼턴은 계약할 팀을 찾지 못했다. 뉴욕 양키스는 그에게 훈련 시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스프링 트레이닝 참가 보장은 없었다. 결국 칼턴은 44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가 은퇴할 당시, 그의 통산 탈삼진 기록은 노아 랜 라이언에 이어 역대 2위였다. 라이언은 1993년까지 투구하며 칼턴과의 탈삼진 격차를 약 1,600개 이상으로 벌렸다. 칼턴의 통산 탈삼진 순위는 이후 로저 클레멘스와 랜디 존슨이 그를 넘어서면서 3위, 그리고 4위로 내려앉았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스티븐 칼턴은 독특한 투구 스타일과 엄격한 훈련법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그라운드 위에서의 행동 방식은 그의 퍼포먼스와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투구 스타일
칼턴은 긴 팔과 큰 키를 활용하여 공을 던지는 좌완 투수였다. 그의 주 무기는 강속구,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였다. 특히 그의 슬라이더는 작고 날카롭게 변화하는 일반적인 슬라이더보다 훨씬 크게 휘는 독특한 구종이었으며, 1968년 일본 순회 경기에서 일본 투수 나리타 후미오에게서 영감을 받아 습득한 것으로 알려져 "메이드 인 재팬" 슬라이더로 불리기도 했다. 칼턴은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시기에 따라 변화시켰다. 1965년부터 1968년경까지는 '라이징 패스트볼(rising fastball)'로 불리는 솟아오르는 듯한 속구와 커브를 주로 구사했다. 1969년부터는 라이징 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를 함께 사용했으며, 1970년경에는 슬라이더를 간헐적으로 사용했다. 1971년경에는 라이징 패스트볼, 커브, 그리고 체인지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72년부터 1974년경까지는 다시 라이징 패스트볼, 커브, 슬라이더 조합으로 돌아왔다. 1974년 이후에는 슬라이더, 하이 패스트볼(강속구), 그리고 '스위핑 커브(sweeping curve)'로 불리는 사선으로 크게 휘는 커브를 주로 던졌다. 이처럼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투구 레퍼토리를 발전시키며 타자를 압도했다.
칼턴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히트 노런은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1안타 완봉승은 6번이나 기록했다.
4.2. 독특한 훈련법
칼턴은 동양 무술 기법을 접목한 자신만의 독특하고 엄격한 훈련 방식을 고수했다. 가장 유명한 훈련법 중 하나는 5갤런짜리 쌀통 바닥까지 주먹을 비틀어 넣는 것이었다. 이러한 훈련은 그의 손목과 팔 힘을 강화하고 제구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퍼포먼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러한 훈련법을 통해 육체적인 강인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집중력까지 향상시켰다.
4.3. 주요 기록 및 통계
스티븐 칼턴은 투수로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타석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W | L | PCT | ERA | G | GS | CG | SHO | SV | IP | H | ER | R | HR | BB | SO | WP | HBP |
---|---|---|---|---|---|---|---|---|---|---|---|---|---|---|---|---|---|
329 | 244 | .574 | 3.22 | 741 | 709 | 254 | 55 | 2 | 5217.2 | 4672 | 1864 | 2130 | 414 | 1833 | 4136 | 183 | 53 |
그의 통산 타격 성적은 타율 .201, 13개의 홈런, 123득점, 140타점을 기록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타율 .222를 기록했으며, 1978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홈런을 치기도 했다. 수비에서는 수비율 .952를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포지션에서 리그 평균 수준이었다. 칼턴은 또한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90개의 보크를 기록했다.
