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덴마크의 공주이자 작센 선제후비였던 안나는 크리스티안 3세 (덴마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의 딸로 태어나, 1553년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의 아내가 되면서 선제후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특히 식물 및 약초 지식에 뛰어나 독일 최초의 여성 약사로 평가받기도 했다. 선제후비로서 그녀는 작센의 농업과 원예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했으며, 새로운 작물과 가축을 도입하여 작센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와 더불어 그녀는 루터교의 확산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지만, 칼뱅주의자 박해에 관여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세기에 쓰인 전기들에서는 그녀가 '국가의 어머니'로서 작센에 기여한 전통적인 역할이 강조되어왔다.
2. 유년기 및 결혼
안나의 출생과 유년기는 엄격한 루터교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그녀의 결혼은 덴마크와 독일, 그리고 루터교 세력 간의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1. 유년기 및 교육
덴마크의 안나는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3세 (덴마크)와 그의 아내인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안나에게 약용 식물을 채집하고 약초 요법을 준비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가르쳤다. 1537년 덴마크-노르웨이에 프로테스탄티즘이 도입된 후, 안나는 엄격한 정통 루터교도로서 성장했다.
2.2.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와의 결혼
1548년 3월, 안나는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동생이자 잠재적인 후계자였던 아우구스트와 약혼했다. 이 결혼은 덴마크가 독일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야망을 뒷받침했다. 선제후 모리츠 입장에서는 루터교 세력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결혼식은 1548년 10월 토르가우에서 거행되었다. 이 결혼식은 모리츠 선제후 통치 기간 중 첫 번째 주요 축제였으며, 1547년에 선제후 직위를 획득한 베틴가의 알베르트 방계가 작센의 선제후로서 자신들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첫 번째 기회이기도 했다.
3. 작센 선제후비로서의 삶과 주요 활동
안나는 작센 선제후비가 된 후, 활발한 정치적 및 종교적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작센의 농업 및 약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 정치적 및 종교적 영향력
안나와 아우구스트는 처음에는 바이센펠스에 거주했다. 1553년 아우구스트가 형 모리츠의 사망으로 선제후가 되자, 그들은 주로 드레스덴에 거주했다. 덴마크의 안나는 수많은 서신을 교환하는 서신 작가였으며, 자신의 서신 보관 기록을 잘 유지했다. 그녀의 서신은 그녀의 일상생활과 당시 정치 및 종교 문제에 대한 그녀의 개입에 대한 자세한 통찰을 제공한다. 작센과 유럽 전역에서 그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여겨졌다.
안나는 루터교의 매우 적극적인 옹호자였으며, 1574년부터 1577년 사이에 작센에서 칼뱅주의 비밀 신앙(crypto-Calvinism)을 억압하는 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억압 과정에서 고문과 장기간의 감금을 포함한 가혹한 칼뱅주의자 박해에 그녀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녀는 다른 왕가 및 제후 가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갈등 조정이나 결혼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주 요청받았다.
3.2. 농업 및 원예 발전 기여
생전에 덴마크의 안나는 정원과 농지를 관리하는 데 뛰어난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578년, 그녀의 남편은 모든 영지 관리를 그녀에게 위임했다. 그녀는 새로운 작물과 새로운 가축 종을 도입하여 작센의 농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네덜란드 및 덴마크에서 시행되던 원예 기술의 도입을 장려했다. 이는 작센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작센은 독일에서 가장 번성하는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3.3. 약학 및 자연 과학 분야 활동
안나는 약초 지식의 공인된 전문가였으며, 직접 약초 요법을 조제했다. 그녀는 현재 독일 최초의 여성 약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동시대의 헬레나 마겐부흐나 마리아 안드레아와는 달리 전문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안나부르크 성에는 그녀 자신의 대규모 실험실과 도서관이 있었다.
q=Annaburg|position=right
4. 개인 생활 및 가족
안나는 남편인 선제후 아우구스트와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4.1. 자녀
안나는 아우구스트와의 사이에서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4명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다음은 그들의 자녀 목록이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요한 하인리히 | 1550년 5월 5일 | 1550년 11월 12일 | |
엘레오노레 | 1551년 5월 2일 | 1553년 4월 24일 | |
엘리자베트 폰 작센 | 1552년 10월 18일 | 1590년 4월 2일 | 1570년 6월 4일 팔츠-짐메른 공작 요한 카시미어와 결혼 (1589년 이혼), 하이델베르크에 투옥됨 |
알렉산더 | 1554년 2월 21일 | 1565년 10월 8일 | 작센의 세습 선제후 |
마그누스 | 1555년 9월 24일 | 1558년 11월 6일 | |
요아힘 | 1557년 5월 3일 | 1557년 11월 21일 | |
헥터 | 1558년 10월 7일 | 1560년 4월 4일 | |
크리스티안 1세 | 1560년 10월 29일 | 1591년 9월 25일 | 아버지의 뒤를 이은 선제후 |
마리 | 1562년 3월 8일 | 1566년 1월 6일 | |
도로테아 폰 작센 | 1563년 10월 4일 | 1587년 2월 13일 | 1585년 9월 26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하인리히 율리우스와 결혼 |
아말리에 | 1565년 1월 28일 | 1565년 7월 2일 | |
안나 | 1567년 11월 16일 | 1613년 1월 27일 | 1586년 1월 16일 작센-코부르크 공작 요한 카시미어와 결혼 (1593년 이혼), 페스테 코부르크에 투옥됨 |
아우구스트 | 1569년 10월 23일 | 1570년 2월 12일 | |
아돌프 | 1571년 8월 8일 | 1572년 3월 12일 | |
프리드리히 | 1575년 6월 18일 | 1577년 1월 24일 |
5. 사망
덴마크의 안나는 오랜 기간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1585년 10월 1일 사망했다.
6. 유산 및 역사적 평가
안나 선제후비는 생전의 다양한 활동과 공헌을 통해 후대에 지속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녀를 기리는 기념물 또한 존재한다.
6.1. 역사적 평가
안나는 작센의 가장 잘 알려진 선제후비 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19세기에 그녀에 대해 쓰인 전기들이 그녀의 전통적인 역할인 '국가의 어머니'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작센의 농업 및 원예 발전, 약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지만, 칼뱅주의자 박해에 대한 그녀의 역할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으로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6.2. 추모 및 기념물

덴마크의 안나를 기리기 위해 드레스덴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7. 가계
덴마크의 안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1. 덴마크의 안나
- 2. 크리스티안 3세 (덴마크)
- 3.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 4. 프레데리크 1세 (덴마크)
- 5.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 6. 마그누스 1세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 7. 브라운슈바이크의 카타리나
- 8. 크리스티안 1세 (덴마크)
- 9.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 10. 요한 키케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11. 튀링겐의 마르가레테
- 12. 요한 5세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 13.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1446-1519)
- 14. 하인리히 4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 15. 포메라니아-볼가스트의 카타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