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혼인보 슈사쿠(本因坊秀策Hon'inbō Shūsaku일본어, 1829년 6월 6일 ~ 1862년 9월 3일)는 에도 시대의 저명한 바둑 기사이다. 본명은 구와바라 도라지로(桑原虎次郎Kuwabara Torajirō일본어)이며, 야스다 에이사이(安田栄斎Yasuda Eisai일본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연례 어성전(御城碁)에서 19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무패 기록을 세워 '무적의 슈사쿠'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오타 유조와의 삼십번기(三十番碁)와 독창적인 슈사쿠류 포석(秀策流布石)으로도 유명하다. 사후에는 혼인보 도사쿠와 혼인보 조와와 함께 '바둑 성인'(棋聖)으로 추앙받으며, 1847년 또는 1848년부터 1862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스승인 혼인보 슈와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기사로 평가받았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콜레라로 사망했지만, 그의 기풍과 전략은 후대 바둑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만화 《히카루의 바둑》을 통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및 배경
혼인보 슈사쿠는 에도 시대 중기에 일본 바둑계의 정점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혼인보 가문에 입문하여 프로 기사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은 그의 비범한 재능과 노력을 보여준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슈사쿠는 1829년 6월 6일, 히로시마현 오노미치시 인노시마(因島Innoshima일본어)의 상인 가문인 구와바라 와조(桑原輪三Kuwabara Wazo일본어)와 그의 아내 가메(カメKame일본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바둑 재능을 보였으며, 미하라성의 영주이자 히로시마번의 필두 가로였던 아사노 다다히로(浅野忠敬Asano Tadahiro일본어)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아사노 영주는 슈사쿠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개인 바둑 스승이자 프로 수준의 기사였던 호신(星新Hoshin일본어) 승려 밑에서 그가 바둑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837년, 8세의 나이에 슈사쿠는 이미 프로 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당시 일본 바둑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자 혼인보 도사쿠와 수많은 명인을 배출한 혼인보 가문에 정식으로 입문했다. 공식적으로는 혼인보 조와의 문하생이었으나, 주로 선배 문하생들에게서 바둑을 배웠다. 1839년에는 초단으로 승단했으며, 이듬해인 1840년 1월 3일에는 정식으로 초단 프로 자격을 취득했다. 같은 해 슈사쿠로 개명하고 2단으로 승단했으며, 1841년에는 3단, 1842년에는 4단으로 승단하며 빠른 속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2.2. 혼인보 입문과 초기 경력
혼인보 가문은 에도 시대 바둑계의 최고 명문으로, 슈사쿠의 입문은 그의 바둑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스승인 혼인보 조와는 슈사쿠의 기량을 보고 "이는 실로 150년 만에 나타난 바둑의 호걸이며, 우리 가문의 명성을 크게 드높일 것이다"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150년 전은 혼인보 도사쿠의 전성기였다.)
1846년, 4단이었던 슈사쿠는 오사카에서 당대 최강의 기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던 이노우에 겐안인세키(井上幻庵因碩Inoue Gennan Inseki일본어)와 여러 차례 대국을 펼쳤다. 겐안인세키가 8단이었으므로 슈사쿠에게 두 점 접바둑으로 시작했으나, 겐안인세키는 슈사쿠의 실력을 인정하고 파격적으로 정선(定先) 대국으로 변경했다. 이 대국들 중 하나가 바로 '귀가 빨개지는 대국'으로 불리는 유명한 대국이다. 겐안인세키는 훗날 "그때 슈사쿠의 기량은 7단에 못 미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겐안인세키를 정선으로 이긴 것을 계기로, 혼인보 조와와 혼인보 슈와는 슈사쿠를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당시 조와는 은퇴했고 혼인보 가문의 당주는 혼인보 조사쿠였으며, 슈와가 후계자였지만 조와와 조사쿠가 1년 후 잇따라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점에서 두 사람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가문의 수장이 되면 동시에 막부의 신하가 되어야 했기에, 슈사쿠는 자신의 주군인 히로시마번의 필두 가로 아사노 가이노카미(浅野甲斐守Asano Kainokami일본어)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바둑 명문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또한 슈사쿠는 스승인 혼인보 슈와와의 대국에서 선(先)으로 두었을 때 크게 앞서자, 슈와가 "수담(手談)을 고치자"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님께 흑을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선 다음은 선상선(先相先)이 되어 세 판 중 한 번은 상수가 흑을 잡게 된다.)
