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생애는 불우한 유년 시절의 가난과 가족의 비극으로 시작되어, 영화계 입문 후에도 슬럼프와 개인적인 고난을 겪었지만, 끊임없는 예술적 탐구와 투쟁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1.1. 유년 및 성장 과정
미조구치 가문은 원래 평범한 중산층이었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가 군용 우의 판매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면서 큰 재정적 실패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족은 빈곤에 시달렸고, 1905년에는 살던 집까지 압류당해 아사쿠사 다마히메초(현 도쿄도 다이토구 기요카와)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시기 가족은 극심한 빈곤에 처했으며, 식구를 줄이기 위해 누이 스즈를 양녀로 보내야 했다. 이는 사실상 그녀를 게이샤 직업으로 팔아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건은 미조구치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아버지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학대를 목격하며 그는 평생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다.
1905년 사숙인 다가와 학교에 입학했고, 1907년에는 근처에 개교한 이시하마 초등학교로 전학하여 후일 동료가 되는 가와구치 마쓰타로와 동급생이 되었다. 1911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이던 미조구치는 학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자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친척 집으로 보내져 약 6개월을 보냈다. 다음 해인 1912년에 그곳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중학교 진학은 좌절되었다. 여러 양자 제안도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중, 류마티스성 관절염을 앓아 약 1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이 병으로 인해 그는 평생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갖게 되었다.
가족은 누이 스즈의 송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생활도 다소 나아졌다. 1913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미조구치는 스즈의 도움으로 아사쿠사의 유카타 도안 가게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유카타 도안에 불만을 느끼고 니혼바시 하마초의 문양 화가에게 다시 견습을 들어갔다. 이 무렵 가족은 스즈가 아버지의 은신처로 마련해 준 니혼바시 신바바시(현 니혼바시와 가부토초 경계)의 집으로 이사했다. 1914년 12월, 빈곤 속에 고생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에 대한 미조구치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이후 미조구치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지망하며, 1916년 구로다 세이키가 운영하는 아카사카의 아오이바시 양화 연구소에 입학하여 1년간 서양화 기초를 배웠다. 당시 연구소 근처 로열 극장에서 로시가 아사쿠사 오페라를 상연하고 있었고, 연구소가 무대 배경화를 담당하면서 미조구치도 이를 돕다가 오페라에 심취해 아사쿠사 오페라를 자주 관람했다. 또한 요세에서 고담이나 라쿠고를 즐기는 등 에도 시대의 취미에 빠져들었고, 레프 톨스토이,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등의 서양 문학과 오자키 고요, 나쓰메 소세키, 이즈미 교카, 나가이 가후 등의 일본 소설을 탐독했다.
양화 연구소를 졸업한 후에도 그림 공부를 계속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17년, 화류계에 연줄이 넓었던 누이 스즈의 주선으로 나고야시의 도자기 회사 디자인부에 취직했으나, 미조구치는 다음 날 바로 도쿄로 돌아왔다. 이듬해 1918년, 고베 유신일보사에서 광고 도안 담당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긴자의 도쿄 지사에 지원하여 쉽게 채용되었고, 월급 40엔을 받으며 고베시 본사로 부임했다. 그는 광고 수주 등의 일을 하면서도 자작 단가를 신문에 싣거나, 당시 유행하던 신극에 열중했다. 그러나 고베 유신일보도 1년 만에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와 누이 스즈의 집에 얹혀살았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정직이 없던 미조구치를 스즈 등 가족들은 걱정했지만, 그는 일자리를 찾지 않고 도서관과 미술관을 다니거나 아사쿠사에서 오페라와 활동 사진(영화)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1.2. 영화계 입문
1920년, 미조구치는 무코지마에서 비파를 가르치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비파를 배우러 온 닛카쓰 무코지마 촬영소의 배우 도미오카 마사와 친해지게 되었다. 도미오카의 도움으로 무코지마 촬영소에 출입하게 되었고, 이내 신진 감독 와카야마 오사무와 알게 되어 그의 촬영 대본 정서를 돕다가 같은 해 5월 와카야마의 권유로 무코지마 촬영소에 입사했다. 당시 영화 관련 직업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누나는 그의 입사를 반대했지만, 미조구치가 강하게 원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미조구치는 처음에는 배우를 지망했으나, 최고참 감독 오구치 다다시의 감독 조수로 배정되어 배우 수배나 매일 스태프 도시락 영수증 작성 등 잡무를 처리했다.
1922년, 다나카 에이조 감독의 《교야 에리미세》의 조감독을 맡으며 다나카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교야 에리미세》 시사회 후 소속 배우 13명과 사카타 시게노리 등의 감독들이 연대 퇴사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오구치도 닛카쓰를 퇴사하면서 스태프가 부족해졌다. 미조구치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나카의 추천으로 감독으로 승진했다.
1923년 2월, 미조구치는 와카야마의 각본으로 《사랑에 되살아나는 날》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같은 달 2월에는 감독 2번째 작품인 《고향》을 발표했으나, 검열로 인해 심하게 편집되어 어쩔 수 없이 비파극을 삽입하여 공개해야 했다. 미조구치는 5월에 공개된 《패잔의 노래는 슬퍼》로 처음 주목받았고, 7월에 공개된 《안개의 항구》로 신진 감독으로서의 평가를 얻었다.
같은 해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미조구치의 자택도 소실되었고, 아버지와 조카와 함께 무코지마 촬영소로 피신했다. 촬영소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기에 미조구치는 곧바로 회사 명령으로 카메라맨 기가 야스고와 함께 지진 후 시내 실황 필름을 촬영했고, 이어서 지진을 소재로 한 극영화 《폐허 속에서》를 감독했다. 그러나 무코지마 촬영소는 폐쇄가 결정되었고, 11월에 미조구치를 포함한 소속 인원들은 교토시의 다이쇼군 촬영소로 이전했다. 다이쇼군 시대에는 한 달에 한 편꼴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촬영했지만, 대부분이 혹평을 받아 슬럼프 시기로 불렸다.
이 무렵 미조구치는 매일 밤 기온, 폰토초, 기야마치도리 등지에서 술을 마셨는데, 1925년 2월경 기야마치의 야토나(유곽의 낮은 등급 기생)인 이치조 유리코와 친해져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유리코와의 연인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같은 해 5월 말 《붉은 석양에 비추어》의 로케 촬영에서 귀가 후 유리코에게 등 부위를 면도칼로 습격당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이 칼부림 사건은 신문 삼면 기사에 스캔들로 크게 보도되었고, 결국 《붉은 석양에 비추어》의 감독직에서 해임되고 3개월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미조구치는 기소를 면하고 도쿄로 간 유리코를 쫓아가 화해했으나, 결국 헤어지고 교토로 돌아와 9월 닛카쓰에 복귀했다. 다음 해 1926년 공개된 《종이 인형 봄의 속삭임》과 《광염의 여사부》는 슬럼프를 벗어난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았고, 전자는 이 해에 시작된 키네마 준보의 일본 영화 베스트 텐에서 7위에 선정되었다.
1926년 말, 미조구치는 배우 나카노 에이지에게 이끌려 간 오사카의 댄스홀에서 댄서 사가 지에코(본명 다지마 가네)를 알게 되어 점차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지에코에게는 오페라 가수 남편이 있었고, 그를 돌보던 야쿠자 두목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당황한 미조구치는 촬영소 서무과 직원이자 사사이 스에사부로와도 친분이 있던 나가타 마사이치의 도움을 받아 지에코의 신변을 정리하고, 다음 해 1927년 8월 나가타의 중매로 결혼했다. 이 해부터 1928년에 걸쳐 미조구치의 작품 수는 줄어들었고, 건강도 자주 나빠졌다. 1928년 5월에는 촬영소가 다이쇼군에서 우즈마사로 이전했으며, 미조구치는 새 촬영소의 각본 부장에 취임하여 한동안 감독업에서 물러났다. 9월에는 쇼와 천황의 대례 기념 영화를 감독할 예정이었으나, 촬영소 사정으로 연기되었고, 이어서 미조구치의 첫 시대극을 오코치 덴지로 주연으로 찍을 계획도 있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않았다. 1929년 1월 공개된 이즈미 교카 원작의 《니혼바시》로 마침내 감독직에 복귀했으며, 같은 해 주제가와 함께 히트한 《도쿄 행진곡》과 당시 성행하던 좌익 사상을 반영한 내용의 《도회 교향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2. 영화 경력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경력은 무성 영화 시대를 거쳐 유성 영화 시대로 전환하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탐구했고, 전쟁 시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전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까지의 예술적 궤적을 보여준다.
2.1. 무성 영화 시대
1923년 영화계에 입문한 미조구치는 초기에는 탐색적인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유진 오닐, 레프 톨스토이 등의 문학 작품을 각색한 영화들을 제작했다. 그의 작업 속도는 매우 빨라 몇 주 만에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흥행 성적도 좋았다. 그 결과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70여 편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으나, 현재 이들 대부분은 유실되었다. 《광염의 여사부》(1926)는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 상영된 몇 안 되는 일본 영화 중 하나로 상당한 찬사를 받았으나, 현재는 그의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영화 대부분처럼 유실되었다. 이 10년의 끝 무렵, 미조구치는 《도쿄 행진곡》과 《도회 교향악》을 포함한 일련의 좌익 성향의 "경향 영화"를 감독했다. 《붉은 석양에 비추어》(1925)는 현존하는 그의 가장 오래된 영화로 알려져 있다.

2.2. 유성 영화 시대
1929년 5월 이후 일본에서는 미국의 토키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곧바로 국내에서도 토키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1930년 미조구치도 미나 토키 방식을 사용하여 부분적으로 노래나 대사를 넣은 파트 토키 작품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을 촬영했으나, 잡음이 많아 기술적으로는 실패했다. 1932년에는 자신의 첫 올 토키 작품 《때의 씨앗》을 촬영했으나, 촬영 종료 직후 4월 4일 닛카쓰를 퇴사하고 시라이 신타로의 초청으로 신흥 키네마로 이적했다. 이 회사에서 첫 작업은 이리에 다카코의 독립 프로덕션인 이리에 프로덕션의 첫 작품 《만주몽골 건국의 여명》(1932)으로, 2개월간 만주 각지에서 로케 촬영을 했으나, 편집 작업이 너무나 복잡해 도중에 편집을 포기하고 잠적했다고 전해진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이리에 프로덕션에서 이즈미 교카 원작의 《폭포의 흰 실》(1933)을 촬영했다. 이 작품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서 2위에 선정되어 무성 영화 시대 미조구치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1934년 3월, 미조구치는 신흥 키네마와의 계약 만료로 퇴사하고, 닛카쓰의 제작 부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의 요청으로 닛카쓰 다마가와 촬영소에 입사했다. 그곳에서는 야마다 이스즈 주연의 《애증 고개》만을 찍었고, 8월 22일 나가타가 닛카쓰를 퇴사하자 미조구치도 그를 따라 9월 나가타 등과 함께 다이이치 영화사 창립에 참여했다. 이 회사에서는 이즈미 교카 원작의 《학 오센》(1935)을 비롯해 《마리아의 오유키》, 《우미인초》(1935) 등을 촬영했으나, 모두 저조한 평가를 받아 다시 슬럼프에 빠졌다. 1936년 공개된 《나니와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들》은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서 전자가 3위, 후자가 1위에 선정되며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기시 마쓰오는 이 두 작품을 "일본 영화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다"고 평가했고, 사토 다다오는 "그전까지도 베테랑으로 존경받던 미조구치를, 더욱 거장이라는 최고급 호칭으로 불리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니와 엘레지》는 그의 첫 번째 완전 토키 영화이기도 하며, 각본가 요다 요시카타와의 오랜 협력의 시작을 알렸다. 미조구치 자신은 이 두 영화를 예술적 성숙을 이룬 작품으로 꼽았다.
1939년, 미조구치가 일본 영화감독 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해에 《마지막 국화 이야기》가 개봉했다. 이 작품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그의 전전 최고작으로, 혹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는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면서 가부키 배우로서 예술적 성숙을 이루려는 파트너를 지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2.3. 전쟁 시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조구치는 애국적인 성격으로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전 사무라이 이야기인 《겐로쿠 주신구라》(1941-42)를 재해석한 대작 시대극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작품들을 그가 압력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자발적으로 행동했다고 믿는다. 동료 각본가 가와구치 마쓰타로는 1964년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 인터뷰에서 미조구치(그는 다른 면에서는 미조구치를 높이 평가했다)를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예술적 "기회주의자"라고 부르며, 좌익에서 우익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민주주의자가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1년은 또한 그의 아내 지에코(1927년 결혼)가 영구 입원하게 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아내가 성병에 걸렸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지에코는 기세가 강하고 성격이 격렬한 여성이었으며, 미조구치에게 막말을 하거나 월급을 모두 가져가 용돈조차 제대로 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조구치의 작품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비평해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때로는 격렬하게 다투기도 했지만, 미조구치는 아내에게 약했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아내의 병을 알게 된 미조구치는 오열했지만,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후 곧바로 촬영 현장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촬영을 계속했다. 미조구치는 아내의 병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 후에도 계속 고민했다. 지에코는 평생 병원을 나가지 못했지만, 미조구치는 이후 지에코의 남동생의 미망인인 다지마 후지를 사실상의 아내로 맞이하여 두 딸을 양녀로 삼았다.
1942년, 미조구치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일본 영화감독 협회는 전시 통합으로 해산되어 국책 단체인 대일본영화협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미조구치는 이 협회의 이사로 취임했다. 이 무렵 미조구치의 영화 제작은 난항을 겪어 오다 사쿠노스케의 각본으로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려 하거나, 다이카 개신을 다루는 작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1943년, 군부의 요청으로 쇼치쿠가 기획한 일화 친선 영화 《되살아나는 산하》의 감독을 맡게 되어 상하이로 약 한 달간 시찰 여행을 했다. 이 시찰 여행은 군의 위촉에 의한 것이었지만, 미조구치는 군속으로서의 대우가 장관 대우가 아니라 사관인 것에 불만을 표명했고, "상하이 육군 보도부장이 대좌인데, 미조구치가 장관 대우로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납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도 로케이션의 어려움과 막대한 제작비 등의 이유로 제작이 연기되었다. 이후 전황이 크게 기울어 물자 부족으로 극영화 필름 사용이 제한되는 가운데, 《단주로 3대》, 《미야모토 무사시》(1944), 《명검 비녀마루》(1945)와 같은 1시간 정도의 중편 영화를 촬영했고, 나아가 정보국 모집 국민가 선전 영화 《필승가》(1945)를 공동 감독했으나, 이 모든 작품들은 실패작으로 간주된다.
