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프란체스코 로시의 생애는 나폴리에서의 유년 시절과 독특한 가족 배경에서 시작되며, 법학 공부와 언론 및 연극계에서의 초기 활동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프란체스코 로시는 1922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운업에 종사했지만, 동시에 만화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과거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풍자하는 그림으로 인해 견책을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적 성향이 뚜렷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시는 훗날 이탈리아의 대통령이 되는 조르조 나폴리타노와 함께 대학에 다녔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로시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이후 어린이 책 삽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라디오 나폴리의 기자로 일하며 라파엘레 라 카프리아, 알도 주프레, 주세페 파트로니 그리피 등 훗날 자주 협업하게 될 동료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의 연예계 경력은 1946년 살바토레 디 자코모의 연극 제작에서 에토레 잔니니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영화 산업에 발을 들여놓아 1948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대지는 흔들린다와 1954년 센소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또한 그는 1951년 벨리시마, 1952년 도시가 심판받다, 1955년 로마 이야기, 1956년 빅아미스트 등 여러 편의 각본을 썼다. 1952년에는 고프레도 알레산드리니 감독의 영화 붉은 셔츠의 일부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1956년에는 비토리오 가스만과 공동으로 셰익스피어 배우 에드먼드 킨에 대한 영화 킨 - 천재와 무절제를 연출했다.
2. 영화 경력
프란체스코 로시의 영화 경력은 거장 감독의 조감독 시절부터 시작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담은 초기 연출작과 정치 및 사회 비판 영화들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전쟁, 문학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했으며, 연극 연출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2.1. 조감독 및 각본가 시절
프란체스코 로시는 영화 경력 초기에 루키노 비스콘티와 같은 거장 감독들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영화 제작의 기술과 미학을 깊이 있게 익혔다. 그는 1948년 비스콘티의 대지는 흔들린다와 1954년 센소의 조감독을 맡아 거장의 작업 방식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신만의 사실주의적 시각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1951년 벨리시마, 1952년 도시가 심판받다 등의 각본을 집필하며 스토리텔링 능력과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다듬었다. 이러한 초기 경험은 훗날 그가 사회 문제를 탐구하는 독자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2. 초기 연출작
로시의 감독으로서의 등장은 1958년 영화 도전을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카모라 보스 파스콸레 시모네티와 푸페타 마레스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며, 마피아의 정부 통제를 암시하는 사실주의적 묘사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로시 자신은 이 영화에 대해 "감독은 열정적으로, 그리고 이전의 것을 고려하지 않고 첫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쉽먼은 이 영화가 "비스콘티의 아리아가 체사레 자바티니의 자연주의로 대체된 대지는 흔들린다의 재작업"이라고 평했다. 도전은 1958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산 조르조상을 수상하며 로시의 이름을 알렸다.
이듬해인 1959년, 그는 더 마글리아리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독일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이민자가 함부르크와 하노버를 오가며 직물 시장의 통제권을 놓고 나폴리의 마피아 보스와 충돌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쉽먼은 이 영화가 "사기꾼들을 다루며, 그들은 독일 이민 노동자 동포들을 등쳐먹는 경쟁 관계의 사기꾼들(알베르토 소르디, 레나토 살바토리)이다. 소르디는 도전의 주인공처럼 경쟁자들보다 동료들을 더 적대시하는데, 이는 로시 영화의 지속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두 영화 모두 의기소침하게 끝나며, 서사적 이해가 불확실하여 더욱 약화되지만, 개별 장면의 활기찬 처리와 잔니 디 베난초의 촬영으로 어느 정도 감춰진다"고 분석했다.
2.3. 정치 및 사회 비판 영화
프란체스코 로시는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즘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질로 폰테코르보,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타비아니 형제, 에토레 스콜라, 발레리오 줄리니와 함께 정치적 성향이 강한 영화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부패한 전후 이탈리아 사회를 다루며 논란이 많은 문제들을 영화화했다.
