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가네코 미쓰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 환경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의 독특한 사회 비판적 시각을 형성했다. 그의 유년기는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과 복잡한 가족 관계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가네코 미쓰하루는 1895년 12월 25일, 아이치현 쓰시마시의 해동군 오에지촌(현 쓰시마시 시모기리초)에서 술 판매업을 하던 오시카 와키치와 사토 야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가네코 야스카즈(金子安和)였으나, 후에 야스오(保和)로 개명했다. 2세 때인 1897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은 나고야시 고이치바초(현 나고야시 나카구 니시키산초메)로 이사했고, 그는 토건업체 시미즈구미 나고야 출장소 주임이던 가네코 쇼타로의 양자가 되었다. 공식적인 입양은 6세 때 이루어졌다. 당시 양모인 스미는 16세의 어린 나이였으며, 전근대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00년 (메이지 33년), 양부 쇼타로가 교토 출장소 주임이 되면서 가족은 교토시 가미교구로 이사했고, 가네코 야스오라는 이름으로 도다 심상고등소학교 심상과에 입학했다. 1906년 (메이지 39년), 쇼타로가 도쿄 본점으로 전근하면서 긴자의 조부 댁에 동거하게 되었고, 다이메이 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긴자 다케가와초(현 긴자 7초메)의 기독교 교회에서 세례 지원식을 받았다. 또한 우키요에시 고바야시 기요치카에게 일본화를 배웠다. 이듬해 1907년 (메이지 40년) 6월, 가족은 우시고메구 신오가와초로 이사했고, 쓰쿠도 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같은 해 11월, 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도미를 꾀하다가 가출했으나 곧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방랑 중의 불섭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3월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
1908년 (메이지 41년) 4월, 교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노장 사상과 에도 문학에 심취했고,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는 도보로 보소반도를 횡단하는 여행을 했다. 첫해에는 성적이 우수했으나, 중학교의 교풍에 반발하여 성적이 나빠지고 200일 가까이 결석하여 중학교 2학년 때 유급했다. 이 무렵부터 현대 문학에 관심을 돌려 소설가를 지망했고, 중학교 4학년 때 동인지를 발행하여 급우들에게 돌려보기도 했다.
1914년 (다이쇼 3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문과에 입학했으나, 자연주의 문학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스카 와일드나 미하일 아르치바셰프의 영향을 받았다. 결국 이듬해 1915년 (다이쇼 4년) 2월에 와세다대학 예과를 중퇴하고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했으나 8월에 퇴학했다. 9월에는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의 방탕한 생활을 그는 나중에 "사람들은 모두 그 무렵의 나를 광인 취급했다"고 회고했다. 폐첨 카타르로 인해 3개월 정도 휴학했고, 1916년 (다이쇼 5년) 6월에 게이오대학 예과를 중퇴했다. 이 무렵 호이즈미 료스케와 료신 형제를 알게 되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샤를 보들레르, 기타하라 하쿠슈, 미키 로후 등의 시를 탐독하며, 7월에는 이시이 유지, 고야마 데쓰노스케 등과 동인지 『구도』를 발행했으나 2호로 휴간했다. 그는 병종으로 징병 검사에 합격했다.
1.2. 초기 여행과 영향
1916년 10월, 양부 쇼타로가 사망하면서 양모와 재산을 절반으로 나눴고, 1917년 (다이쇼 6년) 우시고메구 아카기모토마치로 이사했다. 그의 방탕한 생활은 여전하여 기후현, 간사이, 후쿠에섬 등으로 "목적 없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카조 다쓰오와 잡지 『혼의 집』을 발행했으나 5호로 휴간했다. 또한 월트 휘트먼, 에드워드 카펜터의 영향을 받아 광산 사업에 착수했으나 실패했다. 12월, 양부의 친구와 함께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 그 직전 가와지 류코의 소개로 인쇄회사를 통해 처녀 시집 『적토의 집』을 1919년 (다이쇼 8년) 1월에 레이분샤에서 간행했다.
