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학력
노무라 겐지로는 1966년 9월 19일, 오이타현 사이키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투수로 활약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최고 학년에서 주장을 맡았고, 당시 투수로서 직구, 커브,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삼촌인 야기 다카시가 과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의 프로 야구 선수였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매년 히로시마의 캠프를 견학하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1. 유소년 시절과 학창 시절
오이타현립 사이키카쿠조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빠른 발을 활용하기 위해 우타자에서 양타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봄과 여름의 전국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한 노무라 겐지로는 당시 감독이었던 오타 마코토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타자로 전향하고 외야수가 되었다. 1학년 때는 주로 좌익수나 우익수로 뛰며 리그전에 기용되었다. 2학년 봄 리그전부터는 중견수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같은 해 가을 리그에서는 중견수로서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3학년 봄 리그전에서는 오이시 다이지로가 세운 17도루 기록을 경신하는 18도루를 달성하며 2시즌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3학년 때는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와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고, 이 시기부터 프로 입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가을 리그전에서는 2루수로도 도전하여 2루수로서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고, 다시 미일 대학 야구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 봄 리그전에서는 22년 만에 도토 대학 야구 리그 통산 기록을 경신하는 52번째 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고마자와 대학의 완전 우승에 크게 기여하여 만장일치로 최고 수훈 선수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4학년 때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에 오모리 쓰요시, 도마시노 겐지 등 3명의 대학생 선수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이 올림픽에서는 주전 선수들이 워낙 뛰어나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결승전을 포함한 3경기에서 9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특히 결승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대타로 출전하여 짐 애벗 투수를 상대로 우전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학 통산 성적은 89경기 출장, 325타수 103안타, 타율 .317, 10홈런, 48타점, 52도루를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에 4회 선정되었다. 대학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야수로 평가받으며 '이시게 히로미치 2세'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복수 구단의 지명이 예상되었으나,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단독 1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히로시마는 같은 고향 출신인 가와사키 겐지로도 1순위 후보로 검토했지만, 스카우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노무라를 지명했다. 계약금 6000.00 만 JPY, 연봉 600.00 만 JPY에 입단 계약을 맺었으며, 등번호는 7번으로 결정되었다.
2. 프로 선수 경력
노무라 겐지로는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만 17년간 활약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1. 프로 입단 및 초기 경력
1989년 4월 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대주자로 1군에 첫 출장했다. 같은 해 5월 4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는 6회말 나카모토 시게키로부터 1군 첫 안타이자 중전 적시타를 기록했다. 이 해에는 대학 시절에도 경험이 있는 좌익수로 뛰었으며, 최우수 신인상은 올림픽 이후 친구인 도마시노 겐지에게 돌아갔다.
1990년부터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한 다카하시 요시히코를 대신하여 유격수의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시범 경기에서는 실책이 많았고, 당시 공칭 70 kg이라는 왜소한 체격에서 오는 파워 부족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시즌에 돌입하자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했다. 4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3회말 미야모토 가즈토모로부터 1군 첫 홈런인 우월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또한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선발되어 2차전에서 2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다. 시즌에서는 33도루를 기록하며 개인 첫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2.2. 주요 선수 경력 및 업적
1991년에는 전 경기에 출장하며 31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170안타를 기록하여 최다 안타를 획득했고, 리그 4위의 타율 .324를 기록했다. 또한 개인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9월 1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동점 적시타와 함께 호수비를 선보이며 팀이 선두로 올라서 리그 우승을 확정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경기는 현역 시절 가장 인상 깊은 경기로 남아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마지막 타자가 되어 구도 기미야스에게 삼진을 당하며 우승을 놓쳤지만, 팀 내 최고 타율인 .333을 기록하여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해 연봉은 5300.00 만 JPY로 크게 인상되는 등 구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12월 7일에는 2년간 교제했던 여성과 결혼했다.
1992년에는 미일 야구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 1993년에는 1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4월에 개인 첫 월간 MVP에 선정되었고,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시즌 타율은 .266으로 저조했다.
