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어린 시절
스파키 앤더슨은 1934년 2월 22일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브리지워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1.2. 교육 및 초기 야구 활동
앤더슨은 USC 트로잔스 야구팀의 배트 보이로 활동하며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수잔 밀러 도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평범한 유격수 선수로 뛰었다. 그의 아메리칸 리전 야구팀은 1951년 디트로이트의 브릭스 스타디움(현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열린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53년,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앤더슨은 1953년 10월 3일에 캐롤 발레와 결혼했는데, 두 사람은 5학년 때 처음 만났다.
2. 선수 경력
2.1. 마이너 리그 경력
앤더슨은 1953년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클래스 C 캘리포니아 리그의 산타바바라 다저스에서 주로 유격수로 뛰며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54년에는 클래스 A 웨스턴 리그의 푸에블로 다저스로 승격되었고, 이때부터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남은 선수 생활을 보냈다.
1955년, 앤더슨은 마이너 리그 계단을 한 단계 더 올라 텍사스 리그의 더블 A 포트워스 캐츠에서 뛰었다. 이때 한 라디오 아나운서가 그의 불같은 플레이를 보고 "스파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56년에는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의 몬트리올 로열스로 이동했고, 1957년에는 오픈 등급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 배정되었다. 다음 시즌, 다저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후 그는 몬트리올로 돌아왔다.
메이저 리그 수준에서 다저스 유니폼을 입지 못한 채 5시즌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낸 후, 그는 1958년 12월 23일 외야수 립 레펄스키를 포함한 세 명의 선수와 맞트레이드되어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했다.
2.2. 메이저 리그 경력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앤더슨에게 주전 2루수 자리를 주었고, 그는 1959년에 유일한 메이저 리그 풀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152경기에서 타율 .218, 홈런 0개, 34 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남은 선수 생활 동안 다시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
그는 이후 4시즌 동안 인터내셔널 리그의 트리플 A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뛰었다. 메이플 리프스의 구단주 잭 켄트 쿡은 여러 훈련을 지켜본 후 앤더슨의 리더십 자질과 모든 배경의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능력을 발견했다. 쿡은 즉시 그에게 감독 경력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며 메이플 리프스의 감독직을 제안했다.
3. 지도자 경력
앤더슨은 마이너리그에서 감독으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이후 메이저리그 팀을 이끌며 양대 리그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3.1. 마이너 리그 감독 시절
1964년, 30세의 나이에 앤더슨은 쿡의 제안을 받아들여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의 감독직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 클래스 A와 더블 A 수준의 마이너 리그 팀들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신시내티 레즈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에서도 한 시즌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4시즌 연속으로 4개의 페넌트 우승팀을 이끌었다. 1965년 웨스턴 캐롤라이나 리그의 록 힐 카디널스, 1966년 플로리다 스테이트 리그의 세인트피터스버그 카디널스, 1967년 캘리포니아 리그의 모데스토 레즈, 그리고 1968년 더블 A 서던 리그의 애슈빌 투어리스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1966년 시즌에는 그의 팀이 마이애미에 4대3으로 패한 29이닝 경기를 치렀는데, 이는 중단 없이 진행된 프로 경기 중 가장 긴 기록으로 남아있다. 마이너 리그 감독 시절 앤더슨은 심판들과 자주 다투는 등 강경한 성격으로 인해 '문제아 감독'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으나, 그는 훗날 그 경험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실패였다고 회고했다.
1969년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3루 코치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3.2. 신시내티 레즈 시절
1969년 시즌이 끝난 직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감독 레프티 필립스는 앤더슨을 1970년 코칭 스태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앤더슨은 에인절스에 고용된 지 하루 만에 데이브 브리스톨의 후임으로 신시내티 레즈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이 임명으로 앤더슨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신시내티 마이너 리그 조직에서 그를 마이너 리그 감독으로 고용했던 레즈의 단장 밥 하우삼과 재회하게 되었다. 앤더슨은 1969년 10월 8일 레즈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스포츠계에서 상대적으로 무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고용 다음 날 헤드라인은 "스파키 누구?"라고 쓰였다. 고용 당시 앤더슨은 35세로 야구계에서 가장 어린 감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은 1970년 레즈를 102승으로 이끌고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차지하며, 신인 감독으로서 100승을 달성한 세 번째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1970년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5경기 만에 패했다. 이 시즌 동안 레즈는 앤더슨의 재임 기간 내내 "빅 레드 머신"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상으로 얼룩진 1971년 시즌에 팀이 4위로 마친 후, 레즈는 앤더슨의 지휘 아래 1972년에 다시 페넌트를 차지했다. 그들은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5경기 만에 꺾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7경기 만에 패했다. 그들은 1973년에 다시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나, 치열한 5경기 시리즈였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에게 패했다.
