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Albert Wilhelm Heinrich Prinz von Preußen독일어,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는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황자이자 해군 대제독 및 해군 총감이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남동생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차남이며, 어머니를 통해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해군 장교로서 다양한 함선과 함대를 지휘했으며, 최종적으로 대제독 및 해군 총감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평생 해군에 헌신한 인물로, 특히 기술 혁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와이퍼 발명에 기여하고 초기 파일럿 면허를 취득하는 등 현대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요트와 자동차 경주를 즐기는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또한,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 군주 중 최초로 청나라 황실을 접견하고, 여러 국가를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하인리히 왕자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군사 교육을 받았고, 특히 해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2.1. 출생 및 가족
하인리히 왕자는 1862년 8월 14일 베를린에서 당시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훗날 프리드리히 3세 황제)과 영국 왕세녀 빅토리아(훗날 빅토리아 황후)의 셋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머니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하인리히는 훗날 빌헬름 2세가 되는 형보다 3살 어렸다. 그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자녀들에게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했으나, 하인리히는 이에 부응하지 못해 어머니로부터 "절망적인 게으름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형 빌헬름 2세나 누이동생 샬럿과 함께 어머니를 싫어하게 되었다.
2.2. 교육
하인리히는 어린 시절부터 해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포츠담의 신궁전 정원에서 돛단배 모형을 만들며 놀았고, 이는 그가 해군 장교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77년 카셀의 김나지움을 중퇴한 15세의 하인리히는 독일 제국 해군 사관생도 프로그램에 입대했다. 그의 해군 교육 과정에는 1878년부터 1880년까지 2년간의 세계 일주 항해, 1880년 10월의 해군 장교 적성 시험 통과, 그리고 1884년부터 1886년까지의 독일 해군 사관학교 교육이 포함되었다. 그는 임관 후 여러 나라를 방문했고, 이후 자신의 해외 방문 경험을 회고록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3. 해군 경력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에 입대하여 초기 함정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쌓았고, 이후 함대 및 군단 지휘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활약했다.
3.1. 해군 입대 및 초기 함정 지휘

하인리히 왕자는 황자라는 신분 덕분에 빠르게 지휘관직에 올랐다. 1887년에는 어뢰정 및 제1어뢰정 전대를 지휘했고, 1888년에는 황실 요트 호엔촐레른의 함장을 맡았다. 1889년부터 1890년까지는 순양함 이레네, 해안방어함 베오울프, 철갑함 작센, 전함 뵈르트의 함장을 역임했다.
3.2. 함대 및 군단 지휘
1897년부터 하인리히 왕자는 여러 해군 기동 부대를 지휘했다. 여기에는 1898년 동아시아 함대와 함께 자오저우만과 칭다오 지역에 대한 독일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확보하는 데 참여한 임시 전대가 포함되었다. 그의 성공은 군사적인 것보다 외교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청나라 황실에서 접견을 받은 최초의 유럽 군주가 되었다.
1899년에는 공식적으로 동아시아 함대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901년 1월 독일로 귀국한 후 같은 해 가을에는 제1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1903년에는 발트해 해군 기지 사령관이 되었고, 1906년부터 1909년까지는 대양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3.3. 제1차 세계 대전 중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인리히 왕자는 발트해 함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전력은 러시아 발트해 함대보다 훨씬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가 붕괴할 때까지 러시아 해군을 방어적으로 몰아붙이고 독일 해안에 대한 공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와의 적대 행위가 끝난 후, 그의 임무는 종료되었고 하인리히 왕자는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에서 군주제가 해체되면서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혁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가족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킬을 탈출했다.
