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릭 키스 데이비스(Eric Keith Davis영어, 1962년 5월 29일 출생)는 여러 메이저 리그 팀에서 중견수로 활약했던 미국의 전 야구 선수이며, 특히 신시내티 레즈에서 두드러진 활약으로 "붉은 에릭"(Eric the Red)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84년 5월 19일 21세의 나이로 레즈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그는 발과 배트 스피드, 파워, 수비 능력 등 뛰어난 운동 능력을 겸비한 파이브 툴 플레이어로 평가받았습니다.
데이비스는 1987년 한 달에 세 개의 만루 홈런을 친 최초의 메이저 리그 선수이자, 같은 시즌에 최소 30개의 홈런과 50개의 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가 되는 등 여러 희귀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워/스피드 선수 중 한 명으로, 7시즌 동안 20홈런/20도루를 기록하여 윌리 메이스와 행크 애런을 능가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0년 레즈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4경기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부상으로 인해 경력 내내 어려움을 겪었지만, 1996년 신시내티 레즈로 복귀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대장암 진단 및 회복 후인 1998년에도 뛰어난 시즌을 보이며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2001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은퇴 후에는 레즈 구단의 순회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며 야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에릭 키스 데이비스는 지미 데이비스와 셜리 데이비스의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짐 주니어라는 남동생과 셜레사라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지미는 가데나에 있는 보이즈 마켓이라는 식료품 체인점에서 일했으며, 아들들과 함께 픽업 농구 경기와 같은 스포츠 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2.1. 어린 시절과 운동에 대한 열망
어린 시절부터 다재다능한 운동 재능을 보인 데이비스는 12세부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미래 선수인 바이런 스콧과 볼드윈 힐스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경쟁하며 NBA에서 뛰는 것을 열망했습니다. 볼드윈 힐스에서 데이비스는 대릴 스트로베리와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의 경력은 고등학교부터 MLB까지 얽히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사우스 로스앤젤레스의 존 C. 프리몬트 고등학교에 재학하며 농구와 야구 모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반면 스트로베리는 라이벌 학교인 크렌쇼 고등학교에서 뛰었습니다.
고등학교 4학년 시절, 데이비스는 야구에서 0.635의 타율을 기록하고 15경기에서 50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습니다. 농구 선수로서는 경기당 평균 29득점과 10도움을 기록했습니다. NBA 진출이라는 목표에 확고했던 데이비스는 고등학교 4학년 때까지 야구보다 농구 경력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NBA 진출의 일반적인 경로가 NCAA에서 뛰는 것이었기 때문에, 데이비스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야구에 대한 열망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8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신시내티 레즈는 8라운드 전체 200순위로 데이비스를 지명했습니다. 같은 드래프트에서 스트로베리는 뉴욕 메츠에 의해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습니다.
3. 프로 야구 경력
에릭 데이비스의 프로 야구 경력은 신시내티 레즈에서 시작하여 여러 팀을 거쳐 부상과 암 투병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강한 의지로 재기에 성공한 드라마틱한 여정이었습니다.
3.1. 초기와 신시내티 레즈에서의 성장
프로 야구 선수로서 첫 풀 시즌에 데이비스는 62경기에서 40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놀라운 스피드를 보여주었습니다. 1984년 메이저 리그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신체적 재능은 그를 야구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선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홈런 파워와 빠른 주루 능력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파이브 툴 플레이어였으며,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는 습관으로 윌리 메이스와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데이비스는 1986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0.277의 타율과 27개의 홈런, 80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0-50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그와 리키 헨더슨만이 메이저 리그 역사상 20홈런-80도루를 달성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습니다. 1986년 6월 11일부터 1987년 7월 4일까지 162경기 동안 그는 659타석에서 타율 0.308, 출루율 0.406, 장타율 0.622를 기록하며 47홈런, 149득점, 123타점, 98도루를 기록했습니다. (도루 실패는 단 12번에 불과했습니다.)
