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교육
마리벨 빈슨은 1911년 10월 12일 매사추세츠주 윈체스터에서 토머스와 거트루드 빈슨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으며, 마리벨은 태어나면서 케임브리지 스케이팅 클럽의 명예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빈슨은 아홉 살 때 보스턴 아레나에서 코치 윌리 프릭에게 스케이팅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진학하여 1933년에 졸업했으며,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스케이팅에 대한 열정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1.2. 초기 활동
빈슨은 12세에 미국 주니어 여자 싱글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찍이 재능을 드러냈다. 이러한 초기 성공은 그녀가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선수 경력
마리벨 빈슨은 여자 싱글 스케이팅과 페어 스케이팅 두 부문에서 모두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국제 무대와 국내 대회에서 수많은 업적을 달성했다.
2.1. 여자 싱글 스케이팅
빈슨은 1928년부터 1937년까지 전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여자 싱글 부문에서 1934년을 제외하고 매년 우승하며 총 9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미셸 콴과 함께 미국 여자 피겨 스케이팅 최다 우승 기록이다.
국제 대회에서는 1928년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여 4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30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31년과 1932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모두 4위를 기록했다.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932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에서 노르웨이의 소냐 헤니와 오스트리아의 프리치 버거에 이어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1934년 유럽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도 여자 싱글로 출전하여 5위를 기록했다. 북미 선수권 대회에서는 1929년 은메달, 1935년 은메달에 이어 1937년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2.2. 페어 스케이팅
빈슨은 페어 스케이팅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토턴 쿨리지와 팀을 이루어 1928년과 1929년 전미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29년 북미 선수권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조지 힐과 새로운 페어 파트너십을 맺어 1933년, 1935년, 1936년, 1937년 전미국 선수권 대회에서 4번의 우승을 추가했다. 힐과의 파트너십으로 1935년 북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1937년 북미 선수권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1931년과 1936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5위를 기록했으며,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도 힐과 함께 출전하여 5위를 차지했다.
3. 코치 경력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마리벨 빈슨-오웬은 남편 가이 오웬과 함께 쇼에 출연하며 프로 스케이터로 활동했다. 두 딸이 태어난 후에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가이 오웬과 이혼하고, 1952년 아버지의 사망 후에는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윈체스터로 돌아와 보스턴 지역의 스케이트장에서 코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두 딸에게도 스케이팅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었고 직접 지도했다.

빈슨-오웬은 텐리 올브라이트를 지도하여 5번의 전미국 타이틀을 획득하게 했고, 나아가 미국 여자 싱글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녀는 훗날 미국의 최고 스케이팅 강사 중 한 명이 된 프랭크 캐럴을 가르쳤으며, 캐럴은 미셸 콴의 수많은 세계 및 전미국 타이틀과 에반 라이사첵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지도했다.
4. 저술 및 언론 활동
빈슨은 1930년대에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뉴욕 타임스의 최초 여성 스포츠 기자로 활동하며 언론계에 발을 들였다. 그녀는 전업 기자로 일하면서도 대회에 참가하고 메달을 획득하는 등 두 가지 역할을 성공적으로 병행했다.
생전에 그녀는 피겨 스케이팅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 피겨 스케이팅 입문(Primer of Figure Skating영어) - 맥그로힐/휘틀시 하우스 (1938)
- 고급 피겨 스케이팅(Advanced Figure Skating영어) - 맥그로힐/휘틀시 하우스 (1940)
- 피겨 스케이팅의 즐거움(The Fun of Figure Skating영어) - 하퍼 앤 브라더스 (1960)
특히 피겨 스케이팅 입문에서 빈슨은 여성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이 얼음 위에서 입어야 할 복장에 대해 상세히 다루며, 치마의 적절한 길이와 스타일을 제시했다. 그녀는 스케이팅 패션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이 스포츠의 매력을 높인다고 보았다. 피겨 스케이팅 역사가이자 작가인 엘린 케스트바움은 "빈슨은 스케이팅 복장이 운동 능력을 어떻게 표현하고 허용하는지, 그리고 복장 자체의 디자인 요소와 스케이터 신체의 시각적 매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어떻게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적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케스트바움은 빈슨이 여성 스케이터들이 남성보다 자신의 외모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언급했다고 밝혔다.
