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가부키 명가인 하리마야(播磨屋하리마야일본어)의 적통으로 성장하며 배우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관심사와 사회 활동을 통해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생애는 전통과 현대, 개인적 열정과 공적 역할이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1944년 5월 22일 월요일, 도쿄도 지요다구 고지마치에서 노미노 타츠지로(波野 辰次郎나미노 타츠지로일본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명은 후지마 히사노부(藤間 久信후지마 히사노부일본어)였다. 아버지는 5대 이치카와 소메고로이자 후에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로 알려진 이치카와 소메고로 5세였다. 어머니는 후지마 세이코(藤間 正子후지마 세이코일본어)로, 그의 외조부인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의 외동딸이었다.
키치에몬 2세 본인의 말에 따르면, 외조부는 외동딸이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가부키 세계에서 여배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딸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외조부는 딸을 어린 시절 내내 남자아이처럼 대했다. 어머니 세이코는 결혼할 때 아버지에게 적어도 두 명의 아들을 낳겠다고 약속했다. 첫째는 남편의 가문 전통을 잇고, 둘째는 외조부의 이름을 잇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녀는 이 약속을 지켰고, 키치에몬 2세를 외조부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는 단순히 연기 가문에 형식적으로 입양되는 대부분의 가부키 배우들과 달리, 외조부에 의해 법적으로 입양되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명찰의 성도 노미노로 바뀌었고, 그는 비로소 양자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의 형은 2대 마쓰모토 하쿠오이다.
1.2. 유년기 및 교육
1945년 3월, 2대 키치에몬은 부모와 형, 그리고 유모인 무라스기 타케(村杉たけ무라스기 타케일본어)와 함께 공습을 피해 닛코로 피난했다. 그들은 시내 전차 사고를 겪었지만, 유모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공습으로 소실된 우시고메구(牛込区우시고메구일본어, 현재의 신주쿠구) 와카미야초(若宮町와카미야초일본어)의 생가를 떠나, 종전 후 10월에는 도쿄 쿠가야마로 이사했다. 5살 터울의 형이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돌아오면 빗자루를 끌고 복수하러 갈 정도로 장난기 많은 아이였다. 1946년 시부야구 시부야로 이사했고, 1951년 시부야구립 도키와마쓰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치요다구 코지마치로 이사하여 1952년 교세이 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했다.
그는 3세부터 마쓰모토 류 일본 무용과 6대 후지마 간주로에게 일본 무용을 배웠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와다 키타로에게 이즈미 류 교겐을, 키네야 에이지에게 나가우타를, 도샤 로센에게 나리모노를 사사했다. 중학교부터는 다케모토 코센에게 기다유를, 대학교 시절에는 작곡가 한마 겐이치에게 성악을 배웠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중인 1962년 5월, 제3회 키노메카이(木の芽会키노메카이일본어)를 마치고 "왜 가부키는 곧바로 고전이 되는가? 연기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모던 재즈를 듣고 새로운 감각을 익혔다. 앞으로 나올 연기는 현대의 가부키여야 한다. 우리는 신(新)도 고전도 아닌 현대의 가부키를 창조하고 싶다"고 기고하며 현대 가부키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1.3. 초기 경력 및 수련
1948년 4세의 나이로 도쿄 극장에서 『마나이타 초베이』(俎板長兵衛)의 나가마쓰 역 등으로 첫 무대에 서며 나카무라 만노스케(中村萬之助나카무라 만노스케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이름은 키치에몬의 선조인 요로즈야 키치에몬의 '만'에서 따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야마우바』(山姥)의 괴동마루 연기로 마이니치 연극상 연기 특별상을 수상하며 천재 배우로 주목받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이치카와 단고(후의 2대 이치카와 에몬)와 형인 이치카와 소메고로와 함께 '10대 가부키'로서 인기를 누렸다. 1949년에는 실부인 8대 마쓰모토 고시로의 습명 피로 공연에 출연했다.
1954년 초대 키치에몬이 사망하자, 그는 하리마야의 후계자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이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61년에는 실부(8대 마쓰모토 고시로)와 형(6대 이치카와 소메고로)과 함께 쇼치쿠에서 도호로 이적했다. 1966년 5월, 도호는 게이주쓰자(芸術座게이주쓰자일본어)에서 만노스케 주연의 『적과 흑』을 상연했다. 같은 해 10월, 새롭게 단장한 제국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에서 22세의 나이로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을 습명했다. 이때 그의 본명도 조부와 같은 '노미노 타츠지로'로 개명했다.
1970년에는 브로드웨이에서 형 소메고로의 연극 『라 만차의 남자』를 관람했다. 어린 시절부터 위장이 약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종종 위경련에 시달렸는데, 1969년 초부터 2년 반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피로가 축적되었다. 1971년 4월 30일에는 이치카와 주카이(市川寿海이치카와 주카이일본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메이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다음 날 가부키자에서 마쓰오마루(松王丸마쓰오마루일본어) 역을 열연했지만, 목 디스크에 대한 공포 속에서 무대에 서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다고 한다. 제국극장 공연 『풍림화산』은 극장 최초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연극'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루 2회 공연에 16번이나 의상을 갈아입는 연극을 40일 연속으로 공연하는 강행군이었다. 공연 후반에는 주먹밥 한 개를 겨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한계에 달해 공연 중에도 두 번이나 쓰러졌다. 결국 1971년 7월, 과로로 인한 만성 기관지염, 소기관지 폐렴, 유주신(遊走腎유주신일본어)으로 인해 의사의 중단 지시를 받았고, 절대 안정을 명령받아 무대 『보잉 보잉』(닛세이 극장)에서 하차했다. 2개월간의 안정 기간이 보도되었으나, 결국 6개월간 요양을 해야 했다.
1.4. 주요 활동 시기
1974년, "키치에몬을 이은 사람으로서 더 고전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하쿠오와 형 고시로를 남겨두고 쇼치쿠로 복귀했다. 1975년, 도쿄의 호텔 오쿠라에서 소꿉친구인 치사(知佐치사일본어)와 결혼했다. 프로포즈는 카루이자와에서 당시 피우던 켄트 담배의 은박지로 즉석에서 만든 약혼반지를 선물했다고 한다.
1976년 7월경, 후쿠오카현 이즈카시 순회 공연 중 가호 극장(嘉穂劇場가호 극장일본어)에 대한 실부의 이야기를 듣고 견학을 갔다. 당시 가호 극장은 경영난으로 철거하여 주차장으로 만들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그는 하나미치(花道하나미치일본어)를 걸으며 직접 발성해보고 연극 극장으로서의 완성도에 감격했다. 이 극장에서의 경험은 후일 고토히라 가부키 부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82년 1월, 실부인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가 사망했다. 이 무렵부터 약 3년간 "가부키 배우를 그만두고 싶다"고 고뇌하며 "가스관을 물고" 있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같은 해 10월 30일, 와세다 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로 형의 벤케이 역과 자신의 토가시(富樫토가시일본어) 역으로 『간진초』를 상연했다. 오쿠마 강당에서 가부키 공연이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84년 7월, TBS의 토크 프로그램 『스바라시키 나카마』(すばらしき仲間)에 2대 사와무라 토주로와 나카무라 간자부로 18세와 함께 출연했다. 촬영은 금마루자에서 진행되었으며, 세 사람은 이 극장에 매료되었고 이는 후일 '고토히라 가부키' 부활의 계기가 되었다.
1993년, 연극 감상 단체인 도민극장 발표의 93년도 연극·가부키 베스트 3 중 '가장 좋아하는 배우 베스트 10'에서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994년 11월, 국립극장에서 『하카타 코조로 나미마쿠라』(博多小女郎浪枕)의 통시극을 24년 만에 상연했다.
2011년, 담도 결석 수술을 위한 입원 중에 인간국보(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 소식을 들었다. 2013년 7월, 순회 공연 중 내장 이상을 느끼고 8월에는 목에 헤르페스가 발병했다. 모두 완치되었지만 후유증으로 미각 장애가 생겼다.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수액이나 냉식 시루코, 꿀과 우유를 뿌린 오트밀 등으로 영양을 보충하며 체중이 10 kg이나 줄었다. 한때는 자신의 침이 써서 삼키기조차 힘들었고,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었다"고까지 괴로워했지만, 이후 회복되어 좋아하는 장어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013년 2월, 막내딸(4녀)이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의 아내가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첫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2019년 5월,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가 첫 무대에 서면서 손자와 함께 공연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2016년 새해, 긴자 햐쿠텐(銀座百点긴자 햐쿠텐일본어)의 대담에서 야마카와 시즈오로부터 "최근에는 때때로 객석에서 '오하리마!'라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기쁜 마음이 든다"고 답했다.
