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스기우라 다다시는 야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기 전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프로 은퇴 후에도 지도자 및 해설가로서 일본 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생애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프로 입단 전, 선수 경력, 그리고 은퇴 후의 다양한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스기우라 다다시는 1935년 9월 17일 아이치현 니시카모군 도요타시 와카미야초에서 5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다다시(忠)'는 소설 '난소 사토미 팔견전'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아버지 사다하루는 자녀들에게 '인(仁)', '지(智)', '효(孝)', '충(忠)', '의신(義信)'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도요타시 이치 초등학교와 도요타시 도부 중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5번 타자이자 중견수로 활약했다. 아이치현립 도요타니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무명이었으나, 당시 오버스로 투수로서 제구력은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는 아이치현 대회 3회전에서 패배했다.
1.2. 프로 입단 전
고등학교 졸업 후 릿쿄 대학에 진학한 스기우라는 동기인 나가시마 시게오, 모토야시키 긴고와 함께 '릿쿄 3인방'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대학 1학년 봄부터 마운드에 올랐던 그는 대학 2학년 때 투구 스타일을 사이드암 (때로는 언더핸드 스로로도 불림)으로 변경했다. 스기우라 본인은 투구 폼 변경의 이유를 '안경'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안경은 유리와 셀룰로이드로 무거웠기 때문에, 상하 움직임이 심한 오버스로 폼으로는 던질 때마다 안경이 흘러내려 불편함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는 머리의 위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이드암이 좋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폼을 변경하자 제구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그는 오버스로 시절에 공이 훨씬 빨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폼 변경은 2학년 봄 시즌 이후 '스나오시 배척 사건'으로 인한 자율 훈련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그는 "스나오시 감독 시절이었다면 반대해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1955년 (대학 2학년)경, 나가시마와 함께 야구부 합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자신의 고향인 아이치현을 연고로 하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구단 사무실을 방문한 일화가 있다. 그는 당시 군대 같았던 릿쿄 야구부가 싫어서 중퇴하고 주니치에서 야구를 하며 돈을 벌고 싶으니 계약금은 받지 않겠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구단 대표였던 나카무라 산고로 또는 구단 대표 대행 다카다 가즈오가 "우선 졸업하고 오라. 대학생은 공부가 본분이다"라며 설득하여 입단 시도는 좌절되었다.
스기우라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리그에서 1957년 춘계 및 추계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특히 같은 해 가을 와세다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모리 도루, 기쓰기 후미오 등 강력한 타선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도 오키쓰 다쓰오가 소속된 센슈 대학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 통산 36승 12패, 평균 자책점 1.19, 233탈삼진을 기록하며 릿쿄 대학 출신 선수 중 최다승 기록을 세웠고, 베스트 나인에 두 차례 선정되었다. 그의 승리 중 대부분인 28승은 폼 변경 이후 2년 동안 거둔 것이다. 1955년에는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도쿄 6대학 야구 리그 선발팀)으로도 선발되었다.
1.3. 선수 경력
스기우라 다다시는 난카이 호크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며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기록들을 세웠다.
1.3.1. 난카이 호크스 입단 및 초기 활약
대학 졸업 후, 스기우라는 삿포로 맥주나 아사히 신문사 입사도 고려했으나, 195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그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난카이의 주력 선수이자 대학 선배였던 오사와 게이지를 통해 상당한 금액의 영양비를 받았으며, 둘의 난카이 입단은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시마가 예상과 달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입단하면서, 의리를 지키며 난카이에 입단한 스기우라와의 대비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나가시마가 요미우리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여 스기우라를 찾아온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에게 스기우라는 "걱정하십니까?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라고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에 쓰루오카 감독은 "그 조용한 말투 속에는 '나는 한 번 결정한 것을 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굳건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입단 첫해 신인이면서도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도에이 플라이어스를 상대로 프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쓰루오카 감독은 경기 후 스기우라에게 "긴장했나?"라고 묻자, 스기우라는 "긴장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초반에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나, 팀 동료들의 맹공 덕분에 안정을 되찾았다. 언더핸드 스로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직구와 옆으로 크게 휘어지는 커브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하며 이 해 27승을 기록, 신인왕을 수상했다. 쓰루오카 감독은 "이제야 니시테쓰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1.3.2. 최고의 시즌 (1959년)
스기우라의 선수 경력 중 백미는 단연 2년 차였던 1959년 시즌이다. 그는 이 해 38승 4패, 승률 .905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난카이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퍼시픽 리그 MVP를 만장일치로 수상했다. 특히 이 해에 기록한 54와 2/3이닝 연속 무실점은 퍼시픽 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8월 26일부터 9월 9일까지의 43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 후 9월 13일 니시테쓰 라이온스전에서 실점하고, 9월 15일 긴테쓰 펄스전 2회에 1실점한 직후인 3회부터 다시 시작된 것이다.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4연투 4연승의 맹활약을 펼치며 난카이를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정규 시즌에 이어 일본 시리즈 MVP까지 수상했다. 경기 후 기자들의 질문에 스기우라는 "혼자가 되면 기쁨이 북받쳐 오겠죠"라고 말하려던 것이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는 말로 와전되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다.