3.2. 전성기 활약과 월드 시리즈 우승
데이비스는 1987년에도 성공적인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개막전에서 그는 3타수 3안타(홈런 1개, 도루 1개, 볼넷 2개)를 기록했습니다. 시즌 첫 10경기 동안 그는 0.526의 타율과 4홈런, 8도루를 기록했습니다. 1987년 5월 1일, 그는 만루 홈런을 포함하여 2개의 홈런을 쳤습니다. 이틀 후에는 또 다시 3개의 홈런(좌익수, 중견수, 우익수 방향으로 각 1개)을 쳤고, 그 중 하나는 만루 홈런이었으며 도루도 기록했습니다. 그는 그 달에 또 다른 만루 홈런을 쳐서 한 달에 세 개의 만루 홈런을 친 역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9월 4일 리글리 필드에서 후반 이닝에 벌어진 극적인 플레이에서 데이비스는 깊은 플라이볼을 잡기 위해 외야 벽에 부딪혔고, 몇 분 동안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었으며 이후 활약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데이비스는 1987년 시즌을 0.293의 타율, 37홈런, 50도루로 마감했습니다. 그는 129경기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즌에 30홈런과 50도루를 기록한 역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1987년 이전에는 단 6명의 선수만이 30-30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그 시즌에는 스트로베리, 조 카터, 하워드 존슨을 포함한 세 명의 다른 선수들이 데이비스와 함께 30-30 클럽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42.53의 파워-스피드 지수로 리그 선두를 차지했으며, 이는 역대 단일 시즌 세 번째로 높은 기록입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데이비스는 평균 30개의 홈런과 40개의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경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선수 중 한 명이자 매우 눈에 띄는 슈퍼스타였습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MVP 투표에서 상위 15위 안에 들며 지지를 받았습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매년 내셔널 리그 홈런, 장타율, OPS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습니다. 1989년 6월 2일, 데이비스는 리버프론트 스타디움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좋은 시즌을 보냈지만, 부상으로 인해 이러한 최고조의 활약을 다시는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990년, 강력한 팀 동료들과 함께 데이비스는 신시내티의 "와이어-투-와이어" 우승 시즌의 핵심 선수였습니다.
데이비스의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는 1990년 월드 시리즈 첫 타석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데이브 스튜어트를 상대로 홈런을 친 것입니다. 이 홈런은 레즈의 월드 시리즈 스윕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즈 4차전에서 다이빙 캐치를 하던 중 신장 파열 부상을 입어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또한 시즌 초에 다쳤던 무릎에 대해 시즌 오프 수술을 받았습니다.
3.3. 레즈 이후 경력과 부상 고통
1990년 이후 데이비스는 선수 경력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 못했습니다. 1991년 부상으로 인해 플레이가 방해받았고, 그는 팀 벨처와 존 웨틀랜드를 상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1992년에도 여러 차례 부상을 입어 대체로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1993년 8월 23일, 다저스는 데이비스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일주일 후, 타이거스는 투수 존 드실바를 다저스로 보내 트레이드를 완료했습니다. 1993년 타이거스는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팀 중 하나였고, 몇 안 되는 약점 중 하나인 중견수 포지션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데이비스는 밀트 카일러를 대체했으며 타이거스에서 29경기에서 비교적 좋은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5번 또는 6번 타자로 출전하여 조정 OPS 142를 기록했으며, 6번째 20홈런/20도루 시즌을 보냈습니다. 데이비스는 1994년 타이거스의 주전 중견수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37경기만 출전했고 타율은 0.183에 불과했습니다. 1994년 단축 시즌 이후, 데이비스는 타이거스로부터 FA 자격을 얻었고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3.4. 재기와 암 투병
한 시즌 동안 휴식한 후, 1996년 신시내티로 돌아와 야구에 복귀할 만큼 건강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비록 부상으로 인해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타율 0.287에 26홈런을 기록하며 준수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의 활약은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를 자유 계약 선수로 영입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1997년 5월, 아메리칸 리그 타율 선두를 달리던 인상적인 출발을 보이던 중, 그의 성적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곧 데이비스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단 당시 야구공 크기의 종양이 발견되었으나, 다행히 전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6월 13일 결장 절제술을 받았고, 이후 주 1회 투약 치료를 병행했습니다. 완치까지 18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데이비스는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회복하여 9월 15일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습니다. 암 치료로 인해 피로를 느꼈지만, 그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1997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결승 홈런을 칠 만큼 건강해졌습니다. 오리올스 팀원들은 데이비스를 위해 모자나 헬멧에 그의 등번호 "24"를 달고 "데이비스를 위해서도 이긴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시즌 후 그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다발골수종 연구 재단의 명예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는 자신과 거의 동시에 대장암 진단을 받은 오리올스 출신 부그 파월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데이비스와 파월은 모두 키스 릴리모 박사에게 수술을 받았으며, 함께 여러 공익 광고에 출연했습니다.
3.5. 마지막 시즌과 은퇴
데이비스의 경력의 마지막은 1999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부상으로 고통받는 세 시즌을 보낸 후 2001년에 최종 은퇴했습니다.
