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초기 경력
키르텫의 어린 시절은 그의 테니스 경력과 개인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성장기와 프로 선수로의 전환 과정은 이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구스타부 키르텫은 1976년 9월 10일 브라질 산타카타리나주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였던 알도(Aldo)로, 키르텫이 여덟 살이던 1985년 쿠리치바에서 주니어 테니스 경기 심판을 보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키르텫의 큰형인 하파엘(Raphael)은 현재 그의 사업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어린 남동생 기예르미(Guilherme)는 태어날 때 오랜 산소 부족으로 인한 뇌 손상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뇌성마비로 고통받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 키르텫은 남동생의 일상적인 어려움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프로 경력 동안 매년 한 대회에서 얻은 모든 상금을 고향의 NGO에 기부하여 유사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는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트로피의 미니어처 복제품 세 개를 포함하여 자신이 획득한 모든 트로피를 남동생에게 기념품으로 주기도 했다.
1.2. 선수 경력 시작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 키르텫은 남아메리카 주니어 테니스에서 여러 중요한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종종 자신의 나이보다 높은 연령대 그룹에서 경기를 치렀다. 그는 14세 때 라리 파수스(Larri Passos)를 만났는데, 파수스는 이후 15년간 그의 코치가 되었다. 파수스는 키르텫과 그의 가족에게 그가 테니스로 생계를 꾸릴 만큼 재능이 있다고 확신시켰고, 두 사람은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키르텫은 1995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 선수로 전향한 지 2년 만에 키르텫은 페르난두 멜리게니(Fernando Meligeni)에 이어 브라질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랭킹의 선수로 성장했다. 1996년에는 데이비스컵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월드 그룹에 진출하는 데 기여하며 당시 가장 높은 성과를 기록했다. 당시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홈 경기에서는 오스트리아 팀이 경기 도중 기권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7년 프랑스 오픈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한 후, 키르텫은 갑작스러운 명성과 우승에 대한 기대감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약 1년 반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1998년은 부상과 관련되지 않은 그의 경력 중 최악의 해였다. 1998년 프랑스 오픈에서 당시 무명이었던 마라트 사핀에게 일찍 패배한 후, 브라질 언론인들이 파리에서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전체 인원이 즉시 귀국하며 나머지 대회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에게 브라질 테니스의 "홍보대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가중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2. 플레이 스타일
구스타부 키르텫은 베이스라인에서 강한 톱스핀이 걸린 스트로크와 견고한 서브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후방에서 지치게 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는 전통적인 클레이 코트 전문 선수들이 선호하는 수비적인 베이스라인 플레이와는 달리 공격적인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강조했으며,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의 첫 서브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오른손잡이로 웨스턴 그립을 사용하여 단식 백핸드를 구사했다. 특히 높은 궤적의 톱스핀 백핸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샷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폴리에스터 스트링을 사용하여 속도를 내면서도 공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톱스핀을 생성할 수 있었던 초기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많은 남아메리카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클레이 코트를 가장 선호했으며, 그의 세 차례 그랜드 슬램 타이틀 모두 롤랑 가로스(프랑스 오픈)의 붉은 클레이 코트에서 획득되었다.
3. 주요 경력 및 성과
키르텫의 프로 경력은 1997년 프랑스 오픈에서의 놀라운 우승을 시작으로, 세계 랭킹 1위 등극과 부상으로 인한 후기 경력, 그리고 현역 은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각 시기의 주요 성과와 변화를 살펴본다.
3.1. 프랑스 오픈 돌풍 (1997)
챌린저 투어 우승 직후, 키르텫은 1997년 프랑스 오픈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마리아 부에노가 1966년 US 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을 획득한 브라질 선수였다. 당시 대회는 그의 세 번째 그랜드 슬램 참가에 불과했으며, 이는 매츠 빌란데르와 함께 오픈 시대 선수 중 최단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또한, 그는 한 주 동안 챌린저 대회와 그랜드 슬램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한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다.
