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티븐 프랜시스 오닐(Stephen Francis O'Neill스티븐 프랜시스 오닐영어)은 1891년 7월 6일 태어나 1962년 1월 26일 사망한 미국의 프로 야구 포수이자 야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로서 17년 동안 아메리칸 리그에서 포수로 활약했으며, 그 중 13시즌을 클리블랜드 냅스/인디언스에서 보냈다. 특히 1920년 월드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우승하는 데 기여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선수 경력 은퇴 후 감독으로 전향한 그는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아울러 네 개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특히 1945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증명했다. 오닐은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지도 아래 루 부드로, 밥 펠러, 할 뉴하우저, 로빈 로버츠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성장했다. 그는 지도력과 업적을 인정받아 국제 리그 명예의 전당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스티븐 프랜시스 오닐은 1891년 7월 6일 펜실베이니아주 미누카(현재의 스크랜턴의 일부)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부모님인 마이클 "스콰이어" 오닐과 메리 조이스 오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골웨이주 마움 출신이었다.
그의 네 형제는 모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하며 탄광에서 일하는 삶을 벗어날 수 있었다. 형제들은 다음과 같다.
- 잭 오닐: 내셔널 리그에서 1902년부터 1906년까지 포수로 활약했다.
- 마이크 오닐: 내셔널 리그에서 1901년부터 1904년, 그리고 1907년에 오른손 투수로 활약했다.
- 짐 오닐: 아메리칸 리그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1920년과 1923년에 내야수로 활약했다.
야구 역사가 윌리엄 C. 카샤터스는 마이클과 잭 오닐이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형제 배터리"를 이뤘다고 언급했다. 오닐 형제들은 "상대 팀 코치들을 속이기 위해 게일어로 신호를 주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스티브 오닐의 두 딸 또한 프로 야구 선수들과 결혼했다. 그 중 한 명은 스키터 웹으로, 그는 1939년 오닐의 지휘 아래 마이너 리그에서 뛰었으며, 오닐이 타이거스 감독을 맡았던 1945년부터 1947년까지도 그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3. 야구 경력
스티븐 프랜시스 오닐은 선수로서 17년 동안 아메리칸 리그 포수로 활약했으며, 이후 성공적인 감독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3.1. 선수 경력
오닐은 1910년 자신의 형 마이크가 감독을 맡았던 엘마이라 커늘스에서 백업 포수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부상으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출전 기회를 얻었으며, 뛰어난 포수 실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코니 맥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계약했다. 1911년에는 뉴잉글랜드 리그의 워체스터에서 뛰었으며, 같은 해 8월 20일에는 코니 맥의 요청으로 해리 데이비스가 1912년 시즌에 선수 겸 감독으로 계약한 클리블랜드 냅스로 이적했다.
오닐은 형제들 중 가장 성공적인 선수 경력을 쌓았으며, 아메리칸 리그에서 17년간 포수로 활약했다. 그는 1911년 9월 18일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냅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도루를 성공시켰다. 이후 12년 동안 클리블랜드에서 뛰었으며, 점차 출전 기회를 늘려 1913년에는 80경기에서 타율 0.295를 기록하며 MVP 투표에서 24위에 오르기도 했다.
1915년에는 처음으로 시즌 대부분을 소화하며 12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36, 91안타, 34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커리어 전체 13개의 홈런 중 첫 두 개가 이 시즌에 나왔다. 1917년 타율 0.184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선수 경력 내내 0.230 이상의 타율을 유지했다. 1919년에는 125경기에서 115안타, 47타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00안타 시즌을 달성했고, 타율 0.289에 35개의 2루타를 추가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이고 긴 시즌은 1920년이었다. 그는 149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21, 55타점, 그리고 커리어 최고 기록인 157안타, 39개의 2루타, 3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이 시즌의 마지막 홈런은 비극적인 순간에 나왔다. 8월 16일, 그는 뉴욕 양키스의 칼 메이스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 같은 날 밤, 클리블랜드가 4-3으로 승리하는 또 다른 득점을 올리던 중, 메이스의 강속구가 레이 채프먼의 머리를 강타했고, 채프먼은 그날 밤 사망했다. 오닐과 팀원들은 채프먼의 장례식 전 그의 시신을 보았으며, 오닐은 관 속에 있는 채프먼을 보고 기절했다고 전해진다. 그 시즌 클리블랜드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우승했다. 1920년 월드 시리즈에서 오닐은 7타수 7안타(타율 0.333)를 기록하고 2타점(모두 클리블랜드가 3-0으로 승리한 1차전에서)을 올리며, 팀이 브루클린 로빈스를 7경기에서 꺾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1924년 시즌을 앞두고 클리블랜드는 댄 분, 조 코놀리, 빌 왐스간스, 오닐을 보스턴 레드삭스로 보내고 조지 번스, 칙 퓨스터, 록시 월터스를 받는 7인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오닐은 레드삭스에서 106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38, 73안타, 38타점을 기록했다. 1924년 12월 15일 뉴욕 양키스는 그를 웨이버 공시에서 영입했다. 1925년 그는 35경기 출전에 그쳤으며 타율 0.286, 26안타, 10타점을 기록한 후 방출되었다.