또한 1959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5번째이자 퍼시픽 리그 최초로 투수 5관왕(승리, 평균 자책점, 탈삼진, 완봉승 수, 승률)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루었다. 이 기록은 2022년 현재까지 사와무라 에이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37년 봄), 빅토르 스타르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38년 가을), 후지모토 히데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43년),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1954년), 스기우라,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1년),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6년),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버펄로스, 2021, 2022년) 등 단 8명만이 달성한 대기록이다. 특히 스기우라의 5관왕은 각 부문에서 2위와의 격차가 매우 커서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1.3.3. 부상 및 투구 스타일 변화
1960년에도 31승을 거두며 시즌 30승 이상을 두 번 이상 기록한 투수가 되었는데, 이는 빅토르 스타르핀, 노구치 지로, 벳쇼 다케히코, 스기시타 시게루, 이나오 가즈히사, 가네다 마사이치, 곤도 히로시 외에는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1961년 5월에는 통산 100승을 달성했는데, 이는 프로 입단 후 불과 3년 1개월, 188경기 만에 달성한 역대 5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그러나 1961년 9월 초 20승에 도달한 직후부터 오른손이 저리는 이상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며칠 쉬면 던질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연투로 인한 오른팔의 혈행 장애 (동맥 폐색)가 판명되었다. 9월 15일 도쿄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허벅지 혈관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고, 남은 시즌은 재활에 전념했다. 1962년에 복귀했지만, 1963년까지 각각 14승에 그쳤다. 부상 후에는 악력이 크게 떨어져 50구 정도만 던져도 팔이 굳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1964년에는 증상이 다소 완화되어 20승을 거두었고, 1965년에도 개막 후 6연승으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5월 하순부터 증상이 다시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3이닝 이상은 던질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에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은 6월부터 스기우라를 구원 투수로 전향시켜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스기우라는 자신이 "퍼시픽 리그의 원조 구원 투수"라며, "구원 성공률이 높았다. 이전 투수가 남긴 주자를 들여보낸 적이 없었다. 세이브 제도가 있었다면 상당한 세이브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노무라 가쓰야는 1977년에 스기우라의 이러한 기용법을 모방하여 완투 능력을 잃었던 에나쓰 유타카를 구원 투수로 전향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1.3.4. 은퇴
스기우라는 1965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하고 다음 해인 1966년부터 난카이의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 스탠카의 퇴단 등으로 투수진이 약해지자, 개막 직전인 4월 5일 코치 겸임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코치 겸임은 1967년까지 지속되었다.) 현역 복귀 당시 쓰루오카 감독이 "투구 이닝은 3이닝까지, 구원 등판에 활용할 것"이라고 언급한 대로, 스기우라는 구원 투수로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으나 번번이 강하게 만류당했다.
1969년 오프 시즌에 노무라 가쓰야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도 은퇴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노무라가 "베테랑과 젊은 선수, 선수와 코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 팀에 필요한 일이다"라며 간곡히 부탁하여, 그는 고통을 참으며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1970년에 신인 사토 미치로가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으면서, 스기우라는 그 해 오프 시즌에 다시 노무라에게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노무라도 "이제까지 어떻게든 남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영원히 무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며 만류를 포기했고, 12월 4일 구단도 그의 은퇴 신청을 수락했다.
스기우라의 은퇴 경기는 다음 해인 1971년 3월 2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로 지정되었다. 경기 5회 종료 후 중단하여, 대학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대결이 시범 형태로 진행되었다. 나가시마가 스기우라가 던진 2구째 공을 중전 안타로 만들어내자, 마운드의 스기우라에게 노무라와 나가시마가 달려가 악수를 나누었다. 경기 후 스기우라는 "그쪽(나가시마)도 진심으로 쳐줘서... 이상한 것을 하는 것보다 그게 더 기뻤다. 후회 없는 야구 생활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프로 경력 동안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노런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1964년에는 단 1개의 안타만 허용한 준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통산 187승을 거두었으나, 200승 이상이 가입 기준인 명구회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스기우라 씨가 들어갈 수 없는 명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로,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명투수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오치아이 본인도 통산 2,371안타를 기록하여 야수 가입 조건을 충족했지만, 가입을 사퇴했다.)
1.4. 은퇴 후 활동
스기우라 다다시는 현역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1.4.1. 코치 및 해설가 활동
현역 은퇴 후 스기우라는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 및 스포츠닛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1971년 ~ 1973년), 릿쿄 대학의 대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요청으로 긴테쓰 버펄로스의 1군 투수 코치(1974년 ~ 1977년)를 맡았다. 1975년에는 구단 사상 첫 리그 후기 우승에 기여했다. 긴테쓰 코치 재임 중 그는 스즈키 게이시에게 "힘으로 던질 거면 씨름선수를 데려와라"며 릴리스 순간 외에는 힘을 빼는 투구 기술을 지도했으며, 오타 고지가 무라야마 미노루의 투구 폼을 참고하여 구속을 높이려 하자 "무라야마의 폼은 상체 사용이 강압적이라 일종의 '사도'이다. 그럼에도 훌륭한 강속구를 던졌지만, 형태만 모방하면 몸이 망가질 뿐이다"라고 설득하여 폼 개조를 중단시켰다. 또한 무라타 다쓰미에게 팔꿈치와 하체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1978년부터 다시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로 복귀했다. 1994년부터는 큐슈 아사히 방송 (KBC) 해설자 및 스포츠닛폰 평론가로 활동하며 "부처의 스기우라, 악마의 가와무라 히데후미"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때로는 질책과 격려의 코멘트를 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マイクの前のジェントルマン마이크 앞의 신사일본어'였고, 후년에는 '야구계의 신사'로도 불렸다. 199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가 우승을 확정 짓는 경기 라디오 중계에서, 그는 과거 자신의 명언 "혼자가 되어 울고 싶다"를 비틀어 "혼자 나카스에서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날 TV 중계에서는 부음성 해설을 맡아 아나운서 와다 야스오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야구 보기"라는 콘셉트로 방송했는데, 스기우라 본인이 술을 마시며 야구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며 "제법 괜찮네"라고 말했다.
