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랭크 휴스 머카우스키(Frank Hughes Murkowski영어, 1933년 3월 28일 출생)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공화당 소속이다. 그는 알래스카주를 대표하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재임했으며, 이후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제8대 알래스카 주지사를 역임했다.
머카우스키는 1970년 알래스카주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0년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1986년, 1992년, 1998년에 걸쳐 세 차례 재선에 성공하며 알래스카주를 대표하는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상원의원 재임 중 그는 상원 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북극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ANWR)의 석유 시추 허용을 추진하는 등 자원 개발에 중점을 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낙태 반대, 총기 규제 반대, 적극적 우대조치 반대 등 보수적 정책을 지지했으며, 군 복무 중 동성애자 병사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02년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그는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딸인 리사 머카우스키를 후임 상원의원으로 지명하여 정실 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에는 가스 파이프라인 협상 시도와 주 정부 예산으로 고가의 전용기를 구입한 사건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전용기 구입은 그의 낮은 지지율과 2006년 주지사 재선 실패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재선 예비선거에서 세라 페일린에게 큰 차이로 패배하며 정치 경력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프랭크 머카우스키의 어린 시절과 교육 과정은 그의 정치 경력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 어린 시절 및 성장 과정
프랭크 머카우스키는 1933년 3월 28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헬렌(Helen영어, 결혼 전 성은 휴스)과 프랭크 M. 머카우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폴란드계 혈통이었다. 그는 미국이 정식 주가 되기 전인 알래스카 준주의 케치칸에서 성장했으며, 1951년 케치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2. 교육
고등학교 졸업 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샌타클래라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시애틀 대학교로 편입하여 1955년 경제학 학사 학위(BS영어)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1955년 여름 미국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1957년까지 복무했다. 복무 기간 동안 그는 알래스카의 싯카와 케치칸에 주둔했으며, 해안경비대 함정인 소렐(Sorrel영어)호와 시슬(Thistle영어)호에 승선했다. 그의 딸 리사 머카우스키는 그가 해안경비대에 복무 중이던 1957년에 태어났다.
3. 초기 경력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전, 프랭크 머카우스키는 금융 및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공직을 수행했다.
3.1. 금융 및 사업 활동
해안경비대 복무를 마친 후, 머카우스키는 퍼시픽 내셔널 은행(Pacific National Bank영어)에서 근무했으며, 퍼시픽 코스트 뱅킹 스쿨(Pacific Coast Banking School영어)에서 추가로 학업을 이수했다. 1971년에는 알래스카 내셔널 뱅크 오브 더 노스(Alaska National Bank of the North영어)의 총재로 승진했다. 그는 당시 33세의 나이로 알래스카 주에서 가장 젊은 국장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알래스카 은행가 협회(Alaska Bankers Association영어)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에는 알래스카 주 상공회의소(Alaska State Chamber of Commerce영어)의 회장을 맡았다.
3.2. 상원 진출 전 공직 활동
머카우스키는 금융 및 사업 활동 외에도 공직에 참여했다. 그는 알래스카 경제개발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이는 그가 상원의원으로 진출하기 전 쌓았던 주요 공직 경력 중 하나이다.
4. 정치 경력
프랭크 머카우스키의 정치 경력은 미국 연방 하원 선거 출마를 시작으로 미국 연방 상원 의원과 알래스카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알래스카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연방 하원 선거 출마
머카우스키는 1970년 알래스카주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 소속의 닉 베기치 주 상원의원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하여 낙선했다. 이 선거에서 그는 4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4.2. 미국 연방 상원 의원
머카우스키는 1981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연방 상원 의원으로 재임하며 알래스카주의 주요 현안에 깊이 관여했다.