2.4. 전후 활동 및 국제적 명성

종전 후인 1946년, 미조구치는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쇼치쿠 오후나 촬영소에 불려가 《여성의 승리》를 촬영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쇼치쿠 직원 조합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 인사에서 느닷없이 "이후 제군에게 명령하겠습니다"라고 말해 조합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미조구치는 곧바로 조합 업무에서 손을 떼고 교토로 돌아가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1946), 《여배우 스마코의 사랑》(1947)을 촬영했으나, 모두 혹평을 받아 전중부터 이어져 온 슬럼프가 계속되었다. 특히 마쓰이 스마코가 주인공인 《여배우 스마코의 사랑》은 키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도호 작품 《여배우》(1947)와 경합을 벌였으나, 평가는 《여배우》 쪽에 집중되어 작품적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1948년 공개된 《밤의 여인들》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서 3위에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아 미조구치의 부활을 인상 깊게 만들었으나, 다음 해 1949년 공개된 《내 사랑은 불탔었지》는 다시 실패작이 되어 원래의 저조한 상태로 돌아갔다.
1949년 5월, 일본 영화감독 협회가 임의 단체로 재건되었고, 미조구치는 다시 그 회장에 취임했다(다음 1950년에 협회는 사업 협동조합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미조구치의 직함은 회장에서 이사장으로 변경되었다). 이 무렵 미조구치는 6대 오노에 기쿠고로 주연으로 쇼치쿠가 기획한 《명공 가키에몬》의 감독으로 결정되었으나, 같은 해 7월 기쿠고로의 사망으로 중지되었다. 또한 하라 세쓰코 주연으로 예정되었던 《미모와 백치》도 중지되었고, 그 다음으로 전시 중부터 영화화를 희망했던 이하라 사이카쿠 원작의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에 착수하려 했으나, 이 또한 쇼치쿠와 의견이 맞지 않아 중지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 1950년에 쇼치쿠를 퇴사했다.
종전 직후 초기 몇 년간, 미조구치는 역사적(주로 메이지 시대) 및 현대적 배경 모두에서 여성의 억압과 여성 해방에 관한 일련의 영화들을 감독했다. 이 모든 영화는 요다가 각본을 쓰거나 공동 각본을 맡았고, 종종 다나카 기누요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다나카는 미조구치가 자신의 첫 영화 감독을 막으려 했을 때 그와 불화를 겪기 전인 1954년까지 그의 주연 배우로 활동했다.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1946)은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제작된 에도 시대 시대극 중 주목할 만한 예외였는데, 이 장르가 연합군 검열관들에 의해 본질적으로 국수주의적이거나 군국주의적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작품 중 《내 사랑은 불탔었지》(1949)는 주제를 굽히지 않고 표현한 것으로 여러 번 지적되었다. 다나카는 자신의 전통주의적 환경을 떠나 여성 해방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파트너조차 남성 우월주의적 태도를 여전히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 젊은 교사를 연기했다.
미조구치는 1952년 《오하루의 일생》, 1953년 《우게쓰 이야기》, 1954년 《산쇼 다유》를 통해 봉건 시대 배경으로 회귀했으며, 이 작품들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특히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비평가들인 장뤼크 고다르,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오하루의 일생》은 에도 시대 황실에서 추방된 한 여성의 사회적 몰락을 따라가며, 《우게쓰 이야기》와 《산쇼 다유》는 전쟁과 폭력적 통치가 소규모 공동체와 가족에게 미치는 잔혹한 영향을 탐구한다. 이 세 영화 사이에는 1953년 교토의 전후 환락가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압박을 다룬 《게이샤》를 감독했다. 컬러로 촬영된 두 편의 역사 영화(《신 헤이케 이야기》와 《양귀비》, 모두 1955년) 이후, 미조구치는 마지막 영화인 1956년 《적선지대》에서 다시 한번 현대적 배경(요시와라 지구의 매춘굴)을 흑백으로 탐구했다.
2.5. 말년

쇼치쿠를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 미조구치는 신도호와 다키무라 가즈오 프로덕션의 제휴로 후나하시 세이이치 원작의 《유키 부인 그림》(1950), 옛 지인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사장을 맡은 다이에이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의 《오유우님》(1951), 도호에서 오오카 쇼헤이 원작의 《무사시노 부인》(1951)을 촬영했으나, 이 세 편 모두 실패작이 되어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키 부인 그림》 당시 감독료는 200.00 만 JPY으로,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고액 연봉의 감독이 되었다. 1951년 7월 《무사시노 부인》 공개 직후에는 크레딧에 '감독'이 아닌 '연출'로 표기된 것에 대해 일본 영화감독 협회를 통해 크레딧 표기를 '감독'으로 통일할 것을 각 회사에 철저히 요구하며, 영화 감독의 권한과 표현의 자유를 지킬 것을 주장했다.
1951년 9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이 제1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에 강한 자극을 받은 미조구치는 숙원 사업이었던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를 신도호와 코이 히데오 프로덕션의 제휴로 촬영했다. 이 작품은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같은 해 제1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은 미조구치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전후의 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미조구치는 도호와의 계약 한 편을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시자카 요지로의 단편 소설 《미운 것》의 영화화에 착수했으나, 시나리오를 둘러싸고 도호와 의견이 대립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도호와의 계약이 미완료인 채로 같은 해 가을 다이에이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1953년, 미조구치는 다이에이 전속 첫 작품으로 우에다 아키나리 원작의 《우게쓰 이야기》를 촬영했다. 이 작품 또한 제1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미조구치는 《기온바야시》 촬영 후인 8월, 각본가 요다 요시카타와 주연 배우 다나카 기누요 등과 함께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니치렌 종 신도인 미조구치는 체류하던 호텔 방에 니치렌상 축을 걸어 수상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우게쓰 이야기》는 2등상인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해는 황금사자상 시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최고상이 되었다. 다음 1954년에는 모리 오가이 원작의 《산쇼 다유》가 제1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여 3년 연속 영화제 수상 기록을 세웠다. 이 해에는 《소문의 여자》와 지카마쓰 몬자에몬 원작의 《근친 이야기》도 촬영했으며, 후자로는 블루 리본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 일본 영화계에는 컬러 영화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미조구치도 1954년 6월 나가타 마사이치와 카메라맨 미야가와 카즈오 등과 함께 컬러 영화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음 1955년에는 자신의 첫 컬러 영화로 다이에이와 쇼 브라더스의 합작 영화 《양귀비》를 촬영했고, 이어서 두 번째 컬러 영화인 요시카와 에이지 원작의 《신 헤이케 이야기》를 촬영했다. 이 두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양귀비》는 제16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 4년 연속 수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다이에이 이사 1명 결원 보충에 키누가사 데이노스케와 함께 후보에 올랐으나, 키누가사가 사퇴하여 9월 주주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다이에이 이사로 취임하며 중역 감독이 되었다. 10월에는 일본 영화감독 협회 이사장직을 오즈 야스지로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수훈장을 수훈했다.
3. 작품 세계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 세계는 봉건적 사회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희생되는 여성의 삶과 저항을 주요 주제로 다루며, 독특한 영상 스타일과 완벽주의적인 제작 방식을 통해 깊이 있는 리얼리즘과 탐미적 미학을 구현했다.
3.1. 주요 주제
미조구치가 그리는 여성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남성에게 헌신하고 사회의 희생이 되어 몰락하거나 극도로 비천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을 잊지 않는 한결같은 여성, 즉 남성의 입신양명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고 자기희생을 이루는 여성이다. 이러한 예는 《마지막 국화 이야기》, 《우게쓰 이야기》, 《산쇼 다유》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즈미 교카 원작의 《니혼바시》, 《폭포의 흰 실》, 《학 오센》에서도 여성 예인이나 게이샤가 젊은 남성의 출세를 돕고 그 희생으로 몰락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두 번째 유형은 마찬가지로 사회나 남성의 희생이 되지만, 그러한 사회나 운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여성으로, 《나니와 엘레지》, 《기온의 자매들》, 《밤의 여인들》, 《적선지대》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매춘부나 게이샤와 같은 몰락한 여성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남성 인물은 여성을 돕는 데 무력하거나 여성에게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고, 강하고 든든한 남성다운 남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미조구치 영화는 인간의 타락 가능성과 정신적 타락을 그려내어, 새로운 인본주의의 탄생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다.
3.2. 영상 스타일
미조구치 겐지의 가장 특징적인 촬영 기법은 숏을 나누지 않고 카메라를 롱 테이크함으로써 현실의 시간을 그대로 포착하는 "원 장면-원 샷" 촬영 방식과, 클로즈업을 극력 배제하고 롱샷이나 풀샷을 다용한 것이다. 그가 이 기법을 채택한 이유는 숏을 나누면 연기의 흐름이 중단되는 것을 싫어했고, 클로즈업이나 크로스커팅 등의 기법을 사용하면 "속임수"가 통하여 완전한 연기를 요구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조구치가 처음으로 원 장면-원 샷을 사용한 작품은 《도진 오키치》(1930)이며,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남녀가 밤의 뱃길을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계속 걸으며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노면보다 낮은 뱃길 안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각도로 카메라를 잡고 5분 이상의 롱 테이크 이동 촬영을 진행한다. 물 흐르듯 능숙한 이동 촬영 또한 미조구치의 특징적인 촬영 기법이다. 그는 특히 크레인 샷을 사용한 이동 촬영을 선호하여, 크레인이 필요 없는 촬영에서도 일부러 크레인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회화에서 출발한 감독으로서 미조구치 겐지는 화면 구도에 매우 신경을 썼다. 그의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인 목적과 사회적 환경을 나타내는 하나의 완성된 그림처럼 보였다. 카메라워크와 연기자의 움직임은 그의 "원 장면-원 샷" 기법과 결합하여 장면의 연속성과 깊이를 부여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관객과 캐릭터 사이에 미묘한 공감을 형성하며 독특한 형식미가 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았다. 그의 작품은 일본 전통 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탐미적이다.
3.3. 제작 방식

미조구치는 완벽주의자였으며, 항상 배우와 스태프에게 최선을 다해 고도의 작업을 할 것을 요구했다. 배우의 연기를 짜내고, 스태프에게 무리한 주문을 하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찍게 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세세하게 지시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모든 문제 해결 방식은 배우와 스태프에게 맡기고 그 답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미조구치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생각하고 노력하며 방법을 궁리하게 한 후에 수정하고 결정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냈다. 그는 배우나 스태프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가차 없이 배역에서 제외시켰다. 이 때문에 미조구치는 종종 "가학주의자", "폭군", "고테켄('불평불만을 말하다'는 뜻의 '고테루'에서 유래)" 등으로 불렸다.
각본은 직접 쓰지 않고 요다 요시카타나 나루사와 마사시게 등의 각본가에게 맡겼다. 미조구치의 각본 작업 방식은 각본가가 쓴 초고를 혹평하고, 거기서부터 몇 번이고 다시 쓰게 하여 자신이 마음에 드는 각본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때로는 완성까지 10번 이상 고쳐 쓰기도 했다。 최종고가 완성된 후 촬영을 시작하더라도 촬영 현장에 각본가를 불러 대사를 수정시켰다. 그럴 때면 당일 촬영할 장면의 대사를 칠판에 쓰고, 협의하면서 배우에게 대사를 시켜 보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고쳤다. 또한 미조구치는 콘티를 만들지 않고, 촬영 현장에서 리허설하는 배우의 움직임을 보면서 카메라의 앵글이나 포지션, 샷의 길이를 결정했다.
리얼리즘을 지향했던 미조구치는 영화 미술에서도 실제 소품을 사용하거나, 스태프에게 그 시대의 풍속이나 생활 양식 등을 철저히 조사하게 하여 완벽함을 추구했다. 미조구치는 《도진 오키치》에서 시대 고증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1930년대에 메이지 시대물을 만들 무렵부터 고증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소품인 램프 하나에도 세세하게 주문하며 하루 종일 고집을 부린 적도 있다고 한다. 미술, 의상, 건축 등의 고증에 전문가를 초빙하는 일도 많았는데, 일본 화가 카이쇼 쿠스오를 시대 풍속과 의상 고증에 여러 번 기용했고, 《광염의 여사부》에서는 미술 고증에 코무라 셋타이를,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는 미술 고증에 키무라 쇼하치를, 《겐로쿠 주신구라》에서는 무가 건축 고증에 오쿠마 기호를, 민가 건축 고증에 후지타 모토하루를 기용했다. 이러한 미조구치의 미술에 대한 완벽 추구가 정점에 달한 작품이 《겐로쿠 주신구라》이다. 이 작품에서는 철저한 사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주신구라를 지향하여, 오쿠마 기호가 소유한 에도성 평면도를 바탕으로 마쓰노 로카 세트를 실물 크기로 재현했다.
배우에게 연기 지도를 할 때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고 "한번 해 보세요"라고만 말했으며, 나머지는 만족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까지 같은 연기를 몇 번이고 다시 시켜 배우 스스로 연기와 움직임을 궁리하게 했다. 고민하던 배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면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세요. 당신은 배우잖아요"라고 되받아쳤다. 미조구치는 구체적인 연기 지도 대신, "반사하고 있습니까?"라고 배우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이 말은 배우가 상대방의 대사나 움직임에 반응하여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기를 다시 시키는 것은 수십 번에 달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양귀비》에서는 야마무라 소치에게 원 컷에 42번의 테스트를 반복시켰고, 《적선지대》에서는 미마스 아이코의 무대적인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80번이나 테스트를 시켰다. 또한 그는 배우들에게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분라쿠 세계를 다루는 《나니와 온나》에서는 주연 다나카 기누요에게 많은 분라쿠 전문 서적을 읽고 공부할 것을 지시했고, 《산쇼 다유》에서도 여노예 역의 가가와 교코에게 중세 일본의 노예 제도의 역사서와 경제사 책을 읽을 것을 요구했다.
