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호시 도루는 1850년 5월 19일 (가에이 3년 음력 4월 8일) 에도 쓰키지 오다와라초(현 도쿄도주오구 쓰키지)에서 좌관(미장이) 츠쿠다야 도쿠베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하마키치였다. 그의 친부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친부는 낭비벽이 심해 가산이 도산하자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 마쓰(사가미국 우라가의 어부의 딸)는 하마키치를 데리고 한방의 호시 야스준과 재혼하였고, 하마키치는 이때부터 '호시'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호시 도루는 당초 의학의 길을 꿈꿨다. 가족과 함께 요코하마로 이주한 후, 가나가와 봉행소 소속 난방의 와타나베 데이안의 제자가 되어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막부가 통상 업무에 필요한 영어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요코하마 영학소(분큐 2년 설립, 헵번이 설립과 교수직에 참여)에서 영어를 배웠고, 이후 헤본숙(현 메이지 학원 대학)과 다카시마 학원에서도 영어를 공부하여 영어 교사가 되었다.
잠시 고케닌 고이즈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막부 육군 삼병대의 군사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좌절되었고, 이후 가이세이쇼 교수 마에지마 히소카의 사숙에 들어가 영어를 배웠다. 게이오 3년(1867년) 가이세이쇼에 입소하여 영어 보조 교사로 일했으며 프랑스어도 배웠다. 같은 해 10월, 그가 해군소 영어 보조 교사로 추천되었으나 보신 전쟁 발발로 3개월 만에 실직했다. 실직 후에는 요코하마 거류지에서 '만국신문지'를 발행하던 영국 영사관 소속 목사 마이클 베일리를 도와 영자 신문 번역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메이지 원년(1868년), 가이세이쇼 동창들의 도움으로 와카사국오바마번 영학교 교사, 오사카로 옮겨간 카미 레이시의 경강숙 조교(瓊江塾助教)가 되었다. 메이지 2년 9월(1869년 10월)에는 카미가 설립을 도운 오사카 양학교 훈도(訓導), 이듬해 동 학교가 대학 남교 분교(오사카 가이세이쇼)가 되자 소조교(小助教)가 되었다. 곧이어 무쓰 무네미쓰가 양학 교사 인선을 요청하자 카미의 추천으로 오사카의 와카야마번 저택에서 양학 조교로 가르쳤고, 후에 동 번 병학료(메이지 2년 말 설치)에 출사했다.
1.1. 영국 유학 및 법률가 수련
폐번치현 후 메이지 4년 8월(1871년 10월) 무쓰 무네미쓰가 가나가와현 지사에 취임하자, 호시 도루도 비슷한 시기에 와카야마현 소속으로 요코하마의 영어 학교 슈분칸(修文館) 교사로 부임했다. 메이지 5년 3월(1872년 4월) 가나가와현 이등 번역관으로 보임되었고, 학교 사무 취급으로서 슈분칸(게이코도) 교두(教頭)에 임명되었다. 나아가 대장성 조세두(租税頭)를 겸임하게 된 무쓰의 추천으로 같은 해 4월 대장성 고용, 9월에는 조세료 칠등 출사(租税寮七等出仕)가 되었다.
신력 1874년 (메이지 7년) 1월, 호시 도루는 요코하마 세관장(조세권조, 종육위)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이른바 '여왕 사건'을 일으키며 7월에 비직(非職) 처리되었다. 이 사건 직후인 1874년 9월, 태정관으로부터 영국 유학을 명받았고, 이듬해 1월 런던의 미들 템플 (4대 법조원 중 하나)에 입학했다. 그는 1877년 (메이지 10년) 6월, 법정 변호사 (Barrister) 자격을 취득하며 영국에서 법정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귀국 후 1878년 (메이지 11년) 2월, 사법성 부속 대언인 (후의 변호사) 제1호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큰 업무인 다카시마 탄광 사건에서 고토 쇼지로의 변호를 맡아 일약 명성을 얻었고, 관청 의뢰 소송에서 고액의 변호료를 요구하여 재산을 모았다.
