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폴 리처즈의 생애는 텍사스 주 왁사해치에서 시작되어 야구계의 다양한 역할을 거치며 발전해 나갔다.
1.1. 유년 시절 및 교육
폴 리처즈는 1908년 11월 21일 텍사스 주 왁사해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가 되던 1926년, 마이너 리그에서 내야수로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1.2. 선수 경력
폴 리처즈는 마이너 리그에서 시작하여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후, 수비형 포수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
1.2.1. 마이너 리그 경력
리처즈는 1926년 17세의 나이로 마이너 리그에서 내야수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28년 7월 23일, 클래스 C 웨스턴 어소시에이션 소속 머스코기 치프스에서 토피카 제이호크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야구 역사상 특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유격수 포지션에서 투수 마운드로 호출된 그는 잠시 동안 양손으로 투구했으며, 심지어 스위치 히터를 상대할 때는 투수와 타자가 각각 손과 타석을 바꾸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리처즈는 타자의 위치와 상관없이 투구마다 손을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 교착 상태를 깼다.
이후 마이너 리그 경력에서 그는 포수로 전향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애틀랜타 크래커스에서 뛰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까지는 크래커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8년 크래커스를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었고, The Sporting News는 그를 올해의 마이너 리그 감독으로 선정했다. 1936년 애틀랜타의 포수였던 리처즈는 투수 더치 레너드의 경력을 전환시키는 데 도움을 주며 이미 뛰어난 야구 지식을 보여주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세 시즌을 보낸 후 마이너 리그로 돌아온 레너드는 애틀랜타에서 리처즈와 함께 뛰었다. 리처즈는 그에게 너클볼을 던지도록 격려했고, 2년 만에 레너드는 워싱턴 세너터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하여 1939년 20승 투수가 되었다. 그는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세 시즌을 더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며 1949년 인터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이끌었고, 40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1.2.2. 메이저 리그 경력
마이너 리그에서 7년간 활약한 후, 리처즈는 1932년 4월 17일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으로 23세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1932년 6월, 그의 계약은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에 의해 구매되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78경기에 출전하여 .361의 타율을 기록한 후, 1932년 9월 존 맥그로 감독의 뉴욕 자이언츠에 의해 영입되었다.
자이언츠에서 리처즈는 1933년 시즌 동안 거스 맨쿠소의 백업 포수로 활동했다. 자이언츠 감독 빌 테리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한 경험은 훗날 리처즈의 감독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 투구와 수비에 집중하는 테리의 실용적인 감독 스타일은 리처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이언츠는 1933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리처즈는 포스트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1934년 리처즈는 .160의 타율을 기록한 후, 1935년 5월 코니 맥 감독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1935년 애슬레틱스의 대부분 경기에서 포수로 출전했으며, 11월에 투수 앨 윌리엄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애틀랜타 크래커스로 이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로 야구계에 선수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리처즈는 1943년 34세의 나이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다. 1943년 100경기에서 비교적 낮은 .220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는 아메리칸 리그 포수 중 수비율, 레인지 팩터, 도루 저지 및 풋아웃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어시스트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리처즈는 또한 스티브 오닐 감독의 비공식 투수 코치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강력한 수비는 1944년에도 계속되어, 리그 포수 중 수비율, 레인지 팩터, 도루 저지율에서 1위를 차지했고, 풋아웃과 도루 저지에서 2위를 기록했다. 이 해 타이거스는 시즌 마지막 날 페넌트 우승을 놓쳤다.
1945년, 리처즈의 타율은 개인 최고 기록인 .256으로 향상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리그 포수 중 수비율과 레인지 팩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해 타이거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시카고 컵스를 1945년 월드 시리즈에서 꺾었다. 7차전으로 진행된 월드 시리즈의 결정적인 7차전에서 그는 2개의 2루타를 치고 4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리처즈는 7경기 중 6경기에서 타이거스의 선발 포수로 출전했으며, 행크 그린버그의 7타점 다음으로 많은 6타점을 기록했다.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이거스 투수진을 이끌어 리그에서 승률, 삼진, 완봉승에서 1위를 차지하고 평균자책점에서 2위를 기록한 공로로 1945년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 10위에 올랐다. 리처즈는 1945년 The Sporting News 선정 올스타 중 한 명이었다.
