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격동의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정부의 주요 관료로 활동하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그의 생애는 존황양이 사상에 대한 경도, 도사 근왕당 활동, 그리고 메이지 정부에서의 황실 중심적 정치 활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1.1. 출생 및 초기 배경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1833년 11월 23일(덴포 4년 음력 10월 12일) 도사 번의 고시(郷士)이자 200석 규모의 사무라이였던 히지카타 히사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大一郎다이이치로일본어였고, 통칭은 楠左衛門구스노키자에몬일본어, 아호는 秦山신잔일본어이었다. 그의 생가는 현재 고치현 고치시 기타진센지 692번지에 위치해 있다.
1.2. 막부 말기 활동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 존황양이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도사 근왕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메이지 유신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1.2.1. 에도 유학 및 사상 형성
안세이 4년(1857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도사 번의 명으로 에도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유학자인 오하시 도쓰안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고, 이 과정에서 존황양이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또한 그는 구보타 기요네의 수제자였던 병학자 와카야마 보쓰도로부터 야마가류 군학을 배우며 군사적 지식도 습득했다.
1.2.2. 도사 근왕당 참여 및 교토 활동
에도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도사국으로 돌아온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다케치 즈이잔 등이 결성한 도사 근왕당에 참여했다. 분큐 3년(1863년) 이후에는 번의 명을 받아 교토로 상경하여 존황양이파의 거점이었던 조슈 번을 비롯한 여러 번의 근왕파 지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곧 과격파 공가인 산조 사네토미의 신임을 얻어 학습원 출사를 명받았으나, 같은 해 발생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산조 일파가 실각하고 교토에서 추방되자, '7경 낙향'에 동참하여 산조 사네토미, 사와 노부요시 등과 함께 조슈국으로 피신했다.
1.2.3. 망명 및 사카모토 료마 등과의 연계
에도 막부에 의한 제1차 조슈 정벌이 시작되자,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산조 사네토미 일행과 함께 규슈의 후쿠오카 번으로 건너가 다자이후에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도사 번 출신의 나카오카 신타로, 다나카 미쓰아키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 등과 연계하여 삿초 동맹의 중개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바칸(현재의 시모노세키시)에서 기도 다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담을 주선하려 했으나, 연락 착오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했다. 7경 낙향부터 메이지 원년(1868년)에 이르는 히지카타의 활동은 그가 직접 쓴 일기인 『회천실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3. 메이지 정부에서의 활동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신정부에 참여하여 다양한 중앙 관료직을 역임하며 황실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에 기여했다.
1.3.1. 중앙 관료로서의 경력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진 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신정부에 봉직하여 메이지 원년(1868년)에 도쿄부 판사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진정부 변사(鎮将府弁事)를 지냈다. 이후 그는 궁내성의 궁내소보(宮内少輔), 내무성의 내무대보(内務大輔), 태정관의 내각서기관장(内閣書記官長) 등을 역임하며 중앙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3.2. 황실 관련 직책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황실과 관련된 직책을 많이 수행했다. 그는 시보(侍補), 궁중고문관(宮中顧問官), 원로원 의관(議官) 등을 역임했다. 그는 모토다 나가자네, 사사키 다카유키, 요시이 도모자네 등과 함께 황권 신장(천황 친정)을 주창하며 궁중 보수파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았다. 천황 친정 운동은 1881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종식되었으나, 1884년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화족의 자작 작위를 받았다.
1.4. 내각 대신으로서의 활동
내각 제도가 발족된 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내각 대신으로 입각하여 주요 부처의 수장으로 활동하며 국가 운영에 참여했다.
1.4.1. 농상무대신
1885년 내각 제도 발족에 맞춰,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제1차 이토 내각에서 농상무대신으로 입각했다. 그는 1887년 7월 26일부터 같은 해 9월 17일까지 제2대 농상무대신으로 재직했다.
1.4.2. 궁내대신
농상무대신직을 마친 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1887년 9월 6일 궁내대신으로 전보되어 1898년 2월 9일까지 약 11년간 이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황실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메이지 천황을 보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 정치 철학 및 주장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황실의 권한 확대를 주장하는 궁중 보수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이러한 정치적 신념을 강하게 피력했다.
