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버하르트 3세는 약 885년에 태어나 939년 10월 2일에 사망한 프랑켄 공작으로, 콘라딘가 출신이다. 그는 형인 동프랑크 왕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918년 12월부터 프랑켄 공작으로 재위했다. 926년부터 928년까지는 로타링기아의 통치자 역할도 수행했다.
에버하르트는 콘라트 1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형을 보좌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특히 콘라트 1세가 사망 직전 자신의 왕권 야망을 포기하고 숙적이었던 하인리히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중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후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을 다하며 프랑켄 공작으로서 왕국 안정에 기여하고 로타링기아의 섭정으로도 활동하며 그 지역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강력한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오토 1세와 지역 공작들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에버하르트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는 헬메른 성 사건에서의 굴욕적인 처벌과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에버하르트의 반란은 동프랑크 왕국의 초기 안정성을 위협했으나, 939년 안더나흐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오토 1세의 왕권 강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켄 공국은 왕실 직할령이 되어 1039년에 해체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의 일련의 행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제에 대한 봉건 영주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독일의 정치 구조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2. 생애 초반과 가문 배경
에버하르트 3세는 약 885년에 태어났다. 그는 콘라딘가의 일원으로, 콘라트 대공(콘라트 노백)과 글리스무트(924년 사망)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글리스무트는 카롤루스 왕조의 황제 아르눌프의 사생아 딸로 추정된다.
콘라딘가는 프랑켄의 란가우 지역에서 백작으로 활동했으며, 오랫동안 카롤루스 왕조에 충성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밤베르크 성을 거점으로 하는 바벤베르크가의 하인리히의 아들들과 프랑켄에서의 우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906년, 양측은 프리츠라르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콘라트 노백이 전사했으며, 바벤베르크 형제 세 명 중 두 명도 사망했다. 이 바벤베르크 가문과의 갈등은 어린 왕 루트비히 4세가 콘라딘가의 편을 들면서 종결되었고, 콘라트의 아들인 콘라트 청년공은 모든 프랑켄의 공작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3. 콘라트 1세 재위 기간의 활동
911년 어린 왕 루트비히 4세가 요절하자,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제후들은 콘라트 청년공을 동프랑크 왕으로 선출했다. 에버하르트는 형인 콘라트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을 적극적으로 보좌했다. 그는 913년 프랑켄의 헤센가우와 페르스가우 백작으로, 913년과 928년에는 상부 란가우의 백작으로 활동했다. 에버하르트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 등 경쟁 공작들에 맞서 형을 지원했다.
914년, 에버하르트는 프랑켄 변경백의 직책을 맡았지만, 자신의 영토적 주장을 확고히 하지 못했으며, 하인리히가 전 튀링겐 공작 부르하르트의 튀링겐 영토를 점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918년 12월 포르히하임에서 병으로 죽음을 앞둔 콘라트 1세는 후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제후들을 소집했다. 중세 연대기 작가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콘라트 1세는 에버하르트에게 독일 왕위 계승에 대한 모든 야망을 포기하도록 설득했으며, 제국의 선제후들에게 그의 옛 경쟁자이자 오토가의 공작인 하인리히 1세를 후계자로 선택하도록 강력히 권고하라고 지시했다. 에버하르트는 919년 5월 프리치라르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왕실 휘장을 하인리히에게 직접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콘라트 1세는 이것이 작센인과 프랑크인 사이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제국이 독일의 공작령들을 기반으로 한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코르바이의 비두킨트의 이러한 기록이 리우돌핑가의 전통을 기반으로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4. 프랑켄 공작 및 로타링기아 섭정
에버하르트는 형의 뒤를 이어 프랑켄 공작이 되었으며, 새로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1세에게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남았다. 하인리히 1세가 불안정했던 로타링기아 공국을 재정복한 후, 926년 에버하르트에게 로타링기아의 섭정 직책을 수여했다. 이는 하인리히 1세가 에버하르트를 깊이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에버하르트는 로타링기아 지역을 빠르게 안정시켰으며, 928년 하인리히 1세가 자신의 사위이자 딸 게르베르가의 남편인 길베르트에게 로타링기아 공작위를 봉건 영지로 부여할 때까지 통치했다. 934년에는 하인리히 1세의 명령으로 로타링기아 공작 길베르트 및 주교들과 함께 서프랑크 왕국의 왕 라울에게 파견되기도 했다.
5. 오토 1세와의 갈등과 반란
하인리히 1세가 936년에 사망한 후, 에버하르트는 곧바로 하인리히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토 1세와 갈등을 겪게 된다. 오토 1세는 강력한 왕권을 목표로 했고, 이는 공작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이전의 정책과 충돌했다.
5.1. 헬메른 성 사건과 첫 반란
937년, 에버하르트는 작센 국경 근처 페켈스하임에 위치한 헬메른 성을 공성했다. 이 성은 작센인 성주 브루닝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비작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했다. 오토 1세는 분쟁 당사자들을 마그데부르크의 왕궁으로 소환했고, 그곳에서 에버하르트는 벌금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의 부하들은 공개적으로 죽은 개를 들고 가는 수치스러운 처벌을 받았다. 이는 당시로서는 특히 명예를 심하게 훼손하는 형벌이었다.
이에 격분한 에버하르트는 오토 1세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서며 그의 반대자들과 손을 잡았다. 938년, 그는 오토의 이복형제인 탕크마르와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 (전 공작 아르눌프의 아들), 그리고 빌룽가의 빌링의 형제인 비히만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탕크마르는 에레스부르크 성에서 암살당했다.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는 그의 삼촌인 베르톨트로 교체되었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자신은 한때 힐데스하임의 요새에 유폐되었으나, 곧 원래의 지위로 복권되었다.
5.2. 제2차 반란과 죽음
오토 1세와의 짧은 화해 기간 이후, 에버하르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타링기아 공작 길베르트, 마인츠 대주교 프리드리히, 그리고 오토 1세의 동생인 하인리히와 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연합군은 오토 1세의 통치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939년 10월 2일, 반란군은 안더나흐 전투에서 콘라트 쿠르츠볼트와 베테라우 백작 우도 (에버하르트의 사촌)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우도 1세가 그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베르트 공작은 도망치던 중 라인강에 빠져 익사했다.
6. 역사적 평가와 영향
에버하르트 3세의 정치적 행동, 특히 오토 1세에 대한 두 차례의 반란은 당시 동프랑크 왕국 및 이후 독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반란은 오토 1세의 왕권 강화를 시험하는 중대한 도전이었으며, 이는 왕국 내 공작들의 권력과 중앙집권화된 왕권 간의 갈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에버하르트의 죽음과 함께 프랑켄 공국은 왕실에 몰수되어 직할령이 되었다. 이로써 프랑켄 공국은 1039년에 해체될 때까지 독립적인 공작이 없는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는 오토 1세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확립하고, 왕국의 주요 공작령 중 하나를 직접 통제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에버하르트의 실패한 반란은 지역 공작들의 자율성이 점차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오토 1세가 제국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독일 왕국의 내부 질서를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