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 필로메나(Philomena라틴어, Filomena라틴어; Ἁγία ΦιλουμένηHagía Philoumēnē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Αγία ΦιλομέναAgía Filoména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공경하는 동정 순교자이자 성인이다. 그녀의 유해는 1802년 5월 24일에서 25일 사이에 로마의 프리실라 카타콤바에서 발견되었다. 무덤을 덮고 있던 세 개의 테라코타 석판에는 "Pax Tecum Filumena라틴어" (라틴어로 "필로메나,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이름이 '필로메나'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필로메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φιλουμένη'(φιλουμένηphilouménē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사랑받는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에서는 라틴어 'filia'("딸")와 'lumen'("빛")에서 유래한 "빛의 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필로메나의 유해는 1805년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로 옮겨졌으며, 이후 그녀에 대한 광범위한 신심이 확산되었다. 1835년 폴린 자리코의 치유를 비롯한 여러 기적이 그녀의 전구에 기인한다고 여겨지며, 이로 인해 그녀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 불리며 영아, 아기, 청소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장 마리 비안네 신부 또한 자신에게 기인한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치유들을 필로메나의 전구 덕분이라고 말했다.
1837년부터 1961년까지 그녀의 축일 제정이 지역 교회력에서 승인되었으나, 로마 보편 전례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1961년 2월 14일, 교황청은 필로메나의 이름을 모든 전례력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는 그녀의 역사적 실존성에 대한 논쟁과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에서는 필로메나의 생애와 전승, 유해 발견 과정, 공경과 기적, 교회 인정 및 전례, 그리고 역사적 비판과 논쟁을 균형 있게 다룰 것이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성 필로메나는 289년 1월 10일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그리스의 작은 왕국의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왕족 혈통을 지녔다. 그녀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여 이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당시 로마 출신의 기독교인 의사 푸블리우스는 이들의 영적 맹목과 특히 왕비의 불임에 연민을 느꼈다. 성령의 감화로 그는 왕과 왕비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며, "아이를 원한다면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그의 말에 은총이 따랐고, 왕과 왕비는 마음이 열려 푸블리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얼마 동안 교리를 배우고 궁정의 몇몇 구성원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월 10일, 필로메나가 태어났다. 그녀는 "루미나"(Lumina라틴어, "빛")라는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는 그녀가 부모의 진정한 신앙의 빛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필로메나"(Philomena라틴어, "빛의 딸")라고 불렀는데, 이는 세례를 통해 그녀의 영혼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했다. 필로메나의 탄생으로 왕국의 많은 가정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필로메나는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으며, 이 가르침은 그녀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녀는 5세에 처음으로 성찬례를 영했고, 그날부터 동정녀들의 신랑인 구세주와 영원히 결합하려는 열망이 그녀의 마음에 뿌리내렸다. 11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결 서원을 하였다. 그녀가 13세가 되던 해, 당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을 맹렬히 박해하고 있었고, 필로메나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니코폴리스에도 전쟁을 위협했다.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맞설 수 없음을 깨닫고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가족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3. 유해 발견
성 필로메나의 유해는 1802년 5월 24일,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에 위치한 프리실라 카타콤바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비문이 새겨진 로쿨루스 (암벽을 파서 만든 무덤 공간)가 발견되었고, 다음 날인 5월 25일에 조심스럽게 조사되고 개봉되었다. 로쿨루스는 세 개의 테라코타 석판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 석판들에는 "Lumena - Pax Te - Cum Fi"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은 고대 전통에 따라 중간 줄부터 읽으면 "Pax tecum Filumena" (라틴어로 "필로메나,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무덤 안에서는 12세에서 13세 사이의 여성 해골이 발견되었다. 해골의 머리 근처에는 말라붙은 피의 흔적이 담긴 작은 유리병이 박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순교자의 무덤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의 연구에 의해 이러한 유리병이 순교자의 무덤을 나타낸다는 믿음은 나중에 부정되었지만, 최근에는 신학자 마크 미라발레와 같은 이들이 원래의 견해를 옹호하기도 한다. 무덤을 둘러싼 석판에는 닻, 세 개의 화살, 종려나무 가지, 꽃, 그리고 담쟁이 잎과 같은 상징들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묻힌 이의 순교와 순결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특히 해골이 화살에 찔린 흔적이 발견되어, 전문가들은 이 유해가 12~13세의 어린 소녀 순교자의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1805년,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의 프란체스코 데 루치아 신부는 자신의 기도실에 안치할 유해를 요청했고, 6월 8일에 1802년 5월에 발견된 유해(당시 먼지와 파편 상태)를 인도받았다. 이 유해는 8월 10일에 무냐노에 도착하여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1805년 9월 29일에는 새로운 은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건축되어 성유물이 안치된 경당으로 옮겨졌다. 1827년에는 교황 레오 12세가 무덤에서 가져온 세 개의 비문 석판을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 성당에 기증했다.