1962년작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시칠리아의 갱스터 살바토레 줄리아노의 삶을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하여 탐구했다. 이 영화는 1962년 제1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로시의 국제적 명성을 확립했다. 쉽먼은 이 영화가 "시칠리아의 풍경과 사람들의 훌륭한 통일성"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1963년에는 로드 스타이거가 주연한 영화 도시 위에 군림하는 손을 연출하여, 나폴리의 도시 재건 프로그램에서 여러 정부 부서 간의 공모를 폭로했다. 이 영화는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살바토레 줄리아노와 함께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로시의 정치적 문제 의식을 다룬 첫 영화로 간주되며, 이는 훗날 잔 마리아 볼론테의 유연하고 즉흥적인 연기에서 잘 드러났다. 로시 자신은 이 영화의 목적에 대해 "나를 열정적으로 흥미롭게 하는 것은 한 인물이 사회 집단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나는 인물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연구를 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사적인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려면 그의 공적인 삶에서 그를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영화는 2008년 이탈리아 문화유산 활동 관광부의 '구해야 할 100편의 이탈리아 영화' 목록에 포함되기도 했다.
1972년작 마테이 사건은 석유 재벌 엔리코 마테이의 의문의 죽음을 다루었으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로시는 이탈리아 국영 석유 가스 기업 에니의 사장 죽음에 대한 조사를 로시를 대신하여 진행하다 의문의 상황에서 살해된 시칠리아 언론인 마우로 데 마우로와 접촉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갱스터 럭키 루치아노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를 다룬 럭키 루치아노를 연출했다. 잔 마리아 볼론테가 주연을 맡았고, 로드 스타이거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에 대한 부차적인 줄거리에서 출연했다. 노먼 메일러는 이 영화를 "범죄 사회의 역설에 대해 가장 신중하고, 가장 사려 깊고, 가장 진실하며, 가장 민감한 영화"라고 평했다.
1976년에는 레오나르도 샤샤의 소설 동등한 위험을 바탕으로 한 고귀한 희생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사법부의 부패를 다루며 리노 벤투라가 출연했다. 쉽먼은 이 영화를 "관객을 숨 막히게 할 정도로 풍부하고 강력하며 몰입감 있는 영화... 영화 역사상 드물게 배경이 아닌 장소가 그 자체로 등장인물이 되어 행동에 대해 논평하는 영화"라고 극찬했다. 옵저버의 러셀 데이비스는 "이처럼 화려한 지성으로 장면을 선택하는 감독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1990년에는 짐 벨루시, 미미 로저스, 비토리오 가스만, 필리프 누아레, 잔카를로 잔니니가 출연한 자스민의 함정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에드몽드 샤를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4. 전쟁, 문학, 그리고 기타 작품
로시는 정치 및 사회 비판 영화 외에도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5년작 진실의 순간은 스페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기획되었으나, 투우사 미겔 마르코 미겔린에 대한 영화로 변경되었다. 쉽먼은 "투우 경기의 와이드 스크린과 컬러 영상은 이전까지 스페인 밖에서 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했다"고 평가했다.
1967년에는 동화적인 영화 기적을 넘어서(원제: 옛날 옛적에...)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소피아 로렌과 오마 샤리프가 주연을 맡았는데, 로시는 당초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이 역할을 맡기를 원했다.
1970년작 매니 워즈 어고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6~1917년 아시아고 전투의 트렌티노 전선을 배경으로 이탈리아 장교들이 휘하 병사들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모습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에밀리오 루수의 소설 고원에 보낸 1년을 원작으로 한다. 마크 프레셰트가 주연을 맡았으며, 제작비 문제로 유고슬라비아와의 협력이 필요했다. 쉽먼은 "알프스 전장은 상상력 넘치고 피비린내 나게 재현되었으며, 파스콸리노 데 산티스가 강철 같은 색감으로 촬영했지만, 로시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충동은 '군인은 광신도이고 전쟁은 지옥이다'라는 진부한 결론으로 이어졌다"고 평했다.
