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헤르만 본디 경הרמן בונדי헤르만 본디히브리어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수학자이자 우주론자이다. 그는 프레드 호일 및 토마스 골드와 함께 우주의 정상 상태 모델을 개발하여 빅뱅 이론의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본디는 또한 일반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특히 중력파의 본질을 올바르게 설명한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1990년 자서전에서 그는 1962년에 발표한 중력파에 관한 연구를 자신의 "최고의 과학 연구"로 꼽았다. 학술적 업적 외에도 그는 유럽 우주 연구 기구(ESRO) 사무총장, 영국 국방부 및 에너지부의 수석 과학 고문 등 다양한 공공 서비스 직책을 수행하며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평생 인본주의 철학을 신봉하며 인본주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헤르만 본디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반유대주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2.1. 어린 시절 및 가족 배경
본디는 1919년 11월 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의 레알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나이부터 수학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던 본디는 먼 친척이자 가족 중 유일한 수학자였던 아브라함 프렝켈에 의해 저명한 아서 에딩턴에게 추천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수학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에딩턴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선견지명을 보였다. 1938년 안슐루스 직전, 부모님의 위험한 상황을 깨달은 그는 즉시 오스트리아를 떠나라는 전보를 보냈다. 본디의 부모님은 가까스로 스위스로 피신한 뒤, 이후 뉴욕에 정착했다.
2.2. 교육 및 전시 경험
에딩턴의 권유로 본디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 트라이포스를 공부하기 위해 1937년 영국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그는 '우호적 적성국인'으로 분류되어 맨섬과 캐나다에 억류되기도 했다. 당시 함께 억류되었던 이들 중에는 토마스 골드와 막스 페루츠도 있었다. 1940년, 본디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최고 성적 졸업생인 시니어 랭글러가 되었다. 본디와 골드는 1941년 말 억류에서 풀려나 프레드 호일과 함께 해군본부 신호국에서 레이더 연구에 참여했다. 그는 1946년 영국 시민이 되었다.
3. 학술 경력 및 연구
본디의 학술적 경력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시작되어 킹스 칼리지 런던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정상 우주론과 일반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3.1. 초기 학술 역할 및 주요 협력
본디는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을 강의했다. 그는 1943년부터 1949년까지, 그리고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레드 호일과 토마스 골드와 긴밀하게 협력하며 중요한 학술적 기초를 다졌다.
3.2. 정상 우주론
1948년, 헤르만 본디는 프레드 호일, 토마스 골드와 함께 정상 우주론을 정립했다. 이 이론은 우주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물질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새로운 항성과 은하를 형성함으로써 우주의 평균 밀도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당시 정상 우주론은 빅뱅 이론의 주요 대안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MB)의 발견 전까지는 경쟁력 있는 우주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CMB의 발견 이후 빅뱅 이론에 의해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3.3.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기여
본디는 일반 상대성이론 분야에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중력 복사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한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본디 복사 좌표, 본디 k-계산법, 본디 질량, 본디 뉴스 개념 등을 도입하고 관련 논문을 다수 저술했다. 또한 리처드 파인만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끈끈한 구슬 논증'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논증은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중력 복사가 실제로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해 예측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했으며, 이는 약 1955년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었다. 1947년의 한 논문은 비균질하고 구형 대칭적인 먼지 해법으로 알려진 `르메트르-톨먼 계량`(LTB 또는 르메트르-톨먼-본디 계량이라고도 함)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본디는 또한 레이먼드 리틀턴과 협력하여 가스 구름에서 항성이나 블랙홀로의 물질 `강착` 이론에 기여했으며, 그의 이름은 "`본디 강착`" 및 "`본디 반경`"과 같은 개념에 남아있다. 그는 또한 음질량의 관성 및 중력 상호 작용을 최초로 분석했다.