1994년부터 7년간 히로시마의 주장과 팀 리더를 맡았으며, 수위 타자를 목표로 시즌에 임했다. 시즌 초 2번 타자였던 타순은 6월 9일 1번으로 돌아왔고, 2번째 최다 안타(이 해부터 공식 타이틀로 제정)와 3번째 도루왕을 획득했다. 구단 유격수로는 1986년 다카하시 요시히코 이후 2번째로 전 이닝 출장을 달성했다. 연봉은 팀 동료 마에다 도모노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4500.00 만 JPY가 크게 인상된 1.08 억 JPY가 되어 처음으로 1억 엔을 돌파했다. 11월에는 가을 캠프 참여가 면제되어 어금니 충치 치료에 집중했으며, 이로 인해 교합이 개선되어 임팩트 시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몸쪽 공에 대한 대응을 개선하기 위해 그립 위치를 올리고 강하게 휘두르는 등 타격 폼을 개조했다.
1995년 4월 18일에 장남이 태어났고, 헬멧에 장남의 이름을 새겨 격려 삼아 경기에 임했다. 5월에는 개인 2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6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첫 등판한 가와하라 준이치로부터 1회 선두 타자 홈런을 터뜨렸다. 9월 1일까지 전 경기에 1번 타자로 선발 출장을 이어갔고, 9월 2일부터는 3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9월 22일에는 당시 역대 5위의 빠른 기록인 857경기 만에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에는 허리와 등에 통증을 안고 귀루가 어려워 도루 수가 감소했지만, 10월 6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30도루에 도달했다. 최종적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6번째로 트리플 쓰리 (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기록했다. 타율 .3145는 로버트 로즈의 .3150과 0.0005 차이로 리그 3위였고, 32홈런은 팀 동료 에토 아키라에 이어 리그 2위였다. 수비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개인 첫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연말에는 당시 역대 최고액인 1.70 억 JPY에 계약을 갱신했으며, 5년 뒤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경신하기 전까지 노무라를 팀 최고 연봉자로 두는 불문율이 생겼다. 이 해 계약 갱신 시 구단은 노무라를 주장 및 팀 리더로서의 활약과 다카쓰 신고, 니시야마 가즈오 등 라이벌 팀의 마무리 투수들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터뜨린 점을 높이 평가하며 팀 내 최고의 공헌도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1996년에는 개막 후 7경기 동안 1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전년도 도루왕을 차지한 오가타 고이치의 존재로 인해 4월 중순부터는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7월 6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왼쪽 발목을 다쳐 들것에 실려 퇴장했고, 다음날부터 3경기에 결장했다. 골절이 의심되었으나 구단은 염좌로 발표했고, 진통제를 복용하며 출장을 이어갔다. 미무라 도시유키 감독은 휴식을 고려했지만, 유격수 백업 선수가 마땅치 않고 노무라 본인이 출장을 간청하여 경기에 계속 나섰다. 그러나 왼쪽 발목을 보호하려다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에도 통증이 번졌고, 9월에는 전력 질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팀 성적도 부상 전 45승 24패에서 부상 후 26승 35패로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 부상이 요미우리의 '메이크 드라마'를 허용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부상으로 인해 개인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연말에는 팀을 이끈 활약을 인정받아 2000.00 만 JPY 인상된 연봉 1.90 억 JPY에 계약을 갱신하고 선수 회장에 취임했다.
1997년 오프 시즌에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당시 여러 팀의 감독들은 유격수 후계자로 노무라의 영입을 강력히 희망했다고 한다. 또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로부터 오퍼가 있었다. 노무라 본인도 오랫동안 메이저 리그 진출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학 시절 감독이었던 오타 마코토의 "자신을 위한 인생이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일본 프로 야구계를 위해 사는 것도 또한 인생이다"라는 조언을 듣고 히로시마에 잔류하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그는 일본 선수로는 13번째, 구단 최초의 2.00 억 JPY 플레이어가 되었다.