2020년 3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가부키자 3월 공연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었다. 그는 무관객 온라인 공연인 『신 우스유키 모노가타리』(新薄雪物語)에 출연했다. 4월에는 코로나19 대책으로 자택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는 한편, 손자를 위해 대본 정리와 청서를 시작했다. 9월의 『모리쓰나 진야』(盛綱陣屋)의 코시로(小四郎코시로일본어) 대본은 키쿠노스케에 따르면 "도중에 멈춰 있었다"고 한다. 7월에는 "온천에 가서 활기를 되찾고 싶다. 체력은 무리라도 기력만이라도 10년은 더 살고 싶다. 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자택 달력에 썼다. 8월, 칸제 노가쿠도(観世能楽堂칸제 노가쿠도일본어)에서 자작 각본 및 연기한 『스마노우라』(須磨浦)를 무관객으로 촬영하여 8월 29일부터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이 달부터 가부키자 공연이 부활했고, 키치에몬 자신도 9월의 슈잔사이(秀山祭슈잔사이일본어)에 출연했다. 그는 달력 여백에 "슈잔사이 힘내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전념하라. 나머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주변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믿어라"라고 썼다.
10월,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으나 방사선 치료가 몸에 맞지 않아 체력을 잃었다. 그는 초학관 웹 매거진의 칼럼 '키치에몬 요모야마 일기'에서 "영향이 생각보다 몸에 크게 울려서 큰 소리를 내면 숨이 차고 일어서기 힘들다"고 밝혔다. 2020년 12월, NHK 라디오 심야 방송에서 "내년 슈잔사이에서는 손자와 『모리쓰나 진야』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의욕을 보였다.
2021년 1월 17일부터 『코토부키 쇼슌 오가부키』(壽初春大歌舞伎) 공연에 건강상의 이유로 일주일간 휴연했고, 마지막 3일간만 복귀했다. 같은 해 3월 4일부터 『산가쓰 오가부키』(三月大歌舞伎) 제3부 『로몬 고산기리』(楼門五三桐)에 출연했다. 공연 마지막 전날까지 무대에 섰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마지막 날에는 휴연했다.
1.5. 개인적인 삶과 취미
키치에몬 2세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와 스케치를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는 문인화를 배우기 위해 화가에게 제자로 들어간 적도 있었다. 후년에 화집을 출판하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술관에서는 전람회의 이어폰 가이드나 강연도 진행했다. 좋아하는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나 폴 세잔을 꼽았는데, 그들의 그림을 볼 때는 예비 지식이 필요 없어서 좋다고 말했다. 조르주 루오 또한 좋아해서 NHK 여행 프로그램에서 직접 그의 화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부키 작가이자 화가로서의 필명은 마츠 칸시(松貫四마츠 칸시일본어)였다. 이는 그의 조상인 닌교 조루리 작가 초대 마츠 칸시(初代松貫四쇼다이 마츠 칸시일본어)의 명석을 계승한 것이다. 2003년경에는 "이제부터는 마츠 칸시로서의 활동에도 힘을 쏟고 싶다"고 말하며 그림과 연극 제작을 더욱 활발히 했다.
가부키계에서는 드물게 퀴즈에 능숙하여 『세계 불가사의 발견!』, 『와쿠와쿠 동물 랜드』, 『미궁 미술관』 등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종종 최고상을 받으며 박식함을 뽐냈다.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과 그의 친부모는 하이쿠에 몰두했고, 그 또한 어머니의 권유로 하이쿠를 배웠지만 전혀 소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욕심이 많아서 이것도 읊고 싶고, 저것도 읊고 싶고, 여러 가지를 읊고 싶어졌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라며, "덜어내고 깎아내는 작업은 아무래도 나에게 맞지 않다고 일찌감치 하이쿠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지어서 어머니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은 하이쿠는 "벚꽃 지고 학교 가는 아이들 즐겁네"였다. 그는 마쓰오 바쇼나 고바야시 잇사를 읽으라는 말을 들었지만, 요사 부손을 더 좋아했다. 바쇼나 잇사는 작품보다는 그들의 생애가 연극이 될 것 같아 흥미가 있었다고 밝혔다.
자동차를 좋아하여 16세 생일에 사메즈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레이서가 되기를 동경하여 서킷 라이선스를 따려고 한 적도 있다. 첫 애차는 중고 닷선이었다. 이후 토요펫, 코로나, 토요타 퍼블리카, 포드 컨설 등을 거쳐 대학 입학 연도에는 MG B를 탔다. 1996년경에는 다임러 더블식스, 1999년경에는 메르세데스-벤츠를 탔다. 제임스 딘을 동경하여 언젠가는 포르쉐를 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수동변속기 차량을 선호했다.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랑으로, 소년 시절의 추억 색에 대해 유모의 고향인 지바현 지쿠라정의 바다 이미지가 남아 있는지, 여름의 강한 햇살 같은 파란색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청년기에는 파란색 의자를 사거나, 미드나잇 블루 색상의 옷만 입었다. 1994년 2월의 대담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되어 파란색 계통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결혼 전에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치사 부인의 영향으로 오페라 감상도 시작했으며, 1995년경에는 휴가가 생기면 이탈리아에 가서 오페라를 관람했다. "오페라를 보면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독서는 '쌓아두고 읽는' 편이었지만, 폭넓게 무엇이든 읽었으며 이와나미 문고는 거의 다 모았다고 한다. 책을 살 때는 한꺼번에 전집을 사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학교 때는 스탕달의 『적과 흑』, 『어린 왕자』 등을 읽었다. 20대에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등을 읽었다. 70대에는 『수국사 수필』(鏑木清方)을 읽었다. 좋아하는 서양 영화는 『에덴의 동쪽』으로, 볼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아폴로 13』도 보면서 오열하여 아내에게 "진심이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 또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좋아하는 여배우는 마릴린 먼로였다. 고등학생 때는 모던 재즈에 심취한 시기가 있었다.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어머니와 보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화를 매우 좋아하여 21세 무렵에는 가로 잡지의 작품에 빠져 있었고, 분장실 거울 앞에는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깨끗하고 깔끔한 그림체를 좋아했다. 어릴 때는 바바 노보루, 데즈카 오사무, 야마네 히후미, 코지마 코가 그리는 여자도 좋아했다. 재미있는 것은 카토 요시로라고 말했다. 매달 사서 보던 잡지는 주간 소년 선데이였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곤충 이야기 고아 허치』와 『톰과 제리』였다. 그는 휴식법에 대해 묻는 질문에 "고아 허치나 톰과 제리를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다. 허치를 보면서 '아, 오늘도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라며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말장난을 좋아했지만 가족들에게는 평판이 좋지 않아, 집에서는 딸들의 공격 대상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B'z에 WANDS에 트리오 코이산즈, 에헤헤" 같은 말을 하면 식탁이 썰렁해졌고, 친척인 나카무라 간자부로 18세조차 "부탁이니 말장난만은 그만두셨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스스로 자주 언급하는 말장난으로는 초등학생 때 생각해낸 "형은 더블, 나는 오버롤(overalls)". 도쿄 디즈니랜드에는 개장 초부터 다녔으며, 곰돌이 푸를 가장 좋아했다.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손자와 함께 푸의 허니 헌트에 줄을 서기도 했다. 곰돌이 푸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진다. 안도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손자인 우시노스케를 닛신 식품의 치킨 라면 상징 캐릭터 '병아리' 거대 인형을 안고 맞이한 적도 있다.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50대까지는 "특별히 없다. 무엇이든 잘 먹는다"고 자주 답했지만, 2001년 11월, 여행지인 유후인 온천에서 "복어회를 배불리 먹는" 30년 숙원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는 칼럼을 썼다. 70대에는 푸를 좋아하는 이유로 "자신처럼 꿀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휘핑크림을 얹은 하와이안 팬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장면도 방송에 남아 있다. 또한 미각 장애를 앓았을 때 "장어덮밥, 소바, 튀김을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장어를 먹었는데 맛없으면 살 희망이 없어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2022년 9월에 개최된 슈잔사이에서 가부키자의 1층 기념품 가게 '코비키초'에서는 "나카무라 키치에몬 선생의 애호품"으로 모리한 노리텐(守半海苔店모리한 노리텐일본어)의 '사가 아리아케 야키노리캔'과 긴자 야마우(銀座やまう긴자 야마우일본어)의 '에도 명산 벳타라즈케' 및 '돗토리 사구 락교 아마즈'가 판매되었다.