미조구치는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종 격노하며, 때로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내 사랑은 불탔었지》에서는 스가이 이치로가 조금 긴 대사를 다 소화하지 못하자 화를 내며, 스가이의 머리를 슬리퍼로 때리고 "정신병원에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에서는 주연 기타미 레이코의 아이 달래는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 아이 안는 방식이 달라요.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어서"라고 말하며 배역에서 제외시켰다. 《우게쓰 이야기》에서도 병사들에게 윤간당하는 여성을 연기한 미토 미쓰코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당신은 대체 (윤간당한) 경험이 없습니까?"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양귀비》에서는 이리에 다카코의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뭡니까 그 연기는. 그건 고양이, 고양이 연기예요"라고 비난했다. '고양이 연기'는 당시 이리에가 주연한 요괴 고양이 영화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요괴 고양이 영화는 저속한 영화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왕년의 대스타 이리에가 몰락했다는 식으로 여겨졌다. 미조구치는 이리에에게 몇 번이고 연기를 시켰지만 불쾌한 태도로 OK를 내주지 않았고, 이리에는 그 뜻을 이해하고 스스로 하차했다. 미조구치는 과거 이리에의 프로덕션에서 《폭포의 흰 실》을 만들어 성공시켜 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 스태프와 배우들은 미조구치가 너무나 냉혹하다고 비판했다.
미조구치의 제작 방식은 배우와 스태프에게 최고의 긴장감을 강요하는 것이었지만, 미조구치 자신도 작품의 분위기에 몰입하며 긴장감을 조성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촬영 현장의 긴장감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촬영 중에는 온종일 현장의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았으며, 점심시간에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스튜디오에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스튜디오 한구석에서 볼일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우게쓰 이야기》 촬영에서는 이동 촬영용 크레인의 감독석에 앉아 있던 미조구치가 긴장감으로 인해 강하게 난간을 움켜쥐고 미세하게 떨었고, 그 진동이 카메라에까지 전달되어 화면이 미묘하게 흔들리자, 카메라맨 미야가와 카즈오의 제안으로 크레인 감독석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3.4. 미조구치 팀

미조구치는 마음이 맞는 스태프나 같은 배우를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미조구치 팀"으로 불렸다. 미조구치 팀의 대표적인 인물과 참여 본수는 다음과 같다 (스태프는 3본 이상, 출연자는 5본 이상 참여자만 기재).
- 각본: 요다 요시카타(23본), 하타모토 슈이치(20본), 가와구치 마쓰타로(9본), 나루사와 마사시게(3본)
- 촬영: 요코타 다쓰유키(27본), 미키 시게토(16본), 미야가와 카즈오(8본), 아오시마 준이치로(7본), 스기야마 고헤이(6본)
- 미술: 가메하라 요시아키(25본), 미즈타니 히로시(21본)
- 기타 스태프: 사카네 다즈코(조감독, 편집, 기록, 19본), 하야사카 후미오(음악, 8본), 카이쇼 쿠스오(고증, 8본), 오타니 이와오(녹음, 7본), 오카모토 겐이치(조명, 7본)
- 배우: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16본), 다나카 기누요, 스가이 이치로(15본), 신도 에이타로(12본), 나카노 에이지, 사카이 요네코(10본), 다나카 하루오(9본), 나쓰카와 시즈에, 시미즈 마사오(8본), 이리에 다카코, 야마다 이스즈(7본), 사와무라 하루코, 카와즈 세이자부로, 모리 키쿠에(6본), 오카다 요시코, 오카다 도키히코, 야마지 후미코, 야나기 에이지로, 오자와 에이타로(5본)
그 중 미조구치가 가장 신뢰했던 인물은 각본가 요다 요시카타와 미술 감독 미즈타니 히로시이다. 미조구치는 두 사람을 "내 육체의 일부 같은" 존재라고 부르며, "내가 이래라 저래라 구두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해 준다"고 말했다. 특히 요다는 《나니와 엘레지》에서 처음 함께 작업한 이래 약 20년 동안 미조구치 작품의 각본을 쓰며 미조구치의 안방마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가와구치 마쓰타로도 미조구치 팀의 각본가였으며, 연극 제작의 요령을 잘 알았기에 미조구치의 좋은 조언자도 되어, 미조구치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가와구치에게 상담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촬영의 미야가와 카즈오, 음악의 하야사카 후미오, 조명의 오카모토 겐이치, 녹음의 오타니 이와오가 신뢰할 만한 스태프가 되었다. 배우 중에서는 《나니와 온나》에서 처음 기용한 다나카 기누요가 그 이후 미조구치 작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연기자가 되었다. 미조구치는 다나카에게 연정을 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으며, 전후에는 결혼설이 돌기도 했다.
미조구치의 제자가 된 주요 인물로는 사카네 다즈코와 신도 카네토가 있다. 사카네는 《게다가 그들은 간다》 이래 미조구치를 사사하며 감독 조수, 스크립터, 편집을 맡았다. 미조구치 작품에서 장식을 담당했던 아라카와 다이의 말에 따르면, 미조구치는 "사카네는 내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각본도 고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카네는 1936년 《첫 모습》을 감독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영화 감독이 되었는데, 미조구치는 이 작품에서 감독 보조를 맡았다. 신도 카네토는 《애원 협》과 《겐로쿠 주신구라》에서 미술 조수를 맡은 이래 미조구치에 경도되었고, 미조구치에게 시나리오 집필을 사사했다. 이때의 고생은 신도의 첫 감독작 《애처 이야기》(1951)에서 그려졌고, 미조구치를 모델로 한 대감독(다키자와 오사무 연기)도 등장한다. 신도는 각본가로서 독립한 후 미조구치의 《여성의 승리》와 《내 사랑은 불탔었지》에 각본을 제공했고, 감독이 된 후에도 "미조구치가 절대 착상할 수 없는 대본을 쓰자"고 의식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신도는 1975년 미조구치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기록 영화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을 제작했다.
4. 개인사

미조구치는 촬영 현장에서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욕설을 퍼붓는 엄격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생활에서는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인물이었으며, 일터와 사생활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런 미조구치에게는 대학교수나 경찰 등 권위적인 존재에게 약한 면모도 있었고, 그 때문에 작품의 고증에 학자나 전문가 등 권위자들을 자주 기용했다. 미조구치는 실제 소품을 요구하는 등 미술 고증에 집착했지만, 스태프가 유명 연구소나 대학이 인정한 소품이라고 우기면, 비록 가짜였을지라도 믿어버렸다고 한다.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의 제작자 코이 히데오에 따르면, 미조구치 팀의 미술 감독 미즈타니 히로시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실제 소품을 구할 수 없더라도 태연히 가짜를 준비하고, 훌륭한 오동나무 상자에 넣거나 인증서를 붙이기만 하면 미조구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화를 내면 오른쪽 어깨가 치솟는 버릇이 있었고, 걸을 때도 오른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촬영 현장에서도 배우의 연기가 테스트를 거듭해도 잘 안 되거나 기분이 나빠지면 점점 오른쪽 어깨가 치솟았다고 한다. 다른 신체적 특징으로는 등에 약 3 cm 길이의 칼자국이 있었다. 이는 1925년 애인에게 칼에 찔린 사건 때 생긴 상처이다.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등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우치카와 세이이치로에 따르면, 미조구치와 함께 목욕하다가 등에 난 칼자국을 보고 놀랐는데, 이에 대해 미조구치는 "자네, 이런 걸로 놀라면 안 돼. 이런 걸 겪어야 여자들을 그릴 수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조구치는 젊을 때부터 고미술을 좋아하여, 한가할 때면 교토나 나라의 불상을 보러 다니거나, 후년에는 요다 요시카타 등과 함께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회에 가기도 했다. 영화 제작에서 《도진 오키치》 무렵부터 시대 고증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하품(粗雑な作りの素朴で大衆的な品物)과도 비슷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어 서화 골동품에서 몇 번이나 가짜를 속아 넘어갔고, 오쿠보 다다모토에게 "가짜 골동품 바람동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말년에는 전서체 글씨 쓰기에도 몰두했다. 또한 미조구치는 독서가이기도 하여, 대체로 다른 사람이 추천한 책을 마구잡이로 읽었지만, 일이 없을 때는 새벽 2시나 3시까지 독서하여 늦잠을 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미조구치는 술을 좋아했지만, 주정을 부리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면 물건을 부수거나 하여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했다고 한다. 미조구치의 친구인 곤다이보 고로에 따르면, 미조구치와 교토의 기루에서 술을 마시던 중 미조구치의 주정이 너무 시끄러워 재미 삼아 술에 취한 미조구치를 중정의 돌등롱에 묶어놓았는데, 미조구치는 그 후 2시간 가까이 묶인 채 잠들었다고 한다. 전후 오다 사쿠노스케와 요정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할 때도, 오다가 "저도 요즘은 사이카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취한 미조구치가 갑자기 "사이카쿠를 네가 알겠나. 네까짓 게 어떻게 알아!" 하고 화를 내며 오다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미조구치는 말리러 들어온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옆방에 소변을 보았는데, 그 방 손님이 쇼치쿠 시절 신세를 진 시라이 신타로였던 것을 알고는 바로 술이 깼다고 한다.
5. 죽음
1956년, 미조구치는 마지막 감독 작품인 《적선지대》를 촬영했는데, 그 전후로 좋아하는 술이 맛없다고 하거나 잇몸에서 피가 나는 등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이 작품 완성 후, 미조구치는 다음 작품으로 《오사카 이야기》의 제작 준비를 시작했으나, 이때도 저녁이 되면 미열이 나고 발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5월에 제작 준비를 중단하고 교토부립 의과대학 부속 병원의 특별 병동에 입원했다. 미조구치는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았으나, 병명은 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나가타 마사이치 등 다이에이 수뇌부에만 알려졌다. 미조구치는 매일 수혈을 받았지만, 백혈병은 불치병이었기에 회복되지 못하고 8월 24일 오전 1시 55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전날에는 "이제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빨리 촬영소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미조구치 작품의 미술 감독을 맡았던 미즈타니 히로시는 미조구치의 사망 당일에 데스 마스크를 제작했다.
8월 30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다이에이 주관으로 회사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법명은 조코인덴 에이토쿠닛켄 거사이다. 묘소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의 자원(子院)인 다이보 혼교지에 세워졌다. 교토의 만간지에도 분골되어 비석이 세워졌는데, 나가타 마사이치가 비석 측면에 "세계적 명감독"이라고 새기게 했다. 미조구치의 부고는 마침 열리고 있던 제1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회장에도 전해져, 출품되어 있던 《적선지대》 상영에 앞서 추도사가 헌정되었다. 촬영까지 이르지 못했던 《오사카 이야기》는 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케이 신문사 주최로 일본 영화 최우수 작품의 감독과 스태프에게 주어지는 '미조구치 상'이 창설되었으나, 시상은 불과 3회로 종료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미조구치는 1930년대부터 일본 영화계에서 굴지의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키노시타 케이스케 등과 함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6.1. 비평적 평가
일본의 영화 비평가들로부터는 여성을 그리는 데 가장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와사키 아키라는 "일본 영화 작가 중에서 여성을 그린 이가 결코 적지 않지만, 아직도 미조구치 이후 미조구치 이전과 같은 이가 없다"고 평했으며, 츠무라 히데오 또한 "인생 유전의 극한에서 인간의 모습,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는 당대에 견줄 자 없는 명인"이라고 평했다. 영화 감독 이치카와 곤은 "얼핏 여성을 보는 눈이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따뜻한 부분이 있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도 높이 평가받으며, 특히 《나니와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들》은 일본 영화에 본격적인 리얼리즘이 확립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후에는 "원 장면-원 샷 기법 때문에 템포가 느리다", "소재가 고루하고 전근대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6.2. 후대에 미친 영향
1950년대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작품이 수상한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영화 비평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동인이자 작가주의 비평을 펼친 젊은 비평가들인 장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미조구치를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발표하는 연간 작품 톱 텐에서는 1959년에 《우게쓰 이야기》가 1위에 선정되었고, 다음 1960년에는 《산쇼 다유》도 1위에 선정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미조구치를 일본 영화나 서양 영화라는 틀을 넘어선, 세계 공통의 영화 언어인 미장센을 가진 보편적인 영화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고다르는 미조구치를 "가장 위대한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경도되었고, 1966년 일본 방문 시 미조구치의 비석을 찾기도 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1950년대 후반 영화 감독이 되어 누벨 바그의 기수로 활약했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도 미조구치 작품의 영향이 엿보였다. 리베트의 《수도녀》(1966)는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독 자신이 분명히 밝혔다. 고다르는 《경멸》(1963)의 후반부 바다로 패닝하는 장면에서 《산쇼 다유》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다.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사한 오마주를 했으며, 더 나아가 《메이드 인 USA》(1966)에서는 코사카 교코가 연기하는 "도리스 미조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누벨 바그 외의 감독들 중에서는 미조구치와 마찬가지로 롱 테이크와 이동 촬영에 능숙한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그 스타일에서 미조구치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또한 미조구치의 유려한 카메라워크에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게쓰 이야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그 외에도 장 유스타슈, 오슨 웰스, 빅토르 에리세,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코세이지, 아리 애스터 등의 감독들이 미조구치를 높이 찬양하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톰슨은 "감정적인 생각이나 지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미조구치 영화에서 파생된 영화의 정의이다. 그는 외적 시야에서 내적 상태를 구현하는 데 최고이다"라고 썼다.
1975년, 미조구치 밑에서 세트 디자이너, 수석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던 신도 카네토는 그의 스승에 관한 다큐멘터리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을 개봉했으며, 1976년에는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신도는 그의 자전적인 데뷔 영화 《애처 이야기》(1951)에서도 젊은 시나리오 작가를 키우는 감독 "사카구치" 캐릭터를 통해 미조구치를 언급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사이트 & 사운드》지의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우게쓰 이야기와 산쇼 다유), 키네마 준보의 "키네마 준보 비평가 톱 200"(오하루의 일생, 우게쓰 이야기, 근친 이야기)과 같은 "최고의 영화" 설문 조사에 꾸준히 등장했다. 2014년 움직이는 이미지 박물관과 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그의 현존하는 영화 30편 회고전이 여러 미국 도시를 순회하기도 했다.
6.3. 수상 경력
- 1936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일본 영화 베스트 텐 1위 (《기온의 자매들》)
- 195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국제상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1953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쓰 이야기》)
- 195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산쇼 다유》)
- 1954년: 블루 리본상 감독상 (《근친 이야기》)
- 1955년: 예술선장 (《근친 이야기》)
- 1955년: 자수훈장
- 1956년: 훈4등 서보장 (사후 추서)
- 1956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특별상 (사후 수상)
- 1956년: 블루 리본상 일본 영화 문화상 (사후 수상)
7. 작품 목록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 목록에는 그의 초기 무성 영화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기 유성 영화, 그리고 감독 외의 다양한 참여작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현재 유실된 상태이다.