1998년에는 서울 올림픽에서 팀 동료였던 도마시노 겐지가 야쿠르트에서 이적하여 노무라와 한 팀이 되었다. 이로 인해 도마시노의 자극을 받은 노무라는 자신의 플레이를 더욱 갈고닦았다고 한다. 이 해에는 주로 1번 타자를 맡아 팀에서 유일하게 전 경기 출장을 달성했지만, 연봉은 동결되었다. 1999년 5월 19일에는 당시 역대 4위의 빠른 기록인 1289경기 만에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9월에는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이 해에는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5월부터 결장이 많아졌고, 정규 시즌 중반에는 3루수나 2루수로 선발 출장이 늘었다. 8월부터는 다시 유격수로 돌아왔지만,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2000년에는 3루수 에토 아키라가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개막 전 캠프부터 에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3루수 훈련에 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8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1루까지 뛰다가 왼쪽 무릎 뒤쪽 근육 파열 (실제로는 근육 단열)을 일으켜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 5월 3일 1군에 복귀했으나 증상이 심해 7월 24일 정밀 검사에서 왼쪽 다리 근력이 오른쪽 다리의 약 절반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져 개인 첫 출장 선수 등록 말소를 당하며 후반기에는 결장했다. 8월에는 마찬가지로 부상당한 마에다 도모노리와 오가타 고이치와 함께 전열에서 이탈하여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가 재활에 전념했다. 이 해는 프로 입단 후 최저인 타율 .240, 2홈런, 1도루로 시즌을 마쳤다.
2001년, 노무라가 전열에서 이탈한 사이에 유격수는 히가시데 데루아키, 3루수는 아라이 다카히로가 각각 주전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노무라는 2루수로 전향하여 기무라 다쿠야와 주전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개막 전 캠프 중인 2월 8일 수비 훈련 중 왼쪽 허벅지를 다쳐 시범 경기는 2경기 출장에 그쳤고, 개막전에는 처음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같은 2루수인 에디 디아스가 타격 호조를 보였고, 오가타의 부상으로 아라이가 우익수로 이동하면서 5월 9일 이후 노무라는 다시 3루수 주전 자리를 되찾았다.
2002년 4월 말에는 오른쪽 허벅지를 다쳐 약 한 달간 2군 생활을 했고, 후반기에는 대타나 수비 요원으로 주로 기용되었다. 출장 경기 수가 100경기를 밑돌았고 타율도 .211로 저조했지만, 유격수 라이벌인 히가시데에게 수비 면에서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2003년 3월 29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수비 중 왼쪽 내복사근에 전치 3주의 좌상을 입어 4월 2일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시즌 종반에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으로 전열 이탈 기간이 길어졌고, 오프 시즌에는 일본 프로 야구 협약 상한을 넘는 33% 삭감된 1.00 억 JPY에 계약을 갱신했다. 같은 해 7월 야마모토 고지의 감독 유임이 결정되었을 때, 마쓰다 하지메 구단주는 다음 감독 후보가 노무라임을 명언했다.

2004년 1월에는 구로다 히로키와 함께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부상 방지를 위한 속근육 강화와 고관절 유연성 향상에 힘썼지만, 6월 19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3루 땅볼을 처리하다 오른쪽 무릎을 다쳐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는 등 이 해에도 부상에 시달렸다. 연말에는 연봉 동결로 계약을 갱신했다.
2005년에는 나이로 인한 노쇠화와 수비 부담 경감을 위해 1루수로도 도전하기 시작했으며, 개막 전 캠프의 홍백전에서는 포수 역할도 수행했다. 같은 해 1월부터는 2000안타 기록 달성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높아졌다. 5월에는 고향인 오이타현 사이키시 내 6곳과 소고 히로시마점에 카운트다운 보드가 설치되었고, 6월에는 히로시마 가스 인포메이션 플라자에서 입단 이후의 궤적을 辿는 사진전이 개최되었다. 2000안타까지 4개만을 남겨둔 6월 21일부터 시작된 홈 6연전에서는 오이타현 사이키시의 오테마에 공원에서 6.3 m (250 in) 야외 스크린을 통해 퍼블릭 뷰잉이 진행되었다. 6월 23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 4회말, 가와시마 료로부터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도토 대학 야구 연맹 출신 선수로는 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영예상이 수여되었고, 히로시마 전철은 기념 파세오 카드를 발행했다. 그 이후로는 대타로 출장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9월 16일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가 은퇴 경기가 되었으며, 만원 관중에게 노무라의 등번호 '7'이 새겨진 포스터가 배포되었다. 은퇴 경기에서는 1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으나, 경기 도중 대학에서 경험이 있는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은퇴 세리머니 연설에서 "오늘 모인 아이들아, 야구는 좋은 것이다. 야구는 즐겁다!"라는 말을 남겼다. 구단은 등번호 '7'을 영구 결번으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노무라 본인이 거절하여 등번호 '7'에 걸맞은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의 영구 결번 보류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2013년부터 도바야시 쇼타가 등번호 '7'을 물려받게 되었다. 또한 구단 간부들은 2009년 신구장 개장에 맞춰 노무라를 감독으로 초빙할 방침을 이 시점에서 이미 내세웠다.