1848년, 슈사쿠는 공식적으로 제14세 혼인보의 후계자가 되었고 동시에 6단으로 승단했다. 또한 조와의 딸인 하나(花Hana일본어)와 결혼했다. 이듬해부터 어성전에 출전하여 이후 19전 19승 무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슈사쿠 최강설의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프로 기사 경력 및 업적
혼인보 슈사쿠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일본 바둑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특히 어성전에서의 무패 기록과 주요 라이벌들과의 대국, 그리고 독창적인 기풍은 그를 바둑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3.1. 어성전(御城碁)과 무패 기록
에도 막부 쇼군 앞에서 매년 열리는 어성전은 당대 최고 기사들의 명예로운 대국이었다. 슈사쿠는 1849년부터 1861년까지 어성전에 출전하여 19연승이라는 경이로운 무패 기록을 세웠고, 이로 인해 '무적의 슈사쿠'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기록은 슈사쿠의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여겨진다.
슈사쿠는 어성전 연승 기록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당시 5단이었던 하야시 유미(林有美Hayashi Yumi일본어)와의 두 점 접바둑을 완강히 거절했으며, 10세 야스이 산에이(安井算英Yasui San'ei일본어, 당시 2단)와의 두 점 접바둑을 슈와가 제안했을 때도 "두 점 바둑은 필승을 기약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19국 동안 두 점 접바둑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동시에 "호선 백번(덤 없음)이라면 누구를 상대로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슈사쿠의 무적 행진은 평이하면서도 수려한 기풍과, 스승인 슈와와 견줄 만한 정확한 형세 판단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슈사쿠의 선번(先番)은 슈사쿠류 포석으로 유명하며, 그의 선번은 견실하기 이를 데 없다고 칭송받았다. 슈사쿠가 어성전의 하국(下局) 결과를 묻는 질문에 "선번이었습니다"라고만 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다만 이 이야기는 겸손한 슈사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아, "선번이었기에 어떻게든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의 앞부분만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다음은 혼인보 슈사쿠의 어성전 19연승 기록이다.
서력 | 상대 | 가문 | 결과 | |
---|---|---|---|---|
1 | 1849 | 야스이 산치 | 야스이 가문 | 선번 11목 승 |
2 | 사카구치 센토쿠 | 사카구치 가문 | 선번 불계승 | |
3 | 1850 | 사카구치 센토쿠 | 사카구치 가문 | 선번 8목 승 |
4 | 이토 쇼와 | 선번 3목 승 | ||
5 | 1851 | 하야시 몬뉴 | 하야시 가문 | 선번 7목 승 |
6 | 야스이 산치 | 야스이 가문 | 선번 불계승 | |
7 | 1852 | 이노우에 세쓰잔인세키 | 이노우에 가문 | 백번 2목 승 |
8 | 이토 쇼와 | 선번 6목 승 | ||
9 | 1853 | 사카구치 센토쿠 | 사카구치 가문 | 선번 불계승 |
10 | 야스이 산치 | 야스이 가문 | 백번 1목 승 | |
11 | 1854 | 이노우에 세쓰잔인세키 | 이노우에 가문 | 백번 불계승 |
12 | 1856 | 이토 쇼와 | 백번 불계승 | |
13 | 1857 | 야스이 산치 | 야스이 가문 | 선번 불계승 |
14 | 1858 | 사카구치 센토쿠 | 사카구치 가문 | 백번 3목 승 |
15 | 1859 | 이토 쇼와 | 선번 9목 승 | |
16 | 핫토리 세이테쓰 | 핫토리 가문 | 선번 13목 승 | |
17 | 1860 | 하야시 유미 | 하야시 가문 | 백번 4목 승 |
18 | 1861 | 하야시 몬뉴 | 하야시 가문 | 백번 14목 승 |
19 | 하야시 유미 | 하야시 가문 | 백번 불계승 |
3.2. 주요 대국과 라이벌 관계
