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川口 松太郎가와구치 마쓰타로일본어는 1899년 10월 1일 도쿄 아사쿠사에서 태어나 1985년 6월 9일에 사망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본명은 松田松一마쓰다 마쓰이치일본어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단편 소설, 장편 소설, 드라마, 각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민중의 삶과 정서를 섬세하게 묘사한 대중 소설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능숙한 이야기 전개와 독자적인 화술로 큰 인기를 얻었다.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제1회 나오키상 수상자로, 그의 대표작인 『아이젠 카츠라』는 영화로 각색되어 당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그를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렸다. 그는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요시무라 코자부로 등 유명 영화감독들과의 협업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고 직접 각본을 쓰는 등 영화계에도 깊이 관여했다. 또한 다이에이 필름의 전무를 역임하며 영화 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신파극단 '신생신파'의 주사(主事)로서 각색과 연출을 담당하며 쇼와 시대 신파극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예술원 회원 및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아내는 배우 미마스 아이코이며, 아들로는 배우 가와구치 히로시 등이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복잡한 출생 배경과 다양한 직업 경험을 통해 문학적 기반을 다졌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1899년 도쿄시아사쿠사구 아사쿠사이마도정(현재의 도쿄도다이토구이마도)에 위치한 이마도 하치만 신사 경내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적에는 시마오카 하루키치의 누나 요네의 사생아인 가와구치 다케지로의 서자(庶子)로 인지 입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친부모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양부 가와구치 다케지로는 술을 즐기는 미장이였다. 과거 이마도에 단자에몬의 지배를 받는 아사쿠사 신마치(新町)가 존재했던 사실로 미루어 그가 피차별 부락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며, 화족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그는 갓난아기 때 양육비를 보낸 봉서(奉書)를 기억했지만,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마도 초등학교에 다니다 4학년 때 중퇴하고 양품점 견습공으로 일했다. 그러나 의무 교육 기간이 2년 연장되면서 야마야보리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야마야보리 초등학교 동급생 중에는 훗날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미조구치 겐지와 마에다 시게노부(호센)가 있었다. 그는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야마야마치의 전당포, 센소지 덴보인(伝法院) 옆 헌책 노점상, 사카타 경찰서 급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이후 체신성 전신 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사이타마현이나 도치기현의 전신국에서도 근무했으며, 1915년(다이쇼 4년)부터 1년 동안 도치기현 하가군에 있던 소보이 우체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2.2. 문학 활동의 시작과 영향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17세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마도로 이사 온 이쿠타 쵸스케의 도움으로 『고단 잡지』에 「流罪人藤助유죄인 도스케일본어」를 게재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쿠타의 스터디 그룹에서는 마에다와 함께 이와타 센타로와도 친분을 쌓았고, 하쿠분칸 계열 잡지에 신(新)고단, 탐정 실화, 그림 소설 등을 이와타의 삽화와 함께 투고하여 원고료를 벌었다.
19세 때 양부가 사망하고 양모마저 친정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이후 고지마치히라카와 덴만구 경내의 셋방에 살다가 『분게이 클럽』 편집장 모리 교코의 소개로 후카가와구의 고단시이자 속기 고단의 인기 작가였던 고도켄 엔교쿠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구술 필기를 돕고 한시와 에도 문학 소양을 쌓았다. 또한 엔교쿠의 소개로 구보타 만타로에게 사사했고, 구보타의 소개로 오사나이 카오루의 각본 연구회에 참여하며 야마토 신문 기자 등으로 일했다. 1922년(다이쇼 11년) 쓰보우치 쇼요 등이 심사를 맡은 제국극장 창립 10주년 기념 희곡 공모전에서 그가 응모한 「출옥(出獄)」이 나가이 타츠오 등과 함께 입선했다.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 이후, 오사나이의 권유로 오사카의 플라톤사에 이와타와 함께 입사하여 나오키 산주고와 함께 『고락(苦楽)』의 편집을 담당했다. 1926년(다이쇼 15년) 도쿄로 돌아와 소설, 수필, 희곡 등을 집필했다. 1930년경부터는 『고단 클럽』에서 현대 소설이나 영화 독본 등을 집필했으며, 1931년(쇼와 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재한 「女優情艶史여배우 정염사일본어」는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시대물인 「湯檜曾の平太郎유비소노 헤이타로일본어」, 「萩寺長七하기데라 쵸시치일본어」 등을 집필했다.