2. 경력 및 정치 활동 시작
호시 도루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 요직을 거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번벌 정치를 비판하고 민권 운동에 참여하며 시련을 겪었으나, 해외 체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더욱 공고히 했다.
2.1. 관직 생활과 외교적 사건
요코하마 세관장 재직 중 1874년 5월, 이른바 여왕 사건이 발생하여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이 사건은 호시가 영국 영사에게 보낸 영문 서한 중 "Her Majesty's Court"를 번역문에서 "여왕 폐하의 재판청"으로 표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영국 영사 로버트슨은 "여제(女帝)"가 아닌 "여왕 폐하"로 번역된 것에 대해 무례하다며 불평을 제기했다. 호시는 영국에서 스스로를 Empress가 아닌 Queen으로 칭하고 있으므로 "여왕 폐하"가 틀린 표기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듬해 6월,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가 외무성에 찾아와 "귀국 천황을 남왕(男王)이라 해도 좋고, 호시의 여왕이라 하는 것을 벌하지 않으면 나 또한 귀국 천황이라 칭하겠다"며 호시의 면직과 사과를 강요했다.
당황한 산조 태정대신과 테라시마 외무경은 호시에게 문서를 고쳐 사과하도록 권유했으나, 호시는 상대방이야말로 부당하다고 상신했다. 영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공문서에는 외국 군주의 공식 칭호를 모두 '황제 폐하'로 지칭할 것을 정하고(메이지 7년 태정관 포고 제98호), 호시에게는 속죄금 2 JPY을 부과하고 요코하마 세관장직에서 해임하여 파크스 공사를 달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2.2. 정치적 비판과 시련
영국에서 돌아온 호시 도루는 사법성에 몸담았으며, 당시 번벌 정치(한바쓰, 특정 번 출신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또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1882년 (메이지 15년), 전년 10월 결성된 자유당 (84년 10월 해산)에 입당하여 기관지 『자유신문』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다른 민권 운동의 지도자들이 기회주의적으로 우왕좌왕하는 가운데서도, 일관되게 자유당의 유지와 운동 재건에 힘썼다. 1883년 (메이지 16년) 4월 당 대회에서 상임 의원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치죄법에 따라 최초의 고등법원 재판으로 후쿠시마 사건의 국사범 심리가 도쿄 고등법원에서 열렸을 때, 호시는 피고 고노 히로노카의 변호인을 맡았다. 6월, 당 총리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유럽 유람에서 귀국 후 번벌 정부와의 대결 의지를 잃고 총리 사임 및 자유당 해산을 주장했으나 이를 만류하고, 이듬해 1884년 (메이지 17년) 3월 당 대회에서 이타가키가 총리 재임을 수락하도록 했다. 5월에는 스스로 신문 『자유등』(후에 아사히 신문사에 매각되어 '도쿄 아사히 신문'이 됨)을 창간하여 정부 비판의 논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그는 여러 시련을 겪었다. 같은 해 9월 22일, 전날의 연설이 관료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니가타에서 체포되었고, 12월 18일 니가타 경죄 재판소에서 징역 6개월, 벌금 40 JPY 판결을 받았다. 이 기간 중인 9월에는 자유당원들에 의한 가바야마 사건이 발생했고, 책임 추궁을 두려워한 이타가키와 도사파는 호시 부재 중인 11월 당 대회에서 해산을 결의했다.
또한 1885년 (메이지 18년) 말 발각된 오사카 사건 재판에서는 오이 겐타로 등을 변호했다. 1886년 (메이지 19년) 10월 24일, 호시와 나카에 조민 등이 발기인이 되어 도쿄에서 옛 자유당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유지 친목회를 열었고, 호시 등은 작은 차이를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번벌 정치를 비판하며 1887년의 3대 사건 건백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로 인해 보안조례에 의해 도쿄에서 추방당했으며, 출판조례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2.3. 해외 체류 및 귀국
투옥 후 1888년 (메이지 21년) 석방된 호시 도루는 일본을 떠나 해외로 향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7개월, 이후 미국 워싱턴 주, 뉴욕에서 3개월을 체류했으며, 이어서 영국에서 1년, 그리고 독일(베를린)에 머물다가 1890년 (메이지 23년)에 귀국했다.