슈사쿠는 여러 중요한 대국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으며, 당대 최고의 기사들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853년, 야스이 산치, 이토 쇼와, 사카구치 센토쿠, 핫토리 세이테쓰, 그리고 오타 유조 등 여러 기사들이 에도(江戸Edo일본어)의 한 저택에 모여 슈사쿠의 실력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슈사쿠가 당대 최강의 기사라는 의견에 도달했지만, 오타 유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타는 자신이 슈사쿠와 3승 3패로 동률인 상태에서 대국 시리즈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당시 유명한 바둑 후원자였던 아카이 고로사쿠(赤井五郎作Akai Gorosaku일본어)는 이 소식을 듣고 전례 없는 30번기(三十番碁, Sanjubango)를 오타와 슈사쿠 사이에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리즈는 1853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오타는 46세의 7단이었고 슈사쿠는 24세의 6단이었다. 대국은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되어 일반적인 10번기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오타는 11국까지 잘 싸웠으나, 슈사쿠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17국 이후 오타는 4게임 차이로 뒤처졌다. 21국은 7월에 진행되었으나, 22국은 그해 10월까지 진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22국은 오타의 집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다른 대국들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진행된 것과 달랐다. 오타가 한 번 더 패하자, 대국 장소는 다시 중립적인 곳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23국은 승부조작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대국은 거의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무승부로 끝났다. 이는 오타의 굴욕을 막아주었다. 백을 잡고 무승부를 기록한 것은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졌으며, 슈사쿠가 어성전에 소집된 것과 함께 대국을 중단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
한편, 스승인 혼인보 슈와와 슈사쿠의 실력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일부에서는 슈사쿠가 스승보다 강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슈사쿠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슈와를 상대로 백을 잡고 대국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명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예를 들어, 슈사쿠는 오타 유조를 상대로 우세한 기록을 보였지만 여전히 그를 어려운 상대로 여겼던 반면, 슈와는 오타를 쉽게 이겼다. 반대로 슈와는 야스이 산치를 매우 강한 상대로 인정했고 (슈와가 야스이에게 패배한 경우가 더 많았다), 오타 유조보다도 강하다고 평가했지만, 슈사쿠는 야스이를 큰 차이로 이길 수 있었다.
3.3. 대표적인 대국과 기풍
슈사쿠의 기풍은 평이하면서도 견실하고 아름답다고 평가받으며, 특히 선번(先番)에서의 전략은 '슈사쿠류 포석'으로 불리며 현대 바둑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적인 대국 중 하나는 '귀가 빨개지는 대국'(耳赤の一局, Mimiaka no Ikkyoku)으로, 1846년 9월 11일(음력 7월 21일) 오사카의 덴노지야 쓰지 주지로(天王寺屋辻忠二郎Tennojiya Tsuji Chujiro일본어)의 집에서 시작되어 9월 13일(음력 7월 23일) 하라 사이이치로(原才一郎Hara Saiichiro일본어)의 집, 9월 15일(음력 7월 25일) 나카가와 준세쓰(中川順節Nakagawa Junsetsu일본어) 바둑 모임의 나카노시마 카미야테이(中之島紙屋亭Nakanoshima Kamiyatei일본어)에서 완결되었다. 이 대국은 흑 슈사쿠와 백 겐안인세키의 대결이었다. 우하귀 대사정석에서 슈사쿠가 실착을 범하고, 겐안인세키가 새로운 조세키를 선보이며 비장의 수를 두자 슈사쿠는 열세에 몰렸다. 겐안인세키는 자유자재로 바둑을 두었으나, 126수째의 백 △가 느슨한 수였다. 이에 대해 슈사쿠가 둔 흑 127수째(그림의 흑 ▲)가 '귀가 빨개지는 한 수'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묘수였다. 이 수를 두기 직전까지는 겐안인세키가 우세했지만, 이 수로 인해 형세가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 수는 상변의 모양을 확대하고, 우변 백의 두터움을 지우며, 하변의 약한 돌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좌변의 침입을 노리는 일석사조의 수였다.