1933년(쇼와 8년) 11월, 불량 화족 사건 수사 과정에서 문인들의 상습 도박이 밝혀지면서 구메 마사오, 사토미 돈 등과 함께 검거되어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3. 문학 경력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다양한 장르에서 독보적인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인기 작가로 부상했다.
3.1. 인기 작가로 부상

1934년(쇼와 9년) 『올 요미모노』에 게재한 메이지 시대 예인(藝人)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인정물(人情物) 「鶴八鶴次郎츠루하치 츠루지로일본어」는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1935년(쇼와 10년)부터는 유서 깊은 요리집을 둘러싼 인정 이야기 「風流深川唄풍류 후카가와 우타일본어」를 연재했다. 이러한 메이지 시대 배경의 작품들로 그는 그해 제1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당시 기쿠치 칸과 친분이 있던 『히노데』 편집자 와다 요시에, 『고단 클럽』 편집자 가야하라 고이치 등의 추천을 받았다. 이어서 하나이 오우메 사건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진 『明治一代女메이지 이치다이 온나일본어』를 집필했다.
그 후 발표한 『아이젠 카츠라』는 신분 차이가 있는 남녀의 사랑과 엇갈림을 다룬 전개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다나카 키누요와 우에하라 켄 주연의 영화화가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그는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1940년(쇼와 15년)에는 극단 신생신파의 주사(主事)가 되어 연극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을 담당했으며, 그의 작품 다수가 신파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전후인 1947년(쇼와 22년)에는 다이에이 필름의 제작 담당 전무 및 감사역을 맡아 영화계에도 기여했다. 같은 해 『일본 소설』 창간호에서는 와다 요시에의 의뢰로 세키 이노스케(關伊之助)라는 필명으로 쓴 현대 중편 소설 「나부(裸婦)」도 호평을 받았다. 1949년(쇼와 24년) 나오키상이 재개되자 그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이후 제80회까지 30년간 그 역할을 수행했다.
3.2. 주요 작품 및 장르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예도물(藝道物), 메이지물(明治物), 시대물(時代物), 현대풍속물(現代風俗物) 등 폭넓은 장르의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능숙한 이야기 구성과 독자적인 화술로 서민들의 삶과 정서를 그려내며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주요 시대 소설로는 『新吾十番勝負신고 주반 쇼부일본어』, 『皇女和宮황녀 가즈노미야일본어』, 『女人武蔵여인 무사시일본어』 등이 있다. 현대물로는 긴자의 여인들을 그린 『夜の蝶밤의 나비일본어』, 교토의 영화계와 유흥가를 배경으로 한 『古都憂愁고도 우슈일본어』, 장편 자전 소설 『破れかぶれ야부레카부레일본어』 등이 대표작이다. 아내의 사망 후에는 『愛子いとしや아이코 이토시야일본어』를 출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신고 주반 쇼부』의 후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한다. 왕조 시대에는 '가타리베(語りべ가타리베일본어)'라는 직업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 '가타리베'가 되고 싶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문학적 지향점을 밝혔다. 그의 작품 『しぐれ茶屋おりく시구레차야 오리쿠일본어』는 2007년 로얄 타일러에 의해 영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사망 후에는 만년의 걸작 『一休さんの門이큐상노 몬일본어』의 속편인 『一休さんの道이큐상노 미치일본어』 약 천 매의 원고가 발견되어 신문에 연재되기도 했다.
