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휴이 앰브로스 제닝스(Hugh Ambrose Jennings, 1869년 4월 2일 ~ 1928년 2월 1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약한 미국의 저명한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로서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내셔널 리그 3연패를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896년에는 타율 .401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제닝스는 또한 한 시즌 51개, 통산 287개의 몸에 맞는 공이라는 메이저 리그 기록을 보유할 정도로 대담하고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로 유명했다.
선수 생활 중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며 학업을 병행했던 그는, 이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아 1907년부터 1909년까지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3루 코치 박스에서 보여준 "Ee-Yah!"라는 독특한 외침과 익살스러운 행동은 그의 상징이 되었다.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고생했으나, 194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로서 헌액되며 그의 위대한 업적이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제닝스는 그의 뛰어난 기량, 독특한 개성, 그리고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후대 야구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휴이 제닝스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탄광에서 일했으며, 세미프로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2.1. 출생 및 가족
휴이 앰브로스 제닝스는 1869년 4월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일랜드 이민자였던 제임스와 노라 제닝스 부부의 아들이며, 그의 부모님은 1851년에 피츠턴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2.2.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어린 시절 제닝스는 지역 무연탄 탄광에서 파쇄공(석탄과 슬레이트를 분리하는 어린 소년)으로 일했다. 1890년,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턴의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유격수로 활약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91년, 그는 당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루이빌 커늘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892년 커늘스가 내셔널 리그에 합류했을 때도 그는 팀에 남아 있었으며, 1893년 6월 7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
휴이 제닝스는 선수로서 뛰어난 활약과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로 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3.1.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제닝스는 오리올스에서 7시즌의 일부를 뛰며 볼티모어 시절 동안 스타 선수로 발돋움했다. 1894년, 1895년, 1896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 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팀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감독 네드 핸런과 함께 6명의 훗날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1루수 댄 브루서스, 2루수 존 맥그로, 유격수 제닝스, 포수 윌버트 로빈슨, 우익수 윌리 킬러, 그리고 좌익수 조 켈리였다. 이 모든 위대한 선수들 사이에서, 제닝스는 오리올스에서의 첫 풀 시즌이었던 1894년에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오리올스의 우승 전성기 동안, 제닝스는 메이저 리그 유격수로서 최고의 시즌들을 보냈다. 1895년, 그는 타율 .386을 기록하고, 159개의 득점을 올렸으며, 204개의 안타를 쳤고, 125개의 타점을 기록했으며, 53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1896년에는 그의 활약이 더욱 빛났다. 그는 타율 .401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209개의 안타, 121개의 타점, 70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불같은 성격의 제닝스는 또한 당대 가장 두려움 없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출루를 위해 다른 어떤 선수보다도 기꺼이 몸에 맞는 공을 감수했다. 한 경기에서는 세 번이나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기도 했다. 1896년에는 무려 51번이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메이저 리그 단일 시즌 기록이다. 1894년부터 1898년까지 오리올스에서 단 5시즌 동안, 제닝스는 전례 없는 202번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했다. 한 경기에서는 애머스 루시의 투구에 머리를 맞았으나, 투혼을 발휘하여 경기를 끝마쳤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쓰러져 사흘 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
제닝스는 또한 그 시대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수비율과 척살 부문에서 각각 세 차례나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537개의 보살과 425개의 척살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425개 척살 기록은 도니 부시와 함께 유격수 단일 시즌 최다 기록과 동률이다. 1895년에는 그의 경력 최고 레인지 팩터인 6.73을 기록했는데, 이는 그해 유격수들의 리그 평균(5.54)보다 1.19포인트 높은 수치였다. 그는 한때 한 경기에서 20번의 수비 기회를 모두 처리했으며, 다른 경기에서는 10개의 보살을 기록하기도 했다. 1898년, 그는 팔을 다쳐 유격수로서의 경력이 사실상 끝났고, 이후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했다.
