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키야마 노보루秋山 登아키야마 노보루일본어는 1934년 2월 3일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12일 사망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투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이다. 그는 다이요 웨일스에서 선수 생활의 전부를 보냈으며, 이후 코치와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현역 시절에는 '면도날 슈트'라고 불리는 독특한 투구 스타일로 타자들을 압도했으며, 1960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다. 또한, 1956년 신인왕을 수상했고, 통산 193승을 기록하는 등 다이요 웨일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004년에는 일본 야구 전당에 특별 헌액되며 그의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2. 유년기 및 아마추어 경력
아키야마 노보루는 프로 야구 입문 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견고한 기초를 다졌다.
2.1. 고등학교 경력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아키야마는 도이 아쓰시土井淳도이 아쓰시일본어와 훗날 프로까지 이어지는 18년간의 긴 배터리 호흡을 시작했다. 2학년이던 1950년 가을 주고쿠 대회 현 예선 준결승에서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 아사히 고등학교에 아쉽게 패했다. 3학년이던 1951년 여름에는 여름 고시엔 동 주고쿠 대회 결승에서 숙적 오카야마 아사히 고등학교를 완봉으로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고시엔 1회전에서 다카마쓰 다이이치 고등학교와 맞붙어 나카니시 후토시中西太나카니시 후토시일본어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3대12로 크게 패했다. 당시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나카타 쇼지로中田庄治郎나카타 쇼지로일본어(긴테쓰 버펄로스의 유격수)도 프로에 입단했다.
2.2. 대학교 경력
고등학교 졸업 후 1952년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아키야마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학년이던 1953년 가을 리그에서는 전후 첫 우승을 포함해 총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3학년이던 1954년에는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니시오 요시타카西尾慈高니시오 요시타카일본어를 에이스로 내세운 리쓰메이칸 대학을 크게 꺾고 메이지 대학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4학년이던 1955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는 시마즈 시로島津四郎시마즈 시로일본어의 니혼 대학을 상대로 1대0의 투수전 끝에 승리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같은 해 제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는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선발팀의 일원으로 일본 대표팀에 선출되기도 했다. 리그 통산 70경기에서 33승 18패, 평균자책점 1.48, 탈삼진 334개를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에도 한 차례 선정되었다. 특히 1954년 춘계 리그 도쿄 대학전에서는 한 경기 탈삼진 22개라는 리그 기록을 세웠다. 당시 시마오카 요시오島岡吉郎시마오카 요시오일본어 감독 체제하에 약팀이었던 메이지 대학에 첫 황금기를 안겨준 인물로 평가된다. 시마오카 감독은 아키야마에게 매일 1000개의 투구를 과제로 주었으며, 아키야마는 이를 충실히 이행하며 강인한 신체와 투구 기술을 익혀 프로 입문 후 큰 재산이 되었다. 도이 외에도 당시 메이지 대학 동기 중 구로키 히로시게黒木弘重구로키 히로시게일본어(1루수), 이와오카 야스히로岩岡保宏이와오카 야스히로일본어(유격수), 오키야마 미쓰토시沖山光利오키야마 미쓰토시일본어(외야수)는 아키야마와 함께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여 '메이지 5인방'으로 불렸다. 또한 쓰치야 히로미쓰土屋弘光쓰치야 히로미쓰일본어(2루수)도 훗날 주니치에 입단했다.
3. 프로 선수 경력
아키야마 노보루는 다이요 웨일스에서 선수 경력 내내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의 영광과 좌절을 함께했다.
3.1. 신인 시절 및 초창기 성공 (1956년~1959년)
1956년, 아키야마는 도이 아쓰시 등 대학 동료들과 함께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했다. 그 해 개막전 다음 경기부터 선발로 기용되어 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25승 25패, 평균자책점 2.39(리그 11위)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후 다이요의 에이스로서 활약하며 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으나, 입단 후 4년 연속 리그 최다 패전 투수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1리그제를 포함해서도 연속 리그 최다 패전 투수 기록 중 가장 길다. 또한 입단 후 9년 연속 50경기 이상 등판은 당시 프로 야구 기록이었다. 1957년에는 24승 27패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다인 탈삼진 312개를 달성했다.