4.4. 연도별 통계
4.4.1. 투수 성적
연도 | 팀 | G | GS | CG | SHO | SV | W | L | PCT | IP | H | HR | BB | HBP | SO | WP | BK | R | ER | ERA |
---|---|---|---|---|---|---|---|---|---|---|---|---|---|---|---|---|---|---|---|---|
1965 | STL | 15 | 2 | 0 | 0 | 0 | 0 | 0 | --- | 25.0 | 27 | 1 | 8 | 0 | 21 | 5 | 0 | 7 | 7 | 2.52 |
1966 | STL | 9 | 9 | 2 | 1 | 0 | 3 | 3 | .500 | 52.0 | 56 | 2 | 18 | 1 | 25 | 2 | 1 | 22 | 18 | 3.12 |
1967 | STL | 30 | 28 | 11 | 2 | 1 | 14 | 9 | .609 | 193.0 | 173 | 6 | 62 | 2 | 168 | 6 | 0 | 71 | 64 | 2.98 |
1968 | STL | 34 | 33 | 10 | 5 | 0 | 13 | 11 | .542 | 231.2 | 214 | 11 | 61 | 3 | 162 | 6 | 0 | 87 | 77 | 2.99 |
1969 | STL | 31 | 31 | 12 | 2 | 1 | 17 | 11 | .607 | 236.1 | 185 | 15 | 93 | 4 | 210 | 7 | 0 | 66 | 57 | 2.17 |
1970 | STL | 34 | 33 | 13 | 2 | 0 | 10 | 19 | .345 | 253.2 | 239 | 25 | 109 | 2 | 193 | 14 | 1 | 123 | 105 | 3.73 |
1971 | STL | 37 | 36 | 18 | 4 | 0 | 20 | 9 | .690 | 273.1 | 275 | 23 | 98 | 5 | 172 | 12 | 0 | 120 | 108 | 3.56 |
1972 | PHI | 41 | 41 | 30 | 8 | 3 | 27 | 10 | .730 | 346.1 | 257 | 17 | 87 | 1 | 310 | 8 | 2 | 84 | 76 | 1.97 |
1973 | PHI | 40 | 40 | 18 | 3 | 0 | 13 | 20 | .394 | 293.1 | 293 | 29 | 113 | 3 | 223 | 7 | 0 | 146 | 127 | 3.90 |
1974 | PHI | 39 | 39 | 17 | 1 | 0 | 16 | 13 | .552 | 291.0 | 249 | 21 | 136 | 5 | 240 | 11 | 4 | 118 | 104 | 3.22 |
1975 | PHI | 37 | 37 | 14 | 3 | 0 | 15 | 14 | .517 | 255.1 | 217 | 24 | 104 | 2 | 192 | 5 | 7 | 116 | 101 | 3.56 |
1976 | PHI | 35 | 35 | 13 | 2 | 0 | 20 | 7 | .741 | 252.2 | 224 | 19 | 72 | 1 | 195 | 8 | 3 | 94 | 88 | 3.13 |
1977 | PHI | 36 | 36 | 17 | 2 | 1 | 23 | 10 | .697 | 283.0 | 229 | 25 | 89 | 4 | 198 | 3 | 7 | 99 | 83 | 2.64 |
1978 | PHI | 34 | 34 | 12 | 3 | 1 | 16 | 13 | .552 | 247.1 | 228 | 30 | 63 | 3 | 161 | 3 | 7 | 91 | 78 | 2.84 |
1979 | PHI | 35 | 35 | 13 | 4 | 2 | 18 | 11 | .621 | 251.0 | 202 | 25 | 89 | 5 | 213 | 10 | 11 | 112 | 101 | 3.62 |
1980 | PHI | 38 | 38 | 13 | 3 | 1 | 24 | 9 | .727 | 304.0 | 243 | 15 | 90 | 2 | 286 | 17 | 7 | 87 | 79 | 2.34 |
1981 | PHI | 24 | 24 | 10 | 1 | 0 | 13 | 4 | .765 | 190.0 | 152 | 9 | 62 | 1 | 179 | 9 | 4 | 59 | 51 | 2.42 |
1982 | PHI | 38 | 38 | 19 | 6 | 2 | 23 | 11 | .676 | 295.2 | 253 | 17 | 86 | 1 | 286 | 9 | 9 | 114 | 102 | 3.10 |
1983 | PHI | 37 | 37 | 8 | 3 | 0 | 15 | 16 | .484 | 283.2 | 277 | 20 | 84 | 3 | 275 | 13 | 9 | 117 | 98 | 3.11 |