4. 플레이 스타일과 주요 업적
에릭 데이비스는 파워, 스피드, 수비력을 겸비한 드문 파이브 툴 플레이어로,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4.1. 플레이 특성과 영향
데이비스는 우타자이자 외야수로, 발과 배트 스피드, 파워, 그리고 뛰어난 수비 판단력을 포함한 운동 능력의 조합을 가졌습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뛰어난 신체적 재능으로 게임에서 가장 흥미로운 선수 중 한 명이 될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홈런 파워와 빠른 주루 능력을 모두 갖춘 그는 종종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는 인상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윌리 메이스와 비교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 레즈 팀 동료인 폴 오닐에 따르면, 데이비스는 "내가 본 최고의 타자, 최고의 주자, 최고의 외야수, 최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4.2. 수상과 주목할 만한 기록
에릭 데이비스는 그의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상을 수상하고 희귀한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 주요 수상 내역
- MLB 올스타 선정: 2회
- 골드 글러브 상: 3회 (1987년, 1988년, 1989년)
- 실버 슬러거 상: 2회 (1987년, 1989년)
- 올해의 컴백 선수상: 1996년
- 로베르토 클레멘테상: 1997년
- 허치 상: 1997년
- 토니 코니글리아로 상: 1997년
- 마빈 밀러 올해의 선수상: 2000년
- 주목할 만한 기록
- 1987년: 한 달에 3개의 만루 홈런을 친 최초의 선수.
- 1987년: 시즌에 30개 이상의 홈런과 50개 이상의 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 (이후 1990년 배리 본즈, 2023년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 2024년 오타니 쇼헤이만이 달성).
- 20홈런/20도루 시즌 7회 달성 (역대 공동 4위).
- 리키 헨더슨과 함께 유일한 20홈런/80도루 클럽 멤버.
- 사이클링 히트 1회 달성 (1989년 6월 2일).
- 30경기 연속 안타 (1998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단 기록).
5. 은퇴 후 활동
프로 야구 선수 은퇴 후, 에릭 데이비스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을 출판하고, 야구계와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5.1. 자서전과 개인적인 성찰
1999년, 데이비스는 자서전 『Born to Play』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피트 로즈가 자신을 믿어주고 야구에 대해 가르쳐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1996년 레즈의 감독이었던 레이 나이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는데, 데이비스는 1986년에 나이트와 경기장 위에서 격렬한 충돌을 겪은 바 있습니다. 그는 나이트가 자신의 복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시즌 후 계약 협상에서 자신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데이비스는 1990년 월드 시리즈에서 입은 부상 이후 레즈가 자신을 대우한 방식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시리즈가 끝난 후 오클랜드에 남겨졌으며, 레즈에게 자신을 신시내티로 데려올 개인 비행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고 주장하며, 병원에서 퇴원한 후 스스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5.2. 코칭과 지역사회 참여
데이비스는 현재 레즈 구단의 순회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플로리다주 베로 비치에서 열린 엘리트 개발 인비테이셔널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소년들의 야구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다발골수종 연구 재단의 명예 이사회 멤버로서 사회 공헌 활동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6. 유산과 영향력
에릭 데이비스는 야구계에서 보여준 뛰어난 재능과 역경을 극복한 의지로 깊은 유산을 남겼으며,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6.1. 폭넓은 영향력과 인정
그는 야구 내외적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암을 극복한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폴 오닐이 그를 "최고의 타자, 최고의 주자, 최고의 외야수, 최고의 모든 것"이라고 칭한 것처럼, 데이비스는 그의 플레이와 개인적인 투쟁을 통해 야구 팬들과 동료 선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6.2. 대중문화 속의 데이비스
데이비스는 코미디언 론 섹스턴과 그의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돈 버터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습니다. 돈 버터(및 섹스턴)는 자주 데이비스의 등번호 44번 레즈 유니폼을 입고 캐릭터로 등장했으며, 데이비스가 자신이 본 가장 완벽한 선수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돈 버터는 1990년 월드 시리즈 이후 마지 쇼트 전 레즈 구단주가 "에릭을 더럽게 대했다"며 그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주가 통했다며, 매년 4월 20일 쇼트가 팀을 매각한 날을 기념하며 '원 비어 기자 회견'을 시작했고, 이어서 '위대한 에릭 데이비스를 존경하는 의무적인 묵념'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북쪽 이웃"인 토니 미첼과 다투면서, 돈 버터는 밥과 톰 쇼에 "에릭 데이비스가 패스트볼을 부숴버린 것처럼 미첼을 부숴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삶에서 섹스턴은 데이비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첫 아들의 이름을 에릭으로 지었으며, 그의 재단 이름은 'You Before Me - 44'로, 44는 데이비스의 등번호를 의미합니다. 이 비영리 단체는 정신 건강으로 어려움을 겪는 코미디언들을 돕고 야구 장학금을 지원합니다.
