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딕 윌리엄스(Richard Hirschfeld Williams영어, 1929년 5월 7일 ~ 2011년 7월 7일)는 미국의 메이저 리그 (MLB) 선수, 감독, 코치, 그리고 프런트 오피스 컨설턴트였다. 그는 특히 1967년부터 1969년, 그리고 1971년부터 1988년까지 엄격하고 직설적인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세 번의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와 한 번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 그리고 두 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윌리엄스는 양대 리그에서 페넌트 우승을 차지한 아홉 명의 감독 중 한 명이며, 빌 매키크니에 이어 두 번째로 세 개 이상의 프랜차이즈를 월드 시리즈로 이끈 감독이 되었다. 또한 그는 루 피넬라와 함께 네 개 팀을 90승 이상 시즌으로 이끈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200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 선출을 통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윌리엄스는 1929년 5월 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세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다가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로 이주했다. 그는 패서디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패서디나 시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3. 선수 경력
윌리엄스는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으며, 1951년 브루클린에서 첫 메이저 리그 경기를 치렀다. 우투우타였던 윌리엄스는 신장 1.8 m (6 ft)에 체중 86 kg (190 lb)였다.
초기에는 외야수로 활동했으나, 1952년 8월 25일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어깨가 탈골되는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그는 남은 시즌을 결장했으며, 송구하는 팔이 영구적으로 약해졌다. 그 결과 그는 1루수와 3루수 등 여러 포지션을 익히게 되었고, 메이저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명 높은 "벤치 조키"가 되었다. 그는 다저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13시즌 동안 1,023경기에 출전했다. 윌리엄스는 통산 타율 .260을 기록했으며, 768개의 안타에는 70개의 홈런, 157개의 2루타, 12개의 3루타가 포함되어 있다. 수비에서는 외야수로 456경기, 3루수로 257경기, 1루수로 188경기에 출장했다.
그는 폴 리처즈가 가장 아끼는 선수 중 한 명이었는데, 리처즈가 볼티모어와 휴스턴 콜트 .45s에서 감독 또는 단장으로 재직하던 1956년부터 1962년 사이에 윌리엄스를 네 번이나 영입했다. 그중 한 번은 1961년 4월 12일에 윌리엄스가 딕 홀과 함께 애슬레틱스에서 오리올스로 척 에세지안과 제리 워커를 상대로 트레이드된 것이었다. 그는 휴스턴에서 한 번도 뛰지 않았다. 그는 1962년 10월 12일 오프시즌 "서류상 거래"로 영입된 후, 12월 10일 다른 외야수 캐롤 하디를 상대로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보스턴에서의 2년간의 선수 생활은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었다. 1963년 6월 27일, 윌리엄스는 펜웨이 파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캐치 중 하나에 희생되었다. 그의 장타는 클리블랜드의 우익수 앨 루플로가 담장 위로 뛰어올라 잡은 후 공을 잡은 채 불펜으로 넘어지면서 잡혔다.
3.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팀 | 리그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51 | 브루클린 다저스 | 내셔널 리그 | 23 | 64 | 60 | 5 | 12 | 3 | 1 | 1 | 20 | 5 | 0 | 0 | 0 | - | 4 | - | 0 | 10 | 0 | .200 | .250 | .333 | .583 |
1952 | 36 | 71 | 68 | 13 | 21 | 4 | 1 | 0 | 27 | 11 | 0 | 0 | 1 | - | 2 | - | 0 | 10 | 4 | .309 | .329 | .397 | .726 | ||
1953 | 30 | 60 | 55 | 4 | 12 | 2 | 0 | 2 | 20 | 5 | 0 | 0 | 1 | - | 3 | - | 1 | 10 | 1 | .218 | .271 | .364 | .635 | ||
1954 | 16 | 37 | 34 | 5 | 5 | 0 | 0 | 1 | 8 | 2 | 0 | 0 | 0 | 1 | 2 | - | 0 | 7 | 1 | .147 | .189 | .235 | .424 | ||
1956 | 7 | 7 | 7 | 0 | 2 | 0 | 0 | 0 | 2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286 | .286 | .286 | .571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아메리칸 리그 | 87 | 390 | 353 | 45 | 101 | 18 | 4 | 11 | 160 | 37 | 5 | 5 | 7 | 0 | 30 | 1 | 0 | 40 | 10 | .286 | .342 | .453 | .795 | |