4.2.1. 선출 및 재임
머카우스키는 1980년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클라크 그루닝(Clark Gruening)을 꺾고 처음으로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54%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이후 그는 1986년, 1992년, 1998년 세 차례에 걸쳐 재선에 성공하며 알래스카주 정치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1981년 1월 3일부터 2002년 12월 2일까지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4.2.2. 주요 위원회 활동
상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머카우스키는 여러 중요한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상원 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알래스카의 천연자원 개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위원장으로서 그는 북극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ANWR)에 대한 석유 시추를 허용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이는 환경 보호 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상원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87년부터 1991년, 그리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동 위원회의 랭킹 멤버(Ranking Member)로 활동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상원 정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4.2.3. 정치적 입장 및 정책
머카우스키는 상원 재임 기간 동안 일관되게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총기 규제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또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에도 반대하는 등 사회적 보수주의적 가치를 지지했다.
특히 군 복무 중인 동성애자 병사들에 대한 정책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상원 연설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군에 복무할 권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성애자 병사들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는 것에 반대하며, 재향군인회(Veterans Administration영어)가 HIV에 감염된 군인들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 증가를 주요 반대 근거로 제시했다. 이는 그의 딸이자 후임 상원의원인 리사 머카우스키가 군대 내 동성애자 금지 정책인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의 폐지에 찬성표를 던지고, 이후 재임 중 동성결혼 합법화를 지지한 세 번째 공화당 상원의원이 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4.3. 알래스카 주지사
2002년 머카우스키는 알래스카 주지사로 선출되어 4년간 재임했다.
4.3.1. 선출 및 재임
2002년 11월 5일, 머카우스키는 2002년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현직 주지사 토니 놀스의 후임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득표율 56%를 기록하며 당시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얻은 최고 득표율을 달성했다. 그는 2002년 12월 2일 취임했다.
주지사 취임과 동시에 그는 상원의원직을 사임했으며, 당시 알래스카주 하원의 다수당 대표 지명자였던 자신의 딸 리사 머카우스키를 후임 상원의원으로 지명했다. 이 지명은 정실 인사라는 비판을 받으며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4.3.2. 주요 정책 및 논란
머카우스키의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주요 정책 결정과 논란이 있었다. 그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협상을 중재하려고 시도했으나, 최종 형태의 협상안은 의회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머카우스키는 의회의 승인 없이 이 협상에 서명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의회가 소송을 제기하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2005년에는 알래스카 주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 예산으로 고가의 웨스트윈드 II 제트기를 270.00 만 USD에 구입했다. 이 전용기 구입은 당시 주 정부의 재정 상황과 맞물려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주민들은 이를 불필요한 사치와 예산 낭비로 간주했으며, 이 사건은 머카우스키의 인기 하락과 그의 행정부에 대한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후임 주지사인 세라 페일린은 취임 후 이 제트기를 매각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머카우스키는 2006년 주지사 재선에 도전했으나, 8월 22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세라 페일린과 존 빙클리(John Binkley)에 밀려 3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페일린은 51%, 빙클리는 30%를 득표한 반면, 머카우스키는 19%에 그쳤다. 현직 주지사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이처럼 큰 차이로 패배한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패배 마진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9%라는 전국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임기를 마쳤다.
2008년 3월 4일, 머카우스키의 전 비서실장인 짐 클라크(Jim Clark)는 베코 코퍼레이션(Veco Corp영어)이 당시 현직 주지사 머카우스키의 인기를 측정하기 위한 정치 여론조사에 1.00 만 USD를 지불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클라크는 '정직한 공공 서비스 사기'(honest services fraud영어)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이후 미국 대법원이 해당 법령이 위헌적으로 모호하다고 판결하면서, 뇌물이나 리베이트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혐의는 무효화되었다.
머카우스키는 2018년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에 다시 출마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총 27년간의 공직 생활 중 2년을 군 복무에, 21년을 알래스카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4년을 주지사로 봉사했다.
