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마리아 마자렐로의 생애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어, 질병과 깊은 성찰을 통해 교육과 봉사의 소명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1. 어린 시절과 배경
마리아 마자렐로는 1837년 5월 9일, 북부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주 모르네세에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농민 가정의 열 자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요셉과 막달레나 칼카뇨 마자렐로였으며, 특히 부모는 신앙심이 깊었다. 마자렐로가 15세 되던 해, 그녀는 본당 사제인 도메니코 페스타리노 신부가 이끌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 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자선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훗날 살레시오 수녀회 창설의 전신이 되었다. 마리아는 이 협회에서 합리적인 판단력, 헌신적인 태도, 즐거운 마음, 그리고 젊은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동네 아이들이 자석처럼 그녀를 따랐고, 그녀와 어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1.2. 질병과 전환점
마리아 마자렐로가 23세가 되던 1860년, 모르네세 마을에 장티푸스 유행병이 휩쓸어 많은 주민들이 감염되어 사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모와 이모부 또한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마리아는 자원하여 그들과 그들의 많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일주일 후, 병자들은 회복되었지만,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렸다. 병세가 심각하여 병자성사를 받았으며, 병에서 회복되었으나 이전과 같은 강건함은 사라지고 몸이 허약해졌다. 밭일을 할 때의 강인한 체력은 더 이상 없었고, 그녀는 가늘고 연약한 몸이 되었다.
이 병을 겪으며 그녀는 삶의 목적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회복 후 10월의 어느 날, 마리아는 마을을 걷던 중 갑자기 눈앞에 넓은 안뜰과 많은 소녀들이 즐겁게 놀고 웃는 큰 건물을 보게 되었다. 이때 "내가 그들을 너에게 맡긴다"는 목소리를 들었고, 이 경험은 그녀의 소명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3. 교육 활동과 사역
19세기에는 소녀들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특히 절실했다. 도시에는 시골에서 온 농장 소녀들, 하녀들, 공장 노동자들,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소녀들이 가득했으며, 이들 모두는 미성년자 성매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이러한 소녀들을 교육하고 기술을 가르쳐 거리 생활의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몇몇 친구들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했고, 15명의 젊은 여성들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 협회'를 구성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이들에게 영적인 삶을 훈련시키는 데 힘썼고, 일부가 수도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모르네세에서 수도 생활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은 소수의 어린 소녀들을 받아들여 숙식을 제공하고, 신앙을 가르치며 재봉 기술을 전수했다.
2. 살레시오 수녀회 창립
마리아 마자렐로는 요한네스 보스코와의 협력을 통해 1872년 '마리아 돕는 분의 딸들'(扶助者聖母マリアの娘たち후조샤세이보마리아노무스메타치일본어, Daughters of Mary Help of Christians)이라는 수도회를 공동 창립하며, 젊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 복지 활동을 체계화했다.
페스타리노 신부는 자신이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여 성인 요한네스 보스코의 지도를 받던 중,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에 대해 보스코에게 알렸다. 보스코는 젊은 소녀들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고려하여 이들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오라토리오 기금 마련을 명목으로 소년 음악단과 함께 모르네세로 갔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을 기반으로 남성 살레시오 수도회의 여성 분과를 설립할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1867년, 보스코는 이들을 만난 후 자신의 제안에 대한 '원죄 없으신 성모의 딸들'의 열정적인 반응을 확인하고, 그들의 첫 번째 회칙을 작성했다. 공동체의 좋은 정신, 유머 감각, 낙천주의, 그리고 자선의 원천이었던 마리아 마자렐로는 초대 총장으로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다. 결국 순종의 미덕이 승리하여 그녀는 30세의 나이에 젊은 공동체의 초대 어머니(총장)가 되었다.