2. 가부키 활동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가부키 배우로서 평생을 헌신하며 다채로운 배역을 소화하고, 창작 및 복원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전통 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연기는 웅장한 체격과 깊이 있는 연기력을 바탕으로 가부키 다치야쿠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2.1. 주요 배역 및 공연
그는 기다유쿄겐, 지다이모노, 세와모노부터 신가부키와 희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키치에몬의 후계자로 이 사람이 태어난 것은 참으로 하늘의 조화"(하마무라 요네조)라는 평과, "연극의 능숙함은 현대 가부키 배우 중 1, 2위를 다투는 실력"(와타나베 야스시)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확실하고 훌륭한 좌장 배우"(후쿠다 쓰네아리)로 격찬받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히트작 중에서도 특히 『간진초』와 『요시쓰네 센본자쿠라』 등에서의 무사시보 벤케이 역은 그의 전공으로 알려져 있으며, 1986년 NHK 신 대형 시대극 『무사시보 벤케이』에서도 주인공 벤케이 역을 맡았다. 그는 7대 마쓰모토 고시로의 벤케이 연기 필름을 연구하고 실부로부터 전수받았으며, 초대 키치에몬과 실부의 양식을 도입하여 자신만의 벤케이 역을 완성했다.
그의 주요 배역은 다음과 같다.
- 『가나데혼 주신구라』의 오보시 유라노스케 : "선배들은 모두 본성을 드러내 각성시키는 연기를 하셨지만, 저는 취기를 남긴 연기를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울리고, (중략) 막이 내릴 때까지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라노스케를 표현할 수 있다면 훌륭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이치노타니 후타바 군키·구마가이 진야』의 구마가이 나오자네 : 초대 키치에몬의 9대 이치카와 단주로 양식을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에게서 계승하고 자신만의 재해석을 더했다.
- 『헤이케 뇨고가시마·슌칸』의 슌칸 승려 : 초대가 부활시켜 연마하고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실부에게서 전수받았으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 『에혼 다이코키』의 다케치 주베에 미츠히데 : 초대 키치에몬의 히트작을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에게서 계승했다. 7대 이치카와 단조의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 『히라가나 세이스이키·사카로』의 히구치 지로 : 초대 키치에몬의 양식을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에게서 전수받았다. 첫 무대인 코마와카마루(駒若丸코마와카마루일본어) 역에서는 초대 히구치와 함께 연기했으나, 대성통곡하여 즉시 강판되었다.
- 『토키 이마야 기쿄노 하타아게』의 다케치 휴가노카미 미츠히데 : 초대가 7대 이치카와 단조 양식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각색을 더해 하리마야 양식을 만들어냈다. 키노메카이에서 실부와 실모에게서 계승했다. 평소에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세세한 지도를 받지 않지만, 이 연목에 한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 『스가와라 덴주 테나라미 가가미』의 다케베 겐조, 토네리 마쓰오마루, 토네리 우메오마루 (마쓰오마루 '쿠비지츠켄') : 초대가 나리타야 양식을 따르면서 고안한 하리마야 양식으로 실부에게 전수받았다. 겐조 역은 키노메카이에서 실부와 실모에게 계승했다.
- 『가지와라 헤이조 호마레노 이시키리』(이시키리 가지와라)의 가지와라 가게토키 : 상연이 끊겼던 것을 초대가 부활시켜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키노메카이에서 실부와 실모에게 계승했다.
- 『텐이마가우 우에노노 하츠하나』(고치야마)의 고치야마 소슌 : 초대 키치에몬의 양식을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에게서 전수받았다.
- 『기쿠쓰키 반즈인 초베이』의 반즈인 초베이 : 9대 나카무라 단주로의 양식을 초대 키치에몬을 거쳐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에게서 전수받았다.
- 『오니이치 호겐 산랴쿠노 마키·이치조 오쿠라탄』의 이치조 오쿠라 나가나리 : 15세 때 키노메카이에서 초대 키치에몬의 양식을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에게서 배웠다. 그 후 초대의 "야아레 카타가타, 오도로쿠나" 녹음을 들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나카무라야 아저씨에게 배운 것 외에 무언가가 있었다. 만년의 웅얼거리는 듯한 머금은 목소리인데도,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위엄, 쿠게(公家쿠게일본어) 사투리가 짧은 대사에 집약되어 있었다. 열심히 듣다 보니 한 글자 한 글자의 음계 차이를 깨달았다. 그런데 음표로 받아 적어 발음해 보니 전혀 대사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낸 조부는 천재다"라고 말했다. 또한 실모에게서도 엄격한 지적을 받았다.
- 『카고 쓰루베 하나마치 요이자메』의 사노 지로자에몬 : 6대 나카무라 우타에몬에게서 "초대는 이랬고, 실부는 이랬다"고 정성스럽게 배운 역할이다.
- 『이모세야마 온나 테이킨·요시노가와』의 오한지 키요스미 : 첫 상대역이었던 6대 나카무라 우타에몬에게 "뱀에 노려진 개구리" 상태로 훈련받았다고 한다.
- 『요시쓰네 센본자쿠라』의 토카이야 긴페이 사실은 신추나곤 도모모리 : 단조 양식을 참고한 초대의 필사본이 있다. 실부의 양식과 2대 오노에 쇼로쿠의 방식을 본받아 연기하고 있다. 의상은 7대 이치카와 단조 양식이다.
- 『게이세이 항온코·쿠이마타』의 에시 마타베에 : 초대는 단주로 양식이었으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식을 2대 오노에 쇼로쿠에게서 배우고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연기했다.
- 『히가시야마 사쿠라 소시』(사쿠라 기민덴)의 키우치 소고.
- 『이가고에 도추 스고로쿠』의 카라키 마사우에몬, 고후쿠야 주베에.
- 『이이 다이로』의 이이 나오스케 : 실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의 전공을 계승했다. 1996년 4월, 6대 나카무라 우타에몬의 마지막 무대에서 함께 연기한 역할이다. 1970년 국립극장 공연에서는 작가이자 연출가인 호조 히데지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 『쇼군 에도를 떠나다』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 『마쓰우라노 다이코』의 마쓰우라 시게노부 공 : 증조부인 3대 나카무라 가로쿠가 그에게 맞춰 쓴 작품을 초대가 연마하여 자신의 전공으로 삼았다.
- 『이로하 가나 시주시치초 야사쿠노 카마하라』의 농민 야사쿠.
- 『니조 성의 기요마사』의 카토 히고노카미 기요마사.
- 『하카타 코조로 나미마쿠라』의 케조리.
- 『오미 겐지 센진칸 모리쓰나 진야』 사사키 모리쓰나 : 초대의 모리쓰나와 코사부로, 코시로 역으로 함께 연기했다. 초대와의 추억이 많은 작품이다.
- 『소초초 쿠루와 닛키 히키마도』 미나미카타 주베에 : 키노메카이에서 실부와 실모에게 계승했다.
- 『나츠마츠리 나니와 가가미』 단시치 : 키노메카이에서 실부와 실모에게 계승했다.
2.2. 창작 및 복원 공연
키치에몬 2세는 '마츠 칸시'라는 필명으로 작품의 감수, 구성, 각본, 보정을 담당하며 여러 작품을 창작하고 복원하여 무대에 올렸다.
- 『간젠초아쿠 노조키카라쿠리』(勧善懲悪覗機関)
- 내용: 통칭 '무라이 초안'. 가와타케 모쿠아미가 47세 때 쓴 작품을 복원 상연했다. '마츠 칸시'라는 이름을 아직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무라이 초안과 종이 쓰레기 상인 큐하치 역으로 국립극장 우수상을 수상했다.