1974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한 후, 1975년에 레즈는 108승을 거두며 지구를 압도했다. 그들은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휩쓸었고, 드라마틱한 7경기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간신히 꺾었다. 그들은 1976년에 102승을 거두며 우승을 반복했다.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필리스를 3경기 만에 휩쓸었고, 이어서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휩쓸었다. 이는 디비전 플레이 시작 이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와 월드시리즈를 모두 휩쓴 유일한 팀이다. 이 두 시즌 동안 앤더슨의 레즈는 포스트시즌에서 파이리츠, 필리스, 레드삭스, 양키스를 상대로 14승 3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1975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레드삭스를 꺾은 후 포스트시즌에서 8연승을 거두고 1976년 포스트시즌에서 7연승을 거두었다. 그들은 1969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 전체 포스트시즌을 휩쓴 유일한 팀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앤더슨은 선발 투수가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즉시 교체하고 불펜을 활용하는 경향 때문에 "캡틴 훅"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윌 맥이내니와 롤리 이스트윅 같은 마무리 투수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노쇠화된 레즈가 다음 두 시즌 동안 다저스에 각각 2위를 차지하자, 앤더슨은 1978년 11월 27일 딕 와그너 단장에 의해 해고되었다. 와그너는 레즈의 코칭 스태프를 "개편"하기를 원했고, 앤더슨이 이에 반대하면서 해고로 이어졌다.
새로운 감독 존 맥나마라 아래에서 레즈는 1979년에 다시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3연패를 당했다. 그들은 1990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휩쓸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때까지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3.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1979년 6월 14일 앤더슨을 새로운 감독으로 고용했다. 팀의 젊은 재능을 본 그는 언론에 자신의 팀이 5년 안에 페넌트 우승팀이 될 것이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타이거스는 거의 즉시 승리하는 팀이 되었고, 앤더슨의 첫 세 시즌 동안 .500 이상의 승률을 기록했으나, 1983년 92승을 거두고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때까지는 우승 경쟁에 뛰어들지 못했다.
1984년, 디트로이트는 시즌을 9승 0패로 시작했고, 40경기 후 35승 5패(메이저 리그 기록)를 기록했으며, 104승 58패(프랜차이즈 최다승 기록)로 가볍게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9월 23일, 앤더슨은 두 개의 다른 팀에서 한 시즌에 100승을 달성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그들은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휩쓸었고, 이어서 월드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5경기 만에 꺾고 앤더슨의 세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타이거스는 1927년 뉴욕 양키스 이후 개막일부터 월드시리즈 종료까지 리그를 선두로 달린 최초의 팀이 되었다. 시즌 후, 앤더슨은 타이거스에서 두 번의 최우수 감독상 중 첫 번째를 수상했다.
1984년 타이거스가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앤더슨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신시내티에서 해고된 이후로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들이 그때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무도 나에게 다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앤더슨의 타이거스는 1985년과 1986년에 모두 3위를 차지했다. 1986년 7월 29일 밀워키 브루어스를 9대5로 이기면서, 앤더슨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 모두에서 감독으로서 600승을 달성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앤더슨은 1987년에 타이거스를 메이저 리그 최고 기록으로 이끌었으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미네소타 트윈스에게 패했다. 그는 그 해 두 번째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1988년에 다시 우승 경쟁을 벌인 후(보스턴 레드삭스에 1경기 차이로 2위), 팀은 1년 후인 1989년에 놀랍게도 103패를 기록하며 무너졌다. 1989년 시즌 동안 앤더슨은 패배의 스트레스로 인해 팀에서 한 달간 휴가를 떠났고, 1루 코치 딕 트라체프스키가 임시로 팀을 지휘했다.
