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프란시스코 고야의 생애는 스페인의 격동적인 역사와 함께 흐르며,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질병은 예술적 변화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에서 중하류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호세 베니토 데 고야 이 프랑크는 도금업자로, 특히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모 대성당 재건축 시 도금 및 장식 작업을 감독했다. 어머니 그라시아 데 루시엔테스 이 살바도르의 가족은 푸엔데토도스에서 귀족 가문임을 자처했으며, 고야의 생가는 어머니 가족 소유의 소박한 벽돌집이었다.
1749년경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로 이주했으며, 고야는 이곳에서 에스쿠엘라스 피아스 데 산 안톤(Escuelas Pías de San Antón) 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무료 교육을 제공했으며, 고야는 이곳에서 평생의 친구 마르틴 사파테르를 만나게 된다. 사파테르에게 보낸 1775년부터 1803년까지의 131통의 편지는 마드리드 궁정에서의 고야의 초기 생활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고야의 교육 수준은 읽기, 쓰기, 셈하기를 포함해 적절했으나, 로버트 휴즈에 따르면 그는 철학적 또는 신학적 문제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회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현실적이었다고 한다.
14세부터 4년간 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의 도제로 그림을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그는 스승의 작품을 모사하는 데 집중했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1763년과 1766년, 고야는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장학생 시험에 두 차례 지원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1.2. 이탈리아 여행과 초기 경력
왕립 아카데미 입학에 실패한 고야는 1771년 자비로 이탈리아 로마로 떠났다. 당시 로마는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으며, 고전 고대의 원형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체류 중 르네상스 걸작들을 접하며 프레스코화 기법을 배웠다. 1771년 파르마 시가 주최한 회화 공모전에서 2등을 수상하며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사라고사로 돌아온 고야는 필라르 성모 대성당의 돔(cupola) 일부(《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숭배》 포함)와 아울라 데이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연작, 그리고 소브라디엘 궁전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는 아라곤 출신 화가 프란시스코 바이유 이 수비아스와 함께 작업하며 그의 섬세한 색조 기법을 익혔다. 고야는 프란시스코 바이유와 친구가 되었고, 1773년 7월 25일 그의 여동생 호세파 바이유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 아이인 안토니오 후안 라몬 카를로스는 1774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고야와 호세파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아들 하비에르 고야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1.3. 마드리드 활동 및 궁정화가
1775년 고야는 처남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도움으로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바이유는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1777년부터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의 책임자였다. 고야는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한 태피스트리 밑그림 연작을 의뢰받아 5년간 약 42점의 밑그림을 디자인했다. 이 밑그림들은 주로 엘 에스코리알과 엘 파르도 왕궁의 벽을 장식하고 단열하는 데 사용되었다. 태피스트리 디자인은 명성이 높거나 보수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고야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의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대부분 로코코 양식의 대중적인 작품들이었다.

태피스트리 밑그림 외에도 고야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나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한 판화 연작을 제작했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대한 그의 관심은 깊었으며, 왕실 소장품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덕분에 벨라스케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1779년경 제작된 에칭 《교살된 남자》는 당시까지 그가 제작한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로, 훗날의 《전쟁의 재난》 연작을 예고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1783년 카를로스 3세 국왕의 총애를 받던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은 고야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이를 계기로 고야는 국왕의 이복동생인 루이스 왕자와 그의 가족 초상화를 그리는 등 왕실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1780년대 동안 그의 후원자 네트워크는 오수나 공작 부부, 국왕 및 기타 저명한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1786년, 고야는 40세의 나이로 카를로스 3세의 급여를 받는 화가로 임명되었다.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자 고야는 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연봉 5.00 만 ESP 스페인 레알과 마차 비용으로 500 ESP 두카트를 받는 수석 궁정화가(Primer Pintor de Cámara)가 되었다. 그는 국왕과 왕비, 마누엘 고도이 스페인 총리 등 수많은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들은 대상을 미화하려 하지 않는 특징으로 유명하며, 특히 1800년에서 1801년 사이에 그려진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왕실 가족에 대한 매우 냉혹한 평가로 간주된다. 현대의 해석가들은 이 초상화를 풍자적으로 보며, 카를로스 4세 통치 뒤에 숨겨진 부패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여겨져 고야는 그녀를 단체 초상화의 중앙에 배치했다. 그림의 왼쪽 뒤편에는 화가 자신이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으며, 가족 뒤편의 그림은 롯과 그의 딸들을 묘사하여 부패와 타락이라는 잠재된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수나 공작 부부, 알바 공작 부부 등 스페인 귀족 최상층으로부터도 작품을 의뢰받았다. 1801년에는 오렌지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고도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야와 고도이는 친구 사이였지만, 고야의 1801년 고도이 초상화는 종종 풍자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도이의 몰락 이후에도 그는 고야를 따뜻하게 언급했다. 고도이는 《카프리초스》 출판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벌거벗은 마하》를 의뢰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예술적 발전과 주요 시기
고야의 예술 세계는 개인적인 질병과 스페인을 휩쓴 사회적 격변, 그리고 깊은 내면의 탐구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했다.