1.4.2. 감독 경력
1985년 9월 22일, 난카이 호크스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스기우라가 다음 해인 1986년부터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아나부키 요시오에게는 사전에 알리지 않았지만, 아나부키는 "당연하다. 이런 것은 빨리 발표하는 것이 좋다.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스기우라 군이 꽃을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 첫해인 1986년, 스기우라는 시즌 전 "가가와 노부유키 3루 전환", "가도타 히로미쓰·데이비드 호스테틀러·대니 굿윈의 60번 트리오"와 같은 구상을 내놓았으나, 가가와는 타격 부진으로 5월 말 2군으로 내려가 두 달 만에 계획이 좌절되었다. 60번 트리오 중 굿윈 역시 잦은 부상으로 부진에 빠졌다. 반면 신인 니시카와 요시아키가 10승을 거두며 세이부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신인왕 경쟁을 펼쳐 퍼시픽 리그 특별상을 수상했다. 시즌 막판에는 이노우에 유지를 구원 투수로 기용하여 정착시켰다. 데이비드는 25홈런, 타율 .285를 기록했고, 야마무라 요시노리는 115경기에 출장했으며, 야마모토 가즈노리는 팀 내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1986년 오프 시즌에는 1군 타격 코치로 나가이케 도쿠시를 영입했고, 1987년에는 사사키 마코토와 유가미타니 히로시의 1, 2번 타순이 정착되었다. 투수진에서는 후지모토 슈지가 15승, 야마우치 가즈히로가 10승을 기록했다. 가토 히데지 (요미우리에서 자유 계약 후 니시모토의 중개로 이적)의 현역 마지막 투혼이 빛을 발하며, 그 해 9월 초까지 오랜만에 우승 경쟁을 벌여 구단 사상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가도타와 가토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고, 가도타는 126경기에 출장하여 3년 만에 31홈런을 터뜨리며 통산 3500루타, 1000득점, 20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감독 3년차인 1988년, 4월 23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호크스를 팔지 않겠다"고 말했던 가와카쓰 쓰토무 구단주가 사망했다. 5월에는 13승 9패 1무로 승리하여 최하위에서 벗어났고, 닛폰햄, 한큐, 롯데와 A클래스(상위권) 경쟁을 펼쳤다. 구단 매각설이 나돌던 가운데, 새로운 구단주가 된 요시무라 시게오는 7월 말 올스타 브레이크에 코치진을 모아 "매각은 없다"고 말하며 팀의 동요를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9월에 8승 11패로 지면서 4위에서 5위로 순위가 떨어졌다. 9월 10일, 원정지인 도쿄의 호텔에서 나가이케는 스기우라에게 불려가 "나는 올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 다음 감독을 맡아달라"는 감독 취임 요청을 받았다. 나가이케는 놀랐는데, 다음 감독은 수석 코치인 후지와라 미쓰루로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이케는 "순위도 올라왔으니 스기우라 씨가 계속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지만, 스기우라는 "아니, 나는 이제 안 된다"며 사퇴 의사가 확고해 보였다. 13일, 요시무라 구단주는 대형 슈퍼마켓 다이에와의 구단 매매 협상을 인정했다. 구단 양도의 조건으로 "호크스 명칭 유지", "스기우라 감독 유임"을 내세웠다.
가도타는 44홈런, 125타점으로 2관왕을 차지했고, 타율 .311, 장타율, 출루율, 볼넷/사구 부문에서도 리그 압도적 1위를 기록하며 MVP와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요시다 히로유키는 1985년 이후 두 번째로 118경기에 포수 마스크를 썼고, 첫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팀 득점력은 리그 2위(578점)였지만, 야마우치 가즈히로, 후지모토 슈지, 야마우치 다카노리 등 주력 선수들이 부진에 빠지면서 팀 평균자책점은 4.07로 리그 4위, 실책은 113개로 리그 최하위였다. 10월 12일 세이부전, 13일 한큐전에서 연달아 홈구장인 오사카 구장에서 끝내기 승리를 거두고, 15일 긴테쓰전을 맞이했다. 3만 2천 명의 만원 관중이 운집한 오사카 구장에서 6대 4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난카이로서의 홈 경기 최종전 후 세리머니에서 스기우라는 "나가시마 군이 (현역을) 은퇴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불멸입니다'라고 말했지만... 호크스는 불멸입니다!", "감사합니다, (후쿠오카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연설을 남겼다. 나가이케는 스기우라로부터 "그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 "내가 규슈로 가서 감독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며, 새로운 코치진 구성을 위해 자신은 물러나겠다는 말에 나가이케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사흘간만 감독 기분을 맛본 셈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1989년에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초대 감독을 맡게 되었다. 가도타 히로미쓰가 오릭스로 이적하면서 대형 연패를 거듭하며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여름부터 반격에 성공했다. 특히 토니 버나자드와 신인 외국인 선수 윌리 업쇼는 여름에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8월에는 버나자드가 타율 .349, 8홈런, 23타점을 기록하며 월간 MVP에 선정되었고, 업쇼도 타율 .326, 9홈런, 19타점으로 타선을 이끌었다. 이 두 선수의 투지 넘치는 타격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고, 8월에는 14승 10패 1무로 첫 월간 승리를 기록했다. 후반기에는 기시카와 가쓰야가 당시 일본 타이 기록인 시즌 3개의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는 등 타선이 끈기를 발휘했다. 10월 5일 세이부전에서는 8점 차를 뒤집는 대역전승을 거두는 등 (스코어 13대 12), "閉店間際のダイエー野球폐점 직전 다이에 야구일본어"는 우승 경쟁을 펼치던 세이부, 긴테쓰, 오릭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세 팀과 호각의 승부를 펼쳐 4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고, 우승팀 긴테쓰에게는 13승 11패 2무로 우위를 점했다。8월 이후에는 28승 19패 3무로 좋은 분위기에서 시즌을 마감한 후 용퇴했다. 투수진에서는 요시다 도요히코가 10승을 거두며 로테이션에 진입했고, 가토 신이치가 첫 두 자릿수 승리(12승)를 기록했다. 이노우에는 27세이브로 팀 최초의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2년차 무라타 마사요시와 신인 마쓰모토 타쿠야의 활약도 두드러졌으며, 야노 미노루는 중간 계투로 50경기에 등판했다. 야수진에서는 사사키, 후지모토 히로시, 기시카와가 두각을 나타냈고, 버나자드와 업쇼 두 외국인 선수가 합쳐 67홈런을 치며 팀 홈런 수는 166개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1.4.3. 프런트 활동
스기우라는 1990년부터 프런트에 합류하여 구단 이사로서 후쿠오카 지역 연고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프런트 활동은 1993년 9월 20일 퇴단 발표와 함께 마무리되었다. 호크스 퇴단 후에는 1994년부터 큐슈 아사히 방송 해설자 및 스포츠닛폰 평론가로 활동했다.