1991년, 타이거스는 타율에서 최하위, 삼진에서 메이저 전체 1위, 대부분의 투수 부문에서 리그 최하위권에 머물렀지만, 8월 말까지는 지구 선두를 달렸고, 결국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2년 9월 27일, 타이거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13대3으로 꺾고 앤더슨의 팀 내 1,132번째 승리를 기록하며 휴이 제닝스를 넘어 타이거스 감독 역대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앤더슨은 타이거스에서 1,331승을 거두며 이 기록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93년 4월 15일, 그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3대2로 꺾고 감독으로서 2,000번째 승리를 달성하며 이 기록을 세운 7번째 감독이 되었다.
앤더슨은 감독 경력 동안 언론에 선수들을 극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이라고 선언했는데, 훗날 그는 이 발언이 깁슨의 초기 경력에 너무 많은 압박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1984년에 그를 위해 뛰었던 마이크 라가가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강타자를 잊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시내티에서 그를 위해 뛰었던 조니 벤치가 디트로이트에서 그를 위해 뛰었던 포수 마이크 히스만큼 강하게 공을 던질 수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앤더슨은 현재까지 몰수패로 경기를 이긴 마지막 아메리칸 리그 감독이다. 이는 그가 디트로이트에 고용된 지 한 달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가 디스코 해체 밤 행사로 인해 코미스키 파크의 경기장이 심하게 손상되어 취소되어야 했을 때 발생했다. 화이트삭스 그라운드키퍼들이 경기장에서 잔해를 제거한 후에도 앤더슨은 타이거스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선수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경기장이 플레이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아메리칸 리그 관계자들이 처음에는 경기를 다음날 오후로 연기할 계획을 세웠을 때, 앤더슨은 경기를 타이거스에게 몰수패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홈팀인 화이트삭스가 허용 가능한 경기 조건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아메리칸 리그 회장 리 맥페일은 앤더슨의 주장을 대체로 지지하며 두 번째 경기를 타이거스에게 9대0으로 몰수패 처리했다.
3.4. 감독 기록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순위/팀수 | 승 | 패 | 승률 | 결과 | ||
신시내티 레즈 | 1970 | 162 | 102 | 60 | .630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1위 | 4 | 4 | .500 | 월드시리즈 패배 (볼티모어 오리올스) |
신시내티 레즈 | 1971 | 162 | 79 | 83 | .488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5위 | - | - | - | |
신시내티 레즈 | 1972 | 154 | 95 | 59 | .617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1위 | 6 | 6 | .500 | 월드시리즈 패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신시내티 레즈 | 1973 | 162 | 99 | 63 | .611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1위 | 2 | 3 | .400 |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패배 (뉴욕 메츠) |
신시내티 레즈 | 1974 | 162 | 98 | 64 | .605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2위 | - | - | - | |
신시내티 레즈 | 1975 | 162 | 108 | 54 | .667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1위 | 7 | 3 | .700 | 월드시리즈 우승 (보스턴 레드삭스) |
신시내티 레즈 | 1976 | 162 | 102 | 60 | .630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1위 | 7 | 0 | 1.000 | 월드시리즈 우승 (뉴욕 양키스) |
신시내티 레즈 | 1977 | 162 | 88 | 74 | .543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2위 | - | - | - | |
신시내티 레즈 | 1978 | 161 | 92 | 69 | .571 |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 2위 | - | - | - | |
신시내티 레즈 총계 | 1449 | 863 | 586 | .596 | 26 | 16 | .619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79 | 106 | 56 | 50 | .528 | 임시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0 | 162 | 84 | 78 | .519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5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1 | 52 | 29 | 23 | .558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 | - | - | - | |
57 | 31 | 26 | .544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4위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2 | 162 | 83 | 79 | .512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4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3 | 162 | 92 | 70 | .568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4 | 162 | 104 | 58 | .642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 | 7 | 1 | .875 | 월드시리즈 우승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5 | 161 | 84 | 77 | .522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3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6 | 162 | 87 | 75 | .537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3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7 | 162 | 98 | 64 | .605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1위 | 1 | 4 | .200 |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패배 (미네소타 트윈스)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8 | 162 | 88 | 74 | .543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89 | 162 | 59 | 103 | .364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7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0 | 162 | 79 | 83 | .488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3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1 | 162 | 84 | 78 | .519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2 | 162 | 75 | 87 | .463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6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3 | 162 | 85 | 77 | .525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4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4 | 115 | 53 | 62 | .461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5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 1995 | 144 | 60 | 84 | .417 |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4위 | - | - |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총계 | 2579 | 1331 | 1248 | .516 | 8 | 5 | .615 | |||
총계 | 4028 | 2194 | 1834 | .545 | 34 | 21 | .618 |
4. 지도 철학 및 인간 관계
앤더슨은 선수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 천재적이었고, 사람들과의 소통에 능했으며, 팀을 위해 필요할 때는 완고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언론에 대한 립서비스와도 같았다. 그는 커크 깁슨을 "다음 미키 맨틀"이라고 불렀고, 1984년 그를 위해 뛰었던 마이크 라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강타자를 잊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시내티에서 그를 위해 뛰었던 조니 벤치가 디트로이트에서 그를 위해 뛰었던 포수 마이크 히스만큼 강하게 공을 던질 수 없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앤더슨은 "캡틴 훅"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선발 투수가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즉시 교체하고 불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그의 독특한 지도 스타일 때문이었다. 신시내티 레즈 감독 시절에는 선수들의 수염을 금지시켜, 당시 콧수염이 특징이었던 레즈의 마스코트 "미스터 레즈"가 콧수염 없는 모습으로 모델 체인지되기도 했다.
그는 유망주를 극찬하면 그 선수가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에는 크리스 피터로를 "향후 10년간 나의 주전"이라고, 바르바로 가르베이를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재림"이라고 치켜세웠지만, 피터로는 메이저에서 3년간 53경기 출장에 그쳤고, 가르베이도 3년간 안타 167개에 머물렀다.
5. 은퇴 및 은퇴 후 활동

앤더슨은 1995년 10월 2일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1994년 파업 이후 리그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고 알려졌다. 앤더슨은 1995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대체 선수를 지휘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구단이 그를 은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은퇴 후 디트로이트의 WJR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그 시즌에 아내에게 "만약 게임이 이렇게 변했다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통산 2,194승 1,834패, 승률 .545의 기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당시 그는 코니 맥과 존 맥그로에 이어 메이저 리그 감독 중 세 번째로 많은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토니 라 루사, 보비 콕스, 조 토리가 그의 승리 기록을 넘어섰고, 현재 그는 역대 최다승 감독 6위에 올라 있다. 앤더슨은 선수 시절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으나, 메이저리그 선수로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단 한 시즌만 뛰었다. 감독으로서는 신시내티 레즈에서 9시즌(1970~197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17시즌(1979~1995년)을 보냈으며, 신시내티에서 두 번, 디트로이트에서 한 번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감독직 은퇴 후 앤더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재임 기간과 그 이후에도 야구 해설가 및 분석가로 텔레비전 활동을 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1984년 제외) 그는 종종 빈 스컬리와 이후 잭 벅과 함께 CBS 라디오의 월드시리즈 중계에 참여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는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케이블 텔레비전 중계에서 컬러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디트로이트에 있을 때 앤더슨은 1987년 CATCH(Caring Athletes Teamed for Children's and Henry Ford hospitals)라는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건강 보험이 없거나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는 중증 아동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은퇴 후에도 이 자선 단체를 계속 지원하고 참여했다. 2008년 인터뷰에서 앤더슨은 CATCH가 "디트로이트에서 내가 한 일 중 단연 최고"라고 말했다.
