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니코스 카잔자키스(그리스어: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니코스 카잔자키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Nikos Kazantzakis니코스 카잔자키스영어,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현대 그리스 문학의 거장이자 가장 널리 번역된 그리스 작가로 평가받는 소설가, 시인, 언론인, 정치인, 철학자이다. 그는 크레타 섬의 지형적,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기독교인 박해를 경험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이는 그의 초기 민족주의적 성향의 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카잔자키스의 문학 세계는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니체, 불교 등 다양한 사상적 스승과 이념적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구원을 향한 영적 투쟁, 그리고 한계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현대적 속편》과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그리스도》, 《미할리스 대장》 등은 독특한 시적 문체와 깊은 철학적 주제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최후의 유혹》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금서 지정 논란을 겪기도 했다.
그는 문학 활동 외에도 공공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는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발전시켰다. 9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알베르 카뮈가 그를 자신보다 훨씬 노벨상에 합당한 인물로 평가할 만큼 현대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로 각색되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그리스인 조르바》와 《최후의 유혹》은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2. 생애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삶은 크레타 섬의 격동적인 역사적 배경과 그의 끊임없는 지적, 영적 탐구가 어우러져 형성되었다. 그는 학업을 통해 서구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다양한 해외 여행과 정치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2.1. 유년기 및 교육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1883년 2월 18일 오스만 제국 치하의 크레타 섬 이라클리오(당시 이름은 칸디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자키스는 곡물과 포도주를 중개하는 중산층 상인이었다. 1897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인들의 반란이 격화되자 그의 가족은 낙소스섬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그는 크레타 섬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으며, 유년 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하며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2.2. 학업과 초기 활동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 그는 수필 《병든 시대》와 소설 《뱀과 백합》을 출간했으며, `카르마 니르바미`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법과 국가 철학에 대한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제목의 법학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1907년에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로 유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Friedrich Nietzsche dans la philosophie du droit et de la cité를 통해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 또한 깊이 탐구했다. 이 시기의 베르그송과 니체로부터 받은 영향은 이후 그의 문학적, 철학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09년에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룬 1막 희곡 《코미디》를 썼는데, 이는 장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가 주도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실존주의 운동보다 앞선 것이었다. 파리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그리스로 돌아와 여러 철학 작품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작가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를 만나 2년 동안 그리스 정교 문화가 번성했던 지역들을 함께 여행하며 민족주의적 열정에 영향을 받았다.
2.3. 결혼과 가족
1911년 카잔자키스는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결혼했으나, 1926년에 이혼했다. 1924년에는 엘레니 사미우(Helen Samiou)를 만났고, 1928년부터 연인 관계를 이어오다가 1945년에 재혼했다. 엘레니 사미우는 그의 작품 초고를 타이핑하고, 여행에 동반하며, 사업을 관리하는 등 카잔자키스의 문학 활동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들은 1957년 카잔자키스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으며, 엘레니 사미우는 2004년에 사망했다.
2.4. 광범위한 여행과 사상적 영향

1922년부터 1957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카잔자키스는 파리와 베를린 (1922~1924), 이탈리아, 러시아 (1925), 스페인 (1932), 키프로스, 아에기나섬, 이집트, 시나이산, 체코슬로바키아, 니스, 앙티브, 중국, 일본 등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다. 이러한 여정은 그에게 다양한 철학, 이념, 생활 방식,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공했으며, 이 모든 경험은 그의 사상과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상황이던 베를린에 체류하던 1922년, 그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전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버리고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는 소련을 두 차례 방문하여(1925년, 1927년) 빅토르 세르주와 같은 좌익 반대파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 그는 공산주의에 희망을 보았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과 루사코프 사건을 목격하면서 소련식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초기 민족주의적 신념은 점차 범세계주의적 이념으로 대체되었다. 1926년에는 언론인으로서 스페인의 총리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또한 빈에 체류하는 동안 불교를 연구하며 기독교 신념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2.5. 정치 및 공공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자원병으로 복무했으며, 당시 총리였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비서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고향 크레타 섬으로 돌아와 후에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인 알렉시스 조르바의 실제 모델이었던 요르고스 조르바스와 함께 탄광 채굴 및 벌목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공공 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약 15만 명에 달하는 카프카스와 남부 러시아의 폰토스 그리스인 난민 귀환 사업에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듬해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총선에서 패배하자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떠나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언어학자 이오안니스 카크리디스와 함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번역했다.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아테네로 돌아왔고, 12월 사태로 알려진 그리스 내전을 직접 목격했다. 1945년에는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어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연립정부의 무임소 장관으로 잠시 입각했다. 같은 해, 그는 그리스-소련 우호 연합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46년 장관직을 사임하고, 유네스코 번역국의 책임자가 되어 문학 작품 번역을 장려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47년,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유네스코 직책을 사임했으며, 실제로 그의 주요 문학 작품 대부분은 이 시기 이후인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탄생했다.