2.1. 질병과 새로운 탐구: 중기 작품
1792년 말에서 1793년 초 사이, 고야는 진단되지 않은 심각한 질병을 앓아 청각 상실이라는 영구적인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이 질병은 그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내성적으로 변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그의 작품의 방향과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이 시기부터 그의 후기 이젤화와 벽화, 판화, 소묘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암울한 시각을 반영하는 듯 보이며, 그의 사회적 성공과는 대조를 이룬다.
1793년에서 1794년 사이 요양하는 동안 고야는 주석판에 그린 11점의 작은 그림들을 완성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에서 주제와 분위기의 중요한 변화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어둡고 극적인 환상과 악몽의 영역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중 《광인들의 마당》은 고독, 공포, 사회적 소외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죄수(범죄자든 정신병자든)에 대한 잔혹 행위의 비난은 고야가 인간 형상의 타락에 초점을 맞춘 후기 작품들에서 다룬 주제였다. 이는 고야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초기 경향에서 벗어나, 남은 생애 동안 그를 사로잡을 자연주의와 환상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기 시작한 1790년대 중반의 초기 작품 중 하나였다. 고야는 이 연작이 "고통에 대한 숙고로 괴로워하는 나의 상상력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썼으며, "의뢰받은 작품에서는 보통 자리가 없는"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1799년 고야는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80점의 판화 연작인 《카프리초스》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초상화나 종교화와 같은 공식적인 의뢰 작업과 병행하여 제작되었다. 고야는 이 판화집이 "어떤 문명 사회에서든 발견되는 수많은 결점과 어리석음, 그리고 관습, 무지 또는 이기심으로 인해 일반화된 흔한 편견과 기만적인 행위"를 묘사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화들의 환상적인 비전은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부제로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단순히 암울하지만은 않으며, 《카프리초스》 52번 《재단사가 할 수 있는 일!》처럼 고야의 날카로운 풍자적 재치를 보여준다.

1798년 고야는 마드리드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왕립 예배당의 펜던티브(pendentive)와 돔에 밝고 경쾌한 장면들을 그렸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기적을 묘사한 이 작품은 통상적인 천사들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연기하는 연극적 사건처럼 기적을 다루었다.
고야의 건강 악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바이러스성 뇌염, 고혈압으로 인한 미세뇌졸중, 메니에르병 등이 거론된다. 또한 그가 그림에 대량의 납백을 사용했기 때문에 납 중독이 누적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일부 진단은 뇌 손상으로 인한 편집형 치매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고야가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보편적인 공포와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독특한 능력에 주목하며, 관객들이 그 이미지 속에서 자신만의 카타르시스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고 평가한다.
《벌거벗은 마하》는 "서양 미술에서 최초의 완전히 세속적인 실물 크기 여성 누드"로 묘사되며, 알레고리나 신화적 의미를 가장하지 않았다. 이 《마하》 연작의 모델은 불확실하다. 가장 흔히 언급되는 모델은 고야와 연애 관계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알바 공작부인과 마누엘 고도이의 정부인 페피타 투도이다. 두 이론 모두 입증되지 않았으며, 이 그림들이 이상화된 합성 인물을 나타낼 가능성도 높다. 이 그림들은 고야 생전에 공개적으로 전시된 적이 없으며 고도이가 소유하고 있었다.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고 망명한 후 그의 모든 재산은 페르난도 7세에게 압수되었고, 1813년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이 두 작품을 '외설적'이라며 압수했다가 1836년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반환했다.


2.2. 전쟁의 영향: 반도 전쟁 시기
180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하면서 1808년부터 1814년까지 반도 전쟁이 발발했다. "침략자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궁정과의 고야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프랑스 후원자들과 동조자들을 위해 작품을 그렸지만, 전쟁 중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1814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복위된 후, 고야는 프랑스군과의 어떠한 연루도 부인했다.