2. 선수로서의 특징
스기우라 다다시는 독특한 투구 스타일과 강렬한 라이벌 관계를 통해 일본 야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투구는 당대 선수들에게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2.1. 투구 스타일
스기우라의 트레이드마크는 땅에 스칠 듯한 낮은 궤도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직구와 크게 옆으로 휘는 커브였다. 그의 커브는 변화가 너무 커서, 스트라이크인 줄 알고 헛스윙한 좌타자의 몸에 공이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에노모토 기하치가 외곽으로 날카롭게 휘어지는 커브에 헛스윙을 했는데, 공이 마치 배를 파고드는 것처럼 맞았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스기우라의 폼은 '손목을 세운 언더핸드 스로'라 불리는 독특한 손목 사용법이 특징이었다. 이는 오버스로 폼을 옆으로만 기울인 형태로, 팔이 어깨보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공에 독특한 회전과 날카로움을 부여했다. 또한, 천성적인 관절의 유연성(특히 고관절)이 사이드암 투구법과 잘 맞아떨어져 유려한 폼에서 위력적인 직구를 만들어내는 요인이 되었다. 이 폼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토모 다쿠미의 연속 사진을 신문 기자로부터 받아 연구한 결과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전성기 시절, 스기우라가 던질 때면 백넷 뒤나 벤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손목을 꺾는 "피싯"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전해진다.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기우라의 뛰어난 하체 근력과 근육의 질에 대해 언급했다. 노무라에 따르면 1960년 오프 시즌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일본에 왔을 때, 윌리 메이스의 팔 근육을 만져본 느낌과 스기우라의 팔을 만졌을 때의 감촉이 거의 같아서 "네 몸은 메이스급이군"이라며 한숨이 나왔다고 한다. 히로세 요시노리 또한 "발도 빠르고, 무엇보다 몸이 유연했다"고 증언하며,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은 시즌 초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히로세)는 난카이에 들어온 이후, 달리기 시합에서 진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스기우라에게는 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년에 싱커를 익히면서 그의 장점이 사라졌다는 평가도 있다. 혹사로 인해 투구 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던 스기우라는 동갑내기 기교파 언더핸드 투수인 미나가와 무쓰오가 크게 가라앉는 싱커를 무기로 1구로 내야 땅볼을 유도하여 아웃을 잡아내는 것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미나가와와 같은 싱커를 익히고 싶다"는 스기우라의 상담에 노무라는 사이드암으로 싱커를 던지려면 공을 놓을 때 손을 역회전시켜야 하므로 스기우라의 장점인 직구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슬라이더를 권했지만, 스기우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싱커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노무라는 "만약 스기우라가 그때 가라앉는 공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승수는 확실히 늘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설득 실패에 대한 후회를 남겼다.
2.2. 다른 선수들의 평가
스기우라 다다시의 투구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노무라 가쓰야는 "상대했던 투수 중 가장 대단했던 건 이나오 가즈히사였지만, 내가 받아본 투수 중에서는 스기우라가 최고의 투수였다. 우타자 등 뒤에서 커브가 휘어져 들어온다. 등 뒤를 통과하는 궤적의 공이 스트라이크가 된다. 게다가 직구는 확실히 솟아올랐다", "몸쪽으로 빠른 슬라이더를 우타자에게 던지게 해보니, 재미있을 정도로 방망이가 부러졌다. 정말 즐거웠다"며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포수로서 배터리를 이루면 정말 따분했다. 스기우라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게 두면 제대로 된 타구는 날아오지 않았다. 포수가 나설 곳이 없었다"고도 말했다.