1956 합계 | 94 | 397 | 360 | 45 | 103 | 18 | 4 | 11 | 162 | 37 | 5 | 5 | 7 | 0 | 30 | 1 | 0 | 41 | 10 | .286 | .341 | .450 | .791 | ||
1957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아메리칸 리그 | 47 | 184 | 167 | 16 | 39 | 10 | 2 | 1 | 56 | 17 | 0 | 1 | 3 | 0 | 14 | 3 | 0 | 21 | 6 | .234 | .293 | .335 | .628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67 | 220 | 205 | 33 | 58 | 7 | 0 | 6 | 83 | 17 | 3 | 4 | 1 | 1 | 12 | 0 | 1 | 19 | 7 | .283 | .324 | .405 | .729 | ||
1957 합계 | 114 | 404 | 372 | 49 | 97 | 17 | 2 | 7 | 139 | 34 | 3 | 5 | 4 | 1 | 26 | 3 | 1 | 40 | 13 | .261 | .310 | .374 | .684 | ||
1958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아메리칸 리그 | 128 | 462 | 409 | 36 | 113 | 17 | 0 | 4 | 142 | 32 | 0 | 6 | 10 | 4 | 37 | 4 | 2 | 47 | 17 | .276 | .336 | .347 | .683 |
1959 |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 아메리칸 리그 | 130 | 538 | 488 | 72 | 130 | 33 | 1 | 16 | 213 | 75 | 4 | 1 | 11 | 6 | 28 | 1 | 5 | 60 | 13 | .266 | .309 | .436 | .746 |
1960 | 127 | 466 | 420 | 47 | 121 | 31 | 0 | 12 | 188 | 65 | 0 | 0 | 1 | 5 | 39 | 3 | 1 | 68 | 16 | .288 | .346 | .448 | .794 | ||
1961 | 볼티모어 오리올스 | 아메리칸 리그 | 103 | 340 | 310 | 37 | 64 | 15 | 2 | 8 | 107 | 24 | 0 | 4 | 5 | 5 | 20 | 0 | 0 | 38 | 7 | .206 | .251 | .345 | .596 |
1962 | 82 | 197 | 178 | 20 | 44 | 7 | 1 | 1 | 56 | 18 | 0 | 0 | 2 | 2 | 14 | 0 | 1 | 26 | 8 | .247 | .303 | .315 | .617 | ||
1963 | 보스턴 레드삭스 | 아메리칸 리그 | 79 | 152 | 136 | 15 | 35 | 8 | 0 | 2 | 49 | 12 | 0 | 0 | 0 | 1 | 15 | 0 | 0 | 25 | 3 | .257 | .329 | .360 | .689 |
1964 | 61 | 77 | 69 | 10 | 11 | 2 | 0 | 5 | 28 | 11 | 0 | 0 | 0 | 0 | 7 | 0 | 1 | 10 | 4 | .159 | .247 | .406 | .653 | ||
통산: 13년 | 1023 | 3265 | 2959 | 358 | 768 | 157 | 12 | 70 | 1159 | 331 | 12 | 21 | 42 | 25 | 227 | 12 | 12 | 392 | 97 | .260 | .312 | .392 | .704 |
4. 감독 경력
윌리엄스는 선수 경력을 마친 후, 엄격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리더십 스타일을 통해 여러 메이저 리그 팀을 이끌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독특한 팀 관리 방식은 때로는 선수단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보스턴 레드삭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 여러 팀을 페넌트 우승과 월드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며 그의 역량을 입증했다.
4.1. 보스턴 레드삭스
1964년, 윌리엄스는 선수로서 최저 타율인 .159를 기록한 시즌 후 레드삭스에서 무조건 방출되었다. 35세의 윌리엄스는 경력의 갈림길에 섰다. 리처즈는 그에게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장을 주었지만, 1965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선수 명단에 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레드삭스는 윌리엄스에게 트리플A 팜팀인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시애틀 레이니어스에서 선수 겸 코치직을 제안했다. 야구계에서 선수 이후의 경력을 시작하려던 윌리엄스는 시애틀 제안을 수락했다. 며칠 후, 1965년 제휴 변경으로 보스턴은 최고 마이너 리그 팀을 인터내셔널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로 옮겨야 했다. 이로 인해 레드삭스 트리플A 감독이었던 시애틀 출신 에도 바니는 태평양 북서부에 남기 위해 사임했다. 토론토 감독직이 갑자기 공석이 되자 윌리엄스는 1965년 메이플 리프스의 감독으로 승진했다. 초보 감독으로서 윌리엄스는 강경하고 훈육적인 스타일을 채택했으며, 젊은 레드삭스 유망주들로 가득 찬 팀을 이끌고 2년 연속 거버너스 컵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이후 그는 1967년 레드삭스 감독을 맡기로 1년 계약을 체결했다.