이 해외 체류를 통해 호시는 일본의 민권 운동의 의의를 알리려 했으나 전혀 상대방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일본이 서구인의 안중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이전의 민력 휴양론자(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민생 안정을 우선시하는 입장)에서, 타국으로부터 경외받고 국세를 발전시키기 위한 증세와 군비 증강을 옹호하는 부국강병의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같은 해 결성된 입헌자유당에 참여했다.
3. 주요 정치 활동 및 업적
호시 도루는 일본 의회 정치의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내각 각료로서 정책 추진과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
3.1. 정당 활동과 국회 진출
1892년 (메이지 25년), 호시 도루는 자신의 중의원 의장 취임을 공약으로 내걸고 제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치기현 제1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무쓰 무네미쓰의 의향을 받아들여 '독립 구락부'를 호시 지지로 결집시킨 오카자키 구니미쓰의 노력 덕분에 제2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제3회 제국의회에서는 무쓰의 지시에 따라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을 강력히 몰아붙였다. 내각 탄핵 결의가 가결되었고, 추가 예산은 전액 삭제되었으며, 궁지에 몰린 마쓰카타 내각은 결국 사직했다. 이어서 성립된 이토 내각(제2차 이토 내각)에 대해, 천황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던 무쓰가 외상으로 입각한 것은, 겐로들이 호시가 주도하는 자유당과의 협력 없이는 의회 정치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제4회 제국의회를 앞두고 자유당 간부들은 "세간의 평판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까지나 적극적 건설주의 (Positive constructive) 방침을 취하며, 이 주의에 맞는 것은 모두 채택할 것, 관리 정당이나 민중 정당이라는 비판에 구애받지 말 것"을 결의했다. 제4회 의회에서 호시는 무쓰와 협력하여 자유당을 강제로 이토 내각 지지 쪽으로 전환시키고, 예산안에 관한 '화협의 조칙'(和協の詔勅) 수락으로 당내를 결집시켰다. 이는 번벌 정부 대 민중 정당이라는 구도를 붕괴시킨 일본 정치사상 최대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의회 제1당이 단순히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국가적 견지에서 정부와의 타협과 조정을 통해 시책에 책임을 지는 체제의 효시였으며, 이후 입헌정우회나 자유민주당으로 계승된 일본의 입헌 정당 정치 확립의 큰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조 경감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당내 의원들이나 민중 정당 연합을 무너뜨린 입헌개진당, 존재를 경시당한 관리 정당 의원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었고, 그 증오심은 호시 의장에 대한 불신임으로 분출되었다.
3.2. 외교관 및 법률 고문
호시 도루는 워싱턴 D.C. 주재 공사로서 미국 법률 문제에 정통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미국 주재 일본 공사를 역임했다. 1898년 제1차 오쿠마 내각(와이한 내각)이 탄생했을 때, 호시는 외무대신으로 입각할 예정이었으나, 오쿠마 총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헌정당 내부에 정치적 문제로 인한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호시는 또한 대한제국 정부의 법무고문으로 활동하며 국제 관계에서도 역할을 수행했다.
청일 전쟁 이후, 전국 일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갈등이 유보되면서 호시의 활동 범위는 축소되었다. 그는 실의에 빠져 조선 시찰에 나섰고, 이노우에 가오루 주조(駐朝) 공사로부터 조선 경영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아 1895년 (메이지 28년) 3월 조선으로 건너가 법무 부문 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인해 조선 내 일본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호시는 친일파인 내부대신 박영효를 명성황후에게 접근시켜 궁정을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8월에는 이노우에가 공사직을 사임했다. 후임인 미우라 고로에게 경시되었으며, 10월의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서는 계획에서 배제되었다. 사건 수습을 위한 사절로 도쿄로 향한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유당과 이토 내각 간의 제휴가 하야시 유조와 이토 미요지 사이에서만 유지되었기 때문에 호시에게는 기회가 없었으며, 무쓰 또한 청일 전쟁 종결의 심로로 병석에 있었다. 이타가키의 입각 문제로 이토 저택에 찾아가는 등 노력했지만, 이미 당 전체가 정부와의 제휴를 인정하는 상황에서 소수파인 간토파를 이끄는 호시가 주도권을 잡기는 어려웠고, 당내에서 고립된 호시는 1896년 (메이지 29년) 2월 이토 히로부미에게 외국행 희망을 내비쳤다. 4월에는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간토파를 무쓰에게 맡기고 도미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전조사회 위원, 철도국유조사회 위원 등에도 임명되었다.
