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세베루스의 생애는 로마 제국의 격동기에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하여 군사적 재능과 충성심으로 고위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1.1. 출생 및 배경
세베루스는 3세기 중반 일리리아 북부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는 비록 속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멘(씨족명)을 통해 고대 로마의 유력 씨족 중 하나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혈통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 군 경력
세베루스는 가난으로 인해 군대에 입대했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 로마군 고위 장교로 승진했다. 그는 군 복무 중 황제 갈레리우스를 만나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의 군사적 배경과 충성심은 테트라키아 체제에서 중요한 승진 기회가 되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세베루스는 로마 제국의 전환기에 부제 및 정제로 임명되어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막센티우스와의 내전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2.1. 테트라키아에서의 역할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테트라키아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때 갈레리우스의 추천으로 세베루스는 서로마 제국의 부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방 제국의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하급 동료가 되었다.
역사가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음에 갈레리우스의 제안에 반대하며 "뭐라고! 밤낮을 바꿔 사는 그 춤꾼이자 상습적인 주정뱅이라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가 군대의 회계관과 보급관으로서 충실히 복무했다고 주장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승낙했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속주의 통치를 맡게 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안정에 매우 중요했다.
2.2. 아우구스투스 승격 및 통치
306년 7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병사들에 의해 즉시 황제로 추대되었다. 동시에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를 정제로 승격시켰다. 락탄티우스는 갈레리우스가 나이 많은 세베루스를 더 높은 직위로 승진시키면서도,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상징을 인정하고 그를 부제의 지위로 테트라키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는 낮은 직위를 가졌지만, 그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서방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세베루스는 이탈리아와 서부 아프리카의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베루스는 서방에서 군대와 백성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정통성은 많은 이들에게 의심받았다. 306년 여름부터 307년 3월/4월까지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 막센티우스, 막시미아누스와 경쟁하며 정제로서의 지위를 유지해야 했다.
2.3. 막센티우스와의 내전
306년 10월, 은퇴한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선포했다.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를 보내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세베루스는 자신의 수도인 메디올라눔 (현재 밀라노)에서 막시미아누스가 이전에 지휘했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막센티우스는 세베루스의 대군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에게 공동 통치를 제안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이를 수락하며 정제로 복귀했다. 세베루스가 로마 성벽 아래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하자, 그의 병사들은 옛 지휘관인 막시미아누스에게 충성하며 막센티우스 편으로 대거 이탈했다.
세베루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라벤나로 도망쳤다. 막시미아누스는 307년 4월경 세베루스가 평화롭게 항복하면 그의 생명을 보존하고 인도적으로 대우하겠다고 제안했다. 세베루스는 이 말을 믿고 항복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는 포로로 잡혀 현재 라티나 근처의 트레스 타베르나이에 투옥되었다.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진압하고 세베루스를 구출하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그 또한 패배하고 물러나면서 세베루스의 목숨을 지켜줄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3. 죽음
세베루스는 307년 9월 또는 10월에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막센티우스는 세베루스의 죽음을 명령했다. 락탄티우스는 세베루스가 스스로 정맥을 열어 자살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기록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라벤나에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는 9월까지 발행되었고, 그의 사망 소식은 12월까지 이집트에 도달했다.
4. 가족
세베루스에게는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세베루스 가문은 아들을 통해 이어졌지만,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는 훗날 리키니우스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5. 평가
세베루스의 짧은 재위 기간은 로마 제국의 테트라키아 체제가 겪었던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의 시기를 상징한다. 그는 갈레리우스의 신임을 얻어 황제에 올랐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라는 강력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 특히 막센티우스와의 내전에서 자신의 군대가 배신하고 이탈하는 상황에 직면하며, 군사적 지지 기반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그의 죽음은 테트라키아 체제가 더 이상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