- 초연: 쇼와 54년(1979년) 8월, 국립극장 소극장
- 『사이카이자쿠라 미소메노 키요미즈』(再桜遇清水)
- 내용: 간세이 5년(1793년) 에도 이치무라자에서 초연된 초대 마츠 칸시 작의 『사이카이 소가 나카무라』(遇曽我中村)를 재구성한 세이겐 사쿠라히메모노. '마츠 칸시'의 첫 창작 작품이다.
- 초연: 쇼와 60년(1985년) 6월, 고토히라정 금마루자
- 재연: 헤이세이 16년(2004년) 4월, 금마루자 제20회 기념 공연, 헤이세이 29년(2017년) 9월, 가부키자 슈잔사이 9월 대가부키 밤 공연
- 『쿠와나야 도쿠조 이리후네 모노가타리』(桑名屋徳蔵入舩物語)
- 초연: 쇼와 61년(1986년) 6월, 가부키자
- 『레이겐 카메야마 호코』(霊験亀山鉾)
- 내용: 츠루야 난보쿠 작. 초연은 1822년(분세이 5년) 7월, 카세이 시대(1804~30년)의 작품. '악'에서도 미를 발견하게 된 '악의 꽃'의 대표작을 57년 만에 복원 상연했다. 국립극장에서 녹화본(컬러)을 일반에게 열람할 수 있다.
- 초연: 헤이세이 원년(1989년) 11월, 국립극장 대극장
- 재연: 가타오카 니자에몬이 계승하여 손을 본 후 2002년, 2009년, 2017년, 2023년에 재연했다.
- 『노보루류 와카레노 세토우치 후지토』(昇龍哀別瀬戸内・藤戸)
- 내용: 히로시마현의 미야지마 이쓰쿠시마 신사에 봉헌하기 위해 노의 『후지토』를 바탕으로 반전을 주제로 구성한 무용극.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 초연: 헤이세이 10년(1998년) 5월, 미야지마 이쓰쿠시마 신사
- 재연: 헤이세이 20년(2008년) 7월, 히에이잔 엔랴쿠지 (마키薪마키일본어 교겐). 레이와 4년(2022년) 9월, 가부키자 슈잔사이 9월 대가부키 제3부, 2023년 1월 29일 NHK 교육 TV 21시 '고전 예능으로의 초대'에서 방영.
- 『도모에 고젠』(巴御前)
- 내용: 무용극.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 초연: 헤이세이 11년(1999년) 10월, 고토히라정 금마루자
- 『하쿠로조 모노가타리』(白鷺城異聞)
- 내용: 구성·연출. 천하무쌍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에 얽힌 사실과 전설을 도입하여 삶과 죽음,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 초연: 헤이세이 11년(1999년) 10월, 히메지 성 산노마루 광장 특설 회장
- 재연: 레이와 4년(2022년) 9월, 가부키자 슈잔사이 9월 대가부키 제1부
- 『히니무카우 시마노 카게키요』(日向嶋景清)
- 내용: 닌교 조루리의 『무스메 카게키요 야시마 닛키』(娘景清八嶋日記)를 바탕으로 한 카게키요모노. 3부작 중 세 번째 작품이다.
- 초연: 헤이세이 17년(2005년) 4월, 고토히라정 금마루자
- 재연: 헤이세이 17년(2005년) 11월, 가부키자
- 차반 교겐 『하리마야 렌주 테나라미 가가미』(播磨屋連中手習鑑)
- 내용: 제29회 '키치에몬을 둘러싼 모임'에서 상연된 하리마야 문하생들의 차반극.
- 초연: 헤이세이 18년(2006년) 7월 31일, 도쿄회관
- 『엔마토 세이라이』(閻魔と政頼)
- 내용: 노교겐의 『세이라이』를 바탕으로 한 무용극이다.
- 초연: 헤이세이 19년(2007년) 6월, 도쿄 가부키자, 재연: 헤이세이 20년(2008년) 4월, 나고야 미소노자
- 『호리베 야헤에 시미즈 잇카쿠 슈잔 짓슈노 우치 마츠우라노 다이코 소레조레노 주신구라』(堀部彌兵衛 清水一角 秀山十種の内 松浦の太鼓 それぞれの忠臣蔵)
- 내용: 우노 신보가 초대 키치에몬에게 맞춰 쓴 작품을 감수했다. 쇼와 49년 이래의 상연.
- 초연: 헤이세이 19년(2007년) 12월, 국립극장 대극장
- 통시극 『이가고에 도추 스고로쿠』(伊賀越道中双六)
- 내용: 기다유쿄겐의 명장면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전후 상연이 두 번밖에 없었던 '오카자키'(야마다 코베에 주택)를 44년 만에 부활시켰다. '오카자키'를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삼는 장면 구성으로 통시극으로 상연되었다. 연극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가부키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요미우리 연극 대상' 대상 및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 초연: 헤이세이 26년(2014년) 12월, 국립극장 대극장
- 재연: 헤이세이 29년(2017년) 3월, 국립극장 대극장(국립극장 개장 50주년 기념)
- 『다테쿠라베 이세 모노가타리』(競伊勢物語)
- 내용: 헤이안 시대 문학의 걸작 『이세 모노가타리』를 소재로 한 연목의 부활 상연. 가부키자에서는 쇼와 40년(1965년) 이래 반세기 만이었다.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은 다이쇼 4년(1915년)과 쇼와 10년(1935년)에 키노 아리쓰네를 연기했다.
- 초연: 헤이세이 27년(2015년) 9월, 가부키자 슈잔사이 9월 대가부키
- 『신레이 야구치노 와타시』(神霊矢口渡)
- 내용: 최근에는 '돈베에 주택' 장면만 상연되었지만, 다이쇼 4년에 초대 키치에몬이 맡았던 '유라 효고노스케 신택' 장면(2막)을 부활시키고, '돈베에 주택'(4막)을 포함하여 100년 이상 상연되지 않았던 '도카이도 야키모치자카'(서막)와 '나마무기무라 도넨안시츠'(3막) 장면을 추가하여 4장 통시극으로 재구성했다.
- 초연: 헤이세이 27년(2015년) 11월, 국립극장 대극장
- 통시극 『고코노 유시 무스메 카게키요 - 히아가지마 -』(孤高勇士嬢景清-日向嶋-)
- 내용: '마츠 칸시' 작 『히니무카우 시마노 카게키요』에 국립극장 문예연구회가 통시극으로서 전단에 1~3막을 추가하여 재구성했다. 국립극장에서 녹화본(컬러)을 일반에게 열람할 수 있다.
- 초연: 레이와 원년(2019년) 11월, 국립극장 대극장
- 『스마노우라』(須磨浦)
- 내용: 『쿠마가이 진야』의 구마가이 나오자네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각본, 연출, 주연을 맡았다. 노가쿠 무대를 사용하고, 가면이나 의상, 소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연기된 1인 무대였다.
- 초연: 레이와 2년(2020년), 국립 노가쿠당 녹화,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인터넷 방송 후 NHK에서 방영되었다.
2.3. 가부키 외 무대 활동
그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약 10년간 도호 극단으로 이적했으며, 도호 극단은 가부키를 주력으로 했지만, 당연히 다른 장르의 무대(스트레이트 플레이, 뮤지컬 등)에도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연극 평론가 미즈오치 키요시는 "아직 20대였지만 정말 잘했다. 『설국』의 시마무라 역은 이때의 키치에몬을 뛰어넘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고 썼다. (연극계 2022년 2월호)
만노스케 시절인 1964년 『사부』(원작: 야마모토 슈고로)에서는 형이 연기한 미남자 주연 에이지 역에 비해, 소박한 사부 역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다. (같은 형제 공동 출연으로 1968년과 1975년에도 재연). 그러나 당시 미즈오치가 본인에게 『사부』 이야기를 하자 "그것은 에이지의 연기입니다. 키치에몬이 사부 역으로 칭찬받아도 명예가 되지 않습니다"라며 갑자기 불쾌해했다고 한다. (연극계 2022년 2월호). 한편, 1970년 창간된 '계간 동시대 연극' 인터뷰에서는 좋아하는 역을 묻는 질문에 '사부'라고 답하기도 했다.