1984 | PHI | 33 | 33 | 1 | 0 | 1 | 13 | 7 | .650 | 229.0 | 214 | 14 | 79 | 0 | 163 | 11 | 7 | 104 | 91 | 3.58 |
1985 | PHI | 16 | 16 | 0 | 0 | 0 | 1 | 8 | .111 | 92.0 | 84 | 6 | 53 | 0 | 48 | 3 | 2 | 43 | 34 | 3.33 |
1986 | PHI | 16 | 16 | 0 | 0 | 0 | 4 | 8 | .333 | 83.0 | 102 | 15 | 45 | 0 | 62 | 3 | 0 | 70 | 57 | 6.18 |
1986 | SF | 6 | 6 | 0 | 0 | 0 | 1 | 3 | .250 | 30.0 | 36 | 4 | 16 | 1 | 18 | 2 | 1 | 20 | 17 | 5.10 |
1986 | CWS | 10 | 10 | 0 | 0 | 0 | 4 | 3 | .571 | 63.1 | 58 | 6 | 25 | 0 | 40 | 2 | 1 | 30 | 26 | 3.69 |
1987 | CLE | 23 | 14 | 3 | 0 | 0 | 5 | 9 | .357 | 109.0 | 111 | 17 | 63 | 2 | 71 | 5 | 4 | 76 | 65 | 5.37 |
1987 | MIN | 9 | 7 | 0 | 0 | 0 | 1 | 5 | .167 | 43.0 | 54 | 7 | 23 | 2 | 20 | 2 | 1 | 35 | 32 | 6.70 |
1988 | MIN | 4 | 1 | 0 | 0 | 0 | 0 | 1 | .000 | 9.2 | 20 | 5 | 5 | 0 | 5 | 0 | 0 | 19 | 18 | 16.76 |
MLB 합계 (24년) | 741 | 709 | 254 | 55 | 13 | 329 | 244 | .574 | 5217.1 | 4672 | 414 | 1833 | 53 | 4136 | 183 | 90 | 2130 | 1864 | 3.22 |
4.4.2. 수비 성적
연도 | 팀 | G | 자살(PO) | 보살(A) | 실책(E) | 병살(DP) | 수비율(FPCT) |
---|---|---|---|---|---|---|---|
1965 | STL | 15 | 1 | 6 | 0 | 1 | 1.000 |
1966 | STL | 9 | 2 | 10 | 0 | 2 | 1.000 |
1967 | STL | 30 | 8 | 30 | 2 | 3 | .950 |
1968 | STL | 34 | 4 | 39 | 3 | 1 | .935 |
1969 | STL | 31 | 1 | 34 | 3 | 1 | .921 |
1970 | STL | 34 | 6 | 38 | 4 | 1 | .917 |
1971 | STL | 37 | 11 | 40 | 0 | 3 | 1.000 |
1972 | PHI | 41 | 8 | 37 | 2 | 3 | .957 |
1973 | PHI | 40 | 4 | 42 | 5 | 3 | .902 |
1974 | PHI | 39 | 6 | 42 | 4 | 1 | .923 |
1975 | PHI | 37 | 10 | 32 | 1 | 4 | .977 |
1976 | PHI | 35 | 4 | 19 | 0 | 2 | 1.000 |
1977 | PHI | 36 | 4 | 52 | 1 | 2 | .982 |
1978 | PHI | 34 | 5 | 46 | 3 | 1 | .944 |
1979 | PHI | 35 | 3 | 32 | 5 | 0 | .875 |
1980 | PHI | 38 | 2 | 42 | 0 | 1 | 1.000 |
1981 | PHI | 24 | 3 | 22 | 0 | 0 | 1.000 |
1982 | PHI | 38 | 6 | 37 | 4 | 2 | .915 |
1983 | PHI | 37 | 4 | 37 | 4 | 0 | .911 |
1984 | PHI | 33 | 7 | 22 | 0 | 0 | 1.000 |
1985 | PHI | 16 | 3 | 18 | 0 | 1 | 1.000 |
1986 | PHI | 16 | 2 | 8 | 0 | 1 | 1.000 |
1986 | SF | 6 | 1 | 8 | 0 | 0 | 1.000 |
1986 | CWS | 10 | 1 | 7 | 0 | 1 | 1.000 |
1987 | CLE | 23 | 2 | 15 | 1 | 1 | .944 |
1987 | MIN | 9 | 1 | 8 | 0 | 1 | 1.000 |
1988 | MIN | 4 | 0 | 1 | 0 | 0 | 1.000 |
MLB 합계 | 741 | 109 | 724 | 42 | 36 | .952 |
5. 평가와 유산
스티븐 칼턴은 야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수많은 상과 기록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독특한 성격과 행동 방식은 야구계 안팎에서 다양한 평가를 낳았다.