4. 생애와 전승
성 필로메나의 생애와 순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폴리의 도미니코 3회 소속 수녀인 마리아 루이사 디 제수가 필로메나 자신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1833년 12월 21일,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이 계시가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마리아 루이사 디 제수의 계시에 따르면, 필로메나는 자신을 그리스의 왕의 딸이며, 부모님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약 13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결 서원을 하였다.
4.1. 가족 배경 및 신앙
필로메나의 부모는 그리스의 작은 왕국의 왕과 왕비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여 이교 신들에게 자녀를 간청했다. 이때 로마 출신의 기독교인 의사 푸블리우스가 그들의 영적 맹목과 왕비의 불임에 연민을 느껴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푸블리우스의 권고에 따라 왕과 왕비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월 10일, 필로메나가 태어났고, 그녀는 "루미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그녀가 신앙의 빛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났음을 의미했다. 부모는 그녀를 "필로메나" 즉 "빛의 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세례를 통해 그녀의 영혼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빛을 상징했다. 그녀의 탄생으로 왕국의 많은 가정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필로메나는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으며, 5세에 첫 성찬례를 영하고, 11세에 순결 서원을 통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봉헌했다.
4.2. 순결 서원 및 황제의 구혼 거부
필로메나가 13세가 되던 해, 당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쟁을 위협했다. 아버지는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가족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어린 필로메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필로메나의 부모는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필로메나는 이미 11세에 예수 그리스도께 순결을 서원했기 때문에 황제의 구혼을 단호히 거부했다.
부모는 로마의 황후가 될 수 있는 엄청난 행운을 강조하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필로메나는 자신의 순결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이미 그분과 결혼 서약을 했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너무 어려 그러한 서약을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그녀를 압박했다. 어머니는 눈물로 부모와 왕국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했지만, 필로메나는 "하느님이 저의 아버지이시고 하늘이 저의 어머니이십니다"라고 단호히 답했다. 결국 부모는 그녀의 뜻을 꺾지 못했고, 황제에게 그녀의 결정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4.3. 박해와 순교
필로메나의 거절에 분노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시작했다.
- 감금 및 채찍질**: 필로메나는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갇혀 손발이 묶인 채 하루 한 번 빵과 물만 제공받았다. 36일 동안 이러한 고통을 견디던 중,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나타나 그녀가 사흘 더 감옥에 있다가 풀려날 것이며, 이후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40일 후, 황제는 그녀를 끌어내 기둥에 묶고 잔혹하게 채찍질하도록 명령했다. 필로메나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상처로 뒤덮였다. 황제는 그녀가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감옥으로 돌려보냈으나, 두 천사가 나타나 그녀의 상처 입은 몸에 귀한 기름을 바르고 완전히 치유해주었다. 다음 날, 황제는 그녀가 완벽한 건강과 아름다움을 되찾은 것을 보고 경악했다. 황제는 이를 자신의 신인 유피테르의 은총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구혼했지만, 필로메나는 "저의 하느님은 제가 오직 그분께만 속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거부했다.