『적토의 집』을 간행한 직후, 그는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로 여행하며 동행인과 헤어져 홀로 브뤼셀 교외에 하숙했다. 친일파이자 일본 공예품 수집가였던 이반 르파주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서양 미술을 접하고 차분한 독서의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에밀 베르하렌의 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결국 1920년 (다이쇼 9년) 5월에 브뤼셀을 떠나 파리로 옮겼고, 12월에 런던에서 귀국선에 올라 1921년 (다이쇼 10년) 1월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2년여의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동인지 『인간』, 『폭풍』 등에 시를 발표했고, 오야마 히로미쓰, 사토 하치로, 히라노 이마오 등과 시지 『낙원』(3호로 휴간)의 편집에 참여했다. 또한 벨기에에서 써 모은 시의 퇴고에 착수하여, 1923년 (다이쇼 12년) 7월에 시집 『고가네무시』로 간행했다. 그 출판 기념회에는 사이죠 야소, 요시다 잇스이, 이시카와 준, 무로 사이세이, 후쿠시 고지로 등이 참석했다.
2. 문학 활동
가네코 미쓰하루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수필가, 번역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일본 문학사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2.1. 시
가네코 미쓰하루의 시 세계는 초기부터 일관되게 사회 비판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는 1916년 『검열관』(Kohro)을 사적으로 간행했으며, 1919년 1월에 처녀 시집 『적토의 집』을 간행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1923년 7월에는 유럽에서 집필한 시들을 엮은 시집 『고가네무시』를 발표했다. 같은 해 미출간된 『썩음의 송가』(Dai-furan shoh)를 저술했다. 1926년에는 『물의 방랑』(Mizu no ruroh)을 간행했다.
1927년 5월에는 아내 모리 미치요와 공저로 시집 『상어 가라앉다』를 간행했다. 1935년 9월에는 『문예』에 「상어」를 발표했고, 12월에는 『중앙공론』에 「등대」를 발표하는 등, 일본의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시를 점차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7년 8월에는 시집 『상어』를 발행했는데,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는 "매우 화가 났을 때나, 경멸하고 싶을 때, 누군가를 놀려주고 싶을 때 이외에는 이후 시를 짓지 않을 생각입니다"라고 썼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그의 강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는 전쟁 중에도 위장된 시를 통해 감시와 검열을 피해가며 전쟁으로 치닫는 풍조에 저항하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했다. 겉으로는 전쟁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 「만(灣)」이나 「홍수」 등도 실제로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 즉 은유, 복자, 아이러니 (반어, 풍자, 비꼼, 비아냥 등)를 담아 발표한 것이라고 본인이 자서전 『시인』에서 설명했다. 예를 들어, 「만」의 서문에 인용된 헤겔의 "영원한 평화에 안식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것은 타락에 불과할 것이다"라는 내용은 가네코 미쓰하루가 결코 생각하지 않을 정반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담아 독자들에게 반어적인 의도로 읽어달라는 "열쇠"를 제공한 것이다. 이는 "승리해야 한다는 신념의 (슬로건) 때문에 한 줄기 풀도 동원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풀까지 동원하는 어리석음, 강제에 대한 저항" 또는 "풀" 자체가 자연스럽게 자라는 자유로운 인간, 혹은 시인 자신을 의미하며, 모든 것을 강제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1948년 4월 시집 『낙하산』, 9월 시집 『나방』을 각각 발행했다. 1949년 5월에는 시집 『여인들에게 보내는 애절한 노래』, 12월에는 시집 『도깨비 아이의 노래』를 간행했다. 1952년에는 『인간의 비극』을 발표하여 1954년 제5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무자비』(1955년), 『방귀 같은 노래』(1962년), 『IL』(1965년), 『어린 잎의 노래』(1967년), 『애정 69』(1968년), 『꽃과 빈 병』(1973년)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는 『시집』(Collected Poems, 전 5권)을, 1967년에는 『전집』(Complete Poems)을 출간했다. 특히 『애정 69』는 에로스적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2.2. 수필 및 자서전적 저작
가네코 미쓰하루는 시 외에도 다수의 수필과 자서전적 저작을 통해 자신의 삶의 경험과 사상을 깊이 있게 드러냈다. 그의 산문 작품들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주요 수필 및 자서전적 저작으로는 『말레이 란인 기행』(1940년), 자서전 『시인』(1957년), 『두개골 잔』(1971년), 『잠들라 파리』(1973년), 『서동』(1974년) 등이 있다. 특히 『잠들라 파리』에서는 그가 파리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 외에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의 상세한 경험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절망의 정신사』와 『일본인의 비극』 등의 저작을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이들 작품은 고금동서의 절망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며, 그가 경험한 "메이지 백년"의 비참함과 잔혹함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2.3. 번역 활동
가네코 미쓰하루는 외국 문학, 특히 시 번역 활동을 통해 서구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번역 작품들은 일본 독자들이 서구의 사상과 예술을 접하는 통로가 되었다.