보스턴은 8시즌 연속 패배를 겪고 있었고, 관중 수가 너무 줄어들어 구단주 톰 야키는 팀을 옮기겠다고 위협할 정도였다. 레드삭스에는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팀은 게으른 "컨트리 클럽"으로 알려져 있었다. 칼 야스트렘스키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너무 게을러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윌리엄스는 모든 것을 걸고 선수들에게 규율을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우리는 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경기를 이길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1966년 최하위에서 반 경기 차이로 마감했던 팀에게는 대담한 발언이었다. 레드삭스보다 기록이 나빴던 유일한 팀은 숙적인 뉴욕 양키스였는데, 이들은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7경기 만에 패한 지 불과 2년 만에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윌리엄스는 선수들에게 몇 시간 동안 기본기를 훈련시켰다. 그는 통금 위반에 벌금을 부과하고, 선수들에게 개인의 성공보다 팀의 성공을 우선시하도록 주장했다. 야스트렘스키의 말에 따르면, "딕 윌리엄스는 지난 봄 팀을 맡았을 때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내가 알았을 텐데, 아무도 시즌 내내 윌리엄스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레드삭스는 1967년 윌리엄스가 다저스에서 배운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적용하며 더 나은 야구를 시작했다. 윌리엄스는 노력 부족과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선수들을 벤치에 앉혔고, 심판들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올스타전 휴식기까지 보스턴은 윌리엄스의 약속을 지키며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고, 아메리칸 리그의 네 경쟁팀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미네소타 트윈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근접한 순위를 유지했다. 레드삭스에서 7번째 시즌을 맞이한 외야수 칼 야스트렘스키는 타격 스타일을 풀 히터로 바꾸어 결국 1967년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타율, 홈런(트윈스의 하몬 킬러브루와 동률), 타점에서 리그를 이끌었다.

7월 말, 레드삭스는 원정에서 10연승을 거두고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서 1만 명의 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레드삭스는 5개 팀의 페넌트 레이스에 뛰어들었고, 8월 18일 스타 외야수 토니 코니글리아로가 빈볼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시즌 마지막 주말, 야스트렘스키와 22승 투수 짐 론보그의 활약으로 보스턴은 트윈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했고, 디트로이트는 에인절스와의 시리즈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불가능한 꿈"의 레드삭스는 1946년 이후 첫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차지했으며, 이후 재능이 뛰어나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위대한 밥 깁슨에게 세 번 패하며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월드 시리즈 패배에도 불구하고 레드삭스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자랑이었고, 윌리엄스는 더 스포팅 뉴스로부터 메이저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어 3년 재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계약을 끝까지 채우지 못했다. 1968년, 코니글리아로가 머리 부상에서 복귀하지 못하고 윌리엄스의 두 주력 투수였던 론보그와 호세 산티아고가 팔 부상을 겪으면서 팀은 4위로 떨어졌다. 그는 야스트렘스키와 구단주 야키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1969년, 팀이 아메리칸 리그 동부에서 크게 뒤처진 3위에 머물자, 윌리엄스는 1969년 9월 23일 해고되었고, 남은 9경기 동안 에디 포포스키가 그를 대신했다.
4.2. 오클랜드 애슬레티스
1970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3루 코치로 진 마치 밑에서 일한 후, 윌리엄스는 이듬해 찰리 핀리가 소유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핀리는 캣피쉬 헌터, 레지 잭슨, 살 반도, 버트 캠파네리스, 롤리 핑거스, 조 루디 등 야구계 최고의 재능들을 영입했지만, 선수들은 핀리의 돈벌레 기질과 끊임없는 팀 간섭을 싫어했다. 애슬레틱스 구단주로서 핀리의 첫 10년(1961년~1970년) 동안 그는 총 10번이나 감독을 교체했다.