1961년 전미국 선수권 대회에서는 그녀의 큰딸이자 동명이인인 마리벨 오웬이 파트너 더들리 리처즈와 함께 페어 스케이팅 타이틀을 획득했고, 막내딸인 16세의 로렌스 오웬은 여자 싱글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CBS가 전미국 선수권 대회를 처음으로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면서 오웬 가족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5. 개인적인 삶
마리벨 빈슨은 1938년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가이 오웬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딸, 마리벨 예르사 오웬 (1940년생)과 로렌스 로숀 오웬 (1944년생)이 있었다. 빈슨과 오웬은 1949년에 이혼했으며, 가이 오웬은 3년 뒤인 1952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같은 해 빈슨의 아버지도 사망하자, 그녀는 두 딸과 함께 동부의 윈체스터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6. 비극적인 죽음
1961년 2월 15일, 마리벨 빈슨-오웬은 코치로서, 그리고 그녀의 두 딸은 선수로서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열릴 예정이던 1961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미국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뉴욕시의 아이들와일드 국제공항에서 나머지 미국 대표팀과 함께 사베나 항공 548편에 탑승했다.
야간 비행은 벨기에 브뤼셀에 경유할 예정이었고, 2월 15일 맑은 오전 중 도착했을 때 기장은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다른 활주로에 착륙하기 위해 다시 선회해야 했다. 보잉 707 항공기는 공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벨기에 베르크 마을의 숲이 우거진 농경지로 추락하여 72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 그리고 밭에서 일하던 농부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 피겨 스케이팅 대표팀 18명 전원과 그들의 친척, 친구, 코치 1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1961년 세계 선수권 대회는 취소되었다. 빈슨-오웬과 그녀의 두 딸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마운트 오번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취소된 1961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는 이듬해인 1962년에 프라하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7. 유산 및 평가
마리벨 빈슨-오웬은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7.1. 긍정적인 평가
그녀는 미국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9번의 전미국 선수권 우승 기록은 그녀의 뛰어난 기량을 증명한다. 또한 그녀는 뉴욕 타임스의 최초 여성 스포츠 기자로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장에 기여한 선구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코치로서 텐리 올브라이트와 같은 올림픽 챔피언을 길러내며 미국 피겨 스케이팅의 황금기를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의 삶은 여성 스포츠인으로서의 한계에 도전하고 다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7.2. 비판 및 논란
빈슨의 저서에서 나타난 여성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복장과 외모에 대한 견해는 현대적 관점에서 논의의 여지가 있다. 피겨 스케이팅 역사가 엘린 케스트바움이 분석했듯이, 빈슨은 여성 스케이터들이 남성보다 외모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스포츠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표현 방식에 대한 시대적 관점을 반영하지만, 오늘날에는 성별에 따른 외모 강요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련하여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다.
7.3. 명예의 전당 헌액 및 기념
마리벨 빈슨-오웬은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미국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 1976년 여자 싱글 선수로, 1994년 조지 힐과 함께 페어 부문 선수로, 그리고 2011년 1961년 세계 대표팀 코치 자격으로 총 세 차례 헌액되었다.
- 프로 스케이터 협회 코치 명예의 전당: 2001년 초대 헌액자로, 그녀와 함께 희생된 다섯 명의 코치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 세계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 2002년에 헌액되었다.
그녀의 두 딸인 마리벨 오웬과 로렌스 오웬 또한 2011년 미국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매사추세츠주 윈체스터에는 그녀와 그녀의 딸들을 기리기 위해 빈슨-오웬 초등학교(Vinson-Owen Elementary School영어)가 명명되었다.
8. 주요 대회 결과
8.1. 여자 싱글
대회/연도 | 1926 | 1927 | 1928 | 1929 | 1930 | 1931 | 1932 | 1933 | 1934 | 1935 | 1936 | 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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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 | 4위 | 3위 | 5위 | |||||||||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2위 | 3위 | 4위 | 4위 | 5위 | |||||||
북미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2위 | 2위 | 1위 | |||||||||
유럽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3위 | |||||||||||
전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3위 | 2위 | 1위 | 1위 | 1위 | 1위 | 1위 | 1위 | 1위 | 1위 | 1위 |
8.2. 페어 스케이팅 (조지 힐과 함께)
대회/연도 | 1930 | 1931 | 1932 | 1933 | 1934 | 1935 | 1936 | 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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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 | 5위 | |||||||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5위 | 5위 | ||||||
북미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1위 | 2위 | ||||||
전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2위 | 2위 | 2위 | 1위 | 1위 | 1위 | 1위 |
8.3. 페어 스케이팅 (토턴 쿨리지와 함께)
대회/연도 | 1928 | 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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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3위 | |
전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 1위 | 1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