7.1. 감독 작품
아래 목록에서 '×' 표시는 필름이 현존하지 않는 유실 영화를, '〇' 표시는 무성 영화를, '□' 표시는 사운드판 영화를, '◎' 표시는 컬러 영화를 의미한다.
연도 | 영화 제목 | 로마자 표기 | 제작사 | 각본 | 주연 배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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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영화, 흑백 | ||||||
1923 | 사랑에 되살아나는 날 | Ai ni yomigaeru hi | 닛카쓰 도쿄 | 와카이 오사무 | 야마모토 가이치, 모리 기요시, 오구리 다케오, 고이즈미 가스케 | 60분 ×〇 |
고향 | Kokyō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요시다 도요사쿠, 오구리 다케오, 미나미 미쓰아키 | ×〇 | ||
청춘의 꿈길 | Seishun no yumeji | 요시무라 데쓰야, 미야지마 후미오, 사카이 요네코 | ×〇 | |||
정염의 항구 | Jōen no chimata | 미나미 미쓰아키, 모리 기요시, 미마스 유타카, 오구리 다케오 | ×〇 | |||
패잔의 노래는 슬퍼 | Haizan no uta wa kanashi | 요시다 도요사쿠, 사와무라 하루코, 미야지마 후미오 | ×〇 | |||
813 | 다나카 소이치로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미쓰아키, 호시노 히로키, 아오야마 마리코, 세가와 쓰루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안개의 항구 | Kiri no minato | 다나카 소이치로 | 이치카와 하루에, 사와무라 하루코, 모리 에이지로,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밤 | Yoru | 미조구치 겐지 | 가쓰라기 고이치, 호세 가오루, 사카이 요네코, 이나가키 히로시, 고미 구니오 | ×〇 | ||
폐허 속에서 | Haikyo no naka | 사와무라 하루코, 가쓰라기 고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피와 영혼 | Chi to rei | 에구치 지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미즈시마 료타로, 사카이 요네코, 미마스 유타카 | ×〇 | |||
고갯길의 노래 | Tōge no uta | 닛카쓰 교토 | 야마모토 가이치, 사와무라 하루코, 미마스 유타카, 호리 다카코,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1924 | 슬픈 백치 | Kanashiki hakuchi | 다카시마 다쓰로 | 고이즈미 가스케, 사카이 요네코, 가쓰라기 고이치, 다카기 마스지로 | ×〇 | |
새벽의 죽음 | Akatsuki no shi | 닛키 | 이토 마쓰오 | 고이즈미 가스케, 스즈키 우타코, 사와무라 하루코, 기타 시게루,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현대의 여왕 | Gendai no joō | 닛카쓰 교토 | 무라타 미노루 | 사카이 요네코, 미나미 미쓰아키, 미마스 유타카 | ×〇 | |
여성은 강하다 | Josei wa tsuyoshi | 닛카쓰 문학회 |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마쓰모토 시즈에, 미야베 시즈코, 기타 시게루 | ×〇 | ||
티끌 세계 | Jinkyō | 다나카 소이치로 | 스즈키 덴메이, 다카기 에이지, 우라베 쿠메코 | ×〇 | ||
칠면조의 행방 | Shichimenchō no yukue | 하타모토 슈이치 | 기타무라 준이치, 다카기 에이지, 도쿠가와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이토 순경의 죽음 | Itō junsa no shi | 닛카쓰 문학회 | 사토 엔지, 하야시 마사오 | ×〇 | ||
장마철 일기 | Samidare zōshi | 고주 요코야마 | 스즈키 우타코, 가쓰라 데루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사랑을 끊는 도끼 | Koi o tatsu ono | 구스야마 리쓰 | 우라베 쿠메코, 와카바 가오루, 미마스 유타카, 고이즈미 가스케 | ×〇 | ||
환락의 여인 | Kanraku no onna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곡예단의 여왕 | Kyokubadan no joō | 우라베 쿠메코, 스즈키 덴메이, 곤도 이요키치 | ×〇 | |||
1925 | 아, 특무함 간토 | Ā tokumukan Kantō | 나카무라 히데오, 나카하라 미쓰오, 미나미 미쓰아키,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 ×〇 | ||
빈털터리 싸움 없음 | Uchien Puchan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미즈키 교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학창을 벗어나 | Gakusō wo idete |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고메이, 미마스 유타카, 모리 기요시, 다카시마 아이코, 곤도 이요키치 | ×〇 | ||
대지는 미소 짓는다 제1편 | Daichi wa hohoemu (T1) | 하타모토 슈이치 | 다카기 에이지, 나카노 에이지, 우메무라 요코, 히가시보 야스나가 | ×〇 | ||
백합은 한탄한다 | Shirayuri wa nageku | 시미즈 류노스케 |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미코시바 모리오, 곤도 이요키치,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붉은 석양에 비추어 | Akai yūhi ni terasarete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미쓰아키 미나미, 와타나베 구니오, 이토 신키치, 우메무라 요코 | ×〇 | ||
고향의 노래 | Furusatonouta | 닛카쓰 | 시미즈 류노스케 | 기타 시게루, 다카기 마스지로, 이토 주에코, 쓰지 미노코, 가와마타 켄타로 | 50분 〇 | |
소품 영화집 거리의 스케치 | Shōhin eiga-shū: Machi no sketch | 미조구치 겐지 | 히가시보 야스나가, 오카다 요시코, 호시노 히로키, 다카기 에이지 | ×〇 | ||
인간 전편, 후편 | Ningen: kōhen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이치카와 하루요, 반도 도모에 | ×〇 | ||
노기 장군과 쿠마상 | Nogi shōgun to Kuma-san | 야마모토 가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이소가와 긴노스케,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26 | 동전 왕 | Dōka-ō | 미조구치 겐지 | 가토 시로, 사이조 가요코 | ×〇 | |
종이 인형 봄의 속삭임 | Kaminingyō no haru no sasayaki | 신게키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시마 고지, 우메무라 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오카다 도키히코 | ×〇 | |
신설 오노가 쓰미 | Shinsetsu ono ga tsumi | 닛카쓰 | 미조구치 겐지 | 스나다 코마코,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이치카와 하루에, 오노에 마쓰바 | ×〇 | |
광염의 여사부 | Kyōren no onna shishō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사카이 요네코,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다나카 하루오 | ×〇 | ||
해국 남자 | Kaikoku danji | 고바야시 마사시 야마모토 가지로 | 히로세 쓰네미, 네기시 도이치로, 미코시바 모리오, 스나다 코마코, 시바야마 이치로 | ×〇 | ||
돈 | Kane | 하타모토 슈이치 다케다 아키라 | 고이즈미 가스케, 고마쓰 미도리, 다니 가니치 | ×〇 | ||
1927 | 황은 | Kōon | 하타모토 슈이치 | 이치카와 하루에,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다키하나 히사코,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자비심 조 | Jihi shinchō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도키히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
1928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1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1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쓰시마 류코, 이치카와 하루에, 네기시 도이치로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2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2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네기시 도이치로, 히사코 다키하나, 하루에 이치카와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3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3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도이치로 네기시, 히사코 다키하나 | ×〇 | ||
귀여운 딸 | Musume kawaiya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기타하라 나쓰에, 스기야마 쇼조 | ×〇 | ||
1929 | 니혼바시 | Nihonbashi | 다하토 | 곤도 게이이치 | 오카다 도키히코, 우메무라 요코, 사카이 요네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아침 해는 빛난다 | Asahi wa kagayaku | 기무라 지히오 | 나카노 에이지, 무라타 히로토시, 도이 헤이타로, 사와 란코 | ×〇 | ||
도쿄 행진곡 | Tōkyō kōshinkyoku | 기무라 지히오 | 나쓰카와 시즈에, 다카기 에이지,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도회 교향악 | Tokai kokyōkyoku | 오카다 사부로 |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1930 |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 | Fujiwara Yoshie no furusato | 기사라기 사토시 | 후지와라 요시에,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 ×〇 | |
도진 오키치 | Tōjin Okichi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메무라 요코, 시마 고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1931 | 게다가 그들은 간다 전편 | Shikamo karera wa yu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게다가 그들은 간다 후편 | Shikamo karera wa i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다카쓰 아이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1932 | 때의 씨앗 | Toki no ujigami | 하타모토 슈이치 | 시마 고지, 나쓰카와 시즈에 | × | |
만주몽골 건국의 여명 | Manmō kenkoku no reimei | 이리에 프로 | 우에시마 료 마스다 신지 | 이리에 다카코, 나카노 에이지, 마쓰모토 다이스케, 야마켄 나오요, 가쓰라 다마코 | × | |
1933 | 폭포의 흰 실 | Taki no shiraito | 신흥 | 히가시보 야스나가 | 이리에 다카코, 오카다 도키히코, 무라타 히로토시, 스가이 이치로, 미아케 본타로 | ×〇 |
기온 축제 | Gion matsuri | 미조구치 겐지 | 모리 시즈코, 오카다 도키히코, 스즈키 스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34 | 진푸렌 | Jinpu-ren | 이리에 프로 | 미조구치 겐지 | 이리에 다카코, 쓰키가타 류노스케, 고스기 이사무, 나카노 에이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유성 영화, 흑백 | ||||||
1934 | 애증 고개 | Aizō tōge | 다마가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스즈키 덴메이, 이치카와 고분지, 하라 고마코 | 102분 □ |
1935 | 학 오센 | Oridzuru o sen | 다이이치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요시자와 이치로, 시바타 신, 도리이 다다시 | 96분 □ |
마리아의 오유키 | Maria no Oyuki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하라 고마코, 나쓰카와 다이지로, 나카노 에이지, 우타가와 기누에 | × | ||
아가씨 오키치 | Ojō Okic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하라 고마코, 아사카 신하치로, 시바타 아라타 | × | ||
우미인초 | Gubijinsō | 다카야나기 하루오 | 나쓰카와 다이지로, 쓰키다 이치로, 다케다 가즈요시, 오쿠라 지요코 | 75분 | ||
1936 | 첫 모습 | Hatsu sugata | 다카야나기 하루오 | 쓰키다 이치로, 오쿠라 지요코, 우메무라 요코, 고이즈미 가스케, 가쓰라기 고이치 | × | |
나니와 엘레지 | Naniwa hika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오쿠라 지요코, 신도 에이타로, 아사카 신하치로 | 89분 | ||
기온의 자매들 | Gion no kyōdai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시가노야 단카이, 신도 에이타로 | 95분 | ||
1937 | 애원 협 | Aien kyo | 신흥 | 요다 요시카타 | 야마지 후미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시미즈 마사오, 미마스 유타카 | 108분 |
1938 | 노영의 노래 | Roei no uta | 하타모토 슈이치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타가와 야에코, 다나카 하루오 | 82분 × | |
아아, 고향 | Aa kokyo | 요다 요시카타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시미즈 마사오, 가토 세이이치, 야마구치 이사무 | 64분 × | ||
1939 | 마지막 국화 이야기 | Zangiku monogatari | 쇼치쿠 | 요다 요시카타 | 하나야기 쇼타로, 가와라사키 곤주로, 우메무라 요코, 다카다 히로시키치 | 146분 |
1940 | 나니와 온나 | Naniwa onna | 요다 요시카타 | 반도 고타로, 다나카 기누요, 다카다 고키치, 가와나미 료타로 | 145분 × | |
1941 | 예도 일대 남자 | Geidō ichidai otoko | 자제 | 요다 요시카타 | 나카무라 간지로, 다카다 고키치, 하야시 나리토시, 아라시 요시자부로 | 101분 × |
겐로쿠 주신구라 전편 | Genroku Chūshingura 1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스에몬 나카무라, 가와라사키 구니타로, 이치카와 우타에몬 | 112분 | ||
1942 | 겐로쿠 주신구라 후편 | Genroku Chūshingura 2 | 쇼치쿠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카미네 미에코, 우메무라 요코 | 111분 |
1944 | 단주로 3대 | Danjuro sanda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이이즈카 도시코, 사와무라 아키오, 쿄 마치코, 다나카 기누요 | 65분 × | |
미야모토 무사시 | Miyamoto Musas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나카 기누요 | 55분 | ||
1945 | 명검 비녀마루 | Meitō bijomaru | 가와구치 마쓰타로 | 하나야기 쇼타로, 야마다 이스즈, 오야 이치지로, 야나기 에이지로 | 67분 | |
필승가 | Hisshōka | 시미즈 히로시 | 사노 슈지, 오야 이치지로, 다나카 기누요, 고스기 이사무, 우에하라 켄 | 117분 | ||
1946 | 여성의 승리 | Josei no shōri | 노다 고고 | 다나카 기누요, 구와노 미치코, 다카하시 도요코, 미우라 미쓰코 | 84분 | |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 | Utamaro o meguru gonin no onna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반도 고타로, 가와사키 히로코, 이이즈카 도시코 | 74분 | ||
1947 | 여배우 스마코의 사랑 | Joyū Sumako no ko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무라 사토시, 히가시노 에이지로, 센다 고레야, 아오야마 스기사쿠 | 96분 | |
1948 | 밤의 여인들 | Yoru no onnatach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다카스기 사나에, 쓰노다 도미에, 나가타 미쓰오, 무라타 히로토시 | 75분 | |
1949 | 내 사랑은 불탔었지 | Waga koi wa moenu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미토 미쓰코, 오자와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미야케 쿠니코 | 84분 | |
1950 | 유키 부인 그림 | Yuki fujin ezu | 도호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우에하라 켄, 쿠가 요시코, 하마다 유리코, 야마무라 사토시 | 88분 |
1951 | 오유우님 | Oyū-sama | 다이에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오토와 노부코, 호리 유지, 야나기 에이지로, 신도 에이타로 | 95분 |
무사시노 부인 | Musashino fujin | 도호 | 가와구치 마쓰타로 | 다나카 기누요, 도도로키 유키코, 모리 마사유키, 가타야마 아키히코, 야마무라 사토시 | 92분 | |
1952 |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Saikaku ichidai onna | 코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네 히사코, 미후네 도시로, 우노 시게요시, 스가이 이치로 | 148분 |
1953 | 우게쓰 이야기 | Ugetsu monogatari | 다이에이 | 야히로 후지 | 쿄 마치코, 미토 미쓰코, 다나카 기누요, 모리 마사유키, 오자와 사카에 | 97분 |
기온바야시 | Gion bayashi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와카오 아야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신도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 85분 | ||
1954 | 산쇼 다유 | Sanshō dayū | 야히로 후지 | 다나카 기누요, 하나야기 요시아키, 가가와 교코, 신도 에이타로, 고노 아키타케 | 124분 | |
소문의 여자 | Uwasa no onna | 나루사와 마사시게 | 다나카 기누요, 오타니 유에몬, 쿠가 요시코, 신도 에이타로, 나니와 지에코 | 84분 | ||
근친 이야기 | Chikamatsu monogatari | 요다 요시카타 | 하세가와 가즈오, 가가와 교코, 미나미다 요코,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사카에 | 102분 | ||
1956 | 적선지대 | Akasen chitai | 나루사와 마사시게 |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고구레 미치요, 이코 산에키, 마치다 히로코 | 86분 | |
컬러 영화 | ||||||
1955 | 양귀비 | Yōkihi | 다이에이 | 도에 칭 | 쿄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야마무라 사토시,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에이 | 108분 |
신 헤이케 이야기 | Shin Heike monogatari | 쓰지 히사카즈 | 이치카와 라이조, 쿠가 요시코, 하야시 나리토시, 고구레 미치요, 오야 이치지로 | 98분 |
7.2. 기타 작품
- 교코와 시즈코(1926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아리산의 협아(1927년, 다사카 도모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지구는 돈다(1928년, 다사카 도모타카, 아베 유타카, 우치다 도무 감독) - 고문 감독
- 울산 앞바다의 회전(1928년, 히가시보 쿄초, 하타모토 슈이치 감독) - 총지휘
- 1931년 닛카쓰 온 퍼레이드(1931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출연
- 첫 모습(1936년, 사카네 다즈코 감독) - 감독 보도
- 맑은 옷소매(1940년, 우시하라 키요히코 감독) - 구성
- 피의 창 후지(1955년, 우치다 도무 감독) - 기획 협력
- 기온의 자매들(1956년, 노무라 히로마사 감독) - 원작
- 오사카 이야기(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 - 원작
; 라디오 드라마
- 흙(1937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추억의 기록(1938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요시노 쿠즈(1939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무대
- 학 오센(1935년, 오사카 극장) - 연출
8. 죽음
1956년, 미조구치는 마지막 감독 작품인 《적선지대》를 촬영했는데, 그 전후로 좋아하는 술이 맛없다고 하거나 잇몸에서 피가 나는 등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이 작품 완성 후, 미조구치는 다음 작품으로 《오사카 이야기》의 제작 준비를 시작했으나, 이때도 저녁이 되면 미열이 나고 발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5월에 제작 준비를 중단하고 교토부립 의과대학 부속 병원의 특별 병동에 입원했다. 미조구치는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았으나, 병명은 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나가타 마사이치 등 다이에이 수뇌부에만 알려졌다. 미조구치는 매일 수혈을 받았지만, 백혈병은 불치병이었기에 회복되지 못하고 8월 24일 오전 1시 55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전날에는 "이제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빨리 촬영소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미조구치 작품의 미술 감독을 맡았던 미즈타니 히로시는 미조구치의 사망 당일에 데스 마스크를 제작했다.