2대 키치에몬의 만노스케 습명 피로 공연은 제국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이기도 했으며, 도호 극단의 처음이자 마지막 호화로운 습명 피로 공연이 되었다. 습명을 앞둔 젊은 스타를 홍보하는 데 도호 측도 힘을 쏟았다. 현대극 주연은 1966년 『적과 흑』(원작: 스탕달)으로, 만노스케의 첫 '붉은 머리 역' 출연이었다. 작가 오오카 쇼헤이가 처음으로 극작을 맡았고, 키쿠타 카즈오가 연출한 화제작이었다. 만노스케는 소렐 역을 위해 머리를 붉게 염색하고 파마를 한 채 임했다. 만노스케 일행은 공연 전에 스탕달의 생가 등을 둘러보는 일주일간의 프랑스 여행을 다녀오며 현지 답사도 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신발을 사고 싶어서 신발 가게에 갔는데 통역도 해준다. 그런데 신발을 신어보려고 오른발을 벗었더니 양말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큰일 났다고 생각하며 왼발을 벗었더니 왼쪽도 뚫려 있었다. 일본에서는 잘 걸어 다니지 않는데 걸어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한 공연 중에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렸다. "그것이 모두에게 옮아 나는 39도 열이 났고, 정말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에는 극장 객석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들로 "만노스케가 등장하기만 해도 소란스러웠고, 연극 따위는 뒷전이었다. 사랑의 라이벌 크로아즈노아 백작(2대 마쓰모토 하쿠오)과 펜싱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 만노스케와 소메고로가 서로 바뀌며 각자의 얼굴이 잘 보이게 되자마자 '꺄악' 소리가 났다"고 여성 팬들의 열광에 지친 듯한 연극 평이 실리는 등, 습명 전부터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TV 드라마와 영화에도 진출했다. 야마다 이스즈, 츠카 요코, 오카다 마리코, 와카오 후미코, 이와시타 시마, 타이지 키와코, 오토와 노부코, 스기무라 하루코 등과의 공동 출연이나 신파극 공연에도 여러 차례 게스트로 출연하여 초대 미즈타니 야에코의 상대역(『온나 케이즈』, 『콘지키 야샤』 외)을 많이 맡았다. 키치에몬 습명 후 가부키 외의 무대 공연으로는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 『풍림화산』, 『거미의 성』 등이 있다. 『거인의 별』이 무대화되었을 때는 호시 잇테츠를 연기하기도 했다.
연극 평론가 도이타 코지는 키치에몬의 현대극 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현대극은 아무리 분장을 해도 배우의 본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숨길 수가 없다. 즉, 부끄러운 것이다. 키치에몬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억지로 가리려 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한다. 가부키는 얼굴에 진하게 분칠을 하고 등장한다. 일종의 마스크(가면)를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계속 가부키를 연기해 온 배우가 현대극을 연기하면, 그것은 갑자기 벌거벗은 채 사람들 속에 뛰어든 듯한 당황스러움이 될 것이다. (중략) 전후 점령군의 명령으로 현대극을 강요당한 몇몇 베테랑 배우들이 극도로 당황해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키치에몬 또한 (중략) 부끄러움을 통감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것을 잘 극복했다. 하나는 타고난 자신을 꾸밈없이 보여주려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세대 젊은이들이 가진 대담함이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극을 연기하는 기술은 물론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때마다 두터워진다. 『설국』에서는 코마코와의 애정이 여러 번 반복되는 형태로 그려졌다. 다른 각본에 비해 소나타와 같은 형식이었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지루하지 않고 부드럽게 관객에게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은 키치에몬이 굳이 자세를 취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여운 여자』의 니시나라는 청년이 아이를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면, 키치에몬의 선량한 느낌이 잘 드러나 있었다. 배우 본인의 선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려는 의식이 없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극에서 키치에몬의 연기 방식의 기본이 되는 것은 가부키 세와모노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영화 배우나 텔레비전 탤런트가 보여줄 수 없는, 성격 묘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키치에몬은 결국, 시종일관 가부키 배우로서 현대극을 연기해 왔다."
3. 방송 및 영화 활동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가부키 무대 외에도 TV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 광고 등 다양한 미디어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폭넓은 활동은 그의 연기 스펙트럼과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증명한다.
3.1. TV 드라마 및 영화 출연
그는 일찍부터 극장용 영화나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특히 『오니헤이 한카초』에서 연기한 주인공 오니헤이(鬼平오니헤이일본어) 역의 성공으로 안방극장에서도 친숙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전에 오니헤이를 연기한 적이 있었으며, TV 드라마에서 3대 하세가와 헤이조 역을 맡았던 요로즈야 킨노스케 또한 그의 친척(어머니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는 사타카 마코토와의 대담에서 재방송 중인 『우몬 토리모노초』와 『오니헤이 한카초』의 연기 차이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우몬 역을 할 때는 무아지경으로 연기했으며, "냉정한 자신을 객석에 앉혀라"는 말을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는 "정말 거짓 없이 말씀드리면, 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입니다"라고 말했다. (대담일: 2006년 11월 18일)
1970년대 이후에도 가부키와 TV 등에서 활약했다. 1980년부터는 TV 시대극 『기리수테 고멘!』에서 주연을 맡았다. (1982년까지 3시리즈 제작) 그는 단순히 출연하는 것을 넘어, 매번 인쇄 전 대본을 검토하고 프로듀서 사사키 씨나 감독 미나모토 씨 등에게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함께 출연했던 실부가 사망한 후에 제작된 제3시리즈에서는 "007 같은 분위기로 할 수 없을까?"라고 직접 제안했고, "조금 더 섹시하게 만들자"며 오프닝에 나체 여성 실루엣을 연출하거나, 최종회에서는 "역할의 이미지로 꼭 하고 싶다"며 주인공이 행글라이더를 타고 오사카성으로 침투하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1986년에는 NHK 신 대형 시대극 『무사시보 벤케이』(전 32회)에서 주연 벤케이 역을 맡았으며, 그해 말 제36회 NHK 홍백가합전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 『오니헤이 한카초』의 4번째 TV 드라마화 당시, 원작자로부터 직접 하세가와 헤이조 역 제안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거절해 왔다. 그러나 실제 나이가 헤이조와 같아지자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출연을 결심했다. "인기 시리즈에 흠집을 내는 것은 아닌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제가 (이케나미) 선생님께 전화했더니, '괜찮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라'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해주셨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놈은 두부에 머리 박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부터 2001년까지 매년 9개 시리즈와 여러 편의 스페셜 판을 제작했으며, 이후 2016년 12월 최종판 방영까지 총 150편의 장기 인기 시리즈가 되어, 키치에몬에게 오니헤이 역은 이견의 여지 없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오니헤이』는 젊은 여성들까지 끌어들이며 큰 붐을 일으켰고, 키치에몬은 『모노가타리』에서 "키치에몬 하면 오니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중략)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 후 인기는 더욱 과열되어, 『간진초』의 벤케이 역으로 막이 내리기 직전에 "오니헤이!"라는 외침이 들렸다고 키치에몬은 『키치에몬의 팔레트』에서 언급했다. 또한 『듣고 쓰는 2대 키치에몬』의 저자 코다마에게는 "돌아가셨을 때, 대표작으로 오니헤이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케나미 쇼타로는 하세가와 헤이조를 그릴 때 실부인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의 풍모를 이미지화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키치에몬도 초대판 『오니헤이 한카초』(제2시리즈 10화 '숨겨진 돈 700냥', 15화 '하단의 검')에서는 헤이조의 아들 타츠조 역을 연기했다.
2003년에는 TV 드라마 『주신구라 - 결단의 때』에서 TV로는 처음으로 오이시 구라노스케 역을 연기하며 중후한 연기를 선보였다. 또한, TV 시대극 『주신구라』 시리즈에서는 1989년 TV 도쿄의 신춘 와이드 시대극 『다이 주신구라』(원작: 모리무라 세이이치 '주신구라')에서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연기했다. (오이시 구라노스케 역은 그의 친형인 현 2대 마쓰모토 하쿠오가 맡았다.)