키르텫은 이 대회에서 지난 4년간 프랑스 오픈 우승자들을 모두 꺾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3회전에서는 1995년 우승자 토마스 무스터를 5세트 접전 끝에 물리쳤고, 8강전에서는 1996년 우승자 예브게니 카펠니코프를 역시 5세트 만에 꺾었다. 결승에서는 1993년과 1994년 우승자 세르지 브루게라를 6-3, 6-4, 6-2의 세트 스코어로 완파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세계 랭킹 66위였던 그는 마크 에드먼슨(212위)과 고란 이바니셰비치(125위) 다음으로 낮은 랭킹으로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을 획득한 세 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의 우승으로 그는 ATP 랭킹 20위권에 진입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인 비외른 보리와 기예르모 빌라스로부터 프랑스 오픈 트로피를 받았다. 우승 트로피를 받기 위해 무대로 불려 나갔을 때, 키르텫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보리에게 몇 번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후 시상식에서 빌라스가 키르텫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키르텫은 대회 의장의 연설 도중 웃음을 터뜨렸다. 키르텫은 빌라스가 한 말을 밝히기를 거부했으나, 강력한 렌즈를 장착한 기자들은 빌라스의 입술을 읽어 스페인어로 "꼬마야, 이제 네 무릎에 여자들이 비처럼 쏟아질 거야!"라고 말했음을 밝혀냈다. 대부분의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흰색을 기본으로 한 유니폼을 입던 시절, 키르텫은 브라질을 상징하는 카나리아색 테니스 유니폼을 입고 당시 테니스계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 자신은 이렇게까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기복이 부족해 급히 제조사로부터 조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브라질 현지에서는 키르텫의 프랑스 오픈 첫 우승 소식을 듣고 마치 즉석 카니발과 같은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3.2. 세계 랭킹 1위 등극 및 연속 성공 (1999-2001)
구스타부 키르텫은 1999년에 당대 최고의 클레이 코트 선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으며, ATP 랭킹 역사상 연말 톱10에 진입한 세 명의 남아메리카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4월에는 몬테카를로 마스터스에서 마르셀로 리오스를 꺾고 우승했으며, 5월에는 로마 마스터스에서 패트릭 라프터를 꺾고 우승했다. 6월에는 프랑스 오픈 8강에 진출했으나, 당시 무명이었던 안드리 메드베데프에게 패했다. 윔블던 선수권 대회에서는 1968년 토마스 코흐 이후 처음으로 8강에 진출한 브라질 선수가 되었지만, 안드레 애거시에게 패했다. 그러나 8강 진출까지 단 한 세트만을 내주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7월에는 브라질과 프랑스 간의 1999년 데이비스컵 8강전에서 세바스티앵 그로장(Sébastien Grosjean)을 5세트 9-7로 꺾는 혈투를 벌였으며, 이 경기는 4시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또한 그는 현재 ATP 파이널스로 알려진 ATP 테니스 마스터스 컵에 출전한 최초의 브라질 선수가 되었지만, 조별리그에서 한 경기를 이기는 데 그쳤다.
2000년에는 또 다른 견고한 클레이 코트 시즌을 보낸 후, 키르텫은 두 번째 프랑스 오픈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로마 마스터스 결승에서 자신을 꺾었던 망누스 노르만을 11번째 매치 포인트에서 물리치고 우승했다. 그 해 그는 ATP 랭킹 역사상(1973년 이후) 최초로 연말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한 남아메리카 선수가 되었다. 이는 리스본에서 열린 2000년 테니스 마스터스 컵(이 이름으로 처음 열린 대회)에서 당시 신예였던 마라트 사핀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사핀은 연말 랭킹 1위를 차지할 기회가 4번 있었지만, 키르텫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실내 하드 코트에서 피트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를 연속으로 꺾으며 연말 랭킹 1위를 지켜냈다. 그는 8년간 미국 선수들이 지켜오던 연말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빼앗았다. 또한 그는 1977~1978년 아르헨티나의 기예르모 빌라스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연말 톱5에 진입한 남아메리카 선수가 되었다.
2001년, 그는 세 번째 프랑스 오픈 왕관을 차지하며 비외른 보리(6회), 이반 렌들(3회), 매츠 빌란데르(3회)와 함께 오픈 시대에 프랑스 오픈 타이틀을 세 번 이상 획득한 위대한 선수 대열에 합류했다. 전 챔피언 짐 쿠리어가 그에게 트로피를 수여했다. 그는 4회전에서 마이클 러셀을 상대로 매치 포인트를 막아내며 우승을 향해 나아갔다. 또한 8월 신시내티 마스터스에서 패트릭 라프터를 꺾고 자신의 경력 중 가장 큰 하드 코트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러나 2001년 US 오픈에서는 1번 시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8강전에서 7번 시드의 예브게니 카펠니코프에게 세트 스코어 0-3으로 패했다.
이후 부상이 키르텫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는 연말까지 남은 9경기 중 8경기에서 패했다. 2년 연속 연말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할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말의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레이턴 휴잇에게 랭킹 1위를 내주었다. 그는 2년 연속으로 ATP 상금 1위를 기록했으며, 약 409.10 만 USD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3.3. 후기 경력 및 부상 (2002-2007)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구스타부 키르텫의 경력은 부상으로 인한 어려움과 랭킹 하락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2002년과 2003년 프랑스 오픈에서 4회전에서 탈락했다.