8월 30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다이에이 주관으로 회사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법명은 조코인덴 에이토쿠닛켄 거사이다. 묘소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의 자원(子院)인 다이보 혼교지에 세워졌다. 교토의 만간지에도 분골되어 비석이 세워졌는데, 나가타 마사이치가 비석 측면에 "세계적 명감독"이라고 새기게 했다. 미조구치의 부고는 마침 열리고 있던 제1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회장에도 전해져, 출품되어 있던 《적선지대》 상영에 앞서 추도사가 헌정되었다. 촬영까지 이르지 못했던 《오사카 이야기》는 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케이 신문사 주최로 일본 영화 최우수 작품의 감독과 스태프에게 주어지는 '미조구치 상'이 창설되었으나, 시상은 불과 3회로 종료되었다.
9. 평가 및 영향

미조구치는 1930년대부터 일본 영화계에서 굴지의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키노시타 케이스케 등과 함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9.1. 비평적 평가
일본의 영화 비평가들로부터는 여성을 그리는 데 가장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와사키 아키라는 "일본 영화 작가 중에서 여성을 그린 이가 결코 적지 않지만, 아직도 미조구치 이후 미조구치 이전과 같은 이가 없다"고 평했으며, 츠무라 히데오 또한 "인생 유전의 극한에서 인간의 모습,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는 당대에 견줄 자 없는 명인"이라고 평했다. 영화 감독 이치카와 곤은 "얼핏 여성을 보는 눈이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따뜻한 부분이 있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도 높이 평가받으며, 특히 《나니와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들》은 일본 영화에 본격적인 리얼리즘이 확립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후에는 "원 장면-원 샷 기법 때문에 템포가 느리다", "소재가 고루하고 전근대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9.2. 후대에 미친 영향
1950년대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작품이 수상한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영화 비평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동인이자 작가주의 비평을 펼친 젊은 비평가들인 장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미조구치를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발표하는 연간 작품 톱 텐에서는 1959년에 《우게쓰 이야기》가 1위에 선정되었고, 다음 1960년에는 《산쇼 다유》도 1위에 선정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미조구치를 일본 영화나 서양 영화라는 틀을 넘어선, 세계 공통의 영화 언어인 미장센을 가진 보편적인 영화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고다르는 미조구치를 "가장 위대한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경도되었고, 1966년 일본 방문 시 미조구치의 비석을 찾기도 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1950년대 후반 영화 감독이 되어 누벨 바그의 기수로 활약했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도 미조구치 작품의 영향이 엿보였다. 리베트의 《수도녀》(1966)는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독 자신이 분명히 밝혔다. 고다르는 《경멸》(1963)의 후반부 바다로 패닝하는 장면에서 《산쇼 다유》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다.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사한 오마주를 했으며, 더 나아가 《메이드 인 USA》(1966)에서는 코사카 교코가 연기하는 "도리스 미조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누벨 바그 외의 감독들 중에서는 미조구치와 마찬가지로 롱 테이크와 이동 촬영에 능숙한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그 스타일에서 미조구치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또한 미조구치의 유려한 카메라워크에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게쓰 이야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그 외에도 장 유스타슈, 오슨 웰스, 빅토르 에리세,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코세이지, 아리 애스터 등의 감독들이 미조구치를 높이 찬양하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톰슨은 "감정적인 생각이나 지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미조구치 영화에서 파생된 영화의 정의이다. 그는 외적 시야에서 내적 상태를 구현하는 데 최고이다"라고 썼다.
1975년, 미조구치 밑에서 세트 디자이너, 수석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던 신도 카네토는 그의 스승에 관한 다큐멘터리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을 개봉했으며, 1976년에는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신도는 그의 자전적인 데뷔 영화 《애처 이야기》(1951)에서도 젊은 시나리오 작가를 키우는 감독 "사카구치" 캐릭터를 통해 미조구치를 언급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사이트 & 사운드》지의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우게쓰 이야기와 산쇼 다유), 키네마 준보의 "키네마 준보 비평가 톱 200"(오하루의 일생, 우게쓰 이야기, 근친 이야기)과 같은 "최고의 영화" 설문 조사에 꾸준히 등장했다. 2014년 움직이는 이미지 박물관과 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그의 현존하는 영화 30편 회고전이 여러 미국 도시를 순회하기도 했다.
9.3. 수상 경력
- 1936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일본 영화 베스트 텐 1위 (《기온의 자매들》)
- 195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국제상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1953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쓰 이야기》)
- 195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산쇼 다유》)
- 1954년: 블루 리본상 감독상 (《근친 이야기》)
- 1955년: 예술선장 (《근친 이야기》)
- 1955년: 자수훈장
- 1956년: 훈4등 서보장 (사후 추서)
- 1956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특별상 (사후 수상)
- 1956년: 블루 리본상 일본 영화 문화상 (사후 수상)
10. 작품 목록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 목록에는 그의 초기 무성 영화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기 유성 영화, 그리고 감독 외의 다양한 참여작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현재 유실된 상태이다.
10.1. 감독 작품
아래 목록에서 '×' 표시는 필름이 현존하지 않는 유실 영화를, '〇' 표시는 무성 영화를, '□' 표시는 사운드판 영화를, '◎' 표시는 컬러 영화를 의미한다.
연도 | 영화 제목 | 로마자 표기 | 제작사 | 각본 | 주연 배우 | 비고 |
---|---|---|---|---|---|---|
무성 영화, 흑백 | ||||||
1923 | 사랑에 되살아나는 날 | Ai ni yomigaeru hi | 닛카쓰 도쿄 | 와카이 오사무 | 야마모토 가이치, 모리 기요시, 오구리 다케오, 고이즈미 가스케 | 60분 ×〇 |
고향 | Kokyō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요시다 도요사쿠, 오구리 다케오, 미나미 미쓰아키 | ×〇 | ||
청춘의 꿈길 | Seishun no yumeji | 요시무라 데쓰야, 미야지마 후미오, 사카이 요네코 | ×〇 | |||
정염의 항구 | Jōen no chimata | 미나미 미쓰아키, 모리 기요시, 미마스 유타카, 오구리 다케오 | ×〇 | |||
패잔의 노래는 슬퍼 | Haizan no uta wa kanashi | 요시다 도요사쿠, 사와무라 하루코, 미야지마 후미오 | ×〇 | |||
813 | 다나카 소이치로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미쓰아키, 호시노 히로키, 아오야마 마리코, 세가와 쓰루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안개의 항구 | Kiri no minato | 다나카 소이치로 | 이치카와 하루에, 사와무라 하루코, 모리 에이지로,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밤 | Yoru | 미조구치 겐지 | 가쓰라기 고이치, 호세 가오루, 사카이 요네코, 이나가키 히로시, 고미 구니오 | ×〇 | ||
폐허 속에서 | Haikyo no naka | 사와무라 하루코, 가쓰라기 고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피와 영혼 | Chi to rei | 에구치 지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미즈시마 료타로, 사카이 요네코, 미마스 유타카 | ×〇 | |||
고갯길의 노래 | Tōge no uta | 닛카쓰 교토 | 야마모토 가이치, 사와무라 하루코, 미마스 유타카, 호리 다카코,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1924 | 슬픈 백치 | Kanashiki hakuchi | 다카시마 다쓰로 | 고이즈미 가스케, 사카이 요네코, 가쓰라기 고이치, 다카기 마스지로 | ×〇 | |
새벽의 죽음 | Akatsuki no shi | 닛키 | 이토 마쓰오 | 고이즈미 가스케, 스즈키 우타코, 사와무라 하루코, 기타 시게루,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현대의 여왕 | Gendai no joō | 닛카쓰 교토 | 무라타 미노루 | 사카이 요네코, 미나미 미쓰아키, 미마스 유타카 | ×〇 | |
여성은 강하다 | Josei wa tsuyoshi | 닛카쓰 문학회 |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마쓰모토 시즈에, 미야베 시즈코, 기타 시게루 | ×〇 | ||
티끌 세계 | Jinkyō | 다나카 소이치로 | 스즈키 덴메이, 다카기 에이지, 우라베 쿠메코 | ×〇 | ||
칠면조의 행방 | Shichimenchō no yukue | 하타모토 슈이치 | 기타무라 준이치, 다카기 에이지, 도쿠가와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이토 순경의 죽음 | Itō junsa no shi | 닛카쓰 문학회 | 사토 엔지, 하야시 마사오 | ×〇 | ||
장마철 일기 | Samidare zōshi | 고주 요코야마 | 스즈키 우타코, 가쓰라 데루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사랑을 끊는 도끼 | Koi o tatsu ono | 구스야마 리쓰 | 우라베 쿠메코, 와카바 가오루, 미마스 유타카, 고이즈미 가스케 | ×〇 | ||
환락의 여인 | Kanraku no onna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곡예단의 여왕 | Kyokubadan no joō | 우라베 쿠메코, 스즈키 덴메이, 곤도 이요키치 | ×〇 | |||
1925 | 아, 특무함 간토 | Ā tokumukan Kantō | 나카무라 히데오, 나카하라 미쓰오, 미나미 미쓰아키,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 ×〇 | ||
빈털터리 싸움 없음 | Uchien Puchan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미즈키 교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학창을 벗어나 | Gakusō wo idete |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고메이, 미마스 유타카, 모리 기요시, 다카시마 아이코, 곤도 이요키치 | ×〇 | ||
대지는 미소 짓는다 제1편 | Daichi wa hohoemu (T1) | 하타모토 슈이치 | 다카기 에이지, 나카노 에이지, 우메무라 요코, 히가시보 야스나가 | ×〇 | ||
백합은 한탄한다 | Shirayuri wa nageku | 시미즈 류노스케 |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미코시바 모리오, 곤도 이요키치,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붉은 석양에 비추어 | Akai yūhi ni terasarete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미쓰아키 미나미, 와타나베 구니오, 이토 신키치, 우메무라 요코 | ×〇 | ||
고향의 노래 | Furusatonouta | 닛카쓰 | 시미즈 류노스케 | 기타 시게루, 다카기 마스지로, 이토 주에코, 쓰지 미노코, 가와마타 켄타로 | 50분 〇 | |
소품 영화집 거리의 스케치 | Shōhin eiga-shū: Machi no sketch | 미조구치 겐지 | 히가시보 야스나가, 오카다 요시코, 호시노 히로키, 다카기 에이지 | ×〇 | ||
인간 전편, 후편 | Ningen: kōhen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이치카와 하루요, 반도 도모에 | ×〇 | ||
노기 장군과 쿠마상 | Nogi shōgun to Kuma-san | 야마모토 가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이소가와 긴노스케,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26 | 동전 왕 | Dōka-ō | 미조구치 겐지 | 가토 시로, 사이조 가요코 | ×〇 | |
종이 인형 봄의 속삭임 | Kaminingyō no haru no sasayaki | 신게키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시마 고지, 우메무라 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오카다 도키히코 | ×〇 | |
신설 오노가 쓰미 | Shinsetsu ono ga tsumi | 닛카쓰 | 미조구치 겐지 | 스나다 코마코,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이치카와 하루에, 오노에 마쓰바 | ×〇 | |
광염의 여사부 | Kyōren no onna shishō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사카이 요네코,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다나카 하루오 | ×〇 | ||
해국 남자 | Kaikoku danji | 고바야시 마사시 야마모토 가지로 | 히로세 쓰네미, 네기시 도이치로, 미코시바 모리오, 스나다 코마코, 시바야마 이치로 | ×〇 | ||
돈 | Kane | 하타모토 슈이치 다케다 아키라 | 고이즈미 가스케, 고마쓰 미도리, 다니 가니치 | ×〇 | ||
1927 | 황은 | Kōon | 하타모토 슈이치 | 이치카와 하루에,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다키하나 히사코,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자비심 조 | Jihi shinchō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도키히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
1928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1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1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쓰시마 류코, 이치카와 하루에, 네기시 도이치로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2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2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네기시 도이치로, 히사코 다키하나, 하루에 이치카와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3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3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도이치로 네기시, 히사코 다키하나 | ×〇 | ||
귀여운 딸 | Musume kawaiya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기타하라 나쓰에, 스기야마 쇼조 | ×〇 | ||
1929 | 니혼바시 | Nihonbashi | 다하토 | 곤도 게이이치 | 오카다 도키히코, 우메무라 요코, 사카이 요네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아침 해는 빛난다 | Asahi wa kagayaku | 기무라 지히오 | 나카노 에이지, 무라타 히로토시, 도이 헤이타로, 사와 란코 | ×〇 | ||
도쿄 행진곡 | Tōkyō kōshinkyoku | 기무라 지히오 | 나쓰카와 시즈에, 다카기 에이지,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도회 교향악 | Tokai kokyōkyoku | 오카다 사부로 |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1930 |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 | Fujiwara Yoshie no furusato | 기사라기 사토시 | 후지와라 요시에,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 ×〇 | |
