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이클 제이 앤드류스(Michael Jay Andrews영어, 1943년 7월 9일 출생)는 미국의 전 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내야수로 활약했다. 그는 야구 경력 이후에도 사회에 크게 기여했는데, 특히 보스턴에 위치한 다나-파버 암 연구소와 연계된 기금 모금 단체인 The Jimmy Fund지미 펀드영어의 이사장으로 25년 넘게 봉사하며 암 환자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헌신했다. 앤드류스는 또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5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 롭 앤드류스의 형이기도 하다.
2. 생애 초반
마이클 앤드류스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과 아마추어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스포츠에 대한 깊은 재능을 보였다. 그의 초기 프로 경력은 마이너리그에서 포지션을 변경하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2.1. 출생 및 학업
앤드류스는 캘리포니아주 토리언스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의 사우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야구, 미식축구, 농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미식축구에서는 UCLA로부터 전액 운동 장학금을 제안받았는데, 이는 외국어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1년간 주니어 칼리지에 등록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이에 따라 앤드류스는 엘 카미노 칼리지에 진학하여, 미식축구 와이드 리시버로서 주니어 칼리지 올 아메리칸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2. 초기 프로 경력
앤드류스의 야구 실력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목을 받았고, 그는 1961년 12월 1일 1.20 만 USD의 사이닝 보너스를 받고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이후 5년 동안 레드삭스 팜 시스템을 거치며 성장했는데, 처음 4년 동안은 유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첫 세 시즌 동안 타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1962년에는 클래스 D New York-Penn League뉴욕-펜 리그영어의 Olean Red Sox올리언 레드삭스영어에서 타율 .299를 기록했고, 1963년에는 Waterloo Hawks워털루 호크스영어와 Winston-Salem Red Sox윈스턴-세일럼 레드삭스영어에서 합계 타율 .298, 1964년에는 Reading Red Sox레딩 레드삭스영어에서 타율 .295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비에서는 어려움을 겪어 해당 시즌에 각각 74개, 36개, 42개의 실책을 범했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의 마지막 두 해를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에서 보냈는데, 이곳은 딕 윌리엄스 감독이 지휘하는 연속 Governors' Cup거버너스 컵영어 챔피언 팀이었다. 1965년에 타율이 .246으로 하락하자, 앤드류스는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이에 1966년에는 타율 .267, 14 홈런, 그리고 International League인터내셔널 리그영어에서 가장 많은 97득점을 기록하며 변화에 성공했다.
1966년 9월, 앤드류스는 아메리칸 리그 최하위에서 단 0.5경기 차이로 벗어난 보스턴 팀에 승격되었다. 그는 5경기에 출전했는데, 모두 선발 출장이었다. 9월 18일 펜웨이 파크에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나, 4타석에서 안타 없이 1득점을 기록했다. 6일 후 양키 스타디움에서 뉴욕 양키스의 프리츠 피터슨을 상대로 첫 메이저리그 안타인 단타를 기록했다. 앤드류스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코미스키 파크에서 두 개의 안타를 더 추가했다.
2.3. 보스턴 레드삭스
1967년 앤드류스는 새로 승격된 딕 윌리엄스 감독과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견수에서 2루수로 포지션을 바꾼 레지 스미스에 밀려 루키 시즌을 벤치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4월 말까지 앤드류스는 수비에서 어려움을 겪던 스미스가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가면서 시즌 대부분 동안 주전 2루수가 되었다. 그는 레드삭스에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중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0년 12월 1일, 앤드류스는 루이스 알바라도와 함께 루이스 아파리시오를 상대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화이트삭스에서 그는 타율 .237을 기록하며 이전보다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1973년 7월 16일에는 시즌 타율이 .201에 그치자 팀에서 방출되었다.
2.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및 1973년 월드 시리즈
1973년 7월 31일, 앤드류스는 이전 소속팀 감독이었던 딕 윌리엄스의 요청에 따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했다. 이는 구단주 찰리 핀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앤드류스는 팀의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포함되어 1973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두 경기에 대타로 출전했다.
1973년 월드 시리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뉴욕 메츠 간의 대결이었다. 이 시리즈의 2차전에서 앤드류스의 경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발생했다. 연장 12회초, 앤드류스는 두 차례의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며 메츠의 10대 7 승리에 빌미를 제공했다. 2사 만루 상황에서 메츠가 7대 6으로 앞선 가운데, 존 밀너의 평범한 땅볼이 앤드류스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첫 번째 실책으로 이어져, 턱 맥그로와 윌리 메이스가 득점했다. 이어서 다음 타자인 제리 그로테의 땅볼을 앤드류스가 1루로 송구했지만, 송구가 진 테네이스를 베이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두 번째 실책이 되면서 클리온 존스마저 득점했다.