3.4. 주요 직책 및 승진
하인리히 왕자의 해군 경력은 다음과 같은 주요 직책과 승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 1872년 8월 14일: 해군 소위 (기초 훈련 및 해군 사관학교, 1877-1878)
- 1881년 10월 18일: 해군 중위 (훈련 항해 및 해군 사관학교, 1878-1882)
- 1884년 10월 18일: 해군 대위 (콜벳함 올덴부르크 부장, 1886)
- 1887년 10월 18일: 해군 소령 (제1어뢰정 전대 사령관, 1887; 황실 요트 호엔촐레른 함장, 1888)
- 1889년 1월 27일: 해군 대령 (방호순양함 이레네 함장, 1889-1890; 장갑해안방어함 베오울프 함장, 1892; 철갑 콜벳함 작센 함장, 1892-1894; 전함 뵈르트 함장, 1894-1895)
- 1895년 9월 15일: 해군 소장 (제1전함전대 제2사단 사령관, 1896-1897; 순양함전대 제2사단 사령관, 1897-1899)
- 1899년 12월 5일: 해군 중장 (순양함전대 사령관, 1899-1900; 제1전함전대 사령관, 1900-1903)
- 1901년 9월 13일: 해군 대장 (발트해 해군 사령관, 1903-1906; 대양함대 사령관, 1906-1909)
- 1909년 9월 4일: 대제독 (독일 제국 해군 총감, 1909-1918; 발트해 함대 총사령관, 1914-1918)
4. 개인 생활 및 관심사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 군인으로서의 삶 외에도 현대 기술과 스포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4.1. 성격 및 사생활
하인리히는 형 빌헬름 2세와는 대조적으로 겸손한 성격으로, 병사들과 독일 북부 지역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190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기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독일계 미국인 사회에서도 환영받았다.
1888년 5월 24일, 하인리히는 그의 사촌인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딸 이레네 공주와 결혼했다. 결혼식에는 당시 위독했던 부친 프리드리히 3세 황제와 어머니 빅토리아 황후가 참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장남 발데마르와 삼남 하인리히는 혈우병을 앓았다. 이 혈우병은 이레네를 통해 부모 양측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이었다. 특히 삼남 하인리히는 4세의 나이에 머리를 부딪힌 후 혈우병으로 사망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발데마르 빌헬름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빅토르 하인리히 | 1889년 3월 20일 | 1945년 5월 2일 | 칼리스타 리페비스터펠트 공녀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음. |
빌헬름 빅토르 카를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 1896년 11월 27일 | 1978년 11월 14일 | 작센알텐부르크의 샬럿 공주와 결혼, 자녀 있음. |
하인리히 빅토르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 1900년 1월 9일 | 1904년 2월 26일 | 혈우병으로 4세에 사망. |


독일 혁명 이후 하인리히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에케른푀르데 근처 헴멜마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는 은퇴 후에도 모터스포츠와 요트를 계속 즐겼으며, 노년에도 레가타(요트 경주)에서 성공적인 참가자였다. 그는 특히 나이 든 선원들 사이에서 여전히 착용되는 "프린스 하인리히 모자"를 대중화시켰다.
4.2. 기술 및 발명
하인리히 왕자는 현대 기술에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기술 혁신의 실질적인 가치를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군인으로서 그는 잠수함과 항공기 같은 최신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으로 무기 체계에 도입하고자 했다. 특히 항공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1910년에는 독일에서 최초로 파일럿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러시아 해군에 대항하기 위해 항공모함 운용까지 계획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고, 자동차 수동 와이퍼를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른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 경적을 발명했다고도 한다.
4.3. 스포츠 및 취미
하인리히는 요트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1887년 해군 장교들이 설립한 킬 요트 클럽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었으며, 빠르게 클럽의 후원자가 되었다.