이후 2년 동안 국제 리그에서 뛰다가 1927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합류하며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 그는 브라운스에서 두 시즌 동안 총 84경기에 출전했으며, 1927년 5월 17일 하워드 엠케를 상대로 좌익수 방면으로 그의 커리어 13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을 기록했다. 1928년 마지막 시즌에는 뉴욕에서 택시를 타던 중 트럭에 치여 생명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9월 14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경기였다. 오닐은 선수 경력 동안 1,590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타율 0.263, 1,259안타, 13홈런, 537타점을 기록했다.
3.2. 감독 경력
선수 경력이 끝난 후, 오닐은 마이너리그에서 감독으로 전향했다. 그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국제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리프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털리도 머드헨스를 감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명성을 얻었으며, 그 중 일부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감독으로서 그는 네 팀을 이끌었으며, 단 한 번도 패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감독을 맡았던 메이저리그 팀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35~1937), 디트로이트 타이거스(1943~1948), 보스턴 레드삭스(1950~1951), 필라델피아 필리스(1952~1954)였다. 그의 타이거스는 1945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오닐은 종종 시즌 중반에 부진한 팀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는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35년, 오닐은 털리도 머드헨스에서의 성공적인 감독 경력 덕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월터 존슨 감독에게 투수 코치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존슨 감독이 46승 48패의 기록으로 해고되자 오닐이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오닐은 남은 60경기에서 36승을 이끌며 팀을 시즌 총 82승 71패(3무승부 포함)의 기록으로 마쳤다. 1935년 팀은 3위를 차지했지만, 다음 두 시즌 동안 각각 80승을 기록하며 5위와 4위에 그쳤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마이너리그 감독을 맡았으며, 1941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코치로 활동했다. 1942년에는 디트로이트의 마이너리그 팀인 보몬트 엑스포터스로 자리를 옮겼다. 1944년에는 델 베이커를 대신해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오닐의 첫 시즌에 타이거스는 5승을 더 추가하며 1940년 이후 첫 승리 시즌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44년, 그들은 투수 할 뉴하우저가 MVP를 수상하는 활약에 힘입어 88승 66패를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9월 26일까지 아메리칸 리그 선두를 지켰지만,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맹추격하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운스에게 페넌트를 내주고 2위에 그쳤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5년, 타이거스는 다시 한번 페넌트 레이스에 참여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그들은 6월 27일 이후 꾸준히 선두를 유지하며 워싱턴 세너터스를 1.5경기 차로 따돌리고 페넌트를 확정 지었다. 뉴하우저는 트리플 크라운과 또 다른 MVP를 수상하며 맹활약했다. 1945년 월드 시리즈에서 오닐의 타이거스는 찰리 그림이 이끄는 98승의 시카고 컵스를 상대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처음 세 경기 중 두 경기를 내주며 불리하게 시작했으나, 시리즈가 시카고로 옮겨진 후 다음 두 경기를 승리하며 3승 2패로 앞서나갔다. 6차전에서 12회 연장 접전 끝에 패하며 시리즈는 동점이 되었지만, 7차전에서 뉴하우저의 호투와 타선의 지원에 힘입어 9-3으로 승리하며 1935년 이후 구단 최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46년 팀은 92승을 기록하며 2위에 올랐으나, 100승 이상을 기록한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크게 뒤처졌다. 이듬해인 1947년에도 85승을 기록했지만 2위에 머물렀다. 1948년 5위에 그치자 그는 타이거스에서 레드 롤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게 되었다.
