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Friedrich August I.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독일어, Fryderyk August I프리데리크 아우구스트 1세폴란드어, Frédéric-Auguste Ier프레데리크 오귀스트 1세프랑스어; 1750년 12월 23일 ~ 1827년 5월 5일)는 베틴가의 일원으로, 1763년부터 1806년까지는 작센 선제후(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로, 1806년부터 1827년까지는 작센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그는 또한 1807년부터 1815년까지 바르샤바 공국의 공작이었으며, 1812년에는 잠시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포되었으나 인정받지 못했고, 폴란드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 후보자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분열되고 1795년 최종적인 폴란드 분할로 인해 소멸된 폴란드를 재건하고 재활성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의 일생 동안 폴란드인들에게 깊은 호감을 얻었으며, 그는 "정의로운 자(The Just)"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보수적인 통치 방식과 나폴레옹 전쟁 중의 정치적 동요는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작센의 재건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이름을 딴 라이프치히의 아우구스투스플라츠(Augustusplatz)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 유년기와 배경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63년 아버지의 죽음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삼촌이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2.1. 출생, 유년기, 교육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50년 12월 23일 드레스덴에서 작센 선제후 세자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의 둘째 아들(생존한 아들 중 장남)로 태어났다. 1763년 10월, 그의 할아버지인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도 재위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라는 이름으로 선제후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미성년자였으므로, 그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 폰 바이에른이 1768년까지 섭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삼촌인 프란츠 크사버 폰 작센 공자가 그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 쪽으로는 두 명의 폴란드 국왕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쪽으로는 최초의 폴란드 공작 시에모비트의 후손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후 그가 폴란드 왕위 후보로 거론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2.2. 섭정 및 선제후로서의 초기 통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미성년자이던 1765년, 그의 삼촌이자 섭정 대리인이었던 프란츠 크사버 폰 작센은 폴란드 왕위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양보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78년부터 1779년 사이에 발생한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하여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협력의 대가로 프로이센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1785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군주 동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790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분쟁 중에는 중립을 유지하며 작센의 독립적인 입장을 지키고자 했다.
3. 작센 선제후로서의 재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나폴레옹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작센의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며, 특히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3.1. 폴란드 왕위 계승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세 선제후 전임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을 겸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실 선거 당시에는 어린 나이 때문에 후보로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1791년 폴란드 5월 3일 헌법이 폴란드 세임에 의해 비준되었을 때, 그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이 헌법 제7조에 따라 작센 왕실의 수장이 폴란드 왕위의 상속인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98년 스타니스와프 국왕 사망 후 폴란드 왕위를 수락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는 1772년부터 폴란드를 분할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와의 분쟁에 얽히게 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1795년 폴란드는 이웃 강대국들 사이에서 완전히 분할되어 이미 명목상의 지위였을 것이다.
3.2. 외교 정책과 프랑스 혁명 전쟁


1791년 8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필니츠 성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의 회담을 주선했다. 이 회담은 부분적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프랑스 내부의 혁명적 동요에 직면하여 프랑스 군주제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군사 행동 가능성을 경고했으며, 이는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자신은 이 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
작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형성된 프랑스에 대항하는 방어 동맹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3년 3월 제국 의회가 발표한 제국 전쟁 선포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에게 참여를 의무화했다. 1795년 4월 프로이센이 제3차 폴란드 분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와 별도 평화 조약을 체결했을 때 작센에서는 큰 우려가 있었다. 프랑스군이 독일 영토를 동쪽으로 진격하자, 작센은 1796년 8월 프랑스 연합군에서 탈퇴하고 신성 로마 제국이 별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추가 조건에 동의했다.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과 1797년 라슈타트 회의에 대한 작센의 참여는 모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헌법 원칙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라슈타트 회의는 라인강 좌안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것을 승인하고, 영토를 포기하는 통치자들에게 보상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라슈타트에서, 그리고 다시 1803년에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규정한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인 제국대표자회의 주요결의가 발표되었을 때, 작센은 바이에른, 프로이센, 뷔르템베르크, 바덴에 이익이 되도록 고안된 영토 조정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4. 나폴레옹 시대와 프랑스와의 동맹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작센의 생존을 위해 동맹 관계를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복잡한 과정을 겪었다.