3.3. 내각 각료로서의 활동
호시 도루는 1900년 (메이지 33년) 10월, 이토가 창당한 입헌정우회에 참여함으로써 이토 히로부미의 신뢰를 얻었다. 같은 해 발족한 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으로 첫 입각을 하게 된다. 그의 강인한 정치적 수완 때문에 '오시토루'(おしとおる, 꿰뚫어 버리다, 밀어붙이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3.4. 정당 정치 개혁 및 영향
1899년 (메이지 32년) 헌정당 도호쿠(東北) 출장소 개설식에서, 호시는 도호쿠 지방의 항만 건설, 철도 완공, 대학 설립 등을 결의했다. 그는 "자유당은 전제 시대에는 파괴 운동을 했지만, 헌정의 오늘날에는 적극적으로 건설 운동을 하고 있는 자"라고 주장하며, "경제, 교통 면에서 서남부에 비해 열악한 도호쿠는 철도, 항만 등의 건설주의를 취해야 하며, 자유당은 도호쿠에서 이러한 사업을 반드시 이루어야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는 일본 정당사상 획기적인 연설로 평가된다. 이전까지 지방의 이익 실현 요구는 지방 국회의원의 환심을 사는 번거로운 일로 여겨졌으나, 호시는 이를 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환기시키고, 그 실현을 정부와 제휴하는 정당에게 기대하게 함으로써 당세 확대를 꾀하는 전략을 개발하고 확립했다. 그는 정당 간의 협력과 갈등을 능숙하게 조율하며 일본 정당 정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사상 및 정치 철학
호시 도루는 번벌 정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적극 건설주의'를 통해 국가 발전과 산업 진흥, 군비 증강을 추구했다.
4.1. 번벌 정치 비판
호시 도루는 당시 일본의 지배 세력이었던 번벌 정치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번벌의 권력 독점과 민주주의적 요소의 부재를 지적하며, 보다 개방적이고 책임 있는 정치 체제를 지향했다.
4.2. 적극 건설주의와 국가 발전론
호시 도루의 정치 사상의 핵심은 '적극 건설주의'(Positive constructive)였다. 그는 단순히 민생 안정을 넘어, 국가의 근본적인 역량 강화를 통해 일본을 국제 사회에서 독립적이고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군사 확장, 산업 발전, 그리고 항만, 철도, 대학 등 국가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지방의 개발 요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지방으로부터의 항만, 철도, 대학 등 인프라 정비 요구를 정당이 받아들여 이를 실현함으로써 지역에 이익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지지를 확보하여 당세를 확대하는 일본형 정당 정치의 원형을 구축했다고 평가된다. 이처럼 그는 자유당, 그리고 후의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일본의 입헌 체제 확립과 적극주의를 통한 국력 증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3. 벤담의 공리주의와 실용주의
호시 도루는 영국 유학 시절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제 원리 서설』(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 of Moral and Legislation, 1789년)을 반복하여 숙독했다. 그는 이상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구체적인 목적에 효과적인지 여부, 그리고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벤담의 공리주의적 사상과 실용주의적 태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무쓰 무네미쓰, 시마다 사부로 등과 함께 영어 서적을 강독했는데, 시마다에 따르면 무쓰가 "인간 시비의 귀착점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호시는 벤담의 공리론에 입각한 법률적 견지에서 논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1884년 급진파 지도자 스즈키 샤테이가 젊은 나이에 급사하자, 호시는 깊이 탄식하며 "사람이 무의미하게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슬퍼했고, 제자 노자와가 평소 주장하던 벤담의 공리주의와 다르지 않냐고 묻자, "옛날과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4.4. 반엘리트주의적 성향