전임 감독 존 맥나마라로부터 2위 팀을 물려받은 윌리엄스는 1971년 또 다른 뛰어난 젊은 선수인 투수 비다 블루의 활약에 힘입어 애슬레틱스를 101승과 첫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전년도 월드 챔피언이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핀리는 윌리엄스를 1972년 시즌에도 유임시켰고, 이때부터 "오클랜드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애슬레틱스 선수들이 서로 싸우고 야구계의 두발 규정을 무시했다. 장발, 콧수염, 턱수염이 "일반인" 세계에서 유행하면서 핀리는 시즌 중반에 선수들에게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르도록 장려하는 홍보를 결정했다. 핑거스는 그의 상징적인 핸들바 콧수염을 길렀고(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윌리엄스 자신도 콧수염을 길렀다.
물론 1970년대 초 오클랜드 왕조를 진정으로 정의한 것은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재능이었다. 1972년 애슬레틱스는 화이트삭스를 5.5게임 차이로 제치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며, 홈런, 완봉승, 세이브에서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들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타이거스를 격렬한 접전 끝에 물리쳤고, 1972년 월드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하게 되었다. 애슬레틱스의 강타자 잭슨이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신시내티의 "빅 레드 머신"이 우승 후보로 점쳐졌지만, 오클랜드 포수 진 테나스의 홈런 활약과 윌리엄스의 감독으로서의 기동력 덕분에 애슬레틱스는 7차전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하며 1930년 필라델피아에서 뛰던 시절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73년, 윌리엄스는 핀리 시대에 전례 없는 3년 연속 감독직을 맡아 애슬레틱스를 다시 한번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볼티모어를, 1973년 월드 시리즈에서 내셔널 리그 챔피언 뉴욕 메츠를 물리쳤는데, 이 모든 시리즈는 치열한 접전 끝에 한계까지 갔다.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오클랜드는 1961년~1962년 뉴욕 양키스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되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핀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구단주의 간섭에 지쳐 있었고, 월드 시리즈에서 2루수 마이크 앤드루스의 수비 실책에 대해 핀리가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에 화가 난 윌리엄스는 사임했다. 당시 뉴욕 양키스의 구단주로서 첫 시즌을 마친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즉시 윌리엄스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핀리는 윌리엄스가 오클랜드와의 계약 마지막 해를 지켜야 하며 다른 곳에서는 감독을 할 수 없다고 항의했고, 결국 스타인브레너는 대신 빌 버든을 고용했다. 윌리엄스는 애슬레틱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2시즌 이상 감독을 맡은 후 승률을 기록하며 팀을 떠난 최초의 감독이었다.
4.3.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경력의 정점에 있던 윌리엄스는 1974년 시즌을 무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바비 윙클스 감독 아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가 부진하자, 팀 구단주 진 오트리는 핀리의 허락을 받아 윌리엄스와 협상했고, 시즌 중반에 윌리엄스는 다시 메이저 리그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감독 교체는 에인절스의 운명을 바꾸지 못했고, 그들은 윌리엄스의 후임인 앨빈 다크 감독 아래 3년 연속 월드 챔피언십을 차지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22게임 뒤진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전반적으로 윌리엄스의 애너하임 재임 기간은 비참했다. 그는 보스턴과 오클랜드에서 일했던 것만큼 재능 있는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지 못했고, 에인절스 선수들은 윌리엄스의 다소 권위적인 감독 스타일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1975년에도 다시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최하위로 마감했다. 1975년 시즌 동안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빌 리는 에인절스 타자들이 "너무 약해서 보스턴 셰러턴 호텔 로비에서 타격 연습을 해도 샹들리에를 맞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이에 대해 레드삭스와의 경기 전에 실제로 팀이 (위플 볼과 배트를 사용하여) 로비에서 타격 연습을 하도록 지시했고, 호텔 보안 요원이 이를 중단시켰다. 윌리엄스는 1976년 7월 22일 해고되었는데, 당시 에인절스는 5할 승률에서 18게임 뒤처져 있었고 (선수들의 반란이 한창이었다).