주요 번역 작품으로는 에밀 베르하렌의 『베르하렌 시집』(1925년), 『근대 프랑스 시집』(1925년), 모리스 르블랑의 『호랑이 새끼』(괴도 루팡 시리즈), 앙리 포코니에의 『말레이』, 『엠덴 최후의 날』 등이 있다. 또한 아르튀르 랭보의 『랭보 시집』과 『일뤼미나시옹』, 루이 아라공의 『아라공 시집』,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전역본, 폴 베를렌의 『플랑드르 유기』 등을 번역했다.
전후에는 야마카와 히로시의 『교토 수호직 시말』(구 아이즈번 노신 수기)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번역 활동은 그가 서구 문학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 문단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3. 예술 활동
가네코 미쓰하루는 시인으로서의 명성 외에도 화가로서 시각 예술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그림은 그의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시각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의 그림 작품으로는 먹으로 그린 「나방」, 「훈랍(인력거 그림)」, 수채화 「꽃(가제)」 등이 있다. 그는 상하이에서 풍속화 전시회를 열어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고, 싱가포르에서도 풍경 소품화전을 개최했다.
그의 화집 및 앨범으로는 『가네코 미쓰하루 자선 시화집』(1974년)과 나카바야시 다다요시의 판화와 가네코 미쓰하루의 시가 결합된 시화집 『대부란송』(1975년) 등이 있다. 특히 『대부란송』에 수록된 「알코올」과 「풀베기」 등의 시에 대해 시인 이이지마 코이치는 피터르 브뤼헐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언급했으며, 「풀베기」는 후일 『상어』(1935년) 이후의 시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라고 평가했다. 그 외에도 『가네코 미쓰하루 화첩』(1981년), 『가네코 미쓰하루 여행의 형상: 아시아·유럽 방랑 화집』(1997년) 등이 출간되어 그의 그림 세계를 조명했다.
4. 사상 및 철학
가네코 미쓰하루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삶과 문학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저항을 옹호하며, 시대의 권위와 부조리에 맞섰다.
4.1. 반전 및 반권위주의적 입장
가네코 미쓰하루는 일관되게 반전 및 반권위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굽히지 않았다. 1937년 아내 모리 미치요와 함께 중국 북부를 여행하며 일본군의 대륙 진출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이는 그의 반전 사상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쟁 중 국가의 감시와 검열이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반전 메시지를 위장하여 발표했다. 겉으로는 전쟁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들도 실제로는 아이러니와 은유를 통해 전쟁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열쇠 하나만 주면 어떤 서랍도 술술 열려 내용이 모두 드러나지만 (중략) '거품'은 일본군의 횡포를 폭로하는 것이고, '천사'는 징병에 대한 부정과 염전론이며, '문장'은 일본의 봉건적 성격을 해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정부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말살되어 마땅한 인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강력한 군의 간섭 하에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스스로도 주목했으며, 당시로서는 어떤 힘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굽힐 여지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1944년 장남 가네코 간에게 징집 영장이 떨어지자, 그는 평소 기관지염을 앓고 있던 아들을 비 오는 날 밖에 세워 병세를 더욱 악화시켜 징집 면제를 받게 했다. 이듬해 1945년에도 다시 징집 영장이 도착했으나, 진단서를 가지고 담당관과 교섭하여 징집을 연기시키고 종전을 맞이했다. 이는 국가의 강제에 불복종하고 개인의 의지를 관철시킨 그의 반권위주의적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또한 『아마노자쿠의 울분 풀이』(『반골』 또는 『자신이라는 것』에 수록)라는 에세이에서, 당시(에세이 집필 당시)의 반전 운동 속에서도 열에 들뜬 전쟁 시기와 공통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쓰며, 맹목적인 열광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 아이들아. 정말로 기쁘지 않은가.