- 닻을 이용한 익사**: 황제는 필로메나를 티베르강에 던져 익사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녀의 목에 무거운 쇠 닻을 묶어 강물에 던졌으나, 두 천사가 나타나 밧줄을 끊고 그녀를 강둑으로 들어 올려 물 한 방울 젖지 않은 채 안전하게 데려왔다. 이 기적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 화살 공격**: 황제는 필로메나가 마법을 사용한다고 비난하며, 화살로 꿰뚫고 로마 거리를 끌고 다니도록 명령했다. 그녀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다음 날 아침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황제는 다시 화살 공격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화살이 그녀의 몸에 닿지 않았고, 두 번째는 화살이 빗나갔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화살이 되돌아와 궁수 여섯 명을 죽였고, 이를 본 다른 궁수들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 참수**: 거듭된 기적과 개종자들의 증가에 격분한 황제는 결국 필로메나를 즉시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필로메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304년 8월 10일 금요일 오후 3시 30분에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녀의 영혼은 승리와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5. 공경과 기적

성 필로메나에 대한 신심은 그녀의 유해가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에 도착하면서부터 널리 확산되었다. 1833년 프란체스코 데 루치아 신부가 저술한 『성 필로메나 동정 순교자의 성해를 로마에서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로 옮긴 역사적 보고서』(Relazione istorica della traslazione del sagro corpo di s. Filomena da Roma a Mugnano del Cardinale이탈리아어)에는 그녀의 유해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 여러 기적이 동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모상이 사흘 동안 계속해서 액체를 흘렸고, 성인의 뼈 가루가 증식하여 수백 개의 성유물함을 채울 만큼 늘어났음에도 원래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필로메나에 대한 신심에는 여러 실천 방법이 있다.
- 필로메나의 끈**: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필로메나의 끈"을 착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 끈에는 여러 대사가 부여되었는데, 끈을 처음 착용한 날에는 전대사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 대사 규정의 일반적인 개정인 『대사에 관한 교리』(Indulgentiarum doctrina라틴어)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갱신되지 않았다.
- 필로메나의 묵주**: 삼위일체를 기리는 세 개의 흰색 구슬과 필로메나의 생애 13년을 기리는 열세 개의 빨간색 구슬로 구성된 "필로메나의 묵주"도 있다.
- 성 필로메나의 기름**: 몸과 영혼의 치유를 위해 사용되는 성유인 "성 필로메나의 기름"도 그녀에 대한 신심과 관련이 있다.
1876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성 필로메나의 사자』(Messenger of Saint Philomena영어)의 첫 호가 발행되었다. 같은 해 10월 6일, 루이 프티 신부는 파리에서 성 필로메나 형제회를 설립했다. 1886년 11월, 교황 레오 13세는 이 형제회를 대형제회로 승격시켰다. 1912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교서 『신자들의 경건한 단체들』(Pias Fidelium Societates라틴어)을 통해 이를 보편 대형제회로 승격시키면서, 필로메나의 역사적 진정성에 대해 "현재의 진술들은 (성 필로메나에 관하여) 항상 확고하고 유효하며 효과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규범으로 판단되어야 하며, 만약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그 권위가 무엇이든 무효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성 필로메나의 전구에 대한 신심 확산에는 여러 성인들의 공경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장 마리 비안네 신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그녀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필로메나를 기리는 성지를 세우고 자주 그녀를 언급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돌린 기적들을 필로메나의 전구 덕분이라고 말했다.
- 신앙 전파회의 설립자인 폴린 자리코는 1835년 8월 10일 필로메나의 성지에서 거의 죽어가던 심장병으로부터 치유되었다.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 몰로카이의 다미앵 성인은 필로메나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와이 칼라와오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그녀의 이름으로 봉헌했다.
- 그 외에도 베드로 율리아노 에이마르, 베드로 샤넬,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마들렌 소피 바라, 에우프라시에 펠레티에, 요한 네포무크 노이만, 안나 마리아 타이기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이 필로메나에게 헌신했다.