대국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의사는 이 광경을 보고 "이것은 슈사쿠의 승리다"라고 단정했다. 주위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바둑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방금 그 수가 두어졌을 때 겐안 선생님의 귀가 빨개졌다. 동요하고 자신감을 잃은 증거이며, 이래서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귀가 빨개지는 한 수'라는 이름은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 다만 이 수에 대해서는 느슨한 수라는 평가나, 오청원의 "지금의 일류 기사라면 누구나 그곳에 둔다"는 평가처럼, 그 가치가 일정하지 않다. 또한 '귀가 빨개지는 한 수'뿐만 아니라, 대국 전체를 아우르는 겐안인세키의 수법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바둑 인공지능이 이 수를 최선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2019년 세계 컴퓨터 바둑 오픈전에서 우승한 최강 소프트웨어 중 하나인 절예(絶藝FineArt중국어)는 이 수(평가치 55.2)를 느슨한 수로 보고, 좌상귀 5의 3에 붙이는 수(평가치 63.1)를 최선으로 제시했다. KataGo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왔지만, 오하시 타쿠분은 상대의 리듬을 깨는 심리전 같은 수이기 때문에 평가가 낮게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KataGo 등은 몇 수 뒤에는 이 지점을 유력한 후보로 제시하기 때문에, 수순이 조금 빨랐다고도 볼 수 있다.)
슈사쿠류 포석은 흑 1, 3, 5로 방향이 다른 소목을 연달아 두는 포석을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흑 7수째의 마늘모까지를 '슈사쿠류'라고 칭한다. 이 수는 슈사쿠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 수를 크게 활용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슈사쿠의 마늘모'라고 불리게 되었다. 슈사쿠는 "바둑판의 넓이가 변하지 않는 한, 이 마늘모가 악수로 평가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바둑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선번으로 확실히 이기려는 전략이며, 덤이 있는 현대 바둑에서는 느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19년 세계 컴퓨터 바둑 오픈전에서 우승한 최강 소프트웨어 중 하나인 절예(FineArt)가 최선수로 이 마늘모를 제시하면서, 슈사쿠의 혜안이 다시금 평가받게 되었다. 이후 프로 기사들의 타이틀전 등에서도 다용되며, 유력한 포석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고 있다.
4. 평가 및 칭호
혼인보 슈사쿠는 일본 바둑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칭호를 통해 그의 위상이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4.1. 사후 평가 및 칭호
혼인보 슈사쿠는 '바둑 성인'(棋聖, Kisei)으로 추앙받으며, 이는 혼인보 도사쿠 (1645년~1702년)와 혼인보 조와 (1787년~1847년)와 함께 세 명에게만 주어진 영예로운 칭호이다. 그러나 조와의 칭호는 사후에 자인 단소(ザイン・ダンソZain Danso일본어)에서 그의 명인 고도코로 직위 획득을 위한 음모에 대한 편향된 기록이 드러나면서 철회되었다. 오늘날 슈사쿠의 명성은 일본에서는 보다 균형 잡힌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슈사쿠와 조와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저술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정보원이 부족하여 여전히 다소 과장된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
슈사쿠는 명인이 된 적은 없지만, 역사상 최강의 기사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기력뿐만 아니라 빼어난 인품으로도 높이 평가받으며, 혼인보 도사쿠(전성)와 혼인보 조와(후성)와 함께 바둑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인보 산사, 혼인보 도사쿠와 함께 제1회 일본기원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5. 개인사
슈사쿠는 1848년에 혼인보 조와의 딸인 하나와 결혼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히로시마번의 필두 가로이자 자신의 아버지 구와바라 와조의 주군이기도 했던 미하라성주 아사노 다다히로에 대한 강한 충성심이었다. 이 충성심 때문에 그는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처음에는 거절했다. 혼인보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 동시에 막부의 신하가 되어야 했는데, 이는 그가 아사노 가문에 진 빚과 충성심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해결된 후에야 그는 후계자 자리를 수락했다.
6. 사망
1862년, 일본 전역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혼인보 가문 내에서도 콜레라 환자가 속출하자, 슈사쿠는 스승인 혼인보 슈와가 만류하는 것도 듣지 않고 환자들을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콜레라에 감염되어 1862년 9월 3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이 해에 어성전은 중지되었고,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슈사쿠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혼인보 가문에서는 슈사쿠 외에는 콜레라로 인한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7. 유산과 영향력
혼인보 슈사쿠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바둑계와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유산과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기풍은 현대 바둑의 기초가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대중문화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7.1. 바둑계에 미친 영향
슈사쿠의 이름은 '슈사쿠류 포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포석은 흑번(黑番)으로 게임을 시작하는 특정 방식으로, 슈사쿠가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의해 완벽하게 발전되었으며 1930년대까지 인기 있는 포석 스타일의 기반이 되었다.