: 서로 이 전쟁에서 태어난 것이.
: 열아홉 살 아이도
: 쉰 살 아버지도
: 똑같은 제복을 입고
: 똑같은 군가를 부르네.
4.2. 사회 및 근대화 비판
가네코 미쓰하루는 일본 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그 이면에 숨겨진 문제점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선이 가져온 비극과 잔혹함을 『절망의 정신사』와 『일본인의 비극』 등의 저작을 통해 비판했다.
그는 봉건적 성격이 강한 일본 사회의 구조, 특히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억압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그의 시와 산문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소외를 조명하며,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환경 문제 등 당대에는 잘 다루어지지 않던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며, 근대화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전쟁을 가능하게 한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파헤치려는 시도였다.
5. 개인 생활
가네코 미쓰하루의 개인 생활은 그의 문학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결혼 생활과 광범위한 여행 경험은 그의 세계관과 작품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5.1. 결혼과 가족
가네코 미쓰하루는 1924년 소설가를 지망하던 모리 미치요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모리 미치요가 임신하면서 도쿄 여자고등사범(현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을 퇴학했고, 두 사람은 금전적인 어려움 속에서 야반도주하며 생활했다. 무로 사이세이의 중매로 결혼했으며, 1925년 3월에는 장남 모리 간이 태어났다. 그는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1926년과 1927년에는 부부가 몇 개월씩 상하이에 머물며 루쉰 등과 친분을 쌓았다. 특히 1927년에는 구니키다 도라오 부부와 상하이에 가서 3개월 정도 머물렀고, 요코미쓰 리이치와도 합류하여 교류를 깊게 했다. 이 시기에 아내 모리 미치요가 미술평론가 히지카타 데이이치와 연애 관계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부터 그는 아내와 애인을 떼어 놓기 위해 그녀가 동경하던 유럽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일본에서의 생활은 막다른 곳까지 몰려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위험한 이번 여행에 몸을 맡기게 되어버렸다"고 회고했다. 이후 부부는 유럽을 떠돌며 액자 만들기, 보따리상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전후에는 시인 지망생 오오코우치 레이코와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모리 미치요와 이혼과 복연을 반복하는 복잡한 관계를 이어갔다. 모리 미치요는 관절 류마티스에 걸려 고통받기도 했다.
5.2. 여행과 개인적 경험
가네코 미쓰하루의 삶에서 광범위한 여행 경험은 그의 작품과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한 유람이 아닌, 생계를 위한 고된 방랑을 통해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직접 목격하고 깊이 성찰했다.
1917년 12월, 그는 양부의 친구와 함께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리버풀을 거쳐 런던, 벨기에 브뤼셀을 여행하며 1년 반 동안 서양 미술을 접하고 사색의 시간을 보냈다. 브뤼셀에서는 친일파인 이반 르파주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서양 미술과 에밀 베르하렌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0년 5월 브뤼셀을 떠나 파리로 옮겼고, 1921년 1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1928년 9월에는 아내 모리 미치요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을 다시 여행하기 시작했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오사카에 머물렀고, 이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갔다(상하이에는 5개월간 체류). 상하이에서는 풍속화 전시회를 열어 여행 경비를 조달했고, 홍콩을 경유하여 싱가포르에서도 풍경 소품화전을 열어 자카르타, 자와섬을 여행했다. 11월까지 파리까지의 1인 여행 경비가 모였고, 아내 모리 미치요를 먼저 파리로 떠나보낸 뒤 자신은 1930년 1월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아내와 재회했다. 파리에서는 액자 제작, 여행객 짐꾼, 행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무일푼의 일본인이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자서전 『잠들라 파리』에서 그는 매춘 외에는 모든 일을 했다고 상세히 묘사했다.
