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반 및 교육

오레샤르스키는 개인적인 배경과 학업 경로, 그리고 정치 경력 이전의 전문직 활동을 통해 기반을 다졌다.
1.1. 유년기 및 학력
플라멘 바실레프 오레샤르스키는 1960년 2월 21일 불가리아의 두프니차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국어인 불가리아어 외에 영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한다. 1985년 국가 세계 경제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투자 및 투자 분석"을 주제로 한 논문을 완성하여 박사 학위에 준하는 학위를 취득했다.
1.2. 초기 전문직 경력
오레샤르스키는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전 다양한 전문직 활동을 수행했다. 1993년부터 재무부 국고 및 채무 부서 책임자를 지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는 불가리아 증권 거래소 관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유니크레딧 불뱅크(UniCredit Bulbank)의 이사로 근무했다.
2. 정치 경력
오레샤르스키는 재무부 차관을 시작으로 재무부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총리에 이르기까지 불가리아 정치의 주요 직책을 거쳤다.
2.1. 재무부 차관
1997년 이반 코스토프가 총리로 취임했을 때, 오레샤르스키는 그의 행정부에서 재무부 차관으로 근무했다. 이 직책은 2001년 총선거까지 유지되었으며, 그는 이후 고등 금융경제 연구소에서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잠시 정계 활동을 중단했다. 2003년, 그는 민주세력연합에 의해 소피아 시장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같은 해, 오레샤르스키는 민주세력연합을 떠나 잠시 BZNS-NS, DP, "게르교프덴" 연합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04년에는 게오르기 퍼르바노프 대통령을 위한 경제 보고서 초안 작성을 담당하는 그룹의 일원이었다.
2.2. 재무부 장관
오레샤르스키는 2005년 8월 17일 불가리아 사회당 주도의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2009년 7월 27일 보이코 보리소프가 스타니셰프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2.3. 국회의원
재무부 장관직을 마친 후, 오레샤르스키는 2009년 부르가스 지역의 불가리아 사회당 명단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2013년 총리직에 오르기 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4. 총리 재임
2013년 5월 보이코 보리소프 내각의 사임으로 조기 총선이 치러진 후, 보리소프의 우익 정당인 GERB가 다수 의석을 확보했으나 과반수를 얻지 못하고 다른 정당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 사회당이 의회를 통해 정부 구성의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2013년 5월 29일 로센 플레브넬리예프 대통령은 오레샤르스키에게 불가리아 사회당을 위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을 부여했다.
2.4.1. 내각 구성과 초기 반대 시위
오레샤르스키가 제안한 내각을 언론에 발표하자, 그의 내각에 대한 일부의 강한 반감이 드러나 내각 선출 전부터 시위가 발생했다. 녹색 운동가들은 5월 27일에 조직되어 5월 28일에 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각은 120대 97의 의회 투표로 선출되었고, 이반 다노프가 칼린 티홀로프를 대체하는 한 가지 변경사항이 있었으나, 오레샤르스키는 총리가 되었다. 내각 선출 몇 시간 후인 2013년 6월 2일 새로운 전국 시위가 조직되었지만, 델랸 페옙스키의 보안 기관장 임명 이후 6월 14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2.4.2. 델랸 페옙스키 임명과 전국적 시위
총리 취임 직후인 2013년 6월 14일, 언론 재벌이자 과거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논란의 인물 델랸 페옙스키를 불가리아 보안 기관(DANS)의 수장으로 임명하면서 대규모 전국적 시위가 발생했다. 페옙스키의 임명에 대한 시위가 첫날부터 격화되자, 그는 결국 사임했지만 시위대는 내각 전체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의 규모는 날마다 달랐지만, 결국 오레샤르스키 내각은 1년 후 사임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오레샤르스키 정부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야기했다.
2.4.3. KTB 은행 파산과 사임
2014년 6월 30일, 불가리아에서 네 번째로 큰 은행인 KTB(Corporate Commercial Bank)가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정부가 이전 몇 주 동안 국영 기업의 예금을 의도적으로 인출했다는 비난 속에서 일어났다. KTB 구제금융은 궁극적으로 국가 예산에 40.00 억 USD의 비용을 초래했으며, 국가 부채를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 사건은 오레샤르스키 정부의 경제 관리 능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2014년 8월 4일, 오레샤르스키는 총리 임명 후 1년여 만에 내각의 사임을 제출했다. 다음 날 의회는 180대 8표(8명 기권, 44명 결석)로 정부의 사임을 수락했으며, 2014년 8월 6일 공식적으로 사임이 수락되었다. 오레샤르스키는 여러 차례 자신을 총리 재임 초기부터 "주머니 속에 사직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총리직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시사했다.
3. 개인 생활
오레샤르스키는 심장병 전문의인 엘카 게오르기에바와 결혼하여 데시슬라프라는 아들 한 명을 두었다. 그의 취미로는 등산과 다양한 공공 행사에서 배지 수집을 하는 것이 알려져 있다.
4. 평가 및 논란
플라멘 오레샤르스키의 총리 재임 기간은 다양한 비판과 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총리직은 시작부터 대중의 불신과 반대에 직면했으며, 이는 특히 논란이 많았던 인사 결정과 대형 경제 스캔들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다.
4.1. 비판과 논란
오레샤르스키는 총리로서 불가리아 사회당과 권력형 기득권 세력 간의 모호한 경계에서 움직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총리 임명 직후 제안된 내각에 대한 초기 반대 시위는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대중의 의구심을 반영했다. 이러한 비판은 2013년 6월, 그가 언론 재벌이자 과거 부패 혐의가 있던 델랸 페옙스키를 국가보안청(DANS) 수장으로 임명하려 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 인사는 광범위한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시켰고, 페옙스키가 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1년 넘게 오레샤르스키 내각의 완전한 사임을 요구하며 이어졌다. 이는 그의 정부가 민주적 책임과 투명성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또한, 2014년 불가리아의 주요 은행인 KTB의 파산은 오레샤르스키 정부에 대한 또 다른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다. 정부가 파산 직전 국영 기업의 예금을 의도적으로 인출했다는 의혹은 KTB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발생한 40.00 억 USD 규모의 공적 자금 투입은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주었으며, 오레샤르스키 내각의 경제 관리 능력과 투명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오레샤르스키의 총리직을 약화시켰고, 결국 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그의 "주머니 속에 사직서를 가지고 다녔다"는 발언은 총리 재임 내내 그의 정부가 직면했던 불안정성과 대중의 반발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