호크스 동료였던 다쿠와 모토지는 스기우라의 투구를 보고 "더 위가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투구 철학도 공 하나 낭비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스기우라가 고의 사구를 던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볼넷을 싫어하고 어떻게 최소 투구 수로 아웃을 잡을지 생각했다. 한큐의 야마다 히사시도 훌륭한 언더핸드였지만 유형이 달랐다. 스기우라는 아래에서 던지는데, 손목이 서서 위에서 던지는 궤적을 그린다. 니시테쓰전은 스기우라와 이나오의 에이스 대결이 되었는데, 내가 불펜에 가려고 하자 감독이 '너는 벤치에 가만히 있어라'고 말렸다. 구원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신뢰받았다. 38승을 한 2년차에는 언제 질까 생각하며 보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투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9년 일본 시리즈에서 스기우라에 대해 나가시마 시게오는 "땅에 박히는 듯한 언더핸드 스로의 오른팔에서 던져지는 직구가 우타자의 등 뒤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전혀 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장훈은 "퍼시픽 리그 투수 탑 3는 이나오, 스기우라, 그리고 도바시 마사유키"라며, "정말 대단한 것은 스기우라 씨의 커브다. 우리 팀의 사이온지 아키오 씨는 '맞겠다!'며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 공이 훅 휘어져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이걸 본 스기우라 씨가 쿡쿡 웃었고, 덩달아 주심까지 쿡쿡 웃더라"고 말했다. 또한 "스기우라 씨는 '내 커브는 너무 커서 문제였다. 좀 더 작고 날카롭게 휘어지는 게 필요했는데'라고 한탄했지만, 얼마나 사치스러운 한탄인가"라고 회고했다. 언더핸드 스로 투수 중에서는 "1위 스기우라 다다시, 2위 아키야마 노보루, 3위 야마다 히사시" 순으로 공의 위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야마다 히사시는 스기우라의 커브에 대해 "나는 스기우라 씨 현역 시절에 간신히 던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행운이었다. 스기우라 씨의 커브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어져서 '커브에 대해 가르쳐주세요'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스기우라 씨는 흔쾌히 '오라'며 오사카 스타디움 라커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커브 던지는 법을 보여줬는데 '에엣!?'이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도저히 그렇게는 던질 수 없었다. 다만 팔꿈치 위가 세워진 채로 던지는 것은 나와 같았다. 이것이 아니면 잠수함 투수의 공은 빨라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1958년 가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방일하여 치른 미일 친선 야구에서 카디널스는 14승 2패를 기록했는데, 일본의 2승 중 1승은 스기우라가 9대2로 완투승을 거둔 경기였다. 삼진을 당한 카디널스 4번 타자 스탠 뮤지얼은 귀국 시 "그 21번 투수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마쓰누마 히로히사, 야마다 히사시, 와타나베 슌스케 세 명의 투수들이 역대 언더핸드 스로 투수 세 명을 꼽으라는 질문에 모두 스기우라를 만장일치로 언급했다. 스기우라 자신은 타자로서 상대해 보고 싶은 투수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자신이 던지는 공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2.3. 이나오 가즈히사와의 라이벌 관계
스기우라는 현역 시절 동갑내기 대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와 많은 대결을 펼친 라이벌이었다. 동시에 이나오의 마운드 매너에서 배울 점이 많아 이나오의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나오와의 맞대결이 벌어진 어떤 경기에서, 이나오가 던진 후 1회말에 스기우라가 마운드에 올라가보니, 1회초에 이나오가 던졌으니 발을 디딘 부분이 파여 있어야 하는데 마운드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스기우라는 "첫 회라 그런가?"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2회말, 3회말,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마운드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로진 백도 손이 닿는 곳에 놓여 있었다. "혹시 이나오가 정리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느꼈고,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에 스기우라는 이나오를 "대단한 투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기우라는 "그때부터 바로 이나오를 따라했다", "(그러나) 나는 위기 상황 후에는 마운드가 거칠어진 것을 깜빡하곤 했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마운드가 거칠어진 상태로 나에게 (마운드를) 넘겨준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1958년 가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맞이한 미일 친선 야구에서 나카니시 후토시, 이나오와 술잔을 기울일 기회가 있었다. 술잔을 거듭할수록 스기우라의 어조가 날카로워졌고, 이윽고 두 사람을 붙잡고 "나카니시 형님, 이나오, 여기 앉아라", "내년에는 반드시 이긴다!"라고 기세를 올렸다고 한다. 나카니시는 "대역전으로 우승을 놓친 분함이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고 회상했다. 스기우라 본인은 "도중부터 기억이 끊겼다",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노무라 가쓰야가 저서에서 자주 언급하는 일화 중 하나는, 어느 해 올스타전에서 벤치에 함께 앉았을 때, 스기우라가 노무라가 이나오의 버릇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버려 (스기우라는 노무라의 연구 열심을 이나오에게 자랑하려는 의도였다), 이나오가 버릇을 고치고 나왔기 때문에 새로 연구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노무라는 "(세 명이서) 센트럴 리그 타격 연습을 보는데, 스기우라가 '이나오 (사이)야, 노무라가 너를 잘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자 이나오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그게 전부인데, 올스타전이 끝나고 이나오와의 첫 대결 때, 1구 상황을 보려고 그냥 흘려보냈더니, 몸쪽으로 올 줄 알았던 공이 바깥쪽으로 왔다. '어라?' 싶어 이나오의 얼굴을 보니 씨익 웃고 있었다"고 말했다. 스기우라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나오와 스기우라가 맞대결하여 승패에 관여된 경기는 24승 24패로 동률이다.
2.4. 센트럴 리그에 대한 대항 정신
스기우라는 이나오가 가진 장점을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센트럴 리그의 화려한 존재들에 대해 철저히 반대로 행동하려는 대항 정신에 불타올랐다. 그의 차분한 마운드 처리와 조용한 말투는 그러한 대항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후지타 모토시 등 화려하게 각광받던 센트럴 리그 투수들이 과장된 액션을 취하면, 스기우라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마운드를 내려왔고, 그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스기우라는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스기우라의 최대 특징인 느린 백스윙, 큰 팔 스윙, 슬로모션 같은 폼은 "가네다, 무라야마, 후지타의 날카롭고 빠른 동작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이 희로애락을 과장되게 표현할수록 나는 무표정하게, 더 신사처럼 행동했다"고 밝혔다.
3. 인물 및 에피소드
스기우라 다다시는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특유의 인물상과 다양한 일화로도 팬들에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3.1. 인물상
노무라 가쓰야는 "자기중심적인 투수들이 많은 야구계에서 스기우라 다다시는 정말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였다. 한마디로 그는 언제나 신사적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항상 조용하고 겸손하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노무라는 또한 "전화로 스기우라가 드물게 퉁명스럽게 응대할 때는 상대방이 언제나 아내였다"고 전했다.