5.1. 주요 업적 및 영예
칼턴은 10차례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경력에서 4,136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당시 좌완 투수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이후 랜디 존슨이 경신했다.) 그의 329승은 야구 역사상 11번째로 많은 승리 기록이며, 라이브볼 시대(1920년 이후) 투수 중에서는 그렉 매덕스, 로저 클레멘스, 워렌 스판에 이어 높은 순위에 있다. 그는 또한 6이닝 이상을 던진 연속 선발 등판 기록(69경기)에서 밥 깁슨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기록은 1982년 4월에 중단되었다. 칼턴은 비록 노히트 노런을 한 번도 던지지 못했지만, 1안타 경기를 6번이나 기록했는데, 이는 야구 역사상 11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1994년, 칼턴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투표율 95.82%라는 매우 높은 득표율로 헌액되었는데, 이는 역대 가장 높은 득표율 중 하나이다. 그의 헌액은 그가 자격이 있는 첫 해에 이루어졌다.
5.1.1. 개인 수상 및 기록
- 사이 영 상 4회 (1972, 1977, 1980, 1982)
- 골드글러브상 (투수 부문) 1회 (1981)
- 투수 삼관왕 1회 (1972)
- 최다승 4회 (1972, 1977, 1980, 1982)
- 최우수 방어율 1회 (1972)
- 최다 탈삼진 5회 (1972, 1974, 1980, 1982, 1983)
- MLB 올스타전 10회 선정 (1968, 1969, 1971, 1972, 1974, 1977, 1979-1982)
- 통산 보크 90개 (역대 1위)
- 통산 주자 견제 아웃 144회 (1957년 이후 역대 1위)
- 플로리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1989)
5.1.2. 구단 기록 및 영구 결번
-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 역대 최다승: 241승
-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 역대 최다 탈삼진: 3031개
-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 역대 최다 선발 등판: 499회
- 필라델피아 필리스 구단 역대 완봉승: 39회 (2위)
-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1989년 그의 등번호 32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여 공로를 기렸다.
-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2004년에 시티즌스 뱅크 파크 외부에 칼턴의 동상을 세워 그의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고 있다.

5.2. 야구계 내 평가
필리스의 아나운서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리치 애쉬번은 칼턴에 대해 "레프티는 장인이자 예술가였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야구 경기를 그려냈다. 한 획, 한 획, 그리고 그가 (투구를) 마치면 그것은 걸작이었다"고 평가했다.
칼턴은 오랜 기간 노아 랜 라이언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작 칼턴 본인은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이 톰 시버였다고 말했다. 뉴욕 메츠를 상대로는 19탈삼진을 기록하고도 패했던 경기가 그의 메츠전 커리어의 축소판이었다. 그는 메츠를 상대로 통산 30승을 거두었지만, 36번 패배를 기록했다.
5.3. 그 외 기록 및 업적
1998년, 스포츠 전문 매체인 스포팅 뉴스는 칼턴을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30위에 선정했다. 1999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 올랐다.
칼턴은 미드 시즌인 결혼 이야기 한 에피소드에 자신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전직 운동선수들이 신발 광고를 촬영하며 앨 번디를 모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켈리 번디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자 그는 오른손으로 사인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ESPN의 로이 파이어스톤과의 인터뷰에서 파이어스톤이 칼턴에게 "당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칼턴은 "세상에 슬라이더 던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6. 인물 및 사생활
스티븐 칼턴의 개인적인 면모는 그의 뛰어난 선수 경력만큼이나 독특하고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중과의 소통 방식, 논란이 되었던 발언들, 그리고 은퇴 후의 삶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드러냈다.