'벤케이', '오니헤이' 등의 TV 시대극에서의 활약과 가부키에서의 충실한 작업으로,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하는 형 하쿠오에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형과 조카 고시로와 달리 습명 후에는 TV 시대극 이외의 현대극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부모, 형제자매와 일가족 5명이 주연한 『오~이! 우리 집』과, 양복 차림으로 예리한 과학 평론가 후지세 시로 역으로 주연하며 공해를 주제로 한 『지금 불꽃의 시간』 두 편뿐으로 보인다. 나카무라 만노스케 시절의 현대극으로는 NHK 극장 『약속』의 필름이 NHK 아카이브에 남아 있어, 일부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에서도 그의 연기를 시청할 수 있다.
주요 출연작:
- 영화:
- 『피리부는 강』(1960) - 야스조 역
- 『주신구라 - 꽃의 권, 눈의 권』(1962) - 산페이 역
- 『쿠로네코』(1968) - 킨도키 역 (주연)
- 『신주 덴아미지마』(1969) - 카미야 지헤이 역 (주연)
- 『오긴사마』(1978) - 다카야마 우콘 역
- 『리큐』(1989) -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
- 『오니헤이 한카초 극장판』(1995) - 하세가와 헤이조 역
- 『자쿠로자카노 아다우치』(2014) - 이이 나오스케 역
- TV 드라마:
- 『우몬 토리모노초』(1969-1970) - 콘도 우몬 역 (주연)
- 『기리수테 고멘!』(1980-1982) - 하나부사 이즈모 역 (주연)
- 『무사시보 벤케이』(1986) - 무사시보 벤케이 역 (주연)
- 『오니헤이 한카초』(1989-2016) - 하세가와 헤이조 역 (주연)
- 『아베 일족』(1993) - 내레이션
- 『주신구라 - 결단의 때』(2003) - 오이시 구라노스케 역
3.2. 예능, 교양, 다큐멘터리 출연
그는 퀴즈에 능숙하여 『세계 불가사의 발견!』(TBS), 『와쿠와쿠 동물 랜드』(TBS), 『미궁 미술관』(NHK) 등 다양한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주 최고상을 받으며 박식함을 뽐냈다.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세계 불가사의 발견!』의 준레귤러였으며, 쿠로야나기 테츠코 등 레귤러 출연진으로부터 '오야붕'(두목)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18년 9월 1일 방영된 제1486회에는 21년 만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지적 능력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NHK의 『오늘의 요리』, TBS의 『훌륭한 동료들』, NHK 『연상 게임』, 『청춘 플레이백』 등에 출연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NHK 교육 TV의 『한시 기행』에서 일본어 낭독을 맡아 그의 목소리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스튜디오 파크에서 안녕하세요』, 『산마노만마』, 『철코의 방』 등 인기 토크쇼에도 출연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과 가부키에 대한 철학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다큐멘터리에서도 활약했다. 『신세계 기행』에서는 내레이션을 맡았고, 『하이비전 스페셜 「하늘을 나는 바다」』에서는 낭독을 맡았다. 특히 2006년 방영된 『하이비전 스페셜 「환갑의 도전 ~ 나카무라 키치에몬 가부키 신작을 만들다」』에서는 그의 창작 활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망 후 2021년 12월 18일에는 NHK 종합에서 『나카무라 키치에몬 씨를 기리며』라는 추모 방송이 방영되어 그의 가부키 명장면과 NHK 소장 비장 영상들을 통해 고인의 인품과 업적을 기렸다.
3.3. 광고 (CM) 출연
그는 다양한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 덴덴공사(현 NTT) '위탁 공중전화(빨간 전화) 홍보 사진'(1955년경?) : 가부키자에 위탁 공중전화가 처음 설치될 때 홍보 사진의 아역 모델로 출연했다. (나카무라 만노스케 시절)
- 히타치 제작소 '키도컬러'(1977년~1978년 전기?) : 플라워 트래블링 밴드의 'MAKE UP'을 배경 음악으로, 색종이 폭풍이 휘날리는 가운데 가부키 배우(키치에몬)가 춤을 추는 광고. '올 대중 12월호'(1977년, 경제통신사)에 하이크로마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키도컬러 광고가 실렸다. 같은 해 후기에는 '데카데카 26 전통미 센서·2대 습명편'에 한 장면만 출연했다. 내레이션은 나야 고로가 맡았다.
- 네슬레 일본 '네스카페 골드 블렌드'
- '차이를 아는 남자(사람)' 나카무라 키치에몬 편 (시리즈 3대째) / 1972년 : ACCCM 페스티벌 제12회 TV 필름 CM 부문 우수 작품상. 덴쓰의 전 부사장 모모세 노부오에 따르면, "일본의 화(和)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프로 중의 프로"로서 3대째 편 출연을 제안했다. 출연 자체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이미 '차이를 아는 남자' 광고는 초대 마쓰야마 젠조 편부터 상당한 화제를 모았기에 키치에몬은 "TVCM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지만, 저는 가부키 배우이기 때문에 화제성 광고에 평상복으로 출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님에게 실례가 됩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스태프들을 난감하게 했다. 결국 "골드 블렌드를 마시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하자, 키치에몬은 그 열의에 눌렸는지 포기했는지 스웨터 차림의 출연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촬영 날, 이미 가부키 연습에 들어간 키치에몬은 격렬한 연습으로 지쳐 쓰러질 듯이 촬영장에 들어섰지만, 카메라 앞에 서자 돌변하여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CM 디자이너 시라스 타카유키는 그의 프로 정신에서 광고 기획 콘셉트인 "한 분야에 뛰어난",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는, 진정한 '차이를 아는 남자'를 느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 '신·차이를 즐기는 사람들' 외 3편 / 2004년
- 산요 상회 '카마에테 미탓테, 시작되지 않아. - 더 스카치 하우스'(1981년) : 컬러 사진의 스틸(패션) 모델. 검은 줄무늬 반팔 폴로 셔츠에 프로듀서처럼 흰색 아우터를 두르고 레몬을 던지는 포즈. 주간 산케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 다이이치 제약 '카로얀 하이·카로얀 S'(1982년 / 현 다이이치 산쿄 헬스케어)
- 아지노모토 제너럴 푸즈 '그랑데이지 천년 커피' : 1983년 '그랑데이지·여자·영원' 편. ACCCM 페스티벌(제23회 우수 작품상), 1983-1984년 '마처럼 검게' 편, 1984년 '무의 사치', '무의 사치 2' 편.
- 산토리 라디오 CM(1991년) '야마자키', '작가의 보관 술병' 편 : ACC CM 페스티벌 제31회 전일본 CM 대상, CM 명예의 전당 13회(작품 №31).
- 하우스식품
- '롯코노 오이시이 미즈'(1990년대, 2000년~2001년 6월까지 '물을 사다', '물을 찾다' 편)
- '카레는 하우스'(1993년)
- '해산물용 카레입니다.', '소고기용 카레입니다.'(1997년~1999년)
- '100주년 기업 광고'(2013년)
- JRA(일본중앙경마회) '나의 경마·당신의 경마' 천황상 (가을) 편 (모토키 마사히로와 야키니쿠를 먹으며 '스테미나'를 강조), 국화상 편 (모토키와 궁도), 아리마 기념 편 (1996년, 게스트 출연).
- 블랑팡
- 소케 요시초안
- 일본 에어 시스템(1990년~1991년) 호놀룰루 노선 취항 편 "하와이가 가깝다. 6월 3일 JAS HAWAII" 일본인의 감성 편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사람을 대접하는 소중한 마음."
- 미쓰이 신탁은행(~2000년?) : 노벨티·나카무라 키치에몬 컬렉션 (초대도 즐겨 사용했다는, 하리마야와 인연이 깊은 문양 '키치비시'를 장식한 상품. 과자 그릇, 머그컵, 냉차 잔, 찻잔, 꽃병, 주머니, 특별 제작 수건, 도시락 & 미니 보자기 등)
- 까르띠에 'CREA' 2000년 12월호 : 트리니티 링의 편집과 광고 타이업 기사로 에세이를 집필했다.
- 라인아트 샤르망 10주년 기념 카탈로그 : 안경에 대한 이야기나 디자인 아이디어 등 기고.
- 샤프 '플라즈마 클러스터 가습 공기청정기'(2010년) : '발견! 플라즈마 클러스터·나카무라 키치에몬 편'.
- SMBC 닛코 증권(2018년, 2019년) : 가부키 배우·100TH "그 인생에, SMBC 닛코 증권" 편.
