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세페 데 리베라 (Josep de Ribera호세프 데 리베라카탈루냐어, 1591년 2월 17일 ~ 1652년 9월 2일)는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그는 주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활동했으며, 동시대인들과 초기 전기 작가들로부터 '작은 스페인인'이라는 뜻의 Lo Spagnoletto로 스파뇰레토이탈리아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리베라의 작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테네브리즘과 사실주의적 묘사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성경적 주제, 그리스 신화, 그리고 특히 순교 장면을 잔혹하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초기에는 강렬한 명암 대비와 인간의 고통을 가감 없이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접근 방식을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더 부드러운 빛, 풍부한 색채, 복잡한 구도를 도입하며 양식의 폭을 넓혔다. 그의 작품은 스페인과 나폴리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7세기 유럽의 가장 뛰어난 거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리베라는 또한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 성인이나 철학자로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리베라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가 적지만, 스페인 하티바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건너가 예술적 기반을 다진 것으로 추정된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주세페 데 리베라는 1591년 2월 17일, 스페인 발렌시아 남쪽으로 약 60 km 떨어진 하티바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1588년에 결혼한 시몬 리베라와 마르가리타 (결혼 전 성은 쿠코) 리베라였으며, 아버지는 구두장이였다. 시몬과 마르가리타 부부에게는 주세페 외에 1588년에 태어난 헤로니모와 1593년에 태어난 후안이라는 두 아들이 더 있었다. 주세페가 6세였던 1597년에 아버지가 재혼했고, 16세였던 1607년에 삼혼을 한 기록은 그의 어린 시절에 어느 정도의 혼란과 단절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세례 기록 이후 20년간의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 교육, 스승, 그리고 스페인을 떠난 시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학자로서 성공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학업을 소홀히 한 것으로 전해진다.
2.2. 초기 예술 교육 및 야망
리베라의 예술 교육과 이탈리아 반도로의 이주 시기는 미술사학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18세기 전기 작가인 안토니오 팔로미노는 리베라가 발렌시아에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리발타의 제자로 도제 생활을 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20세기 중후반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을 확증할 실제 증거는 없으며, 최근에는 이러한 시나리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증거는 리베라가 17~18세였던 1608년에서 1609년, 심지어 14~15세였던 1605년에서 1606년경에 이미 이탈리아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리발타의 사실주의적이고 카라바조적인 성숙한 양식이 1614년경에야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리베라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직접적인 사제 관계는 불분명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리베라의 드로잉 기법이 철저히 이탈리아적인 교육과 영향을 보여준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예술 공부를 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파르마를 거쳐 로마로 향했다.
3. 이탈리아에서의 예술 활동
리베라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파르마와 로마에서 초기 명성을 얻은 후, 나폴리에 정착하여 스페인 총독들의 후원 아래 나폴리 미술계의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1. 이탈리아 초기 (파르마, 로마)
q=Játiva, Spain;Valencia, Spain;Parma, Italy;Rome, Italy;Naples, Italy|position=left
리베라는 1611년 6월 이탈리아 파르마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산 프로스페로 교회를 위한 《성 마르틴이 거지에게 망토를 나누어주는 모습》이라는 그림 (현재는 소실됨)에 대한 대금을 받았다. 20세의 외국인 화가가 공공 제단화를 의뢰받았다는 점은 당시 리베라의 명성을 짐작하게 한다. 루도비코 카라치는 1618년에 리베라가 파르마에 머무는 동안 파르네세 가문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지역 예술가들의 불만을 샀다고 기록했다.
이후 1613년 10월에는 로마에서 산 루카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었음이 확인된다. 1615년부터 1616년까지 그는 '외국인 구역'으로 알려진 비아 마르구타의 한 집에 그의 형제 헤로니모와 화가였던 후안 등과 함께 살았다. 당시 로마는 바로크 미술의 발원지이자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가장 중요한 회화의 중심지였다. 네덜란드의 헤리트 판 혼토르스트, 프랑스의 시몽 부에, 독일의 아담 엘스하이머 등 많은 화가들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키아로스쿠로와 테네브리즘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고 있었다. 리베라가 로마에 있었다는 마지막 기록은 1616년 5월 산 루카 미술 아카데미에 약속된 기부금을 지불한 것과 1616년 7월의 은행 거래 내역이다.
줄리오 만치니는 그의 저서 『회화에 대한 고찰』(1614~1621)에서 리베라의 로마 시절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는 귀도 레니가 리베라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로마와 같은 미술의 중심지에서 리베라와 같은 기질을 가진 화가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고 극찬했다. 만치니는 리베라를 카라바조의 추종자이면서도 더 실험적이고 대담한 인물로 묘사했다. 만치니에 따르면, 리베라는 처음에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실에서 일당을 받고 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 명성을 얻고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리베라가 한 해 (아마도 1614년 또는 그 이전) 부활절 고해성사를 소홀히 하여 로마 당국과 문제가 있었으며, 때로는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소비를 했고,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고 기록했다.
3.2. 나폴리 시대 (1616-1652)