이러한 실책에 격분한 오클랜드 구단주 찰리 핀리는 앤드류스에게 부상을 당했다는 허위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하며, 남은 시리즈에서 그가 경기를 뛸 수 없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앤드류스의 팀 동료들과 딕 윌리엄스 감독은 연대 의식을 보여주며 앤드류스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특히 일부 선수들은 운동용 테이프로 유니폼에 앤드류스의 등번호 "17"을 붙여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커미셔너 보위 쿤이 핀리에게 앤드류스를 다시 선수단에 복귀시킬 것을 명령했다. 앤드류스는 4차전 8회에 대타로 출전했는데, 이때 뉴욕 메츠 팬들로부터 동정심이 담긴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땅볼 아웃되었고, 핀리는 그를 남은 시리즈 동안 벤치에 앉혔다. 오클랜드가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지 11일 후인 11월 1일, 앤드류스는 무조건 방출되었다. 이 사건 이후 앤드류스는 더 이상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1975년 일본에서 활약한 뒤 은퇴했다.
3. 일본 프로야구 경력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한 후, 마이클 앤드류스는 1975년에 일본 프로야구 팀인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에서 '안드리우스(アンドリウス일본어)'라는 등록명으로 뛰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팀의 주요 선수로 활약했다.
4. 은퇴 후 활동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을 마친 마이클 앤드류스는 이후 수십 년간 사회 공헌 활동에 헌신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특히 암 환자 지원을 위한 지미 펀드에서의 활동은 그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4.1. 지미 펀드 활동
앤드류스와 지미 펀드의 첫 인연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루키 시즌이었던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자선 단체의 이사장이었던 Bill Koster빌 코스터영어는 앤드류스에게 12세의 암 환자를 만나줄 수 있는지 요청했다. 앤드류스는 이를 수락하고 그 청년과 30분 동안 시간을 보냈다. 만남 후 앤드류스는 그 청년의 낙천적인 태도에 대해 코스터와 이야기했고, 코스터는 그에게 그 청년의 상태가 말기였고 의사들도 더 이상 치료법이 없어 퇴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경험은 앤드류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79년, 당시 지미 펀드의 Ken Coleman켄 콜먼영어 사무국장은 앤드류스에게 부국장직을 제안했다. 앤드류스는 프로 야구 경력이 끝난 후 매사추세츠 뮤추얼 생명보험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업이 파트타임이라는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결국 그는 보험업계를 떠나 지미 펀드에서 전업으로 일하게 되었고, 1984년에는 이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2009년 말에 이 자리에서 은퇴할 때까지 25년 이상 지미 펀드를 이끌며 암 환자들을 위한 기금 모금 및 지원 활동에 헌신했다. 그의 노력으로 지미 펀드는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과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다.
5. 경력 통계
5.1. 메이저리그 타격 성적
연도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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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BOS | 5 | 19 | 18 | 1 | 3 | 0 | 0 | 0 | 3 | 0 | 0 | 0 | 1 | 0 | 0 | 0 | 0 | 2 | 0 | .167 | .167 | .167 | .333 |
1967 | 142 | 578 | 494 | 79 | 130 | 20 | 0 | 8 | 174 | 40 | 7 | 7 | 18 | 2 | 62 | 2 | 4 | 72 | 9 | .263 | .349 | .352 | .701 | |
1968 | 147 | 634 | 536 | 77 | 145 | 22 | 1 | 7 | 190 | 45 | 3 | 8 | 12 | 2 | 81 | 3 | 1 | 57 | 6 | .271 | .366 | .354 | .721 | |
1969 | 121 | 554 | 464 | 79 | 136 | 26 | 2 | 15 | 211 | 59 | 1 | 1 | 10 | 4 | 71 | 5 | 0 | 53 | 7 | .293 | .384 | .455 | .839 | |
1970 | 151 | 681 | 589 | 91 | 149 | 28 | 1 | 17 | 230 | 65 | 2 | 1 | 4 | 4 | 81 | 3 | 0 | 63 | 10 | .253 | .341 | .390 | .732 | |
1971 | CWS | 109 | 408 | 330 | 45 | 93 | 16 | 0 | 12 | 145 | 47 | 3 | 5 | 6 | 4 | 67 | 1 | 1 | 36 | 6 | .282 | .400 | .439 | .840 |
1972 | 148 | 602 | 505 | 58 | 111 | 18 | 0 | 7 | 150 | 50 | 2 | 2 | 18 | 7 | 70 | 2 | 3 | 78 | 4 | .220 | .315 | .297 | .612 | |
1973 | 52 | 185 | 159 | 10 | 32 | 9 | 0 | 0 | 41 | 10 | 0 | 1 | 3 | 0 | 23 | 0 | 3 | 28 | 7 | .201 | .314 | .258 | .571 | |
OAK | 18 | 24 | 21 | 1 | 4 | 1 | 0 | 0 | 5 | 0 | 0 | 0 | 0 | 0 | 3 | 0 | 0 | 1 | 1 | .190 | .292 | .238 | .530 | |
'73 합계 | 70 | 209 | 180 | 11 | 36 | 10 | 0 | 0 | 46 | 10 | 0 | 1 | 3 | 0 | 26 | 0 | 3 | 29 | 8 | .200 | .311 | .256 | .567 | |