2.6. 사망

1957년 말, 백혈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잔자키스는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중국과 일본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중국에서 천연두나 콜레라 증상으로 인해 예방접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백신이 그에게 괴저를 유발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그는 코펜하겐을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괴저는 치료되었으나, 중국에서 심한 아시아 독감에 걸려 결국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 시기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기도 했다.
카잔자키스는 1957년 10월 26일, 74세의 나이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 이라클리오로 운구되어 이라클리오 성벽 중 가장 높은 지점인 마르티넹고 요새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생전에 미리 써놓은 유명한 문구인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리스어: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덴 엘피조 티포타. 데 포붐메 티포타. 이메 레프테로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는 2세기부터 이어져 온 견유학파 철학의 이상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으로,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상징한다.
2007년에는 니코스 카잔자키스 사망 50주년을 기념하여 고액의 그리스 유로 금은 기념주화가 발행되었다. 주화 앞면에는 그의 초상이, 뒷면에는 그리스의 국장과 그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3. 문학 세계와 주요 저작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문학은 깊은 철학적 통찰과 독특한 예술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과 영적 탐구, 그리고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며 광범위한 독자층에게 영향을 미쳤다.
3.1. 문학적 특징과 주제
카잔자키스 문학의 핵심은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니체, 불교 신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초기 공산주의 이념 등 다양한 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베르그송의 직관 철학은 그의 세계관에 깊이 스며들어,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직관의 혼합이라는 주제가 그의 많은 이야기, 인물, 그리고 개인 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구원에 대한 투쟁적인 자세를 작품 속에 구현하며, 인간 존재의 한계와 그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탐구했다.
카잔자키스는 자신의 작품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 문화의 종교, 민족주의, 정치적 신념, 그리스 내전, 성 역할, 이민, 일반적인 문화 관행 등을 다양하게 탐구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가 동양과 서양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독특한 물리적, 영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동양의 본능과 서양의 이성을 화해시키는 것"이 그리스의 특별한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소설 전반에 걸쳐 논리와 감성의 균형을 이루는 베르그송적 주제와 연결된다. 비평가들은 그의 문체가 때때로 화려하고 은유적이며 읽기 어렵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는 그가 그리스를 여행하며 만난 농민들의 지역적인 표현과 은유를 보존하고 이야기의 진정성을 더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평가된다.
3.2. 서사시
카잔자키스의 대표 서사시인 《오디세이아: 현대적 속편》(그리스어: Οδύσσεια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The Odyssey: A Modern Sequel영어)은 1924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4년간의 집필과 개정을 거쳐 1938년에 완성되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원작의 끝 이후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내용을 다루며, 호메로스 원작의 구조를 따라 24개의 랩소디로 나뉘어 있고 총 33,333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잔자키스 자신은 이 시가 자신의 모든 지혜와 경험을 담은 가장 위대한 문학적 경험이라고 여겼으나, 문학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전례 없는 서사시"라는 찬사와 "오만불손한 행위"라는 비판으로 의견이 엇갈렸으며, 오늘날까지도 학자들 간에 평가가 분분하다.
3.3. 소설
카잔자키스의 가장 유명한 소설들 중 다수는 1940년에서 1961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 《그리스인 조르바》(그리스어: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Zorba the Greek영어)는 1946년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자유롭고 본능적인 삶을 추구하는 조르바와 지식인의 고뇌를 대비시키며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를 탐구한다.
-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그리스도》(그리스어: Ο Χριστός ξανασταυρώνεται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Christ Recrucified영어)는 1948년에 발표되었으며, 그리스의 작은 마을에서 수난극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종교적, 사회적 갈등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과 위선을 고발한다.
- 《미할리스 대장》(그리스어: 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Captain Michalis영어, '자유 또는 죽음'으로 번역되기도 함)은 1950년에 출간되었으며, 19세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크레타인들의 투쟁을 배경으로 자유를 향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그린다. 이 소설은 1953년에 다시 출판되었다.
