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티호노프는 1905년 5월 14일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노동 계급 가정의 환경 속에서 보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티호노프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예카테리나 기술통신원 학교(현재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철도 기술대학)에서 수학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보조 엔지니어로 일했다. 이후 1930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야금 연구소 (현재 우크라이나 국립 야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엔지니어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에는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 초기 경력
1930년부터 1941년까지 티호노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 위치한 레닌 야금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상급 엔지니어로 승진했으며, 1941년 1월에는 공장의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훗날 소련의 지도자가 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는 이후 그가 소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마피아'로 불리는 브레즈네프 파벌의 핵심 인물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에는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9월부터 그는 스베르들롭스크주의 페르보우랄스크에 있는 신튜브 공장의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1947년 7월부터 1950년 12월까지 니코폴의 남부 튜브 야금 공장장으로 재직했다. 공장장으로서 티호노프는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했는데, 그의 지휘 아래 해당 공장은 지역 최초로 병원을 재개장하고 식당을 조직하며 동부 전선 여파에 휘말린 노동자들을 위한 사교 클럽을 복원하는 등 사회적 지원에 힘썼다.
3. 정치 및 행정 경력
티호노프의 경력은 지역 산업 현장에서 시작하여 소련 산업부의 고위직을 거쳐 국가 주요 행정직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3.1. 산업 및 부처 직책
1950년부터 티호노프는 소련 흑색 야금 산업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 유색 야금부 필수 파이프 산업 국장을 역임했다. 1955년 9월부터 1960년까지 그는 흑색 야금 산업부 차관으로 재직하며 파이프 산업을 담당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국가경제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또한 각료평의회 과학위원회 위원 및 후에는 의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끄는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1961년 제22차 공산당 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 비투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6년 제23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정식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2.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1963년 티호노프는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 계획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3. 부총리와 제1부총리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자, 티호노프는 각료평의회 부의장(부총리)으로 승진했다. 부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야금 및 화학 산업을 담당했으며, 중공업 전반에 대한 총괄 조정을 맡았다. 1976년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이 병가를 내자, 브레즈네프는 그의 병세를 틈타 티호노프를 각료평의회 제1부의장(제1부총리)으로 임명했다. 제1부총리가 된 티호노프는 코시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그를 예비 인물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두 지도자는 그의 솔직함과 정직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1978년에는 정치국 후보 위원에 선출되었고, 1979년에는 정식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침공 결정에 대해 통보받지 못했다.
4. 총리 재임 기간 (1980-1985)
티호노프는 1980년 10월 23일 코시긴 총리의 사임(코시긴은 같은 해 12월 18일 사망) 이후 75세의 나이로 각료평의회 의장(총리)에 선출되었다.
4.1. 임명과 주요 정책
그의 5년간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티호노프는 소련 경제의 침체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경제 개혁 조치를 취하는 것을 회피했다. 그는 제26차 당 대회에서 제11차 5개년 계획 (1981-1985)을 발표하며, 출산휴가를 신청하는 어머니들에게 900.00 만 RUB를 할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자리에서 소련 농업이 충분한 곡물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소련-미국 관계 개선을 촉구했지만, 소련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모든 추측을 일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호노프는 경제적 "결점"과 지속되는 "식량 문제"를 인정했으며, 에너지 자원 절약, 노동 생산성 향상, 소련 생산품 품질 개선의 필요성 등을 논의했다. 총리 임기 초인 1981년 1월, 그는 정부의 인구 정책이 자신의 내각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 중 하나임을 인정했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러시아인의 출산율이 충분하지 않음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침체기는 러시아 인구의 출생률 감소와 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4.2.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시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조언을 받아 티호노프에게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수여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 사망 후, 티호노프는 체르넨코의 서기장 후보 지명을 지지했지만, 투표에서 체르넨코가 패하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티호노프를 헤이달 알리예프로 교체할 계획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역사학자 윌리엄 A. 클라크는 아제르바이잔 KGB의 전 수장이었던 알리예프가 티호노프의 동의 없이 각료평의회 제1부의장에 임명된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1984년 안드로포프의 사망으로 티호노프는 자신의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부 서방 분석가들은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다시 티호노프의 동의 없이 제1부의장에 임명된 것을 두고 소련 위계 내에서 그의 입지가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했다. 그로미코가 제1부의장에 임명될 당시 티호노프는 유고슬라비아를 국빈 방문 중이었다.