1.5.1. 헌법 제정 과정에서의 역할
1888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대일본제국 헌법 심의를 위해 설치된 추밀원의 추밀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정파(천황 친정파)의 일원으로서 입헌군주제 확립을 위해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이토 히로부미 등과 논쟁하며 황권 확장을 옹호했다. 헌법 제정 이후에도 그는 1889년의 요시히토 친왕(훗날의 다이쇼 천황) 입태자례, 이듬해인 1890년의 제국의회 발족, 1894년부터 시작된 청일 전쟁 등 주요 국가적 사건들에 있어 메이지 천황을 보좌하는 궁내대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95년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1898년에 궁내대신직에서 사임하고 다나카 미쓰아키에게 자리를 넘겼다.
2. 작위 및 훈장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작위와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외국 정부로부터도 훈장을 받았다.
구분 | 내용 | 수여일 |
---|---|---|
위계 | 정사위 | 1885년 10월 1일 |
종삼위 | 1886년 10월 20일 | |
정2위 | 1896년 10월 10일 | |
종1위 | 1918년 11월 4일 | |
작위 | 자작 | 1884년 7월 17일 |
백작 | 1895년 10월 7일 | |
훈장 및 기념장 | 훈1등 욱일대수장 | 1887년 10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889년 11월 25일 | |
은제 황수포장 | 1890년 1월 21일 |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1903년 7월 16일 | |
대례 기념장 | 1915년 11월 10일 |
- 외국 훈장**
- 이탈리아 왕국: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그랜드 오피셜 (1886년 10월 1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훈장 다스코무트울크로이츠미츠토데무스테르코알레르헤히스티레프란츠조제프 훈장 (1886년 10월 18일)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북극성 제1등 훈장 (1886년 10월 18일)
- 덴마크 왕국: 단네브로 훈장 코만도르 프레미에르클라스 (1886년 10월 18일)
- 태국: 왕관 제1등 훈장 (1891년 5월 7일)
- 오스만 제국: 미지지에 제1등 훈장 (1891년 6월 1일)
- 하와이 왕국: 로열 칼라카우아 훈장 제1등 훈장 (1892년 7월 26일)
- 세르비아 왕국: 타코보 십자 훈장 제1등 훈장 (1895년 10월 14일)
3. 만년 및 교육 활동
궁내대신직에서 물러난 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제실제도조사국 부총재(이후 총재), 황전강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그는 교육 관련 업무에 전념하며 성덕 강화(聖徳講話) 등을 통해 국민 교화에 힘썼다. 특히 그는 고쿠가쿠인 대학 학장과 도쿄 여학관장 등을 맡아 교육계에 헌신했다. 메이지 천황이 붕어하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자, 그는 임시 제실 편수국 총재직을 맡아 『메이지 천황기』 편찬에 주력했다.
4. 저술 및 저작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여러 저서와 기록물을 남겼으며, 이는 그의 사상과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단독 저서**
- 『欧米游草오베이 유소일본어』 (1888년)
- 『回天実記회천실기일본어』 (상하권, 1900년)
- 『天皇及偉人を祀れる神社천황 및 위인을 모신 신사일본어』 (안하라 기요스케, 사에키 쓰네마로 공저, 1912년)
- 『明治天皇聖徳録메이지 천황 성덕록일본어』 (1913년)
- 『明治のみかど메이지의 미카도일본어』 (다무라 도라조, 마스야마 겐고 작곡, 1913년)
- 『秦山遺稿신잔 유고일본어』 (상하권, 1919년)
- 『土方久元日記 明治十四年히지카타 히사모토 일기 메이지 14년일본어』 (사이토 노부로 편, 2017년)
- 공동 저서**
- 『日本国民訓일본 국민 훈일본어』 (이토 스케유키 공저, 1913년)
5. 가족 관계
히지카타 히사모토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부친**: 히지카타 히사요(土方久用, 1809년~1890년)는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가신이었다.
- 여동생**: 다마코(玉子)는 히가시쿠제 미치토미의 둘째 아들인 히가시쿠제 미치토시의 아내였으나, 자녀의 가정교사로 고용한 대학생(출치감 사건으로 활약하며 경시청 경시로 승진한 신주쿠서 모리타 경부의 아들)과 불륜이 발각되어 이혼하고 빚 문제로 전 남편에게 고소당했다.