- 《최후의 유혹》(그리스어: 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영어)은 1955년에 출간되었으며, 예수를 인간적인 고뇌와 유혹에 직면한 존재로 묘사하여 큰 종교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그레코에게 보고하다》(그리스어: Αναφορά στον Γκρέκο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Report to Greco영어)는 1961년 출판된 자서전적 소설로, 카잔자키스 자신의 철학적, 영적 여정을 다룬다.
이 외에도 《성자 프란체스코》 (1962년, '하느님의 빈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도 출판), 프랑스어로 쓰인 《돌의 정원》 (1963년), 《형제 살해자들》 (1964년), 프랑스어로 쓰인 《토다 라바》 (1964년), 어린이 소설 《알렉산드로스 대왕》 (1982년), 《크노소스 궁전의 궁전에서》 (1988년), 《뱀과 백합》 (1980년) 등 다수의 소설을 집필했다. 미출간 소설로는 '부서진 영혼들'(1908년), '등반'(1946년) 등이 있다.
3.4. 희곡 및 기타 저작
카잔자키스는 소설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여러 희곡을 썼는데, 1948년 파리에서 초연된 《배교자 율리우스》, 《세 편의 희곡: 멜리사, 쿠로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969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972년), 《오디세우스: 드라마에서》 (일부, 1973년), 《코미디: 1막 비극》 (1975년), 《소돔과 고모라: 희곡》 (1976년), 《두 편의 희곡: 소돔과 고모라, 코미디: 1막 비극》 (1982년), 《붓다》 (1983년), 《오디세우스: 운문 비극》 (2022년) 등이 있다. 또한 1946년에 《카포디스트리아스》, 1962년에 《멜리사》가 상연되기도 했다.
그의 광범위한 여행 경험은 《스페인 기행》, 《일본, 중국 기행》, 《영국 기행》, 《모레아 기행》, 《여정: 이탈리아, 이집트, 시나이, 예루살렘, 키프로스 기행》, 《러시아 기행》 등 다수의 탁월한 여행기로 이어졌다.
회고록, 수필, 철학 에세이로는 《구세주들》(그리스어: Ασκητική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The Saviors of God: Spiritual Exercises영어) (1960년), 《그레코에게 보고하다》 (1965년), 《심포지엄》 (1974년), 《법과 국가 철학에 대한 프리드리히 니체》 (2007년), 《고통받는 신: 갈라테아와 파파스테파누에게 보낸 편지들》 (1979년), 《키프로스의 천사들》 (1976년), 《나를 재로 태워라: 발췌문》 (1964년), 《드라마와 현대인: 에세이》 (1976년), 《호메로스의 G.B.S.》 (1975년), 《찬가 (알레고리)》 (1970년), 《두 가지 꿈》 (1972년) 등이 있다. 그의 서신들은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선별된 편지들》로 출판되기도 했다.
3.5. 언어관과 문체
카잔자키스가 활동하던 시기, 그리스 문학계에서는 카타레부사와 민중 그리스어(데모티키) 사이의 언어 논쟁이 첨예했다. 카타레부사는 고대 그리스어와 근대 그리스어를 연결하고 데모티키를 '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어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신 아테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작가들 사이에서 데모티키 사용이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카잔자키스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데모티키로 글을 쓰는 이유가 민중의 정신을 포착하고, 자신의 글이 평범한 그리스 시민들에게 더 잘 다가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평범한 구어체 그리스어로도 예술적인 문학 작품을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는 "왜 데모티키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며, 그리스 농민을 포함한 일상적인 사람들의 방언을 기록하고, 그리스를 여행하며 들었던 표현, 은유, 관용구를 자신의 글에 포함시켜 후대에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의 작품이 카타레부사가 아닌 데모티키로 쓰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칭찬하기도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카잔자키스의 글이 너무 화려하고 난해한 은유로 가득 차 있으며 데모티키로 쓰였음에도 읽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잔자키스 연구자 피터 비엔은 카잔자키스가 사용한 은유와 언어가 그리스를 여행하며 만난 농민들로부터 직접 가져온 것이며, 민중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그들의 지역적인 은유와 구절을 사용하여 서사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표현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4. 철학과 이념
카잔자키스는 인간의 존재와 신념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며, 그의 독특한 종교관과 사회정치적 시각을 통해 기존의 틀을 깨는 이념적 가치들을 탐구했다.