호시 도루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배경 때문에, 타고난 환경이 좋은 지식 엘리트들에게 반감을 가졌고 평생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런던의 미들 템플 법학원에서 동창이었던 바바 타츠이는 도사번의 상위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번비 유학생이었는데, 두 사람은 한 번 논쟁 끝에 몸싸움까지 벌였고 그 이후로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1883년 입헌개진당 공격에 가담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개진당을 '가짜 정당'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오노 아즈사, 시마다 사부로를 비롯한 순탄한 길을 걸어온 지식 엘리트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이 엘리트 집단이면서도 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5. 논란 및 비판
호시 도루의 정치적 행적은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다. 그는 특히 '금권 정치'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5.1. '여왕 사건'과 외교적 파문
호시 도루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재직하던 1874년 5월, 영국 영사에게 보내는 영문 서한의 번역 문제로 '여왕 사건'이라 불리는 외교적 파문이 일었다. 호시는 영문 원문의 "Her Majesty's Court"를 일본어 번역문에서 "여왕 폐하의 재판청"이라고 표기했는데, 당시 주일 영국 영사 로버트슨은 "여제"(Empress)가 아닌 "여왕"(Queen)으로 번역한 것이 무례하다며 항의했다. 호시는 영국 군주 자신들이 Empress가 아닌 Queen을 자칭하므로 "여왕 폐하"가 틀리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듬해 6월, 영국 공사 파크스는 외무성에 직접 찾아와 강력히 항의하며, "귀국 천황을 남왕(男王)이라 하거나, 호시가 여왕이라 하는 것을 벌하지 않으면, 나 또한 귀국 천황이라 칭하겠다"고 협박하며 호시의 면직과 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산조 태정대신과 테라시마 외무경은 당황하여 호시에게 문서 수정과 사과를 권유했으나, 호시는 상대방이야말로 부당하다고 맞섰다. 결국 영국 세력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공문서에서 외국 군주의 공식 칭호를 모두 '황제 폐하'로 통일하도록 규정하고(메이지 7년 태정관 포고 제98호), 호시에게는 속죄금 2 JPY을 부과하고 요코하마 세관장직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5.2. 국회 의장직 불신임 및 제명
1893년 (메이지 26년) 11월 29일, 중의원에서는 의장이었던 호시 도루에 대한 의장 불신임안이 166대 119로 가결되었다. 불신임의 사유로는 소마 사건 연루 의혹 및 거래소로부터의 뇌물 수수 의혹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호시는 "조약 개정을 지지하는 자신에 대한 경육파(국민협회, 입헌개진당 등)의 방해 공작이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며 사임을 거부했다. 당시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중의원 의장은 칙임관(勅任官)으로 분류되어 임면권이 천황에게 있었기 때문에, 호시는 계속해서 의장석에 앉아 직무를 수행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중의원은 호시의 해임을 요구하는 상소안을 152대 126으로 가결했다. 그러나 천황은 이에 대해 "의원이 스스로 불명확했음의 과실"이라며 중의원의 태만을 질책하는 칙답을 내렸다. 이는 호시에 대한 불신임을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으로 본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대신히지카타 히사모토에게 요청하여 얻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호시가 계속 의장석에 앉아 직무를 이어가려 하자, 12월 5일 호시에 대한 1주일간의 등원 정지 징벌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등원 정지 기간이 끝난 12월 12일 호시가 다시 의장석에 앉으려 하자, 12월 13일 중의원은 가장 중한 징벌인 의원 제명(185대 92로 가결, 제명 요건인 출석 의원 3분의 2를 넘는 67% 찬성)을 의결했다. 이로써 호시는 중의원 의원의 자격을 상실하고 자동적으로 의장직에서도 해임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중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5.3. 도쿄시 의혹 사건 및 사임
1900년 (메이지 33년) 11월 15일, 체신대신으로 재직 중이던 호시 도루는 도쿄시회 오직 사건에 연루되어 시 참사 회원들을 겸임하고 있던 호시 체신상 등이 고발당했다. 12월 20일 호시는 사표를 제출했으며, 같은 달 22일 하라 다카시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호시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신문 『마이니치 신문』의 맹렬한 비난 캠페인으로 인해 3개월 만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901년 3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재판 도중 암살당했다.