MLB 8년 합계 | 893 | 3685 | 3116 | 441 | 803 | 140 | 4 | 66 | 1149 | 316 | 18 | 25 | 72 | 23 | 458 | 16 | 12 | 390 | 50 | .258 | .353 | .369 | .721 |
5.2. 메이저리그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1루 (1B) | 2루 (2B) | 3루 (3B) | 유격 (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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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66 | BOS | - | 5 | 11 | 18 | 0 | 2 | 1.000 | - | - | |||||||||||||||
1967 | - | 139 | 303 | 345 | 16 | 63 | .976 | - | 6 | 2 | 1 | 1 | 0 | .750 | |||||||||||
1968 | - | 139 | 330 | 375 | 17 | 93 | .976 | 1 | 0 | 3 | 0 | 0 | 1.000 | 4 | 9 | 5 | 1 | 1 | .933 | ||||||
1969 | - | 120 | 297 | 334 | 18 | 82 | .972 | - | - | ||||||||||||||||
1970 | - | 148 | 342 | 350 | 19 | 74 | .973 | - | - | ||||||||||||||||
1971 | CWS | 25 | 197 | 11 | 4 | 17 | .981 | 76 | 177 | 191 | 17 | 51 | .956 | - | - | ||||||||||
1972 | 5 | 33 | 2 | 0 | 7 | 1.000 | 145 | 354 | 325 | 19 | 69 | .973 | - | - | |||||||||||
1973 | 9 | 61 | 3 | 0 | 1 | 1.000 | 6 | 13 | 7 | 0 | 2 | 1.000 | 5 | 7 | 2 | 0 | 0 | 1.000 | - | ||||||
OAK | - | 9 | 11 | 6 | 1 | 2 | .944 | - | - | ||||||||||||||||
'73 합계 | 9 | 61 | 3 | 0 | 1 | 1.000 | 15 | 24 | 13 | 1 | 4 | .974 | 5 | 7 | 2 | 0 | 0 | 1.000 | - | ||||||
MLB 합계 | 39 | 291 | 16 | 4 | 25 | .987 | 787 | 1838 | 1951 | 107 | 438 | .973 | 6 | 7 | 5 | 0 | 0 | 1.000 | 10 | 11 | 6 | 2 | 1 | .895 |
5.3. 일본 프로야구 성적
연도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75 | 긴테쓰 | 123 | 422 | 389 | 31 | 90 | 12 | 1 | 12 | 140 | 40 | 2 | 1 | 3 | 2 | 28 | 0 | 0 | 43 | 11 | .231 | .282 | .360 | .642 |
NPB 1년 합계 | 123 | 422 | 389 | 31 | 90 | 12 | 1 | 12 | 140 | 40 | 2 | 1 | 3 | 2 | 28 | 0 | 0 | 43 | 11 | .231 | .282 | .360 | .642 |
5.4. 등번호
- 2 (1966년 ~ 1973년)
- 17 (1973년)
- 4 (1975년)
6. 평가 및 유산
마이클 앤드류스의 경력은 야구장 안팎에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1973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아픈 기억은 선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지만, 이후 지미 펀드를 통한 헌신적인 사회 공헌 활동은 그에게 영구적인 존경을 안겨주었다.
6.1. 야구 경력에 대한 평가
앤드류스는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수비에서 약점을 보였으나, 2루수로 전향한 후에는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메이저리그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1967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Impossible Dream" 시즌에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야구 경력은 1973년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의 치명적인 두 차례 실책으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사건은 그에게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주었으며, 특히 구단주 찰리 핀리의 부당한 압력과 강압적인 태도는 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동료 선수들과 딕 윌리엄스 감독, 그리고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보위 쿤의 지지와 개입은 그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앤드류스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프로페셔널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던 선수로 기억될 수 있다.
6.2. 사회 공헌 및 유산
선수 경력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앤드류스는 은퇴 후 지미 펀드의 이사장으로서 암 환자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헌신하며 진정한 유산을 남겼다. 1967년 암 환자 소년을 만났던 경험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이는 이후 25년 이상 암과의 싸움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환자들을 지원하는 데 그의 삶을 바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단순한 기부자가 아니라, 조직의 리더로서 수많은 캠페인을 주도하며 암 연구 및 치료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앤드류스의 헌신은 스포츠 스타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의 좋은 예시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름은 야구 선수로서의 기록을 넘어 박애주의자이자 사회 공헌자로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