4.1. 종교관과 그리스 정교회와의 관계
카잔자키스는 깊은 영적 탐구를 추구했지만, 특히 그리스 정교회 신앙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어릴 적 그리스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성인전에 매료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주요 영적 중심지이자 수도원이 있는 아토스산으로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대부분의 카잔자키스 비평가와 학자들은 종교와 영성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투쟁이 그의 많은 작품의 핵심이었으며, 《최후의 유혹》과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그리스도》와 같은 일부 소설은 기독교적 도덕과 가치에 대한 질문에 전적으로 집중한다고 평가한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불교와 같은 다양한 철학, 문화, 종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념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개적인 질문과 비판은 그리스 정교회 일부 인사들과 많은 비평가들과 갈등을 빚게 했다. 학자들은 카잔자키스가 성직자들과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문학 비평가들과 어려운 관계를 맺게 된 것이 그의 '질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작가 대런 미들턴은 저서 《할렐루야의 파편: 니코스 카잔자키스와 기독교 신학》에서 "대부분의 기독교 작가들이 하나님의 불변성, 예수의 신성,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카잔자키스는 신적 가변성, 예수의 인간성, 그리고 우리의 노력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자체를 강조했다"고 설명하며, 전통적인 정교회 기독교 신념에 대한 카잔자키스의 독특한 해석을 강조했다.
많은 정교회 성직자들은 카잔자키스의 작품을 비난하고 그를 파문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한 카잔자키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성스러운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은 나에게 저주를 주었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축복을 줍니다: 당신들의 양심이 내 양심만큼 깨끗하고, 당신들이 나만큼 도덕적이고 신앙심 깊기를 바랍니다." 이 파문 시도는 정교회 최고 지도부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종교적 견해에 대한 많은 기독교 당국자들의 지속적인 불찬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현대 학계에서는 카잔자키스가 자신의 소설 내용과 신념에서 신성모독적이거나 불경했다는 생각을 대체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이 학자들은 카잔자키스가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공개적으로 씨름하고 의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더욱 강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성장시켰던 오랜 기독교인 전통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런 J. N. 미들턴과 같은 학자들은 카잔자키스의 기독교 신앙 해석이 그의 사후에 대중화된 보다 현대적이고 개인화된 기독교 해석보다 앞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4.2. 사회 및 정치관
카잔자키스는 평생 동안 "목표로서의 사회주의와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엄청나게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공평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다툼을 멈추고 단결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프로그램이 그리스뿐만 아니라 문명 세계 전반에 걸쳐 승리해야 할 필요성을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묘사했다.
카잔자키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그리스 우익에게는 '부도덕하고', '볼셰비키 문제아'이며 '러시아 간첩'이라고 비난받는 등 증오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 공산당과 소련 양측으로부터는 '부르주아 사상가'로 불신을 받았다. 그러나 1957년 그가 사망했을 때, 중국 공산당은 그를 "위대한 작가"이자 "평화의 헌신자"로 기렸다. 전쟁 후, 그는 잠시 동안 소규모 그리스 좌파 정당의 지도자였으며, 1945년에는 그리스-소련 우호 연합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5. 유산과 평가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그의 독특한 문학적 업적과 사상적 깊이로 인해 현대 그리스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혁신적인 사상은 때때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5.1. 노벨 문학상 후보 지명

카잔자키스는 9년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1946년 그리스 작가 협회는 그와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소스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 정부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1947년과 1950년에 후보로 지명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최만년인 1957년에는 1표 차이로 알베르 카뮈에게 수상을 놓쳤다. 이 일에 대해 카뮈는 훗날 카잔자키스가 자신보다 "백 배 이상 그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문학적 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정치적, 종교적 배경이 그의 수상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5.2. 영화 각색
카잔자키스의 여러 소설은 주요 영화로 각색되어 그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그리스도》는 1957년 적색 공포로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한 줄스 다신 감독에 의해 프랑스에서 영화 《숙명》(프랑스어: Celui qui doit mourir프랑스어)으로 제작되었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에 의해 1964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1965년 3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서 배우 앤서니 퀸이 호탕하면서도 매력적인 조르바 역을 열연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최후의 유혹》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오랜 구상 끝에 1988년 영화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예수를 인간적인 고뇌와 유혹에 직면한 존재로 묘사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 등 기독교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와 상영 금지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나, 작품성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 2017년에는 야니스 스마라그디스 감독이 연출한 카잔자키스의 전기 영화 《카잔자키스》(그리스어: Καζαντζάκη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Kazantzakis영어)가 개봉되기도 했다.