일본의 이면사를 보면, 산타마의 무라노 츠네우몬, 모리쿠보 사쿠조 등 오사카 사건 이후 자유당 우파의 '소시'(壯士)들을 정계로 끌어들인 점에서, 비록 호시 자신이 금전적으로 결백하더라도 도쿄시정의 수많은 의혹 사건에는 호시의 책임이 크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5.4. 금권 정치 및 부패 의혹
호시 도루는 생전에도 수많은 오직(汚職) 의혹으로 인해 '금권 정치의 화신'으로 격렬하게 비판받았다. 현대 일본에서 금권 정치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자유당 내 좌파가 주도한 오사카 사건 이후, 그는 폭력배들을 당에 입당시켜 우파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생활은 검소하고 강직했다고 전해진다. 후임 체신대신 하라 다카시도 그를 "담박(淡泊)한 사람이며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깨끗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또한 나카무라 기쿠오는 "세간에 전해지는 스캔들은 정적들의 악의적인 선전이나, 문하생 및 소시(壯士)들의 소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당시의 정치인들, 심지어 현대에도 첩을 두는 것이 드물지 않았지만, 호시는 여성 관계에서는 매우 청렴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측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생들을 포함하여 집안의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재산 형성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며, 암살 후 밝혀진 그의 유산은 1.00 만 JPY 남짓한 빚뿐이었다고 한다.
6. 암살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1일 오후 3시경, 도쿄 시회 의장이었던 호시 도루는 도쿄 시청 참사회의실에서 시장, 조역, 참사회의원 등과 환담 중이었다. 이때 전 도쿄시 요쓰야구 학무위원이었던 이바 소타로 (신교토류 검술 10대 종가)에 의해 단도에 찔려 암살되었다. 향년 51세. 그는 암살 2년 전 시즈오카현의 나가사와 오유다테(長沢雄盾) 자택에서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회담하던 중 데구치로부터 죽음을 예언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오타구의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다.
7. 개인 생활 및 유산
호시 도루는 바쁜 정치 활동 와중에도 학문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대에 많은 유산을 남겼다.
7.1. 가족 관계 및 사생활
호시 도루의 부인은 호시 쓰나(星つな, 津奈, 綱, 綱子)이며, 양자 호시 히카루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의 사생활은 검소하고 강직했으며, 서생들을 포함한 집안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자산 형성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암살 후 밝혀진 그의 유산은 1.00 만 JPY 남짓한 빚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당시 그에게 씌워진 '금권 정치'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7.2. 지적 탐구와 서재
호시 도루는 병적이라고 할 만큼 독서에 몰두하는 습관을 지녔던 '학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방대한 장서를 독파했다. 정치, 법률, 역사 분야 외에도 제번스나 매클라우드 등 최신 경제학 원서를 읽었다. 요코하마 세관장 시절에는 진푸 지츠쓰네, 노자와 게이이치 등과 함께 윌리엄 블랙스톤의 『영국 법률 전서』(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를 『영국법률전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옥중에서도 이른 아침 희미한 빛 속에서 글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독서에 탐닉했으며,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외국 서적 주문과 서적 전달에 관한 내용이었다.