3.2. MVP 시즌 및 일본 시리즈 우승 (1960년~1964년)
1960년 4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개막전(나고야)에서 주니치의 마키노 시게루牧野茂마키노 시게루일본어 코치의 노크 배트가 아키야마의 이마에 직격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그 해 21승 10패, 평균자책점 1.75를 기록하며 구단 사상 첫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어진 다이마이 오리온즈와의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 모두 구원 등판하여 16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며 1자책점(평균자책점 0.53)을 기록했다. 10월 11일 1차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스즈키 다카시鈴木隆스즈키 다카시일본어, 10월 15일 4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시마다 겐타로島田源太郎시마다 겐타로일본어를 계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팀의 일본 제일에 공헌한 그는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MVP, 최우수 평균 자책점, 베스트 나인을 석권했다. 1962년에는 72경기에 등판하여 개인 최다인 26승을 기록했다. 9월 25일과 9월 26일 한신과의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양대 리그제 이후 유일한 2일 연속 완봉승을 달성했다. 또한 더블헤더에서 하루에 2승을 거둔 기록도 통산 5차례나 달성하며 현재까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으로 남아있다. 1963년부터는 코치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21승을 올리며 한신과의 우승 경쟁에서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시마다 겐타로, 스즈키 다카시, 곤도 마사토시権藤正利곤도 마사토시일본어, 이나가와 마코토稲川誠이나가와 마코토일본어 등과 함께 강력한 투수진을 구축했다.
3.3. 선수 생활 말년 및 은퇴 (1965년~1967년)
1965년 이후 아키야마는 오랜 혹사로 인해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1967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다이요에서만 쌓은 통산 승수는 193승으로, 명구회 입회 조건인 200승에 7승 모자란 기록이었다. (다만 명구회는 1978년에 발족되었기에 아키야마 은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입단 후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고, 12년간의 현역 생활 동안 A클래스 진입이 3번뿐일 정도로 저조했던 팀 상황 속에서 아키야마는 에이스로서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풀타임으로 활약했고, 매년 50경기 이상 등판하며 쌓아 올린 193승은 강팀에서 200승을 거둔 투수보다 더 높은 가치로 평가되기도 한다. 1967년에는 아키야마의 고등학교 후배인 히라마쓰 마사아키平松政次히라마쓰 마사아키일본어가 다이요에 입단했다. 아키야마와 교체되듯 다이요의 에이스가 된 히라마쓰 또한 '면도날 슈트'라는 별명으로 다른 팀의 강타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지만, 본래 '면도날 슈트'라는 별명은 아키야마에게 붙여진 것이었다.
3.4. 투구 스타일 및 특징
아키야마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매우 드문 '횡회전/언더핸드 속구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직구만으로도 충분히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다만, 스기우라 다다시杉浦忠스기우라 다다시일본어나 오토모 아쓰시大友工오토모 아쓰시일본어와는 다른 유형의 투수였다. 그 두 투수가 '손목을 세운 사이드암'으로 속구와 커브,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은 반면, 아키야마는 '손목을 눕힌 완전한 언더핸드' 투수로, 속구와 '면도날'이라 불린 슈트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아키야마 노보루는 코치와 감독으로서 다이요 웨일스에 헌신했다.