2004년 호주 오픈에서 키르텫은 이반 류비치치를 꺾고 3회전에 진출하며 그의 경력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호주 오픈 3회전에 도달했지만, 이후 파라돈 스리차판에게 패했다. 부상으로 얼룩진 이 해에, 키르텫은 브라질에서 열린 브라질 오픈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단 하나의 ATP 투어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 해 대회는 9월에서 2월로 개최 시기가 변경되었고, 코트 표면도 하드 코트에서 클레이 코트로 바뀌었다.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픈과 비냐델마르 오픈과의 협의를 통해 남미 투어 일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2002년에도 브라질 오픈에서 우승했던 키르텫은 이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하드 코트와 클레이 코트 모두에서 브라질 오픈 타이틀을 획득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특히 2004년 프랑스 오픈 3회전에서 키르텫은 당시 세계 랭킹 1위이자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던 로저 페더러에게 유일한 그랜드 슬램 패배를 안겼다. 두 선수는 2002년 함부르크 마스터스에서 클레이 코트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으며, 당시 페더러가 6-0, 1-6, 6-2로 키르텫을 꺾었다. 하지만 2004년 프랑스 오픈에서는 부상에 시달리던 키르텫이 페더러를 압도하며 3세트 만에 승리했다. 이 패배는 페더러가 2013년 윔블던에서 세르히 스타호프스키에게 2회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그랜드 슬램 8강 이전에 패배한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있다. 9월 1일, 키르텫은 수술받은 엉덩이 부위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며 무기한 ATP 투어 활동 중단을 발표했다. 그는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2006년 상반기에도 부상과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키르텫은 세계적인 상위 선수로서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세계 랭킹 200위 밖으로 밀려난 키르텫은 더 이상 브라질 최고의 선수가 아니었으며 (당시 히카르두 멜루와 플라비우 사레타에게 밀려), 시즌 주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와일드카드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2006년 브라질 오픈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1회전에서 조기 탈락했다. 이 실패 이후 키르텫은 북미 마스터스 시리즈인 마이애미 오픈과 인디언 웰즈 마스터스에 참가할 와일드카드를 획득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두 대회 모두 기권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테니스 연맹은 키르텫이 3회 우승자로서 2006년 프랑스 오픈에 와일드카드를 받을 기회가 충분하다고 발표했지만, 2월 중순 이후 남자 투어에서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와일드카드를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그의 프로 경력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오픈에 불참하게 되었다.
2007년에도 키르텫의 경기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랭킹이 ATP 투어 대회에 자동 출전할 만큼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대회 참가를 위해 와일드카드에 의존했다. 그 해 그의 승패 기록은 2승 7패에 그쳤다. 11월에는 뇌성마비를 앓던 그의 어린 남동생 기예르미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3.4. 은퇴 (2008)
2008년, 구스타부 키르텫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 오픈, 브라질 오픈, 마이애미 오픈 등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대회 위주로 일정을 잡았다. 코스타두사우이프와 마이애미에서 단식 1회전 탈락을 겪은 후, 마이애미에서 니콜라스 라펜티와 팀을 이루어 펠리시아노 로페스와 페르난도 베르다스코를 상대로 오랜만에 ATP 마스터스 시리즈 복식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008년 5월 25일, 구스타부 키르텫은 롤랑 가로스 경기장에서 15,000명의 관중 앞에서 마지막 프로 단식 경기를 치렀다. 그는 1997년 첫 프랑스 오픈 우승 당시 입었던 것과 같은 파란색과 노란색의 '행운의'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등장했다. 상대 선수 폴앙리 마티유를 상대로 매치 포인트를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3세트(6-3, 6-4, 6-2)로 패배했다. 이 스코어는 공교롭게도 1997년 프랑스 오픈 결승전의 결과와 같았다. 경기 후 그는 대회 주최측과 모든 팬들로부터 그의 경력 동안 이룬 업적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4. 데이비스컵 참여
키르텫은 1996년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었는데, 당시 그는 브라질에서 두 번째로 높은 랭킹의 선수였다(페르난두 멜리게니에 이어). 그 이후로 키르텫은 항상 국가대표팀의 부름에 응했으며, 이는 조국을 대표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고 말했다. 1999년과 2000년 시즌 동안 키르텫은 데이비스컵 경기에서 100%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팬들은 그가 ATP 투어 대회를 위해 에너지를 아끼는 데 더 신경 썼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키르텫이 경기 도중 자신에게 경기에 집중하라고 소리친 팬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2004년, 브라질이 캐나다와의 리페차지 경기에서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고, 그 해 1회전에서 스웨덴에게 패배한 후 아메리카 그룹 I으로 강등되면서 브라질 테니스 연맹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키르텫은 아메리카 그룹 I에서 브라질을 위해 뛰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인 히카르두 아시올리(Ricardo Accioly)의 예상치 못한 해고가 그 계기가 되었다. 키르텫은 선수들과의 협의 없이 이루어진 이 결정이 독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는 연맹 이사회의 일련의 의심스러운 결정들 중 가장 최근의 일일 뿐이었다.