1888년, 이시카와지마 감옥에서 요코야마 마타키치가 당시 최신간이었던 매클라우드의 『경제철학』(다구치 우키치 번역, 1885년)을 읽고 있자, 호시는 그 논의가 유럽에서는 이미 진부하며 무익하다고 말했다. 호시의 감방을 찾았을 때, 그는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원서 대여섯 권을 던져주며, "이것들이 모두 신간 경제서인데, 이것들을 읽지 못해서야 안 된다. 지금부터 정당원들은 적어도 영어와 프랑스어 정도는 제대로 습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평생 단순한 운동가로 끝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제번스나 리카도와 함께 매클라우드의 경제서를 넣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결코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지만, 오카자키 구니미쓰에 따르면 호시는 독서를 위해 시간을 아끼고 무의미한 이야기를 싫어했으며, 특별한 용무 없이 방문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거절하여 인기가 없었고 오만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모치즈키 게이스케가 교토에 체류 중이던 호시를 방문했을 때, 호시는 식사 중이었는데 식사 옆에 책을 놓고 읽었으며, 용건 중에도 눈길도 주지 않고 식사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자 호시는 "나는 눈으로 읽고, 입으로 먹고, 귀로 자네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의심한다면 자네가 말한 것을 전부 말해보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의 장서는 1만 1천 권에 달했으며, 사망 후 1913년 (다이쇼 2년) 양자 호시 히카루와 유족들은 약 1만 권의 장서를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기증했고, 이는 '호시 문고'(星文庫)로 보관되어 있다. 이 문고는 메이지 39년(1906년) 호시 히카루와 유족들이 게이오기주쿠에 위탁했고, 다이쇼 2년(1913년)에 정식으로 기증되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친 일본과 중국 고전 서적, 그리고 정치, 경제, 법률 자료를 중심으로 한 일본어 및 중국어 서적 5,732권, 서양 서적 4,81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장서를 살펴본 이타쿠라 타쿠조는 그를 학자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또한 주미 공사 시절에도 많은 도서를 수집했는데, 병법서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주재 무관이었던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호시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가져가 "이렇게 많은 책을 모두 읽을 수 없을 테니 내가 대신 읽어드리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7.3. 주요 인물과의 관계
호시 도루의 행동은 자신을 후원하고 이끌어준 무쓰 무네미쓰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하라 다카시처럼 무쓰를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은혜를 느끼고 우직하게 대했다. 자유당 입당은 변호사로서 성공했던 당시 호시에게 적극적인 동기가 없었고, 옥중에 있던 무쓰가 출옥 후 활동할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무쓰가 출옥 후 외국으로 나간 동안 사재를 털어 이타가키의 제멋대로 행동을 견뎌가며 자유당을 유지한 것도 무쓰의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6년 2월 귀국한 무쓰가 10월에 정부의 무임소 변리공사가 되었을 때는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무쓰에게는 자유당과 번벌 정부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가 대립하는 상태가 자신에게 가장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무쓰는 호시를 냉정하게 밀어냈지만, 미안함이 남아있었는지 제3회 제국의회를 앞두고 중의원 의장으로는 고노 히로노카가 유력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쓰의 의중을 헤아린 오카자키 구니미쓰의 노력으로 호시의 중의원 의장 취임이 실현되었다. 호시는 무쓰의 지시에 따라 마쓰카타 내각과 격렬하게 대립하여 내각 탄핵 결의안을 가결시켰고, 군함 건조비 등 신규 사업비는 전액 삭제되어 마쓰카타 내각은 붕괴했다. 이어서 무쓰가 외상으로 입각한 제2차 이토 내각에 대해서는 자유당 내를 강제로 방향 전환시켜 '화협의 조칙' 수락으로 당내를 통합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호시는 자유당 내뿐만 아니라 개진당과 관리 정당으로부터 증오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중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무쓰 무네미쓰 사후 호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도쿠토미 소호는 호시를 무쓰 문하생으로 여기며 "호랑이 같은 호시 도루도 무쓰 앞에서는 거의 고양이 같았다"고 평했다.
7.4. 이민 정책 추진
1894년 (메이지 27년), 하와이 이민의 공식 계약 이민(관약 이민)이 폐지되자, 호시 도루는 일본 정부에 민간 계약 이민 체제(사약 이민)의 설치를 추진하여 민간 이민 회사의 인가를 얻어냈다. 이후 일본 민간 회사를 통한 해외 이민 알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해외 이민자와 국내 송금 업무는 요코하마 쇼킨 은행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호시는 5대 이민 회사(히로시마 해외 도항 회사, 모리오카 상회, 구마모토 이민 회사, 도쿄 이민 회사, 일본 이민 회사) 중 주요 몇몇 회사의 사업에 관여했다. 그는 당시 호놀룰루에서 가동 중이던 철도를 일본 국내에도 도입하려 했던 이노우에 게이지로의 활동을 돕기도 했다.