4.1. 코치 재임
아키야마는 현역 은퇴 후에도 다이요 웨일스에 남아 1968년부터 1973년까지 1군 투수 코치를 맡았고, 1974년에는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
4.2. 감독 재임
아키야마는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 출신 투수로는 처음으로 감독에 취임했으며, 이후 2021년 미우라 다이스케三浦大輔미우라 다이스케일본어 감독까지 기다려야 할 정도로 드문 사례였다. 그는 후지타 모토시藤田元司후지타 모토시일본어를 1군 투수 코치로 영입했고, 감독 첫 해인 1975년 4월에는 선두를 차지하는 등 선전했다. 하지만 6월에 들어서면서 히로시마, 주니치, 한신, 야쿠르트의 4강팀 간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자 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전년도보다 성적이 하락하여 51승 69패 10무로 5위를 기록했다. 이는 벳토 카오루別当薫벳토 카오루일본어 감독의 마지막 해인 1972년 이후 4년 연속 5위였다. 투수진은 히라마쓰 마사아키와 야마시타 리쓰오山下律夫야마시타 리쓰오일본어, 사카이 가쓰지坂井勝二사카이 가쓰지일본어, 마시바 시게아키間柴茂有마시바 시게아키일본어 등이 나름의 성적을 기록했으나, 그 외 불펜진은 부진했다. 타격진에서는 마쓰바라 마코토松原誠마쓰바라 마코토일본어, 에지리 아키라江尻亮에지리 아키라일본어, 존 시핀John Sipin존 시핀영어 등 베테랑 선수들이 활약하며 타격 성적은 우승팀 히로시마 등과 큰 차이가 없었다.
2년 차인 1976년에는 더 높은 성적을 목표로 클리트 보이어Clete Boyer클리트 보이어영어 1군 내야수 수비 코치의 추천으로 닛폰햄의 게리 제스타드Garry Jestadt게리 제스타드영어를 영입했다. 투수진도 히라마쓰 마사아키, 야마시타 리쓰오, 마시바 시게아키, 스기야마 도모타카杉山知隆스기야마 도모타카일본어 등이 버티고 있었고, 타격진에서도 나카쓰카 마사유키中塚政幸나카쓰카 마사유키일본어, 마쓰바라 마코토, 나가사키 케이이치長崎慶一나가사키 케이이치일본어 등이 건재했다. 5년 만의 A클래스 진입이 기대되었으나, 마쓰바라, 나가사키, 시핀 등 파괴력 있는 타선이 맹타를 휘둘러도 불펜진이 무너지면서 투타 불균형이 드러나 개막전부터 최하위로 추락했다. 5월 이후의 반등이 기대되었지만 투수진의 붕괴는 어쩔 수 없었다. 6월 29일에는 원정지 아키타에서 아키타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 약 300명과 환담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는 아키야마에게 "선두 요미우리와 좋은 경기를 하면서도 17.5경기 차이로 5위인 이유가 무엇이냐", 히라마쓰 마사아키에게는 "면도날 슈트는 요즘 어떻게 되었느냐" 등 가혹한 질문이 쏟아졌다. 7월 올스타전을 전후로 7연패를 당했고, 1승을 거둔 뒤 다시 9연패를 기록했다. 결국 우승팀 요미우리에 32경기, 5위 야쿠르트에도 8경기 이상 뒤처지며 10년 만의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중 공격 및 수비 권한은 클리트 보이어가, 투수 운용은 후지타 모토시와 합의제로 결정되었지만 실제 투수 기용은 후지타가 결정하고 있었다. 이는 아키야마가 사실상 감독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선수 교체를 심판에게 알리는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했음을 의미한다. 나고야에서의 주니치전, 구사나기에서의 한신전에서는 경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벤치를 비우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며, 이는 벤치 뒤에서 한 모금 피우는 정도가 아니라 원정팀 대기실이나 장내 방송실 안에 앉아 쉬는 모습이었다. "지금은 당신에게 운이 없다. 당분간 클리트 보이어에게 맡겨보라"는 나카베 겐키치中部謙吉나카베 겐키치일본어 구단주의 말 한마디로 현장 지휘권을 박탈당했고, 시즌 종료 후인 10월 25일 사임했다. 11월 10일에는 도쿄의 호텔에서 12개 구단 중 가장 먼저 납회가 열렸다. "야구는 꼴찌여도 연회는 으뜸"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마지못해 모인 선수들은 조용했고, 너무나 조용하여 고용된 콤파니온마저 "야구 선수들은 의외로 조용하네요"라며 놀랄 정도였다. 호화로운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담소하는 모습도 드물었으며, 매년 열리던 노래자랑 대회도 프로그램에서 사라졌다. 