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1.1. 어린 시절과 가족
오타 유조는 1807년 에도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川原 卯之助가와하라 우노스케일본어였으며, 생애 동안 오타 우노스케, 오타 료스케 등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꾼 후 최종적으로 오타 유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에도 출신의 상인이었다. 유조는 어린 시절부터 야스이 가문에 입문했으며, 훗날 야스이 가문의 8대 당주인 야스이 지토쿠 센치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그의 호는 一石庵爛柯잇세키안 란카일본어이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오타 유조는 야스이 센카쿠 센치 (야스이 가문의 7대 당주) 문하에서 바둑을 배웠으며,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야스이 산치 (도시테쓰)와 경쟁하며 실력을 키웠다. 덴포 4년(1833년)부터 8년(1837년)까지 나고야, 교토, 오사카, 규슈 등 일본 각지로 대국을 위한 원정을 떠났다. 그의 소년 시절부터 이 시기까지의 기보들은 덴포 10년(1839년)부터 12년(1841년)에 걸쳐 『西征手談세이세이 슈단일본어』(상하권)이라는 기보집으로 간행되었다.
2. 바둑 경력
오타 유조의 프로 경력은 중요한 업적, 독특한 기풍, 그리고 당대 바둑계에서의 주목할 만한 위치로 특징지어진다.
2.1. 프로로서의 지위와 승단
오타 유조는 덴포 9년(1838년)에 6단으로 승단했다. 가에이 1년(1848년) 12월 24일에는 이토 쇼와 및 하야시 하쿠에이 몬뉴와 함께 7단으로 승단했다. 당시 7단 기사가 되면 삭발하고 어성전에 출전하여 공식적인 녹봉을 받는 것이 관례이자 기사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미남으로 알려진 유조는 삭발을 싫어했다는 기록(『좌은담총』)이 있으며, 어성전에도 출사하지 않는 이례적인 승단을 이뤘다.
그는 삭발이나 어성전 출전 없이 7단 승단을 허용해 달라는 전례 없는 요청을 했다. 당시 그의 실력이 라이벌들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바둑 아카데미는 논의 끝에 그에게 삭발이나 어성전 출전 없이 7단 승단을 허락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례적인 승단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본인방 슈사쿠를 만나기 전까지는 널리 유명하지 않았다.
2.2. 기풍
오타 유조는 기세가 좋고 화려한 바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고목과 외목을 자주 사용하여 유연하고 우아한 바둑을 두는 인상을 주었다. 그의 기풍은 높은 포석 활용과 잦은 변화가 특징이었다. 그는 특정 정석의 개발에도 기여했는데, 특히 외목 정석 중 백A, 흑B, 백C로 이어지는 수순은 그가 본인방 슈사쿠와의 대국에서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덴포 4걸'
오타 유조는 덴포 시대의 가장 강력한 네 명의 바둑 기사를 일컫는 '덴포 4걸'(天保四傑)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이 그룹에는 오타 유조 외에도 이토 쇼와, 야스이 산치 (도시테쓰), 사카구치 센토쿠가 포함되었다. 이 권위 있는 그룹에 포함된 것은 당시 바둑계에서 그의 높은 위상과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주요 대국 및 라이벌 관계
오타 유조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중요한 대국을 펼쳤으며, 특히 본인방 슈사쿠 및 본인방 슈와와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3.1. 본인방 슈사쿠와의 라이벌 관계
오타 유조와 본인방 슈사쿠의 첫 대국은 덴포 13년(1842년) 6월에 열렸다. 당시 오타는 35세의 6단이었고, 슈사쿠는 13세의 2단이었다. 이 첫 대국에서 오타는 두 점 접바둑으로 승리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총 11국의 바둑을 두었으며, 슈사쿠가 7승 3패 1무승부를 기록했다.
슈사쿠의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타는 나중에 자신의 연승을 거두며 슈사쿠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슈사쿠가 오타와 호선으로 둘 수 있게 되기까지 약 50국의 바둑을 두었으며, 두 점 접바둑을 극복하고 호선으로 두기까지 4년이 걸렸다. 그들의 관계는 친밀한 우정으로 발전하여 때로는 하루에 두 번씩 바둑을 두기도 했다. 그들은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로 여겨졌으며, 오타는 한때 슈사쿠의 스승이 될 뻔하기도 했다.