7.5. 제자 및 추종자
호시 도루를 따랐던 주요 인물들로는 토시미츠 츠루마츠, 고바야시 세이이치로, 오오츠카 츠네지로, 요코타 센노스케, 와타나베 토루, 이소베 야스지, 하야시 겐키치로, 고쿠보 키시치, 휴가 테루타케, 이노우에 게이지로, 와타나베 칸주로, 스가와라 덴 등이 있다.
호시는 해외 경험을 쌓아 당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해외 이주자 일부를 지원했으며, 귀국 후에는 자유 구락부(自由倶楽部) 회원을 정당 기관지 등의 요직이나 이민 사업 등에 중용했다. 이들은 호시파의 핵심 인재가 되었고, 많은 자유 구락부 회원들도 호시파에 합류하여 소시(壯士)들이 정치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7.6. 영전 및 서훈
호시 도루는 생전 및 사후에 여러 영예를 받았다.
- 위계 (位階)**
- 1874년 (메이지 7년) 2월 18일: 종육위 (1885년 6월, 형기 확정으로 위기(位記) 반납)
- 1896년 (메이지 29년) 4월 30일: 종사위
- 1900년 (메이지 33년) 11월 10일: 정사위
-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1일: 종삼위
- 훈장 (勲章)**
- 1897년 (메이지 30년) 9월 16일: 훈삼등욱일중수장
-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1일: 훈이등서보장
7.7. 주요 평전 및 관련 작품
호시 도루에 대한 주요 평전은 다음과 같다.
- 마에다 렌잔 『호시 도루 전』 (星亨傳), 고잔쇼인, 1948년.
- 나카무라 기쿠오 『호시 도루』, 요시카와 고분칸 (인물총서 101), 1963년, 신장판 1988년.
- 아리이즈미 사다오 『호시 도루』, 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평전선 27), 1983년.
- 노자와 게이이치 편저 『호시 도루와 그 시대 1·2』 신판 (가와사키 마사루·히로세 준코 교주), 헤이본샤 (도요 문고), 1984년. 와이드판 2007년.
- 다케우치 요시오 『정당 정치의 개척자 호시 도루』, 후요쇼보, 1984년.
- 스즈키 타케시 『호시 도루 번벌 정치를 흔든 남자』, 주오 공론사 (주코 신서), 1988년.
호시 도루를 다룬 관련 작품으로는 영화와 TV 드라마가 있다.
- 영화**
- 『일본 암살 비록』 (1969년, 배우: 치바 토시로)
- TV 드라마**
- 『봄의 파도』 (1985년, NHK, 배우: 타다 유키오)
7.8. 기념 및 평가
호시 도루의 묘소가 있는 이케가미 혼몬지 경내에는 한때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금속 공출로 인해 대좌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전후 유족들에 의해 대좌는 기증되었으나, 현재는 니치렌 상인의 동상이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도치기현우쓰노미야시 호시가오카(星が丘)의 동네 이름은 호시 도루에서 유래했으며, 쇼와 40년(1965년)에 제정되었다.
호시 도루는 생전에도 수많은 오직 의혹으로 인해 '금권 정치의 권화'로 평가받았지만, 사생활에서는 검소하고 강직했다고 전해진다. 후임 체신대신 하라 다카시도 그를 "금전 문제에 깨끗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그의 죽음 후 남긴 유산이 빚뿐이었다는 점은 그를 둘러싼 금권 정치의 비판과 대조를 이룬다. 그는 일본의 입헌 체제 확립과 국력 증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다.
8. 관련 인물
- 호시 히카루 (양자)
- 야마시타 하지메
- 무쓰 무네미쓰
- 이바 소타로
9. 외부 링크
- [https://www.ndl.go.jp/portrait/datas/190/ 호시 도루 | 근대 일본인의 초상]
- [https://hoshitooruden.exblog.jp/i3/ 호시 도루 전] - 마에다 렌잔 『호시 도루 전』 복각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