이례적인 분위기 속에서 납회 인사말은 사임 후 거취조차 정해지지 않은 아키야마가 미정인 신임 감독을 대신하여 연단에 올라 "다이요에 신세를 진 21년 동안 최저 승률(.366)로 끝내게 되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다른 형태로 야구를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대한 박수를 보낼 수도 없었고, 다이요 선수단과 관계자들은 고개만 숙였다. 나카베 겐키치는 "과거 호에일즈는 (1960년에) 최하위에서 우승했다. 작년(1975년) 히로시마도, 올해 요미우리도 그랬다. 내년은 호에일즈 차례다"라며 혼자 힘없이 소리쳤고, 이는 더욱 안타까운 모습으로 비쳤다. 아키야마는 후지타 모토시와 함께 어느새 회장을 나와 복도에 놓인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카베 겐키치는 야구 자체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경기 결과만큼은 신경 쓰고 있었다. 다이요의 유일한 우승 당시의 에이스이자 1967년 은퇴한 그가 아끼던 아키야마를 아꼈지만, 당시 V9 시대였던 터라 "지금 감독을 시키면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가와카미 데쓰하루일본어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키야마를 좀처럼 감독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가와카미 감독이 은퇴하고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나가시마 시게오일본어가 신임 감독이 된 1975년에야 비로소 감독으로 임명했다. 모기업인 다이요 어업의 사장이기도 했던 나카베 겐키치는 바쁜 일정으로 경기를 관전할 수 없을 때에도 반드시 아키야마 감독 자택에 전화하여 상황을 물었으나, 들려오는 보고는 패전 결과뿐이어서 결국 참지 못했다.
4.3. 2군 감독 재임
납회 이틀 후인 11월 12일, 벳토 카오루가 다시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프런트 진입이나 해설가 전향이 예상되었던 아키야마는 1군 감독으로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카베 겐키치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1977년에 2군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가까운 미래에 감독 재등판을 염두에 둔 인사였으나, 직후인 1977년 1월 14일 나카베 겐키치가 사망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히라마쓰 마사아키는 아키야마 감독에 대해 품격 있는 감독이었지만 선수층이 약했던 시기였다고 지적하며 "타이밍이 안 좋았어요. 선수들만 있었다면 대감독이 되었을 겁니다. 제가 현역으로 있을 때 다시 한번 감독을 해주셨으면 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아키야마가 감독을 맡았던 기간 동안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인 도이 아쓰시는 코치로서 그를 돕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으나, 아키야마 사망 직후 도이 아쓰시가 받은 『월간 베이스타스』의 추모 인터뷰에 따르면, 1975년 아키야마가 감독에 취임했을 때에도 나카베 겐키치가 "도이는 다이요를 그만둔 사람이니까"라는 이유로 복귀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 진실이었다고 한다. (도이 아쓰시의 다이요 코치 복귀는 나카베 겐키치 사후인 1978년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팀에 대해 쓰지 야스히코辻恭彦쓰지 야스히코일본어는 후에 "투수들의 제구가 제멋대로였고, 콤비네이션 같은 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술도 의식도 모두 부족한 팀이었다"고 회고했다.
5. 은퇴 후 활동
야구 지도자 경력 이후, 아키야마 노보루는 야구 해설가, 스카우트, 그리고 OB 회장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텔레비전 아사히의 「슈퍼 베이스볼」과 TV 가나가와의 「tvk 프로 야구 중계」 해설가로 1978년부터 2000년까지 활동하며 야구팬들에게 해박한 지식과 깊이 있는 분석을 전달했다. 동시에 스카우트로서 유망주 발굴에 힘썼고, 다이요 OB 회장으로서 구단 발전에 기여했다. 1998년 10월 8일에는 자신이 승리 투수가 되어 우승을 차지했던 1960년 이래 처음으로 요코하마의 우승을 한신 고시엔 구장의 방송석에서 게스트 해설가로 지켜보았다.