건강이 나빠지던 안드로포프는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중앙위원회 연설문을 작성했다. 이 연설문 중 하나에서 안드로포프는 자신의 사망 시 후임이 체르넨코가 아닌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될 것이라고 중앙위원회에 밝혔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체르넨코, 우스티노프, 티호노프를 포함한 반(反)고르바초프 '트로이카'의 방해로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낭독되지 못했다. 안드로포프의 말년 동안 티호노프는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고, 1984년 동베를린에서 열린 상호 경제 원조 이사회 회의에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동구권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를 수행하고, 소련을 방문한 핀란드 총리를 접대했다. 즉, 안드로포프의 말년과 체르넨코의 집권 사이 기간 동안 티호노프는 소련의 주요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티호노프는 순조롭게 물러났고 체르넨코의 서기장 후보 지명을 지지했다. 1985년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티호노프는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후보 지명에 맞설 경쟁자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처음에는 빅토르 그리신을 지지했지만, 중진 정치국 위원인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이 고르바초프 지지를 표명하자 티호노프도 고르바초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만장일치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면서 티호노프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4.3.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사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후, 티호노프는 새로 설립된 관리 시스템 개선 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의장 직함은 주로 명예직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수장은 부의장인 니콜라이 리즈코프였다. 1985년 5월 23일 티호노프는 1990년까지, 그리고 2000년까지의 개발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 계획은 동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동료들에게 티호노프가 총리직을 수행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티호노프는 소련 국민 소득의 20~22% 성장, 산업 성장의 21~24% 증가, 그리고 2000년까지 소련 농업 생산량의 두 배 증가를 전망했다. 고르바초프가 보수적인 정치국 위원들을 제거하고 교체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티호노프는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다. 1985년 9월 27일 리즈코프가 티호노프의 후임으로 총리직을 맡았고, 그의 사임은 1985년 9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사임 당시 티호노프는 소련 지도부 내에서 최고령자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89년 중앙위원회 위원직을 잃을 때까지 소련 정치에서 활동했으나, 그 이전보다 훨씬 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5. 말년과 사망
1989년 정치 일선에서 강제 은퇴한 후, 티호노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자신의 서기장 선출을 지지했던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 관점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 금지되었을 때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후에 소련 해체 전후 시기에 국민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은퇴 후 그는 다차에 칩거하며 여생을 보냈고, 그의 한 친구가 언급했듯이 그는 "은둔자"처럼 살았으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자녀가 없었고 아내가 사망하여 말년의 삶이 매우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소련 해체 직전까지 티호노프는 최고 소비에트의 국가 고문으로 일했다. 그는 1997년 6월 1일 사망했으며,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망 직전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저에게는 재정적인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부총리였을 때 받은 3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전 총리였던 그는 다차, 사설 경호원, 그리고 개인 연금을 남겼지만, 어떠한 저축도 없었다. 정부에서 일할 때 그와 그의 아내는 모든 돈을 버스 구입에 사용했고, 이 버스를 소년선봉대 캠프와 학교에 기부했다. 소련 해체 후 개인 연금이 취소되었고, 티호노프는 일반 노령 연금을 받았다. 경호원들은 자신의 월급에서 과일을 사다 주기도 했다고 한다.
6. 유산과 평가
티호노프의 경력과 정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복합적이다.
6.1. 긍정적 평가
그는 소련 행정 및 산업계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며 숙련된 조직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공장이 병원을 재개장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을 복원하는 등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했다. 타임지는 티호노프를 "검증되고 시험을 거친 예스맨"이라고 평가했으나, 브레즈네프는 그를 "나의 가장 위대한 비평가"라고 칭하며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두 지도자는 그의 솔직함과 정직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6.2. 비판과 논란
티호노프는 침체기 동안 각료평의회 의장으로서 소련 경제를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그는 경제적 "결점"과 "식량 문제"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구조적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현상 유지를 선호했다. 이러한 보수적인 접근 방식은 소련의 경제적 어려움을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총리직을 맡았을 때 외교 및 국방 정책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소련 경제는 정체되었으며, 그는 당시 고령 정치인들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다른 소련 총리들과 비교했을 때, 티호노프는 후기 소련 문화에 거의 영향을 미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 소수에게만 기억된다. 그의 고향인 하르키우에 세워졌던 흉상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2023년 1월 6일 해체된 것은 그의 유산에 대한 현재의 부정적 시각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7. 수상 및 훈장
니콜라이 티호노프는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국가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 사회주의 노동영웅: 2회 (1975년, 1982년)
- 레닌 훈장: 9회 (1939년 3월 26일, 1945년 3월 31일, 1948년 9월 4일, 1954년 5월 11일, 1958년 7월 19일, 1971년 11월 26일, 1975년 5월 13일, 1982년 12월 10일, 1985년 5월 13일)
- 10월 혁명 훈장: 1회 (1980년 5월 13일)
- 적기 훈장: 2회
- 붉은 별 훈장: 1회
- 스탈린 국가상:
- 1등급 (1943년): 파이프 및 박격포 탄약 생산의 급진적 개선에 기여
- 3등급 (1951년): 대구경 무봉제 파이프 개발 및 상업 생산 기여
- 애국 전쟁 훈장: 1등급 (1985년 4월 23일)
- 공학박사 (1961년)
8. 관련 항목
- 침체기 (소련)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미하일 고르바초프
- 니콜라이 리즈코프
- 소비에트 연방 각료평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