4.4. 몬트리올 엑스포스
1977년, 그는 몬트리올로 돌아와 엑스포스의 감독이 되었고, 5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윌리엄스의 감독 경력 중 가장 긴 재임 기간). 엑스포스는 막 107패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최하위를 기록한 상태였다. 팀 사장 존 맥헤일은 보스턴과 오클랜드에서 윌리엄스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가 엑스포스가 마침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윌리엄스는 첫 두 시즌 동안 엑스포스를 설득하여 개선된 모습을 보였지만 5할 승률 미만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9년과 1980년 엑스포스는 페넌트 경쟁팀으로 변모했다. 이 팀은 두 해 모두 90승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승률 시즌이었다. 1979년 팀은 95승을 거두며 몬트리올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많은 승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번 모두 최종 월드 챔피언(1979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1980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윌리엄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엑스포스 팀은 외야수 앙드레 도슨과 포수 게리 카터와 같은 올스타를 포함한 젊은 재능으로 가득했다. 탄탄한 젊은 선수 핵심과 풍부한 팜 시스템을 갖춘 엑스포스는 오랜 기간 동안 우승을 다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강경한 태도는 선수들, 특히 투수들을 소외시켰고, 결국 그의 환영받던 분위기를 사라지게 했다. 그는 투수 스티브 로저스를 "산꼭대기 증후군"을 앓는 사기꾼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저스가 오랫동안 약팀에서 좋은 투수였기 때문에 팀이 강해졌을 때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윌리엄스는 또한 몬트리올 프런트 오피스가 메츠로부터 엘리스 발렌타인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트레이드하여 영입한 마무리 제프 리어든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1981년 엑스포스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자, 윌리엄스는 9월 7일 페넌트 레이스 도중 해고되었다. 그의 온화한 후임인 짐 패닝이 부임하여 리어든을 마무리 역할로 복귀시키자, 고무된 엑스포스는 몬트리올에서의 36년 역사상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릭 먼데이와 최종 월드 챔피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5차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가슴 아픈 패배를 당했다.
4.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그러나 윌리엄스는 오래 실업 상태에 있지 않았다. 1982년, 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맡았다. 1984년까지 그는 파드리스를 첫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챔피언인 시카고 컵스는 (1945년 이후 첫 포스트시즌 진출) 1차전과 2차전을 승리했지만, 윌리엄스의 파드리스는 기적적인 역전승으로 다음 세 경기를 모두 이겨 페넌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4년 월드 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는 스파키 앤더슨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타이거스는 정규 시즌 동안 104승을 거둔 팀이었다. 타이거스가 5경기 만에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윌리엄스와 앤더슨은 모두 앨빈 다크, 조 매카시, 요기 베라와 함께 양대 리그에서 페넌트를 우승한 감독 명단에 합류했다. (이후 토니 라 루사 (2004년), 짐 릴랜드 (2006년), 조 매든 (2016년), 더스티 베이커 (2021년), 그리고 그 파드리스 팀의 백업 포수였던 브루스 보치 (2023년)가 이 그룹에 합류했다.)
파드리스는 1985년에 3위로 떨어졌고, 윌리엄스는 1986년 스프링 트레이닝 직전에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파드리스에서의 그의 기록은 4시즌 동안 337승 311패였다. 2011년 기준으로 그는 팀 역사상 패배 시즌이 없는 유일한 감독이었다. 파드리스에서의 그의 어려움은 팀 사장 발라드 F. 스미스와 단장 잭 맥키언과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윌리엄스는 구단주 (이자 맥도날드 레스토랑 거물) 레이 크록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고용한 인물이었다. 맥키언과 스미스(크록의 사위이기도 했다)는 팀을 인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고, 윌리엄스를 자신들의 계획에 위협으로 보았다. 샌디에이고에서의 임기가 끝나면서 윌리엄스의 감독 경력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4.6. 시애틀 매리너스

또 다른 만년 패배 팀인 시애틀 매리너스가 1986년 척 코티어 감독 아래 첫 28경기 중 19패를 기록하자, 윌리엄스는 5월 9일 거의 10년 만에 다시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로 돌아왔다. 매리너스는 그 시즌에 어느 정도 활기를 보였고, 이듬해에는 5할 승률에 거의 도달했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독단적인 감독 스타일은 새로운 세대의 야구 선수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는 부상에 시달리던 고먼 토마스를 외야수로 기용하려 했으나, 토마스의 의학적 이력, 즉 회전근개 문제 때문에 매리너스 프런트 오피스에 의해 제지당했다. 또한 윌리엄스는 독실한 종교를 가진 매리너스 선수들, 특히 앨빈 데이비스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윌리엄스는 1988년 6월 8일 해고되었는데, 당시 시애틀은 23승 33패로 6위에 머물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감독직이었다. 윌리엄스의 감독 경력 총 승패 기록은 21시즌 동안 1,571승 1,451패였다.