1946년 .201의 타율을 기록한 후, 그는 마이너 리그로 돌아가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세 시즌을 더 뛰었다. 그는 1949년 버팔로를 인터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으로 이끈 후 40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1.2.3. 선수로서의 특징 및 통산 기록
8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리처즈는 523경기에 출전하여 1,417타수 321안타를 기록하며 통산 타율 .227, 15홈런, 155타점을 기록했다. 17년간의 마이너 리그 시즌에서는 통산 타율 .295, 171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타격에서는 약했지만, 수비형 포수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통산 수비율 .987로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는 아메리칸 리그 포수 중 레인지 팩터에서 세 번, 수비율에서 두 번, 그리고 도루 저지와 도루 저지율에서 각각 한 번씩 1위를 차지했다. 리처즈의 통산 도루 저지율 50.34%는 메이저 리그 포수 역대 12위에 해당한다.
1.3. 감독 및 단장 경력
폴 리처즈는 선수 은퇴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 여러 팀에서 감독 및 단장을 역임하며 혁신적인 전술과 선수 육성으로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1. 시카고 화이트삭스
리처즈는 1951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많은 팀들이 홈런에 의존하여 공격을 펼치던 시대에, 리처즈는 통념에 반하여 투구, 뛰어난 수비, 스피드, 그리고 도루에 의존하여 득점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이는 오늘날 '스몰볼'로 알려져 있다. 화이트삭스는 1951년부터 1961년까지 11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에서 도루 1위를 차지했다. 그는 화이트삭스를 이끌고 네 시즌 동안 승률을 기록했지만, 뉴욕 양키스 (1951년, 1952년, 1953년)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54년)에 밀려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화이트삭스 감독 재임 시절 그는 "왁사해치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선발 투수 빌리 피어스를 한 타자 동안 1루수로 기용하고, 오른손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오른손 투수를 투입한 후, 다시 피어스를 마운드로 복귀시키는 독특한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1.3.2. 볼티모어 오리올스
1954년 9월, 리처즈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고용되어 1958년까지 감독과 단장을 겸임했다. 이는 존 맥그로 이후 두 직책을 동시에 수행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단장으로서 그는 뉴욕 양키스와의 17인 트레이드에 관여했는데, 이는 야구 역사상 가장 큰 트레이드로 남아 있다. 리처즈는 브룩스 로빈슨과 같은 뛰어난 수비형 선수들과 스티브 바버, 밀트 파파스, 척 에스트라다와 같은 강속구 유망주 투수들을 영입하는 데 집중했다. 1959년 리 맥페일이 단장으로 고용된 후, 리처즈는 오리올스의 감독 역할만 수행했다. 오리올스는 5년간의 실망스러운 시즌 끝에 1960년 마침내 2위를 차지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오리올스의 2위는 리처즈의 감독 경력 중 최고 성적이었다. 1960년 AP통신과 UPI통신은 그를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했다.
1.3.3. 휴스턴 애스트로스
1961년 9월, 리처즈는 오리올스 감독직을 사임하고 새로운 내셔널 리그 구단인 휴스턴 콜트 .45s (이후 애스트로스로 개명)의 단장이 되었다. 리처즈는 조 모건, 지미 윈, 마이크 쿠엘라, 돈 윌슨, 러스티 스텁 등 젊은 선수들로 휴스턴 팀을 채웠으나, 1965년 시즌 후 로이 호프하인츠 구단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1.3.4.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이듬해 리처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수단 운영 이사로 고용되었다. 이는 그가 서던 어소시에이션 소속 애틀랜타 크래커스의 마이너 리그 포수 겸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던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성공을 거두었던 도시로 돌아온 것이었다. 1966년 시즌 말까지 리처즈는 브레이브스의 단장 직함을 얻었다. 애틀랜타 구단에서 리처즈의 6년은 그의 야구 경력 중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행크 애런, 조 토레, 펠리페 알루, 리코 카티 등 강력한 핵심 선수들을 물려받았다. 그는 여러 젊은 투수와 야수들을 추가하고, 너클볼을 던지는 구원 투수 필 니크로를 성공적인 선발 투수로 전환시켰다. 그의 오랜 제자 루먼 해리스가 지휘한 1969년 브레이브스는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 팀은 역사상 최초로 열린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결국 "미라클 메츠"에게 스윕당했다. 브레이브스는 1970년과 1971년에도 우승 경쟁에 실패했고, 리처즈는 1972년 시즌 중반에 해고되었으며, 에디 로빈슨이 그를 대신했다.