6. 개인사 및 에피소드
아키야마 노보루는 그의 성격과 관련된 여러 일화들을 남겼다. 훗날 압도적인 마무리 투수로 전성기를 맞았던 사사키 가즈히로佐々木主浩사사키 가즈히로일본어에게 "너처럼 승리하는 경기 마지막 1이닝 한정으로만 던지면, 나는 130경기 전부(일본 프로 야구는 당시 130경기 체제였다.) 벤치에 들어가서 모든 경기를 던지고 막아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해설가로서 처음에는 매우 서투르고 답답한 말투였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사람처럼 능숙해졌다. 다이요 웨일스 시절부터의 요코하마 팬이자 아쿠타가와상 작가인 마루야 사이이치丸谷才一마루야 사이이치일본어는 그가 말하기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 맹훈련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말의 본업인 사람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어 문화에 공헌해야 한다. 그 일본어는 우리 문명 전체의 기반이므로, 특히 규범으로서의 말하기의 확립은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장대한 논조로 극찬했다.
7. 사망
아키야마 노보루는 2000년 8월 12일 호흡 부전으로 인해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일본 야구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8. 유산 및 영예
아키야마 노보루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공식적인 영예를 통해 기려졌다.
8.1. 야구 전당 헌액
아키야마 노보루는 사망 후 4년이 지난 2004년, 일본 야구 전당에 특별 헌액되었다. 이는 그의 선수 및 지도자로서의 공헌이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8.2. 역사적 평가
아키야마 노보루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다이요 웨일스가 최하위와 B클래스를 전전하던 어려운 팀 사정 속에서도 에이스로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풀타임으로 활약하며 쌓아 올린 통산 193승은, 강팀에서 200승을 거둔 투수들보다 더 큰 가치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면도날 슈트'는 후배 히라마쓰 마사아키에게 계승되어 다이요의 상징적인 구질이 되었다. 아키야마는 팀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구단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겼고, 이는 현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9. 상세 기록
아키야마 노보루는 선수 및 지도자 경력 전반에 걸쳐 인상적인 기록들을 남겼다.
9.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56년 | 다이요 | 58 | 35 | 26 | 7 | 0 | 25 | 25 | -- | -- | .500 | 1552 | 379.2 | 290 | 24 | 136 | 7 | 19 | 266 | 3 | 1 | 120 | 101 | 2.39 | 1.12 |
1957년 | 65 | 40 | 27 | 3 | 0 | 24 | 27 | -- | -- | .471 | 1631 | 406.0 | 319 | 21 | 116 | 13 | 9 | 312 | 2 | 1 | 138 | 113 | 2.50 | 1.07 | |
1958년 | 62 | 36 | 20 | 3 | 1 | 17 | 23 | -- | -- | .425 | 1418 | 359.0 | 287 | 30 | 89 | 11 | 5 | 243 | 2 | 0 | 112 | 100 | 2.51 | 1.05 | |
1959년 | 56 | 33 | 17 | 3 | 2 | 14 | 22 | -- | -- | .389 | 1238 | 300.1 | 267 | 26 | 87 | 5 | 8 | 212 | 4 | 0 | 131 | 110 | 3.29 | 1.18 | |
1960년 | 59 | 26 | 8 | 4 | 0 | 21 | 10 | -- | -- | .677 | 1055 | 262.1 | 189 | 11 | 86 | 10 | 12 | 183 | 3 | 0 | 65 | 51 | 1.75 | 1.05 | |
1961년 | 69 | 17 | 6 | 1 | 1 | 20 | 15 | -- | -- | .571 | 1117 | 280.2 | 239 | 16 | 70 | 4 | 7 | 179 | 2 | 1 | 97 | 82 | 2.63 | 1.10 | |
1962년 | 72 | 17 | 8 | 5 | 0 | 26 | 12 | -- | -- | .684 | 1139 | 290.2 | 213 | 16 | 79 | 7 | 7 | 199 | 1 | 0 | 73 | 62 | 1.94 | 1.00 | |
1963년 | 60 | 17 | 8 | 1 | 1 | 13 | 14 | -- | -- | .481 | 876 | 214.2 | 212 | 23 | 52 | 3 | 2 | 99 | 1 | 1 | 88 | 74 | 3.10 | 1.23 | |