- Papas company(2004년~2021년 6월) : 스틸(패션) 모델. 분게이슌주, 주간 분슌 등에 게재.
4. 수상 경력 및 영예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그의 뛰어난 예술적 업적과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55년 - 제8회 마이니치 연극상 연기 특별상
- 1975년 - 나고야 연극 펜클럽 연간상
- 1977년 - 예술선장 신인상
- 1984년 - 제39회 예술제상 우수상, 마야마 세이카상 대상
- 1985년 - 제41회 일본 예술원상
- 1991년 - 제46회 예술제상, 제12회 마쓰오 예능상 대상
- 1995년 - 마야마 세이카상 대상, 제3회 요미우리 연극 대상 우수 남우주연상
- 1996년 - 제19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남우주연상
- 1999년 - 제9회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 골든 글로리상
- 2002년 - 제57회 예술제상
- 2002년 - 일본 예술원 회원
- 2007년 - 제48회 마이니치 예술상
- 2008년 - 제12회 쓰보우치 쇼요 대상, 제28회 전통문화 폴라상 대상
- 2009년 - 제16회 요미우리 연극 대상 선정 위원 특별상
- 2011년 -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간국보) 인정
- 2015년 - 제22회 요미우리 연극 대상 대상 및 최우수 작품상, 제31회 아사쿠사 예능 대상, 제31회 와세다 대학 예술 공로자 표창
- 2017년 - 제25회 하시다상 특별상
- 2017년 - 문화공로자 표창
- 2019년 - 제71회 일본방송협회 방송 문화상
- 2021년 - 정사위, 욱일중광장(사후 추서)
5. 저술 및 출판물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배우로서의 활동 외에도 여러 권의 저서와 출판물에 참여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와 사상을 대중과 공유했다.
- 『키치에몬 일기』(1956년, 연극 출판사) : 저자는 초대 키치에몬이지만, 제목 글씨는 2대 키치에몬이 썼다. (초등학교 3학년 때)
- 『반바지 입은 하리마야』(1993년, 단코샤 / 2000년, PHP 문고) : 연재작인 '차에 대한 삶의 풍경'의 '배우의 민낯', '달팽이의 넋두리'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 『이야기』(1996년, 매거진 하우스) : 잡지 '하토요!'의 연재 '휴식 시간'을 가필 수정 및 재구성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 『나카무라 키치에몬의 가부키 월드』(1998년, 쇼가쿠칸). 감수.
- 『키치에몬의 팔레트』(2000년, 신초샤) : 아가와 사와코와의 대담집. 사진: 이나고시 코이치.
- 『하리마야 그림 이야기』(2004년, 마이니치 신문사) : 마이니치 신문 연재 '하리마야 분장실에서 한숨'을 발췌하여 수록했다.
- 『나가사키 스케치』 그림 엽서집(2005년 봄경?, 시마바라 반도 관광연맹) : 철코의 방 2006년 8월 25일 방영분에서 지난 출연 때 취미인 그림 이야기가 나와 방송에서 몇 점 소개했더니, 시마바라 반도 관광연맹 관계자가 "저 친구에게 그리게 해라"라고 말하며 배우인 자신에게 이 일을 맡겼다고 말했다. 유명한 키치에몬에게 지역 10곳(시마바라 성, 하쿠운 연못, 하우스 텐 보스, 나베시마 저택 나가야몬과 돌담, 오바마 온천, 글로버 저택, 네덜란드 담, 쿠주쿠시마, 다랑이논, 헤이세이 신잔)의 그림을 그려 한마디 코멘트와 함께 엽서집으로 만들어 나가사키를 알리고 싶다는 취지였다. 2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첫날 스케치를 하고 밤에 완성하여 다음 날 전달했다. 히라도에서는 "관광객 아줌마들이 '아! 키치에몬이다! 키치에몬이다!'라고 손가락질하며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그 자리에서 그림을 완성하여 전달했다"고 말했다.
- 『꿈꾸는 새』(2019년, 니혼케이자이 신문 출판사) : 나의 이력서 시리즈에 수록된 자서전이다.
- 『나카무라 키치에몬 무대에 살다 예도에 목숨 건 명배우』(2022년 9월 5일 초판, 8월 31일 발매, 쇼가쿠칸) : 2대 키치에몬 요모야마 일기(二代目中村吉右衛門四方山日記니다이메 나카무라 키치에몬 요모야마 닛키일본어)의 단행본화. 달력 뒷면에 그린 러프 스케치, 미완성 그림책 '오시바이노 에혼', 키치에몬 부인 인터뷰, 작가 오사카 고의 특별 기고가 수록되어 있다. 사진집 '가부키 배우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별책 '예단 역을 살다'를 제3장에 상연 기록 추가하여 재수록했다.
주요 연재물:
- '차에 대한 삶의 풍경' 「배우의 민낯」「달팽이의 넋두리」(1986년 1월 ~ 12월호, 1990년 1월 ~ 1992년 12월호. 단코샤)
- 하토요! 「휴식 시간」(1994년 3월 ~ 1995년 8월호, 매거진 하우스)
- 아사히 신문 석간·예능란 오프 스테이지 「하리마야 분장실 이야기」1-4회 (1994년 3월)
- 마이니치 신문·선데이 마이니치 「하리마야 분장실에서 한숨」(마이니치 신문 석간: 총 24회, 매월 둘째·넷째 화요일 게재. 2001년 1월 9일 ~ 12월 25일 / 선데이 마이니치: 총 26회, 2002년 10월 13일호 ~ 2003년 4월 13일호).
- 부인화보(2003년 1월 ~ 12월호, 하스트 부인화보사) 「나카무라 키치에몬의 배우 세시 기행 나카무라 키치에몬이 그린 가부키 그림 12개월」.
- 요미우리 신문 조간 「시대의 증언자」(2006년 5월 10일 ~ 6월 8일) 총 22회.
- 니혼케이자이 신문 「나의 이력서」(니혼케이자이 신문사) : 『꿈꾸는 새』에 수록되어 있다.
- 아사히 신문 「말하다 인생의 선물」(2017년 7월 10일 ~ 7월 28일, 아사히 신문)
- 웹 매거진 『혼노 마도』(本の窓)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요모야마 일기」 희대의 명배우가 그리고 쓰는 무대 안팎(2020년 ~ 2022년, 쇼가쿠칸).
6. 사회 활동 및 전시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가부키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전시회를 통해 그의 예술적 면모를 선보였다.
- 문부과학성 중앙교육심의회 위원 (제4기)
- 세타가야 미술관 개관 기념 '슈나벨 VS 가부키·대담과 창작 일본무용'(1989년 9월 14일, 세타가야 미술관) - 패널리스트. 일본을 방문한 화가 줄리언 슈나벨과의 대담, 4대 나카무라 자쿠에몬의 창작 무용으로 구성된 행사였다.
- 제64회 나라학 문화 강좌 강연 '대불 개안 1250년·도다이지와 나라' 「대불이 만들어지기까지」(2003년) - 게스트. 강사는 도다이지 벳토(別当벳토일본어) 하시모토 쇼엔, 사회는 사카이 유키에, 게스트는 키누타니 고지 (화가) 등이 있었다.
- 문화청 '차세대를 이끌 어린이 문화 예술 체험 사업' 순회 공연 사업 워크숍 '가부키 세계에서 놀자' '실제로 무대를 보자'(2006년 ~ 2012년) - 전국 초등학교를 방문하며 가부키를 친숙하고 즐겁게 체험할 수 있도록 활동. 이야기, 구성·연출·감수를 담당했다.
- '코로 빛과 추억의 변주곡'전(2008년 6월 14일 ~ 8월 31일, 국립 서양 미술관·고베 시립 박물관) - 오디오 가이드.
- 개관 기념전 '폴라 미술관 컬렉션전' 프리 이벤트 SBS 라디오 공개 녹음 제3탄 '인상파와 에콜 드 파리의 즐거움'(2010년 8월 21일, 시즈오카 시 미술관) - 패널.
- '루오와 풍경'전 오프닝 기념 토크쇼 '나카무라 키치에몬이 그림을 이야기하다 - 루오에게 매료되어'(2011년 4월 23일, 파나소닉 시오도메 미술관) - 토크.