3.2. 브루클린 수퍼바스 및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1899년, 네드 핸런 감독이 브루클린 수퍼바스로 옮겨가자, 제닝스를 비롯해 조 켈리, 윌리 킬러 등 그의 여러 스타 선수들도 함께 팀을 옮겼다. 1898년 팔 부상 이후 제닝스는 이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1899년과 1900년 브루클린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899년 시즌 중에는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1901년, 제닝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되었다. 그러나 그의 약해진 팔은 그의 선수 경력을 단축시켰고, 필리스에서 두 시즌 동안 82경기 이상 출전하거나 타율 .272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제닝스는 1903년 수퍼바스에서 6경기를 뛰면서 사실상 선수 경력을 마감했다. 다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 재임 기간 중 9번의 타수를 기록한 예외가 있었다.
3.3. 주요 선수 기록 및 특징
휴이 제닝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에 여러 독보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1896년에 한 시즌 최다인 51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 또한 통산 287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여 이 부문에서도 역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는 크레이그 비지오가 285개로 현대 야구 기록을 보유하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수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 유격수로서 한 시즌 최다 척살 기록인 425개를 달성하여 도니 부시와 함께 역대 공동 1위에 올랐다.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수비율과 척살 부문에서 각각 세 차례나 리그 1위를 차지했다. 한 경기에서 20번의 수비 기회를 처리하거나, 다른 경기에서는 10개의 보살을 기록하는 등 그의 수비 범위와 정확성은 탁월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그의 대담하고 두려움 없는 플레이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그는 출루를 위해 몸에 맞는 공을 기꺼이 감수했으며, 경기 중 머리에 공을 맞고도 경기를 마치는 투혼을 보여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선수였다.
4. 교육 및 법률 활동
휴이 제닝스는 야구 경력과 병행하여 학업과 법률 활동에도 전념하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1890년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 제닝스와 그의 동료 존 맥그로는 함께 세인트보나벤처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다. 1899년 시즌이 끝난 후, 제닝스는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코넬 대학교 야구팀의 감독을 맡았으며,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이 감독직에 매우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코넬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Phi Delta Theta 형제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제닝스는 1904년 봄, 오리올스의 감독을 맡기 위해 캠퍼스를 일찍 떠날 때까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학자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비록 코넬에서 법학 학위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는 1905년 메릴랜드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제닝스는 볼티모어와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야구 경력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비시즌에는 꾸준히 법률 업무를 병행했다.
5. 지도자 경력
휴이 제닝스는 선수로서의 명성만큼이나 독특하고 성공적인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5.1.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1907년, 제닝스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타이 코브와 샘 크로포드를 포함한 재능 있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타이거스를 1907년, 1908년, 1909년 세 시즌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제닝스의 팀은 1907년과 1908년 월드 시리즈에서 "팅커 투 에버스 투 찬스"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에게 패했고, 1909년 시리즈에서는 호너스 와그너의 피츠버그 파이리츠에게 패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했다. 제닝스는 이후 1920년 시즌까지 타이거스 감독직을 이어갔지만, 더 이상 페넌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디트로이트 감독 시절, 제닝스는 주로 3루 코치 박스에서 보여준 독특한 행동으로 유명해졌다. 여기에는 "Ee-Yah!"라는 외침을 비롯해 다양한 환호성, 휘파람, 경적 소리, 몸을 비트는 동작, 춤, 잔디 뽑기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Ee-Yah!"라는 외침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머리 위로 양팔을 흔들고 오른쪽 무릎을 날카롭게 들어 올리는 동작과 함께 사용되었다. 1907년에는 주석 휘파람으로 상대 팀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Ee-Yah!"라는 외침은 계속되었고, 제닝스가 '휴이 "Ee-Yah" 제닝스'로 불릴 정도로 상징적인 행동이 되었으며, 타이거스 팬들은 그가 경기장에 나타나면 똑같이 "Ee-Yah!"라고 외치곤 했다.