6.1. 언론관 및 대중적 이미지
1976년부터 칼턴은 언론과의 모든 소통을 단절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 선수 생활 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는 독특한 행동 방식을 유지했다. 이러한 결정은 1973년 그가 부진했을 때 언론이 그의 특이한 훈련 방식을 꼬집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를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가족까지 나쁘게 쓰는 것은 싫었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이 오랜 침묵 기간 동안, 1981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멕시코 출신 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한 기자는 "내셔널 리그 최고의 투수 두 명은 영어를 못한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와 스티브 칼턴이다"라는 농담을 던져 그의 언론 침묵을 부각시켰다.
198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하며 오랜만에 기자회견에 응했을 때, 기자들의 질문 대부분은 "왜 기자회견에 응했는가"였다고 한다. 그는 침묵이 자신에게 "완벽했다"며, "비난받는 것에 지쳤고, 그것이 나를 더 잘 집중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나의 인용구 없이도 더 좋고 흥미로운 글을 썼다"고 덧붙였다. 필리스의 오랜 팀 동료 래리 보와는 "그는 기자들이 들어오면 가면을 썼다. 기자들에게는 매우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칼턴의 이러한 언론 침묵은 그에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부여했다.
6.2. 인종차별 및 반유대주의 논란
1994년, 작가 팻 조던은 칼턴의 콜로라도주 듀랑고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은 필라델피아 잡지의 1994년 4월호에 "얇은 산 공기(Thin Mountain Air)"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기사는 뉴욕 타임스의 머레이 채스에 의해 인용되며 칼턴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대한 수많은 논란의 근원이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칼턴은 "세계는 러시아와 미국 정부에 의해 지배되거나 통제되며, 이들은 '저주파 음파'로 공기를 채운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시온 장로들, 영국 정보기관, "스위스에서 모이는 12명의 유대인 은행가들", 그리고 "로마에서 원탁회의를 하는 300인 위원회"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칼턴은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흑인 아들이 있는데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에이즈 바이러스가 게이와 흑인을 없애기 위해 메릴랜드주의 비밀 생물전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펼쳤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전 팀 동료 팀 맥카버는 칼턴을 인종차별주의자나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 변호했다. 맥카버는 "만약 그가 어떤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그가 읽는 몇몇 자료들을 믿는 죄이다. 그가 급진적인 내용에 대해 읽으면서 혼란스러워하는가? 그렇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만드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칼턴의 대중적 이미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6.3. 가족 및 은퇴 후 생활

칼턴은 베벌리와 33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 1998년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칼턴은 콜로라도주 듀랑고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150그루의 과일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는 "앨 고어가 친환경적이기 전부터 나는 친환경적이었다"고 말하며 자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세인트 루크 병원과의 협력 관계에 대해 "나는 '평생 건강'이라는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소파에서 일어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도록, 앉아만 있는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세인트 루크와 나는 그 점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의학 쪽은 아니지만,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잘 훈련받았다. 그것이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2017년, 칼턴은 약 15년 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으며, 일상적인 야구 경기도 챙겨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더 이상 이 선수들을 모른다. 코치들은 좀 알지만,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다른 할 일이 있다. 24년 동안 야구를 소유했다. 나는 그것을 플레이했으니, 다시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투구 수 제한에 대해 칼턴은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한다. 이 선수들은 투구 수 제한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겠지만, 그들은 그들이 아는 전부가 그것뿐이기에 반대할 수 없다. 철학적으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수들은 충분히 던지지 않기 때문에 진정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힘줄, 인대, 근육, 뼈가 더 커지고, 밀도가 높아지고, 강해져야 공을 던지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도록 충분히 던져야 한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00개는 많지 않다. 100개로 몸을 푸는 것이다. 그리고 200개를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한 경기에서 185개를 던졌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칼턴의 오랜 팀 동료이자 전담 포수였던 팀 맥카버는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티브 (칼턴)와 내가 죽으면, 우리는 같은 묘지에 60피트 6인치 (약 18.44 m) 떨어진 곳에 묻힐 것이다." 맥카버는 2023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6.4. 어록
- "나는 세상에 슬라이더 던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태어났다." - ESPN의 로이 파이어스톤이 "당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스티브 칼턴이 답변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