4.1. 나폴레옹과의 동맹과 국왕으로의 승격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이끌었던 라인 동맹 창설에 참여하지 않았다. 작센이 왕국으로 승격될 예정이었던 프로이센의 북독일 제국 구상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1806년 9월 이후, 프랑스군의 라인강 좌안 철수를 요구하는 베를린 최후통첩에 대응하여 나폴레옹이 튀링겐까지 진격해오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프로이센에 합류했다. 하지만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작센 연합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프로이센 정부와 군대는 이후 동쪽으로 급히 철수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프로이센의 의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나폴레옹의 군대가 작센을 점령하려 하자 평화를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1806년 12월 11일 포즈난에서 양측의 권한 있는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작센은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튀링겐 일부를 새로 조직된 베스트팔렌 왕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 보상으로 작센은 코트부스 주변 지역을 얻었으며,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와 같은 라인 동맹 국가들과 함께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806년 12월 20일 작센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1807년 7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과 체결한 틸지트 조약 이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바르샤바 공국의 대공으로도 지명되었다. 그는 1795년 폴란드 세임이 제안한 폴란드 왕위를 거절했었지만, 두 번째로 폴란드 관련 작위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4.2. 바르샤바 공국 통치
나폴레옹이 작센에 강요한 바르샤바 공국 헌법 제5조는 1791년 폴란드 헌법과 연계되어 바르샤바 공국을 작센 왕실에 세습적으로 귀속시켰다. 지정학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은 1795년의 제2차 폴란드 분할과 제3차 프로이센 분할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나, 단치히는 프랑스-작센 공동 "보호령" 하의 자유시로, 비아위스토크 주변 지역은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프로이센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은 옛 프로이센 지방인 신동프로이센, 남프로이센, 신실레시아, 서프로이센의 영토로 이루어졌다. 또한 새로운 국가는 노테치강 연안과 "헤움노 땅"을 얻었다.

총체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은 초기 면적이 약 10.40 만 km2에 달했고, 인구는 약 260만 명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폴란드인이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바르샤바 공국을 점령하려 시도했을 때 폴란드-작센 연합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패퇴했고, 오스트리아는 1795년까지 합병했던 폴란드 지역, 그중에서도 옛 폴란드 왕실 도시인 크라쿠프를 바르샤바 공국에 할양해야 했다. 1812년 7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바르샤바 공국 세임의 선언을 비준하여 폴란드 왕국을 복원했다. 나폴레옹은 이 조치에 대해 항의했다.
4.3. 해방 전쟁과 포로 생활

1813년 독일 전역 (1813년) 동안 작센은 다른 많은 전쟁 국가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 나라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었고, 동시에 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1813년 가을 라이프치히 전투(국민 전투)가 시작될 무렵, 약 200만 명의 작센 지역 주민들은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영토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배신할 경우 작센을 적국 영토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대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행동의 여지는 크게 제한되었다. 그는 나라의 안녕을 경솔하게 도박에 걸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1806년 프로이센이 자신을 버렸던 방식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왕은 나폴레옹과의 공개적인 단절이나 선전포고를 감행하지 않고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의 동맹을 신중하게 시도했다. 봄에 프로이센과 러시아군이 작센으로 진입하자, 국왕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먼저 남쪽으로 이동했고 레겐스부르크에서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작센-오스트리아 조약은 4월 20일에 체결되었고, 국왕은 동시에 프로이센과 러시아 동맹국들에게 이를 알렸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외교적 움직임을 숨길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5월 2일 뤼첸 전투에서 프로이센-러시아군을 격파한 후 국왕을 작센으로 긴급 소환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자신에게 제시된 최후통첩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구체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제 프랑스에 평화 신호를 보내는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의 패배를 고려할 때,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결정은 작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왕의 거의 배신에 화가 나고 동시에 연합군에 맞서 모든 가용한 병력을 총동원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작센의 모든 자원을 가혹하게 요구했다. 또한 작센은 변화하는 전쟁의 운세와 그에 따른 병력 이동 및 주둔으로 고통받았다. 8월 말, 연합군은 드레스덴 전투에서 다시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작센은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드레스덴은 프랑스군 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9월 9일에야 테플리체에서 프로이센 및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했다。9월, 확장된 연합군 앞에서 작센에 주둔한 나폴레옹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작센 육군 내에서 연합군으로의 첫 번째 이탈이 발생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봄의 경험을 고려할 때 프로이센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작센이 이전과 같이 프랑스의 지배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가 즉시 연합군에 합류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실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폴레옹과 관계를 끊지 않기로 선택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작센군과 폴란드군은 나폴레옹 편에서 싸웠다. 프랑스군의 명백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 큰 작센 군대는 전투 중에 연합군으로 넘어갔지만, 폴란드군은 대부분 전멸했다. 전투가 끝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포로로 잡혔다.