이러한 익살스러운 행동 뒤에는 뛰어난 코칭 능력이 숨어 있었다. 명장 코니 맥은 제닝스를 존 맥그로, 조 매카시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명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디트로이트 시절 그의 가장 큰 도전이자 성과 중 하나는 다루기 힘들었던 타이 코브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제닝스는 코브의 재능과 복잡한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코브를 그의 본성대로 자유롭게 두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결론 내렸다. 제닝스는 어느 날 코브를 따로 불러 "야구에 대해 내가 너에게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의 발전에 방해만 될 뿐이다. 너는 그저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네 판단을 사용해라... 네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로 해라, 나는 너를 지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12년, 타이 코브의 정지에 항의하기 위해 정규 팀 선수들이 파업에 돌입하여 임시 선수들이 타이거스 경기에 출전했을 때, 제닝스는 자신의 코치들을 대리 선수로 내보내는 한편, 자신도 한 번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심판이 누구를 대신하여 타석에 섰느냐고 묻자 제닝스는 "당신이 알 바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심판은 그의 라인업 시트에 "제닝스 - 운동 삼아 타석에 들어섰음"이라고 기록했다.
제닝스는 성급하고 고집이 세며 화려하고 심지어 괴짜 같았지만, 항상 정직하게 경기에 임했다고 주장했다. 제닝스가 감독으로 있던 시절인 1919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간의 경기를 타이 코브와 트리스 스피커가 조작했는지에 대한 스캔들이 1926년에 불거졌을 때, 제닝스는 처음에는 경기 조작이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언급하며 해당 경기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를 했다. 그러나 그의 "노 코멘트"가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자, 제닝스는 1926년 12월 언론에 해당 문제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부인하며 "나의 야구 경력 35년은 깨끗했다... 야구에서 내가 한 모든 일은 언제든 누구 앞에 가서 나의 입장을 밝힐 준비가 되어 있는 성격이었다"고 덧붙였다. 1920년 시즌 이후, 제닝스는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1,131승은 1992년 스파키 앤더슨이 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타이거스 역사상 최다 승리 기록이었다.
5.2. 뉴욕 자이언츠 시절
1921년, 제닝스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존 맥그로와 함께 코치로 계약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팀 동료로 만난 제닝스와 맥그로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제닝스는 맥그로의 결혼식에서 신랑 들러리를 섰고, 1899년 맥그로의 23세 아내가 사망했을 때 운구자 중 한 명이었다. 맥그로와 제닝스는 매년 자신들의 생일에 재회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제닝스는 코치로서 1921년과 1922년 두 차례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맥그로가 병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제닝스는 1924년과 1925년 일부 기간 동안 자이언츠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그의 통산 감독 기록은 1,184승 995패였다.
5.3. 지도자 기록
다음은 휴이 제닝스의 정규 시즌 및 포스트시즌 감독 기록이다.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DET | 1907 | 153 | 92 | 58 | .613 | 1위 | 0 | 4 | .000 | 월드 시리즈 패 (시카고 컵스) |
DET | 1908 | 154 | 90 | 63 | .588 | 1위 | 1 | 4 | .200 | 월드 시리즈 패 (시카고 컵스) |
DET | 1909 | 158 | 98 | 54 | .645 | 1위 | 3 | 4 | .429 | 월드 시리즈 패 (피츠버그 파이리츠) |
DET | 1910 | 155 | 86 | 68 | .558 | 3위 | - | - | - | |
DET | 1911 | 154 | 89 | 65 | .578 | 2위 | - | - | - | |
DET | 1912 | 154 | 69 | 84 | .451 | 6위 | - | - | - | |
DET | 1913 | 153 | 66 | 87 | .431 | 6위 | - | - | - | |
DET | 1914 | 157 | 80 | 73 | .523 | 4위 | - | - | - | |
DET | 1915 | 156 | 100 | 54 | .649 | 2위 | - | - | - | |
DET | 1916 | 155 | 87 | 67 | .565 | 3위 | - | - | - | |