1949년 레드삭스의 스카우트로 일하던 오닐은 1950년 시즌 도중 3루 코치였던 키키 카일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보스턴 레드삭스의 3루 코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 단장 조 크로닌이 조 매카시에게 사임을 요청하면서 팀이 31승 28패를 기록하고 있을 때 오닐이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오닐은 남은 95경기에서 63승을 이끌며 팀을 최종 94승 60패의 기록으로 마쳤다. 1950년 레드삭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즌 1,000득점 이상을 기록한 팀이 되었으며, 또한 팀 타율 0.300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팀이기도 했다. 9월 18일까지만 해도 리그 페넌트 우승에 1경기 차이로 근접했지만, 시즌 막판 12경기 중 7경기를 패배하며(더블헤더 3경기 포함) 결국 3위에 머물렀다. 1951년 시즌은 팀의 침체를 보여주었으며, 보스턴이 16시즌 연속 90승 이상을 기록하지 못하는 시작이 되었다. 그들은 87승 67패로 3위를 기록하며 양키스에 11경기 차로 뒤처졌고, 오닐은 루 부드로로 교체되었다. 레드삭스에서 감독직을 떠날 당시 오닐은 150승 99패를 기록했으며, 클리블랜드에서 199승 168패, 디트로이트에서 509승 414패를 합쳐 총 858승 681패의 감독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1952년 시즌 중반, 그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을 맡았다. 에디 소여는 1950년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이끌며 언론으로부터 "휘즈 키즈"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이듬해 1위에서 5위로 추락했으며, 1952년 6월 27일 28승 35패를 기록하자 소여는 해고되고 오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오닐은 이후 91경기에서 59승을 거두며 팀을 4위로 끌어올렸다. 다음 시즌인 1953년에는 83승(2무승부 포함)을 기록했으며, 시즌 막판에는 그의 1,000번째 승리를 달성하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공동 3위를 기록했다(페넌트 우승팀과는 22경기 차이). 그러나 그는 1954년 시즌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40승 37패의 기록을 남긴 채 7월 15일 해고되었고, 테리 무어가 그의 뒤를 이었다(무어는 남은 시즌 동안 35승만을 추가했다).
3.2.1. 감독 기록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CLE | 1935 | 59 | 36 | 23 | 0.610 | AL 3위 | - | - | - | - |
CLE | 1936 | 154 | 80 | 74 | 0.519 | AL 5위 | - | - | - | - |
CLE | 1937 | 154 | 83 | 71 | 0.539 | AL 4위 | - | - | - | - |
CLE 합계 | 367 | 199 | 168 | 0.542 | 0 | 0 | - | |||
DET | 1943 | 154 | 78 | 76 | 0.506 | AL 5위 | - | - | - | - |
DET | 1944 | 154 | 88 | 66 | 0.571 | AL 2위 | - | - | - | - |
DET | 1945 | 153 | 88 | 65 | 0.575 | AL 1위 | 4 | 3 | 0.571 | 월드 시리즈 우승 (CHC) |
DET | 1946 | 154 | 92 | 62 | 0.597 | AL 2위 | - | - | - | - |
DET | 1947 | 154 | 85 | 69 | 0.552 | AL 2위 | - | - | - | - |
DET | 1948 | 154 | 78 | 76 | 0.506 | AL 5위 | - | - | - | - |
DET 합계 | 923 | 509 | 414 | 0.551 | 4 | 3 | 0.571 | |||
BOS | 1950 | 95 | 63 | 32 | 0.663 | AL 3위 | - | - | - | - |
BOS | 1951 | 154 | 87 | 67 | 0.565 | AL 3위 | - | - | - | - |
BOS 합계 | 249 | 150 | 99 | 0.602 | 0 | 0 | - | |||
PHI | 1952 | 91 | 59 | 32 | 0.648 | NL 4위 | - | - | - | - |
PHI | 1953 | 154 | 83 | 71 | 0.539 | NL 4위 | - | - | - | - |
PHI | 1954 | 77 | 40 | 37 | 0.519 | 해고됨 | - | - | - | - |
PHI 합계 | 322 | 182 | 140 | 0.565 | 0 | 0 | - | |||
총합 | 1861 | 1040 | 821 | 0.559 | 4 | 3 | 0.571 |
4. 유산과 영예
스티븐 프랜시스 오닐의 14시즌에 걸친 감독 경력 통산 승률은 0.559 (1,040승 821패 18무)라는 견고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1,000승 이상을 거두면서도 0.540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23명의 감독 중 한 명이며, 또한 1,000승 이상을 거두고도 1,000패를 기록하지 않은 12명의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오닐의 지도 아래 성장한 전설적인 선수들로는 루 부드로, 밥 펠러, 할 뉴하우저, 그리고 로빈 로버츠 등이 있다. 그는 국제 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이기도 하다.
5. 개인사와 사망
스티븐 프랜시스 오닐은 1962년 1월 26일, 70세의 나이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미누카의 세인트 조셉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