1616년 말, 리베라는 채권자들을 피하기 위해 (줄리오 만치니의 기록에 따르면, 높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했다) 나폴리로 영구히 이주했다. 당시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 제국의 일부였으며, 스페인 총독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1616년 11월, 리베라는 시칠리아 태생의 나폴리 화가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아촐리노의 딸 카테리나 아촐리노와 결혼했다. 그녀의 인맥은 리베라가 나폴리 미술계에서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도시 미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스페인 국적은 그를 도시 내 소수 스페인 통치 계급뿐만 아니라 스페인령 네덜란드 출신의 중요한 수집가 및 미술상들과도 연결시켜 주었다. 이 시점부터 리베라는 자신의 작품에 "주세페 데 리베라, 스페인인 (Jusepe de Ribera, español스페인어)"이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독 페드로 텔레스-히론, 제3대 오수나 공작의 관심을 빠르게 사로잡았고, 오수나 공작은 그에게 귀도 레니의 영향을 보여주는 여러 주요 작품을 의뢰했다.
1620년부터 1626년까지는 남아있는 회화 작품이 적지만, 이 시기에 그의 가장 뛰어난 판화들이 제작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나폴리 외부의 미술계에서도 주목을 받으려는 시도였다. 그의 경력은 1620년대 후반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는 나폴리에서 선도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1626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그리스도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 리베라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의 많은 그림들은 스페인 통치 계급 인사들에 의해 본국으로 보내졌으며, 그의 에칭 작품들은 미술상들에 의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 그의 영향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의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베라는 자신의 번영을 이기적으로 보호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그리스 화가 벨리사리오 코렌치오와 나폴리 화가 잠바티스타 카라치올로와 함께 소위 '나폴리 카발'의 우두머리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나폴리 미술 의뢰를 독점하기 위해 음모, 진행 중인 작품 방해, 심지어 외부 경쟁자들 (예: 안니발레 카라치, 카발리에르 다르피노, 귀도 레니, 도메니키노)을 위협하는 등의 수단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 '카발'은 1641년 도메니키노의 사망 시점에 해체되었다.
리베라의 제자로는 헨드릭 데 소머, 프란체스코 프라칸차노, 루카 조르다노, 바르톨로메오 파산테 등이 있다. 그는 주세페 마룰로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아고스티노 벨트라노, 파올로 도메니코 피놀리오, 조반니 리카, 피에트로 노벨리 등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 예술 사조 및 주제
리베라의 예술은 강렬한 테네브리즘과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고통과 취약성을 깊이 탐구했으며, 후기에는 더 부드러운 양식으로 발전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를 통해 그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4.1. 테네브리즘과 사실주의

리베라의 초기 양식은 스페인과 베네치아 거장들, 그리고 카라바조와 코레조의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제는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을 놀라운 자연주의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 중 거의 절반은 성인, 사도, 철학자, 과학자, 우화적 인물들의 반신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들의 모델은 주로 로마와 나폴리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 즉 어부, 부두 노동자, 노인, 거지 등 겸손한 인물들이었으며, 종종 주름진 피부와 누더기 옷을 입은 모습으로 강렬한 시각적 집중력으로 그려졌다. 그는 강렬한 명암 대비를 강조하는 테네브리즘 기법을 사용하여, 늙은 성인들의 쇠약해진 육체나 늘어진 피부까지도 미화하지 않고 가차 없이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표현을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잔혹함을 강조하는 사실주의는 잔인한 순교도에서 그 특징을 발휘했으며, 《절름발이 소년》 (1642년)과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4.2. 후기 양식 및 발전
1630년대 초반부터 리베라의 양식은 강렬한 테네브리즘에서 벗어나 더 확산된 빛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는 1642년 작 《절름발이 소년》과 같은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1630년 이후에는 주제의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볼로냐파의 고전주의를 흡수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안정된 구도, 명확한 색채, 고요한 서정성, 그리고 고귀함이 돋보이는 화풍을 창조하며 카라바조적인 경향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4.3. 주요 주제 (순교, 신화, 초상 등)