1931년에는 브뤼셀의 르파주에게 몸을 의탁했고, 일본화 전시회를 열어 여행비를 벌었다. 아내를 남겨두고 싱가포르, 그리고 4개월간 말레이 반도를 여행했다. 아내 모리 미치요는 1932년 4월 홀로 귀국했고, 가네코 미쓰하루도 6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실모의 권유로 여동생 가와노 스테코가 경영하던 화장품 회사의 선전 부서에서 근무하며 세안제 상표로 '몽코코'(귀여운 아가씨)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야마노쿠치 바쿠와의 교우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여행 경험은 그에게 "무국적자의 시야"를 제공했으며, 유럽의 식민지가 된 아시아 국가들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며 사회적 연대 의식과 국제적 시각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여행을 통해 얻은 풍경, 인물 묘사, 그리고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 전중과 패전 후의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6. 죽음
가네코 미쓰하루는 1975년 4월에 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30일 오전 11시 30분, 기관지 천식에 의한 급성 심부전으로 무사시노시 기치조지 혼초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7월 5일 센니치다니 회당에서 치러졌다.
7. 평가 및 영향
가네코 미쓰하루는 생전에도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으며, 사후에도 그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비판적 시각과 평화주의적 메시지는 특히 사회 운동과 문화 전반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7.1. 수상 및 인정
가네코 미쓰하루는 그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1954년 1월에는 시집 『인간의 비극』으로 제5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 3월에는 『풍류 시해기』로 예술선장 문부대신상을 수상했다.
7.2. 비평적 평가
가네코 미쓰하루는 일반적으로 날카로운 자기 비판과 현실 비판, 저항, 그리고 반골 정신을 가진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전쟁 중에도 위장된 형태로 감시와 검열을 뚫고 저항적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법과 의도를 이해하지 않고 표면적인 내용만을 보고 전쟁 협력 시로 단정하는 것은 시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라는 비판적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작품은 영국, 벨기에, 파리, 상하이, 아시아, 유럽을 방랑하며 얻은 풍경과 인물 묘사, 그리고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 전중과 패전 후의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또한 『애정 69』와 같이 에로스를 그린 작품들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만년에는 텔레비전 출연과 대담을 많이 했으며, 그의 독특한 성격이 젊은이들에게 알려져 "에로 할아버지" 캐릭터로 젊은 세대 사이에서 교조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7.3. 사후 출판물
가네코 미쓰하루 사후에도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다수의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1975년 2월부터는 『가네코 미쓰하루 전집』(전 15권, 주오코론샤)이 간행되기 시작하여 1977년 1월까지 이어졌다.
주요 사후 출판물로는 『가네코 미쓰하루 시집』(시초샤 현대시문고, 신판 2008년), 『풍류 시해기』(고단샤 문예문고, 1990년), 기요오카 다쿠교 편 『가네코 미쓰하루 시집』(이와나미 문고, 1991년), 『여인들에게 보내는 애절한 노래: 가네코 미쓰하루 시집』(슈에이샤 문고, 1992년), 『시인 가네코 미쓰하루 자전』(고단샤 문예문고, 1994년), 가와무라 분이치로 편 『가네코 미쓰하루 초: 시와 산문으로 보는 시인상』(도잔보 백과문고, 1995년), 『절망의 정신사』(고단샤 문예문고, 1996년), 『인간의 비극』(고단샤 문예문고, 1997년), 『여인들에게 보내는 애절한 노래』(고단샤 문예문고, 1998년), 『사람이여, 너그러워져라』(주오코론 문고, 2003년), 『두개골 잔』(주오코론 문고, 개정판 2004년), 『말레이 란인 기행』(주오코론 문고, 개정판 2004년), 『기면 선다』(주오코론 문고, 2004년), 『잠들라 파리』(주오코론 문고, 개정판 2005년) 등이 있다.