4.7. 연도별 감독 성적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리 | 패배 | 승률 | 순위 | 승리 | 패배 | 승률 | 결과 | |||
보스턴 레드삭스 | 1967 | 162 | 92 | 70 | .568 | 아메리칸 리그 1위 | 3 | 4 | .429 | 월드 시리즈 패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보스턴 레드삭스 | 1968 | 162 | 86 | 76 | .531 | 아메리칸 리그 4위 | - | - | - | - | |
보스턴 레드삭스 | 1969 | 153 | 82 | 71 | .536 | 해고 | - | - | - | - | |
보스턴 레드삭스 총계 | 477 | 260 | 217 | .545 | 3 | 4 | .429 |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71 | 161 | 101 | 60 | .627 | 아메리칸 리그 서부 1위 | 0 | 3 | .000 | ALCS 패배 (볼티모어 오리올스) |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72 | 155 | 93 | 62 | .600 | 아메리칸 리그 서부 1위 | 7 | 5 | .583 | 월드 시리즈 우승 (신시내티 레즈) |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73 | 162 | 94 | 68 | .580 | 아메리칸 리그 서부 1위 | 7 | 5 | .583 | 월드 시리즈 우승 (뉴욕 메츠) |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총계 | 478 | 288 | 190 | .603 | 14 | 13 | .519 |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1974 | 84 | 36 | 48 | .429 | 아메리칸 리그 서부 6위 | - | - | - | - |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1975 | 161 | 72 | 89 | .447 | 아메리칸 리그 서부 6위 | - | - | - | - |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 1976 | 96 | 39 | 57 | .406 | 해고 | - | - | - | - | |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총계 | 341 | 147 | 194 | .431 | 0 | 0 | - | ||||
몬트리올 엑스포스 | 1977 | 162 | 75 | 87 | .463 | 내셔널 리그 동부 5위 | - | - | - | - | |
몬트리올 엑스포스 | 1978 | 162 | 76 | 86 | .469 | 내셔널 리그 동부 4위 | - | - | - | - | |
몬트리올 엑스포스 | 1979 | 160 | 95 | 65 | .594 | 내셔널 리그 동부 2위 | - | - | - | - | |
몬트리올 엑스포스 | 1980 | 162 | 92 | 70 | .568 | 내셔널 리그 동부 2위 | - | - | - | - | |
몬트리올 엑스포스 | 1981 | 55 | 30 | 25 | .545 | 내셔널 리그 동부 3위 | - | - | - | - | |
26 | 14 | 12 | .538 | 해고 | |||||||
몬트리올 엑스포스 총계 | 727 | 380 | 347 | .523 | 0 | 0 |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1982 | 162 | 81 | 81 | .500 | 내셔널 리그 서부 4위 | - | - | - |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1983 | 162 | 81 | 81 | .500 | 내셔널 리그 서부 4위 | - | - | - |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1984 | 162 | 92 | 70 | .568 | 내셔널 리그 서부 1위 | 4 | 6 | .400 | 월드 시리즈 패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1985 | 162 | 83 | 79 | .512 | 내셔널 리그 서부 3위 | - | - | - | - |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총계 | 648 | 337 | 311 | .520 | 4 | 6 | .400 | ||||
시애틀 매리너스 | 1986 | 133 | 58 | 75 | .436 | 아메리칸 리그 서부 7위 | - | - | - | - | |
시애틀 매리너스 | 1987 | 162 | 78 | 84 | .481 | 아메리칸 리그 서부 4위 | - | - | - | - | |
시애틀 매리너스 | 1988 | 56 | 23 | 33 | .411 | 해고 | - | - | - | - | |
시애틀 매리너스 총계 | 351 | 159 | 192 | .453 | 0 | 0 | - | ||||
통산 | 3022 | 1571 | 1451 | .520 | 21 | 23 | .477 |
5. 은퇴 후 활동 및 명예의 전당 헌액
1989년, 윌리엄스는 35세 이상의 전 메이저 리그 선수들이 주로 뛰는 리그인 시니어 프로페셔널 베이스볼 협회의 웨스트 팜 비치 트로픽스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트로픽스는 정규 시즌에서 52승 20패를 기록하며 남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 세인트피터스버그 펠리컨스에게 4-12로 패했다. 트로픽스는 시즌 종료 후 해체되었고, 나머지 리그는 1년 뒤 해체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뉴욕 양키스의 특별 고문으로 활동했다. 1990년, 윌리엄스는 자서전 노 모어 미스터 나이스 가이(No More Mr. Nice Guy영어)를 출판했다. 196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불화로 인한 결별로 인해 그는 야키 구단주 재임 기간(2001년까지) 동안 레드삭스와 거리를 두었지만, 구단주와 경영진이 바뀐 후 2006년 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등번호는 포트워스 캣츠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캣츠는 포트워스에서 인기 있는 마이너 리그 팀이었으며, 윌리엄스는 다저스 시스템을 거쳐가는 동안 1948년, 1949년, 1950년에 그곳에서 뛰었다. 또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포트워스 감독이었던 바비 브래건이 자신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텍사스 리그의 캣츠가 1964년 최종 해체된 후, 2001년 독립 리그 팀으로 다시 창단되었고, 이 "새로운" 캣츠가 윌리엄스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했다.