2.3. 선수로서의 특징
노무라 겐지로는 타격, 주루, 수비 삼박자를 고루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2.3.1. 타격
노무라 겐지로는 최다 안타 3회, 최다 득점 2회, 트리플 쓰리,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등, 특히 현역 시절 전반에는 히로시마의 리드오프맨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당시 공칭 176 cm, 75 kg으로 특별히 체격이 좋지는 않았지만, 주로 강타자 유형의 선수들이 달성했던 트리플 쓰리를 이뤄냈을 때는 꾸준한 훈련을 통한 근력 강화를 높이 평가받았다. 노무라가 프로에서 실질적으로 10년간 유격수로 뛰며 기록한 통산 타율 .293은 1000타석 이상에서는 센트럴 리그 최고 기록(2004년 당시)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강타자 유격수였다. 과감한 타격이 특기였으며, 찬반양론이 있었지만 1번 타자로 기용될 때도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를 공략했다.
심야 메이저 리그 TV 중계를 빼놓지 않고 보는 '메이저 리그 광'이었기에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의식했으며, 3루타의 크로스 플레이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양타가 되었지만, 목표로 했던 좌타에는 처음부터 능숙하지는 않았다. 배트는 미즈노의 나와 다미오가 만든 작품을 사용했다. 프로 입단 후에는 스위치 히터로 활동할 생각이었지만(히로시마 입단 초기에는 양타 등록), 프로에서는 처음부터 좌타에 집중했다.
2.3.2. 주루
노무라 겐지로는 빠른 발을 자랑하는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대학 시절에는 도토 대학 야구 리그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웠고, 4학년 봄에는 완전 도루를 달성하는 등 프로 입단 전부터 주루 기술이 뛰어났다. 4학년 때는 베이스 한 바퀴를 13.8초에 도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프로 입단 후에도 1989년 4월 12일 첫 도루를 기록했고, 5월 말까지 도루 시도 10회 중 8회 성공하며 일찍부터 기술이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프로에서도 통산 3회 도루왕을 획득했다. 노무라는 입단 후 10년간 234도루, 42 3루타를 기록했으나, 현역 시절 후반에는 잦은 다리 부상으로 주력이 떨어져 대주자가 투입되는 경우가 늘었다.
2.3.3. 수비
노무라 겐지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투수였지만, 대학에서 외야수가 되었고 프로 입단 2년차부터 내야수가 되었다. 그는 플레이에서 동료와의 연계 플레이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프로 입단 첫 해에는 쇼다 고조와의 연계 플레이를 철저히 연습했다. 타구가 날아오는 횟수나 병살, 중계에 관여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타자가 타격하는 순간 외에는 항상 360도 전 방향에 주의를 기울였다.
히로시마의 옛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 구장은 흙 구장이었기 때문에 불규칙 바운드가 많아, 평정심을 유지하고 허리를 낮춰 확실히 포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의 어깨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송구를 과제로 삼았고, 대시 등으로 커버하는 것을 의식했다. 반드시 수비의 명수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전반에는 레인지 팩터에서 리그 최고 수치를 여러 해에 걸쳐 기록(1992년, 1994년, 1995년)하는 등, 타구를 아웃으로 만드는 능력은 높았다.
글러브에 대해서는 프로 입단 2년차부터 같은 글러브를 7년간 사용할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였으며, 같은 유형의 글러브를 사용한 후배로는 이오 다카미쓰, 가이 마사토, 이시바시 나오토 등이 있다. 이 노무라의 글러브를 기반으로 한 글러브를 에토 아키라와 히가시데 데루아키가 사용했고, 기무라 다쿠야도 노무라의 글러브를 참고했다.