7. 경력 통계
연도 | 리그 | 팀명 | 출장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몸에 맞는 공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84 | 내셔널 리그 | 신시내티 레즈 | 57 | 200 | 174 | 33 | 39 | 10 | 1 | 10 | 81 | 30 | 10 | 2 | 0 | 1 | 24 | 0 | 1 | 48 | 1 | 0.224 | 0.320 | 0.466 | 0.786 |
1985 | 56 | 131 | 122 | 26 | 30 | 3 | 3 | 8 | 63 | 18 | 16 | 3 | 2 | 0 | 7 | 0 | 0 | 39 | 1 | 0.246 | 0.287 | 0.516 | 0.803 | ||
1986 | 132 | 487 | 415 | 97 | 115 | 15 | 3 | 27 | 217 | 71 | 80 | 11 | 0 | 3 | 68 | 5 | 1 | 100 | 6 | 0.277 | 0.378 | 0.523 | 0.901 | ||
1987 | 129 | 562 | 474 | 120 | 139 | 23 | 4 | 37 | 281 | 100 | 50 | 6 | 0 | 3 | 84 | 8 | 1 | 134 | 6 | 0.293 | 0.399 | 0.593 | 0.992 | ||
1988 | 135 | 543 | 472 | 81 | 129 | 18 | 3 | 26 | 231 | 93 | 35 | 3 | 0 | 3 | 65 | 10 | 3 | 124 | 11 | 0.273 | 0.363 | 0.489 | 0.852 | ||
1989 | 131 | 542 | 462 | 74 | 130 | 14 | 2 | 34 | 250 | 101 | 21 | 7 | 0 | 11 | 68 | 12 | 1 | 116 | 16 | 0.281 | 0.367 | 0.541 | 0.908 | ||
1990 | 127 | 518 | 453 | 84 | 118 | 26 | 2 | 24 | 220 | 86 | 21 | 3 | 0 | 3 | 60 | 6 | 2 | 100 | 7 | 0.260 | 0.347 | 0.486 | 0.833 | ||
1991 | 89 | 340 | 285 | 39 | 67 | 10 | 0 | 11 | 110 | 33 | 14 | 2 | 0 | 2 | 48 | 5 | 5 | 92 | 4 | 0.235 | 0.353 | 0.386 | 0.739 | ||
1992 | 내셔널 리그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76 | 308 | 267 | 21 | 61 | 8 | 1 | 5 | 86 | 32 | 19 | 1 | 0 | 2 | 36 | 2 | 3 | 71 | 9 | 0.228 | 0.325 | 0.322 | 0.647 |
1993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31 | 511 | 451 | 71 | 107 | 18 | 1 | 20 | 187 | 68 | 35 | 7 | 0 | 4 | 55 | 7 | 1 | 106 | 12 | 0.237 | 0.319 | 0.415 | 0.734 | |
1994 | 아메리칸 리그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37 | 138 | 120 | 19 | 22 | 4 | 0 | 3 | 35 | 13 | 5 | 0 | 0 | 0 | 18 | 0 | 0 | 45 | 4 | 0.183 | 0.290 | 0.292 | 0.582 |
1996 | 내셔널 리그 | 신시내티 레즈 | 129 | 496 | 415 | 81 | 119 | 20 | 0 | 26 | 217 | 83 | 23 | 9 | 1 | 4 | 70 | 3 | 6 | 121 | 8 | 0.287 | 0.394 | 0.523 | 0.917 |
1997 | 아메리칸 리그 | 볼티모어 오리올스 | 42 | 176 | 158 | 29 | 48 | 11 | 0 | 8 | 83 | 25 | 6 | 0 | 0 | 3 | 14 | 0 | 1 | 47 | 2 | 0.304 | 0.358 | 0.525 | 0.883 |
1998 | 131 | 508 | 452 | 81 | 148 | 29 | 1 | 28 | 263 | 89 | 7 | 6 | 0 | 7 | 44 | 0 | 5 | 108 | 13 | 0.327 | 0.388 | 0.582 | 0.970 | ||
1999 | 내셔널 리그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58 | 223 | 191 | 27 | 49 | 9 | 2 | 5 | 77 | 30 | 5 | 4 | 0 | 1 | 30 | 1 | 1 | 49 | 1 | 0.257 | 0.359 | 0.403 | 0.762 |
2000 | 92 | 293 | 254 | 38 | 77 | 14 | 0 | 6 | 109 | 40 | 1 | 1 | 0 | 2 | 36 | 0 | 1 | 60 | 7 | 0.303 | 0.389 | 0.429 | 0.818 | ||
2001 | 내셔널 리그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74 | 171 | 156 | 17 | 32 | 7 | 3 | 4 | 57 | 22 | 1 | 1 | 0 | 1 | 13 | 0 | 1 | 38 | 4 | 0.205 | 0.269 | 0.365 | 0.634 |
통산 (17년) | 1626 | 6147 | 5321 | 938 | 1430 | 239 | 26 | 282 | 2567 | 934 | 349 | 66 | 3 | 50 | 740 | 59 | 33 | 1398 | 112 | 0.269 | 0.359 | 0.482 | 0.8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