1996년 오프 시즌에는 당시 침체기였던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고, 당시 구단 사장이었던 노자키 가쓰요시가 협상을 담당하며 계약 합의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앤더슨의 아내가 강력히 반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6. 수상 경력 및 유산
6.1.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주요 수상
앤더슨은 2000년 감독으로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17시즌, 신시내티에서 9시즌을 감독했지만, 그의 명예의 전당 명판에는 신시내티 레즈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전 단장 밥 하우삼을 기리기 위해 레즈 모자를 쓰고 헌액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헌액 전 앤더슨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명예의 전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에 내가 속할 자격이 없으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수락 연설에서 그는 선수들에게 많은 공을 돌리며, 두 종류의 감독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서 나쁜 선수들을 데리고 경기에 지고 해고되는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나처럼 천재적인 감독이다. 나는 좋은 선수들을 얻었고, 방해가 되지 않게 비켜나서 그들이 많이 이기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리고 26년 동안 그저 머물렀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나는 월드시리즈 반지를 한 번도 끼지 않았다... 이 반지는 죽을 때까지 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앤더슨은 같은 해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2005년 5월 28일 신시내티에서 열린 경기 전 행사에서 앤더슨의 등번호 10번은 레즈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 시즌 동안 디트로이트의 코메리카 파크에서도 앤더슨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2006년 6월 17일, 앤더슨이 1955년에 뛰었던 포트워스 캐츠에 의해 그의 등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는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1년 시즌 내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앤더슨을 기리기 위해 유니폼 오른쪽 소매에 패치를 달았다. 그들은 2011년 6월 26일 코메리카 파크의 외야 벽에 그의 등번호 11번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06년에는 캘리포니아 루터교 대학교의 새로운 운동 단지에 "스파키 앤더슨 야구장" 건설이 완료되었다. 앤더슨은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저명한 선수들을 대학 야구팀으로 유치했으며,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로 대학으로부터 런드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6.2. 야구계에 미친 영향
앤더슨은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 팀 모두에서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었다. 1984년 월드시리즈에서 상대였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내셔널 리그)의 감독 딕 윌리엄스 또한 1972년과 1973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아메리칸 리그)와 함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 누가 이기든 양대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최초의 감독이 될 수 있었다. 윌리엄스의 1972년 팀은 앤더슨의 레즈 팀을 꺾은 바 있다.
앤더슨의 업적은 2006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 토니 라 루사에 의해 동등하게 달성되었다. 라 루사는 이전에 1989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함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으며, 앤더슨을 자신의 멘토로 여겼다. 얄궂게도, 2006년 월드시리즈에서 타이거스의 감독이었던 짐 릴랜드 역시 1997년 플로리다 말린스와 함께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타이거스가 라 루사의 카디널스를 꺾었다면 그 역시 같은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시리즈 동안 앤더슨은 타이거스의 홈 구장인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린 2차전의 시구를 던졌다.
7. 사망 및 가족
2010년 11월 3일, 앤더슨은 치매 상태가 악화되어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오크스 자택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발표되었다. 앤더슨은 다음 날인 11월 4일 76세의 나이로 사우전드오크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57년간 함께한 아내 캐롤, 아들 리와 앨버트, 딸 셜리 엥겔브레히트, 그리고 8명의 손주를 남겼다. 그의 아내 캐롤은 2013년 5월 7일 79세의 나이로 사우전드오크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8. 미디어 출연
- 1979년, 앤더슨은 TV 프로그램 WKRP 인 신시내티의 "스파키"라는 에피소드에 자신으로 출연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앤더슨은 가상의 방송국에서 토크쇼 진행자로 등장한다. 결국 앤더슨은 해고되고, 그는 "내가 미쳤나 봐. 이 도시에 올 때마다 해고되네!"라고 말한다.
- 1980년, 앤더슨은 더 화이트 섀도우 시즌 3 에피소드 "If Your Number's Up, Get it Down"에 자신으로 출연했다. 팔라헤이가 그를 쿨리지에게 소개하지만, 쿨리지는 "죄송합니다, 당신이 졌지만 저는 당신에게 투표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쿨리지는 그를 1980년 무소속 대선 후보 존 B. 앤더슨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 1983년, 앤더슨은 디즈니 채널 영화 타이거 타운에 자신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