그의 노래방 애창곡은 시가 마사루의 '여자'였다. 특히 도입부의 "시가 마사루야!"라는 대사 부분을 "스기우라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자택이 노후화되어 가족들이 재건축을 제안했을 때, 스기우라는 "이 집에 애착이 있다. 싫으면 나가도 좋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후년 KBC 해설가로 후쿠오카에서 해설할 때도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자택에서 통근했다. 참고로 이 자택은 스기우라가 사망한 후인 2010년 12월 25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3.2. 주요 관계
스기우라와 그의 스승이자 감독이었던 쓰루오카 가즈토와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다. 난카이의 백업 포수였던 스즈키 다카오는 둘의 관계를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사이. 하지만 끈적끈적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였다.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는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표현했다. 스기우라의 부인은 "어느 날, 목욕을 하다가 오른팔이 새하얗게 변했다. 더 이상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제가 남편의 야구에 대해 참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왜 감독님께 더 이상 던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소리를 질렀다. '바보야! 이런 몸이 되어도 던지는 게 에이스다!'라고. 사귈 때부터 '나는 사무라이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 쓰루오카 씨에게 반해 있었다", "승리하는 경기는 당연하고, 지고 있는 경기에 던지는 것도 에이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 던졌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히로세 요시노리는 스기우라에게 "감독님께 칭찬 들은 적 있나?"라고 묻자, 스기우라가 한동안 생각하더니 "그러고 보니 전혀 없네"라고 웃으며 답했다고 전했다. 히로세도 마찬가지로 쓰루오카로부터 직접 칭찬을 들은 적이 없었으며, "아마 그게 좋았을 것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다. 인생 최대의 감격을 안겨준 애제자에게조차 직접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것이 쓰루오카 감독이었고, 감독과 스기우라의 유대에는 말 같은 것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현역 시절 노무라 가쓰야와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스기우라, 노무라, 그리고 히로세 요시노리 세 명은 홈에서도 원정에서도 늘 함께 어울려 놀았고, 술을 못 마시는 노무라도 기분 좋게 술자리에 동행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세 명이 함께 통금 시간을 어기는 일도 다반사였고,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본떠 '난카이의 세 악인'이라고 불렀다. 스기우라는 노무라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1965년 12월 출간된 노무라의 첫 저서에 기고한 글에서 "내가 말하기도 이상하지만, 노무라라는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머리 좋은 사내다. 그 덕분에 내 투구가 얼마나 많이 구원받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우정은 스기우라의 은퇴 직후 노무라와 노무라 사치요의 불륜이 시작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난카이에 남아 사치요와 격렬하게 충돌했던 히로세와 달리, 은퇴 후 난카이를 떠나 해설자 및 긴테쓰 코치를 지낸 스기우라는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았다. 그러나 1977년 9월, 노무라가 사치요의 잦은 현장 개입(공사 혼동)을 이유로 시즌 중 감독직에서 해임되자, 노무라는 그 해 10월 주간문춘에 발표한 '독점 수기'라는 글에서 자신이 해임된 원인은 쓰루오카 파벌의 음모 때문이며, "쓰루오카 감독의 최우수 문하생"인 스기우라가 감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9년 오프 시즌 겸임 감독 취임 직후 스기우라가 은퇴하려 했던 것은 자신이 감독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며, 그때 스기우라에게 면전에서 "너, 감독 되고 싶었던 거 아니었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노무라는 1965년 11월 쓰루오카가 난카이 퇴단 의사를 표명했을 때, 다른 간부 선수들과 함께 쓰루오카 자택을 찾아가 퇴단을 만류했을 때, 쓰루오카가 "트리플 크라운?...웃기는 소리 마", "홈런왕?...웃기는 소리 마", "정말로 난카이에 공헌한 건 스기우라뿐이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쓰루오카는 1960년대 초반 이미 "내 후임은 1순위 가게야마, 2순위 노무라"라는 구상을 주변에 명확히 밝혔다. 이 구상은 구단 내에서 널리 공유되었고, 구단 후원회도 1969년 오프 시즌에 "이제 무엇보다 노무라는 감독직을 받아들여야 한다. 쓰루오카 씨 다음은 가게야마 씨, 그 다음은 노무라가 난카이의 감독 노선이었는데, 가게야마 씨가 급사했고 이이다 씨가 일종의 대타로 들어왔을 뿐이다. 노무라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명언하며 노무라의 겸임 감독 취임을 지지했다. 따라서 해임 후 노무라가 반복적으로 주장한 스기우라의 감독 취임 공작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3.3. 주요 에피소드
스기우라 다다시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 환상의 메이저리거**: 1960년 가을, 우승 경쟁을 하던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난카이에 "스기우라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남은 십여 경기 동안의 임대였지만, 만약 성사되었다면 일본인 메이저리거 1호가 될 수도 있었다.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도 "일본 야구를 위해서도 된다. 기회이니 해보라"며 찬성했고, 여권까지 발급받아 출국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직전 다이에이와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고, 우승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는 한 내줄 수 없다는 구단의 결정으로 무산되었다.
- 릿쿄 대학 시절의 탈주 경험**: 당시 6대학 야구부 중 릿쿄 대학과 메이지 대학 야구부의 혹독한 훈련은 단연 으뜸이었다. 스나오시 구니노부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에 비명을 지르고, 합숙소에서는 선배들의 엄격한 규율에 떨며 합숙소를 몰래 빠져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 나가시마 시게오 은퇴 시 발행된 '호치 그래프' 기고문에서는 합숙소를 빠져나온 것이 "두 번 정도"라고 언급했다.
-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1학년 봄 시즌 종료 후의 탈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시즌 중 어깨 부상을 당해 "이제 어깨가 낫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선배들의 혹독한 훈련에 짓눌려 시즌 종료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는 스나오시 감독의 지시로 야구부 매니저가 마중 나와 마지못해 합숙소로 돌아왔다고 한다.
- 대학 2학년이던 1955년경 야구부 합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려 시도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반감**: 1948년 오프 시즌 벳쇼 다케히코가 난카이에서 요미우리로 이적한 사건(일명 벳쇼 빼내기 사건)의 경위를 보고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라고 생각한 이후 '안티 교진'이 되었다고 한다.
- 호크스 불멸 선언**: 난카이 호크스의 홈 경기 최종전 세레모니에서 "나가시마는 아닙니다만 호크스는 불멸입니다. 감사합니다. (후쿠오카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은 팀이 후쿠오카로 이전한 후에도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발언으로 기억된다.