도진 오키치 | Tōjin Okichi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메무라 요코, 시마 고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1931 | 게다가 그들은 간다 전편 | Shikamo karera wa yu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게다가 그들은 간다 후편 | Shikamo karera wa i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다카쓰 아이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1932 | 때의 씨앗 | Toki no ujigami | 하타모토 슈이치 | 시마 고지, 나쓰카와 시즈에 | × | |
만주몽골 건국의 여명 | Manmō kenkoku no reimei | 이리에 프로 | 우에시마 료 마스다 신지 | 이리에 다카코, 나카노 에이지, 마쓰모토 다이스케, 야마켄 나오요, 가쓰라 다마코 | × | |
1933 | 폭포의 흰 실 | Taki no shiraito | 신흥 | 히가시보 야스나가 | 이리에 다카코, 오카다 도키히코, 무라타 히로토시, 스가이 이치로, 미아케 본타로 | ×〇 |
기온 축제 | Gion matsuri | 미조구치 겐지 | 모리 시즈코, 오카다 도키히코, 스즈키 스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34 | 진푸렌 | Jinpu-ren | 이리에 프로 | 미조구치 겐지 | 이리에 다카코, 쓰키가타 류노스케, 고스기 이사무, 나카노 에이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유성 영화, 흑백 | ||||||
1934 | 애증 고개 | Aizō tōge | 다마가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스즈키 덴메이, 이치카와 고분지, 하라 고마코 | 102분 □ |
1935 | 학 오센 | Oridzuru o sen | 다이이치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요시자와 이치로, 시바타 신, 도리이 다다시 | 96분 □ |
마리아의 오유키 | Maria no Oyuki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하라 고마코, 나쓰카와 다이지로, 나카노 에이지, 우타가와 기누에 | × | ||
아가씨 오키치 | Ojō Okic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하라 고마코, 아사카 신하치로, 시바타 아라타 | × | ||
우미인초 | Gubijinsō | 다카야나기 하루오 | 나쓰카와 다이지로, 쓰키다 이치로, 다케다 가즈요시, 오쿠라 지요코 | 75분 | ||
1936 | 첫 모습 | Hatsu sugata | 다카야나기 하루오 | 쓰키다 이치로, 오쿠라 지요코, 우메무라 요코, 고이즈미 가스케, 가쓰라기 고이치 | × | |
나니와 엘레지 | Naniwa hika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오쿠라 지요코, 신도 에이타로, 아사카 신하치로 | 89분 | ||
기온의 자매들 | Gion no kyōdai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시가노야 단카이, 신도 에이타로 | 95분 | ||
1937 | 애원 협 | Aien kyo | 신흥 | 요다 요시카타 | 야마지 후미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시미즈 마사오, 미마스 유타카 | 108분 |
1938 | 노영의 노래 | Roei no uta | 하타모토 슈이치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타가와 야에코, 다나카 하루오 | 82분 × | |
아아, 고향 | Aa kokyo | 요다 요시카타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시미즈 마사오, 가토 세이이치, 야마구치 이사무 | 64분 × | ||
1939 | 마지막 국화 이야기 | Zangiku monogatari | 쇼치쿠 | 요다 요시카타 | 하나야기 쇼타로, 가와라사키 곤주로, 우메무라 요코, 다카다 히로시키치 | 146분 |
1940 | 나니와 온나 | Naniwa onna | 요다 요시카타 | 반도 고타로, 다나카 기누요, 다카다 고키치, 가와나미 료타로 | 145분 × | |
1941 | 예도 일대 남자 | Geidō ichidai otoko | 자제 | 요다 요시카타 | 나카무라 간지로, 다카다 고키치, 하야시 나리토시, 아라시 요시자부로 | 101분 × |
겐로쿠 주신구라 전편 | Genroku Chūshingura 1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스에몬 나카무라, 가와라사키 구니타로, 이치카와 우타에몬 | 112분 | ||
1942 | 겐로쿠 주신구라 후편 | Genroku Chūshingura 2 | 쇼치쿠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카미네 미에코, 우메무라 요코 | 111분 |
1944 | 단주로 3대 | Danjuro sanda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이이즈카 도시코, 사와무라 아키오, 쿄 마치코, 다나카 기누요 | 65분 × | |
미야모토 무사시 | Miyamoto Musas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나카 기누요 | 55분 | ||
1945 | 명검 비녀마루 | Meitō bijomaru | 가와구치 마쓰타로 | 하나야기 쇼타로, 야마다 이스즈, 오야 이치지로, 야나기 에이지로 | 67분 | |
필승가 | Hisshōka | 시미즈 히로시 | 사노 슈지, 오야 이치지로, 다나카 기누요, 고스기 이사무, 우에하라 켄 | 117분 | ||
1946 | 여성의 승리 | Josei no shōri | 노다 고고 | 다나카 기누요, 구와노 미치코, 다카하시 도요코, 미우라 미쓰코 | 84분 | |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 | Utamaro o meguru gonin no onna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반도 고타로, 가와사키 히로코, 이이즈카 도시코 | 74분 | ||
1947 | 여배우 스마코의 사랑 | Joyū Sumako no ko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무라 사토시, 히가시노 에이지로, 센다 고레야, 아오야마 스기사쿠 | 96분 | |
1948 | 밤의 여인들 | Yoru no onnatach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다카스기 사나에, 쓰노다 도미에, 나가타 미쓰오, 무라타 히로토시 | 75분 | |
1949 | 내 사랑은 불탔었지 | Waga koi wa moenu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미토 미쓰코, 오자와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미야케 쿠니코 | 84분 | |
1950 | 유키 부인 그림 | Yuki fujin ezu | 도호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우에하라 켄, 쿠가 요시코, 하마다 유리코, 야마무라 사토시 | 88분 |
1951 | 오유우님 | Oyū-sama | 다이에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오토와 노부코, 호리 유지, 야나기 에이지로, 신도 에이타로 | 95분 |
무사시노 부인 | Musashino fujin | 도호 | 가와구치 마쓰타로 | 다나카 기누요, 도도로키 유키코, 모리 마사유키, 가타야마 아키히코, 야마무라 사토시 | 92분 | |
1952 |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Saikaku ichidai onna | 코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네 히사코, 미후네 도시로, 우노 시게요시, 스가이 이치로 | 148분 |
1953 | 우게쓰 이야기 | Ugetsu monogatari | 다이에이 | 야히로 후지 | 쿄 마치코, 미토 미쓰코, 다나카 기누요, 모리 마사유키, 오자와 사카에 | 97분 |
기온바야시 | Gion bayashi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와카오 아야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신도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 85분 | ||
1954 | 산쇼 다유 | Sanshō dayū | 야히로 후지 | 다나카 기누요, 하나야기 요시아키, 가가와 교코, 신도 에이타로, 고노 아키타케 | 124분 | |
소문의 여자 | Uwasa no onna | 나루사와 마사시게 | 다나카 기누요, 오타니 유에몬, 쿠가 요시코, 신도 에이타로, 나니와 지에코 | 84분 | ||
근친 이야기 | Chikamatsu monogatari | 요다 요시카타 | 하세가와 가즈오, 가가와 교코, 미나미다 요코,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사카에 | 102분 | ||
1956 | 적선지대 | Akasen chitai | 나루사와 마사시게 |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고구레 미치요, 이코 산에키, 마치다 히로코 | 86분 | |
컬러 영화 | ||||||
1955 | 양귀비 | Yōkihi | 다이에이 | 도에 칭 | 쿄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야마무라 사토시,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에이 | 108분 |
신 헤이케 이야기 | Shin Heike monogatari | 쓰지 히사카즈 | 이치카와 라이조, 쿠가 요시코, 하야시 나리토시, 고구레 미치요, 오야 이치지로 | 98분 |
10.2. 기타 작품
- 교코와 시즈코(1926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아리산의 협아(1927년, 다사카 도모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지구는 돈다(1928년, 다사카 도모타카, 아베 유타카, 우치다 도무 감독) - 고문 감독
- 울산 앞바다의 회전(1928년, 히가시보 쿄초, 하타모토 슈이치 감독) - 총지휘
- 1931년 닛카쓰 온 퍼레이드(1931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출연
- 첫 모습(1936년, 사카네 다즈코 감독) - 감독 보도
- 맑은 옷소매(1940년, 우시하라 키요히코 감독) - 구성
- 피의 창 후지(1955년, 우치다 도무 감독) - 기획 협력
- 기온의 자매들(1956년, 노무라 히로마사 감독) - 원작
- 오사카 이야기(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 - 원작
; 라디오 드라마
- 흙(1937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추억의 기록(1938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요시노 쿠즈(1939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무대
- 학 오센(1935년, 오사카 극장) - 연출
11. 죽음
1956년, 미조구치는 마지막 감독 작품인 《적선지대》를 촬영했는데, 그 전후로 좋아하는 술이 맛없다고 하거나 잇몸에서 피가 나는 등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이 작품 완성 후, 미조구치는 다음 작품으로 《오사카 이야기》의 제작 준비를 시작했으나, 이때도 저녁이 되면 미열이 나고 발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5월에 제작 준비를 중단하고 교토부립 의과대학 부속 병원의 특별 병동에 입원했다. 미조구치는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았으나, 병명은 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나가타 마사이치 등 다이에이 수뇌부에만 알려졌다. 미조구치는 매일 수혈을 받았지만, 백혈병은 불치병이었기에 회복되지 못하고 8월 24일 오전 1시 55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전날에는 "이제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빨리 촬영소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미조구치 작품의 미술 감독을 맡았던 미즈타니 히로시는 미조구치의 사망 당일에 데스 마스크를 제작했다.
8월 30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다이에이 주관으로 회사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법명은 조코인덴 에이토쿠닛켄 거사이다. 묘소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의 자원(子院)인 다이보 혼교지에 세워졌다. 교토의 만간지에도 분골되어 비석이 세워졌는데, 나가타 마사이치가 비석 측면에 "세계적 명감독"이라고 새기게 했다. 미조구치의 부고는 마침 열리고 있던 제1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회장에도 전해져, 출품되어 있던 《적선지대》 상영에 앞서 추도사가 헌정되었다. 촬영까지 이르지 못했던 《오사카 이야기》는 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케이 신문사 주최로 일본 영화 최우수 작품의 감독과 스태프에게 주어지는 '미조구치 상'이 창설되었으나, 시상은 불과 3회로 종료되었다.
12. 평가 및 영향

미조구치는 1930년대부터 일본 영화계에서 굴지의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키노시타 케이스케 등과 함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12.1. 비평적 평가
일본의 영화 비평가들로부터는 여성을 그리는 데 가장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와사키 아키라는 "일본 영화 작가 중에서 여성을 그린 이가 결코 적지 않지만, 아직도 미조구치 이후 미조구치 이전과 같은 이가 없다"고 평했으며, 츠무라 히데오 또한 "인생 유전의 극한에서 인간의 모습,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는 당대에 견줄 자 없는 명인"이라고 평했다. 영화 감독 이치카와 곤은 "얼핏 여성을 보는 눈이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따뜻한 부분이 있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도 높이 평가받으며, 특히 《나니와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들》은 일본 영화에 본격적인 리얼리즘이 확립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후에는 "원 장면-원 샷 기법 때문에 템포가 느리다", "소재가 고루하고 전근대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2.2. 후대에 미친 영향
1950년대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작품이 수상한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영화 비평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동인이자 작가주의 비평을 펼친 젊은 비평가들인 장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미조구치를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발표하는 연간 작품 톱 텐에서는 1959년에 《우게쓰 이야기》가 1위에 선정되었고, 다음 1960년에는 《산쇼 다유》도 1위에 선정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미조구치를 일본 영화나 서양 영화라는 틀을 넘어선, 세계 공통의 영화 언어인 미장센을 가진 보편적인 영화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고다르는 미조구치를 "가장 위대한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경도되었고, 1966년 일본 방문 시 미조구치의 비석을 찾기도 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1950년대 후반 영화 감독이 되어 누벨 바그의 기수로 활약했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도 미조구치 작품의 영향이 엿보였다. 리베트의 《수도녀》(1966)는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독 자신이 분명히 밝혔다. 고다르는 《경멸》(1963)의 후반부 바다로 패닝하는 장면에서 《산쇼 다유》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다.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사한 오마주를 했으며, 더 나아가 《메이드 인 USA》(1966)에서는 코사카 교코가 연기하는 "도리스 미조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누벨 바그 외의 감독들 중에서는 미조구치와 마찬가지로 롱 테이크와 이동 촬영에 능숙한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그 스타일에서 미조구치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또한 미조구치의 유려한 카메라워크에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게쓰 이야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그 외에도 장 유스타슈, 오슨 웰스, 빅토르 에리세,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코세이지, 아리 애스터 등의 감독들이 미조구치를 높이 찬양하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톰슨은 "감정적인 생각이나 지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미조구치 영화에서 파생된 영화의 정의이다. 그는 외적 시야에서 내적 상태를 구현하는 데 최고이다"라고 썼다.