자동차 경주에도 열정적이었던 그는 1908년 독일 그랑프리의 전신인 "프린스 하인리히 투어"를 그의 이름을 따서 시작했다. 그는 형 빌헬름 2세와 함께 독일 황실 자동차 클럽을 후원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영국 자동차 제조업체인 복스홀 모터스는 1911년 경주 참가를 위해 제작된 모델 C-10을 그의 이름을 따서 "복스홀 프린스 하인리히"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5. 외교 활동 및 해외 방문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 지휘관으로서의 임무 수행과 더불어 여러 해외 국가를 방문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5.1. 중국 방문
하인리히 왕자는 1898년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서 자오저우만과 칭다오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청나라 황실에서 접견을 받은 최초의 유럽 군주가 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선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5.2. 일본 방문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 사관생도 시절이던 1878년 10월 6일부터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당시 16세였던 그는 콜벳함 프린츠 아달베르트에 탑승하여 남미 여러 국가를 순방한 뒤 태평양을 횡단하여 1879년 5월 23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하며 첫 일본 방문을 했다.
일본 도착 후 5월 26일, 독일어에 능통했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과 외무성 어용각 하치스카 모치아키가 프린츠 아달베르트 호에 승선하여 메이지 천황의 환영 의사를 전달했다. 5월 28일 하인리히는 함정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역에서 신바시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하마리큐 내 영빈관인 엔료칸으로 안내되었다. 이튿날인 5월 29일, 그는 메이지 천황을 처음으로 배알했다. 하인리히는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로부터 받은 프로이센 최고 훈장인 흑수리 훈장을 메이지 천황에게 증정했고, 메이지 천황은 답례로 욱일대수장을 수여했다. 다음 날인 5월 30일에는 메이지 천황이 엔료칸으로 직접 행차하여 하인리히를 방문하고 화병과 비단 직물 등을 선물하며 환대했다.
이후 하인리히 왕자는 일본 관광을 즐겼다. 6월 4일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 내무경 이토 히로부미 등 저명한 인사들과 함께 가부키를 관람했다. 독일인 거류지에서도 무도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하인리히는 환영받았다. 그는 이후 후지산 등반도 시도했으나,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여름 더위를 피해 요코하마항의 프린츠 아달베르트 호로 돌아와 피서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콜레라가 유행하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무더운 일본의 여름을 건강상의 이유로 북쪽 해역에서 보냈으며, 홋카이도의 항구 도시 하코다테로부터 당시 미개척지였던 북쪽 섬 내륙까지도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9월 17일 프린츠 아달베르트 호는 다시 요코하마에 입항했다. 9월 말부터 10월까지 닛코를 방문했으며, 10월 15일에는 아카사카 임시 궁궐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아리스가와노미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궁내경 도쿠다이지 사네노리, 이와쿠라,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참석했다.
11월 중순에는 서일본을 방문하여 교토 어소 등을 견학하고 아라시야마에서 호즈 강 뱃놀이를 즐겼으며, 기온, 기요미즈데라 등도 구경했다. 오쓰, 사카모토, 우지도 방문했다. 12월에 하인리히를 태운 프린츠 아달베르트 호는 나가사키로 향했고, 1880년 1월 6일 나가사키를 떠난 뒤 9일 고베항에 도착했다.