5.3. 기념 및 추모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고향인 크레타 섬 이라클리오에는 니코스 카잔자키스 박물관이 건립되어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있으며, 이라클리오의 베네치아 양식 로자에는 그의 기념 메달이 새겨져 있다. 2007년에는 그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하여 그리스에서 10 EUR 기념주화가 발행되기도 했다.
카잔자키스는 그리스 문학계에서 민중 그리스어(데모티키)의 예술적 가능성을 증명하고,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융합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을 탐구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영감과 사색의 기회를 제공하며 현대 그리스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저작 목록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주요 저작들은 그의 광범위한 문학적 활동과 다양한 장르에 걸친 재능을 보여준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들을 장르별로 분류한 목록이다.
6.1. 시
- 《테르트신》 (그리스어: Τερτσίνε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32년 ~ 1937년)
- 《그리스도》 (영어: Christ영어)
6.2. 소설
- 《뱀과 백합》 (그리스어: Όφις και Κρίνο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06년)
- 《부서진 영혼들》 (그리스어: Σπασμένες Ψυχέ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08년)
- 《향연》 (그리스어: Συμπόσιον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 《토다 라바》 (프랑스어: Toda Raba프랑스어, 1930년)
- 《돌의 정원》 (프랑스어: Le Jardin des rochers프랑스어, 1936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 (어린이 소설, 1940년)
- 《크노소스 궁전의 궁전에서》 (어린이 소설, 1940년)
- 《등반》 (그리스어: Ο Ανήφορο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46년, 초판 2022년)
-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어: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46년)
-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그리스도》 (그리스어: Ο Χριστός ξανασταυρώνεται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48년, '그리스 수난극'으로도 알려짐)
- 《미할리스 대장》 (그리스어: 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50년, '자유 또는 죽음'으로도 알려짐)
- 《최후의 유혹》 (그리스어: 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51년)
- 《형제 살해자들》 (그리스어: Οι Αδελφοφάδε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53년)
- 《성자 프란체스코》 (그리스어: Ο Φτωχούλης του Θεού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56년, '하느님의 빈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도 알려짐)
- 《그레코에게 보고하다》 (그리스어: Αναφορά στον Γκρέκο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61년)
6.3. 희곡
- 《밤의 끝》 (그리스어: Ξημερώνει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07년)
- 《코미디》 (영어: Comedy영어, 1909년)
- 《주 건축가》 (그리스어: Ο Πρωτομάστορα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10년)
- 《율리우스》 (영어: Julian the Apostate영어, 1948년 초연)
- 《카포디스트리아스》 (1946년)
- 《소돔과 고모라》 (영어: Sodom and Gomorrah영어)
- 《붓다》 (영어: Buddha영어)
- 《세 편의 희곡: 멜리사, 쿠로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어: Three Plays: Melissa, Kouros, Christopher Columbus영어)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영어: Christopher Columbus영어)
- 《오디세우스: 운문 비극》 (영어: Odysseus: A Verse Tragedy영어)
6.4. 여행기
- 《일본, 중국 기행》 (그리스어: Ταξιδεύοντας: Ιαπωνία-Κίνα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38년)
- 《러시아 기행》 (그리스어: Ταξιδεύοντας: Ρωσία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40년)
- 《스페인 기행》 (영어: Spain영어)
- 《모레아 기행》 (영어: Journey to the Morea영어)
- 《영국 기행》 (영어: England영어)
- 《여정: 이탈리아, 이집트, 시나이, 예루살렘, 키프로스 기행》 (영어: Journeying: Travels in Italy, Egypt, Sinai, Jerusalem and Cyprus영어)
6.5. 수필 및 회고록
- 《구세주들: 영적 수행》 (그리스어: Ασκητική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영어: The Saviors of God: Spiritual Exercises영어, 1960년)
- 《그레코에게 보고하다》 (그리스어: Αναφορά στον Γκρέκο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1965년)
- 《심포지엄》 (영어: Symposium영어)
- 《고통받는 신: 갈라테아와 파파스테파누에게 보낸 선별된 편지들》 (영어: The Suffering God: Selected Letters to Galatea and to Papastephanou영어)
- 《법과 국가 철학에 대한 프리드리히 니체》 (영어: Friedrich Nietzsche on the Philosophy of Right and the State영어)
- 《두 가지 꿈》 (영어: Two Dreams영어)
6.6. 번역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및 《오디세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