2.4. 부상 및 역경
노무라 겐지로는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차례 부상에 시달렸다. 1996년 7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2루 도루 중 왼쪽 발목을 다쳐 큰 부상으로 이어질 뻔했으나, 염좌 진단을 받고 진통제를 복용하며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에도 통증이 번져 9월에는 전력 질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부상은 팀 성적 악화와 '메이크 드라마'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고관절 통증으로 5월부터 결장이 잦아졌고, 2000년 4월 8일에는 1루까지 뛰다가 왼쪽 무릎 뒤쪽 근육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어 시즌 후반기를 통째로 날렸다. 이 부상으로 왼쪽 다리 근력이 오른쪽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2002년 4월 말에는 오른쪽 허벅지를 다쳐 약 한 달간 2군 생활을 했으며, 2003년 3월 29일에는 수비 중 왼쪽 내복사근 좌상으로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시즌 종반에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으로 장기간 이탈했다. 2004년에도 6월 19일 야쿠르트전에서 3루 땅볼 처리 중 오른쪽 무릎을 다치는 등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노무라 겐지로는 꾸준한 재활과 노력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특히 2000안타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2.5. 은퇴
2003년에 이미 한 차례 은퇴를 고려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야마모토 고지가 2000안타 달성까지 약 150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류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005년 6월 23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한 노무라 겐지로는 그 해 9월 16일 시즌 종료 후 17년간의 선수 생활을 은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가 그의 은퇴 경기가 되었으며, 만원 관중이 모인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노무라의 등번호 '7'이 새겨진 포스터가 배포되었다. 그는 1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하여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경기 도중 대학 시절 포지션이었던 중견수로 잠시 이동하기도 했다. 은퇴 세리머니에서 그는 "오늘 모인 아이들아, 야구는 좋은 것이다. 야구는 즐겁다!"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구단은 그의 등번호 '7'을 영구 결번으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노무라 본인이 거절하여 등번호 '7'에 걸맞은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의 영구 결번 보류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2013년부터 도바야시 쇼타가 등번호 '7'을 물려받게 되었다. 또한 구단 간부들은 2009년 신구장 개장에 맞춰 노무라를 감독으로 초빙할 방침을 이 시점에서 이미 내세웠다.
3. 감독 경력
노무라 겐지로는 선수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임시 코치로 활동하다가, 2010년부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2014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3.1. 감독 취임 및 팀 운영
2010년부터 11년 연속 B클래스(하위권)에 머물던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및 코치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임 감독 마티 브라운의 연봉 40.00 만 USD를 크게 웃도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취임 기자회견에서는 "우승을 목표로 한다. 선수들에게도 A클래스(상위권)를 목표로 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강력한 우승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히로시마 시내 병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우승하면 '평범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생각이다"라고 선언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전년까지 부진했던 소요기 에이신, 히로세 준과 시범 경기에서 활약한 아마야 소이치로, 그리고 자신이 미국 코치 연수 중 매료되어 주미 스카우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입한 저스틴 휴버를 개막부터 주전으로 고정했다. 소요기와 히로세는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지만, 아마야와 장타력을 기대했던 휴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해 선발 라인업 패턴은 95가지에 달할 정도로 타선을 고정하지 못했다. 팀 희생번트 수는 구단 사상 최다인 140개, 팀 도루 수도 지난 15년간 최다인 119개로 기동력이 개선되었고, 경기당 평균 득점은 5년 만에 3점대를 벗어나 4.1점이 되었다. 수비 면에서도 전년도 리그 최하위인 100개였던 팀 실책 수가 리그 3위인 82개로 개선되었다.
투수진에서는 콜비 루이스의 갑작스러운 퇴단이 전년 12월에 결정되었다. 개막 전 캠프부터 정규 시즌 초반까지 오타케 간, 요코야마 류지, 마이크 슐츠, 나가카와 가쓰히로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잇따랐다. 특히 오타케의 경우, 부상 직후 신중한 조정에도 불구하고 복귀를 서두르다 재부상하는 등 선수 컨디션 관리 면에서 비판이 많았다. 또한 중간계투 투수 기용법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마에다 겐타는 팀 사상 최초로 투수 부문 삼관왕을 달성했지만, 팀 평균자책점은 전년도 3.59에서 5년 만에 4점대 후반(4.80)으로 악화되었고, 마에다 겐타를 제외한 팀 평균자책점은 5.33을 기록하며 과거 최대 악화 폭(1.21)을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실점이 162점 증가한 737점, 사사구는 137개 증가한 524개, 피홈런도 54개 많은 171개로, 모두 최대 폭의 증가를 기록하며 '구단 사상 최악의 투수력 후퇴'라는 평가를 받았다.