- 스이타 사건**: 1880년 2월 7일, 오사카부 시모시마군 고지촌(현 오사카부 스이타시 기시베키타)의 '금렵 제찰지'인 샤카가이케에서 당시 고베에 체류 중이던 하인리히 왕자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몰래 오리 사냥을 하고 있었다. 금렵 구역인 줄 몰랐던 나나오촌의 이다 모토키치(井田元吉)가 하인리히 왕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로이센 측은 이튿날 황손에 대한 불경한 행위가 있었다며 오사카부와 외무성에 항의를 제기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담판 결과, 같은 달 14일 오사카 부청과 기시베 신사에서 "사죄식"이 거행되었고, 관련자 13명이 처벌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수사 및 처리 과정을 안이하게 진행한 순경 8명은 불경죄로 면직되었고, 경감 5명은 1개월 봉급 정지 처분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는 독일인(프로이센인)에게는 일프수호통상조약(1861년 1월 24일 체결)으로 시작된 치외법권이 인정되었으며, 이는 북독일 연방 창설 후의 조약(1869년 2월 20일 체결)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과의 조약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스이타 사건은 일본의 불평등 조약 하의 약소 외교의 한 예로 지적되며, 이에 대한 비판의 고조와 자유민권운동, 내셔널리즘 고양의 관점에서 연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이를 약소 외교가 아닌, 조약 개정을 큰 지장 없이 추진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사건 이전에는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치외법권 및 영사 재판권 문제보다 관세 자주권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이 사건 이후에는 치외법권 및 영사 재판권을 포함한 개정 조약안을 각 주일 외국 공사들에게 송부하는 등 열강과의 협상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894년 영일통상항해조약을 통해 열강들로부터 영사 재판권 철폐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하인리히 왕자는 사건 후 4월 2일 다시 궁중에 들렀는데, 메이지 천황은 오사카에서의 사건에 대해 열렬히 유감의 뜻을 표하며, 여러 일이 있었겠지만 일본에 대한 좋은 추억을 안고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인리히는 4월 5일 요코하마를 출항하여 다음 방문지인 상하이로 향했다.
하인리히는 1899년에 일본을 재방문했으며, 1912년에는 메이지 천황의 대장례에 독일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5.3. 대한제국 방문
하인리히 왕자는 1899년 6월 9일부터 6월 20일까지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방문 당시 그는 고종황제에게 조선의 고유 무술을 보여달라고 간청했고, 궁술 시범을 본 후 크게 감탄하여 직접 활을 쏘아보기까지 했다.
6. 명예 및 훈장
하인리히 왕자는 평생에 걸쳐 군 복무와 외교적 공헌을 인정받아 수많은 명예와 훈장을 수여받았다.
6.1. 독일 내 훈장 및 직책
- 프로이센 왕국:
- 흑수리 훈장 기사 (1872년 8월 14일); 칼라와 함께 (1881)
- 적수리 훈장 대십자 (1872)
- 왕관 훈장 1급 기사 (1872년 8월 14일)
-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대사령관 십자 (1872년 8월 14일)
- 요한 기사단 정의 기사
- 장기 근속 표창
- 푸어 르 메리트 훈장 (군사) (1916년 8월 1일); 오크 잎사귀와 함께 (1918년 1월 24일)
- 호엔촐레른: 호엔촐레른 공가 훈장 1급 명예 십자
- 안할트: 알베르트 곰 훈장 대십자 (1884)
- 바덴:
- 충성 왕가 훈장 기사 (1881)
- 베르톨트 1세 훈장 기사 (1881)
- 바이에른: 성 후베르트 훈장 기사 (1886)
- 브라운슈바이크: 하인리히 사자 훈장 대십자 (1888)
- 에르네스틴 공국들: 작센에르네스틴 왕가 훈장 대십자 (1885)
- 자유 한자 도시들: 한자 십자 훈장
- 헤센 및 라인:
- 루트비히 훈장 대십자 (1875년 4월 1일)
- 황금 사자 훈장 기사 (1888년 5월 24일); 칼라와 함께
- 용감 메달
- 메클렌부르크: 벤드 왕관 훈장 대십자 (광물 및 다이아몬드 왕관과 함께)
- 올덴부르크: 페터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공작 훈장 대십자 (황금 왕관과 함께, 1878년 2월 18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백수리 훈장 대십자 (1882)
- 작센:
- 루에 왕관 훈장 기사 (1882)
- 알베르트 훈장 대십자 (왕관 및 칼과 함께)