6. 교회 인정 및 전례
1834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 필로메나에 대한 공경을 허용했다. 그리고 1837년에는 놀라 교구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가 속한 교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교구에서 8월 11일(또는 일부 자료에 따르면 9월 9일)에 성 필로메나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을 승인했다.
필로메나의 이름은 시성 또는 복자 선포 즉시 등재되는 로마 순교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1920년 판 로마 미사 경본에는 8월 11일자에 필로메나가 언급되어 있었는데, 이는 "특정 지역을 위한 미사"(Missae pro aliquibus locis라틴어) 섹션에 포함되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사용될 미사는 공통 전례에 있는 동정 순교자의 미사에서 가져오도록 지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1년 2월 14일, 교황청은 필로메나의 이름을 모든 전례력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은 1960년 전례 규범에서 명시된 원칙들을 지역 교회력에 적용하기 위한 지침의 일환으로 내려졌다. 이 문서의 33항은 14개의 특정 축일을 지역 교회력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했지만, 해당 축일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장소에서는 유지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성 필로메나 동정 순교자의 축일(8월 11일)에 대해서는 "성 필로메나 동정 순교자의 축일(8월 11일)은 모든 전례력에서 삭제되어야 한다"(Festum autem S. Philumenae V. et M. (11 augusti) e quolibet calendario expungatur.라틴어)고 명시적으로 지시했다. 따라서 자의교서 『숨모룸 폰티피쿰』에 따라 로마 전례의 특별 양식으로 사용되는 1962년판 로마 미사 경본에는 필로메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7. 역사적 비판과 논쟁
성 필로메나의 역사적 실존성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그녀의 이름이 전례력에서 삭제된 배경이 되었다. 교황청의 삭제 명령은 특히 마리아 루이사 디 제수 수녀의 계시와 관련하여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의문점들 이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문은 주로 19세기 후반 오라치오 마루키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그의 연구는 1911년 『가톨릭 대백과사전』에 필로메나에 대한 기사를 쓴 고고학자이자 교회사학자인 요한 페터 키르슈의 지지를 받았다. 마루키는 무덤에서 발견된 세 개의 석판에 새겨진 비문이 2세기 중반 또는 후반의 것이며, 발견된 유해는 4세기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4세기에는 기독교 박해가 이미 끝났던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름뿐만 아니라 석판을 장식했던 나뭇잎, 두 개의 닻, 종려나무 가지 등 순교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던 상징들도 발견된 유해의 인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석판이 흐트러져 있었다는 주장은 4세기 관습인 이미 새겨진 재료를 재활용하여, 그 장소에 묻힌 사람이 이전의 사람과 동일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설명되었다.
인도네시아어 자료에서는 마리아 루이사 디 제수 수녀의 계시에 기반한 필로메나의 전승이 심각한 역사적, 성인전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야기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고 다른 중세 순교자 전설에서 명백히 차용된 사실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 그리스 왕국**: 필로메나가 그리스 코르푸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 공주라고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설정된 시기에는 그리스 왕국(또는 폴리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코르키라 폴리스는 이미 기원전 148년에 로마 제국에 의해 해체되고 마케도니아 속주에 편입되었다.
- 불임 부모의 개종**: 불임 부모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자녀를 낳는다는 이야기는 중세 순교자 전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야기이다.
- 이름의 어원**: '필로메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의미하며, 현재 나이팅게일로 알려진 새에게 붙여진 고대 이름이다. 이는 'filia luminis'("빛의 딸")와는 관련이 없으며, 'filumena'는 깨진 비석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의 영토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이 황제는 결코 홀아비가 아니었으며, 그의 아내 프리실라는 그의 사후 몇 년까지 살아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제국을 통치했다. 로마 황궁에는 지하 감옥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 이야기 서술의 불일치**: 성녀 자신이 받아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1인칭과 3인칭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서술된다.