3.2. 지도 철학 및 전략
노무라 겐지로 감독은 선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히로시마 전통의 달리는 붉은 헬멧 야구(走る赤ヘル野球일본어)를 표방했다.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상위 타선에 기용하여 팀 도루 수를 대폭 늘렸고, 브래드 엘드레드 등 외국인 선수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임시 코치를 맡을 때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으며, "단어만으로 문법은 엉망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로 통한다"고 말하며 외국인 선수들의 신뢰를 얻었다. 2014년 홈런왕 엘드레드는 "케니(노무라 감독)의 조언 덕분"이라며 노무라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반면, 상대 투수의 팔에 따라 타순을 대폭 변경하는 이른바 '좌우병'(左右病일본어)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예고 선발 제도가 도입된 2012년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노무라의 이러한 지휘는 상대 투수와의 상성이나 자팀 선수들의 컨디션과 관계없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타순을 고정할 수 없다는 비판이 많았다.
또한 노무라 겐지로는 번트를 싫어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022년 8월 후루타 아쓰야의 프로그램 '풀타의 방정식'에서 "초구부터 번트를 하는 건 왜일까 싶다"며 번트(특히 희생 번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투수의 심리를 고려할 때, 플레이볼 직후 선두 타자를 내보냈는데 2번 타자가 스스로 1아웃을 헌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노무라는 프로 야구의 엔터테인먼트성을 고려하여 번트를 싫어한다고 밝혔으며, 이러한 번트 혐오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번트만 하는 비력한 타자였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다만 감독 시절에는 자팀 선발 투수의 질에 따라 선수를 공격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희생 번트를 지시하기도 했으며, 종반에 결승점을 얻기 위한 번트는 어느 정도 긍정하기도 했다.
3.3. 시즌별 팀 성적 및 주요 사건
노무라 겐지로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시즌별 성적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 2010년 | 히로시마 | 5위 | 144 | 58 | 84 | 2 | .408 | 21.5 | 104 | .263 | 4.80 | 44세 |
| 2011년 | 히로시마 | 5위 | 144 | 60 | 76 | 8 | .441 | 16.0 | 52 | .245 | 3.22 | 45세 |
| 2012년 | 히로시마 | 4위 | 144 | 61 | 71 | 12 | .462 | 26.5 | 76 | .233 | 2.72 | 46세 |
| 2013년 | 히로시마 | 3위 | 144 | 69 | 72 | 3 | .489 | 17.0 | 110 | .248 | 3.46 | 47세 |
| 2014년 | 히로시마 | 3위 | 144 | 74 | 68 | 2 | .521 | 7.5 | 153 | .272 | 3.79 | 48세 |
| 통산: 5년 | 718 | 322 | 371 | 27 | .465 | A클래스 2회, B클래스 3회 | ||||||
- 2011년은 2경기 출장 정지(6월 28일, 6월 29일 한신 타이거스전, 1승 1패)는 통산 성적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 기간의 대리 감독은 고 신지였다.
2010년 최종 리그 성적은 팀 사상 최악 2위 타이인 84패(58승)를 기록하며 2년 연속 5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 해 부진했던 투수진에게 가을 캠프에서 가혹한 훈련을 예고하는 등 다음 해를 향한 의욕을 보였다. 2011년에는 9월 초까지 A클래스를 다투었으나, 이후 급격히 무너져 전년과 같은 5위로 시즌을 마쳤다.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는 10연패를 당하며 50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교류전 최악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6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3회말 나카무라 교헤이의 땅볼 판정을 놓고 심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퇴장당했고, 다음날 가토 료조 커미셔너로부터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2012년 정규 시즌 전반기는 한신의 부진에 힘입어 1997년 이후 15년 만에 전반기 A클래스(3위)로 마쳤다. 그러나 9월에 8연패를 포함한 6승 17패 1무로 급격히 부진하며 야쿠르트와의 3위 싸움에서 탈락, 최종 리그 성적은 4위로 15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했다.
2013년에도 계속 지휘봉을 잡았으며, 4년 연속 정규 시즌 패배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이후 16년 만에 A클래스(3위)에 진입하여 구단 사상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이뤄냈다.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하며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4년에는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 한신과 우승 경쟁을 벌였고, 9월 26일 한신과의 경기(고시엔)에서 히로시마가 패배하면서 요미우리의 우승이 확정되었지만, 동시에 히로시마의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결정되었다. 한신과의 2위 싸움이 이어졌으나, 시즌 최종전인 10월 6일 요미우리와의 경기(마쓰다)에서도 패배하여 3위가 확정되었다.