3.3. 영화 및 연극 각색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영화 및 연극계와도 긴밀하게 협업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그는 1930년대부터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를 위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각색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1939년작 『잔국 이야기』가 있다. 반대로 미조구치 감독은 가와구치의 작품을 각색하여 1937년작 『사랑과 증오의 해협』(원작: 아옌쿄)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두 사람은 1953년 『우게츠 이야기』, 1954년 『산쇼다유』(영어 제목: The Crucified Lovers), 1955년 『양귀비』 등의 영화에서 협력했다. 미조구치 감독은 또한 1953년 영화 『기온바야시』(영어 제목: A Geisha)를 가와구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했다. 이 외에도 나루세 미키오, 요시무라 코자부로 등 다른 유명 감독들도 그의 작품을 영화로 각색했다.
그는 1940년 극단 신생신파의 주사가 된 이후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을 담당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신파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으며, 특히 자작 소설의 각색과 연출을 맡아 쇼와 시대 신파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4. 영화 및 TV 드라마화
가와구치 마쓰타로의 소설과 각본은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 『아이젠 카츠라』: 여러 차례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 『신고 주반 쇼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 『蛇姫様뱀 공주님일본어』:
- 『뱀 공주님』 도호, 1940년, 감독: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출연: 하세가와 카즈오, 야마다 이스즈
- 『뱀 공주님 도중』 다이에이 필름, 1950년, 감독: 키무라 케이고, 출연: 하세가와 카즈오, 야마다 이스즈
- 『뱀 공주님』 도에이, 1954년, 감독: 코우노 토시카즈, 출연: 아즈마 치요노스케, 호시 미치코
- 『뱀 공주님』 다이에이 필름, 1959년, 감독: 와타나베 쿠니오, 출연: 이치카와 라이조, 사가 미치코
- 『신 뱀 공주님 오시마 센타로』 도에이, 1965년, 감독: 사와시마 타다시, 출연: 미소라 히바리, 하야시 요이치
- 『芸道一代男예도 이치다이 오토코일본어』: 1941년, 감독: 미조구치 겐지.
- 『명도 미녀마루(名刀美女丸명도 미녀마루일본어)』: 1945년, 감독: 미조구치 겐지.
- 『夜の門밤의 문일본어』: 1948년, 감독: 키무라 케이고.
- 『우게츠 이야기』: 1953년, 감독: 미조구치 겐지, 출연: 다나카 키누요, 쿄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오자와 에이타로.
- 『채털리 부인은 일본에도 있었다』: 1953년, 감독: 시마 코지, 출연: 토도로키 유키코, 와카오 후미코, 오카 조지.
- 『기온바야시』: 1953년, 감독: 미조구치 겐지, 출연: 와카오 후미코, 코구레 미치요, 신도 에이타로.
- 『くちづけ입맞춤일본어』: 1957년,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 출연: 가와구치 히로시, 노조에 히토미, 미마스 아이코.
- 『스자쿠몬』: 1957년, 감독: 모리 잇세이, 출연: 와카오 후미코, 이치카와 라이조.
- 『오에야마 슈텐도지』: 1960년, 감독: 타나카 토쿠조, 출연: 하세가와 카즈오, 이치카와 라이조, 카츠 신타로, 혼고 코지로, 나카무라 타마오.
- 『신 겐지 이야기』: 1961년, 감독: 모리 잇세이, 출연: 이치카와 라이조, 스미 하나요, 나카무라 타마오, 와카오 후미코.
- 『古都憂愁 姉いもうと고도 우슈 아네 이모토일본어』: 1967년, 감독: 미스미 켄지, 출연: 후지무라 시호, 야치구사 카오루, 와카야기 키쿠, 이토 에이코.