고야는 아내 호세파가 사망한 1812년경부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렸고, 훗날 《전쟁의 재난》으로 알려진 에칭 연작을 준비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고야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고야는 여러 부처를 위해 국왕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국왕 자신을 위한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고야는 《전쟁의 재난》을 제작할 당시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들을 1808년 도스 데 마요 봉기의 폭력, 이어진 반도 전쟁, 그리고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의 자유주의 탄압에 대한 시각적 항의로 본다. 이 장면들은 전장의 참혹함을 묘사하며 때로는 섬뜩하고, 죽음과 파괴 앞에서 분노한 양심을 대변한다. 이 작품들은 고야 사망 35년 후인 1863년에야 출판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와 복원된 부르봉 왕실 모두를 비판하는 예술 작품을 배포하는 것이 그제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연작의 처음 47개 판화는 전쟁 중의 사건들을 다루며 개별 병사와 민간인에게 미친 갈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중간 부분(48번부터 64번 판화)은 프랑스군으로부터 도시가 해방되기 전인 1811년에서 1812년에 마드리드를 강타한 기근의 영향을 기록한다. 마지막 17개 판화는 복원된 부르봉 왕정이 가톨릭 교계의 지지 아래 1812년 스페인 헌법을 거부하고 국가 및 종교 개혁에 반대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겪은 쓰라린 실망을 반영한다. 첫 출판 이후, 고야의 잔혹 행위, 기아, 굴욕을 묘사한 장면들은 "경이로운 분노의 개화"로 평가받았다.
1814년에서 1819년 사이의 고야 작품은 대부분 의뢰받은 초상화들이지만, 세비야 대성당의 산타 후스타와 산타 루피나 제단화, 투우 장면을 묘사한 판화 연작 《투우》, 그리고 아마도 《로스 디스파라테스》 에칭 연작도 포함된다.
2.3. 말년의 고독: 퀸타 델 소르도와 검은 그림
고야의 말년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부족하며, 그는 정치적 상황을 의식하여 이 시기의 여러 작품을 공개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작업했다. 그는 노년과 광기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성공적이고 왕실과 연관된 예술가였던 고야는 말년에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다. 1810년대 후반부터 그는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를 스튜디오로 개조하여 거의 고립된 채 살았다. 이 집은 우연히도 근처의 농가도 청각 장애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스페인어, 귀머거리의 집)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술사학자들은 고야가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의 사회적, 정치적 흐름에 소외감을 느꼈고, 이러한 변화를 사회 통제를 위한 반동적인 수단으로 보았다고 추정한다. 그의 미공개 작품들에서는 그가 중세주의로의 전술적 후퇴로 본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듯 보인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희망했지만, 복원된 부르봉 왕정과 가톨릭 교계가 1812년 스페인 헌법을 거부하면서 많은 자유주의자들처럼 환멸을 느낀 것으로 여겨진다.
75세의 나이에 홀로 정신적, 육체적 절망에 빠진 고야는 14점의 《검은 그림》 연작을 완성했다. 이 모든 작품은 그의 집 벽에 직접 유화로 그려졌다. 고야는 이 그림들을 전시할 의도가 없었고, 이에 대해 글을 쓰지도 않았으며, 아마도 이 그림들에 대해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야 사망 약 50년 후인 1874년경, 당시 소유주였던 프레데리크 에밀 데를랑거 남작에 의해 이 그림들은 벽에서 떼어내져 캔버스로 옮겨졌다. 많은 작품이 복원 과정에서 심하게 변경되었으며, 아서 루보의 말에 따르면 현재 남아있는 것은 "고야가 그린 것의 조잡한 모사품에 불과하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과 부서지기 쉬운 회벽을 캔버스에 옮기는 섬세한 작업으로 인한 손상으로 인해 대부분의 벽화는 광범위한 손상과 페인트 손실을 겪었다. 현재 이 작품들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3. 개인적인 삶
고야는 1773년 7월 25일 호세파 바이유와 결혼했다. 그들은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오직 아들 하비에르 고야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호세파는 1812년 6월에 사망했다.
호세파 사망 후, 고야는 35세 연하의 하녀이자 먼 친척인 레오카디아 웨이스(Leocadia Weiss스페인어, 본명 조리야, 1790-1856)와 함께 살았다. 그녀는 고야가 사망할 때까지 그를 돌보았다. 레오카디아는 딸 로사리오 웨이스 조리야와 함께 1824년까지 고야의 퀸타 델 소르도 빌라에서 함께 살았다. 레오카디아는 고야의 첫 아내 호세파 바이유와 외모가 비슷하여, 고야의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가 《호세파 바이유 (또는 레오카디아 웨이스)》라는 신중한 제목을 달고 있을 정도다.
그녀의 불같은 성격 외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녀는 고야의 아들 하비에르가 결혼한 부유한 고이코에체아 가문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레오카디아는 보석상 이시도르 웨이스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으나, 1811년 그가 "불법적인 행위"로 그녀를 고발한 이후 별거했다. 그녀는 그 이전에 두 자녀를 두었으며, 1814년 26세에 세 번째 자녀인 로사리오를 낳았다. 이시도르는 로사리오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확고한 증거는 거의 없지만 이 아이가 고야의 자녀라는 추측이 많았다. 고야와 웨이스가 연인 관계였다는 추측이 많았지만, 그들 사이의 애정은 감정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4. 보르도 망명과 사망
1824년 5월, 78세의 고야는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탄압을 피해 프랑스 보르도로 망명했다. 그는 1824년 6월부터 9월까지 파리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1826년 5월에서 6월 사이 잠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궁정화가 직을 사임한 후, 1828년 4월 16일 망명지 보르도에서 8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사망 전 뇌졸중으로 인해 오른쪽 몸이 마비되었다.