슈사쿠는 또한 에르되시 수와 유사한 개념인 '슈사쿠 수'(秀策数)로도 기억된다. 약 400국에 달하는 그의 기보가 전해지며, 1900년 이시타니 히로사쿠(石谷広策Ishitani Hirosaku일본어)에 의해 『고교쿠 요인』(敲玉余韵Kōgyoku Yoin일본어)으로 정리되었다. 많은 프로 기사들이 이 기보를 연구했으며, 대한민국의 이창호 9단도 젊은 시절부터 슈사쿠의 기보를 열심히 연구하며 "저는 평생을 바쳐도 슈사쿠 선생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7.2. 문화적 영향


슈사쿠는 홋타 유미와 오바타 다케시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히카루의 바둑》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에서 슈사쿠는 주인공 신도 히카루에게 씌인 헤이안 시대의 천재 기사 후지와라노 사이의 영혼이 이전에 깃들었던 인물로 묘사된다. 이 작품의 성공과 함께 일어난 '바둑 붐'을 통해 슈사쿠는 어린이들에게도 '바둑 역사상 최강의 인물'로 인식되며 친숙해졌다.
히로시마현 미하라시의 이토사키 신사에는 에도 시대에 슈사쿠의 생애를 기념하여 건립된 석비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석비는 《히카루의 바둑》에도 등장한다.) 또한 인노시마에 있는 슈사쿠의 생가는 현재 '혼인보 슈사쿠 바둑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노시마가 속한 오노미치시는 이러한 인연으로 바둑을 '시의 기술'(市技)로 지정하고, 연 2회 '혼인보 슈사쿠 바둑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7.3. 역사적 평가와 논란
슈사쿠의 명성은 일본 내에서 균형 잡힌 평가를 받는 반면, 서구권에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의 역사적 평가는 현대 바둑 인공지능의 등장과 외부 논란을 통해 더욱 다각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2014년 6월 6일, 구글 두들은 슈사쿠의 185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이는 영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일본인을 기리는 것이 외교적으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구글 영국 웹사이트는 서둘러 수정되었다.
현대 바둑 인공지능의 발전은 슈사쿠의 바둑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었다. 인공지능은 그의 유명한 '귀가 빨개지는 한 수'를 최선수로 보지 않는 등 일부 수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슈사쿠류 포석'의 가치를 재확인하며 그의 혜안을 다시금 입증했다. 인공지능의 분석을 통해 슈사쿠의 바둑이 현대 바둑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심오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역사적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8. 관련 작품
혼인보 슈사쿠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조명되거나 영감을 주었다.
- 서적
- 존 파워, 『무적: 슈사쿠의 바둑』(Invincible: The Games of Shusaku영어)
- 『혼인보 슈사쿠 - 완전 기보집』(Honinbo Shusaku - Complete Game Collection영어)
- 『고교쿠 요인』(敲玉餘韵일본어, 이시타니 히로사쿠, 1900년)
- 『완본 혼인보 슈사쿠 전집』(完本 本因坊秀策全集일본어, 세이분도 신코샤, 1996년)
- 『슈사쿠』(秀策일본어, 일본 바둑 대계 15, 이시다 요시오 해설, 다무라 다카오 저, 지쿠마쇼보, 1976년)
- 이시다 요시오, 『도사쿠・슈사쿠・오청원 - 길을 개척한 3대 거성』(道策・秀策・呉清源-道を拓いた三大巨星일본어, 세이분도 신코샤, 1987년)
- 후쿠이 마사아키, 『수려 슈사쿠 (바둑 고전 명국선집)』(秀麗秀策 (囲碁古典名局選集)일본어, 일본기원, 1992년)
- 후쿠이 마사아키, 『명인・명국선 슈사쿠』(名人・名局選 秀策일본어, 세이분도 신코샤, 2008년)
- 다카기 쇼이치, 『슈사쿠 극치의 한 수』(秀策極みの一手일본어, 일본기원, 2010년)
- 만화 및 애니메이션
- 『히카루의 바둑』(홋타 유미, 오바타 다케시)
- 컴퓨터 게임
- 『혼인보 슈사쿠 바둑 트레이너』(本因坊秀策 囲碁トレーナー일본어, 일본 소프트&하드사, PC-8800 시리즈, 1983년 7월)
- 『슈사쿠 어성전집』(秀策御城碁集일본어, 아테나 소프트웨어, F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