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군 경력의 시작
호세 프룩투오소 리베라 이 토스카나는 1784년 10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목장주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1810년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의 군대에 합류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군대 내에서 점차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장군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2. 독립 투쟁에서의 역할
1820년, 반다 오리엔탈이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스 연합 왕국에 점령되고, 패배한 아르티가스가 망명길에 오르자 리베라는 새롭게 형성된 시스플라티나 주에 잔류했습니다. 1825년, 리베라는 '몬손의 포옹'(Abrazo del Monzón스페인어)으로 알려지게 될 사건에서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와 처음 만났습니다. 같은 해, 라바예하가 이끄는 33인의 오리엔탈과 그들의 아르헨티나 지지자들이 브라질 제국에 맞서 싸움을 시작했을 때, 리베라도 아르헨티나 측에 합류했습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합류했는지 아니면 강제로 합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 시스플라티나 전쟁의 중요한 군사 지휘관이 되었고, 린콘 전투와 사란디 전투에 참여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리베라는 1827년에 1년 동안 우루과이를 떠났고, 그로 인해 이투자인고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3. 첫 번째 대통령 재임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의 결과로 우루과이의 독립이 선언된 후, 리베라와 라바예하 사이의 갈등은 실제적인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장군 호세 론도가 첫 임시 총독이 되었습니다. 리베라는 마침내 1830년 11월 6일부터 1834년 10월 24일까지 우루과이의 첫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이 첫 임기 동안 그는 신생 독립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 정치적 갈등과 두 번째 대통령 재임
첫 임기 이후 리베라는 마누엘 오리베 장군을 자신의 후임 대통령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베라는 다시 라바예하뿐만 아니라 오리베와도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1838년 10월, 리베라는 오리베를 격파하고 그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망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갈등 과정에서 우루과이 정치의 중요한 분열인 콜로라도당 지지자와 블랑코당 지지자 간의 구분이 시작되었습니다. 리베라의 지지자들은 붉은색 완장을 착용한 반면, 오리베의 지지자들은 흰색 완장을 착용했습니다. 이후 이 두 세력은 각각의 정치 정당을 형성하게 됩니다. 리베라는 1839년 3월 1일부터 1843년 3월 1일까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했습니다.
5. 우루과이 내전과 망명
오리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실권자인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우루과이를 침공하여 우루과이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842년 12월, 오리베는 아로요 그란데 전투에서 리베라를 격파하고 몬테비데오 대포위전을 시작했습니다. 리베라의 권력은 수도 몬테비데오로 제한되었고, 오리베는 국가의 나머지 지역을 통치했습니다. 결국 1847년 리베라는 브라질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1853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6. 최종 복귀와 사망
후안 프란시스코 히로 대통령이 축출된 후, 1853년 9월 25일에 베난시오 플로레스,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그리고 리베라로 구성된 통치 삼두정치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라바예야는 10월 22일에 사망했고, 리베라는 몬테비데오로 향하던 중 1854년 1월 13일에 사망했습니다. 이로 인해 플로레스만이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리베라의 죽음은 우루과이 역사에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사건이었습니다.
7. 주요 논란
호세 프룩투오소 리베라의 생애는 우루과이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결정과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중요한 논란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통치 기간 중 발생한 한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우루과이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페이지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7.1. 살시푸에데스 학살
1831년에 발생한 살시푸에데스 학살(Masacre de Salsipuedes스페인어)은 리베라의 생애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루과이 북부에 거주하던 원주민 차루아족을 거의 완전히 학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전이었습니다. 리베라 대통령은 자신의 군대가 "야만인"으로 간주되던 차루아족을 평정하고 국토를 확장하며 자원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1831년 4월 살시푸에데스 강변에서 차루아족을 초청하여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차루아족 지도자들을 살해하고 나머지 부족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위한 함정이었습니다. 이 학살로 인해 수백 명의 차루아족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남은 소수는 브라질 등으로 흩어져 사실상 차루아족의 씨족 공동체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리베라의 권력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비판받으며, 우루과이 역사에서 원주민 말살 정책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살시푸에데스 학살은 리베라가 '애국자'이자 '건국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원주민 학살자'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주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8. 콜로라도당의 창립
리베라는 우루과이의 가장 지배적인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콜로라도당을 창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정당의 기원은 그가 마누엘 오리베와 갈등을 겪던 시기인 183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리베라의 지지자들은 붉은색 완장을 착용했고, 이는 나중에 콜로라도당의 상징적인 색깔이 되었습니다. 이 정당은 1865년부터 1958년까지 약 90년 동안 우루과이를 중단 없이 통치하며 국가의 정치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9. 유산과 역사적 평가
호세 프룩투오소 리베라의 유산은 우루과이 역사에서 복잡하고 다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독립과 공화국 건설에 기여한 애국자이자 군인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내전을 선동하고 원주민 학살을 지시한 논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9.1. 정치적 유산과 '리베리스타' 경향
리베라의 유산은 우루과이 정치사, 특히 콜로라도당 내에서 강력한 개인적 리더십의 표본으로 남아있습니다. 콜로라도당 내부에는 '바틀리스타'(Batllista스페인어)와 같은 다른 파벌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리베리스타'(Riverista스페인어) 경향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 '리베리스타' 경향은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와 보르다베리 가문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대표되었으며, 리베라의 강력한 중앙 집권적 리더십과 실용주의적 접근 방식을 계승하려는 특징을 보입니다.
9.2. 전반적인 역사적 평가
리베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우루과이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그의 군사적 공헌과 건국 과정에서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브라질 제국에 맞선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신생 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독립의 영웅이자 국가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칭송합니다.
그러나 살시푸에데스 학살과 우루과이 내전의 선동자로서의 역할은 심각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특히 원주민 차루아족에 대한 학살은 현대적 관점에서 인권 침해와 대량 학살로 규정되며, 그의 도덕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논란은 그의 긍정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반적인 역사적 평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리베라는 우루과이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행동의 윤리적, 사회적 파장은 여전히 역사학자와 대중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0. 같이 보기
- 우루과이의 정치
- 콜로라도당 (우루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