3.2. 슈사쿠와의 30국 바둑
가에이 6년(1853년), 에도의 한 저택에 야스이 산치, 이토 쇼와, 사카구치 센토쿠, 핫토리 세이테쓰 그리고 오타 유조를 포함한 저명한 바둑 기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본인방 슈사쿠의 뛰어난 실력에 대해 논의했고, 대부분이 그가 당대 최고의 기사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오타는 당시 슈사쿠와 2승 2패 2무승부를 기록 중이었기에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유명한 바둑 후원자였던 아카이 고로사쿠는 오타와 슈사쿠 간의 전례 없는 30국 바둑(三十番碁)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대국은 1853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 오타는 46세의 7단이었고, 슈사쿠는 24세의 6단이었다. 대국은 일반적인 십번기보다 빠른 주 1회로 진행되었다. 오타는 11국까지는 잘 버텼으나, 그 이후 슈사쿠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17국 이후 오타는 4국 뒤처졌고(6승 10패 1무승부), 이후 1승 3패 1무승부를 추가하며 더욱 궁지에 몰렸다.
21국은 7월에 두어졌으나, 22국은 그해 10월까지 연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22국은 오타의 집에서 두어졌는데, 이는 다른 대국들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진행된 것과는 달랐다. 오타가 이 대국에서도 패하자, 대국 장소는 다시 중립적인 곳으로 변경되었다.
1853년 11월 5일과 28일에 두어진 23국은 오타의 "일생일대의 명국"(畢生の傑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대국은 거의 24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오타가 백을 잡고 무승부로 끝났다. 이 대국은 오타가 더 큰 굴욕을 피할 수 있도록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백을 잡고 무승부를 이끌어낸 것은 큰 성과로 여겨졌으며, 슈사쿠의 어성전 출전과 함께 이 대국을 중단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 본인방 슈사쿠 자신도 이 대국을 칭찬하며 "아마도 오타 씨의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오타의 명성은 주로 이 30국 바둑 중 이 한 대국에서 비롯되었다.

3.3. 본인방 슈와와의 대국
오타 유조와 본인방 슈와 사이에 약 140국의 기보가 남아 있다. 이들의 대국은 호선으로 시작하여, 이후 오타가 선상선과 정선을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덴포 14년(1843년)에는 오타가 7단일 때, 당시 7단이었던 본인방 슈와와 백을 잡고 무승부를 기록한 대국이 있는데, 이는 그의 명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4. 저술
오타 유조는 그의 기풍과 당대 바둑의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러 중요한 기보집을 남겼다.
4.1. 기보집
- 『西征手談세이세이 슈단일본어』 (西征手談, '서정수담'): 덴포 10년(1839년)부터 12년(1841년) 사이에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기보집은 주로 그의 서일본 원정 대국 기록을 담고 있다.
- 『六石集롯세키 슈일본어』: 1846년에 출판되었다. 이 기보집은 덴포 13년(1842년) 이후의 대국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 『斧之柄伝記오노노테라 덴세츠일본어』: 오타 유조에게 귀속된 또 다른 기보집이다.
5. 평가
오타 유조의 실력과 기풍은 동시대 기사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현대 바둑 기사들에게도 계속해서 인정받고 있다.
5.1. 당대 평가
본인방 슈사쿠는 오타 유조를 높이 평가하며 『囲碁見聞誌이고 겐분시일본어』에서 "오타의 기예는 터럭만큼의 힘이 더 뛰어나다"(雄蔵が芸、毫厘の力勝れり)라고 언급했다. 비록 '덴포 4걸' 중 일부(예: 사카구치 센토쿠와의 대국에서 선상선을 유지한 것)와의 대전 성적은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22세나 어린 떠오르는 스타인 본인방 슈사쿠를 상대로 30국 바둑의 17국까지 호선으로 버텨낸 그의 실력은 높이 평가된다. 이는 오타가 노년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탁월한 기량의 증거였다.
5.2. 현대적 재평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후지사와 히데요키와 같은 저명한 바둑 기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오타 유조를 좋아하는 기사로 꼽는다. 그의 고목과 외목을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기풍과 유연하고 화려한 바둑은 계속해서 찬사를 받으며 연구되고 있다.
6. 유산
오타 유조의 독특한 바둑 기풍과 바둑 이론에 대한 기여는 바둑과 그 후대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6.1. 바둑 이론 및 실전에 미친 영향
그의 고목 (높은 수)과 외목 (변칙적인 수)의 빈번한 사용은 바둑에 더욱 유연하고 화려한 접근 방식을 가져왔다. 그는 특히 외목을 활용한 특정 정석 (백A, 흑B, 백C)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포석 이론에 대한 그의 기여를 보여준다. 그의 전반적인 유연하고 화려한 기풍은 후대 바둑 기사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어, 더욱 경직되지 않고 창의적인 바둑 접근 방식을 장려했다.
7. 사망
오타 유조는 안세이 3년 3월 20일(음력)인 1856년 4월 24일(양력)에 사망했다. 그는 에치고국의 다카다 (니가타현)에 있는 가지야시키(梶屋敷) 여관에서 대국 여행 중 객사했다. 그는 '덴포 4걸' 중 가장 먼저 사망했으며, 본인방 슈사쿠와의 유명한 30국 바둑이 끝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