- 사생활**: 집이 노후화되어 가족들이 재건축을 제안했을 때 스기우라는 "이 집에 애착이 있다. 싫으면 나가도 좋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훗날 KBC 해설가로 후쿠오카에서 해설할 때도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자택에서 통근했다. 참고로 이 자택은 스기우라가 사망한 후인 2010년 12월 25일 화재로 전소되었다.
4. 사망 및 유산
스기우라 다다시는 일본 야구계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업적은 영구히 기려지고 있다.
4.1. 사망
스기우라 다다시는 2001년 11월 11일,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오사카 로망스의 원정 숙소였던 삿포로시 주오구의 한 호텔에서 급성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였다. 정토진종 혼간지파 사카이 별원에서 열린 영결식에서는 사찰 문 앞에 모인 팬들이 난카이 호크스 구단 깃발을 흔들고 구단가 '난카이 호크스의 노래'를 합창하며 그를 배웅했다。
4.2. 유산
스기우라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최우수 투수에게 수여되는 '杉浦賞스기우라상일본어'이 제정되었다. 그의 모교인 아이치현립 도요타니시 고등학교 운동장 옆에는 스기우라가 난카이 유니폼을 입은 모습의 흉상(높이 1.85 m)이 건립되어 있다. 그는 일본 야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과 영향력을 남겼다. 1996년에는 출신지인 도요타시에서 첫 시 영예상을 수여받았다. 모교인 도요타니시 고등학교 야구부 격려회에는 매년 다른 동문들과 함께 참석했는데, "프로 경험자가 가르치면 폐가 된다. 현역 지도자들도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연습 견학 시에는 선수들과 그물 너머로만 대화했다고 한다. 1997년 7월 5일부터 8월 31일까지 도요타시 향토 자료관에서는 스기우라의 유품을 모은 전시회 '너는 스기우라를 보았는가'가 개최되었다.
5. 상세 정보
5.1. 연도별 투수 성적
|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4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자책 | WHIP |
|---|---|---|---|---|---|---|---|---|---|---|---|---|---|---|---|---|---|---|---|---|---|---|---|---|---|
| 1958 | 난카이 | 53 | 34 | 14 | 1 | 3 | 27 | 12 | -- | -- | .692 | 1187 | 299.0 | 235 | 11 | 72 | 4 | 13 | 215 | 4 | 0 | 91 | 68 | 2.05 | 1.03 |
| 1959 | 69 | 35 | 19 | 9 | 9 | 38 | 4 | -- | -- | .905 | 1377 | 371.1 | 245 | 17 | 35 | 2 | 11 | 336 | 2 | 0 | 67 | 58 | 1.40 | 0.75 | |
| 1960 | 57 | 29 | 22 | 4 | 8 | 31 | 11 | -- | -- | .738 | 1284 | 332.2 | 266 | 28 | 44 | 5 | 5 | 317 | 1 | 0 | 85 | 76 | 2.05 | 0.93 | |
| 1961 | 53 | 20 | 12 | 1 | 1 | 20 | 9 | -- | -- | .690 | 946 | 241.2 | 202 | 24 | 31 | 3 | 10 | 190 | 1 | 0 | 85 | 75 | 2.79 | 0.96 | |
| 1962 | 43 | 18 | 6 | 1 | 1 | 14 | 15 | -- | -- | .483 | 705 | 172.2 | 165 | 12 | 36 | 4 | 5 | 96 | 1 | 0 | 68 | 59 | 3.07 | 1.16 | |
| 1963 | 51 | 24 | 9 | 1 | 3 | 14 | 16 | -- | -- | .467 | 990 | 252.2 | 217 | 30 | 46 | 5 | 1 | 156 | 1 | 0 | 86 | 74 | 2.63 | 1.04 | |
| 1964 | 56 | 33 | 9 | 1 | 3 | 20 | 15 | -- | -- | .571 | 1100 | 270.2 | 253 | 28 | 52 | 4 | 9 | 162 | 1 | 0 | 103 | 91 | 3.02 | 1.13 | |
| 1965 | 36 | 8 | 3 | 0 | 0 | 8 | 1 | -- | -- | .889 | 429 | 111.1 | 85 | 10 | 16 | 0 | 2 | 82 | 0 | 0 | 27 | 27 | 2.19 | 0.91 | |
| 1966 | 27 | 0 | 0 | 0 | 0 | 2 | 4 | -- | -- | .333 | 191 | 51.0 | 42 | 6 | 3 | 0 | 0 | 39 | 0 | 0 | 16 | 14 | 2.47 | 0.88 | |
| 1967 | 45 | 4 | 0 | 0 | 0 | 5 | 5 | -- | -- | .500 | 384 | 98.1 | 82 | 9 | 16 | 2 | 2 | 68 | 0 | 0 | 29 | 26 | 2.39 | 1.00 | |
| 1968 | 41 | 7 | 0 | 0 | 0 | 5 | 6 | -- | -- | .455 | 457 | 111.0 | 100 | 8 | 32 | 6 | 4 | 53 | 1 | 0 | 39 | 33 | 2.68 | 1.19 | |
| 1969 | 30 | 5 | 1 | 0 | 0 | 2 | 7 | -- | -- | .222 | 268 | 65.1 | 68 | 8 | 16 | 1 | 3 | 33 | 0 | 0 | 33 | 30 | 4.15 | 1.29 | |
| 1970 | 16 | 0 | 0 | 0 | 0 | 1 | 1 | -- | -- | .500 | 141 | 35.2 | 28 | 4 | 10 | 1 | 2 | 9 | 0 | 0 | 13 | 11 | 2.75 | 1.07 | |
| 통산 : 13년 | 577 | 217 | 95 | 18 | 28 | 187 | 106 | -- | -- | .638 | 9459 | 2413.1 | 1988 | 195 | 409 | 37 | 67 | 1756 | 12 | 0 | 742 | 642 | 2.39 | 0.99 | |
5.2. 연도별 감독 성적
|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본루타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 1986 | 난카이 다이에 | 6위 | 130 | 49 | 73 | 8 | .402 | 21.5 | 136 | .251 | 4.46 | 51세 |
| 1987 | 4위 | 130 | 57 | 63 | 10 | .475 | 16.0 | 132 | .261 | 3.86 | 52세 | |
| 1988 | 5위 | 130 | 58 | 71 | 1 | .450 | 17.5 | 162 | .267 | 4.07 | 53세 | |
| 1989 | 4위 | 130 | 59 | 64 | 7 | .480 | 11.0 | 166 | .257 | 4.74 | 54세 | |
| 통산 : 4년 | 520 | 223 | 271 | 26 | .451 | B클래스 4회 | ||||||
- 난카이 (난카이 호크스)는 1989년 다이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5.3.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타이틀**
- 다승왕: 1회 (1959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59년)
- 최다 탈삼진: 2회 (1959년, 1960년)
- 당시 연맹 표창은 없었으나,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표창이 시작되었다.