1964년 | 63 | 23 | 8 | 2 | 1 | 21 | 10 | -- | -- | .677 | 1053 | 259.2 | 214 | 20 | 68 | 4 | 9 | 126 | 1 | 0 | 96 | 79 | 2.73 | 1.09 | |
1965년 | 39 | 11 | 1 | 0 | 0 | 5 | 5 | -- | -- | .500 | 420 | 103.1 | 98 | 8 | 30 | 3 | 2 | 41 | 1 | 0 | 34 | 31 | 2.71 | 1.24 | |
1966년 | 34 | 22 | 3 | 0 | 0 | 6 | 8 | -- | -- | .429 | 557 | 130.1 | 134 | 18 | 37 | 2 | 3 | 35 | 1 | 0 | 67 | 58 | 4.02 | 1.31 | |
1967년 | 2 | 1 | 0 | 0 | 0 | 1 | 0 | -- | -- | 1.000 | 27 | 6.1 | 6 | 2 | 4 | 0 | 0 | 1 | 0 | 0 | 3 | 3 | 4.50 | 1.58 | |
통산: 12년 | 639 | 278 | 132 | 29 | 6 | 193 | 171 | -- | -- | .530 | 12083 | 2993.0 | 2468 | 215 | 854 | 69 | 83 | 1896 | 21 | 4 | 1024 | 864 | 2.60 | 1.11 |
9.2. 연도별 감독 성적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1975년 | 다이요 | 5위 | 130 | 51 | 69 | 10 | .425 | 21.5 | 137 | .249 | 3.93 | 41세 |
1976년 | 6위 | 130 | 45 | 78 | 7 | .366 | 32.0 | 172 | .256 | 4.45 | 42세 | |
통산: 2년 | 260 | 96 | 147 | 17 | .395 | B클래스: 2회 |
9.3. 타이틀 및 수상 경력
아키야마 노보루는 선수 시절 여러 중요한 타이틀과 수상 경력을 기록했다.
9.3.1. 타이틀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60년)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1회 (1957년)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고 승률: 1회 (1960년)
9.3.2. 수상
- 최고 수훈 선수(MVP): 1회 (1960년)
- 신인왕: 1956년
- 베스트 나인: 1회 (1960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 (1960년)
- 일본 야구 전당 특별 헌액: 2004년
9.4. 주요 기록
그의 경력에서 두드러지는 주요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9.4.1. 첫 기록
- 첫 등판·첫 선발 등판: 1956년 3월 2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차전(주니치 구장)
- 첫 승리: 1956년 3월 2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가와사키 구장)
9.4.2. 이정표 기록
- 통산 100승: 1960년 9월 2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3차전(가와사키 구장)
- 통산 150승: 1963년 5월 25일, 대 한신 타이거스 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4.3. 기타 기록
- 1일 2승: 5회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1957년 9월 11일, 대 히로시마 카프 21·22차전(나가노 이와무라타 구장)
- 1960년 6월 2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1·12차전(시모노세키 구장)
- 1961년 7월 12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16·17차전(가와사키 구장)
- 1962년 5월 20일, 대 히로시마 카프 6·7차전(가와사키 구장)
- 1963년 9월 15일, 대 히로시마 카프 18·1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 2일 연속 완봉승: 1962년 9월 25일·9월 26일, 대 한신 타이거스 25·26차전(가와사키 구장)
- 연속 리그 최다 패전: 4년 연속 (1956년~1959년) ※일본 프로 야구에서 다른 달성 사례 없음
- 시즌 27패: 1957년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312탈삼진: 1957년 ※구단 기록, 센트럴 리그 우완 투수 기록
- 신인 선수 연속 타석 무안타: 50 (1956년) ※양대 리그제 이후 일본 프로 야구 투수 기록이며, 2021년 사토 데루아키佐藤輝明사토 데루아키일본어에게 경신될 때까지는 양대 리그제 이후의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올스타전 출장: 9회 (1956년~1964년)
9.5. 등번호
아키야마 노보루가 선수 및 지도자 경력 동안 사용했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17 (1956년~1969년)
- 71 (1970년~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