5. 빈 회의와 전후 질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빈 회의에서의 입지는 어려웠으며, 그 결과 작센은 상당한 영토를 잃고 바르샤바 공국은 해체되었다.
5.1. 협상과 영토 손실
1814년과 1815년 빈 회의의 협상에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입지는 작센의 어려운 지리적 위치, 변화하는 전쟁의 운세, 오스트리아의 지원 부족, 그리고 그 자신의 동요로 인해 불리했다.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애초에 작센을 대 나폴레옹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데 정당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1813년 3월 17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기 전부터, 그들은 2월 22일 칼리시 조약에서 작센과 폴란드에 해를 끼칠 동맹을 러시아와 이미 합의했다. 즉, 바르샤바 공국은 주로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고, 프로이센은 할양하는 폴란드 영토에 대한 보상으로 작센 영토를 합병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이 작센의 경제적, 문화적으로 더 발전된 영토에 대한 욕구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1752년 정치적 유언장에서 발전시켰고 이미 7년 전쟁에서 실현하려 했던 오래된 합병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중앙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지배를 극복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지원 제안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과의 광범위한 싸움에서 작센 국왕과의 동맹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은 포로가 되어 베를린 근처 프리드리히스펠데로 끌려가 "연합군 고위 정부"의 이름으로 러시아-프로이센의 감금 아래 놓였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무렵 작센의 사기 저하의 원인은 러시아의 레프닌 공작이 1814년 11월까지 관리했던 정부나 그 후의 프로이센 점령군(1815년 6월까지 지속) 때문이 아니라, 프로이센 장관 슈타인 남작의 강압적인 방식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표들과는 대조적으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이전 동맹국인 나폴레옹의 준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처벌로 빈 회의 참석이 거부되었다. 분명히 작센 국왕에 대한 이러한 대우는 칼리시에서 합의된 합병 계획을 실행하려는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의도 때문이었다. 작센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은 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지나치게 강화된 프로이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작센 문제는 회의를 파열시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은 마침내 러시아 황제의 중재로 작센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1815년 1월 7일).
프로이센 감옥에서 1815년 2월에 석방된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처음에는 자신의 나라 분할에 대한 동의를 미루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는 마침내 양보하여 5월 18일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제시한 평화 조약에 동의했다. 1815년 5월 21일 조약이 서명됨에 따라 작센 영토의 57%와 작센 인구의 42%가 프로이센에 할양되었다.
수백 년 동안 작센과 연결되어 있던 지역들은 인위적으로 생성된 행정 구역에 흡수되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었다.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 시대 작센 선제후국의 옛 수도였고 마르틴 루터와 멜란히톤으로 유명한 국립 대학교(1817년 프로이센의 할레 대학교와 합병되면서 사라짐)의 소재지였던 비텐베르크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고향이자 거주지였던 토르가우는 프로이센이 "작센 주"라는 이름으로 새로 만든 행정 구역 중 하나에 편입되었다. 오버라우지츠와 마찬가지로 작센 통치하에서 헌법적 자치권을 보존했던 하우지츠는 브란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어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오버라우지츠는 자의적으로 분할되었다. 괴를리츠를 포함하여 프로이센에 할양된 지역은 실레시아 주에 추가되었으며, 이 지역들 또한 헌법적 자치권을 상실했다.
5.2. 바르샤바 공국 해체
1815년 5월 22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바르샤바 공국의 통치자로서 퇴위했다.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는 주로 러시아에, 일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러시아에 할양된 지역에는 러시아 왕위와의 세습 연합에 참여하는 폴란드 왕국이 창설되었다. 옛 폴란드 왕실 도시인 크라쿠프는 더 이상 새로운 왕국에 속하지 않고 별개의 공화국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치권을 누렸던 크라쿠프의 내부 자치권은 1831년 폴란드 봉기 이후 폐지되었다.