- 장남**: 히지카타 히사아키(土方久明, 1862년~1898년)는 군인이었다. 10대에 히지카타 가의 하녀 야노(矢野)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야노는 출산 후 사망했다. 히사아키는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독일 육군 중위가 되었고, 일본 육군의 요청으로 28세에 귀국했다. 일본 육군 대위가 되어 재혼했으나, 장남이 태어난 지 3개월 후 36세의 나이로 권총 자살했다. 유족에 따르면, 일본을 방문한 외국 황태자의 열병식에 동료의 거짓말 때문에 평복으로 참석했다가 다른 부대는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고, 평복을 입은 히사아키의 부대는 입장이 저지되자 그날 밤 자살했다고 한다.
- 히사아키의 장녀**: 아야코(綾子, 1882년~1959년)는 전처(하녀 야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노는 술 도매상 다나카 분시치로의 딸로, 예절 교육을 겸해 히지카타 가의 하녀로 들어왔다가 18세의 히사아키와의 사이에서 아야코를 낳고 출산 후 사망했다. 아야코는 17세에 다나카 긴노스케에게 시집갔으나 남편에게 애첩과 자녀가 있었고, 아야코 또한 마쓰모토 고시로 7세와 염문을 뿌리며 26세에 이혼했다. 히지카타 가로 돌아왔으나 의절당했고, 야노 사다유키의 양녀가 되어 오이시 시게미와 재혼했다.
- 히사아키의 장남**: 히사타카(久敬, 별명 요시)는 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작위를 계승했으나, 연출가의 길을 걸어 신극 운동에 열중했고 결국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쇼와 9년(1934년)에 작위를 박탈당했다. 그의 아내 우메코는 미시마 야타로 자작의 둘째 딸로, 미시마 쓰네노리 자작과 시조 다카우타게 후작의 손녀였다.
- 양녀**: 하루코(春子, 1856년~1908년)는 약품 상인 나카이 고마의 딸이었다. 그녀는 교토 기온의 전직 마이코였으며, 화족에게 시집가기 위해 신분 조정을 위해 히지카타의 양녀가 되었다. 그녀는 시조 다카우타게 후작의 후처가 되었고, 후작에게는 이미 처자식이 있었으나 이혼하고 하루코와 재혼하여 장남 시조 다카아이와 장녀 가네코를 낳았다. 가네코는 미시마 야타로와 결혼했고, 그들의 딸 우메코가 히지카타의 손자 히지카타 요시의 아내가 되었다.
- 조카**: 히지카타 히사카쓰(土方久功)는 그의 남동생의 아들로, 조각가이자 민속학자가 되었다.
6. 사생활 및 거주지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고치현 고치시 기타진센지 692번지에 생가가 있었으며, 도쿄 고이시카와구 하야시초(현 분쿄구 센고쿠 2초메)에 양관과 화관이 있는 저택을 소유했다.


그가 궁내대신 시절에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다. 이 저택의 지하 창고는 연극을 하던 손자 히사타카(요시)의 요청으로 모형 무대 연구소로 개조되어, 연극 관계자들의 숨겨진 사교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현재 저택 터에는 1893년 천황의 히지카타 저택 방문을 기념하는 '메이지 천황 행차 기념비 구 히지카타 히사모토 저택' 비석이 세워져 있다.
7. 사망 및 평가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메이지 시대의 중요한 정치인이자 황실의 핵심 조력자로서, 그의 사망은 한 시대의 마감을 알렸으며, 그의 생애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의 황권과 입헌 정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7.1. 사망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1918년 11월 4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그의 묘소는 도쿄의 소메이 묘지(현 소메이 영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남긴 일기 『회천실기』는 7경 낙향부터 메이지 원년(1868년)에 이르는 그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7.2. 평가 및 유산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주요 관료로서 특히 궁중 관련 직책을 많이 역임하며 황실에 대한 깊은 신뢰를 얻었다. 그는 모토다 나가자네, 사사키 다카유키, 요시이 도모자네 등과 함께 황권 신장(천황 친정)을 주창하는 궁중 보수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신념은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 입헌군주제 확립을 위해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 등과 대립하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천황 친정 운동이 1881년에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궁내대신으로서 메이지 천황을 보좌하며 황실의 안정과 권위 유지에 기여했다. 그의 활동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황실이 차지하는 역할과 보수적 이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만년에 교육 활동에 헌신하고 『메이지 천황기』 편찬에 참여한 것은 그의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8. 관련 인물 및 사안
- 산조 사네토미
- 사카모토 료마
- 삿초 동맹
- 오구리 다다마사: 에도성 함락 후 오구리의 저택을 접수하여 이주했으며, 그의 전기에 오구리에 대한 언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