1975년, 미조구치 밑에서 세트 디자이너, 수석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던 신도 카네토는 그의 스승에 관한 다큐멘터리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을 개봉했으며, 1976년에는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신도는 그의 자전적인 데뷔 영화 《애처 이야기》(1951)에서도 젊은 시나리오 작가를 키우는 감독 "사카구치" 캐릭터를 통해 미조구치를 언급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사이트 & 사운드》지의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우게쓰 이야기와 산쇼 다유), 키네마 준보의 "키네마 준보 비평가 톱 200"(오하루의 일생, 우게쓰 이야기, 근친 이야기)과 같은 "최고의 영화" 설문 조사에 꾸준히 등장했다. 2014년 움직이는 이미지 박물관과 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그의 현존하는 영화 30편 회고전이 여러 미국 도시를 순회하기도 했다.
12.3. 수상 경력
- 1936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일본 영화 베스트 텐 1위 (《기온의 자매들》)
- 195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국제상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1953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쓰 이야기》)
- 195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산쇼 다유》)
- 1954년: 블루 리본상 감독상 (《근친 이야기》)
- 1955년: 예술선장 (《근친 이야기》)
- 1955년: 자수훈장
- 1956년: 훈4등 서보장 (사후 추서)
- 1956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특별상 (사후 수상)
- 1956년: 블루 리본상 일본 영화 문화상 (사후 수상)
13. 작품 목록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 목록에는 그의 초기 무성 영화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기 유성 영화, 그리고 감독 외의 다양한 참여작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현재 유실된 상태이다.
13.1. 감독 작품
아래 목록에서 '×' 표시는 필름이 현존하지 않는 유실 영화를, '〇' 표시는 무성 영화를, '□' 표시는 사운드판 영화를, '◎' 표시는 컬러 영화를 의미한다.
연도 | 영화 제목 | 로마자 표기 | 제작사 | 각본 | 주연 배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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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영화, 흑백 | ||||||
1923 | 사랑에 되살아나는 날 | Ai ni yomigaeru hi | 닛카쓰 도쿄 | 와카이 오사무 | 야마모토 가이치, 모리 기요시, 오구리 다케오, 고이즈미 가스케 | 60분 ×〇 |
고향 | Kokyō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요시다 도요사쿠, 오구리 다케오, 미나미 미쓰아키 | ×〇 | ||
청춘의 꿈길 | Seishun no yumeji | 요시무라 데쓰야, 미야지마 후미오, 사카이 요네코 | ×〇 | |||
정염의 항구 | Jōen no chimata | 미나미 미쓰아키, 모리 기요시, 미마스 유타카, 오구리 다케오 | ×〇 | |||
패잔의 노래는 슬퍼 | Haizan no uta wa kanashi | 요시다 도요사쿠, 사와무라 하루코, 미야지마 후미오 | ×〇 | |||
813 | 다나카 소이치로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미쓰아키, 호시노 히로키, 아오야마 마리코, 세가와 쓰루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안개의 항구 | Kiri no minato | 다나카 소이치로 | 이치카와 하루에, 사와무라 하루코, 모리 에이지로,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밤 | Yoru | 미조구치 겐지 | 가쓰라기 고이치, 호세 가오루, 사카이 요네코, 이나가키 히로시, 고미 구니오 | ×〇 | ||
폐허 속에서 | Haikyo no naka | 사와무라 하루코, 가쓰라기 고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피와 영혼 | Chi to rei | 에구치 지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미즈시마 료타로, 사카이 요네코, 미마스 유타카 | ×〇 | |||
고갯길의 노래 | Tōge no uta | 닛카쓰 교토 | 야마모토 가이치, 사와무라 하루코, 미마스 유타카, 호리 다카코,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1924 | 슬픈 백치 | Kanashiki hakuchi | 다카시마 다쓰로 | 고이즈미 가스케, 사카이 요네코, 가쓰라기 고이치, 다카기 마스지로 | ×〇 | |
새벽의 죽음 | Akatsuki no shi | 닛키 | 이토 마쓰오 | 고이즈미 가스케, 스즈키 우타코, 사와무라 하루코, 기타 시게루, 미즈시마 료타로 | ×〇 | |
현대의 여왕 | Gendai no joō | 닛카쓰 교토 | 무라타 미노루 | 사카이 요네코, 미나미 미쓰아키, 미마스 유타카 | ×〇 | |
여성은 강하다 | Josei wa tsuyoshi | 닛카쓰 문학회 |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마쓰모토 시즈에, 미야베 시즈코, 기타 시게루 | ×〇 | ||
티끌 세계 | Jinkyō | 다나카 소이치로 | 스즈키 덴메이, 다카기 에이지, 우라베 쿠메코 | ×〇 | ||
칠면조의 행방 | Shichimenchō no yukue | 하타모토 슈이치 | 기타무라 준이치, 다카기 에이지, 도쿠가와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이토 순경의 죽음 | Itō junsa no shi | 닛카쓰 문학회 | 사토 엔지, 하야시 마사오 | ×〇 | ||
장마철 일기 | Samidare zōshi | 고주 요코야마 | 스즈키 우타코, 가쓰라 데루코, 고이즈미 가스케, 이나가키 히로시 | ×〇 | ||
사랑을 끊는 도끼 | Koi o tatsu ono | 구스야마 리쓰 | 우라베 쿠메코, 와카바 가오루, 미마스 유타카, 고이즈미 가스케 | ×〇 | ||
환락의 여인 | Kanraku no onna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미마스 유타카, 사카이 요네코, 요시다 도요사쿠 | ×〇 | ||
곡예단의 여왕 | Kyokubadan no joō | 우라베 쿠메코, 스즈키 덴메이, 곤도 이요키치 | ×〇 | |||
1925 | 아, 특무함 간토 | Ā tokumukan Kantō | 나카무라 히데오, 나카하라 미쓰오, 미나미 미쓰아키,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 ×〇 | ||
빈털터리 싸움 없음 | Uchien Puchan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라베 쿠메코, 미즈키 교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학창을 벗어나 | Gakusō wo idete | 미조구치 겐지 | 미나미 고메이, 미마스 유타카, 모리 기요시, 다카시마 아이코, 곤도 이요키치 | ×〇 | ||
대지는 미소 짓는다 제1편 | Daichi wa hohoemu (T1) | 하타모토 슈이치 | 다카기 에이지, 나카노 에이지, 우메무라 요코, 히가시보 야스나가 | ×〇 | ||
백합은 한탄한다 | Shirayuri wa nageku | 시미즈 류노스케 |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미코시바 모리오, 곤도 이요키치,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붉은 석양에 비추어 | Akai yūhi ni terasarete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미쓰아키 미나미, 와타나베 구니오, 이토 신키치, 우메무라 요코 | ×〇 | ||
고향의 노래 | Furusatonouta | 닛카쓰 | 시미즈 류노스케 | 기타 시게루, 다카기 마스지로, 이토 주에코, 쓰지 미노코, 가와마타 켄타로 | 50분 〇 | |
소품 영화집 거리의 스케치 | Shōhin eiga-shū: Machi no sketch | 미조구치 겐지 | 히가시보 야스나가, 오카다 요시코, 호시노 히로키, 다카기 에이지 | ×〇 | ||
인간 전편, 후편 | Ningen: kōhen | 하타모토 슈이치 |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다카기 에이지, 이치카와 하루요, 반도 도모에 | ×〇 | ||
노기 장군과 쿠마상 | Nogi shōgun to Kuma-san | 야마모토 가이치, 고이즈미 가스케, 이소가와 긴노스케,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26 | 동전 왕 | Dōka-ō | 미조구치 겐지 | 가토 시로, 사이조 가요코 | ×〇 | |
종이 인형 봄의 속삭임 | Kaminingyō no haru no sasayaki | 신게키 | 미조구치 겐지 | 야마모토 가이치, 시마 고지, 우메무라 요코, 이치카와 하루에, 오카다 도키히코 | ×〇 | |
신설 오노가 쓰미 | Shinsetsu ono ga tsumi | 닛카쓰 | 미조구치 겐지 | 스나다 코마코,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이치카와 하루에, 오노에 마쓰바 | ×〇 | |
광염의 여사부 | Kyōren no onna shishō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사카이 요네코,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요시코, 고이즈미 가스케, 다나카 하루오 | ×〇 | ||
해국 남자 | Kaikoku danji | 고바야시 마사시 야마모토 가지로 | 히로세 쓰네미, 네기시 도이치로, 미코시바 모리오, 스나다 코마코, 시바야마 이치로 | ×〇 | ||
돈 | Kane | 하타모토 슈이치 다케다 아키라 | 고이즈미 가스케, 고마쓰 미도리, 다니 가니치 | ×〇 | ||
1927 | 황은 | Kōon | 하타모토 슈이치 | 이치카와 하루에, 다카기 에이지, 미나미 미쓰아키, 다키하나 히사코, 야마모토 가이치 | ×〇 | |
자비심 조 | Jihi shinchō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나카노 에이지, 오카다 도키히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
1928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1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1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쓰시마 류코, 이치카와 하루에, 네기시 도이치로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2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2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네기시 도이치로, 히사코 다키하나, 하루에 이치카와 | ×〇 | ||
한 남자의 일생 인생만사 돈 편3 | Hito no isshō - Jinsei banji kane no maki: 3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도이치로 네기시, 히사코 다키하나 | ×〇 | ||
귀여운 딸 | Musume kawaiya | 하타모토 슈이치 | 고이즈미 가스케, 기타하라 나쓰에, 스기야마 쇼조 | ×〇 | ||
1929 | 니혼바시 | Nihonbashi | 다하토 | 곤도 게이이치 | 오카다 도키히코, 우메무라 요코, 사카이 요네코, 다카기 에이지, 나쓰카와 시즈에 | ×〇 |
아침 해는 빛난다 | Asahi wa kagayaku | 기무라 지히오 | 나카노 에이지, 무라타 히로토시, 도이 헤이타로, 사와 란코 | ×〇 | ||
도쿄 행진곡 | Tōkyō kōshinkyoku | 기무라 지히오 | 나쓰카와 시즈에, 다카기 에이지,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도회 교향악 | Tokai kokyōkyoku | 오카다 사부로 |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이리에 다카코, 다카기 에이지 | ×〇 | ||
1930 |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 | Fujiwara Yoshie no furusato | 기사라기 사토시 | 후지와라 요시에, 나쓰카와 시즈에, 고스기 이사무 | ×〇 | |
도진 오키치 | Tōjin Okichi | 하타모토 슈이치 | 야마모토 가이치, 우메무라 요코, 시마 고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
1931 | 게다가 그들은 간다 전편 | Shikamo karera wa yu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게다가 그들은 간다 후편 | Shikamo karera wa iku | 하타모토 슈이치 | 우메무라 요코, 우라베 쿠메코, 다카쓰 아이코, 스가이 이치로 | ×〇 | ||
1932 | 때의 씨앗 | Toki no ujigami | 하타모토 슈이치 | 시마 고지, 나쓰카와 시즈에 | × | |
만주몽골 건국의 여명 | Manmō kenkoku no reimei | 이리에 프로 | 우에시마 료 마스다 신지 | 이리에 다카코, 나카노 에이지, 마쓰모토 다이스케, 야마켄 나오요, 가쓰라 다마코 | × | |
1933 | 폭포의 흰 실 | Taki no shiraito | 신흥 | 히가시보 야스나가 | 이리에 다카코, 오카다 도키히코, 무라타 히로토시, 스가이 이치로, 미아케 본타로 | ×〇 |
기온 축제 | Gion matsuri | 미조구치 겐지 | 모리 시즈코, 오카다 도키히코, 스즈키 스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라베 쿠메코 | ×〇 | ||
1934 | 진푸렌 | Jinpu-ren | 이리에 프로 | 미조구치 겐지 | 이리에 다카코, 쓰키가타 류노스케, 고스기 이사무, 나카노 에이지, 다키하나 히사코 | ×〇 |
유성 영화, 흑백 | ||||||
1934 | 애증 고개 | Aizō tōge | 다마가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스즈키 덴메이, 이치카와 고분지, 하라 고마코 | 102분 □ |
1935 | 학 오센 | Oridzuru o sen | 다이이치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나쓰카와 다이지로, 요시자와 이치로, 시바타 신, 도리이 다다시 | 96분 □ |
마리아의 오유키 | Maria no Oyuki | 다카시마 | 야마다 이스즈, 하라 고마코, 나쓰카와 다이지로, 나카노 에이지, 우타가와 기누에 | × | ||
아가씨 오키치 | Ojō Okic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하라 고마코, 아사카 신하치로, 시바타 아라타 | × | ||
우미인초 | Gubijinsō | 다카야나기 하루오 | 나쓰카와 다이지로, 쓰키다 이치로, 다케다 가즈요시, 오쿠라 지요코 | 75분 | ||
1936 | 첫 모습 | Hatsu sugata | 다카야나기 하루오 | 쓰키다 이치로, 오쿠라 지요코, 우메무라 요코, 고이즈미 가스케, 가쓰라기 고이치 | × | |
나니와 엘레지 | Naniwa hika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오쿠라 지요코, 신도 에이타로, 아사카 신하치로 | 89분 | ||
기온의 자매들 | Gion no kyōdai | 요다 요시카타 | 야마다 이스즈, 우메무라 요코, 시가노야 단카이, 신도 에이타로 | 95분 | ||
1937 | 애원 협 | Aien kyo | 신흥 | 요다 요시카타 | 야마지 후미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시미즈 마사오, 미마스 유타카 | 108분 |
1938 | 노영의 노래 | Roei no uta | 하타모토 슈이치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스가이 이치로, 우타가와 야에코, 다나카 하루오 | 82분 × | |
아아, 고향 | Aa kokyo | 요다 요시카타 | 가와즈 세이자부로, 야마지 후미코, 시미즈 마사오, 가토 세이이치, 야마구치 이사무 | 64분 × | ||
1939 | 마지막 국화 이야기 | Zangiku monogatari | 쇼치쿠 | 요다 요시카타 | 하나야기 쇼타로, 가와라사키 곤주로, 우메무라 요코, 다카다 히로시키치 | 146분 |
1940 | 나니와 온나 | Naniwa onna | 요다 요시카타 | 반도 고타로, 다나카 기누요, 다카다 고키치, 가와나미 료타로 | 145분 × | |
1941 | 예도 일대 남자 | Geidō ichidai otoko | 자제 | 요다 요시카타 | 나카무라 간지로, 다카다 고키치, 하야시 나리토시, 아라시 요시자부로 | 101분 × |
겐로쿠 주신구라 전편 | Genroku Chūshingura 1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스에몬 나카무라, 가와라사키 구니타로, 이치카와 우타에몬 | 112분 | ||
1942 | 겐로쿠 주신구라 후편 | Genroku Chūshingura 2 | 쇼치쿠 | 하라 켄이치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카미네 미에코, 우메무라 요코 | 111분 |
1944 | 단주로 3대 | Danjuro sanda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이이즈카 도시코, 사와무라 아키오, 쿄 마치코, 다나카 기누요 | 65분 × | |