- 구찌×나카무라 키치에몬 동일본 대지진 자선 갈라(2011년 5월 25일, 팰리스 호텔 도쿄).
-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전·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영화제 II' 강연(2011년 8월 2일, 와세다 대학 오쿠마 기념 강당) - 강연.
- 구찌×나카무라 키치에몬 자선 갈라 '도호쿠 아이들 지원을 위한 밤'(2012년 5월 25일, 팰리스 호텔 도쿄).
- '클리블랜드 미술관전' '인간 국보전'(도쿄 국립 박물관)·'세기의 일본화'전(2014년 2월 5일 ~ 4월 1일, 도쿄도 미술관) - 3개 전시회를 연결하는 오디오 가이드 내비게이터.
- 가마쿠라 쓰루오카 하치만구 단카쓰 준공 봉축 행사 '거리 첫 통행·봉축무' 「엔넨노 마이」 봉납(2016년 3월 30일, 가마쿠라 쓰루오카 하치만구 마이덴).
- 와세다 대학 예술 공로자 표창 기념 나카무라 키치에몬전·나카무라 키치에몬 강연회 - 고전 가부키의 예와 마음(2016년 8월 4일, 와세다 대학 오쿠마 기념 강당) - 강연.
- 유네스코 지원 그림 접시 tribute21 자선 그림 접시 컬렉션 나카무라 키치에몬 그림 접시(펠리시모) - 시다레자쿠라 그림, 장모종 개와 발자국 그림.
- 후지산 세계 유산 국민회의 '유명인 응원 메시지 223 펠로우' - 꿈의 한 글자와 사인, 기고.
주요 전시회·사진전:
- 나카무라 키치에몬 스케치전(2005년 5월 10일-14일, 긴자 요시이 화랑) : 아사히 신문 연재 '키치에몬이 그리는 나가사키 여행의 정취' '하리마야 그림 이야기' 원화 등도 전시되었다.
- NHK 후생문화사업단 자선 기획 '예능인들의 다채로운 미술전'(2005년 7월 20일-8월 5일, 가와구치코 미술관).
- 와세다 대학 연극 박물관 기획전 '초대 나카무라 키치에몬전'(2011년 7월 2일 - 8월 7일, 와세다 대학 연극 박물관·기획 전시실 I).
- 나카무라 키치에몬 사진전 - SONORAMENTE(2014년 8월 30일-9월 15일, 구찌 긴자 7층).
- 와세다 대학 예술 공로자 표창 기념 나카무라 키치에몬전(2016년 6월 7일 - 8월 7일, 와세다 대학 쓰보우치 박사 기념 연극 박물관).
-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사진전(2018년 11월 7일 - 12월 9일, 미키모토 긴자 4초메 본점 7층 미키모토 홀).
- 미로전 - 일본을 꿈꾸며(2022년 2월 11일-4월 17일, 분카무라 더 뮤지엄) : 습명 피로 공연을 미로가 관람하고 분장실을 방문했을 당시의 슬라이드를 전시했다.
- 신주쿠 역사 박물관 레이와 4년도 소장 자료전 '이와타 유리 신 수장품전'(2022년 4월 1일-5월 29일, 신주쿠 역사 박물관) : 이와타 유리 제작 제품 '이와-11 하리마야(나카무라 키치에몬) 습명 피로 기념품 이와타 공예 유리 60×35×20 1966년'을 전시했다. 다채로운 나비를 본뜬 젤리 과자 같은 유리 젓가락 받침대(투명, 갈색, 파랑, 빨강, 노랑 5종)가 있었다.
- 세이코 하우스 긴자 홀 '나베시마 노리야스 사진전 -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2023년 3월 9일-3월 21일) :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분장실에서 분장한 모습으로 촬영한(나베시마 씨에 따르면 "농담으로 '하루 두 번 공연'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에 그 연극의 정해진 동작, 볼거리를 카메라 앞에서 한바탕 연기해 주시는 호화로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다양한 배역의 필름을 화지에 인쇄하여 전시했다.
7. 사망 및 사후 평가
2021년 3월 28일, 나카무라 키치에몬 2세는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고, 당분간 요양에 전념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5월 6일에는 '7월 대가부키'(7월 4일 ~ 29일)에 출연할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나, 6월 1일 다시 휴연이 발표되어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그는 마지막까지 무대에 서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28일 18시 43분, 심부전으로 도쿄 시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12월 1일 저녁 각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법명은 '슈게이인샤쿠칸시다이코지(秀藝院釋貫四大居士슈게이인샤쿠칸시다이코지일본어)'였다. 사위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는 같은 달 2일 가부키자에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장인을 기렸다.
사망 후, 12월 2일 오후 마쓰노 히로카즈 내각관방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현대를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로서 수많은 작품, 다양한 역할로 무대에 섰으며 TV 드라마에서도 『무사시보 벤케이』를 연기하는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했다. 우리나라 문화 예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나카무라 키치에몬 씨의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국 정부는 키치에몬에게 사망일을 기해 정사위를 추서하고 욱일중광장을 수여했다.
친족만 참석한 장례식에서는 그가 "내 장례식에서는 이 곡을 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제4악장(아다지에토)이 배경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또한, 키치에몬의 의상 제작을 담당했던 '기온 사이토'의 여주인의 블로그에 따르면, 관에는 "7년 전 슌칸용으로 주문했으나 기온 주인의 사망으로 완성되지 못했던 의상용 천"이 덮였고, 다케모토 아오이다유(竹本葵太夫다케모토 아오이다유일본어)는 통야(通夜통야일본어) 때 그의 가슴에 『스마노우라』의 대본이 놓여 있었다고 『연극계』 2022년 3월호에 기고했다.
2021년 12월 18일, 형 2대 마쓰모토 하쿠오는 다음 해 2월 주연 뮤지컬 『라 만차의 남자』 제작 발표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루지 못한 꿈'은 지금까지 키쿠타 카즈오와 아버지 초대 마쓰모토 하쿠오를 위한 진혼곡으로 불렀지만, 이제 진혼곡을 부를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버렸다"고 말하며, "이별은 언제나 슬픈 법이다. 단 한 명뿐인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극복하고 '이루지 못한 꿈'을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2022년 6월 10일, 히에 신사(지요다구 나가타초)의 '산노 마쓰리'에서 같은 구 로쿠반초 정회는 자치노 회관 앞에 설치한 오미키도코로(お神酒所오미키도코로일본어)에 키치에몬이 기증한 새로운 봉납막을 내걸었다. 이 정회는 지금까지 1950년대에 기증받은 초대 키치에몬의 봉납막을 내걸어왔는데, 2대 키치에몬이 생전에 "새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하여 새롭게 봉헌된 것이었다. 키치에몬은 그 공개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2022년 8월 5일, '추모회'가 1주기에 맞춰 11월에 개최될 예정이며, 가부키 관계자들에게는 이미 일정이 전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8월 31일, 쇼가쿠칸에서 『나카무라 키치에몬 무대에 살다 예도에 목숨 건 명배우』가 발매되었고, 2대 나카무라 키치에몬 1주기 추모 '영상으로 기리는 나카무라 키치에몬(하리마야) 최고의 예술' 특집이 진행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9월 1일부터 시작되는 쇼치쿠 공식 동영상 배포 서비스 '가부키 온디맨드' 배포를 시작으로, 10월에는 CS '위성극장' 및 'BS 쇼치쿠 토큐'에서 TV 방송, TBS 채널 2에서는 일요극장 '지난해', 그리고 히가시긴자·토게키(東劇토게키일본어)에서의 시네마 가부키 『구마가이 진야』 상영, NHK 교육 TV에서는 고전 예능으로의 초대를 통해 9월 1주기 슈잔사이와 추억의 대표작 모음이 방영되었다.
2022년 11월 3일, 형 하쿠오의 문화훈장 친수식에서 천황은 2대 하쿠오에게 출연했던 무대와 작년에 사망한 동생 나카무라 키치에몬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8. 관련 항목
- 나카무라 키치에몬 1세
- 마쓰모토 하쿠오 (초대)
- 마쓰모토 하쿠오 (2대)
- 오노에 키쿠노스케 5세
- 오노에 우시노스케 7세
- 가부키
- 인간국보 (일본)
- 문화공로자
- 구 금비라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