리베라는 전통적인 성경적 주제와 그리스 신화의 에피소드를 포함하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지만, 아마도 순교를 묘사한 수많은 작품들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때때로 묶인 성인들과 사티로스들이 고통 속에서 살가죽이 벗겨지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잔혹한 장면들을 담고 있다. 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가끔 뛰어난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풍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풍경화는 19세기 이전 스페인 회화에서는 드문 주제였는데, 리베라의 접근 방식은 독창적이었으며 당시 로마의 풍경화 (예: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의 작품)와 대조를 이루었다. 프라도 미술관의 전 관장인 알폰소 에밀리오 페레스 산체스는 리베라의 풍경화가 "나폴리 풍경화 역사에서 리베라에게 중요한 위치를 보장한다"며 "서명이 없어도 그의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여러 점의 훌륭한 남성 초상화와 자화상을 그렸으며, 펠리페 4세의 아들이자 나폴리 총독이었던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를 묘사한 유일한 기마 초상화는 스페인 왕실 소장품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5. 주요 작품
리베라는 유화, 드로잉,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걸작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들은 순교, 신화, 초상, 우화, 철학자 및 성인 묘사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5.1. 유화 작품
리베라의 유화 작품들은 그의 강렬한 예술적 특징과 폭넓은 주제 의식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그의 주요 유화 작품들이다.
- 역사화 및 순교화
- 《성 로렌스의 순교》 (1620~1624년)

- 《성 히에로니무스와 천사》 (1626년)

- 《성 안드레아의 순교》 (1628년)
- 《술 취한 실레노스》 (1626년)
- 《익시온》 (1632년)
- 《티티오스》 (1632년)
- 《피에타》 (1633년)
- 《삼위일체》 (1635~1636년)
- 《막달라 마리아의 승천》 (1636년)
- 《아폴론이 마르시아스를 벗기는 장면》 (1637년)

- 《피에타》 (1637년)

- 《야곱의 꿈》 (1639년)
- 《성 필립의 순교》 (1639년)
- 《은둔 성 바오로》 (1640년)
- 《성 젠나로가 화로에서 무장하지 않고 나오는 장면》 (1641~1647년)
-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1644년)
- 《세례자 요한의 머리》 (1646년)
- 《성 안나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 (1648년)
- 《성 베드로의 부인》 (1615~1616년경)
- 《에케 호모》 (1620년)
- 우화, 철학자, 사도 및 성인
- 《오감의 우화: 후각》 (1611~1616년경)

- 《오감의 우화: 미각》 (1611~1616년경)

- 《오감의 우화: 촉각》 (1611~1616년경)
- 《사도 성 베드로》 (1630~1635년)
- 《사도 성 바르톨로메오》 (1630~1635년)
- 《철학자 (플라톤)》 (1637년)
-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1637년)
-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1637년)
- 《성 오노프리우스》 (1642년)
-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날짜 미상)
- 《은둔 성 바오로》 (1647년)
-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 시메온》 (1647년)
- 《이집트의 성 마리아》 (1651년)
-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 (1652년)
- 초상화
-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의 초상》 (1638년)

- 《수염 난 여인》 (1631년)
5.2. 드로잉
리베라는 해부학적 연구와 인물 스케치를 포함한 뛰어난 드로잉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주요 드로잉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박쥐와 귀 연구》 (1622년경)

- 《사티로스의 머리》 (1625~1630년경)
- 《고문자에게 매 맞는 그리스도》 (1626년경)

- 《높은 줄 위의 곡예사들》 (1634~1635년경)

- 《환상적인 장면》 (날짜 미상)

- 《토가를 입은 남자》 (1640년대)

- 《말뚝에 묶인 남자》 (1940년대)

- 《초승달의 성모》 (1551~1552년)
5.3. 판화 및 에칭
리베라는 중요한 에칭 작가였으며, 프란시스코 고야 이전의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판화가였다. 그는 약 40점의 판화를 제작했으며, 거의 모든 작품이 162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주요 에칭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큰 기괴한 머리》 (1617~1627년경)

- 《코와 입 연구》 (1622년경)

- 《귀 연구》 (1622년)

- 《성 히에로니무스와 최후의 심판 나팔》 (1621년경)

- 《성 바르톨로메오의 순교》 (1624년)

- 《술 취한 실레노스》 (날짜 미상)