다른 모든 브라질 프로 선수들과 새로 임명된 전 선수 출신 감독 자이메 온신스는 키르텫의 주장을 따랐다. 그 결과, 브라질은 주니어 선수들로 구성된 팀으로 존별 그룹 1회전을 치러야 했으며(이는 많은 협상 끝에 가능했는데, 그 과정에서 브라질은 라운드를 몰수패당하여 아메리카 그룹 II로 자동 강등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패배하여 아메리카 그룹 II로 강등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러한 항의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 브라질은 2005년 시즌을 위해 리페차지 경기를 다시 주니어 팀으로 치러야 했으며, 결국 아메리카 그룹 II로 강등되었다. 2005년, 항의의 여파로 브라질 테니스 연맹 이사회가 교체된 후, 키르텫과 다른 선수들은 팀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제 전 선수 페르난두 멜리게니가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키르텫은 2004년 9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엉덩이 부상으로 코트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의 파업 종료 이후에도 복귀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는 2005년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브라질 산타카타리나주 (클레이 코트)에서 열린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의 아메리카 존 그룹 II 2회전 경기에 복귀했다.
코트 | 실내 | 실외 | 총계 |
---|---|---|---|
클레이 | 카펫 | 잔디 | 하드 |
승 | 28 | 6 | |
8 | 26 | 34 | |
패 | 8 | 5 | 2 |
5 | 10 | 15 |
5. 개인 생활
구스타부 키르텫의 개인 생활은 가족 관계, 그가 설립한 재단의 사회 공헌 활동, 그리고 테니스 외적인 관심사 및 논란을 포함한다.
5.1. 가족 관계 및 사생활
키르텫은 브라질 남부의 플로리아노폴리스에서 태어나 정착했다. 그는 2010년 11월, 남동생 기예르미의 생일에 마리아나 손치니(Mariana Soncini)와 결혼했으며, 부부는 딸과 아들 한 명씩을 두었다。 그의 큰형 하파엘은 현재 그의 사업 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또한 그는 모델이자 TV 진행자인 헤나타 키르텫과 먼 친척 관계이다.
5.2. 구스타부 키르텫 재단
2000년에 구스타부 키르텫은 플로리아노폴리스에 기반을 둔 비영리 자선 단체인 구스타부 키르텫 재단(Gustavo Kuerten Institute)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어린이와 장애인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남동생 기예르미가 겪었던 어려움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이 재단을 설립했으며, 자신의 경력에서 얻은 상금 일부를 재단에 기부하는 등 활발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5.3. 기타 활동 및 관심사
은퇴 후에도 키르텫은 태어난 곳인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섬의 라고아 다 콘세이카오(Lagoa da Conceição) 호숫가 지역에서 활동하며 살고 있다. 그는 여전히 지역 테니스 애호가들과 함께 테니스를 가르치고 즐긴다. 고향에서는 "카쇼루 그란지"(Cachorro Grande, "큰 개")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는 열렬한 서핑 애호가이기도 하다.
키르텫은 2009년 2월 16일 플로리아노폴리스에 있는 산타카타리나 주립대학교(UDESC) 예술센터(CEART)의 연극 과정에 합격하여 연극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축구 팀은 브라질의 아바이 FC이다.
5.4. 논란
2016년 10월, 키르텫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의 저작권 및 이미지 권리 수입과 관련된 조세 회피 문제로 법원에 출두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약 700.00 만 BRL (약 200.00 만 USD)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6. 수상 및 영예
구스타부 키르텫은 그의 경력 동안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98년, 2002년, 2004년에 테니스 기자 협회로부터 스포츠맨십에 대한 프랑스 오픈 오렌지 상을 수상했다.
- 조국 브라질에서는 1999년 프레미우 브라질 올림피쿠를 수상했으며, 1999년과 2000년에는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2000년에는 ATP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 2003년에는 ATP 아서 애시 인도주의상을 수상했다.