TV 드라마화된 작품으로는 1969년 도카이 TV 방송에서 방영된 『窯ぐれ女가마구레 온나일본어』, 1970년 NHK 종합 텔레비전의 『은하 드라마』에서 방영된 『古都憂愁고도 우슈일본어』 등이 있다.
5. 기타 직업 활동
작가 활동 외에도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2차 중일 전쟁 당시, 가와구치는 '펜 부대'(Pen butai)라고 불리는 정부 후원 작가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 그룹은 접근 금지된 전쟁 지역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그 대가로 일본의 중국 내 전쟁 노력을 호의적으로 서술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는 다이에이 필름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었으며, 1947년부터는 제작 담당 전무 및 감사역을 역임했다. 1960년에는 메이지자 이사 제작부장, 나니와 라쿠텐치 감사역을 맡았다. 1965년에는 일본 예술원 회원(제3부 연극)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미스 유니버스 재팬 대회,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미스 월드 일본 대회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하며 미인 대회 심사에도 참여했다. 도호의 프로듀서 이케노 미츠루의 기획으로 가와구치 마쓰타로, 나카노 미노루, 호조 히데지, 키쿠타 카즈오는 극작가들의 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극작가 4인의 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6. 개인 생활
가와구치 마쓰타로의 후처는 배우 미마스 아이코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배우 가와구치 히로시, 차남은 가와구치 히사시, 삼남은 배우이자 전 메이지자 프로듀서였던 가와구치 아츠시(2008년 57세로 뇌출혈로 사망)이다. 장녀는 전 배우이자 도예가인 가와구치 아키라(본명: 쿠니시게 아키라)이다.
그는 19세에 양부가 사망하고 양모마저 친정으로 돌아가면서 천애고독한 신세가 되었다. 1964년(쇼와 39년)에는 분쿄구 고이시카와 스이도초(현재의 카스가)로 이주하여 사망할 때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거주했다. 그의 자택을 재건축하여 완성된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맨션 '가와구치 아파트먼트'는 현재도 남아있다. 그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 『위대한 조력』에 등장하는 鰊口冗太郎니신구치 조타로일본어의 모델이기도 하다.
7. 수상 경력 및 영예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그의 문학적,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다음과 같은 주요 수상 경력과 영예를 얻었다.
- 1935년(쇼와 10년): 『츠루하치 츠루지로』, 『풍류 후카가와 우타』 등으로 제1회 나오키상 수상.
- 1959년(쇼와 34년): 마이니치 연극상 수상.
- 1963년(쇼와 38년): 제11회 기쿠치 칸상 수상.
- 1969년(쇼와 44년): 『시구레차야 오리쿠』로 제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
- 1973년(쇼와 48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으며,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8. 사망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1982년(쇼와 57년) 1월 18일, 후처 미마스 아이코가 췌장암으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큰 슬픔에 잠겼다. 그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져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아내 미마스 아이코의 사망 3년 후인 1985년(쇼와 60년) 6월 9일, 도쿄여자 의과대학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5세였다.
9. 유산 및 평가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일본 대중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대중의 정서를 깊이 이해하고 표현하며 폭넓은 독자층에게 사랑받았다. 그는 자신을 '스토리텔러'라고 칭하며 이야기의 힘을 중시했고,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연극으로 활발히 각색되어 대중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후에는 만년의 걸작 『이큐상노 몬』의 속편인 『이큐상노 미치』 약 천 매의 원고가 발견되어 신문에 연재되는 등 그의 문학적 열정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그의 묘비는 아사쿠사 센소지 관음당 동쪽의 산샤(三社) 경내에 세워져 있으며, "生きるということむずかしき夜寒かな살아간다는 것 어려운 밤 추위여일본어"라는 그의 하이쿠가 새겨져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구레차야 오리쿠』는 2007년에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해외 독자들에게도 소개되었다.
10. 관련 항목
- 일본의 소설가 목록
- 시대 소설가 및 역사 소설가 목록
- 나오키상
-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 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