3.4. 후기 학술직
본디는 1954년 킹스 칼리지 런던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85년에는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왕립천문학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4. 공공 서비스 및 기타 활동
본디는 학술 연구 외에도 다양한 공공 및 사회적 기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4.1. 정부 및 국제 기구에서의 역할
본디는 여러 정부 및 국제 기구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유럽 우주 연구 기구(ESRO)의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이 기구는 후에 유럽 우주국(ESA)으로 발전했다. 이후 그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영국 국방부의 수석 과학 고문을 지냈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영국 에너지부의 수석 과학 고문으로 활동했다. 또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자연환경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1년부터 1997년까지 고등교육연구회 회장,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수로학회 회장을 지냈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는 케임브리지 처칠 칼리지의 석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4.2. 공공 프로젝트에 대한 기여
본디는 중요한 공공 프로젝트에도 깊이 관여했다. 1953년 런던의 홍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후에 템스 방벽 건설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전력 생산을 위한 세번 강 댐 건설 제안을 지지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제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1963년에는 BBC에서 'E=mc2'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1940년부터 2000년까지의 연구 논문과 기록물은 야누스 프로젝트에 의해 109개의 기록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5. 수상 및 영예
본디는 평생 동안 그의 탁월한 학술적 업적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그는 1959년 왕립학회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1973년에는 바스 훈장 나이트 컴패니언으로 임명되어 '경' 칭호를 받았다. 주요 학술상으로는 1983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메달, 1988년 수학 및 응용 연구소의 금메달, 그리고 2001년 왕립천문학회 금메달이 있다. 또한 `인문주의에 대한 공로로 G.D. 비를라 국제상`을 수상했다. 1973년에는 물리학 연구소의 `구스리 메달`을 받았고, 1960년부터 1963년까지 `제임스 스콧 상 강연`을 맡았다. 1974년에는 배스 대학교에서 명예 이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6. 철학과 인본주의
본디는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인본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지키며 이에 따른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6.1. 인본주의적 신념의 형성 배경
본디의 부모는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평생 인본주의자로 살았다. 그는 종교가 억압과 편협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은 프레드 호일과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자유 사상'을 옹호하는 데 여러 차례 목소리를 냈으며, 초기부터 영국 무신론자 또는 인본주의 서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6.2. 인본주의 활동
본디는 1982년부터 1999년까지 영국 인본주의 협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합리주의 언론 협회`(Rationalist Press Association)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인본주의 선언문 II의 서명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인도의 합리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안드라프라데시주의 무신론자 센터(Atheist Centre)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그와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이 센터를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센터 과학 박물관의 강당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한 권위 있는 국제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받은 상금을 무신론자 센터와 뭄바이의 여성 건강 프로젝트에 나누어 기부하기도 했다.
7. 사생활
본디는 1947년 역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틴 스톡먼과 결혼했다. 그녀는 프레드 호일의 연구생 중 한 명이었으며, 본디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부부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그중 딸 리즈 본디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교수이다.
8. 사망
헤르만 본디는 2005년 9월 10일 케임브리지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케임브리지 근처의 앵글시 수도원에 뿌려졌다.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2015년에 사망했다.
9. 유산 및 평가
헤르만 본디는 우주론과 일반 상대성이론 분야에 대한 심오한 기여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공 서비스 활동과 평생에 걸친 인본주의적 신념을 통해 과학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9.1. 과학적 유산
본디의 가장 잘 알려진 과학적 유산은 프레드 호일과 토마스 골드와 함께 개발한 정상 우주론이다. 비록 이 이론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MB)의 발견 이후 빅뱅 이론에 의해 가려졌지만, 이는 우주론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대안적 관점을 제공했다. 그는 중력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본디 k-계산법, 본디 질량 등 관련 개념을 도입하여 일반 상대성이론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끈끈한 구슬 논증'을 대중화하여 중력 복사의 물리적 의미에 대한 논의를 촉진했다. 그의 르메트르-톨먼-본디 계량에 대한 기여와 강착 이론(본디 강착, 본디 반경)은 항성 및 블랙홀 주변의 물질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9.2. 공공 및 인본주의적 유산
본디의 공공 서비스 활동은 과학 정책과 사회 기반 시설 발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럽 우주 연구 기구(ESRO), 영국 국방부, 영국 에너지부 등에서의 최고 과학 고문 역할은 과학적 전문성을 정책 결정에 통합하는 데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특히 1953년 런던 홍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템스 방벽 건설이라는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로 이어져 시민 안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평생에 걸친 인본주의 신봉과 영국 인본주의 협회 및 합리주의 언론 협회 회장으로서의 활동은 영국 인본주의 운동의 확산과 시민 사회 내에서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문주의 선언문 II 서명과 인도 무신론자 센터에 대한 지원은 그의 신념이 국경을 넘어 인류의 복지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9.3. 비판 및 논쟁
본디의 학설 중 가장 큰 논쟁점은 그가 프레드 호일, 토마스 골드와 함께 주창했던 정상 우주론이었다. 이 이론은 빅뱅 이론과 오랜 기간 경쟁했지만, 1964년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MB)의 발견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면서 점차 지지를 잃었다. 비록 정상 우주론은 현재 주류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이는 초기 우주론 연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깊은 논의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그가 대중화했던 '끈끈한 구슬 논증'은 중력파의 물리적 실재성을 둘러싼 과학계 내부의 논쟁을 약 1955년까지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과학적 발견의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과 관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