6. 작센 국왕으로서의 후기 통치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작센으로 돌아와 영토 손실로 인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정치 개혁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6.1. 작센으로의 귀환과 대중의 환영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1815년 7월 작센으로 귀환했을 때, 그는 전국적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또한 할양된 영토에서도 왕에 대한 수많은 충성의 표현이 전해졌다. 이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통치자들을 냉담하게 여겼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된 프로이센인"이라는 개념이 퍼지기 시작했다. 1815년 초부터 작센군 대부분의 연대가 주둔해 있던 리에주 주에서는 4월 말에 반란이 발생했다. 프로이센 국왕의 지시에 따라 블뤼허 원수(Generalfeldmarschall)는 합병된 영토 출신 병사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병사들은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작센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블뤼허는 도시를 벗어나야 했으며, 추가 프로이센 병력을 소집해서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귀환 당시 작센의 여론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편이었다. 프로이센의 정책이 작센 국가와 국왕 모두에게 너무 무자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해방 전쟁의 보상이 분배될 때 베를린 특수 이익 집단의 탐욕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6.2. 전후 재건과 국내 정책
귀국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 법 제도의 개혁, 학예 진흥에 힘썼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작센의 산업화는 크게 진전되었고,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독일 학문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분단된 국가의 재건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쳤다.
6.3. 말년과 왕위 계승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정부의 마지막 12년은 대부분 조용하게 지나갔다. 국왕의 보수적인 성격은 1806년까지 대외 정책에서 작센의 이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나타났는데, 나폴레옹의 패권 경험 이후 더욱 강고해졌다. 정치 개혁에 있어서는 국왕이 이룬 것이 거의 없었다. 1827년 그의 사망(나폴레옹의 사망 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다)까지 작센 국가의 헌법적 구성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국왕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남은 라우지츠 상류층의 권리를 존중하여 그러한 움직임을 피했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기존 정치 체제를 진정한 입법부로 전환하는 바람도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반세기 이상 작센의 운명을 이끌었던 노왕에 대한 경외심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국가의 지연된 경제적, 사회적 재건에 대한 불만은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안톤 국왕이 느끼게 될 몫이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드레스덴의 로마 가톨릭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살아남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남동생 안톤이 작센 국왕으로 뒤를 이었다.
7. 사생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의 결혼 생활은 자녀 운이 따르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살아남은 적자녀가 단 한 명의 딸 뿐이었다.
7.1. 결혼과 자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769년 1월 17일 만하임에서 대리 결혼식을 통해, 그리고 1769년 1월 29일 드레스덴에서 직접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의 아말리에 백작 팔츠백작 영애(후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국왕의 누이)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 동안 아말리에는 네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한 명의 딸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 사산아 (1771년)
- 사산아 (1775년)
- 마리아 아우구스타 네포무세나 안토니아 프란치스카 크사베리아 알로이시아 (1782년 6월 21일 드레스덴 출생 - 1863년 3월 14일 드레스덴 사망)
- 사산아 (1797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드레스덴의 유대인 궁정 재정가의 딸과의 불륜으로 사생아 딸을 두기도 했다. 살아남은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작센 국왕 자리는 그의 남동생 안톤이 계승했다.
8. 유산과 평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재건에 대한 노력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나폴레옹 시대의 정치적 동요와 개혁 지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8.1. 긍정적인 평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분열된 폴란드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통해 폴란드인들에게 깊은 호감을 얻었다. 그의 생애 동안 그는 "정의로운 자(The Just)"라는 별명을 얻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제안을 두 번이나 받았던 인물로서, 폴란드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은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기억된다.
8.2. 비판과 논쟁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나폴레옹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작센은 나폴레옹과의 동맹으로 인해 영토 확장과 왕국 승격이라는 이점을 누렸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맹자로 남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국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해방 전쟁 기간 중 그의 정치적 동요와 나폴레옹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의 보수적인 성격은 나폴레옹의 헤게모니를 경험한 후 더욱 강고해져 정치 개혁에 거의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의 사망 시점까지 작센 국가의 헌법적 구성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진정한 입법부를 위한 정치 시스템 전환에 대한 대중의 열망도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재건이 지연된 것에 대한 불만은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안톤 국왕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그의 행동과 결정은 당시의 복잡한 유럽 정세 속에서 작센의 이익을 위한 고뇌의 결과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토 손실과 개혁 지연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남겼다.
9. 조상
- 1.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 2.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폰 작센 선제후
- 3.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 4.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3세
- 5.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 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
- 7. 신성 로마 황후 마리아 아말리아
- 8. 아우구스트 2세
- 9.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베르하르디네
- 10.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
- 1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
- 12.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13.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 1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 (= 10)
- 15.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 (= 11)
10. 같이 보기
- 작센 군주 목록
- 작센 역사
- 드레스덴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