- 뷔르템베르크: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대십자 (1882)
6.2. 해외 훈장 및 명예 학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 이슈트반 왕립 훈장 대십자 (1872)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장
- 브라질: 남십자성 훈장 대십자
- 불가리아: 성 알렉산더 훈장 대십자
- 청나라: 쌍룡 훈장 1등급 2호
- 덴마크: 코끼리 훈장 기사 (1888년 7월 30일)
- 핀란드: 자유 십자 훈장 대십자 (1918)
- 그리스: 구세주 훈장 대십자
- 하와이: 칼라카우아 훈장 대십자
- 이탈리아:
- 최고 성모 영보 훈장 기사 (1875년 10월 18일)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대십자 (1875년 10월 18일)
- 토스카나 대공 가문: 성 요셉 훈장 대십자
- 성좌: 최고 그리스도 훈장 기사
- 일본: 국화 훈장 대수장 (1879년 6월 10일)
- 대한제국: 금척대훈장 (1904)
- 몬테네그로: 다닐로 1세 훈장 대십자
-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
- 오스만 제국: 오스마니에 훈장 1등 다이아몬드와 함께
- 포르투갈:
- 두 왕가 띠 훈장 대십자
- 탑과 검 훈장 대십자
- 루마니아: 루마니아의 별 훈장 대십자
- 러시아 제국:
- 성 안드레이 훈장 기사
-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기사
- 백수리 훈장 기사
- 성 안나 훈장 1급 기사
- 성 스타니슬라프 훈장 1급 기사
- 세르비아: 백수리 훈장 대십자
- 조호르: 조호르 왕실 훈장 1등 (1898년 2월 24일)
- 시암: 차크리 왕가 훈장 기사 (1899년 12월 24일)
- 스페인:
- 황금양털 훈장 기사 (1883년 10월 3일)
- 해군 공로 훈장 대십자 (백색 훈장과 함께, 1903)
- 스웨덴-노르웨이:
- 세라핌 훈장 기사 (1887년 10월 17일)
- 성 올라프 훈장 대십자 (칼라와 함께, 1888년 8월 1일)
- 영국:
- 바스 훈장 명예 대십자 (민간) (1881년 8월 13일) - *1915년 박탈됨*
- 가터 훈장 기사 (1889년 8월 8일) - *1915년 박탈됨*
- 왕립 빅토리아 체인 수훈자 (1902년 8월 9일) - *1915년 박탈됨*
- 베네수엘라: 해방자 훈장 칼라
하인리히 왕자는 또한 여러 명예 학위와 직책을 수여받았다.
- 1899년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명예 공학박사 학위
- 1902년 3월 6일 하버드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 1902년 2월 25일 뉴욕시 명예 시민 (뉴욕 방문 중)
- 1902년 3월 10일 필라델피아 명예 시민 (필라델피아 방문 중)
7. 사망
하인리히 왕자는 1929년 4월 20일 헴멜마르크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1929년 4월 24일 헴멜마르크 성에서 거행되었다.
8. 평가 및 영향
하인리히 왕자는 동시대인들에게 겸손하고 대중적인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기술과 스포츠 분야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8.1. 대중적 평가
하인리히 왕자는 형인 빌헬름 2세와는 달리 겸손하고 친근한 성격으로 인해 병사들과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독일 북부 지역에서 그의 인기는 높았다. 그는 또한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었는데, 1902년 미국 방문 시 미국 언론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독일계 미국인 사회에서도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와 외교관으로서의 재능을 잘 보여준다.
8.2. 기술 및 스포츠에 미친 영향
하인리히는 해군 장교로서 잠수함이나 항공기 등 신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술의 실질적인 가치를 빠르게 파악하고 이를 군사 전략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려 했다. 직접 파일럿 면허를 취득하고 항공모함 운용을 구상했던 것은 그의 기술 혁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요트와 자동차 경주에 대한 애정이 깊어, 1887년 킬 요트 클럽의 창립 회원으로서 클럽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908년 그의 이름을 딴 프린스 하인리히 투어는 독일 그랑프리의 전신이 될 만큼 독일 자동차 경주 문화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대중화시킨 "프린스 하인리히 모자"는 오늘날에도 많은 선원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