5. 선거 이력
프랭크 머카우스키가 출마했던 주요 선거들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70년 선거 | 하원의원 (알래스카 광역선거구) | 92대 | 공화당 | 44.89% | 35,947표 | 2위 | 낙선 |
1980년 선거 | 상원의원 (알래스카 제3부) | 97대 | 공화당 | 53.69% | 84,159표 | 1위 | 당선 |
1986년 선거 | 상원의원 (알래스카 제3부) | 100대 | 공화당 | 54.02% | 97,674표 | 1위 | 당선 |
1992년 선거 | 상원의원 (알래스카 제3부) | 103대 | 공화당 | 53.05% | 127,163표 | 1위 | 당선 |
1998년 선거 | 상원의원 (알래스카 제3부) | 106대 | 공화당 | 74.49% | 165,227표 | 1위 | 당선 |
2002년 선거 | 알래스카 주지사 | 8대 | 공화당 | 55.85% | 129,279표 | 1위 | 당선 |
2006년 선거 (공화당 예비선거) | 알래스카 주지사 | 9대 | 공화당 | 19% | (비공개) | 3위 | 낙선 |
6. 논란 및 비판
프랭크 머카우스키의 정치 경력은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그의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은 대중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6.1. 정실 인사 논란
2002년 알래스카 주지사로 당선된 후, 머카우스키는 자신이 사임한 상원의원 자리에 자신의 딸인 리사 머카우스키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정실 인사의 전형적인 사례로 비판받았으며, 민주적 절차와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이들은 이 지명이 가족 관계에 기반한 특혜라고 보았고, 이는 그의 정치적 신뢰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 주지사 전용기 구입 논란
2005년, 머카우스키 주지사는 알래스카 주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 예산으로 고가의 웨스트윈드 II 제트기를 270.00 만 USD에 구입했다. 이 전용기 구입은 당시 주 정부의 재정 상황과 맞물려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주민들은 이를 불필요한 사치와 예산 낭비로 간주했으며, 이 사건은 머카우스키의 인기 하락과 그의 행정부에 대한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후임 주지사인 세라 페일린은 취임 후 이 제트기를 매각하겠다고 공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6.3. 낮은 지지율 및 재선 실패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머카우스키는 지속적으로 낮은 지지율에 시달렸다. 특히 전용기 구입 논란과 가스 파이프라인 협상 실패 등 여러 정책적 문제와 논란이 겹치면서 그의 지지율은 19%까지 떨어지며 전국 주지사 중 최하위 수준을 기록했다. 이러한 대중의 불만은 2006년 주지사 재선 도전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당시 와실라 시장이었던 세라 페일린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하며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다. 이는 현직 주지사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기록한 가장 큰 패배 마진으로 남았다.
7. 개인사
프랭크 머카우스키는 낸시 머카우스키와 결혼하여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그의 딸 중 한 명인 리사 머카우스키는 1957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딸인 캐럴(Carol영어)은 전 주 상원의원 알리스 스터귤류스키의 아들과 결혼했다.
8. 평가 및 영향
프랭크 머카우스키는 알래스카주와 미국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21년간의 상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알래스카의 천연자원 개발, 특히 북극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ANWR)에서의 석유 시추 허용을 강력히 주장하며 주 경제 발전에 기여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정책적 입장은 환경 보호론자들로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다.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 그는 낙태 반대, 총기 규제 반대, 적극적 우대조치 반대 등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군 복무 중 동성애자 병사들에 대한 그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냈으며, 이는 이후 그의 딸 리사 머카우스키가 더욱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 것과 대비된다.
주지사 재임 기간 동안 발생한 정실 인사 논란(딸의 상원의원 지명)과 고가 전용기 구입 논란은 그의 행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논란과 정책 실패는 그의 낮은 지지율과 2006년 주지사 재선 실패로 이어졌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유산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카우스키는 알래스카의 자원 개발을 옹호하는 강력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사회적 입장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정 결정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그의 정치 경력은 알래스카의 자원 중심 경제와 보수적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9. 관련 항목
- 리사 머카우스키
- 알래스카주
- 미국 공화당
- 미국 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