- 닻의 사용**: 닻은 귀하고 비싼 도구였으며, 로마 법을 어긴 자를 고문하는 데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비판들은 필로메나의 "수난기"(passio라틴어)가 그녀의 유해가 발견된 카타콤바의 비석에 그려진 도구들을 유일한 근거로 삼아 신심과 공경을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교회가 이 전설에 부여한 인준(imprimatur)은 단지 그 내용에 신앙에 위배되는 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자들이 이를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마크 미라발레가 마루키의 결론이 성 필로메나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마루키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여러 전문가들을 인용했다. 역사학자 마이클 S. 카터(미라발레의 입장을 지지하는)는 19세기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카타콤바 순교자"와 그들의 유물에 대한 공경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성 필로메나에 대한 신심을 다루었다. 또한 2005년 4월, "필로메나 연구 회의 - 1805-2005"에서 피렌체의 오피피치오 델레 피에트레 두레 에 라보라토리 디 레스타우로가 수행한 석판 연구 결과가 공개되었다. 이 분석은 석판에서 오직 한 종류의 석회 모르타르만 발견되었음을 확인하여, 석판이 재배열되지 않았다는 이론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다른 이들은 그녀에게 기인한다고 여겨지는 기적, 오랜 교황의 승인, 그리고 성녀의 지속적인 인기를 근거로 그녀의 공경의 진정성을 강조한다. 이는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 성지의 주임 신부와 이탈리아어 『성인 대백과사전』(Enciclopedia Dei Santi이탈리아어)에서 제시된 견해이다. 전 세계의 순례자들이 이탈리아 놀라 교구의 필로메나 성지에 끊임없이 찾아와 강렬한 대중적 신심을 보여주고 있다.
8. 유산과 영향력
성 필로메나는 수많은 성인들과 신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의 신심은 다양한 형태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 성지 및 건축물**:
- 이탈리아 아벨리노도 무냐노 델 카르디날레에 위치한 성 필로메나 성지에는 그녀의 유해가 실물 크기의 화려한 옷을 입은 성상 안에 안치되어 있다.
- 인도의 마이소르에 있는 성 필로메나 대성당.
-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성 필로메나 교회.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성 필로메나 교회.
- 영국에 있는 성 필로메나 가톨릭 여고등학교.
- 미국 뉴욕주 프랭클린빌의 성 필로메나 로마 가톨릭 교회.
- 브라질 소로카바의 성 필로메나 성지.
- 미국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의 성 필로메나 가톨릭 교회 및 학교.
- 미국 일리노이주 몬티첼로의 성 필로메나 가톨릭 교회.
- 피지 수바의 성 필로메나 콥트 정교회 어린이집.
- 하와이 칼라와오의 성 필로메나 가톨릭교회는 몰로카이의 다미앵 성인이 그녀를 기려 명명한 곳이다.
- 신심의 확산과 영향**:
- 장 마리 비안네 성인은 필로메나를 기리는 성지를 세우고 그녀에게 많은 기적을 돌리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그녀에 대한 신심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 폴린 자리코는 성 필로메나의 전구로 심장병이 치유된 후,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세 개의 가톨릭 협회인 살아있는 묵주기도 협회, 신앙 전파회, 성소 협회를 설립했다.
- 베드로 율리아노 에이마르, 베드로 샤넬,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마들렌 소피 바라, 에우프라시에 펠레티에, 요한 네포무크 노이만, 안나 마리아 타이기 등 수많은 다른 성인들도 필로메나에게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 현대의 신앙적 의미**:
- 성 필로메나에 대한 공경은 현대에도 많은 신자들에게 지속되고 있다. 특히 성 비오 10세회와 관련된 "플로리다 마이애미 성 필로메나 국립 성지" 웹사이트는 1960년대에 그녀의 이름이 전례력에서 삭제된 것을 "하느님의 백성에게 순결과 신앙이라는 미덕이 그토록 도전받는 시기에 가장 강력한 전구자를 박탈하려는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하며, 그녀에 대한 신심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필로메나가 현대 사회의 도전 속에서 신앙과 순결을 지키는 데 중요한 영적 도움을 제공한다고 믿는 신자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
- 필로메나의 이야기는 신앙을 위한 굳건한 의지와 순교 정신을 상징하며, 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한 그녀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모범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