또한 『유랑』 가네코 미쓰하루 에세이 컬렉션 전 3권 중 『이단』, 『반골』(오바 가요로 편, 지쿠마 문고, 2006년)이 출간되었다. 『서동』(주오코론 문고, 개정판 2007년), 『세계 구경거리 총정리』(주오코론 문고, 2008년), 모리 미치요/모리 간과 공저 『시집 「세 사람」』(고단샤, 2008년/고단샤 문예문고, 2019년), 『가네코 미쓰하루 지쿠마 일본 문학 038』(지쿠마 쇼보, 2009년), 『자유에 대하여: 가네코 미쓰하루 노년 수필』(주오코론 문고, 2016년), 『자신이라는 것: 가네코 미쓰하루 노년 수필』(주오코론 문고, 2016년), 『말레이의 감상: 가네코 미쓰하루 초기 기행 유실』(주오코론 문고, 2017년), 모리 미치요와 공저 『짝』(주오코론 문고, 2021년), 『시인/인간의 비극: 가네코 미쓰하루 자전적 작품집』(지쿠마 문고, 2023년) 등도 있다.
자료 문헌으로는 『가네코 미쓰하루 신장판 현대시 독본 3』(시초샤, 1985년), 『아시아 무전 여행』(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1998년), 『가네코 미쓰하루 21세기의 일본인에게』(쇼분샤, 1999년), 『가네코 미쓰하루·초고 시집 IL(일) 〈자필 노트〉 복각』(가네코 미쓰하루의 모임, 2010년), 『노장미원』(우유 쇼린, 2015년) 등이 있다. 또한 사쿠라이 시게토의 구술 기록 『금화흑장미초지』(슈에이샤, 1975년/쇼가쿠칸 문고, 2002년), 모리 간의 『아버지 가네코 미쓰하루 전: 밤의 끝으로의 여행』(쇼시 야마다, 2002년), 가시와쿠라 야스오의 『오늘밤은 얼마나 꿈 같은 밤: 가네코 미쓰하루와 모리 미치요』(사유샤, 2018년), 『가네코 미쓰하루를 여행하다』(주오코론 문고, 2021년) 등 그의 삶과 작품을 다룬 연구서들도 활발히 출간되었다.
8. 영향력
가네코 미쓰하루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 예술가, 특히 포크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대중의 인식 변화에도 기여했다.
8.1. 포크 음악에 대한 영향
가네코 미쓰하루는 일본의 포크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는 종종 노래 가사로 사용되거나, 그의 정신이 음악적 메시지에 반영되었다.
- 다카다 와타루는 그의 시를 바탕으로 한 노래 「69」를 불렀다.
- 히가시노 히토시는 가네코 미쓰하루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는 당한다」라는 곡을 발표했다.
- 도모베 마사토는 그의 시 「엽서」를 노래로 만들었다.
만년에는 텔레비전 출연과 대담을 많이 했으며, 그 일부가 『가네코 미쓰하루 게타바키 대담』으로 출간되었다. 호리키 마사미치의 회고록 『가네코 미쓰하루와 보낸 시간』(겐다이 쇼칸)도 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또한 가네코 미쓰하루와 34세 연하 여성의 30년에 걸친 애인 관계를 다룬 에모리 요시히로의 논픽션 『가네코 미쓰하루의 러브레터』를 원작으로 한 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러브레터』(1981년)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는 전후에도 야마카와 히로시의 『교토 수호직 시말』을 번역하고, 『일본인의 비극』, 『절망의 정신사』 등을 저술하며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이는 그의 사상이 단순히 문학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