- 최고 승률: 1회 (1959년)
- 표창**
- 최고 수훈 선수 (MVP): 1회 (1959년)
- 신인왕: (1958년)
- 베스트 나인: 1회 (1959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95년)
- 최우수 투수: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59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 (1959년)
- 도요타시 영예상 (1996년)
5.4. 개인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첫 선발·첫 승리: 1958년 4월 5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 (고마자와 야구장), 7이닝 2실점
- 첫 탈삼진: 상동, 1회말 부스지마 쇼이치로부터
- 첫 완투 승리: 1958년 4월 20일, 대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 2차전 (가와사키 야구장), 9이닝 2실점
- 첫 완봉 승리: 1958년 9월 24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2차전 (오사카 구장)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투구 이닝: 1959년 10월 2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28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역대 89번째
- 통산 100승: 1961년 5월 6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5차전 (헤이와다이 야구장) ※역대 32번째
- 통산 1000탈삼진: 1961년 7월 29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7차전 (오사카 구장), 9회초 기도 노리후미로부터 ※역대 23번째
- 통산 1500투구 이닝: 1963년 6월 27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48번째
- 통산 150승: 1964년 5월 26일, 대 도쿄 오리온스 14차전 (오사카 구장) ※역대 17번째
- 통산 1500탈삼진: 1965년 5월 2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5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말 대릴 스펜서로부터 ※역대 13번째
- 통산 2000투구 이닝: 1965년 5월 19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7차전 (오사카 구장) ※역대 28번째
- 통산 500경기 등판: 1968년 5월 24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9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6회말 2아웃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3과 1/3이닝 무실점 ※역대 22번째
- 기타 기록**
- 투수 3관왕: 1회 (1959년) ※역대 9번째
- 투수 4관왕: 1회 (1959년) ※역대 6번째
- 투수 5관왕: 1회 (1959년) ※역대 5번째, 퍼시픽 리그 최초이자 20세기 퍼시픽 리그 유일
- 시즌 승차 34: 1959년 ※역대 최다 (연간 34승 이상을 기록한 다른 6명의 투수는 모두 그 해에 6패 이상을 기록)
- 54와 2/3이닝 연속 무실점 (1959년 9월 15일 ~ 10월 20일)
- 신인으로부터 3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1958년 ~ 1960년)
- 2리그제 이후 유일한 기록이었으나, 후에 노리모토 다카히로가 4년 연속 (2013년 ~ 2016년)으로 갱신했다.
- 첫회 선두 타자로부터 3자 연속 피홈런: 1964년 7월 1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전 (오사카 구장), 1회초 슈키 야스히로, 고노 아키테루, 대릴 스펜서에게 피홈런 ※역대 최초
- 일본 시리즈 4연투 4연승: 1959년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 역대 2번째, 무패는 유일
- 일본 시리즈 4승: 상동 ※이나오 가즈히사 이후 역대 2번째
- 올스타전 출장: 6회 (1958년 ~ 1961년, 1964년, 1965년)
5.5. 등번호
- 21 (1958년 ~ 1970년)
- 70 (1974년 ~ 1977년)
- 71 (1986년 ~ 1988년)
- 81 (1989년)
5.6. 저서
- 僕の愛した野球내가 사랑했던 야구일본어 (우미도리샤: 1995년 9월)
5.7. 관련 방송 출연
- 야구 해설가로서 출연했던 프로그램**
- MBS 베이스볼 파크: MBS 라디오의 중계 프로그램 현행 타이틀.
- KBC 해설가 시절에도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네트워크 중계에 출연했다.
- S☆1 BASEBALL: 마이니치 방송 시절 (1978년 ~ 1985년)에 출연한 TBS 텔레비전 계열 중계 프로그램의 현행 통일 타이틀. 드물게 TBS 제작분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 KBC 호크스 나이터: KBC 라디오의 중계 프로그램 현행 타이틀.
- MBS 해설가 시절에도 화요일부터 목요일, 그리고 1973년까지의 토요일 및 일요일 네트워크 중계에 출연했다.
- 슈퍼 베이스볼: 마이니치 방송 시절 (~ 1973년) 및 KBC 시절에 출연한 TV 아사히 계열 중계 프로그램의 현행 통일 타이틀. 마이니치 방송 시절에는 NET 텔레비전, 히로시마 홈 텔레비전 제작 중계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 BASEBALL Real&Live: 마이니치 방송 시절 (~ 1973년)에 출연한 TV 도쿄 계열 중계 프로그램의 현행 타이틀.
- MBS 베이스볼 파크: MBS 라디오의 중계 프로그램 현행 타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