1.3.5. 감독으로서의 전술 및 평가
리처즈는 1951년부터 1961년까지 11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감독 중 퇴장 횟수 1위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스몰볼' 전략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51년부터 '왁사해치 스왑'이라는 전술을 재도입했으며, 이 전술을 발명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 전술은 1909년 이후 메이저 리그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리처즈는 그의 경력에서 4~5번 정도 투수를 외야수로 이동시키고, 플래툰 이점을 얻기 위해 새로운 투수를 투입한 다음, 원래 투수를 다시 마운드로 복귀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2009년 ESPN.com의 롭 나이어는 독자의 제안을 지지하며 이 도박적인 전술에 "왁사해치 스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처즈는 셔먼 롤라가 메이저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이 되는 데 기여했으며, 거스 트라이안도스가 훌륭한 포수가 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 너클볼 투수 호이트 빌헬름의 공을 잡기 위해 트라이안도스가 처음 사용했던 특대형 포수 미트를 설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기 부여가이자 멘토, 그리고 경기 전략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리처즈는 감독으로서 팀을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지도 아래 16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 감독이 되었다.
1976년, 3년 반 동안 야구계를 떠나 있던 리처즈는 빌 비크에 의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으로 다시 고용되었다. 이 시즌에 패배 기록을 남긴 후, 그는 시즌 말에 현장에서 은퇴했지만, 화이트삭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선수단 운영 자문으로 야구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감독으로서 11시즌 동안 923승 901패 (시카고에서 406승 362패, 볼티모어에서 517승 539패)의 기록을 남겼다.
1.3.6. 감독 통산 기록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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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 승 | 패 | 승률 |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51 | 154 | 81 | 73 | .526 | AL 4위 | - | - | - |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52 | 154 | 81 | 73 | .526 | AL 3위 | - | - | - |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53 | 154 | 89 | 65 | .578 | AL 3위 | - | - | - |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54 | 145 | 91 | 54 | .628 | 사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5 | 154 | 57 | 97 | .370 | AL 7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6 | 154 | 69 | 85 | .448 | AL 6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7 | 152 | 76 | 76 | .500 | AL 5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8 | 153 | 74 | 79 | .484 | AL 6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59 | 154 | 74 | 80 | .481 | AL 6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60 | 154 | 89 | 65 | .578 | AL 2위 | - | - | - | - |
볼티모어 오리올스 | 1961 | 135 | 78 | 57 | .578 | 사임 | - | - | - | - |
볼티모어 총계 | 1056 | 517 | 539 | .490 | 0 | 0 | - | |||
시카고 화이트삭스 | 1976 | 161 | 64 | 97 | .397 | AL 6위 | - | - | - | - |
시카고 총계 | 768 | 406 | 362 | .529 | 0 | 0 | - | |||
총계 | 1824 | 923 | 901 | .506 | 0 | 0 | - |
2. 개인사
폴 리처즈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구체적인 결혼 및 가족 관계는 공개된 정보가 제한적이다.
3. 사망
폴 리처즈는 1986년 5월 4일 텍사스 주 왁사해치에서 77세의 나이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4. 평가 및 유산
폴 리처즈는 야구계에 다양한 혁신과 공헌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여러 수상과 기념을 통해 기려지고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4.1. 공헌 및 혁신
리처즈는 셔먼 롤라와 거스 트라이안도스를 메이저 리그 최고의 포수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트라이안도스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너클볼 투수 호이트 빌헬름의 너클볼을 잡기 위해 사용했던 특대형 포수 미트를 설계했다. 그의 '스몰볼' 전략은 당시의 야구 흐름에 역행하는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왁사해치 스왑'과 같은 독창적인 전술을 재도입하여 경기 운영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4.2. 수상 및 기념
1996년, 리처즈는 조지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고향인 텍사스 주 왁사해치에 있는 폴 리처즈 공원은 텍사스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그는 1938년 The Sporting News 올해의 마이너 리그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1945년에는 The Sporting News 올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60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4.3. 영향력
리처즈의 코칭과 멘토링은 그가 지도했던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제자 중 16명이 훗날 메이저 리그 감독이 되었다. 이는 그의 선수 육성 능력과 리더십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스몰볼'과 '왁사해치 스왑'과 같은 그의 전략적 혁신은 야구 전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빌 테리 감독으로부터 배운 투구와 수비에 대한 집중은 그의 감독 철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