미야모토 무사시 | Miyamoto Musashi | 가와구치 마쓰타로 | 가와라사키 초주로, 나카무라 가네몬, 다나카 기누요 | 55분 | ||
1945 | 명검 비녀마루 | Meitō bijomaru | 가와구치 마쓰타로 | 하나야기 쇼타로, 야마다 이스즈, 오야 이치지로, 야나기 에이지로 | 67분 | |
필승가 | Hisshōka | 시미즈 히로시 | 사노 슈지, 오야 이치지로, 다나카 기누요, 고스기 이사무, 우에하라 켄 | 117분 | ||
1946 | 여성의 승리 | Josei no shōri | 노다 고고 | 다나카 기누요, 구와노 미치코, 다카하시 도요코, 미우라 미쓰코 | 84분 | |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 여인들 | Utamaro o meguru gonin no onna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반도 고타로, 가와사키 히로코, 이이즈카 도시코 | 74분 | ||
1947 | 여배우 스마코의 사랑 | Joyū Sumako no ko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무라 사토시, 히가시노 에이지로, 센다 고레야, 아오야마 스기사쿠 | 96분 | |
1948 | 밤의 여인들 | Yoru no onnatachi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다카스기 사나에, 쓰노다 도미에, 나가타 미쓰오, 무라타 히로토시 | 75분 | |
1949 | 내 사랑은 불탔었지 | Waga koi wa moenu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미토 미쓰코, 오자와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미야케 쿠니코 | 84분 | |
1950 | 유키 부인 그림 | Yuki fujin ezu | 도호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우에하라 켄, 쿠가 요시코, 하마다 유리코, 야마무라 사토시 | 88분 |
1951 | 오유우님 | Oyū-sama | 다이에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오토와 노부코, 호리 유지, 야나기 에이지로, 신도 에이타로 | 95분 |
무사시노 부인 | Musashino fujin | 도호 | 가와구치 마쓰타로 | 다나카 기누요, 도도로키 유키코, 모리 마사유키, 가타야마 아키히코, 야마무라 사토시 | 92분 | |
1952 |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Saikaku ichidai onna | 코이 | 요다 요시카타 | 다나카 기누요, 야마네 히사코, 미후네 도시로, 우노 시게요시, 스가이 이치로 | 148분 |
1953 | 우게쓰 이야기 | Ugetsu monogatari | 다이에이 | 야히로 후지 | 쿄 마치코, 미토 미쓰코, 다나카 기누요, 모리 마사유키, 오자와 사카에 | 97분 |
기온바야시 | Gion bayashi | 요다 요시카타 | 고구레 미치요, 와카오 아야코, 가와즈 세이자부로, 신도 에이타로, 스가이 이치로 | 85분 | ||
1954 | 산쇼 다유 | Sanshō dayū | 야히로 후지 | 다나카 기누요, 하나야기 요시아키, 가가와 교코, 신도 에이타로, 고노 아키타케 | 124분 | |
소문의 여자 | Uwasa no onna | 나루사와 마사시게 | 다나카 기누요, 오타니 유에몬, 쿠가 요시코, 신도 에이타로, 나니와 지에코 | 84분 | ||
근친 이야기 | Chikamatsu monogatari | 요다 요시카타 | 하세가와 가즈오, 가가와 교코, 미나미다 요코,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사카에 | 102분 | ||
1956 | 적선지대 | Akasen chitai | 나루사와 마사시게 |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고구레 미치요, 이코 산에키, 마치다 히로코 | 86분 | |
컬러 영화 | ||||||
1955 | 양귀비 | Yōkihi | 다이에이 | 도에 칭 | 쿄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야마무라 사토시, 신도 에이타로, 오자와 에이 | 108분 |
신 헤이케 이야기 | Shin Heike monogatari | 쓰지 히사카즈 | 이치카와 라이조, 쿠가 요시코, 하야시 나리토시, 고구레 미치요, 오야 이치지로 | 98분 |
13.2. 기타 작품
- 교코와 시즈코(1926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아리산의 협아(1927년, 다사카 도모타카 감독) - 응원 감독
- 지구는 돈다(1928년, 다사카 도모타카, 아베 유타카, 우치다 도무 감독) - 고문 감독
- 울산 앞바다의 회전(1928년, 히가시보 쿄초, 하타모토 슈이치 감독) - 총지휘
- 1931년 닛카쓰 온 퍼레이드(1931년, 아베 유타카 감독) - 출연
- 첫 모습(1936년, 사카네 다즈코 감독) - 감독 보도
- 맑은 옷소매(1940년, 우시하라 키요히코 감독) - 구성
- 피의 창 후지(1955년, 우치다 도무 감독) - 기획 협력
- 기온의 자매들(1956년, 노무라 히로마사 감독) - 원작
- 오사카 이야기(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 - 원작
; 라디오 드라마
- 흙(1937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추억의 기록(1938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요시노 쿠즈(1939년, NHK 라디오 제1방송) - 연출
; 무대
- 학 오센(1935년, 오사카 극장) - 연출
14. 죽음
1956년, 미조구치는 마지막 감독 작품인 《적선지대》를 촬영했는데, 그 전후로 좋아하는 술이 맛없다고 하거나 잇몸에서 피가 나는 등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이 작품 완성 후, 미조구치는 다음 작품으로 《오사카 이야기》의 제작 준비를 시작했으나, 이때도 저녁이 되면 미열이 나고 발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 5월에 제작 준비를 중단하고 교토부립 의과대학 부속 병원의 특별 병동에 입원했다. 미조구치는 골수성 백혈병으로 진단받았으나, 병명은 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나가타 마사이치 등 다이에이 수뇌부에만 알려졌다. 미조구치는 매일 수혈을 받았지만, 백혈병은 불치병이었기에 회복되지 못하고 8월 24일 오전 1시 55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전날에는 "이제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빨리 촬영소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미조구치 작품의 미술 감독을 맡았던 미즈타니 히로시는 미조구치의 사망 당일에 데스 마스크를 제작했다.
8월 30일,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다이에이 주관으로 회사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법명은 조코인덴 에이토쿠닛켄 거사이다. 묘소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의 자원(子院)인 다이보 혼교지에 세워졌다. 교토의 만간지에도 분골되어 비석이 세워졌는데, 나가타 마사이치가 비석 측면에 "세계적 명감독"이라고 새기게 했다. 미조구치의 부고는 마침 열리고 있던 제1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회장에도 전해져, 출품되어 있던 《적선지대》 상영에 앞서 추도사가 헌정되었다. 촬영까지 이르지 못했던 《오사카 이야기》는 1957년 요시무라 코자부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케이 신문사 주최로 일본 영화 최우수 작품의 감독과 스태프에게 주어지는 '미조구치 상'이 창설되었으나, 시상은 불과 3회로 종료되었다.
15. 평가 및 영향

미조구치는 1930년대부터 일본 영화계에서 굴지의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키노시타 케이스케 등과 함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15.1. 비평적 평가
일본의 영화 비평가들로부터는 여성을 그리는 데 가장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아 왔다. 이와사키 아키라는 "일본 영화 작가 중에서 여성을 그린 이가 결코 적지 않지만, 아직도 미조구치 이후 미조구치 이전과 같은 이가 없다"고 평했으며, 츠무라 히데오 또한 "인생 유전의 극한에서 인간의 모습,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는 데는 당대에 견줄 자 없는 명인"이라고 평했다. 영화 감독 이치카와 곤은 "얼핏 여성을 보는 눈이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따뜻한 부분이 있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에는 경의를 표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리얼리즘 작가"로서도 높이 평가받으며, 특히 《나니와 엘레지》와 《기온의 자매들》은 일본 영화에 본격적인 리얼리즘이 확립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후에는 "원 장면-원 샷 기법 때문에 템포가 느리다", "소재가 고루하고 전근대적이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2. 후대에 미친 영향
1950년대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작품이 수상한 이후, 그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영화 비평지 《Cahiers du Cinéma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어》의 동인이자 작가주의 비평을 펼친 젊은 비평가들인 장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등이 미조구치를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발표하는 연간 작품 톱 텐에서는 1959년에 《우게쓰 이야기》가 1위에 선정되었고, 다음 1960년에는 《산쇼 다유》도 1위에 선정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미조구치를 일본 영화나 서양 영화라는 틀을 넘어선, 세계 공통의 영화 언어인 미장센을 가진 보편적인 영화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고다르는 미조구치를 "가장 위대한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경도되었고, 1966년 일본 방문 시 미조구치의 비석을 찾기도 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은 1950년대 후반 영화 감독이 되어 누벨 바그의 기수로 활약했는데, 그들의 작품에서도 미조구치 작품의 영향이 엿보였다. 리베트의 《수도녀》(1966)는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독 자신이 분명히 밝혔다. 고다르는 《경멸》(1963)의 후반부 바다로 패닝하는 장면에서 《산쇼 다유》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다. 고다르는 《미치광이 피에로》(1965)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유사한 오마주를 했으며, 더 나아가 《메이드 인 USA》(1966)에서는 코사카 교코가 연기하는 "도리스 미조구치"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누벨 바그 외의 감독들 중에서는 미조구치와 마찬가지로 롱 테이크와 이동 촬영에 능숙한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그 스타일에서 미조구치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또한 미조구치의 유려한 카메라워크에 영향을 받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우게쓰 이야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그 외에도 장 유스타슈, 오슨 웰스, 빅토르 에리세,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코세이지, 아리 애스터 등의 감독들이 미조구치를 높이 찬양하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톰슨은 "감정적인 생각이나 지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미조구치 영화에서 파생된 영화의 정의이다. 그는 외적 시야에서 내적 상태를 구현하는 데 최고이다"라고 썼다.
1975년, 미조구치 밑에서 세트 디자이너, 수석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던 신도 카네토는 그의 스승에 관한 다큐멘터리 《어느 영화 감독의 생애 미조구치 겐지의 기록》을 개봉했으며, 1976년에는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신도는 그의 자전적인 데뷔 영화 《애처 이야기》(1951)에서도 젊은 시나리오 작가를 키우는 감독 "사카구치" 캐릭터를 통해 미조구치를 언급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사이트 & 사운드》지의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100선"(우게쓰 이야기와 산쇼 다유), 키네마 준보의 "키네마 준보 비평가 톱 200"(오하루의 일생, 우게쓰 이야기, 근친 이야기)과 같은 "최고의 영화" 설문 조사에 꾸준히 등장했다. 2014년 움직이는 이미지 박물관과 국제교류기금이 주최한 그의 현존하는 영화 30편 회고전이 여러 미국 도시를 순회하기도 했다.
15.3. 수상 경력
- 1936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일본 영화 베스트 텐 1위 (《기온의 자매들》)
- 195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국제상 (《사이카쿠 이치다이 온나》)
- 1953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쓰 이야기》)
- 195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산쇼 다유》)
- 1954년: 블루 리본상 감독상 (《근친 이야기》)
- 1955년: 예술선장 (《근친 이야기》)
- 1955년: 자수훈장
- 1956년: 훈4등 서보장 (사후 추서)
- 1956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특별상 (사후 수상)
- 1956년: 블루 리본상 일본 영화 문화상 (사후 수상)
16. 외부 링크
- [https://www.imdb.com/name/nm0003226/ 미조구치 겐지 IMDb]
- [https://www.sensesofcinema.com/2002/great-directors/mizoguchi/ 알렉산더 제이코비: "미조구치 겐지". 센시스 오브 시네마]
- [https://harvardfilmarchive.org/programs/the-tales-and-tragedies-of-kenji-mizoguchi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미조구치 겐지의 이야기와 비극]
- [https://www.bfi.org.uk/lists/kenji-mizoguchi-10-essential-films 재스퍼 샤프: "미조구치 겐지: 10가지 필수 영화". 영국 영화 연구소]
- [https://info.japantimes.co.jp/weekly/feature/fl20060826aj.htm 알렉산더 제이코비: "미조구치 겐지: 영화 거장의 지속적인 관련성". 재팬 타임스 위클리]
- [http://www.filmref.com/directors/dirpages/mizoguchi.html Acquarello: "미조구치 겐지". 스트릭틀리 필름 스쿨]
- [http://www.chicagoreader.com/movies/archives/0297/02077.html 프레드 캠퍼: "공간 속의 모험: 47인의 충신". 시카고 리더]
- [http://www.latrobe.edu.au/screeningthepast/firstrelease/fr1201/ckfr13a.htm 치카 키노시타: "욕망의 안무: 미조구치 영화 속 다나카 키누요의 연기 분석". 스크리닝 더 패스트]
- [http://www.latrobe.edu.au/screeningthepast/firstrelease/fr1201/tgfr13b.htm 태그 갤러거: "미조구치와 자유". 스크리닝 더 패스트]
- [http://www.brightlightsfilm.com/22/mizoguchi.html 게리 모리스: "움직이는 정신: 미조구치 겐지의 세계". 브라이트 라이츠 필름 저널]
- [http://enjoyment.independent.co.uk/film/features/story.jsp?story=308551 데이비드 톰슨: "우게쓰 모노가타리". 인디펜던트]
- [https://www.mcjp.fr/fr/kenji-mizoguchi 파리 일본 문화원: 미조구치 겐지]
- [https://www.cinematheque.fr/media/mizoguchi.pdf 프랑스 시네마테크: 미조구치 겐지 (PDF)]
- [https://www.cinelounge.org/Perso/94/Kenji-Mizoguchi 에릭 로메르: 미조구치 겐지]
- [https://offscreen.com/view/mizoguchi 오프스크린: 미조구치]
- [https://www.nikkatsu.com/movie/12894.html 닛카쓰: 1931년 닛카쓰 온 퍼레이드]
- [https://www.shochiku.co.jp/cinema/database/02285/ 쇼치쿠: 게이도 이치다이 오토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