6. 사생활
리베라는 나폴리에서 화가의 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1616년 11월, 주세페 데 리베라는 시칠리아 태생의 나폴리 화가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아촐리노의 딸 카테리나 아촐리노와 결혼했다. 그는 나폴리에 정착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7. 만년 및 건강 악화
1644년 이후 리베라는 건강 악화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1644년경, 리베라의 딸은 스페인 행정부의 한 귀족과 결혼했으나, 그 귀족은 곧 사망했다. 1644년부터 리베라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작업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의 작업실은 그의 지휘 아래 계속해서 작품을 생산했다. 1647년에서 1648년 사이, 스페인 통치에 대한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그와 그의 가족은 나폴리 왕궁으로 피신했다. 1651년에는 자신의 집을 팔았으며, 1652년 9월 2일 사망할 무렵에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는 생의 마지막 해까지 여러 호평받는 그림들을 계속해서 제작했다. (참고: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사망일을 1652년 11월 3일로 기록하기도 한다.)
8. 유산과 영향력
리베라는 스페인 및 나폴리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에 재조명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재확립했다.
8.1. 후대 예술가들에게 미친 영향

살바토레 로사와 루카 조르다노는 리베라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였으며, 아마도 그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제자로는 조반니 도, 플랑드르 화가 헨드릭 데 소머 (이탈리아에서는 '엔리코 피아밍고'로 알려짐), 미켈란젤로 프라칸차니, 그리고 전투 장면을 그린 최초의 중요한 화가인 아니엘로 팔코네 등이 있다. 리베라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의 많은 그림들은 스페인 통치 계급 인사들에 의해 본국으로 보내졌고, 그의 에칭 작품들은 미술상들에 의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 그의 작품은 사망 후에도 계속 유행했으며, 특히 루카 조르다노와 같은 제자들이 그의 극사실주의적인 폭력 묘사를 계승함으로써 더욱 그러했다. 그의 영향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의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8.2. 비평적 평가 및 전시
리베라의 국제적인 명성은 점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는 여러 주요 전시회를 통해 촉진되었다. 1973년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에서 그의 판화와 드로잉 전시회가 열렸고, 1982년 런던 왕립 예술원에서 모든 매체를 아우르는 전시회가, 199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비평가와 학자들로부터 더욱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2006년에는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의 전 관장이었던 니콜라 스피노사가 집필한 리베라의 작품 목록집(catalogue raisonné)이 출판되었다.
9. 논란 및 전기적 논쟁
리베라의 생애에 대한 초기 전기들은 부정확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의 행동과 관련된 일부 의혹들은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
17세기와 18세기 리베라의 전기 작가들, 예를 들어 베르나르도 데 도미니치, 카를로 첼라노, 안토니오 팔로미노 등은 현재 오류로 밝혀진 상당량의 정보를 생산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는 20세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고, 오늘날에도 간혹 반복되곤 한다. 오랫동안 그는 1587년에 태어났으며, 데 도미니치는 그가 풀리아의 갈리폴리 출신이라고 했고, 첼라노는 레체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그가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했고, 다른 이는 그의 아버지가 스페인 군 장교였다고 했으나, 20세기 연구와 문서들은 이러한 주장들이 거짓임을 입증했다.
리베라의 생애에 대한 다른 일화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초기 기록들 (오늘날에도 반복되는)은 리베라가 발렌시아에서 예술 교육을 시작했으며, 프란시스코 리발타의 제자였다고 전한다. 이는 충분히 그럴듯하지만, 이를 확증할 실제 증거는 없다.
데 도미니치의 전기는 리베라를 이기적이고 거만하며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는 그리스 화가 벨리사리오 코렌치오와 나폴리 화가 바티스텔로 카라치올로와 함께 소위 '나폴리 카발'의 우두머리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전기들 외에는 이를 입증하거나 반박할 실제 문서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 도미니치의 전기는 한 현대 역사가에 의해 "뻔뻔한 거짓말"로, 다른 역사가에 의해 "풍자화"로 불리기도 했지만, 후자는 비판적인 검토를 통해 여전히 일부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자크 라세뉴는 1952년에 "그의 이탈리아 전기 작가들은 리베라의 격렬하고 기이한 경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로 스파뇰레토'의 삶을 직업적 음모와 경쟁, '질투심'(gelosia di mestiere이탈리아어)으로 인한 독살 시도, 음모와 난투, 승리와 역경, 극적인 연애 사건의 끝없는 연속으로 묘사한다. 마치 그의 그림처럼 어두운 부분과 눈부신 빛, 우울함과 황홀경의 교차이다. 우리는 차라리 리베라의 삶에 대한 기록과 확립된 날짜에 충실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10. 관련 항목
- 바로크 회화
- 테네브리즘
- 카라바조
- 나폴리파
- 스페인 황금기 미술
- 프란시스코 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