3.4. 감독직 사임
2014년 10월 8일 노무라 겐지로 감독은 구단에 감독 사임을 요청했고, 이는 수락되었다. 그는 이미 진출이 확정된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 팀을 지휘하며 감독 생활을 마쳤다. 이 해 기록한 74승은 구단 사상 2번째로 많은 승리 수였다.
4. 은퇴 후 활동
감독직 사임 후 노무라 겐지로는 다시 닛폰 TV와 히로시마 TV 방송의 야구 해설가,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2015년 2월에는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오퍼를 받아 스프링 캠프의 임시 코치로 취임하기도 했다.
2017년 4월에는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교육학 연구과 대학원 입시(사회인 특별 전형)에 합격하여, 2019년 3월 동 연구과(박사 전기 과정)를 수료했다. 2022년 6월에는 히로시마 대학 스포츠 센터의 객원 교수로 취임하여 학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5. 개인 생활
노무라 겐지로의 애칭은 노무켄(ノムケン일본어)이다. 초등학교부터 프로까지 주장을 맡으며 항상 팀 전체와 다른 선수들을 배려했다. 1994년부터는 주장 및 팀 리더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자유 계약 선수 자격 취득 시에도 구단은 그에게 지도자로서의 기대를 걸며 팀 잔류를 희망했다.
구장 밖 훈련 시에도 다른 선수들에게 눈길을 주며, 젊은 선수였던 히가시데 데루아키나 아라이 다카히로가 부진에 시달릴 때 격려를 보냈다. 아라이는 노무라에 대해 "마음 깊이 의지할 수 있고,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또한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트리플 쓰리를 기록했을 때는 경험자로서 조언을 해주어 그가 평정심을 되찾도록 도왔다.
외국인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항상 영어로 소통한다. 영어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임시 코치를 맡았을 때 독학으로 배웠다. 그는 "단어만으로 문법은 엉망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로 통한다"고 말하며, 마음을 열고 외국인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그의 누나는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 70기생인 아키즈키 시호이며, 남동생은 전 사회인 야구 선수(투수)이자 일본 석유, 고마자와 대학, 환태평양대학에서 코치 및 감독을 역임하고 2019년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 코치를 맡았던 노무라 아키히코이다.
히로시마시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카프 팬이었던 야나기타 유키 (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도 존경하는 선수로 노무라의 이름을 꼽았다.
실제로 현역에서 은퇴한 것은 2005년이지만, 2년 전인 2003년에 한 차례 은퇴 의사를 밝혔었다. 그러나 당시 감독이었던 야마모토 고지가 2000안타까지 약 150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류하여, 결국 2005년 2000안타를 달성하고 은퇴했다.
축구 일본 대표팀 감독 모리야스 하지메와는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내 같은 단지에 살며, 자택이 걸어서 2분 거리에 있어 30년 지기 친구이다.
6. 평가 및 영향력
노무라 겐지로는 선수로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일본 프로 야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유격수였다. 특히 1995년의 트리플 쓰리 달성은 그의 뛰어난 공수주 능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순히 뛰어난 개인 기록을 넘어,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고 젊은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의 꾸준함과 부상을 극복하는 정신력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감독으로서는 침체기에 있던 히로시마 카프를 2013년 16년 만에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이끌고, 2014년에도 연속 진출시키는 등 팀 재건에 큰 공헌을 했다. '달리는 붉은 헬멧 야구'를 통해 팀의 기동력을 높이고 외국인 선수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으로 팀워크를 다지는 등 현대 야구에 맞는 지도력을 선보였다. 비록 우승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은 히로시마 카프가 다시 강팀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은퇴 후에도 해설가, 평론가, 객원 교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야구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히로시마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객원 교수로 활동하는 것은 스포츠인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무라 겐지로는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야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일본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7. 관련 항목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 트리플 쓰리
-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 최다 안타 (일본 프로 야구)
- 최다 도루 (일본 프로 야구)
- 베스트 나인 (일본 프로 야구)
- 골든 글러브상
- 마에다 겐타
- 아라이 다카히로
- 소요기 에이신
- 브래드 엘드레드
- 모리야스 하지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