많은 양성 기간과 어려움, 선의였으나 잘못된 조언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의 갈등(마을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지은 남자 학교가 보스코에 의해 소녀들의 활동을 위해 '딸들'에게 넘겨진 일) 끝에, 서원식이 거행되었다. 마리아 마자렐로가 이끄는 15명의 젊은 여성들은 아퀴 교구장과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보스코, 그리고 페스타리노 신부 앞에서 수도 서원을 했다. 1872년 7월 31일은 이 새로운 수도 가족의 탄생일이었다. 35세의 나이에 수도복을 입은 그녀는 이제 마리아 마자렐로 수녀가 되었다. 그녀와 새로 서원한 14명의 수녀들이 이 신생 수도회를 구성했다. '마리아 돕는 분의 딸들'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보스코는 마리아에게 모든 수녀들을 소집하여 총장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임시로 총장직을 수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살레시오 수도 가족의 여성 분과로서 '마리아 돕는 분의 딸들'은 토리노에서 사제들과 수사들이 소년들을 위해 하던 일을 소녀들을 위해 하고자 노력했다.
살레시오 수녀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후, 마리아 마자렐로는 자신과 다른 수녀들이 읽고 쓰는 능력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는 많은 수녀들이 이전에는 얻을 기회가 없었던 기술이었다. 그녀의 헌신은 수녀들의 지적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세심한 어머니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살레시오 수녀들은 그녀를 "마자렐로 어머니"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다.
2.1. 선교 활동
1877년, 첫 선교 수녀들이 우루과이로 떠났다. 마자렐로 어머니는 그들을 제노바 항구까지 동행한 후, 프랑스에 있는 수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배를 타고 프랑스로 향했다.
마르세유에서 그들이 탄 배가 고장 나 수리해야 했고, 모든 승객들은 배가 건선거에 있는 동안 하선해야 했다. 수녀들은 숙소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착오가 생겨 잠잘 곳이 없게 되었다. 마자렐로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 좌절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가져온 시트를 짚으로 채워 모두를 위한 임시 침대를 만들었다. 비참한 밤을 보낸 후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지만, 마자렐로 어머니는 일어날 수 없었다. 열이 그녀의 몸을 휩쓸고 있었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다음 날 아침, 이미 지쳐 있는 동료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그녀는 간신히 일어나 선교사들을 배웅하고, 남은 수녀들과 함께 생시르쉬르메르에 있는 그들의 집과 고아원으로 향했다.
3. 말년과 죽음
생시르에 도착한 마리아 마자렐로는 쓰러져 40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으며, 흉막염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죽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하며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한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무리하지 않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쳐 귀환 여정을 진행했다. 다행히 여정 중 한 경유지에서 보스코가 가까이 있었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다.
4월 초, 마리아는 니차몬페라토로 돌아왔다. 고향의 공기는 그녀에게 힘을 주었고, 몸이 강해졌다고 느끼자 그녀는 공동체 일정과 평소 업무를 계속하겠다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이는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일이었고, 병이 재발했다. 4월 말경에는 죽음이 임박한 듯 보였다. 마침내 1881년 5월 14일 새벽녘, 마자렐로 어머니는 죽음의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병자성사를 받은 후,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녕히 계세요. 이제 저는 갑니다. 천국에서 만나요." 그녀는 곧이어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시복 시성 및 현양
마리아 마자렐로는 1938년 11월 20일 시복되었고, 1951년 6월 24일 시성되었다. 그녀의 훼손되지 않은 유해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마리아 돕는 분의 성모 대성당에 안치되어 공경받고 있다. 로마 남동부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산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 성당이 있다.

5. 영향 및 평가
마리아 마자렐로의 삶과 그녀가 요한네스 보스코와 함께 공동 창립한 살레시오 수녀회는 교육, 사회 복지,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소녀와 여성들의 삶에 지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업적은 특히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 기회 개선과 사회적 조건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5.1. 교육 및 사회 복지에 대한 기여
마리아 마자렐로의 소명과 그녀가 공동 창립한 살레시오 수녀회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특히 취약했던 소녀들에게 교육과 보호를 제공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소녀들이 빈곤과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마자렐로는 이들에게 재봉 기술과 같은 실용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신앙과 윤리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살레시오 수녀회는 마자렐로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 세계적으로 학교, 직업 훈련 센터, 기숙사, 고아원 등을 설립하여 소외된 젊은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녀의 리더십과 헌신은 수도회가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중요한 사회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도 살레시오 수녀회는 마리아 마자렐로의 교육적 비전과 자비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 특히 소녀와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