1979년에는 카를로 레비의 동명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를 연출했다. 이 영화 역시 잔 마리아 볼론테가 주연을 맡았으며, 1979년 제11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고, 1983년에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로시는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 RAI의 초청으로 영화화할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고, 4부작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141분짜리 장편 영화로 편집했다. 그는 이 영화를 "나 자신의 양심을 통한 여정"이라고 묘사했다. 쉽먼은 "이 영화는 로시의 최고작들이 가진 모든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다. 적어도 절반의 답은 보류된 채 조사가 진행된다... 이 조사에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존중이 있지만, 예술과 변증법의 전형적인 거장다운 조합은 진실의 순간보다 훨씬 더 깊은 공감으로 부드러워진다. 농민을 연상시키는 가끔씩 의식적인 장면들이 이 영화를 손상시킬 수 없다"고 평했다.
1981년작 쓰리 브라더스는 필리프 누아레, 미켈레 플라치도, 비토리오 메초조르노가 출연했으며,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단편 소설 세 번째 아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는 1981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는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를 각색한 카르멘을 연출했으며,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했다. 이 영화는 1986년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1987년에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죽음의 연대기를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잔 마리아 볼론테, 오르넬라 무티, 루퍼트 에버렛, 앤서니 들롱, 루시아 보세가 출연했으며, 콜롬비아의 몸폭스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는 에페보 도로상을 수상했다.
1989년에는 11명의 다른 감독들과 협력하여 만든 옴니버스 영화 12명의 감독이 12개의 도시를에 참여했으며, 로시의 부분은 "나폴리"였다. 1992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나폴리 일기를 연출했다.
그의 마지막 감독 작품은 1997년 홀로코스트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휴전이었다. 존 터투로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 대해 로시는 2008년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삶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로시는 원래 1987년 4월 레비의 자살로 인해 프로젝트가 취소되었지만, 결국 1997년에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2.5. 연극 연출
프란체스코 로시는 영화 작업 외에도 연극 연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63년 주세페 파트로니 그리피의 어떤 여인 친구를 추억하며를 연출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다시 연극 연출로 돌아와 에두아르도 데 필리포의 희극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나폴리 백만장자!, 내면의 목소리, 그리고 필루메나 마르투라노를 연출했는데, 이 모든 작품들은 루카 데 필리포가 출연했다.
3. 영화 철학 및 스타일
프란체스코 로시의 영화 철학은 '시네-인베스티게이션'이라는 탐사 보도적 영화 제작 방식으로 요약된다. 그는 경제적으로 침체된 이탈리아 남부의 부패와 불평등에 관심을 가진, 본질적으로 탐사 저널리스트이자 십자군적 성향의 감독이었다. 그는 "관객은 단지 수동적인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질문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로시의 작품은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엄격함"을 특징으로 하며, 정치적 또는 윤리적 수준에서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훌륭한 시각적 요소를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인물이 사회 집단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며, "나는 인물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연구를 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사적인 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려면 그의 공적인 삶에서 그를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버라이어티 영화 가이드는 로시의 대부분의 영화가 "사람과 사건의 표면 아래를 깊이 파고들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권력 행사 사이에 지속적인 연결 고리를 설정한다"고 평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를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즘 이후의 사회 비판적 다큐멘터리 영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강한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었으나, 원숙기에는 보다 문학적인 표현으로 확장되었다.
로시는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로베르토 사비아노, 파올로 소렌티노 등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배우 존 터투로는 로시를 "멘토와 같은 존재"라고 부르며, 그가 프리모 레비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감독으로서 배우들을 물리적으로 도울 수 있는 훌륭한 배우였다고 회고했다.
4. 개인 생활
프란체스코 로시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로마의 스페인 계단 근처 비아 그레고리아나에 거주했다. 2010년 4월, 그의 아내 잔카를라 만델리가 사망했다.