- 2005년에는 '테니스 매거진'이 선정한 "테니스 시대 위대한 40인" 목록에서 37위에 올랐다.
- 2010년에는 테니스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ITF의 최고 영예인 필리프 샤트리에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그는 아르헨티나로부터 메르코수르 코넥스 상을 수상하며 해당 10년간 남아메리카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선정되었다.
- 2011년에는 국제 클럽의 명예로운 장 보로트라 스포츠맨십 상을 수상했다.
- 2012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6년 6월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의 글로벌 홍보대사로 임명되어 주로 남아메리카 지역에서 명예의 전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 2016년 2월 16일, 리우 오픈의 중앙 코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구가 키르텫 코트'로 공식 명명되었다.
- 2016년 8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16년 리우 올림픽 개막식 동안 마라카낭 경기장으로 성화 봉송을 담당했으며, 이후 오르텐시아 마르카리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7. 유산 및 평가
구스타부 키르텫은 그의 탁월한 경기력과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을 통해 테니스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클레이 코트에서의 압도적인 강세는 그를 "클레이 코트의 왕"으로 불리게 했다. 그는 브라질 남자 선수로서 최초의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자이자 세계 랭킹 1위를 달성한 선수로서, 브라질 테니스의 역사를 새로 썼으며 수많은 젊은 브라질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인기는 "구가"라는 애칭으로 브라질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그가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브라질에서 "즉석 카니발"이 열릴 정도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경기 외적으로도, 키르텫은 구스타부 키르텫 재단 설립을 통해 장애인과 어린이를 위한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스포츠 선수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었다. 남동생의 죽음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시작된 그의 자선 활동은 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이른 은퇴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는 테니스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겸손함으로 동료 선수들과 팬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 헌액과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서의 역할 등을 통해 은퇴 후에도 테니스계와 브라질 사회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8. 경력 통계
구스타부 키르텫은 프로 경력 동안 20개의 단식 타이틀과 8개의 복식 타이틀을 획득했다. 단식 최고 랭킹은 2000년 12월 4일 기준 1위였으며, 복식 최고 랭킹은 1997년 10월 13일 기준 38위였다. 총 커리어 프라이즈 머니는 약 1480.70 만 USD에 달한다. 이 섹션에서는 그의 그랜드 슬램 단식 성적, 그랜드 슬램 결승, 그리고 연말 챔피언십 결승 성적을 자세히 다룬다.
8.1. 그랜드 슬램 단식 성적
대회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승-패 |
---|---|---|---|---|---|---|---|---|---|---|---|---|---|---|---|
호주 오픈 | A | A | 2R | 2R | 2R | 1R | 2R | 1R | 2R | 3R | A | A | A | A | 7-8 |
프랑스 오픈 | A | 1R | W | 2R | QF | W | W | 4R | 4R | QF | 1R | A | A | 1R | 36-8 |
윔블던 | A | A | 1R | 1R | QF | 3R | A | A | 2R | A | A | A | A | A | 7-5 |
US 오픈 | A | A | 3R | 2R | QF | 1R | QF | 4R | 1R | 1R | 2R | A | A | A | 15-9 |
총 승-패 | 0-0 | 0-1 | 10-3 | 3-4 | 13-4 | 9-3 | 12-2 | 6-3 | 5-4 | 6-3 | 1-2 | 0-0 | 0-0 | 0-1 | 65-30 |
A = 불참
W/F/SF/QF = 우승/준우승/4강/8강
#R = 해당 라운드 탈락 (예: 1R은 1회전 탈락)
8.2. 그랜드 슬램 결승
결과 | 연도 | 대회 | 코트 | 상대 | 스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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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 1997 | 프랑스 오픈 | 클레이 | 세르지 브루게라 | 6-3, 6-4, 6-2 |
우승 | 2000 | 프랑스 오픈 | 클레이 | 망누스 노르만 | 6-2, 6-3, 2-6, 7-6(8-6) |
우승 | 2001 | 프랑스 오픈 | 클레이 | 알렉스 코레차 | 6-7(3-7), 7-5, 6-2, 6-0 |
8.3. 연말 챔피언십 결승
대회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승-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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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마스터스 컵 | 출전 자격 없음 | RR | W | RR | 출전 자격 없음 | 5-6 |
결과 | 연도 | 대회 | 코트 | 상대 | 스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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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 2000 | 테니스 마스터스 컵, 포르투갈 | 하드 (실내) | 안드레 애거시 | 6-4, 6-4, 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