DET | 1917 | 154 | 78 | 75 | .510 | 4위 | - | - | - | |
DET | 1918 | 128 | 55 | 71 | .437 | 7위 | - | - | - | |
DET | 1919 | 140 | 80 | 60 | .571 | 4위 | - | - | - | |
DET | 1920 | 155 | 61 | 93 | .396 | 7위 | - | - | - | |
디트로이트 총계 | 2103 | 1131 | 972 | .538 | 4 | 12 | .250 | |||
NYG | 1924 | 44 | 32 | 12 | .727 | 임시 | - | - | - | 5월 21일 ~ 7월 6일 |
NYG | 1925 | 32 | 21 | 11 | .656 | 임시 | - | - | - | 5월 4일 ~ 6월 8일 |
뉴욕 총계 | 76 | 53 | 23 | .697 | 0 | 0 | .000 | |||
통산 총계 | 2179 | 1184 | 995 | .543 | 4 | 12 | .250 |
6. 개인적인 삶과 건강 문제
휴이 제닝스의 사생활과 그의 생애를 괴롭혔던 여러 사고 및 건강 문제는 다음과 같다.
6.1. 비극적인 사고와 건강 악화
휴이 제닝스의 삶은 여러 비극적인 사고로 점철되어 있었다. 선수 시절 필라델피아에서 몸에 맞는 공으로 머리를 맞고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던 사건이 있었다. 코넬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밤, 물이 비워진 수영장에 머리부터 다이빙하여 두개골이 골절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1911년 12월에는 비시즌 중 발생한 자동차 사고로 죽음에 이를 뻔했다. 팬들이 선물한 차를 운전하던 중, 스크랜턴 남동쪽으로 37015 m (23 mile) 떨어진 굴즈보로 근처 리하이강 다리를 건너다 차가 전복되었다. 이 사고로 제닝스는 다시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뇌진탕을 겪었으며, 양쪽 다리와 왼쪽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 후 며칠 동안 의사들은 제닝스가 생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러한 신체적 학대와 머리 부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25년 시즌 동안 존 맥그로 감독이 병으로 자리를 비우자, 제닝스가 자이언츠의 전권을 맡게 되었다. 팀은 2위로 시즌을 마쳤고, 시즌 종료 후 그에게 쌓인 스트레스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졌다. 그의 사망 기사에 따르면, 제닝스는 이러한 건강 문제로 인해 1926년 봄 훈련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 위치한 윈야 요양소로 요양을 떠났다가, 스크랜턴의 집으로 돌아와 포코노 산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회복하며 보냈다.
6.2. 사망
휴이 제닝스는 1928년 2월 1일,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바인 스트리트 530번지에 위치한 자택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척수성 수막염이었으며, 결핵이 기여 요인으로 작용했다.
7. 유산 및 평가
휴이 제닝스는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 야구인들에게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7.1. 명예의 전당 헌액
휴이 제닝스는 194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선수로서 사후 헌액되었다. 이는 그가 야구계에 남긴 지대한 공헌과 뛰어난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7.2. 평가 및 영향
제닝스는 선수 시절의 강렬하고 두려움 없는 플레이 스타일과 더불어, 감독으로서의 독특한 리더십으로 야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코니 맥과 같은 당대 최고의 명장들은 그를 존 맥그로, 조 매카시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세 명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그의 지도력은 특히 타이 코브와 같은 다루기 힘든 스타 선수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례에서 빛을 발했다. 제닝스는 코브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최고의 기량을 끌어냈다. 또한 3루 코치 박스에서 보여준 "Ee-Yah!"라는 외침과 익살스러운 행동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팬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으며, 그의 개성 넘치는 리더십은 후대 야구인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1920년 시즌을 끝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1,131승을 기록하며, 1992년 스파키 앤더슨이 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타이거스 역사상 최다 승리 감독으로 남아있었다. 그의 업적은 야구의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