윌리엄스는 2007년 12월 베테랑 위원회에 의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출되었고, 2008년 7월 27일 헌액되었다. 그는 2009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4년에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명예의 전당에 사후 헌액되었다.
6. 개인사
윌리엄스는 1950년 영화 재키 로빈슨 이야기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1967년 메이저 리그 감독이 되기 전에 텔레비전 퀴즈 쇼 매치 게임(Match Game영어)과 오리지널 할리우드 스퀘어즈(Hollywood Squares영어)에 출연했다. 피터 마셜의 오리지널 할리우드 스퀘어즈 백스테이지에 따르면, 윌리엄스는 후자 쇼의 참가자로 5.00 만 USD를 획득했다.
윌리엄스는 노마 무사토(Norma Mussato영어)와 결혼하여 마크(Marc영어), 릭(Rick영어), 캐시(Kathi영어) 세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릭 윌리엄스는 전 마이너 리그 투수이자 메이저 리그 투수 코치였으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로 스카우트가 되었다.
7. 논란 및 법적 문제
2000년 1월, 윌리엄스는 플로리다에서 공연 음란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했다. 그에 대한 고소 내용은 그가 호텔 방 발코니 밖에서 "벌거벗고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스는 나중에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할 때 고소 내용의 세부 사항을 알지 못했으며, 자신이 발코니 문에 벌거벗고 서 있었을 뿐 발코니에 있지도 않았고 자위행위를 하지도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베테랑 위원회의 투표를 불과 몇 주 앞두고 발생했다. 윌리엄스의 체포는 위원회의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그는 2008년이 되어서야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었다. 윌리엄스는 뉴욕 타임스에 "포트 마이어스에서 체포된 사건이 나에게 꽤 큰 타격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8. 평가 및 영향
딕 윌리엄스는 야구계에 독특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감독 스타일은 '강경하고 직설적'이라는 특징으로 요약되며, 이는 그가 이끌었던 팀들의 성과와 선수단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규율과 기본기를 강조하며 팀을 변화시켰고, 특히 보스턴 레드삭스의 '불가능한 꿈' 시즌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월드 시리즈 2연패는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윌리엄스는 선수들에게 높은 수준의 헌신과 노력을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능숙했다. 그는 칼 야스트렘스키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비다 블루, 앙드레 도슨, 게리 카터와 같은 젊은 재능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능력은 팀을 단기간에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위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은 때때로 선수단과의 불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스티브 로저스나 제프 리어든과의 갈등,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나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선수들과의 소통 문제 등은 그의 리더십이 모든 선수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선수들과의 마찰은 시대 변화에 따른 리더십 방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스는 양대 리그에서 페넌트 우승을 차지하고, 세 개의 다른 프랜차이즈를 월드 시리즈로 이끈 역사상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승리를 넘어, 팀의 문화를 바꾸고 선수들에게 승리 의식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더 이상 착한 남자는 없다'는 그의 철학은 야구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영향은 후대 감독들에게도 이어졌다.
9. 사망
딕 윌리엄스는 2011년 7월 7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 근처 병원에서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그의 아내 노마 윌리엄스는 2011년 8월 4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