고야의 시신은 처음 보르도에 묻혔다가, 훗날 마드리드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왕립 예배당에 재매장되었다. 이 예배당의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성 안토니오의 기적》 또한 고야의 작품이다. 고야의 유해를 이장할 당시 그의 두개골이 사라진 상태였다. 스페인 영사는 즉시 이 사실을 마드리드의 상급 기관에 보고했고, 그들은 "머리가 있든 없든 고야를 보내라"고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5. 예술적 특징과 주제
고야 예술은 당대 스페인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며 독창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5.1. 판화와 다양한 기법
고야는 에칭과 애쿼틴트를 포함한 판화 기법에 탁월한 숙련도를 보였으며 혁신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카프리초스》, 《전쟁의 재난》, 《투우》, 《로스 디스파라테스》와 같은 판화 연작에서 그의 상상력과 정치적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그는 또한 회화에서 임파스토와 글레이징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복잡한 색상 변화와 질감을 구현했으며, 이는 태피스트리 밑그림의 제한적인 형식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5.2. 사회 비판과 인간 심리 묘사
고야의 작품은 당대 사회, 종교,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그는 인간의 광기, 미신, 전쟁, 죽음 등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을 탐구했다. 특히 《광인들의 마당》과 같은 작품에서는 수감자(범죄자 또는 정신병자)에 대한 잔혹 행위를 비판하며 인간 존엄성의 훼손을 고발했다. 《전쟁의 재난》 연작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폭력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며,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잔혹한 전장의 공포를 묘사했다.
《카프리초스》에서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통해 미신과 부패한 사회의 어리석음을 풍자했으며, 《카를로스 4세의 가족》과 같은 왕실 초상화에서도 대상을 미화하지 않고 그들의 부패와 타락을 암시하는 냉혹한 시선을 드러냈다. 고야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과 내면의 악마를 보편적인 공포와 환상적인 이미지로 승화시켜, 관객들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도록 했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불의와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고야의 비판적이고 통찰력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6. 영향과 유산
고야는 "마지막 대가이자 최초의 근대 화가"로 불리며, 그의 예술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1. 후대 예술가 및 문화에 미친 영향
고야의 작품은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를 넘어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스페인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는 고야의 《카프리초스》와 《검은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21세기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화가인 마이클 잔스키와 브래들리 루빈스타인 또한 고야의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와 《검은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잔스키의 《거인과 난쟁이 연작》(1990-2002)은 고야의 이미지를 활용한 대규모 회화 및 목각 작품이다.
고야의 영향은 시각 예술을 넘어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로 확장되었다.
-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는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1911년 피아노 독주곡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작곡했으며, 훗날 이 모음곡을 바탕으로 동명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 스페인 작가 페르난도 아라발의 소설 《정어리 매장》은 고야의 그림 《정어리의 매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 《나는 고야다》는 고야의 반전 그림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 비디오 게임 《임파스토》는 고야의 작품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2024년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노턴 사이먼 미술관에서 고야의 에칭 작품에 대한 대규모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고야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영화 및 TV 프로그램도 다수 제작되었다.
- 《고야: 천재 같은 광인》(2002), 로버트 휴즈가 진행한 다큐멘터리.
- 《고야의 유령》(2006), 밀로시 포만 감독.
- 《볼라베룬트》(1999), 비가스 루나 감독.
- 《보르도의 고야》(1999),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
- 《고야 또는 깨달음으로 가는 험난한 길》(1971), 콘라트 볼프 감독.
- 《벌거벗은 마야》(1958), 헨리 코스터 감독.
- 《시간의 사역부》 시리즈 중 《계몽의 시간》(2017).
7. 주요 작품 소장처
고야의 주요 작품들은 전 세계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특히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는 핵심 소장처이다.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벌거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 《검은 그림》 연작 등 고야의 대표작 다수가 소장되어 있다.
-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마드리드, 스페인)
-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스페인)
-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미국)
- 마냐니 로카 재단 (파르마, 이탈리아)
- 도쿄 후지 미술관 (일본)
- 미에현립 미술관 (일본)
- 국립 서양 미술관 (일본)
- 마치다 시립 국제 판화 미술관 (일본)
- 가나가와 현립 근대 미술관 (일본)
- 히메지 시립 미술관 (일본)
- 나가사키 현립 미술관 (일본)
- 오쓰카 국제 미술관 (일본): 《퀸타 델 소르도》의 《검은 그림》 연작을 당시 배치 그대로 재현한 복제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