5. 수상 경력 및 영예
5.1. 주요 영화제 수상
- 칸 영화제
- 1972년: 마테이 사건으로 황금종려상 수상
- 베네치아 영화제
- 1958년: 도전으로 심사위원 특별상 및 산 조르조상 수상
- 1963년: 도시 위에 군림하는 손으로 황금사자상 수상
- 2012년: 명예 황금사자상 수상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1962년: 살바토레 줄리아노로 은곰상 (감독상) 수상
- 2008년: 명예 황금곰상 수상 (그의 13개 영화가 '오마주' 섹션에서 상영됨)
-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 1979년: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로 최고상(Grand Prix) 수상
5.2. 국내외 주요 수상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1965년: 진실의 순간으로 최우수 감독상 수상
- 1976년: 고귀한 희생으로 최우수 감독상 및 최우수 작품상 수상
- 1979년: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로 최우수 감독상 및 최우수 작품상 수상
- 1981년: 쓰리 브라더스로 최우수 감독상 및 최우수 각본상 수상
- 1985년: 카르멘으로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촬영상 수상
- 1997년: 휴전으로 최우수 작품상 및 최우수 감독상 수상
- 나스트로 디 아르젠토상 (이탈리아 영화 기자 조합상)
- 1959년: 도전으로 최우수 오리지널 영화상 수상
- 1963년: 살바토레 줄리아노로 최우수 감독상 수상
- 1981년: 쓰리 브라더스로 최우수 감독상 수상
- 2014년: 평생 공로상 수상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 1983년: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 1986년: 카르멘으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
-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 1981년: 쓰리 브라더스로 후보 지명
-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 1981년: 쓰리 브라더스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 바리 국제 영화제 (BIF)
- 2010년: 예술적 우수성에 대한 "프레미오 페데리코 펠리니" 수상
- 픽션 및 영화 아그리젠토 연구 센터
- 1987년: 죽음의 연대기로 에페보 도로상 수상
5.3. 공로 인정 및 훈장
- 1987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그란데 우피치알레 (Grande ufficial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
- 1995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카발리에레 디 그란 크로체 (Cavaliere di gran croc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
- 200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Officier de la Légion d'honneur)
- 2010년: 트리에스테 영화제에서 "황금 할버드" 수상
- 2010년 10월 27일: 엔리코 마테이의 고향인 마텔리카의 명예 시민이 됨
- 2013년: 이탈리아 문화유산부 장관 마시모 브라가 참석한 가운데, 그가 세 편의 영화를 촬영했던 마테라의 명예 시민이 됨
- 2014년: 렌초 로셀리니가 공동 제작하고 미켈레 디오마가 연출한 영화 본 인 더 USE에 참여
6. 유산 및 영향력
프란체스코 로시는 거의 40년에 걸친 감독 경력 동안 역사 영화, 전쟁 영화, 가족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시네-인베스티게이션'의 대가이자 여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된다. 영국 영화 협회는 그가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로베르토 사비아노, 파올로 소렌티노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버라이어티 영화 가이드는 로시의 대부분의 영화가 "사람과 사건의 표면 아래를 깊이 파고들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권력 행사 사이에 지속적인 연결 고리를 설정한다"고 평했다. 가디언지의 데이비드 로빈슨과 존 프랜시스 레인은 로시의 부고 기사에서 그를 "경제적으로 침체된 이탈리아 남부의 부패와 불평등에 관심을 가진, 본질적으로 십자군적이고 탐사적인 언론인"으로 묘사하며, 그가 "관객은 단지 수동적인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질문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고 강조했다.
로시의 마지막 영화 휴전에서 프리모 레비 역을 맡았던 배우 존 터투로는 로시를 "멘토와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그는 "그가 아니었다면 프리모 레비의 모든 작품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영화들도 많다... 그는 훌륭한 배우였다. 배우로서 물리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어려울 때면 직접 연기해서 보여주었고, 모든 배우들이 이해했다"고 회고했다.
감독 주세페 피치오니는 로시의 작품이 이탈리아에 "정체성과 존엄성"을 부여했으며, 로시가 "자신의 작품을 사명처럼 살았던 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은 2015년 자신의 영화 유스를 "프란체스코 로시에게"라는 간단한 마지막 자막으로 헌정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7. 사망
프란체스코 로시는 2015년 1월 10일 92세의 나이로 로마 자택에서 기관지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몇 주 전부터 병상에 누워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월 10일 로마의 카사 델 시네마에서 추모식이 열렸으며, 주세페 토르나토레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그의 학창 시절 친구였던 이탈리아의 대통령 조르조 나폴리타노는 장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